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가끔 일이 많이 몰려 쉬지 않고 달리다보면 감기 몸살에 심하게 걸릴 때가 있다. 하루 종일 꼼짝없이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서 끙끙 앓다보면 걸렀던 식사부터 전반적인 생활습관까지 떠올리며 아픔을 자초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밀려든다. 반성을 하다가도 아픔이 길어지면 종국에는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찾아올까’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무한한 듯 누리던 내 몸에 대한 사용권은 없어지고 방구석에 웅크려 오로지 내 몸에서 나는 숨소리와 고열만 느껴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보이는 시간과 공간의 유한함. 우리의 존재는 이 유한함 속에서 또한 얼마나 미약하게 잠시나마 깜빡이는 불빛일까. ‘살아있음’을 다만 느끼고 있자면, 일상에 파묻혀 믿게 되었던 시간의 직선적 흐름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 아픔과 회복의 순환이 만들어내는 곡선의 아름다움에 어느덧 숙연해지기도 한다.

언젠가 신은 왜 굳이 사람에게 ‘아픔’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일까 의아해했지만, 아팠던 것이 나으면 같은 세상도 정말 더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픔이라는 것이 오히려 살아있음에 대한 신호이자 누구나가 경험할 수 있는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면, 우리 사회에서 아프다고 해서 가난해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플 수 있는데, 어떤 사회에서는 왜 아프면 가난이 찾아오게 될까.

세 모녀가 자살한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주택 반지하 방. 28일 찾은 이 집 텔레비전 위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찍은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 박은하 기자

몇 해 전 자살한 송파구의 세 모녀 사건은 오랫동안 아파서 일하기 힘든 큰딸과 취업준비하며 아르바이트하던 둘째딸, 그리고 식당에서 열심히 생활비를 벌어온 어머니 이야기의 끝이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삶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넘어져 다치게 되자 본격적으로 가난해졌다. 우연히 넘어진 것 같지만 아픈 몸으로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었다. 세상을 뜬 지 3년이 된 고 최인기님은 두 차례의 큰 수술을 받고 생계가 어려워져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파서 도저히 일할 수 없었던 그에게 2013년부터는 ‘근로능력 있음’으로 판정이 내려졌다. 정부는 그에게 먹고살기 위한 급여를 받으려면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부 수급자’ 자격을 부여했다. 아프다고 호소했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수급권이 박탈되기 때문에 그는 지하주차장 청소부로 일하다가 결국은 세상을 떠났다. 나라마저 그에게 일을 해야만 밥값을 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꼭 이렇게 극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내가 연구를 하면서 만나게 된 아픈 노동자들도 아프기 시작하면 일자리가 불안정해지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 때문에 일을 계속하다가 더 아프게 되기도, 또는 아예 일자리를 더 이상 구할 수 없으니 소득이 없어 결국에는 수급자가 되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동안의 많은 연구들은 아파서 가난해지는 경로보다 가난할수록 사람들이 더 아프게 되는 경로에 집중하였다. 특히 서구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한 연구들을 보면 아프면 가난이 찾아온다는 가설은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 가설은 아파서 일을 못하면 즉각적으로 소득이 단절되어 가난을 버티다 못해 자살을 선택하거나, 아파도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다가 정말로 죽는 사람이 있는 한국과 같이 슬픈 사회에서나 설득력이 있을 수 있겠다.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또는 노동력을 시장에서 교환해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가난에서 벗어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는,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상품화 지수가 높은 나라이다.

