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출간되어 크게 주목받은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은 스탈린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권력 앞에 나약한 예술가의 복잡한 내면과 고뇌를 그려내며, ‘체제에 순응해 살아남은 비겁한 작곡가’ 혹은 ‘음악으로 압제에 은밀히 저항한 예술가’라는 이분법적 평가로는 가닿을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문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얼마 전 발간된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라는 부제처럼, 혹독한 전쟁 시기 탄생한 교향곡 7번을 둘러싼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구성한 역사서이자 작곡가의 모습에 한층 다가갈 수 있는 평전이다.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증언>이 널리 읽혔음에도 그에 관한 책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음악만큼 격동의 현대사와 맞물려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작곡가가 드물기 때문이리라.

그런 관심은 음악회장으로도 이어져 롯데콘서트홀은 탄생·서거 백주년도 아닌 쇼스타코비치를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해 그의 작품을 조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쇼스타코비치와 검은 수사’라는 음악회가 눈길을 끈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14번을 안톤 체호프의 소설 <검은 수사>와 결합해 만든 이 공연은 에머슨 현악 사중주단의 바이올린 주자 필립 세처와 연극 연출가 제임스 글로스먼의 공동 창작물이다.

이들은 말년의 쇼스타코비치가 체호프의 이 단편에 매료되어 오페라를 구상했다는 자료를 바탕으로 현악사중주 14번에서 그 흔적을 찾아내고, 체호프의 소설 내용과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엮어 에머슨 사중주단과 일곱 명의 배우 앙상블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음악-연극’을 만들었다. 소설의 등장인물 코브린과 페소츠키가 젊은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으로 중첩되는 대본만큼이나, 현악사중주 14번을 중심에 두고 자전적인 8번을 비롯한 여러 곡들이 극의 흐름에 따라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음악 구성이 흥미롭다. 쇼스타코비치의 15개 현악사중주 전곡 음반을 냈던 에머슨 사중주단은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연극 속에 녹여내며 색다른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기존 음악을 새로운 서사 안에서 재배치하는 작업은 2018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초연된 음악극 ‘귀향’에서도 엿볼 수 있다. 17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와 한국 전통 가곡을 교차해 만든 이 음악극에는 연출과 음악감독 외에 ‘음악 드라마투르그’가 따로 있어 바로크 오페라와 전통 가곡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한다.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귀환>을 해체하고 15개의 여창 가곡에서 적절한 부분을 선택해 극에 부합하는 음악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글로벌화된 세상에서 고향과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이 작품에서는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도, 한국 전통 가곡도, 현재적 의미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지난 주말 열린 소리꾼 이희문의 ‘민요 삼천리’(‘깊은舍廊사랑’ 세 번째 프로젝트)도 과거의 노래가 흥미로운 서사 안에서 어떻게 생명력을 얻는지 보여준 공연이었다. 1968년 출시된 ‘민요삼천리’ 음반 얘기로 시작해 그 음반을 들으며 민요가수를 꿈꾸던 여성 화자의 사연을 따라가면서 그때 불렸던 노래들을 듣노라면, 익히 알던 민요들도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개성 넘치는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라이브 공연의 감동과 현장감을 대체할 수는 없다.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공연장까지 찾아오게 하려면 그만큼 매력적인 콘텐츠를 제공해야 할 터. 서양 고전음악의 미적 가치도, 전통 음악의 깊이도 그것을 행하는 음악가들의 자기 서사로 구현될 때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아닐까.

훌륭한 연주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음에도 관습적인 프로그램 외에 참신한 시도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클래식 공연은 별로 없다. 기존 레퍼토리도 어떤 서사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진대, 세상의 이슈와 접목해 고전을 현재화하는 음악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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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