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책읽기는 닮은 점이 많다. 그것은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시간 보내기이며 달콤한 휴식이며 동시에 재충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여행과 책읽기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다. 순식간에. 그리고 다른 세계로 이동한 우리는 잠시나마 우리가 떠나온 현실 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 때문에 얻게 되는 어마어마한 효과가 있다. 새로운 삶의 전망을 얻게 된다는 것. 독서와 여행을 통해 말이다.

세상에 여행과 독서의 힘으로 인생을 바꾼 수혜자 그룹이 있다면 나 자신이야말로 그 그룹의 중심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사표 쓸 각오로 받아낸 1년 무급 휴가로 여행과 독서를 병행한 덕이다. 틀림없이 그 덕이 맞다.

거대한 나무뿌리에 깔리다시피 한 타프롬 사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 경험 이후 한참을 헤매긴 했지만 결국 나는 잡지사 기자 생활을 접고 원하던 대로 가끔 글 쓰고 수시로 몸을 놀려 노동하는 시골의 민박업자가 됐다. 하루 두 번 개와 함께 시골길을 산책하며 더 이상 감옥 같은 마감과 야근은 내 것이 아니다 되뇌는데 그러면 그때마다 얼마나 심장 뻐근하게 행복한지 모른다.

바로 그 여행과 독서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 같은 걸까? 여권과 책만 챙기면 비행기 탈 준비가 다 된 것 같다. 대체로 여행가방 안에 무슨 책을 넣을지 고민하며 짐 싸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민한다. 이걸 넣을까? 아니 뺄까? 혹시 너무 무거울까? 빼면 나중에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까? 읽을 게 없어서 손가락 빨며? 혹시 너무 심심해서 태국어로 쓰여 있는 음료수 병에 붙은 성분 표시 안내문 같은 걸 읽게 되는 건 아닐까? 비행시간이 총 9시간이고 그중 공항에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반인데, 걱정하며…. 늘 그런 식이다, 비행기 타기 전까지.

그런 과정을 통해 간택받은 책은 총 6권. 그중 2권은 우리의 여행 목적지 앙코르와트에 대한 것이고, 남편과 나의 책이 각각 2권씩이었다. 그중 내가 고른 책은 LP에 이어 카세트테이프로 음악 듣기가 다시 유행하고 있는 지금의 포스트디지털시대를 이해하기 딱 좋은 책 <아날로그의 반격>(데이비드 색스, 2016년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과 주진우 기자의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저수지를 찾아라>.

그 책들과 함께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왔다. 인천공항이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이번 추석 연휴에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는데 우리는 바로 그 직전 여유롭기 그지없는 비수기에 여행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앙코르와트가 아닌가?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한 번도 활짝 꽃피워 보지 못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앙코르와트의 돌틈 속에 봉인하는 모습을 본 이래로 늘 그곳에 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남편과 나, 우리 두 사람이 꼽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첫 번째 여행지였다.

과연 좋았다. 컴퓨터도 포클레인도 없던 고대의 인간이 순수한 노동력만으로 그런 엄청난 보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인간이 가진 위대한 창조력과 신비를 느끼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1860년 밀림을 탐험하다 우연히 앙코르와트를 발견한 프랑스 식물학자 앙리 무오의 말처럼 이곳의 건축물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이 세운 것보다 더 장엄’하고, 거의 노예 상태에 가까웠을 수많은 도공들이 새긴 그 많은 조각품은 하나같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고 창조적이어서 미켈란젤로가 눈곱만큼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가져온 책도 어쩜 그리 앙코르와트와 안성맞춤이던지. <아날로그의 반격>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디지털이 줄 수 있는 것은 현실세계의 풍성함을 흉내 낸 모사에 불과하다.”

맞다. 아무리 실감나는 영화를 본들 알 수 있겠나? 컴퓨터 게임 같은 액션영화 <툼레이더>를 아무리 여러 번 본다 해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있겠나? 거대한 스퐁나무들이 뿌리를 내려 버려진 채 무너져 가고 있는 사원들을 움켜잡고 있는 현장 앞에 서 있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관능적인 그 많은 압사라 무희들의 부조작품을 실재하는 장소에서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경험하는 일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그렇다면 앙코르와트를 여행하는 내내 우리와 함께한 <이명박 추격기>는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처음엔 몰랐다. 내가 왜 하필 이 책을 들고 캄보디아에 왔는지. 그런데 여행하면서 알았다.

