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전 합의보다 진전된 것이며 현실적으로 최상의 결과였다는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의 항변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서 결론짓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 입장에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의 본질과 한·일 합의의 근본적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정치적 합의로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 문제를 정치적 협상으로 결말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며 위안부 합의의 근본 문제였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1월 1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부산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 등 현안보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위안부 해결 없이는 일본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턱없이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여자로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단심(丹心)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고, 친일 논란을 빚은 선친의 전력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국민 정서에 편승해 지지도를 높이기 위한 정치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대일 기조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외교적 자충수라는 게 문제였다. 미국의 아시아재균형 정책에 첨병 역할을 하는 일본과 각을 세우는 것이 한·미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미국의 압박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은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가 택한 방법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해결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협상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이 협상은 구조적으로 한국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대일 외교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바람에 생긴 일이다.

초기 단계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 외교를 이렇게 하면 나중에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다’고 경고하고 이를 막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했어야 하는 사람은 박근혜 정부의 외교수장이던 윤 전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국민 모두가 수용할 수 없는 합의가 이뤄졌을 때는 장관직을 걸고 저항하지도 않았다. 윤 전 장관은 협상 결과 평가가 박하다고 항변할 것이 아니라, 외교장관으로서 한국 외교가 이길 수 없는 전쟁터로 끌려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 책임을 생각해봐야 한다.

<유신모 |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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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시인 송경동이 파인텍 소속 두 노동자의 굴뚝농성을 지지하는 연대의 날을 제안했다. 콜트콜텍 때도 그랬고, 희망버스 때도 그랬고, 작년 광화문 노숙농성 때도 그랬었지. 익숙하지만 늘 새로운 예술행동들의 시작. 이른바 ‘408+49’ 프로젝트이다.

2006년 한국합섬의 정리해고에 맞서 5년간 투쟁했던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 노동자들은 자신이 다녔던 회사를 인수한 스타케미칼이 공장부지와 기술을 팔아먹고 위장 폐업했을 때,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들 중에 차광호 동지는 2014년 5월27일부터 408일 동안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2017년 11월11일, 다른 두 명의 노동자들은 스타케미칼 본사가 있는 목동 에너지공사 75m 굴뚝 위로 올라가 다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12월30일이면 농성 49일째가 된다. 광화문 캠핑촌에서 함께 싸웠던 촌민들이 다시 목동으로 달려가 연대의 날을 갖기로 한 것이다. 매서운 추위가 계속되고 있어, 얼마나 참여가 가능할지 걱정을 했지만, 제안 5일 만에 무려 822명이 함께하기로 했다.

사회적 재난에 개입하는 예술행동은 2000년대 들어 구체적인 문화운동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2004년부터 시작된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아마도 동시대 예술행동의 본격적인 첫 번째 사례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파견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사회적 재난의 현장에 참여하여, 다양한 예술 활동을 전개했다.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시작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한진중공업·쌍용자동차·콜트콜텍·기륭전자 등 파업노동자들의 싸움 현장, 밀양송전탑 건설반대·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등 안전·탈핵·평화운동의 현장, 세월호 재난의 현장, 그리고 블랙리스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퇴진을 위한 광화문 캠핑촌 운동에 이르기까지 예술행동은 한국 사회 재난 현장에서 운동 당사자들과 연대했다. 왜 예술행동은 다시 재난과 투쟁의 현장으로 돌아갈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삶이 갈수록 힘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이 있다. 평생을 평화롭게 살다가 송전탑을 설치하고 군 시설 들어와야 한다고 해서 마을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 꽃다운 학생들도 있다. 이들 모두가 자본과 공권력에 의해 일상의 삶이 망가진 사람들이다. 예술인들이 달려간 곳은 사람의 삶이 파괴된 곳이다.

재난의 현장에서 예술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파견예술가라고 부른다. 예술가들은 재난 현장에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재난이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예술행동은 언제나 사후적일 수밖에 없다. 파견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실이 재난의 현장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든지 재난의 현장에 파견 나갈 자세가 되어 있다.

광화문 캠핑촌이 사라졌어도, 시민의 힘으로 정권이 바뀌었어도 예술행동은 지속된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일들이 산적하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예술행동은 늘 누적되어왔다. 예술행동의 끝은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사회적 재난과 시국사건이 생길 때마다 예술행동이 요청되고, 개입하기 마련이니까. 예술행동은 본능적으로 ‘5분 대기조’의 운명을 갖는다. 재난이 발생하거나 연대가 필요한 곳이라면 본능적으로 현장으로 달려간다.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파견예술인 사이에 강력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재난의 개입에 대한 필연적인 의지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예술행동이 계속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아직 고통과 파국의 시대에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점에서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파견예술가들은 언젠가 이 일이 끝나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현장에서 계속 활동하고 싶은 양가적 감정을 가진다. 그래서 예술행동은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오래된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처럼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짜~앙가 엄청난 기운이” 틀림없이 생겨나면서 예술행동은 언제나 이미 현장에 있을 거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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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철도노조 KTX 열차 승무지부가 12월21일에 제4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1979년 YH무역 노동조합의 생존권 투쟁을 위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다가 경찰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21세로 숨진 노동자 김경숙씨를 기리는 상이다.

KTX 열차 승무지부의 해고 승무원들은 2004년 철도청의 자회사에 위탁 계약직으로 입사했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채용 시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 및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았던 것과 달리, 계약기간 2년이 만료되자 다른 자회사 소속 계약직으로 재계약할 것을 강요받았다. 부당한 노동조건과 재계약 요구에 맞서 이적을 거부하고 파업을 시도했지만, 정규직 전환 대신 해고를 통보받았다. 투쟁은 11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이들의 해고 무효소송에 대한 1·2심 판결은 “KTX 승무원과 코레일의 묵시적 계약 관계”를 인정했다. 하지만 2015년에 대법원은 “코레일과 승무원 사이에 직접 근로관계가 성립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근로자 파견계약 관계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며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이후 “서울고법 민사1부(신광렬 부장판사)는 해고 여승무원 34명이 코레일을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1·2심을 파기하고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경향신문 2015년 11월27일자 보도)

문재인 정부가 여성의 취업 및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해 지난 26일 내놓은 여성 일자리 로드맵을 보며 이 해고 승무원들을 새삼 떠올려본다. 이 정책들은 그 여성 노동자들이 겪었던 부당함을 앞으로 근절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의 여성 일자리 로드맵의 세 핵심분야 중 두 가지는 ‘경력단절 예방’ ‘경력단절 후 재취업 지원’이다. 이 로드맵의 대부분은 기혼여성들이 직면하는 경력단절 문제에 대한 지원책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지원책들은 여성의 노동을 결혼과 출산이라는 규범적 틀 안에서 사유한다. 여성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주체이기 이전에 출산과 육아의 책임자로 설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언제나 저출산 문제의 최종 책임을 여성에게 돌려온 과거 정부들의 정책방향과는 얼마나 다른가.

출산, 육아와 관련된 여성노동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경력단절 여성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정책들은 물론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KTX 여승무원들의 경우가 보여주듯 여성들은 취업 문턱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고 불평등한 고용 조건에 직면하며 구조적인 저임금, 고용불안정에 시달린다. 그런 점에서 ‘차별 없는 일자리 환경 구축’은 경력단절, 저출산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가장 시급한 일이며, 로드맵의 세 핵심분야 중 하나가 아니라 여성 일자리 정책의 포괄적 철학이어야 한다.

