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이게 과연 될까? 차라리 책을 읽거나 상담소를 가는 게….’

사실 멘토링하는 인공지능(AI) 얘기는 진작 들었지만 그때는 관심이 없었다. 삶이 딱히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거짓말처럼 직장에서 잘리고, 몇 달을 우물쭈물하다 겨우 시작한 카페를 1년도 못 가 접고, 간신히 조그만 물류업체의 총무 일을 맡기까지 인생은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정적으로 아내가 별거를 선언했다. 아이를 데리고 떠나면서 남긴 말이 마음에 쓰리게 남았다. “당신은 일이 안 풀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성격이 문제야! 늘 남 탓만 하고 운이 나쁘다고만 하지. 원인이 당신에게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아이가 뭘 보고 배우겠어?”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술로 달래면서 괴로워하던 나날 중에 문득 TV프로그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이 인공지능에게 멘토링을 받다가 로봇을 때려 부수고 만 사연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가사 도우미를 하는 로봇이었는데 새로 멘토링 프로그램을 깔고 나서 처음에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넘어서 몸과 마음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코칭을 하나둘씩 조곤조곤 해 주었고, 그러다 보니 인공지능에 대한 신뢰도나 의존도가 점점 더해갔다고 한다.

그럴 즈음 인공지능 회사에서 멘토링 프로그램의 업그레이드를 할인 가격으로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SNS, 운전 기록, 신용카드 기록, 각종 사회활동 등등 사이버스페이스에 남아 있는 모든 정보들에다 그동안 인공지능 로봇이 함께 살면서 관찰한 데이터들까지 더한 ‘생애 빅데이터’를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사실상 사용자와 똑같은 복제 인격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과 똑같은 인공지능 인격을 대하게 되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훨씬 성찰의 깊이가 더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복제한 인공지능 로봇과의 동거생활을 단 한달 만에 스스로 끝내고 말았다. 자신이 이렇게 짜증나고 제멋대로인 성격인 줄 처음 알았던 것이다. 평소 스스로가 조금은 까탈스럽고 고집이 있는 편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에 문제가 될 정도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살면서 사사건건 부딪치는 부분들은 갈수록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한편으로는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하는 자괴감도 점점 커져갔다. 그의 인격이 복제된 인공지능은 더 이상 자상한 멘토가 아니었다. 그와 똑같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짜증내면서 참견하고 조언하는 동거인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인공지능 회사에 인격 복제 멘토링 프로그램의 제거를 요청했지만, 개인 신상 정보와 관련되어 기술적, 행정적 절차가 복잡하다면서 엄청난 비용의 청구서를 받았다. 사실은 애초의 계약 조건에 들어 있었던 내용이었다. 결국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로봇을 때려 부수었고, 자동 경보로 연결된 보안업체가 출동하면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프로그램은 그와 함께 인격 복제 멘토링 인공지능의 다른 몇 가지 사례들도 소개했다. 자신의 생애와 인격이 복제된 인공지능과 오래 생활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었다. 유서에는 “삶이 덧없다”는 짤막한 글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고민을 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또 다른 경우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성적 정체성을 애써 억누르고 부정하며 살다가, 자신의 생애와 인격이 복제된 인공지능을 보고는 과감하게 용기를 낸 사람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왜 그렇게 스스로를 부정하고 살았는지 후회가 된다며 인공지능 덕분에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과감하게 비싼 비용을 치르고 구입한 인격 복제 인공지능과의 몇 달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때려 부수었다는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될 때도 있었고,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내가 이런 삶을 살아왔나, 이런 답답한 인간이었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이 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아직은 인공지능한테 고맙다는 생각까지는 안 들지만, 아무튼 내일은 별거 중인 아내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

2002년 즈음에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들의 아날로그와 디지털 비율이 대략 5 대 5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를 이른바 ‘디지털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5년 뒤인 2007년에는 전 세계 모든 정보의 94%가 디지털 형태가 되었다. 2011년 ‘사이언스’지에 실렸던 자료이다. 아날로그 형태의 정보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디지털 정보가 그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며 그런 추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빅데이터’의 시대에 인공지능이 갈수록 정교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한 번에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서 단순히 바둑 같은 한정된 분야가 아니라 일상의 삶과 같은 복잡하고 변수 많은 상황에서도 인간보다 더 현명하게 판단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것이다. 서점에서 자기개발서를 사서 읽기보다 인공지능한테 멘토링을 받는 게 더 효과적인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만큼 인간과 관련된 빅데이터의 양은 막대하게 축적되어 가고 있다. 사실 인간의 자존심이나 존엄성을 내세우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가?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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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심의가 한창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출범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하고픈 정책의 실행이란 측면에서는 2018년이 원년이다. 그 성패의 8~9할은 예산 확보에 달려 있다. 반대로 야당은 문재인 정부가 원하는 정책행보를 순순히 인정하기 어렵다. 정책을 바라보고 설계하는 철학이 안 맞는 것도 있지만,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내년 지방선거의 결과에 있어 야권에 두려운 미래를 안길 수 있다는 판단이 없지 않다. 그러다 보니 현재 국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전쟁터이다.

이런 와중에 사회복지직 공무원의 증원을 위한 예산 증액의 처지가 애처롭다. 본디 서울시에서 행한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사업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서울시민이 누리는 혜택을 전 국민이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며 문재인 후보 시절 공약 목록과 취임 후 국정과제 목록에 또렷이 적은 사업이다. 그러나 공무원 증원은 망국적인 일이란 야권의 논리에 막혀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실 역대 정부 중 복지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의지를 불태우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성공적이라 자평하기 어려웠던 것은 실제 담당인력에 대한 과감한 확보 없이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인력의 재배치, 아니면 형식적인 증원에만 그쳤다. 박근혜 정부가 ‘맞춤형 복지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주민센터에 통합방문팀을 만들라고 했지만 평균 1.4명만 증원된 상태였고 당연히 그 성과는 기대 이하였다.

물론 공무원 증원이 능사일 수는 없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쏟아내는 복지프로그램은 늘어만 가서 현재 21개 부처에서 500여개의 복지프로그램이 읍·면·동으로 내려가고 있다. 예산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인력은 고작 1~2명 증원에 그쳤다. 지방정부 전체 예산 중 사회복지부문의 지출 비중은 평균 27%에 달하고 있고 국민 2500명당 사회복지직 1명이 배치되어 있는 현실을 놓고 볼 때, 깔때기 현상은 반복되고 있다.

서울시의 해법은 달랐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에 걸쳐 소위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모형을 구현하기로 계획했고 현재 강남구를 제외한 모든 구가 서울시와 함께 이 사업을 수행한다. 시의 가장 큰 역할은 자치구에 적절한 사회복지직 공무원 필요 규모를 제시하고 이들을 충원하는 데 인건비의 75%를 지원한 것이었다. 그 결과 3년간 2222명의 인력이 충원되었다.

이 중 동에 1인씩 배치될 간호사 인력 411명, 마을의 자치 기반을 조성할 한시직 공무원 73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인건비 투자의 결과는 명확했다. 동당 월평균 찾아가는 서비스가 2.6배나 증가했고 1년간 복지 사각지대 발굴 및 지원 건수도 7만여건에 달했다. 0세와 65세 가구원이 있는 가구를 모두 방문하는 사업으로 우울증, 치매, 자살 위험을 지닌 어르신과 산모 8000건을 조기 발굴하게 되었다.

이는 동당 7.1명의 사업인력이 늘어 1인당 복지 대상자 수가 289명에서 126명으로 줄어든 데에 기인한 결과이다.

서울시를 통해 입증된 사회복지직 공무원의 증원 효과는 이제 전국적으로 확대시켜야 마땅하며 그 시발점은 2018년 예산 편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공무원의 증원에는 여야 간 이견이나 정쟁이 개입될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자기 삶을 홀로 짊어지고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지쳐 있다. 이 짐을 함께 지기 위한 공무원 증원은 그래서 무죄다.

