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한 3일 광화문광장은 휴일 나들이 인파로 북적였다. 눈부신 초가을 햇살 아래 시민들의 표정은 밝았다. 아이들은 달리고 소리치고 웃었다. 보수층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안보불감증이라고 개탄했다. 하지만 엄중한 정세라고 해도 이 정도의 행복과 평화조차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은 과도한 엄숙주의다. 70년 가까이 머리띠 두르고 북한 규탄 구호를 외쳤어도 달라진 것은 없지 않은가.

1주일 전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이 일본 상공을 통과해 날아갔을 때 일본은 발칵 뒤집어졌다. 학교가 휴교하고 신칸센이 멈춰서고 신문들은 앞다퉈 호외를 냈다. 일본 정부는 긴급 대피령인 ‘J얼러트’를 발령했다. 지진 때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반대로 한국인은 지진을 더 두려워한다. 북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 한국과 남의 동네 일로 보는 일본의 반응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한 3일 오후 도쿄 거리에서 한 시민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진을 배경으로 한 북한 핵실험 관련 보도를 보고 있다. 도쿄 _ AP연합뉴스

김정은은 핵 도박판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기대 이상으로 부응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쇼의 가장 충실한 관객은 도널드 트럼프다. 누구보다 빨리, 자주 반응한다. 반응 패턴은 불가측하고 피아를 넘나든다. 북한이 도발을 멈추면 김정은을 극찬하고 도발하면 장롱 속 군사옵션을 꺼내든다. 트럼프가 중심인 국제사회 북핵 대응체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발언에는 사실과 의견이 섞여 있다. “미국은 지난 25년간 북한과 대화를 해왔고 터무니없는 돈을 지불했지만 대화는 답이 아니다”라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북한과 대화를 죽 해온 게 아니라 하다 말다 했다. 클린턴이 대화 창구를 열어놓으면 부시가 창구를 닫는 식이었다. ‘터무니없는 돈’이란 말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북·미 제네바 합의로 북한에 중유와 식량을 제공했지만 북한은 그 대가로 핵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북핵 사태의 수혜자인 트럼프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트럼프는 북핵 사태를 주도하면서 러시아 스캔들 등으로 흔들리는 국내 정치적 기반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터무니없이 돈을 쓰는 건 북한이다. 가장 발사비용이 싼 스커드미사일만 해도 1발에 600만~1000만달러인데, 북한은 지난 6년간 60발이 넘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이 나라 곳간을 털어 도발하는 것을 트럼프는 감사해야 할 입장이다. 사학스캔들로 지지율이 폭락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북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김정은의 핵도박은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다. 의도치 않게 아베와 트럼프의 정치적 환경을 개선해주기도 했지만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쥐고 강대국들을 호령하는 편익이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앞으로도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김정은은 핵보유국 지위와 영구적 체제생존을 최종목표로 추구한다.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려면 미국과 대등한 핵억지가 형성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게 핵무기 종류의 다양화와 운반체계 완비를 뜻하는 다종화다. 북한은 핵무기 종류는 구비하고 있지만 운반체계는 그렇지 못하다. 일종의 소모품으로 200대가량 보유 중인 미사일 발사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제작 기술은 없는데, 유엔 제재로 수입할 길은 막힌 상태여서 언제 동이 날지 모른다. 향후 발사대 부족으로 미사일이 무용지물이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북한은 과거 병뚜껑 제조기술 부족으로 생활필수품인 병 생산에 애를 먹은 적이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용 잠수함도 버거운 문제다. 발사관 3개짜리 대형 잠수함을 건조해야 하는 데 비용, 시간, 기술 모두 북한 편이 아니다. 미국과의 핵경쟁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는 것과 유사하다.

기술적 난관을 극복했다고 해도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미국이 자신을 핵으로 위협하는 북한에 핵보유국 지위를 내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6차례 핵실험 후 핵보유국 지위를 획득한 ‘파키스탄 사례’를 내심 기대하고 있겠지만 두 나라는 차이가 크다. 파키스탄은 미국을 위협하지 않았고 국제사회와 반목하지도 않았다. 파키스탄의 핵이 숙적 인도만을 겨냥하고 있다는 믿음도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한은 이 중 어느 대목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김정은의 핵도박은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다. 핵무력 교리도 어느덧 안보와 생존의 수단에서 공격 중심으로 변질됐다. 자위 차원의 핵개발 명분도 상실했다. 생존을 넘어 국제정치 현실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강대국을 꿈꾸는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불가능하고, 추구하면 안되는 끔찍한 망상이다. 묻고 싶다. 북한은 왜 핵국가가 되려고 하는가.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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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눈 쌓인 태백산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청량리에서 출발해 용문, 예미(禮美), 고한을 지나 태백역에 내렸다. 플랫폼의 안내판을 보니 다음역이 문곡(文曲)이었다. 멀어져가는 기차를 보는데 예와 악을 중시한 공자님 생각이 났다. 지난주 정선(旌善)의 여량에서 일박하고 반론산에 올랐다. 정선의 문자적인 뜻은 ‘선행을 드러내어 칭찬함’이고 반론은 ‘半論’이다. 생소하지만 궁리가 깊은 듯한 산 이름을 입에 굴리며 오르는데 논어 생각이 아니 날 수가 없었다.