“앙코르 왕조의 수리야바르만 2세는 자신의 왕권을 신격화하기 위해 앙코르와트를 지었어. 신에 가까워지고 싶은 그의 야망이 건축과 예술을 집대성한 이런 걸작을 만들게 한 거지. 그런데 이명박은 돈에 대한 야망으로, 그것도 그와 그 주변 인물들만 벌 수 있는 돈을 위해서 국민의 대다수에게 엄청난 해악이 되는 4대강 사업을 했어. 수리야바르만은 인공저수지 위에 앙코르와트를 지었지만 이명박은 저수지에 돈을 감춰뒀지. 우리만의 앙코르와트를 지을 수도 있는 엄청난 돈이야. 그걸 찾아내야 해. 백년, 천년 뒤의 후대를 위해서도. 앙코르와트든 이집트든 세계 어디에 있든 주진우의 책 <이명박 추격기>를 사서 읽어야 하는 이유지.” 집에 돌아가면 3권 더, 아니 가능하면 더 많이 이 책을 사야겠다며 내가 남편에게 한 말이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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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산성에 갇혔고, 역사는 굴종을 기록했다. 1636년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의 치욕적 역사를 보여준다. 쓰러져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떠오르는 청나라와의 실리 외교를 압도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불과 40여년 후, 조선 민중은 또다시 외세의 침략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왕과 봉건 지배층의 무능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백성들은 또다시 ‘오랑캐’의 발굽에 짓밟혔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역사는 굴종을 기록했지만, 영화는 치욕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사유한다. 영화 <남한산성>은 조선의 지배계급이 자초한 이 굴욕의 역사를 이른바 ‘객관적 시각’으로 묘사한다. 척화파 김상헌도, 주화파 최명길도 모두 자기 나름대로 할 말은 있다는 식이다. 김훈의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 묘사는 영화의 사실성을 높여주긴 한다. 전쟁과 평화 사이의 긴박한 대립 구도 속에서, 서로 마주치는 세력과 인물들을 중립적이면서도 다면적으로 묘사한다. 영화 속에서 김윤석의 단호함과 이병헌의 절절함은 불꽃 튀는 말과 논리의 향연이다. 여기에 박해일이 연기한 인조 임금 역시 비굴하고 무책임한 캐릭터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누구의 편에서 역사를 사유하는가? 역사의 객관적 기록과 영화의 상상적 진실은 다른 문제이다. 원작 소설가 김훈도, 영화감독 황동혁도 모두 대답을 회피한다. 물론, 그것은 궁극적으로 독자와 관객의 몫이다. 다만, 영화 <남한산성>이 문제의 본질을 반쯤 가리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인조를 비롯하여 김상헌, 최명길 등 당시의 봉건 관료들은 광해군의 개혁정치와 자주적 중립 외교를 무너뜨린 반란의 주역들이었다. 척화파든 주화파든 사실은 썩어가는 조선의 봉건 왕정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계층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장장이 ‘날쇠’(고수)와 부모 잃은 어린아이 ‘나루’(조아인)의 캐릭터가 주변인처럼 겉돌고 있다는 사실은 아쉽다. 근왕병을 요청하는 날쇠의 활약은 허무하게 좌절된다. 나루는 그저 순진함과 귀여움의 캐릭터로 소진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조는 왕궁으로 돌아오고, 날쇠와 나루는 대장간으로 돌아간다. 비굴한 왕은 권좌를 유지하고, ‘무지렁이’ 백성들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엔딩신은 그 의도와 달리, 역사적 패배의식과 냉소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역사 영화는 과거를 현재화한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맥락에서 소환된다. 영화 <남한산성>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과 겹쳐진다. 400여년 전, 조선의 사대주의 정책은 명나라에 대한 군신의 의리와 명분에 집착했다. 새로이 대륙의 주인으로 떠오른 청나라에 대해서는 무지와 무시로 일관했다. 실리적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자 했던 광해군의 의지는 인조반정으로 무너졌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조선의 봉건 지배층은 외세의 힘 앞에 철저히 농락당했다.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도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쪼갰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고 미·소 냉전체제가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를 외치면서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핵무기 개발을 통해 미국과 맞서고 있다. 한반도는 여전히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넘어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작가 한강이 말했듯이,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