<이태수 꽃동네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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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먼다오(金門島)가 어딘데요?” 이야기할 때마다 되돌아온다. 내 어릴 때,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한반도의 운명과 샴쌍둥이처럼 묶여 있었던 섬. 이제 70년의 세월 속에 냉전의 상징, 진먼이 잊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겠으나, 격렬한 포격전의 이면에서 끊이지 않게 이어간 끈끈한 국민당과 공산당, 중국과 미국의 인연, 그리고 2001년의 ‘소삼통’(중국과 대만은 2001년부터 진먼과 마조(馬祖) 지역에 한정해서 ‘상거래, 교통, 우편’의 자유화를 실시했으며, 2004년의 대삼통으로 이어갔다) 이래 ‘냉전의 섬’에서 ‘평화의 섬’으로 놀랍게 거듭난 기적의 섬을 모르고서야 되겠는가? 한반도는 38선에 고착하고, 얼어붙고, 화석화되어 있는데….

19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蘆溝橋) 사변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거국항일”을 내걸고, 국공합작하여 8년간의 잔혹한 항일전쟁을 이겨내고 중국은 광명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내 중국의 미래를 건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벌어졌다. 1948년 가을 동북에서 제3야전군은 국민당 4개 병단 47만명을 섬멸하고 전국 해방의 결정적인 고지를 점령한 데 이어, 노도지세로 주요 도시를 공략하여 1949년까지 전국을 거의 해방시켰으나 마지막 대만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만 걸리고 만 것이다.

진먼은 대소 두 개 섬으로 이루어지고, 인구는 12만명(실제 거주자 5만명), 면적은 151.7㎢로 강화도의 반만 하다. 섬은 중국 푸젠(福建)성의 대도시 샤먼(廈門)의 코앞 2㎞ 지점에 있으며, 대만과는 200㎞ 떨어져 있다.

1949년 10월1일 톈안먼에서 마오쩌둥이 신중국의 탄생을 선언한 직후, 10월25일 자정을 넘어 9000명의 인민해방군이 구닝터우(古寧頭) 등 3개 지점으로 대진먼에 상륙하여 3일간의 혈투에서 6100명이 전사하고 3000명이 포로가 되는 큰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 패인에는 배의 조달 등 인민해방군의 준비 부족, 간만 차가 많은 진먼다오의 지형조건이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 셋째로 4만의 병력에 전차를 다수 가진 국민당군에 비해 병력 열세였다는 것, 그리고 일본군의 참전이 있었다. 구 일본군 주몽골군 사령관, 네모토 히로시(根本博) 중장이 장제스에 의해 린바오위안(林保源)이라는 중국이름으로 국민당군 중장으로 임명되어, 일본군 패잔 장교 7명을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배치하여 전투를 진두지휘하게 했다. 일본군의 참전은 오랫동안 비밀이었으나, 2009년 구닝터우 전투 승리 60주년 기념행사에 네모토의 자손이 초대되어 훈장을 받고 공개되었다.

중국군이 재정비하여 진먼을 공략하고자 했을 때, 6·25전쟁이 터져 중국은 한반도에 출병하여 대만 공략작전에 돌릴 병력이 없어진 데다, 한때 중국 내전에 불간섭을 천명한 미국이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하여 대만 문제에 개입했다.

6·25전쟁이 끝나자 1954년에 ‘제1차 대만해협위기’가 있었으며, 1958년 8월23일부터 10월5일까지 중국군이 47만발의 포탄을 진먼에 쏟아부은 ‘8·23 포격전’이 있었다. 국민당군도 지금은 관광지화되어 있는 사자산(獅山) 포진지 등에 사정거리 17㎞, 터지면 반경 87m의 구덩이가 파이는 어마어마한 미제 8인치 포를 오키나와에서 급거 옮겨와서 쏘아댔다. 중국군의 포격은 중·미 수교 직전인 1978년 말까지 20년간 계속되었으나, 섬은 요새화되어 견고해지면서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1964년 이후 점점 심리전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틀에 한 번, 홀숫날 저녁 6시부터 7시까지만 포격하고, 포탄의 내용물도 선전삐라, 책자, 문방구, 과자, 배우사진, 돈까지…. 마치 한국에서 탈북자가 띄우는 풍선의 내용물과 흡사하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중국과 미국은 진먼이나 한반도에서 이렇게 격렬하게 전투하면서 바르샤바에서 비밀회담을 계속했다. 장제스는 맹렬히 반대했으나, 미국은 몇 차례 진먼을 포기하려고 했으며, 마오쩌둥은 마음먹으면 가능한 진먼 공략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진먼을 점령해버리면 대만과 200㎞의 망망대해를 두게 되고, 그렇게 되면 대만의 독립성이 더욱더 뚜렷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 전체의 정통정부를 주장하는 장제스도 대륙반공(大陸返攻)의 상징으로 진먼의 사수를 외쳤으며, 마오쩌둥도 대륙(진먼)과 대만의 연속성을 중시하였으니, 양자는 동상이몽으로 ‘하나의 중국’을 ‘포격을 통한 대화’로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2000년대에 들어서 민진당 정권이 중국에 “진먼의 양보와 대만 독립 승인을 맞바꾸자”고 제안했으나 일축당했다고 한다.

1979년 1월1일에 포격이 멈추고 1992년, 42년 만에 계엄이 해제되었다. 한때 섬 인구의 2배, 10만명을 넘었던 국민당군은 1만명만 남기고 철수하여, 현재는 2000명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진먼 경비사령부의 군정하에서 군에 예속하여, 온갖 폐단에 시달리면서도 군으로 먹고살았던 진먼은 다른 생계의 길을 찾아야 했다.

계엄 해제 후 대만 정부는 군사시설의 관광화를 허가했다. 그래서 거대한 지하 해군기지나 포대, 심리전 방송국, 초소, 지하벙커, 적 상륙 방해용의 용치, 지하마을, 군사박물관, 포탄 탄피로 칼을 만드는 가게, 국민당군 위안소인 특약다실 등이 관광시설화되었다. 군정 시기 군에 희생한 진먼 민간 영웅들이 군의 피해자로 커밍아웃하는 기억의 역전, 내지는 재구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소삼통으로 진먼은 양안의 중간지대라는 이점을 향유했으나, 대삼통의 시대를 맞이하여 대륙에서 물을 공급하는 파이프라인이 부설되고 샤먼과 다리로 연결되려는 지금, 진먼은 어떤 정체성으로 독자성을 주장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군인의 위락을 위해 만든 ‘진먼 고량주’가 이제 세계의 명품이 되어, 진먼은 대만에서 가장 부유한 현(縣)이 되었다. 현민들은 교육, 복지, 생활의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다. 진먼에 호적을 두고 있지만 이곳에 살지 않는 7만명은 1년에 1인 7병씩 배당되는 고량주의 매력에 묶여 있다고 한다.

나는 ‘평화의 섬’ 진먼에서 38선 너머를 바라보며, 우리도 ‘전쟁의 땅’에서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꿈꾼다.

<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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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나라 시인들은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자주 서 있었다. 몸이 그곳에 없으면 마음이라도 밤새 세워놓고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며 거친 대자보를 이어갔다. 여행하고 사랑하는 일조차 미안한 시절이었다. 눈꽃이 피면 눈꽃 보러 지리산에 가야 한다. 억새가 보고 싶으면 제주도 올레길을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시인들. 하루는 비행기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제주도에 다녀왔다. 김종해 시인의 ‘섬 하나’란 시를 펄럭거리면서 말이다. “어머니가 이고 오신 섬 하나. 슬픔 때문에 안개가 잦은 내 뱃길 위에 어머니가 부려놓은 섬 하나. 오늘은 벼랑 끝에 노란 원추리 꽃으로 매달려 있다, 우리 집 눈썹 밑에 매달려 있다. 서투른 물질 속에 날은 저무는데 어머니가 빌려주신 남빛 바다. 이젠 저 섬으로 내가 가야 할 때다.” 남빛 바다는 내가 없는데도 오래도록 잘 있어주었구나. 어느 날 캄캄한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았다. <시인의 사랑>이라는 영화였다. 장소는 제주도. 원추리 꽃과 유채꽃이 노랗게 일렁거리는 남빛 바다가 눈앞에 수두룩했다.

