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거저 오지 않는다.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내게 주어진 자원을 가지고 음식을 만든다. 이때 자원이란 농업을 기본으로 인간과 자연과 국제관계와 과학기술 등등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결과다. 날것 상태의 자원이 먹을 수 있는 밥, 빵, 국수에서 장, 과자, 일품요리 등등이 되기까지 인류는 어마어마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고 주고받고 이어왔다. 자원의 한계를 다만 감수할 뿐 아니라, 탐구하고 대응하는 가운데 교육도 문화도 인간다움도 태어났다. 음식은 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한 기본기술(low-tech)이자 1만년 농업사와 함께 이어진 문화의 꽃이다. 그 꽃은 갖가지 모양과 빛깔로 피어나 오늘에 이른다. 위도마다 대륙마다 민족 저마다 서로 다른 일상의 식생활이야말로 거대한 강줄기, 산맥 또는 해양 못잖은 일대장관이다.

한식 또한 그중 하나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돼 온 식재료 및 그와 유사한 식재료를 사용해 한국 고유의 조리 방법 또는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음식으로 한국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갖고 생활 여건에 알맞게 창안되어 발전, 계승돼 온 음식”(농촌경제연구원 자료) 같은 말로 한식의 갈피를 잡기 어렵다면 내 점심시간부터 들여다볼 일이다.

막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한 끼 먹자고 모두의 발길이 다급해진다. 어린이, 청소년, 노인, 학생, 취업준비자, 산업예비군, 자영업자, 봉급쟁이 누구나 이 한 끼만큼은 놓칠 수 없다. 아침 거른 사람도 많다. 이 한 끼를 놓치면 하루가 엉망이 된다. 이때의 한 끼를 감당하는 골목골목, 거리거리의 밥집, 국밥집, 분식집 그리고 학교식당이며 구내식당의 한식부, 더하여 점심시간만큼은 반드시 밥과 반찬이 있는 차림 또는 구이나 찌개를 일품요리 삼아 백반 정식을 준비하는 온갖 형태의 요식업소가 바로 오늘날 한식의 제일선, 최전선이다. 한국인이 소화해 변형한 중식, 일식, 양식도 의미가 깊다. 점심시간에 한해 “매일 반찬이 바뀌는 한식뷔페”를 차리는 맥줏집이 여기서 어찌 빠지랴.

오늘날의 한식은 매일 한식을 선택하는 서민대중의 한 끼에, 스스로 나는 한식에 종사하노라 여기는 종사자들의 인식과 매일 수행하는 일 속에 적나라하고 정직하게 깃들어 있다. 산업혁명과 현대의 충격을 지나 오늘에 이른 한식의 실제는 초·중등 학생과 서민대중의 점심 한 끼가 나오는 구체적인 과정 안에 압축되어 있다. 가정식 또는 한 사람의 자취(自炊)만으로는 못다 먹일 사람을 먹이는 바로 그 사람의 일이 한식의 세목을 이룬다.

그 사람은 장을 본다. 식료 선택과 반찬 구성과 간 보기에서 재량이 있다. 웬만하면 온통으로 재료를 받아 밑손질을 한다. 점심 장사 직전까지 정신이 없다. 저녁 장사 전까지 다시 밑손질을 포함한 준비에 뛰어든다. 장보기와 간 보기에 재량이 있고, 차림에서 임기응변이 가능하다면 주방장급 일꾼이고 실제 요리사다. 하지만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일은 대중매체, 인터넷, 소셜미디어에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방송이 고급 음식 호들갑에 ‘셰프(chief)’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면서 그 존재가 더욱 희미해졌다. 분야를 떠나 식당에서 당연히 하는 일인 재료 손질-준비를 굳이 ‘프렙(prep, preparation)’이라는, 그럴 이유가 보이지 않는 외국어로 바꾸어 부르는 데 이르러 일 또한 희미해졌다.