이 계절은 지금 어디를 통과하는 중인가. 어제 들은 매미소리가 오늘은 또 확연히 다르다. 매미는 꼬리를 씰룩이던 힘도 잃은 채 겨우 가슴 근처의 발음기만으로 희미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닳아지는 매미소리를 듣는데 최근 때맞추어 읽은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조지장사 기명야애, 인지장사 기언야선. 새가 죽으려 할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고, 사람은 죽음이 가까우면 그 말이 선해진다).

정상 부근에 천연기념물인 철쭉을 키우는 반륜산은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의 산행처였다. 등산로에 사람들의 발길과 눈길이 닿은 흔적이 별로 없었다. 좌우의 껑충한 나무와 풀들이 외려 우리를 구경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희미하게 끊어지기도 하는 길을 오르다가 양지바른 무덤에 읍을 하고 그 앞에 앉았다. 햇살이 기탄없이 찾아오는 무덤가의 식생은 언제나 풍요롭다. 고개를 숙이고 오래 쳐다보면 와글와글한 햇빛 사이로 주로 벼과와 사초과의 풀들이 사이좋게 어울리고 있다. 곧 벌초를 하게 되면 본치가 나게끔 어깨보다 훌쩍 웃자란 풀들. 그중에 무덤을 지키는 수문장인 양 확실하게 꼿꼿한 산비장이가 있다. 기다란 대궁 위에 짙은 보라색 꽃을 둥근 공처럼 얹어두었다. 엉겅퀴와 달리 가시가 하나도 없어 부드러운 느낌이 주르르 흘러넘친다.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매미소리 들으며, 순한 산비장이 바라보며 반론산의 무덤가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가을이라 소리도 순해지는구나, 이순(耳順)이 가까이에 왔구나. 산비장이,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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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국립수목원 제공

능소화의 주홍빛 꽃송이들이 담장 아래로 다복하게 떨어져 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여름 그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연일 쏟아붓던 빗속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덩굴을 올리며 싱그럽고 기운차며 밝게 피어 있던 그 능소화가 이젠 계절을 보내고 있다. 능소화는 시들기 전에 꽃송이들을 툭툭 내려놓아 마치 석양에 물든 붉은 노을빛처럼 마지막까지 아름답다.

능소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어릴 적 마당에 심어졌던 그 꽃송이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마루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에 있던 퍼걸러(pergola) 위로, 흡착뿌리를 붙여가며 집의 벽면을 타고 오른 능소화 줄기가 이어져 아름다운 꽃송이들을 축축 늘어트렸다. 우리집 능소화는 여러 집으로 시집도 갔다. 당시엔 서울에서 능소화를 구경하기 그리 쉽지 않아 집에 놀러 오신 지인들은 특별한 능소화의 모습에 감동했고, 엄마는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뿌리가 달린 줄기를 나누어 주곤 하셨다. 생각해보면 꽃이든 나무든 작은 것이어도 좋은 것들은 나누던 여유를 가진 시절이었다.

작은 골목길로 이어지며, 능소화로 동네가 아름다운 모습을 만난 것은, 대학생 때 구례에 갔을 때로 기억한다. 보기만 해도 평화롭던 그 오래된 마을엔 집집마다 담장이며 대문 옆이며 곳곳에 벽을 타고 능소화가 자라고 있었다. 서울토박이였던 나는 언제나 그리운 고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넉넉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집집마다 꽃이며 나무를 키워가며 살아온 세월의 기품 있는 흔적들이 묻어 있는 그런 곳 말이다.

능소화가 서울에서 보기 어려웠던 이유가 비교적 추위에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양반꽃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나무 공부를 전공으로 하면서 알게 되었다.

옛날에는 이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서만 심을 수 있어서 천한 계층의 사람들이 심으면 관가로 잡혀가 곤장을 맞았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 능소화가 한자어로 능가할 또는 업신여길 ‘능(凌)’자와 하늘 ‘소()’로 이루어진 것으로 미뤄보면, 하늘 같은 양반을 능가하고 업신여길 것을 염려해서였을까?