“삶의 아름다움과 비애가 동시에 내재된 시어를 사용했다면 더 깊은 울림이 가능했을 것 같네요.” 곶자왈 시동인 턱주가리 샘의 조언에 끙끙 앓던 시인. 월수 30만원의 방과후 학교 글짓기 교사 현택기 시인.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가난한 동네 청년을 사랑하게 된 시인. “세상에서 자기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뭐가 필요한지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건 한 사람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어줄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람 망가지지 않아.” 위태롭던 감정도 사랑도 파도에 쓸려가듯 떠나가고, 똑같은 일상에 팽개쳐진 시인은 그래도 또박또박 ‘희망’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내려간다. 시인은 결국 시로써 구원을 입는 존재.

제주도 밤바다는 언제보아도 좋더라. 조선에선 북두칠성과 삼태성, 또 문창성. 서양에서는 한 덩어리로 큰곰자리 별하늘. 옛 선비들과 시인들은 급제하려고 문창성을 찾아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단다. 좋은 시가 점지된다면 무슨 일을 못할까. 오래된 떡갈나무가 서 있는 풍경처럼 하늘엔 별들이, 땅에는 시인들이 살아주었으면 바란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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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고독사가 많은 나라다. 1980년대 말 이후 지속된 경제위기가 1994년 버블붕괴로 이어지면서 ‘나 홀로 사망’이 급증했다. 실직자와 이혼율 급증, 비혼 풍조와 개인주의 문화 확산 등이 고독사를 늘린 원인으로 지목됐다. 일본에서는 연간 3만2000여명이 고독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독사 예비군(群)’도 10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고독사가 많다보니 일본 지자체들은 고령자들이 사는 집 대문에 흰 수건을 걸어두도록 했다. 흰 수건이 걸려 있지 않으면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으니 봐달라는 뜻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고독사한 사람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청소해주는 업체들도 성업 중이다. 작가 신조 게이고의 단편만화 <집고양이 분짱의 1년>은 심부전증을 앓다 고독사한 40대 실직자 주인의 곁을 지킨 고양이의 얘기를 그려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2009년 8월에는 유명 여배우 오하라 레이코가 도쿄에 있는 자택에서 고독사한 지 2주 만에 발견돼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고독사의 대국’에 드리워진 그늘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도 고독사가 급증하는 추세다. 고독사한 사람은 2011년 693명에서 지난해에는 1232명으로 두 배가량 늘었다. 고독사한 지 수개월 만에 이웃이나 방문객에 의해 발견되는 사례도 허다하다. 지난 25일에는 배우 이미지씨가 홀로 살던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숨진 지 2주 만에 발견됐다. 이씨는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에서 반려견과 함께 살았고, 형제들과도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이씨가 사망 전 신장질환을 앓았던 데다 자살이나 타살 흔적도 없어 고독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MBC 공채 11기 탤런트로 데뷔해 <서울의 달> <육남매> <파랑새는 있다> <태조 왕건> 등에 출연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이씨도 고독사를 피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고독사 대신 무연사(無緣死)라는 표현을 쓴다. 누군가와 연이 닿지 않아 홀로 외롭게 살다 쓸쓸하게 죽음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고독사는 인적 관계의 끈이 끊어진 사회가 만들어낸 죽음이라고 봐야 한다. 인간의 마지막 순간마저 방치한다면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고독사를 막을 사회안전망 구축을 서둘러야 할 때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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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고독사

광장에 촛불이 다시 등장했다. 청년의 노동을 사유화하고 꿈과 삶을 착취해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이 땅의 어른들에 대한 항의의 촛불이다. 현장실습이라는 미명하에 적정 임금과 합당한 처우는커녕, 안전과 생명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값싼 노동자’ 취급을 받다 목숨을 잃은 이민호군의 친구들이 들고 나온 촛불이다. 구의역의 김군과 LG유플러스 고객센터의 홍양이 생을 마감했을 때만 해도 슬픔을 앞세워 어금니를 악물고 참았던 분노가 기어코 터져 나온 것이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이민호군의 친구들은 “현장실습 곳곳이 세월호이고 구의역입니다”라고 절규한다. 이 땅에서 세월호와 구의역은 어른들의 무능과 비겁함과 탐욕이 실재하는 장소이다. 현실과 관행과 편의를 내세워 자신만의 이익을 좇는 어른들의 못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곳이다. 되새길수록 울화가 치밀어 썩 내키지 않지만, 이민호군의 친구들이 세월호와 구의역의 기억을 불러내 상기시키고자 한 어른들의 못남이 무엇인지 그 면면을 짚어 보자. 이를 통해 무엇이 미래를 담지할 어린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위험의 전가’이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감수하거나 해소해야 할 위험 노동을 스무 살도 채 안된 고교생이 도맡게 했다. 그런데도 작업현장에는 안전장치도 없었고 위험을 인지시키고 예방하기 위한 관리와 감독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린 학생을 그 위험한 작업현장으로 끌어냈다. 고장난 기계를 수리하다 다쳐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도 이군을 불러내 일을 시켰다.

두 번째, ‘책임의 전가’이다. 고장난 기계의 작동장치를 끄고 수리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며, 사고 원인을 이민호군에게 돌리려 했다. 더 나아가 기업은 회사의 어려운 현실에, 학교는 취업실적을 강제하는 정부당국에, 정부당국은 허술한 법·제도와 인력 부족에 책임을 돌렸다. 어느 누구도 나쁜 규칙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에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비용의 전가’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부담을 부과했다. 이민호군은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실습수당을 받으며 월 80시간의 초과노동을 했다. 구의역의 김군이, LG유플러스 고객센터의 홍양이 그러했듯이 이민호군은 어린 학생이 아니라, 그저 다루기 쉬운 노동자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아니, ‘노동자 이하’였다. 현대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그리 취급받아선 안된다. 인간과 시민임을 전제로 대우받아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 홀로 위험과 책임과 비용을 전담해서는 안된다. 그리해서는 인간적 삶과 시민적 활동이 불가능하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과오가 아니라 ‘범죄’이다. 그러니까 구의역의 김군을, LG유플러스 고객센터의 홍양을 그리고 이민호군을 죽게 한 이 땅의 어른들, 특히 기업인과 교육자와 정부당국자란 이름의 어른은 범죄자다. 최소한 방조자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 5월 구의역의 김군 어머니가 이리 경고한 바 있다. “아이 탓이라고만 하고 이러면 안되잖아요. 앞으로 또 다른 사람 분명히 죽어요. 이건 진짜 아니에요”라고. 그 경고가 1년 반에 걸쳐 두 번이나 현실로 나타났다. 이 땅에 ‘범죄도시’는 따로 있지 않다. 위험과 책임과 비용을 어린 학생들에게 전가하는 어른들이 건재한 현실이 바로 범죄도시이다.

이곳에서는 죽음에 이르지 않았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당한 고통’의 사례가 숱하게 발생하고 있다. 교육부의 공식집계만 해도 2016년에만 6만여명의 고교생이 3만여개 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했는데, 그중 95개 업체에서 법정시간을 초과해 실습을 시켰고 27개 업체는 임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또 부당대우(45건)와 유해·위험업무(43건), 성희롱(17건)도 다수 일어났다.

