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한국의 미래인가? 한국의 현재 상태가 이웃 나라인 일본의 20년 혹은 30년 전과 유사하다는 진단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1980년대의 버블경제 붕괴 이후 이어진 저성장, 고령화의 진전과 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 문제,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 등 지난 30여 년 동안 일본이 겪어온 문제들이 현재 한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과 닮아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에스콰이어 코리아’ 지는 “일본이 한국의 미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본의 부동산 시장 변동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한국 부동산 시장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일본의 과거 혹은 현재를 통해 한국의 미래를 예측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일본은 조선에 비해 일찍 서구식 근대화 과정을 경험했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여러 근대식 문물과 제도를 한반도에 이식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기반을 그대로 활용하는 한편, 새로운 발전을 꾀하면서도 일본의 사례를 참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한국과 일본이 20~30년의 격차를 두고 유사한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고 보는 시차론(時差論)이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한·일 시차론’은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1972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수립된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미 1969년에 건설부 관료들은 한국의 첫 국토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한편으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지역과학’을 중심으로 한 계획이론을 학습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론적 틀을 한국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문제는 믿을 만한 데이터의 부족에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이 5년 단위로 수행되는 상황에서 10년 후인 1981년에 해당하는 경제 현황을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1969년의 시점에서 1981년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당시 건설부 관료들은 데이터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시차론’을 들고 나왔다. 일본의 과거가 한국의 현재이자 미래라는 논리였다. 건설부는 한국의 산업 발전 과정이 일본의 그것과 닮았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다. 이 논리에 따라 한국의 국토계획은 일본의 1960년 당시 산업 구조에 해당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1960년이 선택된 이유는 1981년 한국의 1인당 GNP는 413달러로 예상되었는데, 이 값이 1960년 일본의 그것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즉 1972년부터 10년 동안 한국이 국토계획을 통해 이루어야 할 미래의 모습은 그로부터 10여 년 전 일본의 모습으로 상정된 것이다. (이주영, <한국의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을 통해서 본 발전국가론 ‘계획 합리성’ 비판> 참조)

한 나라의 경험에 비추어 다른 나라의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한 발전이론의 영향이 컸다. 전후 탈식민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신생독립국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모두 ‘저개발국’에서 ‘개발도상국’을 거치는 동일한 경로를 통해 서구 선진국과 유사한 형태로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팽배한 시기였다. 발전이론을 주창한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 경제학자 W. W. 로스토였다. 그는 <경제 성장의 제단계>(1960)라는 책을 통해 모든 나라가 다섯 단계를 거쳐 발전하며 그 종착지는 당시의 미국과 같은 “고도화된 대량 소비 시대”라고 주장했다. 로스토 식의 발전 모델은 ‘한·일 시차론’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이 모델에 따라 1969년의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 일본에 비해 20여 년 뒤처져 있었고, 아시아·아프리카의 다른 저개발국들에 비해서는 10여 년 앞서 있었다고 여겨졌다.

1960년대의 단선적 발전이론은 1980년대 이후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폐기되다시피 했다. 이제는 세계 각국이 ‘발전’을 거듭하면 언젠가 미국과 같은 고도 소비 사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단선적 모델의 유혹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러 나라들의 복잡한 발전 경로를 단순화시키는 ‘선택적 망각’을 통해 다양한 발전 경험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명백히 상이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상태에 이르렀지만, ‘한·일 시차론’이라는 렌즈는 복잡다단한 경험의 총합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일종의 유용한 착각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듯, 미래에 대한 상상은 단순한 공상(空想)이 아닌 현실의 문제와 필연적으로 맞닿아 있다. 특히 국가 기구가 상상하는 미래는 지금 현재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와 긴밀하게 엮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한국의 미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일본을 한국의 미래로 상정하는 것이 우리의 현재에 미치는 함의를 예민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1969년 한국의 국토계획 과정에서 한국의 미래를 일본의 모습으로 등치시킨 건설부 관료들의 선택은 지나친 지역 불균형과 몇몇 전략 산업군에 대한 자원의 집중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달콤한 미래를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선택은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한국의 과거에 대한 서사와 미래에 대한 담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형섭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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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