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용감하게 맞서던 사람이 어느 때부턴가 옳고 그름의 잣대는 뒷전에 둔 채 그저 서로 좋은 방향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비겁한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예전에는 분명히 깨끗한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차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온갖 이권에 개입하여 과도하게 자기 것만 챙기는 삶을 사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세상 물정을 하나하나 경험하다 보면 옳고 그름이란 게 그리 단순하게 구분될 수 없음을 알아가게 되는 법, 그러니 이 역시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이해관계에 얽매이다 보면 자유로울 수 없어서, 혹은 적자생존의 험한 세상에 살아남으려다 보니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으로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수광(1563~1628)은 용감했던 사람이 비겁해지고 깨끗했던 사람이 탐욕스러워졌다는 인식 자체가 틀렸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서 변한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역시 겉으로만 용감하고 깨끗해 보였을 뿐 실제 그 사람의 내면은 비겁하고 탐욕스러웠다는 것이다. 다만 젊을 때는 내면을 숨기고 겉으로 그럴듯하게 꾸밀 만한 힘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해짐에 따라 의지도 약해져서 내면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감기만 걸려도 지극히 이기적으로 변하는 우리 모습을 떠올려 보면, 육신의 쇠락으로 인해 안일함에 더 쉽게 무너지게 된다는 말도 그럴 법하다.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일뿐더러 핑계 댈 일도 아니다. 겉으로 용감하고 깨끗해 보이는 게 능사가 아니므로 젊음을 내세우는 일 역시 허망할 뿐이다. 나이와 기력에 좌우되지 않는 내면의 용기와 깨끗함을 갖추는 것이 관건이다. 이수광은 의리(義理)로 인격을 수양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매 순간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삼는 실천을 서서히 쌓아감으로써 길러진다는 호연지기(浩然之氣)다. 현실과 욕망의 테두리 내에서는 확보할 수 없는 또 다른 시각이 있음을 보여주는 인문고전이나 종교 경전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겁함과 탐욕으로 가려진 우리 마음을 성찰하고 이해관계가 얽힌 현실을 좀 더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 끊임없이 거기에 비추어 보는 일 외에, 용기와 깨끗함을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게 할 방법이 따로 있을까.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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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