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나에게 생긴 첫 번째 변화는 지금 독자들이 보고 있는 이 글이다. 나와 경향신문의 인연은 2009년 겨울 ‘2030콘서트’라는 코너에서 시작됐다.

30대가 되고 난 후 얼마 전까지는 ‘별별시선’에 글을 실었다. 그런데 살아온 세월 중 가장 많은 나이인 35세에 나는 2030 같은 애매한 명칭도 아닌 ‘청춘’이라는 수식어가 붙던 코너에서 ‘직설’을 날릴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꽤 오랜 기간 나는 ‘청년필자’ 혹은 ‘청년논객’으로 소개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 수식어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2030을 넘어 ‘영포티’와 후기 청년(4050)까지 등장한 마당에 고작 30대가 청년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청년은 두 개의 상이한 존재를 지칭하는 개념이고,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이 둘 사이의 괴리로부터 온다.

첫 번째 청년들은 오늘날의 20대와 30대에 속하며, 사전적 의미의 청년에 가깝다. 2000년대 이후에 성인이 된 이들을 설명하는 가장 구속력 있는 단어는 ‘88만원세대’나 ‘n포세대’다. 이 ‘청년’들은 지난 10여년간 한국 사회가 쌓아왔던 구조적 불행의 당사자로 호명되었으나, 그다지 많은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선거 때마다 이 청년들의 불행이 화제가 되었지만 보수 세력에서는 어차피 도움이 안될 것이기 때문에, 리버럴 세력에서는 자신들을 열과 성을 다해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번번이 잊혀졌다. 이들은 돈 없는 소비자이자, 표가 적은 유권자이고, 경쟁을 유일한 존재양식으로 주입받았지만 승리가 허락되지 않는 조건 속에 놓여 있다. 분노와 좌절, 불신과 불관용, 자기연민과 자존감 없음이라는 독소들이 내면을 장악해가는 가운데, 2016년을 기준으로 이들은 88만원도 아닌 78만원의 월평균 소득을 겨우 버는 처지가 되었다.

두 번째 청년들은 오늘날 40대와 50대 초반 즈음에 속하며, 2000년대 이후에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 이들이다. 3/4/586, 영포티, 후기청년과 같은 단어들로 정의되는 이들은 어쨌거나 ‘희망찬’ 한국 사회를 실시간으로 경험했던 이들이다. 경제는 성장했고, 독재는 타도되었다. 위기나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극복해냈다. 이들이 스스로를 청년이라고 칭할 때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불로불사 선언 같은 것이다. 이들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언제나 사회의 최전선이라고 여기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결코 고루한 꼰대가 될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

청년필자의 청년은 당연히 전자다. 궁핍으로부터 시작된 담론은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20대 개새끼론’과 ‘노오력’ 타령 앞에서 점점 더 수세적이고 지리멸렬해졌다.

애초에 누구로부터도 대표성을 인정받은 바 없었던 청년필자들이 뜬금없는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동안 청년담론장의 승리는 ‘멘토’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위로와 조언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든, 한국 사회에서 전자의 청년들의 입지는 지나치게 좁아졌다고 생각했던 때보다도 더 좁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인재 유출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외화벌이와는 다른 성격의) 해외취업을 국가가 장려하고, 고위관료와 정치인들이 자기 자식의 그다지 엄청나지도 않은 취직처를 만들어주기 위해 청탁비리를 저지르고, 공무원 아니면 탈조선이 모범답안이 되어버린 최근의 트렌드가 증명하는 바다.

게다가 후자의 위풍당당해 보이는 ‘청년들’에게서도 불안이 읽힌다. 이들은 전례 없이 길어진 평균수명과 그다지 체계적이지는 못한 노후준비, 자녀의 부양을 바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발버둥을 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른이 되는 대신에 경박해지기로 한 데는, 역사의 흐름이 허락해준 자신만만함만이 아닌 나름의 절박함도 있는 것이다.

과거의 세대론은 전자의 청년들이 후자의 청년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상황을 바꾸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전략(별다른 타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으로도 또 이론(세대라는 분석단위가 갖는 한계 때문에)으로도 실패했다. 그렇다고 후자의 관대한 양보를 바라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그사이 ‘두 청년’의 미스매치는 4차 산업혁명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열심히 좀먹고 있다. 방법이 있을까? 결국은 또 원론이다. 청춘은 청년에게, 책임과 존경은 어른에게, 그리고 미래는 후속세대에게.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