이른바 ‘한·미동맹’의 깃발 아래 강행된 사드 배치로 인해 중국 무역에서 이미 8조5000억원의 경제 손실이 발생했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편향된 정책은 미국 군수업체들의 무기 장사에 휘둘릴 뿐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주변 강대국들의 힘 관계를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미국과 일본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실리적 등거리 외교와 자주적 중립 노선이 절실하다. 이것이 400년의 세월을 건너 영화 <남한산성>이 던져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정헌 중부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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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정용이…? 너, 정용이 맞지?”

그녀가 얼굴을 좀 더 앞쪽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정용은 어떡하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고개를 숙여보았지만, 더는 피하긴 어려워 보였다. 손님들이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그녀 주위로 중년 여자 두 명이 다가와 참견했다. 그녀는 그녀들을 이모라고 불렀다.

“응. 대학 동기를 여기서 만나네.”

“그래? 그럼 특별히 큰 놈으로 주시겠네. 호호호.”

똑같은 선글라스를 쓴 중년 여자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큰소리로 웃었다. 정용은 그 앞에서 정말이지… 오징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말없이 정용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오징어는 타닥, 소리를 내며 동그랗게 제 몸을 말기 시작했다.

*

단군 이래 최장 연휴라더니 그만큼 아르바이트 자리도 많았다. 인터넷 알바 사이트에는 마트 판매원에서부터 택배 배송사원, 청과물 상하차 아르바이트, 심지어는 송편 포장 사원까지 그야말로 일자리가 알밤처럼 쏟아졌다. 정용과 진만은 그중 고속도로 휴게소 판매사원 아르바이트를 골랐다.

“딱 이거네. 시급 만 원!”

진만이 고른 고속도로 휴게소는 서해안 고속도로 목포 방향 고창 고인돌 휴게소였다.

“여긴 내가 몇 번 가봤는데 차도 별로 안 밀리는 곳이야. 완전 꿀 알바라는 뜻이지.”

“한데 시급을 왜 이렇게나 많이 주지?”

정용이 같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갸우뚱거렸다.

“그건 뭐…. 명절이니까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자는 뜻이겠지.”

진만은 그렇게 짐작했지만, 그런 건 <반지의 제왕> 속 호빗 마을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근무 첫날부터 깨닫고 말았다. 직원 전용 미니버스를 한 시간 가까이 타고 도착한 휴게소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자동차가, 관광버스가, 단군 할아버지 수염처럼 길게 꼬리를 물고 휴게소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애초 진만과 정용은 둘이 함께 맥반석 오징어구이 코너에 배치되었지만, 델리만쥬 코너 아르바이트생이 잠적하는 바람에 진만은 그쪽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델리만쥬 코너는 그래도 의자에 앉을 수 있었지만, 맥반석 오징어코너는 그렇지 못했다. 양손에 기다란 집게를 든 채 계속 일어서서 오징어가 타지 않게, 너무 말리지 않게 뒤집어주고 펴주어야 했다.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면 정용은 집게를 치우고 목장갑 세 장을 겹쳐 낀 손으로 오징어를 구웠다. 그래도 뜨겁지 않았다.

“너희들 휴게소에서 제일 긴장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아?”

휴게소 2층에 있는 직원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최 주임이라는 사람이 말을 걸었다.

진만과 정용이 멀뚱멀뚱 말없이 바라보자, 그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관광버스. 관광버스가 들어올 때만 조심하면 돼.”

진만이 예의상 그건 왜 그렇죠, 물으니 바로 이런 답이 돌아왔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취해 있거든. 여기가 휴게소인지, 산 정상인지, 헷갈리는 사람들이야.”

