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들어와 올해만큼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의 시간’과 ‘분단체제의 시간’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나날은 없는 듯하다. 민주화의 시간에서 보면 지난해 가을에 일어난 촛불시민혁명은 문재인 정부라는 세 번째 진보적 정권을 출범시켰다. 분단체제의 시간에서 보면 올해 들어 북·미 간 갈등의 고조는 한반도 평화는 물론 동북아 정세를 크게 요동치게 하고 있다. 두 시간이 이렇게 충돌하면서 남북관계가 다른 모든 이슈들을 압도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많은 국민의 의식에 저류(低流)하는 것은 무력감과 불안감이다. 외국 언론들은 태평한 우리 사회를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이는 외부의 피상적 관찰이다. ‘분노와 화염’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 ‘단 하나의 수단’ ‘국가 핵무력 건설의 역사적 대업’ 등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이 무시무시한 말폭탄들을 주고받고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국민들은 거의 없다. 우발적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는데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무력과 불안과 짜증의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상황을 이대로 놓아둘 순 없다. 안보 위기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선 상황에 대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구별해야 한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다음의 사항들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북한의 경우. 첫째, 북한은 핵무장을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주정부가 아닌 독재체제인 김정은 정권은 핵무력 건설만이 정권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중국 역시 북한에 대한 지지를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후 동북아의 지정학적 차원에서 구조화된 ‘한·미·일 대 북·중·러’ 간의 대결 구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중국에 북한은 대미관계에서 유효한 완충지대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았다.

이어 미국의 경우. 첫째, 미국은 북핵 위기를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최대의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북한 장거리미사일의 완성이 미국으로선 레드 라인을 넘어서는 것이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최종 결정을 내릴지는 예단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미·중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의 사실상의 ‘동북 제4성’인 북한 지역에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또 다른 수단의 정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격언과 트럼프 정부가 처한 미국 국내 상황을 고려할 때 전쟁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도 어렵다.

다음으로 우리의 경우. 첫째, 현재 갈등 구도가 북·미 간 대결인 만큼 우리에게 허용된 활동의 공간은 넓어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 정권은 통미봉남(通美封南)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트럼프 정권은 우방인 우리의 안보 못지않게 방산기업 등 국내 이해관계의 구속을 받고 있다. 둘째, 북·미 간 긴장은 북한이 핵무력을 완성할 것으로 예상되는 앞으로 1년 내외 동안 계속되고, 때론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정말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국면에서 미국의 군사옵션이나 북한의 군사도발의 가능성이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점증해온 북·미 간 대결 구도에 대한 이러한 사실판단을 많은 국민은 이미 숙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복잡한 만큼 해법 역시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그 해법을 모색하는 데는 다음의 가치판단이 먼저 고려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어떤 형태로든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선 안된다. 정부는 북한과 미국에 전쟁 불가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강하고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 둘째, 활동 공간이 협소하더라도 정부는 제재와 대화의 동시 병행을 계속해야 한다. 제재를 강화한다고 북한이 핵무력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제재와 고립 상태에서는 생존이 지속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더불어, 북한이 핵무장을 이룬 다음 대화의 장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 만큼 그때의 ‘한국 주도권’을 위해서라도 특사 파견 등 대화를 꾸준히 시도해야 한다.

이러한 목표들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대외 정책에 대한 정치세력 간의 협력과 합의다. 대북정책에서 정답은 없다. 당장 전술핵 도입 문제를 포함해 여론은 크게 갈라져 있다. 강압정책이든 관여정책이든 대외정책의 일차적 목표는 안보와 외교 역량을 제고해 국익을 극대화하고 한반도 평화를 성취하는 데 있다. 먼저 우리 내부의 의견을 모으고 단합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와 같은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어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외정책에서만은 이 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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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