실제로도 한국은 국제적으로 비교분석해보면 이 상품화 지수가 높다. 반드시 일을 해야만 그나마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건강한 몸뚱이 자체가 가난을 피하기 위한 생존수단이 된다. 그리고 아픈 몸뚱이는 ‘하자 있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 의료보장 사각지대가 넓어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계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꼭 재난적 의료비 때문이 아니더라도 노동자가 먹고살기 위해 아픈데도 쉴 수 없고, 아파도 참고 일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러다가 정말 일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가파르게 가난의 굴레에 빠지게 되는 사회라면 의료비 이전에 그 사회의 소득보장정책에 구멍이 있는 것이다. 아픔이 자연의 섭리가 아니고 가난으로 향하는 비참한 저주가 되어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사회의 어느 부분은 심각하게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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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언저리였다. 친구가 책 한 권을 빌려줬다. 고인이 된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였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친구에게 술까지 사줬다. 이미 판매금지가 된 소설이었다. 깊은 밤에 읽었다. 문장을 읽는 맛은 좋았다. 책장이 쑥쑥 넘어갔다. 하지만 실망했다. 수위가 한참 낮았다. 이 정도는 이미 마스터한지 오래였다. ‘빽판’을 사러 다니던 세운상가에서 구한 일본 ‘야설’ 번역본은 물론이요, 서점에서도 구할 수 있었던 도미시마 다케오의 <여인추억>보다 못했다. 책을 반납하며 친구에게 얻어 마신 술을 뱉어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울러 자기도 실망했다는 친구의 자백을 이끌어냈던 기억도.

이 책을 구해보려 얇은 지갑을 열었던 이유는 이미 <즐거운 사라>로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걸 봤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단과 학계를 가리지 않고 마 교수를 천하의 색마로 몰아가지 않았는가. 검찰의 구속 이유가 무려 ‘음란문서 제조 반포’였으니 호기심 많은 청년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사는 판결문에 이렇게 남겼다. “이 판결이 불과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현재의 법 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예언이 실현되는 데는 10년씩이나 필요없었다. 그가 사면되어 복직한 1998년의 세상만 해도 충분히 그랬으니. 어쨌거나, 이 필화사건 이후 마광수는 작품으로 세상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아니, 이후 종종 “자기 검열 때문에 아무 것도 쓸 수가 없다”라 했다하니 그러지 못했다는 게 정확하리라.

작가 마광수

자기 검열이란 보이지 않는 상자에 스스로를 가두는 행위다. 신념에 의해 스스로를 검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외부적 상황에 의해 생겨난다. 한참 ‘청소년 유해 매체 판정’으로 음악계가 들썩였던 이명박 정권 시절에 가사에 술이나 담배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면 무조건 19금 판정이 내려졌다. 여성가족부가 담당했던 심의다. 해당 노래 하나에만 적용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문제는 그 음반에 통째로 주홍글씨가 찍혔다는 거다. 건전한(?) 노래도 청소년들이 들을 수 없는 웃기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행여 술이나 담배를 연상케 하는 단어라도 들어갈까봐 가사를 몇 번씩 들여다 보는 음악가들이 생겨났다. 200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직후, 한 음악가를 만났다. 멀지 않은 과거에 음악계에 꽤 높은 영향력을 가졌던 그는 갑자기 잊혀지다시피 했다. 어쩌다 내놓는 음악은 지루했으며 그나마도 조용히 흘러갔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지난 9년동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어. 내가 이런 음악을 해도 될까? 무슨 일을 당할까봐가 아니었어. 세상이 이런데 내가 만드는 음악을 사람들이 태평한 소리 한다며 손가락질할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 그의 말이 근거없게 들리지는 않았다. 이명박근혜 시대에 정신적으로 곤란함을 겪은 음악가들을 몇 알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다가 공황장애에 걸린, 사회적 메시지를 은유하던 음악가가 있었고 세월호 이후 일년간 작업했던 음반을 엎어버린 음악가도 있었다. 블랙리스트로 대변되는, 사회적 공기가 그들에게는 법과 제도보다 강력한 자기 검열의 칼날로 작용했던 셈이다.