필자에게도 특성화고에 다니는 이민호군과 동갑내기인 아들이 있다. 다행히 모진 일을 겪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즐겁게 꾸려가고 있다. 그래도 보고 있노라면 이민호군과 그의 친구들이 떠오르며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애써 한마디 한다. “내 아들과 민호의 친구들이여, 나를 포함한 어른들을 믿지 마라. 오직 촛불을 들고 나온 그대들의 의지와 마음을 믿어라. 이 땅과 이 세상은 결코 어른들의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처지와 생각에 맞춰 이 땅과 이 세상을 새로이 만들어 가라.” 자기부정, 못난 어른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는 추악하다.” 이제 어른들은 사라질 때이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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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29일 새벽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지난 9월15일 이후 약 2개월 반 중단했던 미사일 실험을 재개한 것이다. 앞서 이달 초 한국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대해서는 전보다 유화적 자세를 보였지만 북한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비난은 멈추지 않았다. 중국은 19차 당대회 결과 설명을 위해 쑹타오 특사를 평양에 파견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을 면담하지 못함으로써 중재자적 역할의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은 쑹타오 특사가 귀국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에 대해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단행했다. 당사자·중재자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면서 미국과 북한이 다시 한반도 긴장의 전면에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긴급소집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대응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북한의 전략적 목표는 핵보유국 지위 획득이다. 핵무력을 지속·강화해가겠다는 의지는 불변인 듯하다.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안정을 강조한다.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아직은 북한의 비핵화보다 평화·안정이 우선이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최대한의 압박과 관여를 주장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출범 11개월이 흐르는 동안 압박만 있을 뿐 관여를 본 사람은 없다. 한국은 대화와 압박의 병행전략을 강조한다. 남북적십자회담·남북군사당국회담을 제의했지만 북한의 응답은 아직까지 없다. 민간급 접촉 신고도 수리했지만 북한의 반응은 소극적이다. 국제규범 위반에 따른 대북 제재에 대한 북한의 반발은 신속하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당사자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김정은 정권의 비판적 태도는 선대 김정일 정권의 6·15와 10·4 선언을 부정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정책’을 제시했다. 북핵 문제 해결과 평화정착, 남북관계 발전, 한반도 신경제공동체 구현 등 3대 목표가 담겨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핵 문제와 남북관계를 선순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핵 문제 해결은 단기적 과정으로 쉽지 않다. 남북관계에는 시급한 해결을 요하는 현안들이 많다. 남북당국 간의 불신상태에서는 어떠한 대화·교류도 의미가 없다. 대화·교류 협력을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유보하거나, 인도 분야 협력까지 정치·군사 문제와 연계한다면 남북관계는 유실되고 말 것이다. 한반도 평화, 북핵 문제, 미·중 대결구도 등 복잡한 상황에서 각국의 입장이 다르고, 특히 미국의 대북 압박·제재 강화 국면에서 방향 전환이 시급하다. 북한이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미국이 판단한 후 이뤄질 대북 압박·제재는 지금과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상황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작금의 상황과 여건으로 보아 12월 한·중 정상회담이 외교적 해법 마련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평창올림픽을 한반도 평화정착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마련되도록 중국과 긴밀히 협력할 필요가 있다.

시기적 측면에서 연말연시는 북한의 핵보유국 선언 이전에 외교적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 중국도 당대회 이후 신형국제관계 건설을 통한 중국의 꿈 실현을 위해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찾고, 주변국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려 한다. 미·북 간 긴장고조와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중 정상회담을 통한 북핵 해법과 출구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면, 이는 새로운 국면을 조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한·중 정상회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해법을 능동적으로 제시하고 주변국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 결과를 갖고 북한을 설득해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평창올림픽이 국면 전환의 변곡점이 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전쟁이 아니면 결국 대화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해 지금까지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점과 국면을 만들어야 한다.

북한이 핵보유국을 선언할 경우 군사적 옵션과 강경정책 대두로 전쟁방지가 외교안보정책의 초점이 될 것이다. 남북관계, 한·미관계, 한·중관계, 북핵정책이 모두 전쟁방지에 종속될 것이다. 이 구도에서 탈피할 수 있는 평화 로드맵을 마련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것이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계획과 전략 마련에 집중하고 이행에 매진해야 한다. 한반도 상황의 전환적 국면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처해야 할 때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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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29일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의 권고를 토대로 자체 개혁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범위가 애매해 논란을 빚은 ‘국내 보안 정보’와 대공·대정부전복 업무를 직무 범위에서 제외하고 대공 수사권 등 모든 수사권을 다른 기관으로 넘기겠다고 했다. 국정원을 순수 정보기관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이다. 비밀활동비 편성과 결산도 국회의 심사를 받겠다고 했다. 이름도 대외안보정보원으로 바꾸고, 국정원법의 연내 전면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29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개의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개혁안은 시민들의 요구를 거의 다 반영하고 있다. 정치에 개입할 소지가 있는 부서를 다시 설치할 수 없도록 법에 명시하고, 불법감청 등 위법한 정보활동 등을 원천 차단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국정원은 이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며, 신속하게 입법으로 뒷받침되도록 협조해야 한다. 북한의 위협 운운하며 수사권 폐지가 성급하다는 둥 토를 다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 국정원 직원이 정치에 관여할 경우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는데 이 정도로는 개혁을 담보할 수 없다. 중형으로 다스려야 한다.

국정원의 진정한 개혁은 법 개정과 조직의 개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정원은 그동안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개혁을 다짐했지만 결국 흐지부지했다. 개혁하는 것처럼 시늉하다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국정원이 정권의 도구가 되지 않으려면 권력에 기대 이득을 얻으려는 조직 이기주의를 버려야 한다. 국정원 개혁은 높은 자정 의지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실천에 옮겨야 가능한 일이다. 시민들이 국정원의 자정 다짐을 듣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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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공적임대주택 85만호, 공공분양주택 15만호 등 5년간 총 100만호의 공공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서민 주거복지 로드맵을 29일 내놨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그간의 대책이 투기수요를 억제하고 시장질서를 정상화하기 위한 수요억제책이었다면 이번 로드맵은 공급확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서민주거가 불안하면 민생이 어려워지고 종국에는 경제 전체에도 악영향이 미친다. 이런 측면에서 무주택 서민을 비롯해 청년, 신혼부부, 고령자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로드맵을 제시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대책은 특히 청년층 30만호, 신혼부부 27만호 등 절반 이상이 젊은층의 주거복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젊은이들이 결혼·출산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부동산 때문이라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 문제만 해결해도 성공한 정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가운데)이 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주거복지 로드맵 당정협의에 참여해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계획을 뜯어보면 걱정스러운 대목이 적지 않다. 특히 100만호라는 상징적 숫자를 맞추기 위해 이것저것 섞어놓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로드맵의 성패를 가늠할 공급 부지 확보가 명쾌하지 않다. 정부는 이날 신규택지 예상지 40곳 중 경기 성남 금토 등 9곳만 공개했다. 나머지는 내년 중 내놓겠다고 밝혔다. 과거 정부의 실패를 거울삼아 수요가 적은 지방보다는 서울 주변 그린벨트를 풀 것으로 보이지만 주거복지와 난개발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공급가액도 시세의 80% 수준으로 싸다고 할 수 없다.

공적임대의 경우도 장기임대를 배 가까이 늘린 것은 반길 일이지만 지난 정부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기존 주택 매입을 통한 재임대 규모를 30만호로 늘려잡은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청년층을 상대로 한 공공임대 중 셰어하우스나 소호형주거클러스트 등의 공급 방법이 생소해 정착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예산대책도 명쾌하지 않다. 소요재원만 연간 24조원 정도 필요한 상황에서 정부는 기존 예산에 주택도시기금의 여유자금 등을 활용하면 문제없다고 하지만 이 기금이라고 화수분일 수는 없다. 정부의 잇단 대책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아파트값은 다시 상승곡선이다. 이런 측면에서 중산층 무주택자나 장년층 주택수요자 대책이 없는 것은 아쉽다. 특히 전국 2000만가구 중 46%에 달하는 세입자 대책이 빠진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이들을 위한 전·월세상한제나 계약갱신 청구권 도입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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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어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하고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다. 북한은 어제 정부 성명을 내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새 형의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5형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또 “김정은 동지는 오늘 국가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로케트 강국 위업이 실현되었다고 선포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지난 75일 동안의 침묵을 깨고 미사일 도발 재개와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것은 북핵의 평화적 해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태다.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북한의 폭주를 강력 규탄한다.

김정은 직접 발사 명령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9일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발사를 지시하는 친필 명령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을 조선중앙TV가 공개했다. 연합뉴스

이번 시험발사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주장대로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갖게 됐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통상 미사일의 사거리가 최고 고도의 2~3배이므로 북한이 밝힌 것처럼 화성-15형이 최고 고도 4475㎞, 사거리 950㎞를 날아갔다면 실제 사거리는 1만3000㎞가량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워싱턴 등 미국 전역을 타격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고난도의 탄두 대기권 재진입과 핵탄두 소형화 기술 개발을 입증한 바 없다. 일정 부분 탄도미사일의 기술 진전을 인정한다 해도 핵무력 완성을 선포할 정도는 아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포는 대내외 과시용 성격이 짙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으로서는 올 초 자신이 내건 ‘연내 핵무력 완성’ 목표가 달성됐음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의도야 어떻든 북핵 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스스로 핵무력 완성을 공표한 북한은 대외관계에서 사실상 핵보유국의 위상을 요구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이를 수용할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북한과 국제사회는 핵보유국 지위 보장과 비핵화라는 근본적 차이를 둘러싼 대립을 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그만큼 멀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핵개발 단계와 핵무력 완성 단계에서의 비핵화는 협상·보상의 내용과 방법에서 차이가 크다. 서로 요구하는 것을 수용하기는 더 어려워지고 그만큼 거래의 비용도 더 커지게 된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도발하지 않은 지난 75일 동안 적극적, 선제적 조치로 국면 전환의 기회를 살려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에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핵 문제는 언제나 양면성을 갖는다. 북한이 핵무력을 완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완성을 선포한 것은 북핵 외교적 해결의 여지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다.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논리에 따르면 북한은 더 이상 핵실험 및 미사일 시험을 할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게 북핵 대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도 대북 대화의 조건으로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중단을 내세운 바 있다.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포는 협상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제재·압박과 외교적 접근을 병행하겠다고 밝힌 것은 고무적이다.

