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이 다만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한답시고 야단법석을 떨기 이전에 간악한 무리들을 물리치며 소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준 것은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긴 세월 무예만을 갈고닦은 무인들은 아이언 맨의 슈트를 입지 않아도 대나무 숲을 날아다녔고, 거미줄 용액을 발사하지 않고도 높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고수들은 장풍만으로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쓸어 버렸고, 축지법으로 천리길을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들 또한 하나의 세계관을 가졌다는 마블의 히어로들처럼 계보가 있으니 이소룡에서 성룡으로 이어져 황비홍으로 열연한 이연걸까지. 지금도 깊은 산중에서 무술을 수련하며 하산 날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는 고수들이 있지 않을까?

30년 가까이 무예를 익혔으며 지금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블의 히어로들이 그렇듯이 70, 80년대 극장가를 주름잡던 소림사의 무술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얘기라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장풍이나 축지법쯤은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는 굳은살이 박인 두터운 손을 앞으로 쭉 뻗어 보이면서 되물었다. 정말 장풍이 있다고 믿는가?

그는 고교 때 몸이 안 좋아 무예를 익혔다. 그는 특히 검술에 빠져 오랫동안 수련하며 조선시대 무예까지 찾아보았는데, 우리나라에 무예를 연구한 변변한 역사책이 한 권도 없더란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잘 다니던 투자전문회사를 그만두고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한 번 하기로 마음먹으면 끝까지 간다는 그는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무예사와 전쟁사를 다룬 책을 여러 권 펴낸 그에게 무예란 장풍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이 아니다. 그에게 무예란 몸으로 새기는 기억이며, 역사이며, 인간의 본질이다.

무협영화와 무협지로 드라마틱한 무예만을 봐 온 사람으로서는 그의 무예론은 밋밋하고 맨숭맨숭하다. 하지만 그의 책은 깊다. “무예는 멈출 수 있을 때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멈추어야 보이기 시작하며, 멈추어야 비로소 움직임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그의 말을 자꾸 되새김한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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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