판사조차 미심쩍어 했던 법 적용은 아득한 과거가 됐다. 여성가족부의 존재이유에 의문을 갖게 했던 무분별한 심의도 사그라들었다. 박근혜는 전 대통령이란 호칭 대신 수인번호로 불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기검열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법과 제도라는 공적 권력의 검열을, 배타적 진영논리의 그것이 대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잊을만 하면 SNS상에서 벌어지는 조리돌림이 ‘고발’과 ‘불편 유발’이라는 이름아래 욕망과 자유의 손발을 잘라내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감시탑이 사라진 자리에, 만인의 만인을 향한 패놉티콘(Panopticon·전방위 감시 체계)이 세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와 피아의 구분이 없는 건축물이다. 처벌과 금지에 대한 두려움 대신, 매장과 손가락질에 대한 공포가 표현의 물길에 스스로 둑을 설치하게 하는 것이다. 마광수 교수를 추모하는 글에서 종종 ‘시대를 앞서갔다’는 문장을 봤다. ‘사라’의 시대는 지금일까. 그 즐거움이 소설 속의 상징으로나마 존중받을 수 있었을까. 역시, 나는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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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가끔 세상일을 두 가지로 구별해 본다. 절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개인 ‘혼자서’ 좋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없다. 단독 드리블로 좋은 사회는 이룩될 수 없다. 좋은 사회를 원한다면 공유된 가치에 때로는 공통의 선을 위해 합의된 강제로 구성된 팀플레이가 필요하다.

절대적으로 ‘혼자서’ 해야 하는 일, ‘혼자서’ 할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 깨달음의 순간, 누가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과거 그 언젠가의 자신의 잘못을 알아채는 각성의 순간, 이 순간은 절대적으로 ‘혼자서’ 맞이해야 한다. ‘혼자서’가 자율성과 독립성을 의미하는 한 절대 슬픈 단어가 아니다.

어쩔 수 없다.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한다. 어찌 보면 죽음은 가장 인간다움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피해갈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은 죽음을 모르는 AI(인공지능)와 다름을 증명하기도 한다. ‘혼자서’와 ‘죽는다’는 단어가 결합하면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 죽음은 ‘혼자서’ 감당하는 일인가? 아니면 죽음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일까?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며, 죽은 사람은 이 글을 읽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이 글을 읽는 사람이나 죽음이 임박한 순간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대해 알 수 없다. 막연하게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세계에 잠시 머물러 있다 떠나는 게 죽음이라면, 그 떠남은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떠나는 길의 짝이 되어줄 수 없다.

이 세계를 사람은 ‘혼자서’ 떠나야 하지만 배웅은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떠난 사람은 ‘혼자서’ 떠나도, 남은 사람은 모여서 작별인사를 고한다. 함께하는 배웅을 장례라 한다. 장례식장을 장식하는 조화가 요란하지 않아도 된다. 대접하는 음식이 풍성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장례의 의미는 배웅하는 사람의 숫자에 의해 배가 된다. 절차에 들인 돈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혼자서’ 길을 떠난다 해도, 장례는 ‘혼자서’이어서는 안된다.

어느새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단어 무연사 혹은 고독사는 사실 고약한 단어이다. 섬뜩한 단어이기도 하다. ‘연’이 있었기에 세상에 태어났을 터인데 세상을 떠나는 순간 세상에 태어나게 했던 ‘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죽음이라니 어찌 고약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배웅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무연고 사망자는 늘어만 간다. 보건복지부에 의하면 2011년 699명, 2012년에는 698명, 2013년엔 894명, 2014년엔 1008명, 2015년엔 1245명, 2016년엔 1231명이 무연사로 죽음을 맞이했다. 고독사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한다. 혼자 죽는 사람은 대개의 경우 남자이다. 혼자 죽는 사람을 ‘혼자 죽는 남자’로 바꾸어 불러야 할 정도이다. 2016년의 무연고 사망자 1231명 중 남성이 894명으로 73%이고 성별 미상으로 분류된 9%의 110명을 제외하면 여자는 전체 무연고 사망자 중 17.7%에 불과한 220명이다. 국립중앙의료원이 집계한 2016년 전체 행려병동 사망자 77명 중 남자는 89.6%인 69명에 달한다.

