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천명한 이후 미국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북한을 자극하는 주장을 중구난방 쏟아내면서 마치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꺾는 게 목적인 양 행동했다. 존 볼턴은 맡겨 놓은 물건이라도 되는 듯 ‘북한 핵을 폐기해 미국 땅에 묻어버리겠다’는 식의 말을 했다. ‘핵폐기 전 보상은 없다’는 말은 수없이 했다. 북한의 비핵화 선회를 약점 잡힌 것으로 보고 항복을 받아낼 기세다. 그러나 김정은의 비핵화 의사가 약점이 되는 것만큼 북·미 정상회담을 성공시키겠다는 트럼프의 의지도 약점으로 작용한다. 북·미 정상회담 실패는 트럼프에 치명적이다. ‘애초 안될 일을 무모하게 밀어붙였다’는 역풍에 직면할 것이다. 11월 중간선거는 아무런 국정 성과 없이 온갖 트럼프 스캔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치러야 한다. 미리 자신에게 수여한 노벨 평화상도 반납해야 한다. 게다가 김정은은 이미 선제 조치로 트럼프를 깊은 골짜기로 유인했다. 돌아갈 길이 없다. 트럼프는 짐짓 “핵 포기 안 해도 상관없다. 대북 압박을 계속 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되돌리기 버튼은 고장 났다. 지금의 북한은 비핵화 천명 이전의 북한이 아니다. 고립무원이었던 북한은 이제 중국이라는 조력자를 확보했다. 비핵화에 실패한다면 미국도 책임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건 대북 압박을 재개해도 중국이 동참을 거부할 명분이 생긴다는 뜻이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핵폐기를 안 하면 카다피 운명을 맞을 것”이라고 자못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한국의 반대를 무릅쓴 전쟁,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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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김정은·트럼프는 이제 서로에게 인질이다. 누구는 패자가 되고 누구는 승자가 되는 일은 없다. 모두 패자이거나 모두 승자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직 한 길, 전진뿐이다. 나아가려면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비핵화 우선의 원칙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핵 문제 외에 북한 인권, 생물화학무기, 중단거리 미사일, 심지어 해킹, 나아가 ‘북한 정권의 위험한 행동 모두’가 북·미회담 의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언컨대 트럼프가 이 보따리를 다 풀어놓으면 김정은은 협상장을 박차고 나갈 것이다. 그런 장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비핵화를 촉진시키지 않는 의제는 비핵화와 묶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핵 문제를 풀지 않으면 나머지도 해결되지 않는다. 인권 문제는 북·미 수교 협상 때 인권대화 채널을 설치하는 것으로 돌리고, 생물화학무기 및 미사일 문제는 남북 간 군축 협상에 맡기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그러면 트럼프·김정은 두 사람은 북한 문제의 본질인 핵에 집중할 수 있다. 둘째, 병행의 원칙이다. ‘선 폐기 후 보상’이라는 리비아 모델에 북한이 반발하자 미국은 엉겁결에 트럼프 모델을 제시했다. 물론 트럼프 모델은 실체가 없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그런 준비 부족은 장점이다. 서로 만족할 만한 걸 담을 공간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속도를 내면 된다. 단, 조건이 있다. ‘선 폐기 후 보상’ 주장을 접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는 미국이 원하는 빠른 속도를 낼 수 없다. 핵폐기를 2년 내 마치려면 핵폐기, 북·미 수교, 평화협정을 동시 진행해야 한다. 가령 비핵화 진전에 따라 미국이 자동적으로 상응 조치를 하는 것이다.

다만, 비핵화와 상응 조치의 시차는 최소화하고, 그 절차를 미리 합의해야 한다. 그러면 미국의 관점에서 ‘선 비핵화’가 되고, 북한의 관점에서는 ‘동시적’이 된다. 이렇게 중첩적 과정으로 로드맵을 짜면 타협이 가능하다. 셋째, 상호 신뢰의 원칙이다. 북한은 핵 억지력 확보가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때문이라고 설명해왔다. 북한이 핵 무력을 완성했기에 미국이 적대 정책 철회 의사를 밝혔고, 그 때문에 핵을 보유할 이유가 사라졌다. 북한은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핵무기는 비핵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미국의 압박에 북한이 굴복한다는 인상을 주면 북한 인민 앞에서 핵폐기를 정당화할 수 없다. 미국의 대북 압박은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승리를 안겨줘야 한다. 그래서 신뢰를 얻어야 한다. 김정은이 핵폐기를 망설이지 않도록 선제적 행동을 하면 더 좋을 것이다. 그래야 검증 과정도 수월하게 넘어간다. 사실 김정은이 개혁의 길로 선회한 이상 핵을 은폐할 이유는 없다. 핵 억지력은 상대가 핵보유 사실을 인지해야 발휘된다. 상대가 모르는 핵은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런 쓸모없는 핵은 숨길 필요도 없다. 김정은은 전면적인 사찰·검증을 과감히 수용, 미국의 신뢰를 받도록 해야 한다. 이런 상호 믿음이 있어야 ‘비핵화-체제보장 교환’을 원만히 진행할 수 있다. 게임은 시작됐다. 게임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배신은 공멸이다.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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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