성차별 없는 노동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체계적, 지속적인 성평등 교육이 필수적인 과제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 과제가 지난할 것은 자명하다. 그래도 일자리 정책과 함께 정부는 분명 성평등 교육의 확대와 심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하며, 출산과 육아의 틀을 중심으로 여성 노동 문제에 접근하는 시각이 과연 성평등의 이상에 부합하는지 성찰해야 한다. 여승무원들을 ‘철도의 꽃’이라 부르며 서비스 노동에 대거 채용한 코레일은 성별에 따라 직제를 분리하는 성차별적 고용행위를 했으며, 그들의 직분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들 여성의 노동 가치를 평가절하했고, 위장도급, 비정규직화, 집단해고로써 성차별적 구조조정을 실행했다. KTX 해고 승무원들의 상황은 모집, 채용에서부터 퇴직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노동시장에 만연한 성차별적 사고와 관행의 전형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여성 일자리 정책에는 성차별적 기업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불행히도 이런 정책이 소급될 수는 없을 터이다. 현재 이 해고 승무원들은 밀린 급여 8000여만원을 받았다가 대법원 파기환송 후 회사에 1억여원을 각자 되갚아야 하는 빚으로 떠안고 있다.

해고 승무원들의 지난 4300일은 여성이 소비되고 폐기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고통이 새겨지는 몸을 가진 인간임을 파업, 단식, 삭발, 점거, 고공농성, 오체투지로 보여준 시간이었다.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시상은 그 고통에 대한 작지만 큰 위로다. 하지만 부당한 외주화와 해고에 맞선 그들의 저항을 무력화한 대법원 판결 후 그 분투가 어떤 결론에 이를지는 불투명하다. 성차별 없는 노동문화를 위한 투쟁은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으로 가는 길에 다름아니다. 새해엔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길 꿈꾼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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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지난 22일 올해 마지막 본회의에 32개 법안을 올렸다. 이들 법안은 개헌 특위 연장을 둘러싼 여야 갈등으로 본회의가 무산되면서 처리되지 못했다. 이 중엔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전안법)과 고등교육법 개정안(시간강사법)이 포함돼 있다. 전안법은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 의류와 잡화 같은 생활용품도 전기용품처럼 ‘KC 인증서’를 받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인증 비용만 20만~30만원이 들어가 영세소상공인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는 지적에 따라 해마다 1년씩 유예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방법으로 시행을 미뤄왔다.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당장 새해 1월1일부터 법이 적용된다. 인증을 지키지 못한 소상공인에게는 3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 또는 5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소상공인 700만명은 하루아침에 범법자로 내몰릴 판이라고 아우성이다.

시간강사법은 시간강사의 고용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주 9시간 이상 강의하는 전업 대학 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주고 임용 기간을 1년 이상 보장하는 내용이다. 당초 2012년 도입될 예정이었지만 법 취지와 달리 강사의 대량 해고를 불러올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 3차례에 걸쳐 도입이 유예됐고, 내년 1월1일 시행을 앞두고 추가로 유예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이 법에 영향을 받는 시간강사만 8만명이라고 한다. 개정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대학의 강사 임용에 큰 혼란이 빚어질 것은 불문가지다. 올해 안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당장 새해부터 실질적인 피해가 예상되는 이런 일몰법안만 12건이다. 영주귀국 독립유공자의 유족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하는 내용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은 주택신청기간(1월2~12일)을 감안하면 연내 법안 처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29일은 연내 본회의가 열릴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하지만 여야는 28일에도 기싸움을 벌이며 충돌했다. 이번 임시국회는 연내 해결해야 할 민생 법안이 많다는 이유로 여야 합의에 따라 열렸다. 이럴 거면 뭐하러 열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당사자들은 속이 타들어간다. 이러니 민생국회가 아니라 ‘민폐 국회’ ‘민생 패싱’이란 말을 듣는 것이다. 법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 개최는 흥정의 대상이 아니라 국회의 의무다. 여당은 누구보다 집권당으로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야당도 도 넘은 정치 공세를 삼가야 한다. 싸움을 해도 민생 문제는 처리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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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정책혁신위원회가 28일 보수정부에서 이뤄진 주요 대북정책의 점검결과를 담은 ‘정책혁신 의견서’를 발표했다. 핵심은 지난해 2월10일 개성공단 전면중단 결정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일방적인 구두지시에 의해 이뤄졌음을 확인한 점이다. 정부는 당시 개성공단 중단조치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결정됐다고 밝혔지만 혁신위 조사결과 이틀 전인 2월8일 개성공단에서 철수하라는 박 전 대통령의 구두지시가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혁신위는 또 당시 개성공단 중단의 근거로 내세운 ‘개성공단 임금의 핵개발 전용’ 문구는 충분한 근거 없이 청와대의 의견으로 삽입됐다고 밝혔다. 당시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정보기관의 문건은 주로 탈북민의 진술 및 정황에 기초한 것이다. 해당 문건에도 ‘직접적인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요컨대 신뢰하기 어려운 정보에 의존해 남북관계를 파탄으로 몰고갈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후 홍영표 당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으로 유입된 돈의 70%가 당 서기실에 상납됐다”고 했다가 국회에서 의원들의 추궁을 받자 증거자료를 갖고 이야기한 건 아니라고 번복하기도 했다.

정부는 더구나 국무회의도 열지 않은 채 대통령 자문기구에 불과한 NSC 상임위원회 결정을 기초로 11일 개성공단에서 인력을 철수시키고 단전·단수 조치까지 취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등 안보적 위기상황에 따른 통치행위라고 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이뤄졌어야 하지만 정부가 법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정세와 상관없이 공단의 정상운영을 보장한다’는 2013년 남북 간 합의서를 철석같이 믿고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인들은 날벼락 같은 결정에 수천억원대의 손실을 입었다.

보수정부의 대북정책은 ‘통치행위’라는 명목하에 법절차를 무시하고 이뤄지는 경우가 잦았다. 이명박 정부가 2010년 천안함 사태 대응조치로 내놓은 남북 간의 모든 교류를 전면 중단시킨 ‘5·24’조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통령이라고 해서 법률 위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이래서는 대북정책이 집권자의 뜻에 따라 요동칠 수밖에 없고, 정치적 후유증을 키우게 된다. 혁신위가 당부한 대로 이번 점검결과를 ‘남북관계를 당파성에서 벗어나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법률에 근거해 추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대북정책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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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검토 태스크포스(TF)’의 보고서에 적반하장식 반응을 내놓았다. 위안부 문제 합의 당시 외교장관이던 윤 전 장관은 이면합의를 했으며 이를 은폐했다는 지적에 “비공개 부분을 대외발표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계기에 국회, 언론 등에 설명했다”고 주장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이면합의 의혹이 쏟아질 때 자신을 포함한 정부 전체가 “절대 없다”고 부인하지 않았나. 그는 “특히 소녀상 문제에 대한 이면합의는 없다”고 다짐했다.

위안부 합의에 ‘최종적·불가역적’이란 표현이 들어간 데 대한 해석도 가관이다. 그는 “외교적 합의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기본적으로 불가역적”이라고 말했다. 외교적 합의와 불가역이 동일시된다면 왜 불필요하게 그런 표현을 합의문에 명기했는지 궁금하다. 특히 일본이 사죄할 경우 돌이킬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한국 측이 먼저 불가역적이란 표현을 제안한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더욱 공허해진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2월 29일 (출처:경향신문DB)

위안부 합의의 일본 쪽 당사자인 아베 총리는 TF 보고서가 발표되자 “위안부 합의는 1㎜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이 추가 조치를 요구하더라도 일절 응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이지만 무례한 발언이다. 지난해 일본 총리 명의의 사죄 편지를 쓰는 문제에 대해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응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일본 입장에서는 일단 합의한 내용을 재협상하려는 움직임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다는 점은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합의 이후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태도를 보면, 합의가 잘못되었음이 역설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합의 하루 뒤 “어제로써 모두 끝이다.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고 한 바 있다. 위안부 합의를 돈 주고 산 면죄부로 여기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20여일 뒤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은 증거가 없다”며 합의 사항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합의는 ‘(일본)군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남긴 문제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되어 있다. 지난 1월에는 소녀상 문제와 관련해 “10억엔을 줬으니 한국 측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진정성이 없는 거짓 사죄로 책임만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속내가 드러난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이다. 관련 당사자들 누구라도 피해자들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건 당연한 의무다. 누구보다 자숙해야 할 윤 전 장관과 아베 총리의 부적절한 처신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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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에게 ‘엘리트 코스’는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일까? 경향신문 11월25일자 ‘다른 삶’을 읽으며 들었던 의문이다.