그러던 능소화가 어느새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꽃나무가 되었다. 기온이 높아져 감나무나 배롱나무처럼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올라온 덕분도 있고, 무엇보다도 벽을 타고 올라 꽃을 피울 수 있는 덩굴성 소재의 식물이 워낙 부족했던 차에 한여름을 이토록 시원하고 아름답게 장식할 능소화는 참으로 멋진 나무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동안 능소화 피는 계절이면 반복적인 민원으로 고생을 했었다. 일본 기록에 능소화 꽃가루에 갈고리 같은 구조가 있어서 사람들을 실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였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란 이의 책에 ‘어떤 사람이 능소화를 쳐다보다가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이 눈에 들어가서 실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능소화 꽃가루가 위험하다’에서 나아가 여러 구체적 병명이 등장하게 만들었고, 어린이집이나 공원 등에서는 잘 키우던 나무들을 뽑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일하는 국립수목원에서 실험연구를 해보았다. 능소화의 꽃가루를 전자현미경(SEM)으로 관찰한 결과 표면이 가시 또는 갈고리 형태가 아닌 매끈한 그물망 모양을 하고 있어 바람에 날리기 어려운 조건이고, 사람의 눈에 들어갈 확률이 낮으며, 들어간다 하더라도 피부나 망막을 손상시키는 구조가 아니었다. 또 식물체에는 독성이 거의 없고, 화밀(꿀)은 48시간 장시간 처리한 경우에만 일부 세포독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부러 오래된 꿀을 어렵게 모아 먹거나 아주 장시간 피부에 노출하기 전에는 우연히 실명에 이를 염려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연구하여 밝히면 될 것을 왜 그 여러 해 반복되는 숱한 소문과 염려를 양산했을까?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심사를 거쳐 연구비를 받고, 그 결과를 평가받아야 하는데 이 주제는 그 기준에 적절하지 않아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싶다.

이 능소화 연구는 내가 포함되어 추진한 연구 중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였지만, 많은 점수를 받는 높은 등급의 학술지에는 실리지 못하였다. 결과는 처음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를 밝히는 데 사용한 기술 수준이 첨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자들이 세계의 교과서를 바꿀 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알고 지내는 한 교수님이 10년 넘게 한 주제로 파고들다보니, 이제 겨우 새로운 이론을 말할 수 있는 결과들이 가닥이 잡힌다고, 이는 연구비 없이도 지속할 수 있게 지지해준 아내의 이해 덕분이 크다고 하신 말이 머리를 맴돈다.

며칠 전 받은 정책교육에서 효율을 극대화한 성과에서 나아가 최선의 가치(Best vaule)를 찾아내고자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든, 정책이든, 개인의 삶의 철학이든 각자가 하는 일에 얼마나 섬세하고 진정성 있게 고려하고 실천해 가야 하는지 가을의 길목에서 생각이 깊어진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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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열광의 경기장이 싸늘한 냉소로 바뀐 지 5일째, 칼럼을 쓰기가 여의치 않은 시점이다. 지난 목요일 밤에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며칠 동안 수많은 언론과 축구팬들이 다해버렸다. 대부분의 비판은 적절했다. ‘악으로 깡으로’ 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축구는 머리로, 그러니까 명석한 판단과 기술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 중앙아시아 최대 공업도시 타슈켄트의 경기장을 우리는 또한 열망한다. 경우의 수? 까짓 거 이기면 되는 거 아닌가? 국가대표라는 자부심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라. 이런 기대들을 누구나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축구는 이처럼 얼핏 보기에 양립하기 어려운 양극단 사이에 있다. 팬들의 함성이나 잔디 상태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내되 전술적으로 유의미한 공간을 순간적으로 파악하여 신묘하게 접근해 나가는 기술? 그것을 아쉽게도 우리 대표팀은 보여주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지치게 된다. 심리적 부담은 더욱 커지고 몸은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여 오히려 둔하게 움직이게 된다.