북한은 정부 성명에서 “세계 평화와 안정 수호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것이 빈말이 아니라면 북한은 스스로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내년 2~3월 평창 동계올림픽, 패럴림픽이 열린다. 한국은 평화의 올림픽으로 치르기를 고대하고 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북한과 미국이, 남한과 북한이 평화를 위한 접촉과 협상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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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충주에 갔다가 문을 닫은 여러 수석 가게를 보았다. 그 앞에 흩어진 돌들이 흡사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었다. 골동가게와 옹기를 파는 상점들도 썰렁하고 마냥 적조했다. 차가운 날씨와 인적이 그친 거리에서 만난 그 풍경이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요즘 수석을 수집하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난이나 분재, 골동 수집 등도 그렇다. 하여간 격조 있는 취미들이 빠르게 사라지며 밀려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선인들의 돌 사랑은 유별났다.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말년의 취미로 수석만 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선비들은 마당에 큰 괴석을 놓아두고 방안에는 자그마한 돌 하나를 갖다 두어 수시로 눈을 맞추었다. 돌은 산이 쪼개진 것이라 그 작은 돌에서 거대한 산의 자태를 헤아렸다. 선인들은 산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자 형상을 지닌 채 굴곡을 이루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 굴곡과 연속됨은 다양하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속에서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숨결이자 밀집된 에너지와 같은 것이고 그것에 의해 어떠한 강요된 형태도 지니지 않는 가능한 모든 형태들이 역동적으로 응고된 것이라고 인식했다. 아울러 산은 치솟으면서도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전진해 나가면서도 자체적으로 응축되며 펼쳐져 나가기에 그 크고 웅장한 산은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모든 생명체를 품고 있는 덕 있는 존재로도 보았다.

이처럼 산과 그 축소된 돌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해서 선인들은 수석을 완상하면서 우주자연의 이치를 헤아리는가 하면 돌이 지닌 미덕을 인간 삶의 궁극적인 덕목으로 끌어안으며 살고자 했다. 돌이 지닌 진중함과 침묵, 장수와 부동의 자리에서 그 무엇인가를 살피고자 욕망한 것이다. 아마도 늙어 침침한 눈으로 돌의 얼굴을 애써 바라보며 자신의 최후의 얼굴을 염두에 두며 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돌에서 각자 어떤 얼굴을 떠올렸을까? 돌은 또한 그림 그리는 작가들에게도 무한한 영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질로서 환상을 심어주고 환영을 자극했으며 또 다른 존재를 그 돌 안에서 찾아내도록 권유해준 매개였다. 그것은 자연이 만든, 시간이 빚어낸 기이한 형태이자 신비다. 최초의 예술작품인 돌을 통해 사람들은 상상하고 이미지를 연상하는 ‘사유하는 인간’ ‘예술 하는 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작가들에게 돌은 익숙한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있다.

최근 경기도 양평의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한 동양화가의 작업실을 다녀왔다. 돌을 유난히 사랑하는 그는 화면에 검은 돌 하나를 그려놓았다. 수평으로 길게 누운, 평원석을 닮은 까만 돌은 오석과도 같은 단호한 검정의 색과 견고한 물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매우 거칠고 조밀한 표면의 상처, 질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업이다. 돌이 지닌 단호한 물질감이 화면 위에 부착되면서 그림과 조각의 경계가 슬그머니 주저앉고 촉각성을 지닌 까만 돌이 납작한 평면의 화면을 무한한 공간으로 물리면서 돌진하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었다. 순간 그것은 광활하고 막막한 우주공간에 단 하나의 돌이 되어 자기 존재를 극대화하고 있다. 나는 그 돌 그림을 보면서 수석을 완상하는 체험을 떠올렸다. 돌은 산이 쪼개진 것이자 아득한 시간의 흔적으로 인해 이루어진 최후의 얼굴이자 무수한 세월의 시련을 제 몸으로 손수 겪어낸, 치러낸 상처로서의 피부를 간직하고 여기까지 살아온 이력을 지녔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의 축적이 놓여있고 자연의 힘에 의해 창조된, 형언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흔적이고, 인위가 아니라 무위의 소산이다.

