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갑작스러운 사고는 어쩔 수 없지만, 웬만한 질병은 예방하거나 관리할 수 있고 수명마저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부귀와 빈천이 정해져 있고 출세의 길 역시 하늘에 달렸다고 생각하던 과거와는 다르다. 여전히 한계는 많지만 그래도 평등이 당연한 가치로 여겨지고 개인의 노력에 의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사회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지 굳이 운명을 상정해 두고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조선후기 문인 홍석주가 <운명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썼으니, 운명을 부인하려는 것이 요즘의 일만은 아니다. 인과응보와 무관해서 닥치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다. 주나라 무왕이 큰 병에 들었다. 나라를 세운 지 4년, 이제 막 기틀을 잡아가야 하는 중차대한 때이다. 하늘의 뜻이 있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마땅한 일 앞에서, 그의 동생 주공은 자신이 대신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어떤 일들은 인간의 노력이나 바람, 혹은 마땅한 이치와는 상관없이 일어나고 진행된다.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면, 거기에 예와 지금의 차이란 있을 수 없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런 운명을 인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이 있어야 한다고 홍석주는 말한다.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복을 얻고 화를 피하기 위해 어떤 부끄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운명을 굳이 말할 것 없이 의롭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는 순간, 끝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으려면 운명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길 외에는 없다.

유난히 많은 죽음을 마주하는 여름이다. 운명에 맞닥뜨린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운명이 필요하다. 노력과 바람이 아무 소용없는 일을 두고도 자책하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남겨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이르는 순간까지 온몸을 바칠 뿐, 성패의 결과는 제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갈량이 <후출사표>에서 던진 말이다. 두려운 마음으로 운명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걸어가는 삶이 아름답다. 그런 사람이 그립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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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