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이에게서 내 꿈을 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세초에 전해듣는 꿈 이야기는 무언가 예지몽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래서 묻기가 조심스러워진다. 무언가 불길하거나 경고를 내포하는 꿈이었을까봐. 그런 꿈이었다면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으려나? 그런 꿈이어서 대비를 하라고 알려주려는 것일까? 차마 묻지 못하는 심정을 알았는지 그쪽에서 먼저 알려준다. 좋은 꿈이었다고. 기분 좋은 꿈. 아주 밝고 활기차고 화사한 꿈. 꿈을 깨고 나서도 한참을 행복한 기운이었다고 했다. 듣는 나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행복한 공기 속에 더 머물고 싶어 더 자세히, 꿈의 세부를 청하고 또 청했다. 그가 꾼 내 꿈이 꼭, 내가 꾼 내 꿈 같았다. 그 꿈을 사겠노라 했다. 꿈을 꾼 건 당신이지만, 꿈의 주인공은 나였으니, 그 꿈에 내 지분도 좀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에게 넘겨라 그 꿈. 거절당했다. 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꿈대로 이루어진 날 자신의 역할을 그대로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서 기분 좋게 그 꿈을 도로 넘겼다. 꿈에서처럼 내가 화사하게 행복해지는 날 너도 끼워줄게 하면서. 애초에 내 것이었던 양, 선심 쓰듯 호탕하게.

그런데 왜 요즘의 내 잠엔 기분 좋은 꿈이 도통 들어오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요즘엔 거의 꿈을 꾸지 않는, 기절과도 같은 잠을 잔다. 한밤의 지친 몸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잠. 기분 좋은 꿈 같은 건 염두에 없는 듯하다. 꿈을 꾸지 않는 것인지 기억을 못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개중에 기억에 남는 꿈이라고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꿈뿐이다. 예를 들면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종종거리고 있거나, 갑오징어나 문어를 구한다고 어느 항구를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 구하지 못하는 꿈 같은 것. 그런 꿈은 왜 또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지. 정말이지 기분이 나쁘다. 꿈에서까지 앞치마라니. 꿈이라도 다른 걸 꾸고 싶단 말이다. 아무래도 베개를 바꿔야 할 모양이야, 하며 애먼 메밀베개를 집어던진다. 이참에 목 디스크 방지용 베개를 사야겠어, 하면서.

꿈이 현실의 연장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전엔 꿈에서 주로 소설을 썼다. 쓰다 멈춘 부분에서 다시 시작되는 꿈.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서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하고, 소설 쓰는 내가 이어서 계속 소설을 쓰기도 한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러면 될 것을 왜 그리 애를 태웠나. 막힌 부분이 펑 뚫리고 짙은 안개가 확 사라지고. 깨어나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하면 대작이 나올 것이 분명해.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이 너무나 위대한 꿈의 소설. 꿈에서조차 꿈인 걸 알고,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고 되뇌고 되뇌던. 그러나 깨어나 노트북을 열면 내가 썼던 문장들은 어김없이 사라져 있고, 기억하기로 했던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엄혹한 현실. 그런 꿈을 꾸었다는 사실조차 기억에서 아예 지워버릴 것이지. 기억해내려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헛꿈. 꿈속의 문장을 기억해낼 능력만 있었다면 지금쯤 나는. 허망하고 애달프지만 또 아주 싫지만은 않은 꿈들이었다.

진짜 기분이 좋아져서 자꾸 꾸고 싶은 꿈도 있다. 하늘을 나는 꿈 같은 것. 먼저 밝히자면 그 꿈은 아침마다 수영을 하던 때에 많이 꾸었다. 손을 뻗는 대로 발을 구르는 대로, 접영으로 배영으로 하늘을 날았다. 가만히 누워 내려다보는 세상이 포근하게 자유로웠다. 꿈에서 실컷 날고 난 다음이면 몸이 참 개운했다. 다시 수영을 시작하면 그 기분 좋은 꿈을 다시 꿀 확률이 높아질 텐데, 꿈의 유영을 위해 잠을 줄이고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뭐, 다시 수영을 시작하면 하늘을 나는 꿈은 꿀 수 있을 테니, 그 꿈이 그리운 날엔 언제든지. 꺼내 먹기만 하면 될 비장의 꿀단지, 잠시 다락방에 숨겨둬도 될 일이다.

한때 꿈을 조절할 수 있다 꿈꾸던 때도 있었다. 쌍꺼풀을 만들기 위해 눈꺼풀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는 어린애처럼. 손금의 운명을 바꾸겠다고 샤프로 손바닥에 선을 내내 긋고 앉은 어떤 사람처럼. 잠들기 전에 내내 똥을 생각했더랬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가서 똥을 싸보려고 애를 써보거나, 똥이 마려운 걸 일부러 참고 잠을 자거나. 들어차지도 않은 똥을 싸려고 애를 쓴다고 똥이 만들어질 일은 없지만, 그렇게 애타게 똥을 생각하다보면 그 애절함이 꿈으로 이어질 테니까. 똥꿈을 꾸면 꼭 좋은 일이 생겼으니까.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꼭 똥꿈이 먼저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똥꿈의 요행을 누려보자는 심산이었다.

이왕에 나온 꿈 얘기, 그 똥꿈 얘기를 해 보자. 방 안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쌌다. 개운한 느낌도 느낌이었지만 돌아서 본 그 모양이 참으로 예뻤다. 만화풍의 똥덩어리. 하도 예뻐서 손을 댔다. 만지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반가운 소식이 들려올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모 신문사에 소설을 투고했던 참이었다. 당선을 예감했다. 예감의 근거라는 게 투고작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꿈에 나온 똥이라니 싶겠지만, 사실 그만한 꿈이 없다 싶었다. 돼지든 용이든 뭐든, 길몽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그 모든 것들이 총출동했더라도 그런 예감은 없었을 것이다. 소설이란 것은 세상에 토해놓는 토사물이 아니라, 세상을 먹고 제 몸에서 소화시킨 다음 가까스로 싸놓은 똥덩어리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똥을 투고하고 똥꿈을 꾸었으니 그보다 좋은 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믿음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 후로 나는 소설가로 살기 시작했고, 두어 번 더 똥꿈을 꾸었고, 이제는 똥꿈이 아니라 다른 어떤 꿈도 잘 꾸지 않는다. 애써 똥을 참고 잠든 날, 결국 자다 깨서 화장실을 가느라 곤한 잠을 망쳐버린 이후, 꿈을 설계하겠다는 허망한 시도 따위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가끔 꿈을 위한 꿈을 꾼다. 꿈에서라도 그리운 이가 찾아주기를, 내 꿈을 꾸었다던 그 사람처럼 내가 대신 그이의 행복한 일상을 꿈꿔주기를. 꿈인 줄 알면서도 함께 화사해지기를. 꿈에서 깬 다음, 그 다디단 기운을 온몸에 감은 채, 오랜만에 기별을 넣을 수 있기를. 네 꿈을 꾸었어, 정말 좋은 꿈이었어, 너에게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아, 하지만 그 꿈을 팔지는 않을 거야, 그 꿈의 주인은 나니까, 말할 수 있기를.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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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