그랑제콜이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성과이듯, 국립대학 평준화 역시 68혁명의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물론 엘리트교육기관으로 대표되는 그랑제콜과 대중교육기관으로 대표되는 국립대학으로 분리된 프랑스의 고등교육 체제는 “적어도 (모든 학생이) 입시에 매달려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가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시사점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엘리트가 아닌 대다수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할까?

우선 프랑스가 그랑제콜-국립대학이라는 이원화 체계를 도입한 68혁명 이후 어떤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었으며 교육체계가 이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를 잠시 살펴보자. 68혁명은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혁명이라 부르기에 무색할 정도다.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시작한 탈산업화로 인한 대량 실업사태가 제1·2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의 전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국립대학 평준화는 더 이상 고등교육 없이 계급상승이 불가능해진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동시에 프랑스는 공교육 서비스의 양적 성장 및 바칼로레아 취득률 80%라는 목표하에 일반계와 구별되는 기술계와 실업계 바칼로레아를 1968년과 1985년에 각각 창설했다. 역설적이게도 국립대학 평준화와 더불어 고등교육을 지속할 의지나 능력이 보이는 학생들을 일찌감치 선별, 격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계열이라는 차이를 서열화함으로써 학생의 향후 진로 및 직업의 선택지를 제한한 것을 뜻한다.

이와 동시에 교육 과정 다양화라는 명목하에 특정한 동네의 일부 학교에만 다국어반, 예체능반과 같은 특수반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러한 교육 체계를 숙지해 활용할 수 있는 특정 계층에만 혜택이 돌아가는 한편 그렇지 못한 학교의 게토화 현상을 초래했다. 세분화·위계화하는 중등교육 과정에 맞추어 고등교육 과정 역시 같은 길을 걸으면서 국립대학의 의과대학 및 법과대학, IUT(단기 공과대학)처럼 향후 안정적인 취업이 보장된 일부 학과에만 지원자가 몰리고 있다. “국립대만 아니면 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다수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국립대학 입학을 기피하고 있다. 실업계 바칼로레아를 취득하고 학사 과정에 입학한 학생들이 1년 유급해 4년 안에 학사학위를 취득할 확률은 약 5%에 불과하며, 전체 학생 중 학위 취득률도 60%에 불과하다. 취업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인문학 학과에 기술계와 실업계를 이수한 학생들이 등록하는 이유는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장학금 등의 혜택을 받으려면 학생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랑제콜에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사립학교를 선호하면서 학자금 대출 시장, 사교육 시장 역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어떠한 성찰을 요구하는가?

좌파로 분류되는 프랑수아 미테랑 정권에 들어서 본격화된 공교육 과정 개편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중상위계층 자녀다. 그리고 그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입학하는 고등사범학교가 보유한 교육 예산은 학생 한 명당 6만유로, 파리 정치대학은 1만5000유로인 반면 서민층 학생이 다수 입학하는 파리 8대학의 1인당 예산은 6000유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차별당하고 배제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서민층의 자녀들이며 그중에서도 프랑스 구 식민지 출신 유색인 이주 노동자의 자녀들이다. 그런데도 프랑스 사회는 이들을 프랑스 복지체계의 수혜자라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이들에게 그랑제콜이라는 엘리트코스는 (무)능력에 따른 결과나 하나의 선택지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외계다. 한국에서도 저소득층의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이주노동자 2세가 성인이 되어 대거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시점이 곧 다가온다. 이들에게 한국의 교육 체계는 어떤 미래를 제시해줄 수 있을까? 능력주의와 기회의 평등이라는 슬로건이 공정한 게임의 법칙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시기와 맥락은 지나버린 지 오래다. 이제는 게임의 룰뿐 아니라 장(場)을 대체할 이데올로기를 고민할 때다.

<김지영 이주노동자·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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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술 마시고 뻗어 있는 이종사촌 오빠더러 ‘먹고 대학생’이라 야단치면서도 엄마는 콩나물국을 끓여 주었다. 설렁설렁 대학교에 다니는 한가로운 대학생을 ‘먹고 대학생’이라 말했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의 처지는 영 다르다. 올해도 기말과제로 써내라 한 대학생들의 ‘삼시 세끼 보고서’에서 눈여겨본 것은 대학생의 점심이었다.

‘학식’이라 부르는 학생 식당에 가는 비율이 높긴 하지만 여전히 편의점 음식이나 ‘밥버거’로 빠르게 한 끼를 처리하는(?) 비율도 그와 비슷하다. 학교 앞 식당도 맘 편하게 가지 못한다. ‘학식’이나 편의점보다 1000원 정도 값이 더 나가 부담일 때가 많고 학교 밖까지 나갈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자신이 먹을 점심을 고르면서 돈, 시간, 맛까지 고민하다 보면 점심 한 끼 먹기가 그리 복잡하다. 결국 자신의 결정장애 때문이려니 하고 만다. 선택에 애를 먹는 이유는 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요 변수는 ‘시간’이다. 대학교에 점심시간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교에 점심시간이 없다 하니 동료들 반응이 ‘어떻게 학교에 점심시간이 없느냐’와 ‘대학교에 점심시간이 왜 따로 있느냐’로 나뉜다. 하지만 이 세대의 공통점은 점심시간이 따로 있거나 없거나 점심은 먹었다는 것이다. 공강 시간이 있어서였다. 점심시간이 따로 있던 나는 그때 제육볶음에 밥만 먹어야 했는데 ‘걸어다니는 식권’인 선배들의 꼬임으로 먹던 반주가 늘 문제였다. 딱 한 잔의 소주가 결국 몇 병이 되어 수업에 빠지기 일쑤였다.

출강했던 대학에도 원래는 점심시간이 따로 있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대학 방송국의 점심 방송과 함께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가끔 오글대는 사랑고백 사연도 나오는 그런 방송이 점심시간과 함께 사라졌다. 3학점짜리 수업시간은 50분 수업, 10분 휴식을 기본 뼈대로 삼았다. 하지만 3학점 수업을 1.5학점으로 잘라, 쉬는 시간을 없애고 75분으로 나눠 이틀로 구성하면서 캠퍼스 풍경도 바뀌었다. 통상 점심시간이라고 부르는 낮 12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수업이 배치되고, 의무화되다시피 하는 ‘복수전공’과 ‘부전공’ 수업까지 채우려면 학생들에게는 공강 시간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강의실을 옮겨 다니는 중에 먹거나 서서 먹거나 아예 굶는 일도 많다. 학생들이 이수해야 할 학점이 늘어나 강의도 많아졌고 강의실 사정도 여의치 않다. 그래서 학교 당국은 10분짜리 쉬는 시간마저도 알뜰하게 모아 강의실을 돌린다. 자료를 찾아보니 1981년부터 실시한 대학졸업정원제와 신규 대학 허가로 학생들이 많아지고 각 대학교마다 강의실이 모자라면서 대학교에서 점심시간을 없애왔다고 한다. 결정타는 외환위기 이후 대학졸업장이 취업 보증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점심시간마저 ‘영양’이 아닌 ‘역량’을 강화해야 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어른들이 그토록 힐난하던 ‘먹고 대학생’의 시대가 아니라 ‘먹고살자고 대학생’의 시대다. 먹고살기 위해 취업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복수전공, 부전공을 이수하고, 각종 공모전을 준비하느라 점심시간을 죽인다. 학자금이란 빚도 끌어안고 있으니 최소로 학교에 와야만 수업이 없는 날에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다.