<남자 혼자 죽다>라는 책을 펼쳤다. 왜 ‘혼자서’ 죽는 사람이 대개의 경우 ‘남자’인지는 이 책에 실린 유품정리업체 대표의 관찰적 해석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사실 할머니들은 혼자 살아도 옆집 할머니와 친하잖아요.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장례식 비용을 대줄 정도는 아니지만, 장례식에 와서 부조금을 내주는 정도는 되죠. 근데 남자들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경우가 많아요. 고독사하는 남자가 더 많은 데에는 아무래도 경제적인 이유가 크죠. 제가 다니는 현장들은 돈이 없어서 여기도 저기도 비빌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뜬 곳이에요. 주로 가난한 동네죠…. 반면 돈 많은 남자는 혼자 안 살거든요. 늦게 발견될 일이 없어요.”

‘혼자서’ 길을 떠나는데 그 길을 배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 이른바 ‘무연고(행려) 사망자 공고’가 한 달간 게시된다. 그 공고문은 매우 건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12조 및 시행령 제9조에 의거 무연고(행려) 사망자의 시체를 처리하고 동법 시행규칙 제4조에 의거하여 아래와 같이 공고하오니, 연고자는 사체(유골)를 인수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그 떠난 길을 배웅하는 사람이 없으면 화장 후 납골이 이뤄진 후 서울의 경우 서울특별시립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에 안치된다. 서울역에서 고향집을 오가는 703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저녁밥을 먹으러 버스 타고 오가던 그 길에 무연고 추모의 집이 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 가난의 부지런함과 습관으로 굳어버린 경직된 남성성이 합작으로 빚어낸 무연사의 유일의 흔적을 ‘혼자서’만 알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여기 적는다.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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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육부의 수능 개편 논의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생활기록부 문제이다. 수능의 절대평가 방침과 변별력 하락을 논외로 하더라도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데 생활기록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학생부 종합전형과 관련하여 나날이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선 학교현장에서 생활기록부는 학교 및 담당교사 그리고 담임교사의 성향 등에 따라 들쭉날쭉한 실정이다. 같은 학교에서조차 생활기록부 담당자에 따라 기재 방법이 달라 담임교사 사이에서 혼선이 빚어지며, 같은 학생이라도 교사가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기재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대학입시의 공정한 경쟁과 학교현장에 빚어지는 혼선을 줄이기 위해 다음과 같이 생활기록부 관리 방안을 제안한다. 첫째, 교원임용시험에 생활기록부 기재요령 과목을 신설하자. 현행 임용시험은 교육학과 전공 이론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 이에 따라 교사는 교육학과 담당교과에는 전문가지만 학교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업무에는 문외한이며 생활기록부 기재요령은 동료 교사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학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신규 및 저경력 교사에서부터 체계적인 생활기록부 기재요령을 학습하여 체질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둘째, 생활기록부 기재요령 연수를 활성화하자. 학교별로 평가 담당교원에 의해 생활기록부 연수가 자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결여되어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각 시·도교육청이 관련 분야 전문가를 초청하여 전 교원을 대상으로 직무연수를 의무적으로 이수하게 한다면 학교현장에서 발생하는 혼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사의 뜨거운 열정을 제안한다. 담임교사가 작성하는 생활기록부 한 줄은 학생의 미래를 일깨우는 등불임을 자각하여 생활기록부 작성에 책임의식과 사명감을 갖길 바란다.

<이정현 | 부여전자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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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6차 핵실험 소식이 전해지자 한반도는 순식간에 화약 냄새에 휩싸였다. 수소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항모강습단, 전략폭격기 같은 전쟁 이미지가 이 땅을 뒤덮고 있다. 차원이 다른 조치, 더 강력한 대응, 군사적 옵션, 자멸, 최고의 적의, 최강의 무기, 최악의 언어가 좁은 한반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을 빼앗는 이런 소란과 불안에도 북핵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가려지지 않는다.

