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집에 갔을 때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혼자 마당에 나와 담배를 피웠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니 이제 좀 철이 들겠거니 싶었는데 여태도 담배를 피우냐며 지청구가 이어졌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아내 역시 시부모 편을 들며 어찌해 볼 도리가 없노라고 한탄 같은 비난을 덧붙였다. 그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저 놈이 누구 자식인지 모르겠다며 오래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말, 집안에 술 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저 놈 혼자 이기지도 못할 술을 처먹고 부대껴서 바르작거리기 일쑤였다며 끌탕을 하고는 지 아비도 안 피우는 담배를 자식 놈이 뻐끔대는 게 얼마나 불상놈 같은 짓거리인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아버지까지 합세하여 속창아리 없는 놈, 뼈가 녹아서 죽어봐야 알지 등등 온갖 악담으로 나를 궁지로 몰았다. 종내 나는 이 지청구들이 담배 끊으라는 애정 어린 충고인지 혹은 묵은 감정을 털어내려는 시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며느리의 환심 좀 사보려는 당신들의 소심한 작당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참을 그러다 어머니가 당장 끊어라, 죽어도 못 끊겠냐, 그럼 거시기라도 해봐라 하기에, 거시기가 뭔데요 물었더니 거 뭣이냐, 건성으로 피우는 담배, 그거라도 해봐라 하는 거였다.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전자담배와 같은 단어가 입에 붙지 않았을 테고 설령 그 단어가 혀끝에서 맴돈다 해도 당신이 기억하고 느끼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수월했을 테다. 어머니가 보기에 전자담배는 건성으로 피우는 담배이고 그렇게 성의 없이 대충대충 피우다 보면 결국 담배 자체에도 무심해져 끊게 되지 않겠느냐는 속내까지 담은 표현이었던 셈이다. 어머니의 이 말이 그려낸 이미지가 너무나 흐뭇해서 전자담배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던 이전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날의 풍경이 들어서고 말았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전유했던 한 단어의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재전유했던 거다. 이미지의 재전유는 정치보다 효과적인 문화적 전복이다. 전범기의 경우도 그렇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는 오랜 세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우리에게는 전범기이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욱일기이다. 그들은 한 번 전유한 욱일기의 이미지인 아침에 떠오르는 해, 다시 말해 세계 위에 군림하는 정복자라는 알레고리를 어떤 정치적 공세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한 비판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은 그들의 확고부동한 이미지에 균열을 내는 건 생각처럼 어렵지 않다. 나는 그런 방식을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다. 커트 보니것 소설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에는 항문을 그린 삽화가 있다. 한눈에 보아도 그가 그린 항문은 일제 전범기와 놀라울 만큼 똑같다. 동그란 항문이 있고 항문 주변의 주름살을 표현한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선들까지 일치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욱일기의 항문이 조금 더 크다는 것과 항문을 비롯해 항문의 주름살이 새빨갛다는 점뿐이다.

아마 보니것이라면 자신의 그림과 욱일기의 차이를 치핵을 앓는 항문과 그렇지 않은 항문이라고 설명했을 듯하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보니것의 그림은 보편적인 항문을 가리키는 듯하고 욱일기의 항문은 항문 자체가 너무 커다랗기 때문에 무언가를 배설하는 구멍이 아니라 외려 배설물을 삼키는 구멍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욱일기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이처럼 항문과 항문 주변의 주름이 새빨갛게 그려진 걸 보면 치질을 앓고 있는 게 분명하며 내치핵이 바깥으로 심각하게 탈출하여 손가락으로 밀어 넣어도 들어가지 않는 상태인 듯하다. 너무나 오랜 세월 노출되어 괴사가 진행되는 중이니 한시도 지체 말고 병원에 가보시라고. 보니것의 소설을 읽은 뒤로 나는 즐겁다. 내가 재전유한 욱일기는 더 이상 전범기로만 인지되지 않지만 아쉽거나 속상하지는 않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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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