점심을 부실하게 때우다 보면 훗날 건강도 땜질을 할 수밖에 없을 텐데. 따로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이들에게 한 시간만이라도 점심시간을 주면 정말 국가적 손실이라도 나는 것일까?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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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8이다. 그 이유는 ‘돈을 번다’ ‘재산을 모은다’를 뜻하는 ‘파차이(發財)’와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168(이리우빠)과 158(우아오빠)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이유도 ‘일생에 계속 돈을 번다’거나 ‘나는 돈을 벌기를 원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베이징 올림픽도 2008년 8월8일 저녁 8시8분에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쌍팔년도’ ‘58년 개띠’라는 말이 있다. <응답하라 1988> 드라마를 본 세대들은 ‘쌍팔년도’를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1988년)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는 ‘단기 4288년’으로 1955년을 말한다. 이와 더불어 입에 오르내리는 말은 ‘58년 개띠’다. ‘57년 닭띠’ ‘59년 돼지띠’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1958년 개띠는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다. 시인 서정홍은 <58년 개띠>라는 시집을 냈다.

60년 만에 찾아오는 내년 ‘황금개띠 해’를 맞아 서울 중앙우체국 직원들이 27일 다양한 개의 형상을 표현한 연하카드를 선보이고 있다. 이상훈 기자

2018년은 무술년 개띠 해이다. 60간지의 10간 가운데 무(戊)는 황금색, 12지 가운데 술(戌)은 개를 뜻하기 때문에 ‘황금개띠의 해’라고 한다. 2007년은 황금돼지의 해라고 해서 떠들썩한 적이 있다. 그해에 태어나면 운수가 좋다는 말도 나왔다. 그래서인지 이때 출생아는 49만명으로 전년도인 개띠해 44만명이나 다음해인 쥐띠해 46만명보다 월등히 많았다. 사실 2007년은 ‘붉은 돼지의 해’였으나 유통업계에 의해 황금돼지의 해로 둔갑했다.

우리 주변에 개만큼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한 동물도 드물다. 한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개뼈가 발견됐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개그림이, 신라시대에는 개형상을 한 토우들이 나왔다. 개의 이상한 행동을 불운의 징조로 보기도 했다. ‘개가 지붕에 올라가면 흉사가 있다’고 했다. 개가 인간에게 도움을 주거나 은혜를 갚은 의견설화나, 의구총(개무덤), 의견비(개비석)도 있다. 인간에게 충성한 개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각종 욕설이나 비하의 상징으로 동원되기도 한다. 아마도 흔하기 때문인 듯하다.

황금개띠해를 앞두고 ‘개 마케팅’이 한창이다. 반려동물 1000만가구 시대를 맞아 관련 업계의 기대도 크다. 하지만 마케팅의 관점에서는 2019년에 더 시선이 간다. ‘황금개의 해’보다 한 수 위인 ‘황금돼지의 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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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눈이 많은 올해다. 밤새 소복이 쌓인 눈처럼 12월의 밤들도 소리 없이 내려앉으며 한 해의 끝에 닿고 있다. 지난 한 해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들 마음속 시간들을 포근히 감싸는 하얀 위로들이다.

지난 26일자 경향신문의 1면 첫 화두는 ‘77만원세대’였다. 통계청의 ‘2017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 지난해 30세 미만 저소득 청년 가구 한 달 소득이 78만원이었다는 것이다. 2007년 여름 우석훈·박권일이 저서 <88만원세대>를 통해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청년의 불안한 삶을 공론화한 지 꼭 10년 만이다. ‘88만원세대’가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면, ‘77만원세대’는 스스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고 한다. ‘생’ 자체를 부정하는 허깨비 같은 삶들의 절망이 가슴에 박힌다.

출처:경향신문DB

20대의 상위 5%만 공무원·대기업 같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나머지 95%는 비정규직인 ‘0.5 대 9.5’의 사회가 88만원세대의 사회상이라면, ‘77만원세대’는 더욱 악화됐을 터. 어쩌면 ‘0.1 대 9.9’의 사회가 지금 우리 눈앞에 서성이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절망의 심연은 다른 곳에 있다. 추락하는 청년의 삶과 달리 국가·기업의 부는 커지는 모순이다. 2006년 국내총생산(GDP)은 847조8760억원이었다. 지난해는 1637조4200억원으로 2배 가까이 성장했다. ‘30대 기업집단의 사내유보금 추이’ 자료를 보면 기업들 유보금은 2006년 127조4000억원에서 2015년 478조원으로 275% 폭증했다.

자본은 고삐 없이 증식하지만, 공동체는 깊은 속병이 들고 있다. 헤어날 길 없는 불평등은 절망을 낳는다. 절망은 분노를 만든다. 분노는 한 사회를 파괴한다. 이런 공동체가 지속가능할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짓누르는 질문이다. 부의 편중과 민심의 균열은 모든 국가들의 말기적 증상이었다. 그래서 부의 편중의 통제는 정치의 책무다.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국무위원들과의 만찬에서 “촛불민심을 받들어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은 1년, 2년 이렇게 금방 끝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적폐청산의 목표가 비정상 권력의 정상화, 즉 우리 사회 권력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면 참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탄핵과 대선을 통해 정치권력의 변화를 이뤄냈을 뿐 우리 사회 각 권력들의 관계가 정상화됐는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적폐청산의 궁극적 지향점은 구성원들의 삶이어야 한다.

적폐청산의 완성은 공동체를 위협할 만큼 심화한 부의 편중과 불균형의 해체다. 이는 ‘자본의 민주적 통제’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권력에 휘둘리고 위협받는 정치·사회 권력을 정상궤도로 돌려놓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권력(손)’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정치·사회 권력의 극복은 지금 모든 국가들의 고민이고 과제이기도 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미국 정치 시스템은 갈수록 ‘1인 1표’ 원리보다는 ‘1달러 1표’ 원리에 동화돼 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실제 문재인 정부 1호 정책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었다. 그 첫 발자국으로 찾았던 인천공항공사는 26일 비정규직 1만명의 정규직화를 위해 3000명은 직접 고용, 나머지 7000명은 자회사 정규직으로 채용키로 했다. 그 확대판이라 할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를 담은 새해 예산안도 “포퓰리즘” 비난 등 진통 끝에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중소기업 다 망한다’는 일각의 선동에도 최저임금 인상도 일단 결정됐다.

이처럼 하나하나 지향하는 것은 소득과 자본의 분배, 편중·편식의 완화에 맞춰져 있다. ‘임금 상승-소비 촉진-생산 증가’의 선순환으로 경제성장과 복지를 모두 이뤄내겠다는 ‘소득주도 성장’론은 자본의 민주적 통제의 다른, 아주 완화된 표현으로 읽힌다.

하지만 고삐 없는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운위될 때마다 따라붙는 이야기는 ‘기업 죽이기·때리기’다. 90% 시민의 삶은 나빠지는데 국가·기업은 살찌는 모순 속에서 자본의 민주적 통제가 ‘기업 괴롭히기’로 둔갑하는 현실이 기막히다. 민주적 권력의 권위를 위협할 만큼 자본의 힘은 세다.

자본이 권위를 가진 권력에 의해 정상 통제될 때 개인의 삶도 나아진다는 경험을 주는 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다. 어쩌면 문재인 정부에게 주어진 그 시간은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니 하고 싶은 것 다해’라는 여론의 동력에도, 입법 과정에선 소수정권임을 연일 확인하는 게 현실이다. 자본의 민주적 통제와 이를 밀고 가야 할 정권의 현실적 조건의 괴리는 크다. 앞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넘어서는 길은 그만큼 험난하다. 영리한 정치권력의 유능함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광호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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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해가 저문다. 광장과 길거리를 터질 듯 가득 메운 촛불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사회 변혁을 향한 힘찬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물꼬가 막혀 있는 곳도 많다. 문재인 정부의 주요 공약인 ‘안전한 사회’와 ‘지속가능한 사회’가 그렇다. 지난 21일, 제천의 화재는 우리가 아직도 ‘대충’과 ‘설마’라는 안전 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설은 부실하고, 운영은 편의적이고, 점검은 형식적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하게’라는 암묵의 요구에 침묵의 동의를 하는 다수가 있는 한, 안전한 사회는 요원하다.

