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실패를 개인에게 책임지울 수는 없는 법이야.” 아이를 지방의 유수한 자율형 사립학교에 보낸 친구가 변명하듯 한 말이다. 정치적 성향에서 평소 공유하는 점이 크기에 친구는 아이를 평범한 일반고에 보내지 않은 데 대해 뭔가 변명할 필요라도 느꼈나 보다. 공교육이 다 무너진 마당에 그런 결정을 가지고 내가 무슨 비난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잖아도 일반고 교실의 쉬는 시간에 남자애가 여자애를 무릎에 앉힌 채 시시덕거리고 수업시간에는 모두 엎드려 자는 게 흔한 풍경이라는 얘기를 듣는 터였다. 똘똘한 아이를 그런 환경에 버려두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친구의 변명은 어찌 보면 ‘먹고사니즘’의 변형일 수도 있었다. 먹고살려면, 뒤처지지 않으려면, 그나마 어엿하게 살아가려면, 어쨌든 남보다 앞서 좋은 기회를 잡아야 한다. 사회의식이나 평등에 대한 태도가 한 걸음 앞선 사람도 이럴진대, 이른바 능력주의(meritocracy)와 경쟁논리가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것을 무작정 비난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정규직들이 먼저 반대하고, 공기업 블라인드 채용에 명문대 졸업생들이 분개를 한단다. 우리가 익히 듣고 있는 ‘무임승차론’이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이 대학에, 이 직장에 들어왔는데 능력도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대우를 바라는가. 이런 논지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어려서부터 비싼 사교육을 받고, 등록금 걱정 없이, 알바에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고 맘 편히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사회적 특혜라고 설명한들 설득력이 없다. ‘시험’이라는 인간에 대한 극히 일면적인 평가가 얼마나 자의적인가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면 이들의 항변이란 게 남보다 더 가지겠다는 주장이라기보다는 그나마 가진 것을 지키겠다는 방어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무너진 교실에 아이를 도저히 보낼 수 없는 친구처럼 말이다. 결국 상황은 또다시 능력의 문제, 능력을 약간 더 가진 을과 능력이 모자란 을이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적’은 어디에 있는가? GDP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고 대학진학률은 30년 전에 비해 2배 넘게 늘어나고 아파트는 해마다 그토록 많이 짓는데, 그 많은 돈과 고학력자들과 집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을들끼리 사는 세상에서 적은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손쉽게 대자본이나 보수화된 정치 지형 등을 적으로 들지 못하겠다. 그것들 역시 일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윤을 탐하는 자본이나 복지와 평등에 눈감은 저간의 정치는, 이 사회와 우리들 자신에 대해 수십년간 한 번도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잘산다는 희망으로 경제적 기준 외에는 모든 것을 도외시한 우리들 자신이 원인인 것이다. 오랜 성장주의의 구호 아래 우리는 자기 자신을 경제적 단위, 생산적 단위로 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고등교육을 받고 생산체제에서 자신의 쓸모를 높인 사람은 대우를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차별을 감수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수월성’과 ‘측정’이 교육의 대치어가 되어 학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라기보다는 선별하는 곳이 되었다. 교육이 계층 간 장벽을 허문다는 시민사회의 이상은 옛말이 되었고, 지금은 오히려 대도시 중산층 이상의 가진 계층만을 골라 통과시키는 보안문 구실을 한다. 천신만고 끝에 기성 조직에 편입한 사람도 편치가 않다. 자기 능력을 끝없이 보여주고 생산성을 입증하지 않는 한 그는 조만간 치킨집이나 빵집을 열어야 할 처지다.

교육에서부터 평등한 일자리와 복지까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전국 국립대를 통합한다든지 액수가 얼마건 기본소득제를 전면 실시한다든지 하는,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방안은 무수히 나와 있다. 이런 방안들이 아무리 철없는 이상주의 소리를 들을지언정 또 이런 정도의 변화 없이 그 무엇도 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을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삶을 누리는 존재로 보는 관점, 사회적 격차를 당연하게가 아니고 매우 기이한 현상으로 보는 시각, 주어진 땅과 자연을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주어진 혜택으로 보는 철학 등이 퍼져야 한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미 조금이나마 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부터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뭔가 사회적 대타협을 시도할 시점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새해 벽두부터 마음을 어지럽힌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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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