지난 이란전, 경기 시작하자마자 텔레비전 중계에서는 ‘대표팀이라는 각오와 정신력으로’라는 말이 들려왔는데 스포츠 경기는 무게를 달 수 없는 그 무슨 정신력을 겨루는 행위가 아니다. 이란과의 졸전 후에 김남일 코치가 ‘빠따’(몽둥이)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설마 ‘빠따’를 치지도 않겠지만 ‘빠따’를 친다 해서 달라질 게 없는 게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이 발언은, 그러나 지금의 대표팀을 살펴보기 위한 열쇠말이다. 지난 7월12일, 코치로 선임되면서 김남일은 “마음 같으면 지금 들어가서 바로 ‘빠따’라도 좀 치고 싶다”고 했다. 물론 김남일 코치는 덧붙였다. “세월도 많이 흐르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 같고요. 어떤 마음을 갖고 경기장에 나가야 되는지를 후배들한테 좀 전해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빠따라도 치고 싶다’는 말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나는 해프닝으로 넘기고 싶지 않다. ‘터프’한 성격의 신임 코치가 젊은 선수들에게 뼈있는 덕담을 한 것이라고 넘겨서는 안된다. ‘빠따’는 곧장 ‘애정 어린 질책’으로 해석되면서 여러 언론과 인터넷에서 긍정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어느 스포츠 뉴스는 “김 코치는 후배들에게 쓴소리부터 했습니다. 이런 걸 ‘사이다 발언’이라고 하나요”라고 보도했다. 어느 스포츠지는 “요즘 젊은 선수들이 간절함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승부 근성’과 ‘국위선양’ 정신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렇게 ‘빠따’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의 ‘승부 근성’으로 이어지고 ‘태극마크를 향한 간절함’으로 연결되어 ‘대한건아 국위선양’으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리고 이란과의 졸전으로 인하여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대표팀의 ‘태도와 자격’을 문제 삼는 식으로 헝클어졌다.

문제는 기술이지 정신력이 아니다. 그 무슨 ‘정신력이 뒷받침된 기술’ 같은 형용모순도 아니며 신태용 감독 개인에게 덮어씌울 문제도 아니다. 지금 대표팀은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되고 있는 세계 축구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결정적인 것은, 현재의 코칭스태프가 장기적인 계획과 안정된 구도 속에 안착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신태용 감독은 부임한 지 겨우 두 달이 지났다. 그사이, 유럽의 여러 리그들은 휴식기였고 8월 말에 일제히 개막한 경기들에서 이른바 유럽파들은 부상이나 팀내 경쟁 등으로 밀린 상태다.

선임되자마자 K리그에 방점을 찍었지만 각 포지션에서 한두 명의 획기적인 선택이 있었을 뿐 비교적 많이 선발했다 해서 시너지가 자연스럽게 생기지는 않았다. 기성용의 부상으로 경기 전체의 흐름을 좌우하는 그라운드 안의 조율사가 없었다.

특히 7월 초순의 코칭스태프 구성은 이미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둘이 합쳐 A매치 174경기에 달하는 김남일과 차두리는, 그러나 코치 경험이 짧고 그나마도 지속적이지 못했다. 2016년 4월 선수에서 은퇴한 김남일은 축구협회 미래전략기획단 위원으로 있다가 2017년 2월 중국 장쑤 쑤닝의 코치로 부임하여 4개월 활동했다. 그게 전부다. 차두리는 2016년 10월 전력분석관이라는 ‘위장 보직’으로 사실상 코치 역할을 하다가 A급 자격증 문제 등으로 올해 4월에 자진 사퇴했다가 7월에 복귀했다.

그나마 전경준 수석코치가 이들보다는 경력이 많지만 그래 봐야 2012년부터이며 그것도 프로구단 제주의 짧은 경력을 제외하고 보면 대체로 20세 이하의 성장기 선수들과 생활했다. 전임 코치가 ‘나이, 선후배’ 등을 감안하여 사퇴함으로써 신 감독보다 ‘후배’로 현재 골키퍼 코치를 맡고 있는 김해운 정도가 일정 경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기 전체를 주도할 만한 포지션은 아니다.

이렇게 구성된 대표팀에 물어보자. 이 중에서 누가 대표팀의 상시적인 전력 향상과 실제 경기 중의 효과적인 전술 구사 및 임기응변을 하는가. 물론 감독이다. 그러나 감독 외에는 누구란 말인가. 언필칭 코칭스태프 아닌가. 급변하는 세계 축구의 흐름은 누가 파악하고 보고하여 토론하는가. 3개 대륙 전역에 나가 있는 해외 선수들의 역량과 컨디션은 누가 분석하는가. 국내 선수들의 심리 상태와 기술 수준은 누가 판단하는가. 어떻게든 이런 과정을 거쳐 집중된 정보들을 어떻게들 토론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가.