이 실패는 북핵 문제를 외면했던 오바마 때문만도 아니고, 남북관계를 단절한 이명박·박근혜 때문만도 아니다. 한·미 모두의 실패이자 트럼프·문재인 대통령 공조의 실패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한국은 유화적 발언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책임을 전가했다. 대화 거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면 트럼프도 해당된다. 그는 군사적 조치를 언급하는 사이사이 대화론을 불쑥 꺼내곤 했다. 진짜 대화를 했다면 다른 경로가 펼쳐졌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대화론은 건성이었기 때문이다. 핵미사일 완성을 위해 달리는 북한을 멈춰 세울 만한 것을 그는 내놓지 않았다. 그만큼 무책임했고 무능했다. 한·미 연합훈련 축소인지 아닌지도 애매했고 그런 것조차 대화와 반대되는 신호들에 압도되었다. 보리에 쌀이 몇 톨 섞였다고 쌀이 되는 건 아니다. 북한도 보리와 쌀은 구별할 줄 안다.

해군이 북한의 해상도발에 대비해 5일 동해에서 함포 실사격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속초함, 광명함, 이병철함. 연합뉴스

이번 핵실험이 분명하게 드러낸 것은 트럼프가 김정은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8월22일 트럼프는 말했다. “김정은이 우리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북한을 유인할 만한 어느 것 하나도 내놓지 않은 채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편 것이다. 13일 뒤 긍정적인 일이 아니라, 수소폭탄 실험이란 부정적인 일이 일어났지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 정부는 그런 트럼프와 발을 맞추고 때로는 한발 더 나아가기도 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사드 조기 배치, 독자적 대북 제재, 핵잠수함 도입, 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 해제, 전술핵 검토와 같이 군사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북한이 핵보유국의 목표에 다가갈수록 대북정책 목표를 비현실적으로 높게 잡았다. 핵실험 유예도 어려운 판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를 하자고 트럼프와 합의했다. 중국의 도움이 필요할 때 한·미·일 협력을 강조, 중국을 자극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해명했다. “전략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전술적으로 일관성 있게 한길로만 갈 순 없다. 전술적으로 다양한 변화들이 다 전략적 목표에 기여하는 것이다.” 정부의 전략적 목표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핵동결이라고 하자. 그동안 정부가 한 것은 북한 도발 때마다 눈에는 눈식의 일대일 대응이었다. 그게 대북정책의 실체였고 전부였다. 그 때문에 전략적 목표는 하늘 높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임기응변적 조치들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도 전략적 목표가 없었던 게 아니다. 북한의 도발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충실하다 샛길로 빠지고, 목표에서 멀어지는 줄 몰랐을 뿐이다. 몸통이 꼬리를 흔든 게 아니라, 꼬리가 몸통을 흔들었다는 점에서 두 정부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중요한 순간에 전략적 목표를 놓쳤다는 점에서도 다르지 않다. 중요한 순간이란 말할 것도 없이 핵실험하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을 때다. 실현가능한 전략적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실천적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때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전쟁위기, 중첩된 안보위기의 수렁을 박차고 나갈 생각을 않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코앞에 닥쳤다. 전술적 변화라는 이름으로 우회할 시간이 없다. 트럼프가 북한 문제를 올바로 학습하고 김정은을 잘 다룰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위기에 솔직해져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낡은 명분, 비핵화라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버려야 한다. 선제적인 한·미 연합훈련 중단으로 대화 국면을 조성, 핵·미사일 실험 중단을 유도하고 핵동결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훈련은 이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핵 문제 해결 기회를 포기하고서라도 지켜야 할 어떤 숭고함이 훈련에 있는 걸까?