성장을 위해 더 많이 생산하고, 생산한 만큼 더 써야만 하는 경제체제에서 소비주의의 확산은 불가피하다. 소비주의는 이미 우리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대로, 마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순례 장소로 등극했고, 쇼핑은 예배가 되었다. 사람들은 얼마나 더 소유하고 소비해야 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소비는 가히 경배의 수준에 올랐다. 이런 고도의 소비사회가 지속가능할 리 없지만, 변화를 택하는 사람은 소수다. “설마, 끝장이야 나겠나.” 사람들은 익숙해진 길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다.

많이 쓰고 쉽게 버리는 생활양식은 생태적 부담과 사회적 갈등의 주요 원인이다. 소비의 증가는 곧 쓰레기의 증가다.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쌓이게 마련이라, 이제는 바다에도 거대한 쓰레기 더미들이 생겨났다. 글자 그대로 “우리의 집인 지구가 점점 더 엄청난 쓰레기 더미”로 변하고 있다(프란치스코 교종, <찬미받으소서>). 상시적 업무에 대한 비정규직의 확산은 우리 사회가 이제는 사람도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해준다. ‘버려진’ 노동자들은 아직도 살을 에는 추위에 거리를 헤매고 굴뚝에 올라가 내려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강박적 소비주의”와 “집착적 소비주의”에 빠진 채 “소비의 자유를 누리는 한” 자유롭다고 착각한다(<찬미받으소서>). 소유와 소비의 능력이 성공으로 간주된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불안과 위기의식이 고조된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더 몰아붙인다. 기약 없는 내일에 오늘을 담보로 잡힌 채, 스스로 노예가 된다. 소비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안전한 사회도 지속가능한 사회도 불가능하다. 부정하기 힘든, 암울한 전망이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란다. 소유와 소비에 매달리는 것도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얻는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끝없이 ‘더’를 향해 질주하는 우리의 고단한 현실이 그 증거다. 사실 우리들은 일상의 소소한 체험을 통해 어떤 때 진정으로 행복해지는지 알고 있다. 앞만 보며 질주할 때가 아니라 옆을 보며 함께 갈 때, 뒤처진 사람들에게 서로 관대히 손을 내밀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 행복은 오래 지속된다. 인간 실존(ex-istence)은 자기 ‘밖에 서는(standing outside)’ 존재인 것이다. 자기를 비우고 거기에 타자를 채울수록 충만해지는 역설적 존재, 사람이다. 그러니 소비주의는 인간의 완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길이다.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소비해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를 향한 끝없는 몸부림에 사로잡힌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는 정부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우리 각자의 적극적 응답이 필수다. 우리가 자신을 비움으로 충만해진다면, 소유나 소비가 아닌 내어줌과 검약을 우리의 기본 생활방식으로 삼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송구영신의 때.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하게’는 이제 그만 우리 마음에서 지우자. ‘조금 천천히, 조금 적게, 조금 불편하게’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자. 그럴 때,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는 느리지만 분명한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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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은 안 오십니까?”

“아…모르셨어요? 지난달에 돌아가셨는데.”

석 달 만에 다시 열린 동네 애서인 모임에서 박 선생은 내 대답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뭐라고 덧붙이려다 그냥 입을 닫고 말았다. 얘기해 봐야 더 안타까울 뿐이다.

동네에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 몇몇을 모아 애서인 모임을 만든 건 김 선생이다. 그동안 모임 이름도 없이 몇 번 모였다가 ‘다음번엔 멋지게 하나 지읍시다!’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든 게 김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를 처음 만난 건 설 연휴 때였다.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곳에 쌓인 책들을 뒤적이다가 뒤표지가 찢어진 <화씨451>을 집어 들고 살펴보는데 그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그거 첫 번역판이네요. 보기 힘든 건데. 번역자가 엉뚱한 사람으로 나와 있거든요.”

그 몇 마디에 심상치 않은 내공(?)이 느껴졌고, 그 자리에서 선 채로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요즘 세상에 그 정도로 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드문 일이었다. 다독가는 많지만 책이라는 물성 자체를 아끼는 애서가는 점점 멸종해가고 있었다.

그다음 주였나, 김 선생을 따라 옆 동네의 작은 독립서점에 갔었다. 진작부터 한번 가봐야지 하고는 바빠서 통 발길을 주지 못하던 곳이다.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인 듯 두 사람은 인사도 생략하고 곧장 신변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재계약했어요?”

“…아뇨. 정리하기로 했어요. 남편도 직장을 옮겨야 해서.”

“아이고… 참.”

김 선생은 그 서점이 폐업을 고민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곳에서 알게 된 몇몇 동네 손님들과 대책을 논의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서점이어도 한 줌밖에 안 되는 단골 고객들로는 안정적인 경영이 어려웠다. 결국 지난봄에 서점이 문을 닫은 뒤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 애서인 모임이었다.

지난번 모임에서 김 선생은 불콰해진 얼굴로 맥주잔을 집어 들다 말고 말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나치 독일의 분서도, 1970년대 우리나라의 소위 불량만화 화형식도 다 한때의 과거일 뿐이었는데… 이건 뭐 어떻게 거스를 수가 없을 거 같아요.”

나 역시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기에 그저 침묵만 지켰다. 도서관들이, 서점들이, 그리고 책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전자책이 종이책의 자리를 대체한 지는 오래되었다. 학교나 도서관에서 전자책이 지닌 정보단말기로서의 장점은 종이책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주말마다 재활용쓰레기장에 책이 잔뜩 쌓이는 일이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도서관의 책들은 극히 일부만이 보존서고에서 생명을 유지했고 방대한 공간을 자랑하던 열람실은 시시각각 전자식으로 탈바꿈했다. 책은 이제 더 이상 정보나 교양을 전하는 수단이 아니라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탐닉하는 문화재일 뿐이었다.

지난달 초, 갑자기 김 선생의 딸이 연락해 오면서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장례까지 치른 뒤였고, 딸은 아버지가 남긴 5000권 가까운 책들을 어찌 처분해야 할지 몰라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모두 재활용쓰레기로 버리려다가 생전에 책을 아끼던 아버지 생각이 나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고인의 수첩에서 애서인 모임의 내 연락처를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책들 중에서 고서적으로 가치가 있거나 그나마 중고서점에서 매입할 만한 책은 채 100권도 안 되었다. 책 하나하나는 모두 인류의 지적 유산이 담긴 위대한 내용들이었지만 도서관에서는 더 이상 개인 장서를 기증받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훨씬 더 풍부한 인터페이스가 달린 전자책으로 소장되어 있는 텍스트들이었다. 정말 피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결국 그가 남긴 책들 대부분은 그냥 폐지로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박 선생에게 말했다.

“<화씨451> 읽어보셨나요? 책이 금지된 사회 이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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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0대들은 새로운 정보를 검색할 때 구글 같은 문자 포털사이트가 아니라 유튜브부터 먼저 찾아본다고 한다. 즉 문자매체가 아닌 시각매체, 그중에서도 동영상매체를 가장 익숙하게 느낀다는 말이다. 스마트폰이 대세가 된 것은 2010년 이후이다. 21세기에 태어나 자란 세대는 바로 이 시기 즈음부터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며 동영상매체라는 환경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정보단말기로서 책은 이제껏 절대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작동하는데 에너지가 필요 없고, 어린아이라도 금방 사용법을 익힐 수 있으며, 거친 충격도 문제없이 견디는 튼튼한 내구성을 지녔다. 그래서 앞으로도 책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문자매체보다 시각매체, 동영상매체를 더 편하게 여기는 인류 역사상 첫 세대가 등장하면서, 책의 장점들보다 단점이 점점 더 두드러지는 시대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다. 한마디로 말해서 21세기는 ‘구텐베르크 마인드’가 저물어 가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매체 환경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에 기반을 둔 지적 사유를 하는 기성세대와, 이미지를 사고의 기본 도구로 사용하는 새로운 세대. 과연 이 둘의 차이는 인류 문화사에서 어떤 의미를 나타나게 될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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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안경점’은 망원우체국 사거리에 있는 적당한 규모의 안경점이다. 1991년부터 자리를 잡은 그곳에서 나뿐 아니라 성산동과 망원동의 아이들이 대부분 첫 안경을 맞췄다. 주인인 30대 남자는 언제나 친절했다. 시력검사를 하고, 테와 렌즈를 고르고, 시간이 걸려 안경이 완성되고 나면 그는 “자, 한 번 볼까” 하면서 손수 안경을 씌워주었다. 그때 볼의 약간 윗부분에 그의 손이 닿았다. 참 따뜻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스무 살이 되어 나는 망원동(성산동)을 떠났다. 그러고는 학교 때문에, 군대 때문에, 직장 때문에, 그 무엇 때문에 계속 멀어져 있었다. 한동안 안경점에 갈 일도 별로 없었다. 이전처럼 안경을 자주 부러뜨리지도 않았고 시력이 크게 변할 일도 없는 나이가 되었다. 직장 근처에는 ‘안경나라’나 ‘다비치’ 같은, 점원을 몇 명씩 두고 영업하는 대형 안경점들이 있어서, 주로 거기로 갔다.