돌을 그리는 작가는 그 무위를 인위로 다시 복기한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무수한 기억을 더듬는다. 돌이 지닌 무거운 기억과 시간을 덩어리로, 질료로 구현하고자 한다. 나아가 돌 안에 박힌 정신 하나를 애써 찾는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돌의 마지막 얼굴이고 여기까지 살아남아 이룬 기적 같은 얼굴이다. 우리 모두도 저 하나의 돌처럼 최후의 얼굴 하나를 그야말로 절박하게 만들며 살고 있는 셈이다. 돌 하나에도 그토록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피던 선인들의 시선과 마음이 새삼스럽다. 충주의 어느 수석 가게 앞에서 뒹굴던 돌들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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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김민섭씨를 찾습니다. 후쿠오카 왕복항공권을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서른다섯을 먹도록 아직 해외에 나가본 일이 없어서 무척 큰 결심을 하고 후쿠오카행 항공권을 예매했는데,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출발하기로 한 그 주에 아이의 수술 일정이 잡혔다.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서 벌어진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의사는 수술 다음 날 어린이집에도 갈 수 있을 만큼 별것 아니라고 했지만, 아버지라는 인간이 혼자 해외로 떠나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마침 이런저런 일정들도 생겨서 티켓을 취소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끊은 항공권은 후쿠오카까지 왕복 8만원, 일명 ‘땡처리 티켓’이었다. 예약을 하면서도 0이 하나 덜 붙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만큼 취소 수수료가 비쌌다. 50%까지는 예상했는데, 2만원이 좀 안되는 돈을 환불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몇 자리 남지 않은 것을 간신히 구했으니 예약대기를 걸어둔 누군가가 곧 그 자리를 다시 채울 것이었다. 그러면 항공사와 여행사는 누군가가 그 티켓을 취소할수록 오히려 이익을 얻는다. 왠지 그것이 얄미워진 나는 티켓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 그러자 담당자는 “여권에 등록된 영문 이름이 같은 대한민국 남성이면 출발 3일 전까지는 가능합니다” 하고 답했다. 그러니까 김민섭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 남성을 우선 찾아야 하는 것이고, 그의 여권에 나와 같은 ‘KIM MIN SEOP’이라는 영문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가 ‘김’을 GIM으로, ‘섭’을 SEOB, SUB으로 등록해 두었으면 양도가 안된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김민섭씨를 찾습니다’ 하는 글을 올렸다.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워서, 800개가 넘는 ‘좋아요’가 달렸고, 저마다의 ‘김민섭’을 호출(태그)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반응은 “내 이름은 왜 김민섭이 아니란 말인가, 개명하고 오겠습니다”라는 것이었고, ‘김민서’라는 친구를 태그하고는 “ㅂ 만들어 ㅠㅠㅠ” 하는 댓글을 다는 이용자도 있었다. 현실 감각이 높은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이름이 김민섭인 사람이 하필 영어 이름이 KIM MIN SEOP이어야 하고, 평일에 2박3일 남자 혼자 자유여행을 갈 수 있어야 하고,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10만원, 그런 사람을 찾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고 말했다. 실제로 그들의 예상이 틀리지 않아서 태그된 ‘김민섭’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어느덧 이것은 “김민섭씨 후쿠오카 보내기 프로젝트”가 되었다. 누군가는 “그냥 2만원 환불 받으시지요” 하고 댓글을 달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나 즐거운 일이 되어 있었다. 좋아요든, 공유든, 댓글이든, 그 어떤 수단으로 여기에 참여한 모두가 이 이벤트에 즐거워했다. ‘아, 이런 게 되는 거야? 우리 힘으로 김민섭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두근거림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내가 후쿠오카에 가고 못 가고, 하는 것보다도 김민섭씨를 찾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되어 있었다. 공유된 어느 글에서는 “엇 저와 영문 이름이 같으신데 이런 일이 있으면 서로 양도할까요?”, “아이고 좋죠” 하는 그들끼리의 연대가 일어나기도 했다.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지금의 페이스북 역할을 하던 불과 10년 전에,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과 친구를 맺는 유행이 잠시 있었다. 나의 미니홈피에도 김민섭들이 들어와서 글을 남겼고 “우리 김민섭 운동회라도 만들어 볼까요?” 하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곧 사그라들었던 그 유행을, 나는 2017년의 페이스북에서 다시 떠올린다. 이름이 같다는 그 단순한 이유와 인연만으로도 이처럼 재미있는 일들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연대한다는 감각은 별것이 아닌데도, 인천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일보다도 더 멀고 어렵다. 아직 김민섭씨는 찾지 못했다. 페이스북에서 ‘김민섭’이나 ‘나는지방대시간강사다’라고 검색하면, 공유된 글을 볼 수 있다. 김민섭과, 김민섭을 아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글은 어느 이용자의 가장 다정했던 댓글로 마무리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읽고 김민섭을 떠올린다. 동네친구 김민섭, 같은 반 김민섭, 같은 과 김민섭, 직장동료 김민섭, 가끔 생각나던 김민섭, 너무 오래 연락하지 않았던 김민섭, 연락이 올 때마다 ‘언제 한 번 보자…’라고 했던 김민섭, 그래서 언젠가부터 먼저 연락하기 너무 미안했던 김민섭, 내가 때렸던 김민섭, 화냈던 김민섭, 싸웠던 김민섭, 술주정부렸던 김민섭, 고백하고 차였던 김민섭,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다시 연락할 찬스다. 다시 오지 않을 김민섭 찬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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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사성어에 남상(濫觴)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 제자 자로에게 “장강은 큰 강이지만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濫觴)’로 적은 골짜기 물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서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 배를 타지 않고는 건널 수가 없게 되었는데 이는 작은 물이 모여 물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니라”고 일렀다. 모든 일은 근본이 있고, 큰일도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출발함을 일깨운다. 첫 시작이 나쁘면 좀처럼 바로잡기 어렵고, 시간이 가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잘못된 일처리가 관행이 되고 적폐로 굳어졌을 때 쉽사리 끊어내기 어렵다는 것을 요즘 우리는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최근 정부합동 부패예방감시단이 ‘귀농어귀촌법’ 시행 이후 처음 실시한 귀농·귀촌 지원사업 실태점검은 오류를 수정할 단서를 잡았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점검이었다고 생각한다. 합동점검에서 성과들만 가득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도시민이 선호하는 대표적 귀농지역 8개 시·군을 우선 점검했는데 총 505건(총 171억원)의 위반사항이 적발되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농지 등 영농기반을 마련하라고 지원한 보조금으로 별장 같은 집을 지은 사례도 있었다. 사안의 경중에 따라 지원금 회수, 관련 공무원 징계 등의 조치를 취할 예정이고 전국 지자체를 대상으로 점검을 확대할 모양새다. 규정과 지침을 위반한 것이니 당연한 조치일 것이다. 잘못된 것은 분명하게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점검과 사후 조치가 행여 문재인 정부가 100대 국정과제로 삼아 추진하는 ‘사람이 돌아오는 농산어촌’에 영향을 줄까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아예 정책을 뒤흔드는 것은 처방이 전혀 다른 것인데, 뿔을 바로잡자고 소를 잡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봐왔다.

정부의 귀농·귀촌 정책은 귀농·귀촌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어 2016년 한 해에만 49만6000여명이 농촌에 정착하고 있는 현실에 기반을 둔다. 이런 행렬은 앞으로 상당기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는데 마을 전봇대 숫자보다 주민 숫자가 적어진 농촌지역엔 가뭄의 단비 같은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농촌으로 향하는 도시민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하는 것이 귀농·귀촌 정책인데, 그중 가장 큰 부분이 자금이다. 이번에 적발된 주요 위반사항도 자금지원과 관련이 많다. 귀농·귀촌 융자자금의 대출 부실심사, 목적 외 유용, 부당집행 등이 대다수다.

행정 담당자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제대로 정책대상자를 가려내려면 자산이나 교육이력, 주소지 변동사항 등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데 일선 담당자에게 그럴 권한은 없다.

또한, 귀농·귀촌인들이 농촌 정서를 이해 못하고 도시생활의 규범과 정서를 우선 고집하기 때문에 관련 민원이 많아 공무원 사이에서는 귀농·귀촌 업무가 기피 1순위라고도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귀농·귀촌 정책 지원과정에 오류가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행여나 귀농·귀촌 정책이 잘못된 관행이 만연한 적폐로 오해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고, 애쓰는 일선 공무원에게 일벌백계보다는 애정 어린 지도가 우선 되었으면 한다.

<채상헌 | 연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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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텔레비전마저도 동네에 한두 대밖에 없던 시절, 삼류 유랑극단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약을 팔기 전에 검은 망토를 두른 이수일과 입술을 빨갛게 칠한 심순애가 등장하는 어설픈 신파극을 보여줬다. 그것도 재미있다고 밤마다 동네 사람들은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부리나케 공터로 몰려나왔다. 초등학교 때 살던 소도시에서는 여름이면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서커스단이 들어왔는데, 그곳을 지날 때면 말똥 냄새가 났다. 그 서커스단 구경 값이 꽤 되어서 말을 타고 뭘 하는지 끝내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 서커스는 명절 때마다 방송에서 보여준 외국 서커스단의 묘기였다. 공중그네를 타고 날아다니거나, 장대 꼭대기에서 끈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거나, 채찍으로 호랑이를 고양이 다루듯 하는 것을 어찌나 많이 봤는지 지금도 실제로 서커스단을 구경한 것처럼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나라 서커스단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동춘 서커스단 사진집을 통해서였다. 그 책에 담긴 사진에는 무대에 나서서 온갖 기이한 재주를 부리는 모습이 아니라 서커스 단원들의 무대 뒤 삶이 담겨져 있었다.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하는 어린 단원들과 화장하는 중국 기예단 소녀들의 모습은 생경했다. 카메라 렌즈는 서커스단 깊숙이 들어가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적은 짧은 글은 진솔했다. 마치 서커스단원 중 한 사람이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사진집을 낸 작가는 서커스에 매료되어 카메라를 들고 서커스단을 따라다녔다는 여학생이었다. 그는 몇 년 동안 서커스단을 사진에 담느라 학교도 그만뒀다고 했다. 그의 열정이 궁금했다. 출판사에 문의해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는 외국에서 사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두어 번 메일을 주고받은 뒤 내가 보낸 책에 그는 피아노 연주가 담긴 시디를 답으로 보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라고 했다. 서커스 공연장 매각을 반대하며 천막 꼭대기에 올라가 농성하는 이의 기사를 보면서 그가 떠올랐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으려나. 그나저나 날 추운데 고공 농성하는 이는 괜찮으려나.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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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에게 조약돌을 가져오면 오이 조각으로 교환해주는 실험을 했다. 거래에 만족한 원숭이들은 열심히 조약돌을 주워 왔다. 그러자 연구자는 한 원숭이를 골라 거래 조건을 바꿔 봤다. 다른 원숭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 원숭이에게만 오이 조각 대신 더 맛있는 포도알을 준 것이다. 화가 난 원숭이들은 연구자의 얼굴에 오이를 던졌다. 원숭이도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면 분노한다.

원숭이조차 아는 이 ‘공정성’이란 개념은 아직 사리분별을 잘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도 민감하다. 아이들은 6~7세만 되면 “오빠(혹은 형·누나·언니)만 더 주는 건 불공평해!”라고 부모에게 당당히 항의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자신이 받은 것과 남이 받은 것을 비교해 ‘무임승차자’를 가려내려는 본능이 있다.