‘기술’이 관건이라고 할 때, 바로 이런 실질적이고 실무적인 사안의 강렬한 실천이 중요하다. 타슈켄트 이후 한국 대표팀은 막연한 기술 보강이나 추상적인 정신력이 아니라, 현재의 코칭스태프에 대한 날카로운 점검부터 해내야 한다. 그 속에 기술이 있고 그 속에 정신력이 있다. 그게 ‘빠따’다.

<정윤수 | 스포츠 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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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화장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닫힌 변기뚜껑이라고 합니다. 다들 한 번쯤 뚜껑을 열었다 질겁하고 닫은 경험이 있으니까요. 또 바퀴벌레에 식겁한 적 있으면 부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박씨 보고 바퀴벌레인 줄 알고 덜컥 놀랐을 테지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자라는 위급해지면 순식간에 목이 몸길이만큼 쭉 늘어나 강한 턱과 이빨로 무는데, 자라한테 물리면 자칫 손가락이 잘릴 만큼 위협적입니다. 과거 자라에게 물린 뻔한 경험이 있다면 침침한 부엌에 놓인 가마솥과 그 긴 손잡이를 보고 순간 자라로 착각해 움찔 놀랄 겁니다.

비슷한 속담으로 ‘고슴도치에 놀란 범 밤송이 보고 놀란다’가 있습니다. 마른 밤송이의 색깔과 모양이 고슴도치와 매우 흡사하니(지금의 애완용 회색 고슴도치는 토종이 아닙니다), 잘못 건드려 주둥이에 가시 수십 개 박혔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한낱 밤송이에도 산중호걸이 겁을 먹습니다. 그리고 ‘국에 데면 냉수도 불어 먹는다’, ‘불에 놀라면 부지깽이 보고도 놀란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불을 쑤석일 때 쓰는, 끝이 불탄 부지깽이 작대기만 봐도 불길이 활활 번지던 공황상태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 쿵, 심장 벌렁, 숨도 가쁩니다.

트라우마(trauma)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있습니다. 천재지변이나 사고, 폭행, 학대 등으로 겪은 충격이 잠재의식에 남아 일상에서 또는 비슷한 상황에서 우울과 불안, 공포에 사로잡혀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수많은 소방관들은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족한 인원과 형편없는 지원 탓에 휴식과 치유는 언감생심이었겠지요. 이번 정부의 소방청 독립과 ‘복합치유센터’ 건립이 다른 사람들을 살리면서도 죽고 싶다 생각하는 분들을 살리는 그 한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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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국회가 개원했다. 문재인 정부는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매우 성공적으로 출범하기는 했지만,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들어섰다. 그 어지럽기로 소문난 ‘여의도 정치’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야당들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새 대표는 ‘강한 야당’에 대한 결기를 분명히 했고, 자유한국당은 엉뚱한 트집을 잡아 아예 국회 보이콧을 선언했다. 정의당을 제외한 야 3당은 이른바 ‘반문연대’를 형성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자칫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많은 개혁과제 해결이 때를 놓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벌써부터 몇몇 논객들은 문 대통령이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이나 국정운영에 대한 높은 지지율에만 기대려 한다며 우려하던 터였다. 문 대통령이 국민과의 소통만 내세우고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의 문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문 대통령이 대의제를 채택한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있다거나 ‘지지율 독재’를 한다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면서 협치를 주문하고 타협과 양보를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아직도 진행 중인 ‘시민혁명’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핵심 과제의 하나가 바로 정치적 체제 전환이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87년 체제의 통상적인 정부들과는 달리 이 체제를 끝장내고 더 좋은 질을 가진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다. 촛불시민들은 무엇보다도 자유한국당으로 대변되는 반민주 적폐세력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시키라고 명령했다. 툭하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자유한국당은 이념적 편협함으로 보나, 그동안의 정치행태를 보나 도무지 다원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건강한 보수 정당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번의 국회 보이콧 작태만 보더라도 이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 당은 사법부의 판단을 정부의 언론장악 시도와 연결시키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집권기에 사법부도 조종하고 언론도 장악해 왔음을 사실상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자신들이 그랬으니 현정부도 그럴 것이라고 말이다. 비록 우리가 자유한국당의 현실적 위상을 무턱대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저 당이 자유민주주의를 팔면서 우리 정치의 중심축이 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보아서는 안된다. 만약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 여소야대 현실을 빌미 삼아 이런 반자유민주주의적 수구 정당과 섣부른 타협을 해서 촛불정신을 배반한다면, 그런 선택이야말로 오히려 커다란 민심이반을 낳을 것이다.