6차례나 실패를 반복한 대북정책이 있다면 그건 ‘실패한 방법’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7번째 실패를 각오해야 한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빠르면 북한 정부 수립 기념일인 9월9일 경험할 수 있다. 완성된 ICBM 발사일 수도 있고, 7차 핵실험일 수도 있다. 그것도 끝이 아니다. 8번째 실패가 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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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나라는 고대 중국 남방에 있던 나라다. 그래서 적월북원(適越北轅), 즉 월나라로 가면서 수레 방향을 북쪽으로 돌린다는 말은, 목적과 전혀 상반되는 행위를 비유한다. 허균은 잘 알려진 <유재론(遺才論)>에서, 온갖 이유로 길을 막아놓고서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한탄하는 상황을 통렬히 지적하는 말로 이를 사용하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오늘날 사람을 선발할 때 어머니가 천첩이거나 개가한 과부가 아닌지를 따지지는 않으니 허균의 시대보다 더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 그보다 훨씬 많은 조건들이 인재 선발의 기준으로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신 지역과 학벌, 정치 성향과 과거 전력 등으로 장벽을 쌓아두고, 이런저런 은원(恩怨) 관계로 얽힌 제한된 인맥 안에서 선발하려다 보면 인재가 없다는 한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새 정부의 인사 검증이 연달아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전 정부의 참으로 편협한 인력풀에 황당했던 기억이 오래지 않은데, 새 정부 역시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이른바 5대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깨끗한 인재를 고르다 보니 선발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해명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말 각자의 분야에서 책임 있게 일해 온 능력자들이 우리나라에 이렇게까지 없으리라고는 믿겨지지 않는다. 특히 과학계와 문화계의 인사에는 무지 혹은 의도된 왜곡이 개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다. 다시 내려진 대통령의 인사시스템 개선 지시가 유효하려면, 알게 모르게 형성된 장벽과 인맥은 없는지 냉철한 외부자의 시선으로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통치자의 가장 큰 덕목은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는 데에 있다. 시골구석이나 말단 병사, 혹은 항복한 적장이나 도둑 무리, 창고 수리공 등에서 탁월한 인재를 발탁했다는 그 옛날 성군들의 이야기를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이 시대 각 분야의 상식적이고 건강한 인재들이 폭넓게 검토될 수 있는 인사시스템의 구성이 정말 중요하다. 허균의 일갈처럼, 하늘이 준 인재를 버린다면 이는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하늘을 거역하고 온전할 수 있는 통치자는 없다. 내달리기에 앞서서 겸허하게 수레의 방향을 점검할 때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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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친박계’ 국회의원의 조카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 점수 조작으로 입사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등에 따르면 KAI에는 친박계 의원의 조카 외에도 전직 공군참모총장 지인과 지방자치단체 고위층 자제 등 10여명이 부정한 방법으로 입사했다고 한다.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 등을 생산하는 KAI는 고용이 안정적일 뿐 아니라 급여와 복지가 국내 최고 수준이다. 외형은 민간 기업이지만 국책은행이 최대주주이고 국방부 발주를 받아 군수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정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7월19일 (출처: 경향신문DB)

권성동 자유한국당 의원의 비서관 김모씨도 강원랜드에 부정하게 입사한 사실이 최근 감사원에 적발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김씨는 경력 미달이어서 애초 서류 심사 대상도 아니었지만 33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 지금도 재직하고 있다. 권 의원은 “전혀 관여한 바 없다”고 밝혔지만, 강원랜드가 기본 자격 요건도 갖추지 못한 일개 의원 비서관에게 왜 이 같은 특혜를 베풀었는지 궁금하다. 전임 정부에서 부총리를 지낸 최경환 의원은 박철규 전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 등에게 지인의 취업을 청탁한 혐의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최 의원의 지인을 특별채용한 박 전 이사장과 권태형 전 운영지원실장은 이미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KAI나 강원랜드, 중진공 등은 대학생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통하는 곳이지만 권력자 주변 사람이나 기득권층은 연줄을 활용해 간단히 입사했다. 이들이 자리를 차지한 탓에 실력 있는 ‘흙수저’ 자제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채용 비리는 권력자와 기업이 뇌물을 주고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잖아도 청년 실업난이 심각하다. 채용 비리가 근절되지 않으면 젊은이들의 박탈감과 좌절감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공정한 일자리 경쟁은 공정 입시와 더불어 한국 사회 최후의 안전판이다. 검찰은 채용 청탁을 한 사람이나 받아준 사람을 모두 파헤쳐 엄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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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어제 고조되는 북핵 위기를 타개할 방안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5대 긴급 제안’을 내놓았다. 문재인 정부를 향해 북한에 특사를 보내 조건 없는 대화를 시작하고, 6자·4자회담 등 다자회담을 재개하면서 중국 등 주변국과의 외교를 강화하라고 촉구했다. 청와대 외교안보 참모들의 전면적 쇄신도 요구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도 정부 비판에만 열을 올리는 다른 야당들과 달리 건설적인 비판과 함께 대안을 제시했다.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야당의 모습이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 5일 오전 정론관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5대 제안 기자회견을 열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임시배치를 중단하고 지난 정부 안보 적폐세력의 밀실 외교에 의한 사드 조기배치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 대표가 “강대강 대결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과감한 대화 제안에 나서야 한다”고 한 것은 현실을 정확히 본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겠다고 선언해 놓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원칙도 전략도 없이 오락가락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를 이끌어나가기는커녕 그에 휘둘리며 북한이 도발할 때마다 대응수위만 높여왔다. 북한의 핵동결과 한·미 연합훈련 축소·전략자산 배치 철회라는 이른바 ‘쌍중단’을 해법으로 제안한 것도 타당하다. 주한미군사령관이 최근 종료된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 때 북한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며 훈련을 축소했다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이 꺼리는 한·미 군사훈련을 축소하고 나아가 일부 훈련을 중단함으로써 북한의 핵동결부터 이끌어내는 방안은 현실적이다. 실현불가능한 전술핵 재배치 등 강경 입장만 관성적으로 되풀이하는 보수 야당과 대비된다.