실제로 정용은 연휴 셋째 날엔가, 관광버스에서 내린 술 취한 할아버지 한 분한테 말도 안 되는 호통을 듣기도 했다. 정용의 오징어코너 옆에 한참 동안 뒷짐을 쥔 채 서 있던 할아버지는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너, 이거 맥반석 아니고 고인돌이지! 이놈아, 천벌을 받아! 어디 오징어를 구울 데가 없어서 고인돌에다가 구워!”

아이 씨…. 정용은 그때는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할아버지, 저 추석인데 지금 여기서 하루 아홉 시간씩 꼬박 서서 오징어만 굽고 있거든요. 어떤 아주머니들은 오징어를 구워주면 오징어가 작아졌다고, 바꿔치기한 거 아니냐고, 따지기도 해요. 근데 제가 무슨 티라노사우루스입니까? 왜 제가 고인돌에다가 오징어를 구워요? 정용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묵묵히 오징어만 구웠다.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든 말든 사람들은 계속 그 앞에 줄을 섰기 때문이다.

그런 나날 중에 대학 시절 첫사랑까지 만난 것이었다. 주위에 고인돌이 있으면 그 아래라도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 정용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

밤 열 시, 다시 광역시로 나가는 퇴근 미니버스에 탔을 때, 진만이 물었다.

“아까 걔…. 선아 맞지? 너랑 잠깐 사귀었던 황선아.”

정용은 말없이 눈을 감은 채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진만에게선 바닐라 향이 났다. 정용 자신에게선 오징어 냄새가 났다. 정용은 오징어처럼 둥글게 몸이 말리는 것 같았다.

“걔, 많이 이뻐졌더라. 아까 보니까 둘이 무슨 말도 하는 거 같던데. 걔가 뭐래?”

반숙으로 구워 달라고 하더라. 이게 무슨 맥반석 달걀도 아니고. 한데도 정용은 그녀에게 ‘어, 그래’라고 짧게 대답했다. 정용은 그 얘기를 진만에겐 하지 않았다. 5년 만에 만난 옛 연인 사이의 대화치곤 어딘지 어색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녀를 만날 기회가 또 올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그녀는 옛 애인을 떠올리면 오징어부터 먼저 생각나겠지. 반숙 오징어. 그 생각이 정용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저기 아까 최 주임이 그러는데, 연휴 끝나고도 계속 일하려면 미리 말해달라고 하더라. 난, 이거 괜찮은데. 델리만쥬. 약간 프랑스 느낌 나지 않니?”

“너나 해.”

정용은 짧게 말하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미니버스 창문 밖으로 추석을 막 보낸 보름달이 쓸쓸하게 떠 있었다. 단군 이래 최장 연휴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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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라, 메르스, 사스 등 신종 전염병들이 전 세계에서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바이러스에는 국경이 없으며 전염병은 지구촌 어디든 강타할 수 있다. 최근 우리는 지카 바이러스가 아시아 대륙에서 태평양 섬들을 건너 남미로 확산되고, 치쿤구니야가 인도양 리유니언섬에서 유럽, 카리브해, 북미와 남미 지역까지 전파되는 것을 목격했다.

아라비아반도 낙타에서 유래된 메르스가 한국처럼 멀리 떨어진 선진 경제 국가에 보건 위기를 초래할 것으로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염병은 인명 손실과 고통 이외에도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야기할 수 있다. 2003년 사스 전파는 총 400억달러,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사태는 60억달러, 한국의 메르스는 100억달러의 경제적 피해를 초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경제적, 인적 비용 중 상당 부분은 줄일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종 병원체의 위협을 공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대비책을 강구하라는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위기가 닥치기 이전에 백신 개발에 착수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를 인식한 각국 정부 및 자선단체 등 지원 기관들은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PI)의 설립을 선언했다.

이들은 대상 질병에 적합한 유망한 후보 백신의 임상 개발을 사전에 지원해, 신종 전염병 발생 초기에 백신을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바로 시범 접종할 수 있도록 현재까지 CEPI에 총 6억2000만달러를 출연했다.