얼마 전 “스마트안경 딸입니다”라고 시작하는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안경점 주인의 딸이라고 밝힌 그는, 얼마 전 출간한 나의 <아무튼, 망원동>이라는 책을 잘 읽었다면서 “작가님이 저희 부모님의 사업체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계신 것 같아서, 반갑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 시간이 괜찮으시면 12월 중순쯤에 한번 가게에 방문해주시겠어요?” 하고 제안했다. ‘도시를 자신의 고향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는 <아무튼, 망원동>을 내고서, 아무튼,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답장을 보내고 곧 만날 약속을 잡았다.

가는 길에, 동네 책방인 한강문고에서 나의 책을 한 권 샀다. 별로 많이 팔린 책이 아닌데도 베스트셀러 매대에 작은 메모까지 더해서, 왼쪽에는 유시민 작가가 오른쪽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있는 그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동네 작가의 책을 굳이 잘 보이는 매대에 놓아준 동네 책방의 후의에 깊이 감격했다. 한강문고부터 스마트안경점까지 약 3분쯤 걸리는 그 거리를, 어느덧 아홉 살에서 서른다섯 살로 훌쩍 자란 나는 나의 책을 들고 걸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 내외가 나를 보고는 아, 왔네, 하고는 “아니 그때 얼굴이 남아 있네, 기억이 나요” 하고 몇 번이고 말했고, 나 역시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목소리도 그대로세요” 하고 인사드렸다. 아홉 살과 삼십대 후반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준비해 둔 책 다섯 권을 여기에 사인을 좀 해 줘요, 하고 꺼내 놓고는, 나의 안경을 벗겨서 이리저리 매만졌다. 나는 민망해서 “아이하고 놀다 보니까 안경 코가 계속 휘어요” 하고 변명하듯 말하고, 책 다섯 권에 나의 이름을 적어 나갔다. 과연, 책에는 ‘한강문고’의 도장이 선명해서 괜히 다시 울컥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나는 시력검사 기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도수를 낮추는 게 더 잘 보이겠고, 난시도 조금 조정이 필요하겠고, 어디 이걸 한 번 써 보자” 하고는 새로운 렌즈를 내 눈 앞에 가져다 댔다. 갑자기 세상이 너무 밝아져서 나도 모르게 앗, 하고 반응하자, 그는 “됐네, 우리 밥 먹고 오자” 하고 나를 이끌었다.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한 동네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할 법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안경점에 돌아와서 그는 완성된 안경의 렌즈를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내가 “사장님, 괜찮아요…” 하고 말하자 그는 “나는 여기에서 안경 팔아서 벌 만큼 벌었어, 이 안경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과 완전히 같은 모델이야, 렌즈도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좋을 만한 것을 골랐어, 정말 좋은 안경이지, 그러니까 계속 글 잘 써요” 하고 답하면서, 나에게 안경을 씌워주었다. 25년 전 볼에 닿던, 그 따뜻한 감각 그대로였다.

어느 동네에나, 그 자리를 오래 지켜온 가게들이 있다. 그곳의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노동을 해 온 이들이 있다. 스마트안경점에서 내가 맞추어 온 것은 단순한 안경이 아니라 추억이었다. 그래서 그 사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괜히, “아, 우리 동네는 여전히 ‘잘’ 있구나” 하는 마음이, 정말로 드는 것이다. 한강문고 역시 동네의 서사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동네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이 여전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몸이 나이 들고 부수어지는 만큼 건물과 가게 역시 그런 부침을 겪겠지만, 그래도 그 사라짐이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추억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조금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일어나기를 바란다. 새로움과 여전함이 공존하고 그 안에서 자란 모두가 안녕한 공간, 도시의 고향이 가져야 할 모습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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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학교 안에서 민주시민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민주시민 교육이 학교 안에서 교육과정으로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교육 주체들이 민주시민으로서 정치적 경험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독일에선 만 16세가 되면 지방선거 투표를 할 수 있다. 18세 국회의원이 배출되기도 했다. 독일 교사들은 정치 활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 제16대 독일 연방의회(2005~2009)의 경우 재적의원 614명 중 13.2%에 해당하는 81명이 교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법조인(143명, 23.3%)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이었다.

의회 구성에서 교사 출신 의원 비중이 큰 것은 독일 외에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교육은 학교 담장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에서 학교 안팎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나 힘이 서로 격렬하게 각축한다. 이때 교육 전문가로서 거시적·미시적 시야를 두루 갖춘 교사가 교육 개혁과 발전에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45만명에 이르는 우리나라 교원은 심각한 ‘정치적 금치산’ 상태에 있다. 선거운동 제한, 공직선거 입후보 시 강제 사퇴, 정당 발기인 및 당원 가입 금지 등 투표권을 제외한 나머지 정치적 자유권 전체를 철저하게 금지당하고 있다. 교사와 동일하게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교수에게 정치적 기본권이 제한 없이 보장되어 있는 것과 크게 대조된다.

흔히 교사들의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하는 핵심 근거로 헌법 제31조 제4항의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조항을 든다. 잘못 이해되는 측면이 크다. 헌법상의 정치적 중립성 규정은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 정치 활동 자체를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교 안에서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거나 교육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학교 밖의 사적 영역에서는 종교 활동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 교사 개인의 종교 활동이 직무인 교육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폭넓게 허용하는 것이다. 교사 정치 활동의 자유 역시 최소한 그 정도 수준에서 허용되는 것이 헌법 정신에 맞다.

최근 교육계 안팎에서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사들이 주도하고 있는 ‘교사정치기본권찾기연대’(cafe.naver.com/teacherscivil) 발족도 그런 흐름의 하나다. 이들은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하는 하위 법령들에 대한 위헌 청구를 위해 내년까지 1만인 청구인 모집 운동을 펼칠 계획을 갖고 있다.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 찾기 운동은 교사의 정치 세력화가 아니다. 민주시민 양성이라는 우리나라 교육과정의 최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다. 교사들의 정치 기본권 보장 요구는 일부 급진적인 교사들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다. 일찍이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엔 등 국내외 권위 있는 기관들이 교원·공무원의 정치적 자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권고안과 보고서를 수차례 제출한 바 있다.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과 관련한 세계 표준은 ‘허용’이다. 교사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하위 법령들의 위헌성을 밝히고 조속히 개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은균 군산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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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수업이 끝났다. 학교에서의 강의가 이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 최근에 와서 그런 기미가 더욱 강해졌다.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집중도나 열의를 찾기가 어렵고 대신 권태로움과 무료함이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어서 난감했다. 

무엇보다도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현재의 시간을 압도하고 있으며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앞당겨 지금의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의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없는 시간을 사는 것이고 결국 지금은 사라진 이상한 시간대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정신병자들이거나 유령들이다. 대다수 학생들은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갖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표정들을 짓고 앉아서 시간을 죽이고 있거나 자고 있다.

