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견(管見)이라는 말이 있다. 대롱을 통해서 본다는 뜻으로, 주로 자신의 소견이 좁음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 표현은 장자가 하는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의아해하는 공손룡에게 주어진 비유에서 비롯되었다. 공손룡은 논리적 변설에 매우 능해서 수많은 학설들의 허를 찌르며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던 인물이다. 그러나 대롱으로 본 하늘, 송곳으로 짚은 땅만이 전부인 줄 아는 이는 진짜 드넓은 하늘과 땅을 이해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법이라는 말을 듣고 공손룡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늘처럼 전문성이 심화된 시대는 없었다. 같은 학과 내에서도 한두 단계 깊이 들어가면 소통이 힘들 정도로 지식이 세분화되고 있다. 전공 분야 내에서 인정받을 만큼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이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지식이 실용화되거나 대중과 소통되기까지에는 또 간단치 않은 과정이 소요된다. 그러나 오늘처럼 전문성이 무시되는 시대도 없다. 누구나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지식정보의 바다가 언제 어디서든 검색창 앞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출처가 세탁되어 떠돌아다니는 정보와 당의정(糖衣錠) 같은 입문서 몇 권만 읽고도 수십 년 한 우물을 판 전문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다. 소통을 소홀히 한 전문가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지식의 중개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대중의 호응에 취해서 전문가를 가볍게 여기는 탓도 있다.

너도나도 융합을 강조하는 시대다. 그러나 전문성 없이 융합은 있을 수 없다. 적당히 넓고 얕게 연결하고 버무린다고 해서 의미 있는 화학작용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지식의 절대량이 증대할수록 전문성은 더 깊고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남들은 대롱을 가지고 하늘을 보지만 나는 전체를 두루 다 본다고 자부하는 것은 전설의 명의 편작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관건은 태도에 있다. 자신의 지식이 대롱으로 본 하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리고 나와 다른 지점을 짚은 이의 송곳이 얼마나 섬세하게 땅의 진면을 보여주는지를 받아들이는 태도. 수사(修辭)로서의 겸손이 아니라, 서로의 전문성을 열린 마음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융합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지식의 대중화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일반 칼럼 > 송혁기의 책상물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 마시고 그림 그리며  (0) 2018.11.14
정의의 현실, 현실의 정의  (0) 2018.10.31
대롱으로 본 하늘  (0) 2018.10.17
이 답답한 교육 앞에서 우리는  (0) 2018.10.04
다시 물을 바라보며  (0) 2018.09.12
‘합력’의 북소리  (0) 2018.08.2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