협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교과서적인 의회정치의 문법이 아니라 진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정치적 동맹이다. 과거로 회귀하려는 반문연대의 시도에 맞서 촛불시민들의 명령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동참했던 정치세력들의 연대, 말하자면 ‘촛불연대’를 새로운 차원에서 복원해 내야 한다. 그 연대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지켜내기 위한 연대였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극중주의가 자유한국당과 민주당 사이를 기계적으로 저울질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고, 바른정당이 보수대연합을 명분으로 자유한국당을 기웃거리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야당들이라고 그저 들러리만 서려 하지는 않을 터이다. 민주당이 앞장서서 자유한국당이 없거나 소수화된 미래의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다른 야당들에 분명하고 실질적인 정치적 이익을 줄 수 있는 연대의 끈을 제시해야 한다. 소수 정당의 생존과 위상을 확실하게 보장해 줄 수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방향의 선거제도 개혁이 그런 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개혁을 통해 진보 정당이 더 커지고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자유한국당의 자리를 대체하는 다당제가 성립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양당중심제보다는 민주당을 위해서나, 사회개혁을 위해서나 훨씬 낫다. 그런 방향의 선거제도 개혁은 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지 않는가.

직접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언제나 민주주의의 질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가 단적인 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기본적으로 우리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했다. 우리 대의제는 다름 아니라 시민들을 제대로 대의하지 못해서 위기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승자독식을 원칙으로 하는 현행 단순다수결 소선거구제에서는 패배한 후보를 지지한 시민들의 의사는 전혀 대변되지 못한다. 정치권은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그 열망에 고장 난 대의제를 수리함으로써 응답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바람직한 선거제도에 대한 숙의의 과정을 ‘시민배심원단’에 맡겨도 좋겠다.

<장은주 | 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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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안보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4일 국회 본회의가 열렸지만 자유한국당은 불참했다. 국회는 북한 핵실험을 규탄하고 강력하고 실효적 제재 방안 마련을 촉구하는 대북결의안을 채택했지만 결과적으로 제1야당이 빠진 ‘반쪽 결의’가 됐다. 그 시간에 한국당은 MBC 김장겸 사장 체포영장에 반발해 국회 로텐더홀에서 “문재인 정권은 공영방송 장악음모를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한국당은 “안보 문제만은 초당적으로 임한다”면서 이날 열린 국방위·정보위 등 안보 관련 상임위에 참여하긴 했다. 하지만 다른 의원들은 국회를 뛰쳐나와 고용노동부와 대검을 항의 방문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7년9월4일 (출처: 경향신문DB)

 

지금 우리는 북핵이 턱밑까지 다다른 최악의 안보위기에 처해 있다. 자고 일어나면 국제사회는 대북 제재를 더하거나 새로운 방안을 내놓는 등 눈이 핑핑 돌 지경이다. 이 판국에 한국당은 국회 보이콧도 모자라 장외에서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대규모 국민보고대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시민의 공감대와는 동떨어진 정략적 이벤트다. 홍준표 대표는 “전대협 주사파, 안보·북핵 경험이 전무한 청와대 국가안보실, 4강 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외교수장, 무기 브로커 출신 국방부 장관, 대북 협상만 하던 국정원장 등 이런 참모들이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야 간 대북정책은 다를 수 있다. 정부 대응이 잘못됐다면 따질 건 따져야 한다. 하지만 비판도 때가 있다. 야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정부와의 차이를 접어두고 합심협력, 북핵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 무슨 호재라도 잡은 양 정치공세의 불쏘시개로 삼아 오히려 위기를 부추기고 정부 발목이나 잡는 건 책임 있는 정당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북한 정권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분열과 방심이다. 북한 도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도 우리의 단결되고 결연한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안보 차원의 중대한 사태를 맞아 정치권이 단합된 모습을 보일 때 민심도 안정될 것이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사명 앞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마침 어제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각당 대표를 청와대에 초청해 회동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야당 대표가 적극 호응, 정쟁을 중단하고 안보위기 극복을 위한 결의를 과시하기 바란다. 국가위기 상황에서 초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북의 도발을 억제하고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이 건재함을 알리는 분명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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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봉되었던 영화 <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갇혀 있던 19만8000명의 영국군과 14만명에 이르는 프랑스, 벨기에군을 영국의 군관민이 합동으로 구출해내는 기적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비록 전쟁의 서막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나 철수 작전에 성공함으로써 영국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력전(total war)의 시대, 전쟁이 벌어지면 온 국토와 전 국민이 전쟁의 참화로 고통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력을 하나로 단합시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서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 전쟁 기간 중 조지 6세가 머물던 버킹엄궁은 7차례나 폭격당했지만, 국왕은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궁이 폭격당하는 장면과 국왕의 건재함을 홍보영상으로 만들어 국민의 단합과 결집을 호소했다.