정의당은 그동안 문재인 정부의 인사와 정책에 협조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난맥상을 매섭게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협조할 것은 협조하되 비판할 것은 냉정하게 비판하는 자기 원칙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정의당의 시의적절한 제안을 받아들여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여·야·정 평화협력체 구성 제안도 즉각 시행할 필요가 있다. 대화를 통한 과감한 해법이 필요하다는 정의당의 제안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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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북핵 대응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큰 틀의 전략과 정교한 실천계획을 마련해 대응해도 모자랄 판에 현안에 대한 임기응변식인 데다 그나마 군사적 대응 위주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에 탄도미사일 발사나 고성능 폭탄 투하 훈련으로 맞대응하는 게 대북정책의 전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북한의 도발적 행태에 대한 임시적 조치일 뿐 적절한 북핵 문제 해결책은 아니다. 북핵 도발에 대한 도덕적 응징이나 분풀이는 될지 몰라도 북핵 문제를 푸는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부의 북핵 대응과 관련해 최근 현안으로 등장한 것이 전술핵 재배치와 미사일 탄두중량 제한 해제다. 송영무 국방장관이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처음 공개 거론한 전술핵 재배치 전략은 소규모 핵무기를 주한미군에 배치해 북핵과 이른바 ‘공포의 균형’을 이루자는 것이다. 송 장관은 그제 국회 답변에서도 “깊이 검토해봐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야당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라는 당초 설명과도 다르다.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회원국 대사들이 북한의 6차 핵실험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러나 북한 김정은 정권의 비이성적 핵위협을 고려하면 과연 “공포의 재균형” 전략이 먹힐지 의구심이 든다. 1991년까지 미국이 한반도 전술핵을 배치했을 때 북한이 그 핵을 두려워했다면 핵개발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술핵 재배치 방안은 북핵 대책으로서의 실효성은 떨어지면서도 한반도 비핵화 명분 상실과 북한 핵무장 명분 제공, 동북아 핵경쟁 촉발 등의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정부 일각에서는 전술핵 재배치 검토를 통해 이에 반대하는 중국으로 하여금 북핵 해결에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도록 하는 효과를 노릴 수 있지 않으냐고 말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오히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사태처럼 북핵 대응 효과는 없으면서 경제보복만 당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미사일 탄두중량 제한 해제 역시 적절한 북핵 대응책인지 의문이다. 500㎏으로 묶여 있는 미사일의 탄두중량 제한을 풀어줘 파괴력을 높이자는 것이지만 이것이 북핵 억지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다. 탄두중량 제한 해제는 사실상 미사일 사거리 연장 가능성을 의미하지만 이는 좁은 한반도 국토를 고려할 때 사실상 불필요한 일이며 중국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 정부는 대북 제재에서도 강경으로 치닫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통화에서 “최고 수준의 제재·압박”을 거론하더니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는 “차원이 다른, 북한이 절감할 수 있는 강력하고 실제적인 대응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언어에서 대화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있다. 물론 전반적인 북핵 로드맵에 따라 강경·온건책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정부의 강경 대처에서는 전반적인 북핵 대응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위기관리 능력도 미흡하다. 제재와 대화의 병행이라는 문재인 정부의 북핵 정책 원칙 자체가 무너진 것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정부의 단선적 북핵 대응이 북핵 위기라는 전체 판을 보지 못한 결과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북핵 문제 전반의 흐름을 지켜보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지 못한 채 눈앞의 현상에만 급급하다 보면 북핵 사태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이것이 외교안보 라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제 대안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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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높고 들판은 풍요로운 한반도의 가을, 지금 이곳에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수십년 동안 전쟁의 위협에 무감각해진 국민들은 사뭇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내면에 불안과 공포가 커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날로 험악해져가는 북·미관계에 속수무책인 정부에 대한 비판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오래전 돌아가신 조부께서는 1970~1980년대 남북관계가 악화될 때면 얼른 짐을 싸서 고향 부여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제아무리 참혹한 전쟁이라 해도 재래전을 떠올리던 그 시절이 차라리 그립다. 21세기 첨단 전쟁수단 앞에 시골 고향이라고 해서 서울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결과는 한반도의 초토화고 우리 모두의 공멸이다.

