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청탁엔 거절밖에 달리 대책이 없다. 아무 데나 걸터앉아서 판소리를 내질러서야 되겠는가. 예전엔 여기저기 연재를 많이 했었다. 하지만 써재낀 글들을 책으로 묶는 일은 낯부끄러워서 차마 하지 못했다. 세상에 사람은 많으나 사랑은 한 사람뿐이듯 내 글은 재주가 아닌 진심이고 싶었다. 그런 글을 찾아 살게 해주신 여러 은인들이 계시다. 감사한 인연들.

오래전 ‘샘터’라는 잡지에 수필 연재를 다년간 했었다. 하루는 샘터의 뒷방을 지키던 동화작가 정채봉 샘이 전화를 주셨는데, 무슨 이야길 나누다가 정샘의 글 가운데 ‘택시 번호 연하장’ 얘기로 미소가 번졌던 기억. “지난해 송년 모임에서였습니다. 친구가 수첩 중의 한 장을 끊어서 송구영신이라고 써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쪽을 들여다보니 웬 택시 번호가 줄줄이 적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심히 무슨 택시 번호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친구가 씩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금년에 너 태워 보낸 택시 번호들이야. 마음이 안 놓여서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바깥으로 나오니 그날따라 눈이 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부 우범 택시들 얘기. 옛날엔 통금에 죄다들 쫓겼고, 택시는 폭풍우에 뜬 유일한 조각배였었다.

택시 번호가 담긴 연하장은 아니더라도, 금테를 두른 반지가 아니더라도, 엽서와 감귤 한 상자 선물로 나누는 연말. 안부를 묻는 다정한 인연. 세상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친구’ ‘사람’이라던 말씀. 그날 정샘과 나눈 대화는 택시 번호를 기록하는 심정으로 세상에서 나를 지키고 또 친구들을 지키며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고물장수 두부장수, 푸성귀장수, 떡장수, 엿장수, 찹쌀떡장수, 메밀묵장수… 겨울 골목마다 손님을 찾아 서성이던 목소리. 막차를 타려고 길게 늘어선 사람들과 호호 시린 손을 비비던 택시 운전수. “얼른 여와붑시다잉.” 부모님 허락에 벅차서 눈 내리는 밤길을 오래 서성이던 연인들. 돈 자랑, 집안 자랑, 권세 자랑, 다들 하는 자랑 속에서 당신의 유별난 친구 자랑. 그런 사랑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일까.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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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