그런데 사실 공정하다는 것만큼이나 모호한 개념도 없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다’는 이 단어의 뜻은, 같은 언어를 쓰는 정반대의 주장이 맞부딪치는 현실 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복지 확대를 위해 부자 증세를 하는 것은 부자에 대한 강탈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던 티 파티(Tea Party)도,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부자 증세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월가 점령 시위대도 똑같이 소리 높여 말했다. “우리는 공정한 사회를 원한다.” 그래서 결국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공정한 것인가.

예산이 한정된 상황에서 소수의 장애아를 위한 전용 놀이터를 만드는 건 불공정한 일인가. 난파된 배에서 구명보트에 탈 사람을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것은 공정한 일일까.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보석금을 낸 피의자를 풀어주는 것은, 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피의자의 상황에 비춰볼 때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놓고 보면, ‘객관적인’ 정답이 존재하는 공정함이란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공정한지는 결국 그 사회 구성원들이 어느 가치관에 중점을 두고, 어떻게 합의해 나가느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방안 공청회’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 중 하나는 ‘공정성’이었다. 한 신입사원은 마이크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힘든 취준생(취업준비생) 시절을 거쳐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정규직들이 너무 쉽게 정규직이 되려고 하느냐. 오늘은 수능날이다. 힘들게 수험생활을 한 후배들에게 공정한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 그들은 “무임승차! 웬말이냐! 공정사회! 공개채용!”이라는 피켓도 들었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시달려 온 우리가 ‘능력주의’에 따른 엄격한 공정함을 요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불공정한 사회의 약자였을 사람들이 힘들게 노력한 대가로 시험을 통과해 정규직이 된 것 역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정규직 되고 싶은 비정규직은 시험 치르고 들어오라”는 말에서는 숫자와 등수로 환산될 수 있는 시험만이 공정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잣대라 여기는 강박을 감지하게 된다. 도대체 15년 동안 인천공항의 특수경비원과 환경미화원으로 일해온 사람들이 정규직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공정한’ 시험이 뭔가. 경영? 토익? 인·적성 검사? 지난 15년 동안 보여준 업무태도와 성과가 그들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한 잣대가 아닌가.

<시험국민의 탄생>(푸른역사)의 저자 이경숙은 자신의 책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시험의 난관을 돌파한 승자들은 어렵게 얻은 서열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서열화 기준이 단순해질수록 모든 대상들은 명쾌하게 서열화된다. 낮은 역전 가능성은 서열의 특권을 더욱 강화한다”고 썼다. 그는 “(시험은)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서열은 보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갑은 을에게, 을은 병에게 폭력적 권력을 행사한다”고 지적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날 공청회에서 11년차 환경미화 노동자는 “청소, 경비 같은 일은 취준생들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아니다. 우리가 정규직의 몫을 뺏자는 게 아닌데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한 정규직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정규직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어렵게 일하는 건 알지만, 여러분만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비정규직에게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선물도 주지 않느냐.” 이것은 ‘을’인 정규직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자격만으로 비정규직을 ‘병’으로 서열화하고, 그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1% 대 99%’의 사회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힘들게 버둥거리며 살고 있단 것을 안다. 그래도 자신의 힘듦과 노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에만 집착해 타인의 노력을 폄하하는 ‘불공정한’ 사회는 되지 않길 바란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단 하나의 잣대로 공정함을 평가하려는 ‘불공정한’ 잣대도 만들지 않기를.

<정유진 토요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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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정립된 양자역학은 삼라만상의 구성원리를 설명하는 물리학의 근본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90년대에 100년 가까운 양자역학 연구 경험으로 무장한 물리학자들이 인공 양자계를 만들고 이를 조작하는 기술을 개발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양자세계에는, 디지털 논리의 단순한 0과 1이 아닌, 한 입자가 두 준위 혹은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 혹은 얽힘 같은 오묘한 상태가 가능하다. 이를 이용한 도청 불가능한 양자암호통신이나 획기적인 알고리즘의 양자컴퓨팅이 제안되며 양자정보학은 물리학의 뜨거운 화두가 됐다.

미국을 필두로 유럽 각국과 중국, 일본 정부가 투자를 이어왔으며, 최근에는 IBM과 구글이 양자컴퓨터 연구에 착수했고, 중국이 인공위성을 이용한 양자통신에 성공하며 주목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제안한 양자정보통신기술의 산업화를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사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런데 실제로 오랫동안 양자계 연구를 해온 물리학자들은 양자정보학의 산업적 응용성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20여년의 연구 결과, 양자컴퓨팅의 가장 뛰어난 계산은 ‘21은 7 곱하기 3’이다. 양자암호통신은 도청을 어렵게 할 뿐, 사물인터넷 등에서 더 큰 문제인 해킹을 막지 못하며, 그나마 단거리에서 시연된 정도다. 그 이유는, 디지털 신호의 0, 1과는 달리, 양자정보 처리의 마술을 가능케 하는 중첩과 얽힘 상태를 제어하는 일이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인 어려움이며, 단기간의 기술 개발로 의미있는 응용분야에서 양자기술이 디지털 컴퓨터 및 통신, 암호기술을 앞설 가능성은 없다.

이런 이유로 초기 양자정보에 대한 흥분된 기대는 많이 가라앉았고, 선진 각국의 지원도 장기적인 기초연구에 집중되고 있다. IBM과 구글의 최근 연구는 첨단 이미지 홍보 목적이며, 양자컴퓨터라기보다는 독특한 구성의 물리학 실험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중국의 인공위성 실험 역시 소위 양자열쇠 분배가 가능한 거리를 확인한 기초연구였다.

이 시점에 우리 정부가 8년 뒤 양자정보기술의 산업화를 목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는 데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더욱이 얇은 연구자층과 그간의 소극적 지원으로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전문가가 충분치 않은 상황이어서, 자칫 국민 세금의 낭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자연의 근본 원리인 양자역학의 잠재력을 일깨워 응용하는 ‘퀀텀테크놀로지’는 분명 미래 첨단기술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될 것이다. 현재 겪고 있는 기술적 어려움의 한계를 확실히 하고, 그 극복 방안을 찾는 연구는 치열하게 계속되어야 하며, 여기서 우리가 결코 뒤떨어져서는 안된다. 단, 양자기술의 발달 단계와 국내 연구 수준을 고려할 때, 섣부른 산업화가 아닌 연구 저변과 수월성 확보를 통해 최첨단과의 격차를 줄이려는 좀 더 긴 호흡의 투자가 요구된다.

<조동현 | 고려대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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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개정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8년부터 공공장소 등에 자동제세동기(자동심장충격기)를 구비해 일반인이 사용하도록 하는 ‘일반인 제세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병원 밖 심정지 환자에게는 심폐소생술과 제세동 처치를 빨리 해야 소생 가능성이 높아지고 장애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 말 현재 자동제세동기 설치현황을 보면, 전체 2만9000여대 중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동주택, 공공시설, 다중이용시설 등에 구비된 것은 2만4000여대다. 자동제세동기 의무 설치대상인 500가구 이상의 아파트 등에 구비된 것은 9000여대에 이르지만 주민에 의한 제세동 실적은 거의 없다.

또한 자동심장충격기 관리운영 기준으로 관리책임자 지정, 구조 및 응급처치 교육 이수자 배치, 장비 사용 교육, 매월 1회 이상 점검 등을 마련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일부 공동주택에서 고가의 자동심장충격기를 방치하거나 사무실에 두고 문을 잠가 놓거나 주민에게 이용방법을 알리지 않은 경우도 있다. 자동심장충격 처치에 대한 인식을 바꿔 빠른 응급처치가 가능하도록 자동심장충격기를 관리해야 한다.

병원 밖 심정지는 가정에서 70%가량 발생하고 있으며 생존율이 매우 낮다. 따라서 공동주택의 자동심장충격기 관리운영 규정 준수를 위해 행정 지원과 교육 제공을 우선 강화하고 위반 시에는 실효성 있는 제재를 해야 한다. 동시에 공동주택 관리자의 인식 전환을 위해 관련 정보를 적극 제공하고 자발적으로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엄태환 | 을지대 교수·응급구조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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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 붐비는 어느 공중화장실 앞. 화들짝 놀란 아주머니가 남자 화장실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영어로 된 남녀 화장실 표시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만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급한 볼일로 들어간 곳이 여자 화장실이 아니었으니 아주머니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창피했을까?