올해 초 CEPI는 우선순위가 높은 3가지 바이러스인 메르스, 라싸열과 니파 바이러스 예방백신을 개발하고자 연구비 지원 신청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기존에는 인식하지 못했거나 새로운 신종 전염병에 대한 신속한 백신 개발을 가능케 하는 백신 기반기술의 개발을 돕기 위해 각국의 백신 기업과 연구기관 등으로부터 2차로 연구비 지원 신청을 받고 있다.

현재 독일, 일본, 캐나다, 호주, 벨기에, 노르웨이, 빌앤드멜린다게이츠재단과 웰컴트러스트재단 등이 CEPI에 출연하는 투자자로 참여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2억5000만유로에 달하는 현물 지원을 약속했으며, 세계 최대 백신 생산국인 인도도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는 고무적인 출발이지만, 위협이 되는 병원균을 신속히 파악해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백신과 백신 기반기술 개발을 지원하며, 필연적인 전염병 발발에 대비해 백신을 비축하겠다는 야심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

이는 백신 개발 분야에서 한국의 전문성이 급성장하고 있음을 주목한 CEPI가 투자자 겸 파트너로 한국의 참여를 희망하는 이유다.

CEPI에 참여할 경우 한국이 얻게 되는 혜택은 무엇일까? 한국은 백신산업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세계화하고, 한국의 대학과 생명공학 기업들은 CEPI가 재원을 지원하는 개발 프로젝트에서 연구비 확보 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 CEPI에 참여하게 되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신종 전염병 관련 의제를 주도하고 글로벌 리더십을 보여줄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된다. 이러한 글로벌 리더십의 기반 위에 정부의 한국 내 추가 투자가 이루어지면 생명공학 전 영역에서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크게 제고될 수 있다.

CEPI에 동참으로써 한국은 신종 전염병에 대한 전 세계의 집단적 방어(collective defense)에 기여하고, 국내 및 국제 생물안보에 이바지하며, 세계 보건에 대한 기여를 제고하고, 동시에 자국 백신 및 생명공학 산업을 강화하고 지원할 소중한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제롬 김 국제백신연구소(IVI) 사무총장·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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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오래전 한 유명 스님의 말씀에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나 싶었죠. 게다가 사람들이 심각하게 논하기까지 하니 이상할 수밖에요. 아직도 심오한 불교 철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산을 산이라, 물을 물이라 부르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됐죠.

미국엔 지금 한창 역사 논란이 뜨겁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탓에 안 그래도 악화되던 인종차별 문제가 더욱 날카로워졌습니다. 인종차별 문제가 트럼프 지지자와 반대자를 나누는 잣대와 겹쳐지며 정치 문제 전반에 떠올랐죠. 남부 연합군 장군들의 동상이 철거되는 것은 그 여파입니다. 철거 반대자는 트럼프 지지자와 많이 겹칩니다.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를 둘러싼 전쟁으로 남부 연합군이 패하며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남부의 정치,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흑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부활했죠. 백인우월주의도 당당히 돌아왔습니다. 큐 클럭스 클랜(KKK)이라는 백인 기독교 테러단체가 극성을 부리고 남부 연합군 장군들의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상들이 남부의 역사를 기린다기보다는 부활하는 백인우월주의를 대표한다고 봐야 하는 이유죠. 자연 흑인과 인권단체들이 철거를 요구해왔고 요즘 들어 지방정부가 이를 수용하는 분위기입니다.

