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밑으로 내려가면 지평선이 펼쳐진 동네. 수평선을 보며 살았는데 이처럼 들녘 끝을 보며 살게 될 줄이야. 대지를 달려온 세찬 바람은 태극기에 닿자 몽돌 해변처럼 찰파닥 소리를 낸다. 만국기가 펄럭이던 가을운동회를 기억하는가. 학교 운동장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모래바람이 불어 무르춤하였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높이 걸린 태극기는 K팝 아이돌만큼 신이 나서 혼자 춤춘다. 퇴근하고 돌아온 사오정에게 부인이 그랬다지. “퇴근길 힘들었나요?” 사오정이 깜짝 놀란 얼굴로 “태극기 흔들지 않았는뎅. 나 태극기 부대 아니영.” 사오정에게 귀팝 파라고 귀이개를 꼭 선물해주어야지.

생풀 냄새가 올라오는 들길엔 코스모스가 한들거린다. 신중현의 노래 ‘미련’은 가을날 레퍼토리. “코스모스 길을 따라서 끝이 없이 생각할 때에, 보고 싶어 가고 싶어서 슬퍼지는 내 마음이여.” 코스모스 길을 따라 늘어선 마을엔 굴뚝마다 노래만큼 하얀 연기도 흘러나온다. 세상엔 연기를 쿨룩쿨룩 내뱉는 굴뚝만 있는 게 아니더라. 나 바람을 삼키는 굴뚝도 보았다. 중동 사막땅 이란에 가면 ‘버드기르’라고 있다. 집집마다 ‘바람 탑’이 하나씩 높다랗다. 뜨거운 사막 바람을 잡아다가 물 저장소에 식히는 원리. 이렇게 시원해진 공기를 집안 곳곳으로 들인다. 이젠 우리나라 굴뚝도 폭염이 기승일 때는 이란의 바람 탑처럼 에어컨 역할까지 했으면 좋겠어.

코스모스가 춤추고 태극기가 춤추고 굴뚝엔 연기가 춤추는 가을. 의자나 평상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던 영감님들은 대부분 하직. 찡등그리며 쏘아보던 교회 댕기는 아짐씨들, 이제 제 앞가림도 벅찬 세월이렷다. 골목을 주름잡던 영감탱이의 담배연기가 그립다. 연기가 피어나는 곳엔 어김없이 사람이 살고 있지. 사람이 집에 머문다는 게 얼마나 온기 있는 노릇인지. 수십 채 건물이 있대도 진실한 사랑을 나눌 ‘내 님’이 없다면 인간은 대체 어디서 위로와 온기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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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