왜 이토록 극단으로만 치닫는 것일까? 핵을 통해서 체제보장을 받고 존속의 길을 모색하려는 북한과 자기들 중심의 세계질서를 위협하는 ‘악의 축’을 용납할 수 없다는 미국의 대립이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지난 10년간 경색되어온 남북관계로 대화채널이 완전히 붕괴되어 ‘코리아 패싱’이라는 유행어가 나올 만큼 속수무책이 된 것이야말로 사태 악화의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대화의 채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정부에 아이들의 목숨과 미래를 맡겨야 하나?

도발, 무력시위, 긴장고조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대화뿐이다. 일방적이고 논쟁적인 선언들이 오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6차 핵실험 이후 미국은 원유공급 중단과 북한노동자 송출금지 등 더 강력한 대북 제재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우리 정부도 이에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북한은 더 강한 도발을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북한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사고틀이다. 북한 정권은 ‘미국이 언제 무력으로 북한을 괴멸시킬지 모른다’는 공포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고 이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해왔다. 핵이 본질이 아니라 체제보장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북한은 웬만한 제재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로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소위 ‘고난의 행군’이 단적인 예이다. 인류역사상 그 정도 극한의 상황에서 붕괴되지 않은 정권은 없었지만, 북한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화의 통로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초토화의 위험에 처한 한반도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갈등은 서로 다른 집단의 의지와 목표가 충돌할 때 발생한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사고틀을 이해해야 한다. 사고틀을 이해하면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대립되는 당사자 간에 승리와 패배(Win-Lose), 패배와 승리(Lose-Win)의 결과를 예측하고 서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는 위 두 가지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쪽 모두 패배(Lose-Lose)하거나 양쪽 모두 승리(Win-Win)하는 극단의 시나리오만이 존재한다.

현재의 남북이나, 북·미 상황이 이대로 치닫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Lose-Lose’ 게임이다. 남한도 북한도, 북한도 미국도 패배하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Lose-Lose’ 게임의 참혹한 결과를 예측할 정도의 두뇌가 있는 당사자들이라면 윈-윈(Win-Win) 시나리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남한과 북한이, 북한과 미국이 서로 얻고자 하는 것을 모두 얻는 ‘윈-윈 게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하는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한다. 대화는 실무급이든 정상급이든, 휴전선에서 하든 제3국에서 하든 직접 당사자 간에 면 대 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마주 보고 상호작용을 해야 서로의 의중을 알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 상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엔으로 가기 전에 ‘남·북·미·일·중·러’가 참여하는 2+4 회담을 통해 윈-윈 시나리오를 만들어보는 것은 너무 한가한 이야기일까?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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