우리나라 화장실 표시는 대부분 영어 및 관련 기호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화장실 사용은 적잖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화장실의 주된 표시는 문자, 그림 상징물, 문자+그림 상징물 등 세 가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문자는 영문자로 화장실을 표시하고 남녀를 따로 구분한다. 그림 상징물은 치마를 그려 여성용임을, 바지를 그려 남성용임을 나타낸다. 문자+그림 상징물은 이 둘을 혼용 표기한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영문자로 된 화장실 표시는 다양한데 ‘RESTROOMS’ ‘TOILET’ ‘W·C’ 등이다.

여기에 남녀를 구분하는 ‘MAN/WOMAN’ ‘GENTS/LADIES’ ‘MEN/WOMEN’ 등의 하위 표시가 있다. 그림 상징물로는 드물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성 구별 표시(♂, ♀)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화장실 표시는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로 영문자 표기를 들 수 있다. 화장실이 기본적인 생리작용 해결 장소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들 영문자는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화장실 사용을 어렵게 하거나 포기하게 하는 고통의 문자 장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도 있다. 국민의 학력 향상과 세계화 시대로 저러한 영어쯤은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튼 이 문제는 우리 언어생활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화장실 표시는 한글로 해야 마땅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한글로 화장실 장벽을 없애야 한다. 한글로 ‘화장실’, ‘남자/여자’로 표시하면 편안하게 들어가 신진대사의 쾌감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영문자를 원한다면 한글과 영문자를 병용하면 될 것이다.

<방운규 | 평택대 겸임교수·국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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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인기를 끈 TV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너목들)에서 주인공의 직업은 ‘국선전담변호사’였다. ‘진실이 재판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재판에서 이겨야 진실’이라 여기는 속물 변호사 장혜성(이보영)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 소년 박수하(이종석)와 정의감에 가득 찬 변호사 차관우(윤상현)를 만나 ‘진짜 변호사’로 거듭난다. 올해 초 방영된 드라마 <피고인>에도 국선변호인이 등장했다. 소녀시대 멤버 유리가,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된 검사 박정우(지성)를 돕는 서은혜 변호사 역을 맡아 활약했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한 장면.

국선변호인 제도는 피고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헌법에 명시돼 있다. 헌법 제12조 4항은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형사피고인이 스스로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국가가 변호인을 붙인다’고 밝히고 있다. 형사소송법 33조는 피고인이 구속됐거나, 미성년자·70세 이상·농아자·심신장애 의심이 있거나,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 징역·금고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기소됐는데 변호인이 없을 경우 법원이 변호인을 직권 선정토록 했다. 경제적 사유로 변호인을 못 구한 경우도 피고인의 청구에 따라 법원이 변호인을 붙여줄 수 있다.

국선변호인은 <너목들>의 장혜성처럼 국선 사건만 맡는 국선전담변호사와 다른 사건도 수임하는 일반 국선변호인으로 나뉜다. 전자는 법원의 위촉으로 월급 형식의 정액 보수를 받고, 후자는 건별 수당을 받는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일단 선정되면, 피고인의 범행수법이 잔인하다거나 피고인과 소신이 다르다는 등의 이유로는 사임할 수 없다. 헌법이 ‘누구든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1975년 55일에 걸쳐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김대두조차 국선변호인의 변호를 받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선변호인들이 연이틀 ‘박근혜 없는 박근혜 재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5인 모두 국선전담변호사다. 이들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접견조차 거부하고, 그의 지지자들은 “목숨을 내놓고 (변호)하라”며 압박한다. 변호사의 숙명이지만 난감하겠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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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촛불혁명 1주년, 이제 고름덩어리를 치워냈을 뿐, 뿌리는 아직 그대로다.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 망국의 뿌리. 단지 입장이 다른 정치가 아니라 악의 정치를 펼치던 이전 정권들의 야만은 낱낱이 국민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돌이켜 두 정권을 생각해볼 때, 박근혜 정권이 곪아터진 고름덩어리였다면 이명박 정권은 화근, 즉 세균의 균주였다.

국가를 부패시킨 이명박 세균정권의 첫 번째 만행은 최근 밝혀진 국가정보원 사유화와 국정원의 민간사찰, 그리고 국정원 댓글부대의 대선 부정공작의 악행들이다. 2014년, 어느 날이었다. 나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서 정부 부처로부터 실무위원을 맡아달라고 부탁받았다. 그런데 그 위원으로 추천되는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이라는 작자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국가관’이 무엇이냐는 질문, ‘국가관’을 적어내라는 명령조의 발언을 해서 충격을 받게 했다. 얼마 뒤 다음 통화에서는 ‘노란색’ 근처에 다니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흉통과 함께 오심과 구토가 올라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5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승용차를 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런 치욕적인 대접을 받은 국민이 한둘이 아니다. 지금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을 포함한 수만의 국민들이 개인사찰 증명 요구와 더불어 국정원 개혁에 대한 “내놓아라, 내 파일”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시민들을 염탐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돈으로 도배한 더러운 댓글들로 국민의 정신을 감염시켰다. 결국 이명박은 불신이라는 씨앗을 사회 곳곳에 뿌렸다.

두 번째 이명박 정권의 악행은 일제고사의 부활이다. 협동과 상생을 가르쳐도 부족한 교육판에 일제고사라는 개인 간, 학교 간 경쟁을 만들어서 아이들, 학교들을 줄세우고 수치심을 안겼다. 이명박 정권은 미래를 오염시키고, 아이들에게 학력신분제를 이식했다. 그때의 이명박 정권이 국민들에게 선물한 삶의 방식이 바로 각자도생이다. 각자도생은 공멸의 구호이다. 나 하나만 살아남는 것은 곧 죽음이다. 죽음으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0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30.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이 각자도생의 결과로 아이들은 무기력이라는 중병과 공부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인생을 이미 망했다고 선언하고 자괴감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절대 사랑의 종교를 가진 장로 대통령이 저지른 국가와 아이들에 대한 악행은 불신에 이어 분열을 낳았다.

그래서 세 번째 이명박의 악행은 바로 종교를 등에 업고, 종교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한없이 보여준 것에 있다. 종교는 신비이고 고통에 대한 구원의 보루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지독한 세속화라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로 이명박의 종교는 편가르기, 이분화, 우익화의 길로 나아가 일부 세력을 분별없는 패거리로 만들었다. 그 거래가 성사되게 하기 위해 이명박은 뻑하면 도시를 종교에 바치고, 국민도 바쳤었다. 그의 종교에 성스러운 것은 없었다. 단지 비즈니스만 있을 뿐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종교마저도 세속화하고 희화화하여 몰락의 길을 걷도록 했다. 그에게 정치는 비즈니스였다. 그는 사기업의 CEO처럼 국가행정도 장사, 국토도 장사, 외교도 장사로 했고, 반짝 홍보하고 뒷감당은 하지 않았다. 5년간 취한 개인적 이득과 국가 대통령이라는 스펙을 추가하는 것으로 자기애를 충족했다. 그에게 수치심이란 없었다. 토건회사에 갖다 바쳐, 파괴된 생태계의 ‘녹조라떼’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보는 것은 이 공사에서 이득을 보게 해준 건설회사의 사장 얼굴들이다.

촛불이 태워야 할 것은 이런 전 정권들의 온갖 균주들이다. 이제 고름덩어리를 조금 치워냈을 뿐이다. 국가와 국민에 온갖 염증과 부작용, 부패를 일으켜왔던 기생충 관료들과 곰팡이 학자들, 썩은 언론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촛불 1주년, 아직 우리는 민주주의를 통해 치유하는 국가적 과정의 입구에 서있을 뿐이다. 다시 100만이 모이고, 1000만이 모여서 얽히고설켜온 우리의 상처들을 찬찬히 제거하고 뜯어내고 분리하고 보존할 것들을 나누어야 한다. 촛불은 다시 타올라야 한다.

<김현수 |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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