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하죠. 노예제는 좋은 일이 아니지만 남부는 노예제가 아니라 주정부 주권을 위해 싸웠다. 게다가 동상을 없애는 시도는 역사를 지우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주정부의 주권은 노예제를 지키기 위한 주권이었죠. 게다가 동상을 치운다고 그들이 말하듯 역사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원래 동상은 기억을 넘어 기리고 자랑스러워하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동상을 지키자는 이들은 그 과거를 기리고 내심 그리워하는 셈입니다. 연방군의 승리, 노예제 폐지도 중요하지만, 남부의 전통도 중요하다는, 산은 산이지만 물도 산이라는 억지입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라는 억지도 있습니다. 최근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이 관제 데모에 동원할 목적으로 우파 단체를 지원한 정도가 아니라 직접 만들었던 정황이 파악됐습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뿐인가요. 국정원, 군은 댓글부대를 조직해 여론을 조작했고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기관들은 공작과 음해로 민주체제의 근간을 손수 흔들었습니다. 부실 산업으로 수조원은 우습게 날렸고 블랙리스트로 언론과 개인의 자유마저 짓밟았습니다. 4대강사업을 통해 한반도 생명줄을 끊어놓았고 개성공단을 폐쇄해 평화 기반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아직도 이어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대한 속보에 탄식도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가 고공행진을 하는 이유입니다. 거기에는 적폐청산에의 요구가 있죠.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이를 정치보복이라 하고 있습니다. 국정원 개혁을 개악이라고도 했죠. “정치보복의 헌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 굿판”이라며 적폐청산에 대응하기 위해 대책특위까지 만들었습니다. 내 잘못은 잘한 것이고, 그 잘못을 고치려는 게 잘못이라는 파렴치한 억지입니다.

짐작하건대 그 적폐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일수록 목청을 높이겠죠. 그러니 쉽게 물러서지도 않을 겁니다. 어디 메모라도 해두고 선거 때 확인해야겠습니다. 항의 전화도 괜찮겠죠. 이번 가을엔 성철 스님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생각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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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어제 긴급 언론 브리핑을 열고 “청와대 안보실 전산 파일에서 세월호 사고 당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된) 상황보고 일지를 사후에 조작한 정황이 담긴 자료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최초 보고시간이 2014년 4월16일 오전 9시30분이었는데 6개월 뒤 이를 오전 10시로 30분 늦춰 보고서를 재작성했다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 내 캐비닛에서 전 정부 청와대가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을 무단으로 개정변경한 자료도 나왔다고 한다. 박근혜 청와대가 세월호 침몰에 부실 대응한 책임을 면하기 위해 사후에 조직적으로 기록을 조작하고, 법규를 무단 수정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 당시 청와대는 세월호 침몰과 같은 재난사고에서 대통령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했으니 30분 늦춘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30분은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한 때로 1분, 1초도 흘려보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시간이었다.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해 신속한 구조를 지시했다면 희생자 상당수를 구출할 수도 있었다. 박 전 대통령 측은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변론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10시에 최초 보고를 받았고, 10시15분에 첫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침몰 상황을 접하고 45분 뒤 구조지시를 하고도 15분 만에 지시를 내린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또 박 전 대통령의 청와대는 세월호 사고 3개월 뒤인 2014년 7월 말 국가위기관리 지침 중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종합관리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한다’는 내용을 ‘안보 분야는 안보실, 재난 분야는 안전행정부가 담당한다’고 바꿨다. 법제처장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정상적으로 고쳐야 하는 대통령 훈령을 무단 수정했다. 세월호 사고 후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재난 컨트롤타워는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아니고 안전행정부’라고 주장한 것에 맞춰 법규를 고친 것이다. 일개 사기업도 해서는 안될 일이 국정의 최고사령탑에서 저질러졌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번 사안을 심각한 국정문란 행위로 보고 수사의뢰하겠다는 청와대 판단은 온당하다. 기록 조작은 왕조시대의 국왕도 감히 하지 못했다. 이번 조작 사건의 발표 시점과 배경에 토를 달 여지가 전혀 없다. 다른 어떤 조작이 또 있을지 모른다.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 때 헌법재판관 다수는 세월호 부실 대응에 대한 책임까지 묻기 어렵다고 봤지만, 그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런 국정농단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수사를 통해 철저하게 진실을 밝히고 김관진 안보실장 등 관련자들을 일벌백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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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조선시대 3대 세금은 땅에서 내는 전조, 노동력을 제공하는 군역과 요역, 그리고 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이었다. 이 중 공납은 전체 세금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는데, 지방 특산물의 생산이 해마다 풍흉이 심해 납부에 문제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중간상인이 대신 내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방납, 대납의 폐단이 컸다. 임진왜란 이후 공납의 폐단이 극심하여 호피 방석 한 개의 값이 쌀 70여석으로 폭등하기도 했다.