영화 <덩케르크> 스틸 이미지

이외에도 영국 정부는 여러 방식으로 프로파간다 작업을 수행했다. 그중 하나가 왕실 마크와 선전 문구를 담은 ‘KEEP CALM’ 시리즈 포스터였다. 첫 번째 포스터는 “Your Courage, Your Cheerfulness, Your Resolution will bring us victory(당신의 용기, 당신의 활기, 당신의 결의가 승리를 불러올 것이다).” 두 번째는 “Freedom is in peril defend it with all your might(위기에 처한 자유를 전력을 다해 사수하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KEEP CALM AND CARRY ON(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이었다. 마지막 포스터는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공개되지 않다가 2000년 영국의 어느 고서점에서 1장의 포스터가 우연히 발견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 정권은 민심을 호도하고,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북한과의 군사적 위기를 조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의 민심 흔들기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침착하게 현실에 대처해왔다. 2006년 제1차 핵실험 이후 계속되는 북핵 위기 속에서도 대다수 국민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진짜 가마니가 된다”는 사실 역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비참한 역사가 이런 사실을 반복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구까지 피란 내려간 상황에서도 “안심하라!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를 연신 틀어댔고, 2014년 4월16일, 이미 선체가 침수되어 기울어 가고 있는 세월호 선내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죽음의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참담하게 망가져가는 국가를 더는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국민이 나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만히 지켜만 보기엔 이른 듯싶다. 중요한 변화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남북관계 개선이다.

제1차 핵실험 이래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 양국의 접근 방법은 북한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핵 개발을 포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계속되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장착용 수소탄 시험에 성공했다는 6차 핵실험 소식이다. 대북 제재와 외교적 고립, 그리고 무력시위로는 북한의 선택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여전히 미사일 사정거리 연장과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산 군사 장비 구매계획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군사체제의 군사력은 앞으로도 북한을 계속해서 압도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유사시 한반도와 우리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국민은 별로 없다. 그런 사실은 정부도 이미 알고 있다. ‘절대 안보’는 ‘절대 평화’ 이외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는 한 어떠한 군사 무기의 도입도 현실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온 국민이 김정은의 북한 핵과 트럼프의 대북 군사옵션이란 덩케르크 해변에 갇혀 있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든 길이겠으나, 문재인 정부는 국민을 믿고, 국민을 위해, 국민과 함께 우리가 주도하는 해법을 만들어 그들을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야 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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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배를 타기 위해 바닷가에 모여 있는 영국군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독일 공군의 폭격이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속절없이 당하던 군인이 울분에 차서 말한다. “공군은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정말 공군은 독일 폭격기가 아군 머리 위에 폭탄을 쏟아부어대도록 수수방관했을까? 사실 공군 역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문제는 공중전이 벌어지는 장소가 덩케르크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영국 공군이 독일 폭격기를 물리치면, 덩케르크 해안에서는 그냥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패하면, 즉 조종사가 목숨을 잃으면 독일 폭격기가 나타나서 폭탄을 쏟아붓는다는 것.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육군은 욕을 한다. 폭격이 없는 것은 공군의 승리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고, 폭격이 있을 때는 공군이 욕을 먹는다. 결국 공군은 욕만 먹는다. 심지어 치열하게 싸우다 간신히 살아남은 조종사에게도 육군들은 “공군은 대체 뭐하는 거야?”라며 욕을 한다. 하지만 의기소침한 그 조종사에게 도슨의 한마디. “괜찮아. 내가 알고 있으니.” 이 말이 훈장보다도 더 귀중한 보상이 되었다.

이 장면에서 학교가 오버랩되었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동료 교사들의 신세가 공군 조종사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육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런데 교육은 그 과정이 순탄할수록 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저절로 성장한 것처럼 느낀다. 마치 평온한 덩케르크의 하늘이 저절로 주어진 것처럼 느껴지듯. 이렇게 교육은 티가 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교육은 문제가 생겼을 경우 바로 티가 난다. 그래서 교사들은 평소에는 투명인간처럼 무시당하다 문제가 발생할 때만 세상의 관심을 끈다. “선생들은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라는 말과 함께. 철밥통 타령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은 무명 교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최초의 대통령이지 싶다. 주요 일간지들의 “교사 돌려치기” 연례행사일이 된 스승의날에 세월호에서 순직한 기간제 교사를 기억하며 “스승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다하려 한다”고 정중히 말하는 모습에서 의기소침한 파일럿을 위로하던 도슨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 말이 의전 담당관이 짜놓은 각본이 아니라 대통령의 진심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세월호 참사는 보여주었다. 세상은 무슨 일만 생길 때마다 “선생들은 뭐하는 거야?”라고 손가락질하지만, 그래도 학교에는 공치사도 못 받을 “티도 나지 않는 일상의 교육”을 묵묵히 수행하는 교사들이 있음을. 그들 대부분은 참사가 아니었다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평범한 교사들이었지만, 대통령부터 선사, 해경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져야 할 담당자가 한결같이 썩어 문드러진 적폐의 종합판이었던 세월호 참사에서 자기 본분을 다한 유일한 공직자였음을.