중·고등학교까지의 생활이란 게 오로지 대학에 입학하는 것에만 설정되어 있기에 정작 그 목표가 달성된 순간 아이들은 맥없이 풀려나버린 존재가 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격렬하게 맴돈다. 

그 어떤 목표도 죄다 사라져버린 공황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적극 찾아나가는 것에 대해 배운 적이 전혀 없고 그런 습관 또한 몸에 배지 않은 아이들은 그저 수동적인 존재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니 이들이 대학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열렬히 찾아나가며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를 갖기는 지난한 일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오로지 취업률과 성과 위주로 대학평가가 강제되는 상황에서 예술대학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되었다. 현재 지방의 미술대학들은 거의 사라져버렸거나 디자인과에 수렴되거나 혹은 문화산업적이고 경영학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묘한 이름으로 겨우 살아남고 있는 형국이다. 진정으로 아티스트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이 갈 만한 대학 자체가 드물고 정작 들어와도 워낙에 취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극대화하는 터에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면서 지레 전공을 포기하거나 타 전공을 기웃거리면서 스펙을 쌓도록 부추기는 현실에 종속되고 있는 지경이다.

학생들이 대학에서의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부모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학부모들 자체가 우리 사회 현실이 요구하는 삶의 논리에 길들여져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무서운 불안과 공포를 지니고 있기에 아이들에게 권하는 전공이란 결국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돈벌이가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되는 전공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는 안이한 소시민적 삶에 한정 없이 굴복시키는 생의 논리를 내재화한다. 그러니 미술대학 자체를 외면할 것이다. 혹 미술대학에 보내는 경우에도 디자인이나 취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전공으로 제한하려 든다. 

그러한 부모의 인식에 따라 전공을 선택한 아이들, 4년제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강박에 따라 점수에 맞춰 들어온 아이들 혹은 전공 불문하고 어떤 식으로든 들어온 아이들에게 대학에서의 전공이란 자신의 소질, 생의 의미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겉돈다. 그러니 학교생활과 수업 역시 매번 미끄러질 뿐이다. 따라서 이런 학생들이 졸업을 해서 미술계로 나가 좋은 작가가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아니 미술대학에서의 생활 자체가 무의미하다.

한편 미술대학에 와서 작업을 하겠다는 학생들은 좋은 작품을 하는 작가가 되는 게 목표여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취업률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너무 이상한 논리가 아닌가? 

올 한 해 수많은 아트페어를 보았고 적지 않은 전시를 봤지만 눈에 띄는 좋은 작가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좋은 전시도 극히 드물었다. 아트페어에 참여한 그 많은 작가들은 시장에서 팔리는 몇몇 작가들의 작품들을 노골적으로 베끼느라 엉망진창이었다. 한 작가의 미술에 대한 생각, 그만의 감각, 감수성과 고유한 그림의 맛이 논의되는 게 아니라 그저 시장에서 얼마나 팔리느냐 라는 정량적 평가가 작가 작품의 질을 압도하는 형국이 빚은 참사다. 이는 결국 대학에서, 아니 그 이전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과 마음으로 사물과 세계를 보고 이를 애써 자기 식으로 표현해내면서 열정적으로 살아오는 대신에 정답 같다고 여겨지는 것을 슬쩍 간편하게 차용해서 교묘하게 자기 것으로 포장하고, 작업하는 일 역시 상품제작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비즈니스적 마인드로 미술을 대하는 태도에서 불거져 나온 왜상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 화단이 빚고 있는 이 온갖 병리적 현상의 기원은 이미 우리의 교육제도 안에 깊게 자리를 틀고 있는 셈이자 더불어 학부모들이 지닌 비겁한 생의 논리로 인해서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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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혼술의 끝은 혼절과 혼령이라던가. 혼자 놀다 혼자 죽기를 바란다면 뭔 소리야 하겠지만, 세계대전보다 무서운 부부싸움이나 데이트 전쟁이 생기면 인류 모두의 소망이겠구나 싶어질 게다. 세밑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누군가 곁에 있어야 하는데도 또 혼자가 좋은 때가 못지않게 많다. 잠깐 누가 곁에 없어 어쩔 수 없는 혼밥 말고 정신없이 사느라 혼밥을 먹어야 한다면 서럽겠지.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낸 사람들을 ‘혼크족’이라 한단다. 혼자 생일을 맞으면 혼나. 그러면 친구들에게 진짜 혼나게 되어 있다. 뉴요커는 혼커들이 많다. 혼자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우리도 혼커가 많아졌는데, 혼밥은 이제 시작 기미. 월급쟁이들은 혼밥을 먹어야 지갑이 그나마 줄지 않을 것이다. 고기라면 환장을 하거나 철판이 두꺼운 아재들은 혼자 식당에 앉아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한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처량한 생각이 쬐끔. 같이 먹어주면 계산은 내가 안 해도 되겠지? 고기를 얻어먹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겠다.

영화 <범죄도시> 말미에 윤계상이 결투를 앞두고 “너 혼자냐” 묻자 엉뚱하게도 “아직 싱글이다” 대답하는 마동석. 실제로 싱글 아니잖아. 비현실 몸매를 자랑 삼은 여배우 애인을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깨는 순간’. 웃자니 성질이 조금 나려는 부분이었다. 한 솔로(해리슨 포드)를 죽이고서도 잘될 줄 알았더냐. 너 스타워즈! 한 솔로는 타투인 행성에 잠시 내렸다가 루크 스카이워커를 만나게 된다. 돈벌이로 루크를 자신의 비행선 밀레니엄 팔콘에 실은 게 그만 사달이 나고 만다. 이름은 솔로인데 털북숭이 외계인 조종사 츄바카와 단짝동무. 게다가 레아 공주님과 열애 끝에 애까지 둔다. 배 아파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 감독이 그랬을까. 한 솔로는 어쩌다가 아들에게 칼베임을 당하고 극장에서 영영 쫓겨났을까. 어디 저승길에서 혼자 혼밥을 즐기고 있겠지. 한 솔로가 문득 보고 싶구나. “혼자가 훨 나서. 병들어가꼬 둘이 요때까지 사렀으믄 날마다가 지옥이재.” 일찍 혼자 된 동네 할머니는 그렇게 자족하면서 오늘도 혼밥이다. 나도 이 산중에서 자발적인 혼밥에 혼커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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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열기가 결실을 맺어가던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기억난다. 전쟁의 아픔을 겪고 못살던 나라가 불과 몇 십년 만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큰 업적을 서울 올림픽을 통해 세계에 과시한 큰 경사였다. 그로부터 꼭 30년이 되는 해에 우리는 올림픽의 양대 꽃이라 할 수 있는 평창 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 또한 개최하게 되었다. 그것도 3번의 시도 끝에 선정된 자랑스러운 쾌거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우리 민족의 경사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북한의 지속적인 핵실험, 미사일 도발과 이로 인한 한반도 긴장 고조 때문이다. 경사스러운 날에 전 세계인들을 초청해 놓고 언뜻 보면 신변안전에 우려와 걱정이 생긴 나라로 오라고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느 어느 나라는 참가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및 동계패럴림픽 시상식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2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상식 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까지는 이제 40여일 남았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개최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올림픽의 정신은 무엇인가?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올림픽은 한마디로 참여를 통해 우정을 나누고 평화와 자유를 고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연기 조정코자 하는 결단까지 검토 중이다. 동맹국인 미국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올림픽을 위해 동맹의 가치나 안보까지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안보태세는 늘 유지하되 전 세계인들이 참여하는 올림픽을 위해 혹시 긴장을 유발시킬 수 있는 일은 좀 미루자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지금과 같은 한반도 위기상황에서도 팀스피릿 훈련이 일시 중단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우리 국민에게 이러한 사항은 우리 정부에 좀 맡겨두자고 당부하고 싶다. 연합훈련의 문제로 한·미동맹 전체를 평가하면서 이러쿵저러쿵하여 국론이 분열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양국 간 외교안보 문제까지 염두에 두면서 결정을 내릴 우리 정부를 국민들이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올림픽 계기 휴전결의안도 채택된 만큼 한·미뿐 아니라 주변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들이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에 협력해야 할 것이다.

