<시경>에 실려 전하는 ‘황황자화(皇皇者華)’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환하게 빛나는 저 꽃, 언덕과 습지에 피어 있네. 급히 가는 많은 일행, 이르지 못할까 늘 걱정이라네.”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나라를 대신하여 사행을 가면서 혹여나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지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담은 시로 해석되어 왔다. 다음 구절에는 이국땅을 달리고 달려서 두루 묻고 알아보리라는 다짐이 이어진다.

19세기 말의 문장가 이건창은 23세 젊은 나이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 사행을 가게 된 이가 전송의 글을 부탁하자 그는 대뜸 부끄러움을 떠올린다. 나름대로 외교 응대에 필요한 학식과 문장력이 남다르다는 자부심과 포부를 가지고 자청하여 갔던 사행이었지만, 정작 사행 길에 겪고 행한 일들은 부끄러운 탄식의 연속이었다. 전송의 글에는 대개 권면을 담게 마련인데 자신이 써줄 수 있는 것은 부끄러움뿐이고, 어찌 보면 부끄러움이야말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권면이라고 하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건창의 부끄러움은 자신이 뜻만 높았지 실무에는 능하지 못함을 뼈저리게 실감한 데서 온 것이었다. 사행을 지원하는 일행의 기강이 너무도 해이하고 문란했지만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으며, 말몰이꾼과 역관에 의존해서 얻을 수 있는 견문이란 지극히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들뿐이었다. 타국 지식인들과의 교류 역시 짧은 기간에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상식적인 비전으로 출발해서 백일을 맞은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인선 및 정책 추진 과정에서 기대가 우려로 바뀔 조짐이 보인다. 대다수 국민의 지지가 만들어준 장막 속에서 집권세력 내부의 도를 넘은 영향력 행세가 있지는 않은지, 제한된 인력풀로 인해서 치우친 정보들이 독선적인 확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없는지, 길게 보고 초석을 놓아야 할 사안들에서 조급하게 성과를 내려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볼 일이다.

사행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르던 날,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이건창은 혼자 멍하니 ‘황황자화’의 시구를 떠올린다. 남들이 모두 이만하면 됐다며 분위기에 휩쓸려 기뻐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완전치 못함을 걱정하고 그로 인해 부끄러워하는 자세. 이것을 잃는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 생길지 모른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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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