광해군 때 영의정 이원익은 공납을 쌀로 내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최초로 도입했다. 토지 1결당 쌀 16말을 부과했는데, 나중에 12말로 낮추었다. 토지 1결이라 함은 300두의 쌀을 수확하는 땅이니, 4%의 세율을 뜻한다. 과거 호수별로 세금을 부과하던 것을 토지 결수에 따라 부과하니 조세의 공평성이 크게 높아져 서민들의 부담은 대폭 경감됐고, 부자와 양반들의 부담은 증가했다. 당시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백성들은 춤추고 개들은 아전을 향해 짖지 않았다”. 효종 때 ‘왕정은 안민보다 우선인 것은 없다’는 기치 아래 김육, 조익 등이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주장해서 충청, 전라까지 확대됐고, 숙종 때인 1677년 경상도로, 그리고 1708년에는 황해도로 확대됐다. 이와 같이 유장한 역사를 보면 대동법은 200년 모색해서 100년 걸려 도입됐다고 하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대동법 확대 실시의 최고 공로자인 김육(1580~1658)은 임진, 병자의 양란을 온몸으로 겪으며 고생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처형된 사림파 김식의 4대손이어서 개인적 고생까지 더했다. 김육은 천신만고 끝에 27세에 생원시에 합격해서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으나 1613년 영창대군을 폐해서 죽이고 훌륭한 대신들을 몰아낸 계축옥사를 보고는 출세를 포기했다. 가족을 이끌고 가평 잠곡의 토굴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2년 뒤 겨우 집 한 채를 마련했다. 숯을 구워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동대문에 새벽 파루를 치면 제1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숯을 지고 오는 김육이었다. 김육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비로소 조정에 나가 일했다. 모리야 히로시가 쓴 <남자의 후반생>을 보면 인생 후반부에 두각을 드러낸 중국사의 22명 영웅호걸이 등장하는데, 김육이야말로 전형적인 후반생의 인물이다.

1638년 김육은 충청관찰사에 임명되자마자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에는 대동법보다 좋은 것이 없사옵니다”라고 하면서 대동법을 건의했다. 70세 때 김육은 아직 대동법이 법제화되지 않는 걸 보고는 드디어 사직 상소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려 즐거이 살면서 일할 마음이 없으니,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형상이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대동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저를 쓰려거든 대동법을 시행하고, 아니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 효종은 김육을 우의정에 임명하며 지지해주었다. 그러나 대동법 추진은 순탄치 않았다. 기득권 세력인 부자, 양반들이 반대했고, 그중 최대 반대자들은 송시열, 김집 등 노론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동법이 너무 급진적 정책이어서 오히려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주장했다. 노론과의 갈등 때문에 결국 김육은 사직했다.

김육은 죽을 때까지 초가집에서 살았다. 죽기 열흘 전 남긴 유언에서도 “신의 병이 날로 깊어가 실낱같은 목숨도 얼마 못 버티고 끊어질 것만 같습니다. 신이 만약 죽는다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라고 호소했고, 죽기 하루 전에는 영의정에게 편지를 보내 대동법 시행을 부탁했다.

김육은 79세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육의 부음을 듣고 백성들이 조의금을 들고 문상을 갔다. 그러나 조의금을 받지 않자 그들은 의논 끝에 ‘조선국 영의정 김공육 대동균역 만세불망비(朝鮮國 領議政 金公堉 大同均役 萬世不忘碑)’라는 글귀를 새긴 송덕비를 세웠다. 김육의 사후 10여년인 1670, 1671년에 대기근으로 100만명 이상이 굶어죽는 재앙이 발생했다. 이때 백성들이 말하기를, “대동법이 있으니까 그나마 우리가 살았지, 대동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다 죽었을 거다”(이상 KBS, <역사저널 그날, 제6권> 참조).

지금 대한민국은 땅과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불로소득이 막대하여 소수의 가진 자는 자손 대대로 부귀와 안락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는 평생 죽을 고생을 해도 해뜰 날을 기약하기 어렵다. 실로 백성을 춤추게 하고 시대를 구할 현대의 대동법은 무엇인가? 현대의 김육은 어디 있는가?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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