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남성 사회의 반발이 곳곳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지하철에서 여성학 책을 읽는다고 봉변당한 여고생부터 “오해 받으니 여성을 멀리하겠다”는 ‘펜스룰’까지. 대개 이러한 현상을 반격(反擊·백래시)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백래시(backlash)는 1970년대 미국에서 치열했던 여성운동과 진보세력을 몰아내고자, 정부와 미디어 등 사회 전반이 주도한 반동의 물결이었다. 이때 등장한 단어 중 하나가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PC)’인데, 당시 미국에서 냉소와 좌절의 용어였다면 한국에서 ‘PC’는 지향해야 할 가치로 사용되었다. 요컨대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다. 우리는 미국의 1970년대 같은 경험이 없으며, 레이건 정부는 안티페미니즘의 선봉장이었지만 우리 정부와 언론은, 특단의 대책은 없을망정, 미투에 우호적이다.

나를 포함한 여성주의 강사 두 명이, 얼마 전 모 대학 학생회로부터 인권 강의를 요청받았다. 그런데 해당 대학의 학생 204명이 그녀의 강연을 취소하지 않으면 학생회를 탄핵하겠다고 서명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익명의 학생들은 강사의 ‘신상을 털고’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결국 학생회는 그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다행히 학내 여성주의 모임은 강연 취소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나는 그녀와 “연대한다”는 뜻에서 강연 거부를 통보했지만, 사실 나도 같은 처지이고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이 아닌가. 페미니즘은 인문학의 핵심이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라는 명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지면에 담기엔 복잡한 논의지만, 만일 학교 당국이 홍준표씨를 특강 강사로 불렀다면 어땠을까. 학생들은 반대 시위를 했겠지만, 홍씨를 불렀다는 이유로 학생회 탄핵과 같은 누군가의 사퇴를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모 보수 정치인의 특강을 둘러싸고 학생들이 반발해 충돌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 학교 측은 강사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했고 강연 취소를 요구한 학생들은 비난받았다.

얼마 전에는 ‘코뮌주의’를 내건 모 연구 공동체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 관련 토론회가 열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토론회 분위기였다. 가해자와 조직을 옹호하는 이들은 억울한 듯 다소 흥분한 얼굴로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피해자를 지원했던 여성들은 ‘쿨’했다. 이들은 토론회 내내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이 안 통하는 이들과의 시간이 아깝다는 듯, 답답해했다.

대학생들의 여성주의 강연 저지는, 반격일까. 또한 이미 당사자 두 명이 모두 인정한 사안에 대해 들뢰즈와 데리다, 칸트를 인용해가며 “우리는 문해력이 뛰어난 집단인데, 우리가 못 알아들었으니 당신들이 틀렸다는 증거”라고 ‘논증’하는 이 조직의 행위는, 과연, 반격일까.

한국 사회의 일부 진보 진영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개념 중의 하나가 ‘대화’와 ‘폭력’이다. 이들은 대화와 폭력을 대립시키면서, 자신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주주의 세력으로 자칭한다. 노! 민주주의는 폭력 대신 대화를 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삶에서 대화로 해결되는 문제는 거의 없다. 평화학자 신시아 인로는 “완벽한 대화는 군대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합의 가능한 대화는 명령뿐이라는 얘기다.

‘을’은, ‘갑’과 말이 안 통하는 일상을 산다. 대화가 안되기 때문에 저항하는(‘폭력을 쓰는’) 것이다. 위 공동체도 일부 여성 회원이 남성과의 대화에 절망하여 탈퇴했는데, 남성은 “왜 우리 몰래 토론회를 개최하느냐”는 말을 반복했다. 모두가 동등한 관계에서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다면, 유토피아다.

민주주의는 대화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대화를 쉽게 생각하는 이들은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글로벌 시대 미국인처럼 자기 언어가 보편적이라고 믿는다. 남성 중심적인 인식과 용어는 ‘영어’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남성’ ‘백인’ ‘이성애자’들은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통념을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남성들의 미투 운동에 대한 반감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목소리’에 대한 불안, 당황, 겁먹은 심정의 산물이 아닐까. 백래시? 반격하려면, 논리가 있어야 한다. 자기 논리가 아니라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래된 관행과 IT의 익명성에 의존한다. 한국 남성들은 새로운 무지의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고, 남성의 심기에 민감한 미디어는 이들의 퇴행을 “반격”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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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