거창하게 올림픽 정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민족의 경사에 북한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이다. 북한은 당장 도발을 멈추고 전 세계인과 민족의 축제에 동참하길 바란다. 절대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같은 긴장고조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1월1일 북한 신년사에서 긴장고조 중단과 올림픽 참여를 위한 메시지를 내길 바란다. 그런 의사만 있다면 북한 참가인원의 참여를 위한 대화의 장은 언제든지 열려있다. 며칠 전 강원도 남북교류협력단이 중국 쿤밍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에서 북한 측 체육계 고위급을 만났다고 알려지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북한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이 올림픽위원회 및 국가, 민간 차원에서 다방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야 할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보자. 북한은 더 이상 이러한 기회를 실기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출구전략을 찾아야 한다. 강대강으로 가면 압박과 고립의 악순환만 지속될 뿐이다. 한·미 연합훈련 연기 조치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고 조건 없는 대화와 협상에 임해야 한다. 언제까지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을 것인가? 대결과 갈등, 고립이 아닌 참여와 대화를 통해 진정한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 

내년은 황금개띠의 해로 알려져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개는 환영과 소통의 아이콘이다. 용감함과 책임감의 상징이기도 하다. 새해에는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여가 전 세계인의 환영을 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 미래에 대한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남북이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시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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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가 내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시행할 ‘중장기 보육 기본 계획’을 27일 내놨다. 500가구 이상 아파트나 공공 임대주택을 지을 때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를 의무화하고, 일정 규모 이상 사업장의 직장어린이집 의무 설치 이행률을 90%로 높이겠다는 게 핵심이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위해 필요한 보육시설을 확충하겠다는 취지다. 현재 전국 500가구 이상 공동주택에 설치돼 있는 어린이집 5800여곳 중 국공립은 727곳에 불과하다. 지금도 500가구 이상 공공주택을 지을 때 어린이집 설치는 준공 허가의 필수 사항이다. 하지만 부모의 선호도가 높은 국공립 어린이집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는 강제조항이 없어 민간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대부분이다.

복지부는 상시 노동자 500명 이상이거나 여성 노동자 300명 이상을 고용하는 사업장의 직장어린이집 의무 설치 이행률을 지난해 말 81.5%에서 90%로 높이기로 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전국 직장어린이집 1012곳 중 기업이 설치한 어린이집은 623곳에 불과하다. 그나마 대기업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513곳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중소기업이 공동으로 설치한 직장어린이집은 30곳에 그쳐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보육 혜택에서도 소외돼 있다. 그럼에도 복지부가 중소기업 노동자를 위한 공동 직장어린이집 확충 방안을 내놓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때마침 교육부도 ‘유아교육 혁신방안’을 내놨다. 국공립 유치원 비율을 현재 25%에서 2022년까지 40%로 높이고, 공공성이 확보된 유치원을 ‘공영형 사립유치원’으로 지정해 운영비의 최대 50%까지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한국 사회의 최대 현안은 저출산 심화에 따른 인구절벽이다. 올해 출산율은 사상 최저 수준인 1.03명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 높은 공공 보육시설의 확충이 필수적이다. 보육은 부모가 아닌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보육의 공공성 강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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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을 27일 내놨다. 삶의 질에 가시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지향점이다. 사람중심 경제·소득주도 성장의 연장선이다. 양적 성장을 강조하던 역대 정권에 비해 질적 성장을 한가운데에 놓았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의제 설정이다. 다만 구체적인지, 실천가능한지 꼼꼼히 따져봐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정부는 삶의 질을 높일 두 축으로 일자리 창출과 혁신성장을 제시했다. 혁신성장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분배에만 치중하지 않고 산업을 부양하면서 4차 산업혁명시대에 대비하고 일자리도 늘리겠다는 다목적 포석일 것이다. 하지만 관이 나서 선도산업을 발굴·지원하고 규제도 완화하겠다는 개발경제식 해법이 얼마나 성과를 낼지는 의문이다. 정작 정부의 역할이 절실한 조선 등 전통산업 대책은 아예 없다.  

취업자수 전망치는 5개월 전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의 36만개보다 낮은 32만개로 제시했다.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일자리가 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과거 정부 때 실패로 끝난 고용증대 세제 같은 정책을 다시 들고나왔다. 청년들로 하여금 고용정책을 직접 만들게 하고, 기업들에 청년고용 장려금을 제공하는 정책도 효과는 미지수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며칠 전 청년실업 해결책을 묻자 “2022년까지 계속 나빠질 것이다. 얼마나 완화시키느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문제 해결에 의지가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는 저소득층 소득을 늘려 소비를 살리고 이를 기업생산으로 연결하면서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이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역대 정부가 출범 초기 한결같이 민생을 얘기하고도 늘 실패로 끝난 것은 조급증과 성과주의에 쫓기다 종국에는 기득권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삶의 질 제고의 초점이 저소득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을 위한 정책이 더 촘촘하게 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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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장관 직속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가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한 조사결과를 27일 발표했다. 조사결과를 보면 박근혜 정부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졸속적 합의를 서둘렀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특히 위안부 문제 합의에 이면합의가 존재하며 박근혜 정부가 이를 은폐했다는 TF의 발표는 충격적이다. 한국 정부가 해외 소녀상 건립을 지원하지 않고, 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를 설득하며, ‘성노예’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는 일본 쪽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는 내용이다. 위안부 합의 이후 일본이 소녀상 이전을 마치 한국이 합의한 것처럼 강하게 요구하는 등 적반하장식 공세를 펴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잘못된 합의로 위안부 피해국과 가해국의 입장이 뒤바뀐 셈이다.

합의에 ‘이 문제(위안부)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표현이 들어간 과정도 어처구니가 없다. 한국 측은 일본의 사죄가 ‘되돌릴 수 없는 사죄’가 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먼저 이 표현을 요구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협상 과정에서 ‘합의’의 불가역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맥락이 바뀌었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인식 부족과 역량 미달이 초래한 외교참사나 다름없다. 외교부는 잠정 합의 후 불가역적이란 표현의 삭제 의견을 냈으나 청와대는 이 표현이 책임 통감 및 사죄 표명을 한 일본 쪽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가 외교부에 “기본적으로 국제무대에서 위안부 관련 발언을 하지 말라”고 지시한 사실도 밝혀졌다. 

위안부 문제 합의가 피해 할머니들과의 소통 부족 등 ‘피해자 중심주의’를 외면한 사실도 확인됐다. 정부는 협상 진행 도중 피해자 쪽에 때때로 관련 내용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확인이나 국제사회 비난·비판 자제 등 한국 쪽이 취해야 할 조치가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사실상 할머니들을 속인 셈이다. 이와 관련, 여성가족부는 ‘화해·치유재단’이 피해 할머니들에게 위안부 문제 합의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고 현금 수령을 강권한 사실이 드러났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이 때문에 돈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 한·일 갈등 구도가 한국 내부의 갈등 구도로 바뀌었다.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는 굴욕적인 합의 내용과 비민주적인 과정을 봐서는 당장 폐기해야 마땅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재협상을 공언했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줄곧 강조해왔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이번 TF 발표와 관련해 “한·일 합의 폐기를 추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 문제는 단기적인 외교 협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국제관계에서 강경대응이 능사가 아니라는 목소리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와 북핵 공조도 중요한 문제이다. 역사적 정의·인권이라는 가치와 한·일관계의 개선이라는 현실적 과제가 부딪치는 상황에서는 조화를 추구하면서도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 당장 합의 파기냐, 합의 준수냐 양자택일을 할 것이 아니라 시민 여론을 수렴하며 숙의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합의 준수를 압박하며 피해자인 양하는 일본에 대해서는 합의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태도 변화를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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