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소확행’(小確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 풀이했다. 무라카미는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 소확행이라고 했다.

자신만의 소박한 행복을 찾는 것이 소확행의 핵심이지만, 일상에는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들도 소확행만큼이나 많다. 억지스럽지만 이를 ‘소확분’(小確憤·소소하지만 확실한 분노)이라고 한다면, 나의 소확분은 잔뜩 있다. 녹색 신호등에도 멈추지 않고 우회전하는 운전자를 어이없이 바라봐야 할 때, 터무니없이 비싼 찻값을 받으면서도 셀프서비스라는 가게 주인에게 화가 난다. 뒷사람이 따라오는 데도 출입문을 그대로 놓아버리는 얌체를 만나는 것도 여지없이 소확분이다. 최근 한 페친은 페이스북에 “뚜벅이여 단결하라”라는 장난 섞인 글과 함께 인도 위 불법 주정차 차량 등을 신고할 수 있는 앱 ‘서울스마트 불편신고’를 링크했다. 아마도 그의 소확분에는 보행로를 막은 불법 주정차 차량이 올라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소소한 분노를 얘기하려니, 오래전 봤던 영화 <폴링 다운>이 떠올랐다. 영화는 방위산업체에서 해고당한 중년 남성의 하루를 좇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고속도로는 출근차량과 도로공사로 정체를 빚고 있고, 하필 빌(마이클 더글러스)의 차는 에어컨이 고장이 났다. 이혼한 아내와 살고 있는 딸을 만나러 가던 빌은 차를 버리고 걷기 시작한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불과 1분이 지났다는 이유로 아침 메뉴를 거절당하고, 메뉴판 사진과는 딴판인 햄버거를 받아들고서 그는 결국, 폭발한다. 그의 분노는 해마다 도로공사를 반복하는 정부, 일자리를 뺏은 다인종 사회, 대기업의 과장광고 등 사회문제들과 맞닿아 있다.

분노는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심리와는 달리 대개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식되어 절제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 할라치면 별수 없이 ‘까칠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마땅히 분노해야 할 대상에 침묵하는 순간, 타자를 향한 ‘졸렬한’ 분노가 그 자리를 메워 버린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재벌의 불법 상속보다 연예인들의 탈세에 더 분노하고, 찔끔 오른 최저임금에 엄살을 부리는 대기업이 아니라 알바에게 화를 낸다. 성폭력 사건을 쓸어 담으려는 검찰 조직이 아닌 내부고발자를 몰아세운다. 제천·밀양 화재참사는 소방관 탓이 아니다.

<분노사회>의 작가 정지우는 “나와 세계가 어긋날 때 생기는 부적절감이 분노의 근원”이라고 규정했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논란은 불행히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을 법한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되묻는 과정이다. 기회는 평등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못했으며, 결과는 정의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진 자의 죄는 실수이고, 못 가진 자의 실수는 죄가 되어선 안된다.

시인 김수영이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고 물었지만, 분노하지 말란 뜻은 아니었다. 일상에서 촉발되는 분노가 나보다 약해 보이는 존재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데 대한 반성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이발쟁이에게/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들고, 때론 화가 치밀어 오르는가? ‘이발쟁이’ 때문이 아니다.

<이명희 ㅣ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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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