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데이터가 ‘디가우징’ 방식으로 영구 삭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대법원은 규정에 따른 통상적 조치라고 해명했으나, 시점에 비춰볼 때 증거인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은 폐기되지 않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의 하드디스크 제출도 거부하고, 자체 조사로 추려낸 파일 410건만 검찰에 제출했다. 수사에 협조하겠다던 김명수 대법원장의 약속은 어디로 갔나. 대법원은 기어코 강제수사를 자초할 셈인가.

디가우징은 강력한 자력으로 모든 데이터를 삭제해 복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퇴임 시 (디가우징에 의한) 폐기가 원칙”이라고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의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된 것은 퇴임(2017년 9월22일) 후 39일 만인 지난해 10월31일이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2017년 11월3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추가조사를 지시했다. 퇴임 후 한 달 넘게 방치되던 하드디스크가 추가조사 결정 직전 ‘완전소거’된 것이다. 배경을 두고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 ‘퇴임 시 폐기’가 통상적인 관례라 해도, 추가조사가 예상되는 시점인 만큼 예외적 보전조치를 하는 게 타당했다고 본다.

대법원은 임 전 차장 등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도 ‘의혹과 관련 없는 공무상 비밀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제출을 거부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다수의 전·현직 법관들은 20여건의 고발을 당한 피고발인이며 검찰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피의자들이다. 피고발인이나 피의자가 소속된 기관에서 수사자료를 제출하면서 스스로 ‘의혹과 관련 없다’고 선을 긋는 일은 상식적이지 않다. 사법농단과 관련된 증거를 은닉하거나 인멸하는 것은 수사방해이자 사법방해에 해당한다. 주권자를 조금이라도 두려워한다면 이런 행태를 보여선 안된다.

법원은 지금이라도 검찰이 요구한 자료 일체를 제출하고 수사에 전폭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사상 초유의 대법원 압수수색 시도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검찰이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해도 영장전담판사들이 기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법원이 그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김 대법원장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법원도 법관도 법 위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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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