대통령의 말처럼, 이번 정부만은 이 고마움을 잊지 않는 정부가 되었으면 한다. 교육의 개혁은 별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들 교실 안 무명 교사들의 어깨에 신바람을 일으켜 주는 것이다. 최근 교사들을 완전히 배제한 국가교육회의 구성안을 보니 무척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이 걱정이 다만 기우에 그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재원 |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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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미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소설가인 다나는 집에서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휘청,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진다. 이어 눈을 뜬 곳은 1815년 메릴랜드주의 숲속이다. 그곳에서 다나는 호수에 빠진 ‘백인 소년’을 구한 뒤 1970년대로 되돌아온다.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의 대표작 <킨>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후로 다나는 소년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1800년대로 끌려간다. 처음에는 몇 분, 그 다음에는 몇 시간, 그 다음에는 며칠,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수어달. 그렇게 1800년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나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흑인 여자’로서의 생존술을 익히게 된다. 즉 점차 노예로 생존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의 다나는 자유인이자 ‘엘리트 여성’이지만, 1800년대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건방진, 따라서 다소 위험한 여자 노예일 뿐이다.

버틀러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다나를 노예제가 가장 혹독했던 1800년대로 보내 그 시대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에서 ‘흑인됨’이란 무엇인지, 그 역사성을 탐구한다.

하지만 버틀러가 이런 이야기를 쓴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는 가정부 일을 하셨고, 나는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킨>을 쓴 이유는 이런 기분을 풀기 위해서였다. 결국 나는 그녀가 한 일들 덕분에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가 삶을 빠르게 개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좀 더 맹렬하게 부모에게 화가 나 있었던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노예제 시대로 보내고 싶었다.”

버틀러가 말하는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일’이란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이 꽃을 피웠던 시기, 민권운동가들이 노예의 삶을 살았던 윗세대에게 쉽게 격분하곤 했던 것을 의미한다. 어떤 민권운동가들은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부모세대를 진심으로 원망하고 저주했다.

버틀러에게 이런 태도는 맥락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다는 의미에서 순진하고 안일한 것이며, 동시에 자기혐오라는 점에서 무기력한 것이기도 하다. 버틀러의 작품과 수치심의 관계를 탐구했던 프랜 미셸은 ‘수치스럽다’의 또 하나의 표현인 ‘굴욕당한(mortified)’의 어원이 ‘죽음(mort)’임에 주목한다. 수치심을 안고 있는 자기혐오는 변화를 견인하기보다는 자기파괴적이다.

버틀러에게 선조들은 어떤 식으로든 버텨낸 자들이었다. <킨>은 다나가 어떻게 노예가 되어가는가, 그리고 다나가 구했던 ‘다른 백인들과는 조금은 다른 백인 소년’은 어떻게 ‘크게 다르지 않은 백인 노예주’로 성장하는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개인을 구조에 종속시키는 조건 안에서 그렇게 간단하게 발휘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나는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교섭하면서 인간으로서 생존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다나가 머무는 집의 다른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노예화된 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안에서 그 시간을 살아냈고 (혹은 결국 죽거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살았고) 그렇게 버텼거나 버티지 못했던 시간들의 중첩 속에서 역사적인 투쟁들은 불타오를 수 있었다.

여성 인터넷 개인방송 진행자(BJ)에 대한 살해 협박이 공공연하게 인터넷 방송을 타고,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을 볼거리로 만드는 영화가 제작된다.

탁현민 경질을 말했다고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경질 청원이 올라온다. 만만하지 않은 강도로 진행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을 보면서 버틀러의 교훈을 되새긴다.

여전히 우리는 각자의 맥락에서 각자의 ‘노예의 조건’을 산다. 그러나 우리의 발버둥이 아무리 하찮아 보일 때에도 제자리걸음 중인 것은 아니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함께 버텨야 한다. 버텨서 더 많은 목소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밀어낸 어떤 한계가 세상을 또 조금 바꾸어놓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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