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때는 19세기 말이다. 여러 추정들이 있지만,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이 처음 커피를 접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카페의 형태를 처음 갖춘 곳으로 알려진 ‘손탁 호텔’의 1층 카페는 1902년에 생겼다. 우리나라의 카페 역사도 100년을 훌쩍 넘긴 셈이다. 작년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카페 수는 주스·전통차 전문점까지 합해 9만개를 넘는다.

국내 커피전문점 프랜차이즈 중 부동의 1위는 ‘스타벅스’다. 연간 매출이 1조원 이상이다. 전국에 1150여개의 매장을 운영 중인데, 최근 이 중 한 매장이 유독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12일 문을 연 노량진 매장이다. 각종 임용·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몰려있는 이 지역에 유독 스타벅스가 없었다는 것도 이야깃거리였지만, 개장한 매점이 여느 스타벅스와는 다르다는 보도 때문에 더 화제를 모았다. 테이블이 낮고 콘센트가 몇 개 없어서 노트북을 들고 오는 손님들이 오래 앉아 공부할 수 없다는 보도였다. 공시생들이 행여 오래 앉아있을까봐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는 의혹이 얹어졌다.

스타벅스 로고.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흥분해서 스타벅스 불매운동이라도 벌였을까? 아니다. 이 기사에 대한 대다수 댓글러들의 비난 화살은 스타벅스가 아닌 소위 ‘카공족’, 즉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향했다. 공부는 도서관에서 해라, 걔네들 때문에 맘놓고 떠들지도 못한다, 넓은 자리 주야장천 차지하니 꼴불견이다, 카페 주인들 화병 나는 것 아느냐 등등.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은 늘 변했다. 그 시대, 그 지역의 문화를 반영하며 바뀌었고, 종종 문화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1674년 카페 ‘프로코프’의 탄생은 집 안에만 있던 파리의 여성들이 마음 놓고 들어갈 수 있는 ‘공공장소’가 됨으로써 이들의 일상 모습을 바꿨다. 이후 파리의 카페는 지식인들이 모여 철학과 시사를 논하는 공간이 되어 사상과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의 다방은 전문 DJ가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들려주던 유흥공간이었고, 같은 시기 역전이나 읍내의 다방은 한복 입은 마담과 짧은 치마의 ‘레지’가 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풀어 서비스하던 끈적끈적한 공간이었다.

스타벅스의 조상뻘이 되는 커피전문점은 ‘난다랑’이었다. 1979년 지금의 대학로에 처음 등장한 뒤 이대입구와 이태원에 지점을 열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서울에만 20곳 이상 있었다. 밝고 세련된 인테리어, 은은한 음악과 ‘비엔나커피’로 젊은이들을 유혹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적 공간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던 시기였다. 카페에 책을 들고 들어와 긴 시간 혼자 앉아있는 이는 없었다. 카페도 커피를 팔기보다는 쾌적한 데이트 공간과 유유자적한 시간을 팔았던 시기였다.

시간이 흘러 이제 카페는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간이 되었다. 전문적인 바리스타가 다양하고 맛있는 커피를 ‘요리’해주는 아담한 카페도 있고, 도서관 이상의 경건함을 과시하는 북카페도 있다. 아저씨, 아줌마 몇몇이 모여 박장대소하며 수다를 떠는 사랑방식 카페도 여전히 건재하다. 카공족의 ‘열공’과 동호회의 뒤풀이와 연인들의 데이트가 공존하는 스타벅스 같은 공간도 있다. “카페는 원래 차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곳”이라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제한된 시기, 제한된 공간에서만 참이었다.

언젠가부터 카페를 점령하기 시작한 카공족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시공간 활용술이 몸에 밴, 그래서 이 시대의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집단이다. 마치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듯, 이 시대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게릴라처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가 훌쩍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런 모습이 못마땅한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들 또한 젊었을 때는 음악 들으며 공부한다고 야단맞았을지 모른다.

노량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공부하는 이들이 준비하는 시험도, 그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방식과 모습도 바뀌었다. 싼값에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스터디카페’가 많이 생긴 것도 최근의 변화상이다. 그러니 스타벅스가 스터디카페 역할을 거부한다고 비판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넓은 자리를 독차지하거나 잡담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부라리지만 않는다면) 부득부득 거기서 공부하겠다는 이들을 흉볼 이유도 없다. 그보다는, 노량진 스타벅스가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안에는 시험에 인생을 건 젊은이들이 있고, 그들이 원하는 공간과 그들을 유혹하는 공간의 괴리, 이를 극복하려는 전술들이 있으며, 옆에서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 과정을 서사화하는 언론이 있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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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