아줌마 또는 이모로 부르는 그 사람이다. 요식업계가 찬모라 이르는 그 사람이다. 업무 능력과 일의 실제에서 셰프이고 밤낮없이 셰프의 프렙을 수행한다. 서민대중이 하루에 한 번은 만나되, 만난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셰프다. 그러니 걱정이다. 2018년 최저임금에 대한 어깃장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한식의 제일선은 그 어깃장이 특히 심한 곳일 수 있다. 쉬이 역사와 문화 운운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아줌마’를 노동과 직업의 예외자로 대한다. 이러다 한식의 제일선이 최저시급 7530원 사각의 가장 나쁜 예가 될 수도 있다. “최저임금 줄 수 있으면 셰프 쓰지 아줌마 쓰겠느냐”는 억지가 훗날의 음식문헌으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노동과 직업과 제도의 실제에서 당대를 돌파한 경험이 있는 문화만이 내일을 기약하는 법이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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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곧 절망일 수 있다는 말, 이해하십니까?”

정화는 환자의 전자차트를 묵묵히 정리하고서 보호자인 최연수의 말뜻을 뒤늦게 생각해보았다. 최연수의 어머니이자 환자인 김인경은 간호사 로봇이 진료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보살피고 있었다.

“그다음에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마련이라서요?”

“그런 옛말이 통용되는 문제라면 저도 좋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이 아니라 남은 사람 전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화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연수로부터 눈을 돌리고 밖으로 나간 환자와 로봇을 잠시 바라보았다. 투명한 진료실 벽 너머에서 김인경은 어린아이처럼 잦은 감정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간호사 로봇은 환자의 질환과 그에 따른 심리 변화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도록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김인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인경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화와 연수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김인경과 그만큼 원활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김인경은 중증 알츠하이머 환자였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이해심이나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사랑으로도 넘기 어려운 벽이 김인경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정화는 다시 눈앞에 앉아 있는 연수의 말꼬리를 더듬었다.

“남은 사람이라는 건 여기 무영구 주민을 말씀하시는 거죠?”

“사실 저는 그냥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표현했다가는 손가락질을 받겠지만요. 안 그래도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않아서 퇴물 취급을 받는 참에 생각까지 꽉 막혔다고 비난을 받겠죠. 하지만 타고난 두뇌를 그대로 갖고 살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겠다고 무영구(無影區)에 모인 것 역시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불법도 아니고, 전자두뇌 이식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머니께서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병이 심해지기 전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사리분별이 어려워지더라도 절대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말라고. 저는 그 말씀을 고스란히 따를 겁니다. 자신의 앞날과 마지막 모습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자식 입장에서 괴로운 건 또 다른 얘기죠.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지금이라도 전자두뇌를 이식하면 남은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말이에요.”

정화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자두뇌를 이식했기 때문에 앞으로 김인경처럼 알츠하이머에 시달릴 위험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인경과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무영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과 고통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화는 문득 깨달았다. 연수는 왜 희망이 곧 절망이라고 말했는가. 얼마 전 밝고 희망 찬 여러 뉴스 끝자락에, 마치 부끄러워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짧게 덧붙어 알려진 소식 때문이었다.

최연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한심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얘깁니다. 뉴스에서 그러더군요. 알츠하이머는 완전히 정복됐다고요. 십 년 동안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에게서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뇌기능 이상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죠.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무한한 희망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알츠하이머가 정복됐으니 뇌기능 치료를 위한 나노머신 생산을 완전히 중단한다면서요? 이제 무영구에 사는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건가요?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은 우리가 수명을 다하고 사라지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건가요? 그럼 우리를 치료해주는 의사 선생님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죠? 그림자도 남기지 못할 우리를 앞으로 어떻게 치료해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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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첫째 주가 끝날 무렵 미국 제약업체인 ‘화이자’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병을 치료하는 신약 연구를 중단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국제적인 제약 업체 사이의 정확한 순위는 알지 못하지만, 화이자는 세계 3대 제약 회사에 포함될 만큼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희귀 뇌질환 연구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건 아니며 벤처 투자 형태의 지원을 시작하겠다는 발표가 뒤를 잇기는 했다. 하지만 해당 질병에 고통받는 환자 및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뇌신경과학 종사자들과 연구 지원을 받던 학술 단체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첨단 약품을 개발하고 치료법을 연구하는 일은 극단적인 양면을 모두 품고 있다. 긴 시간과 거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일이기 때문에 채산성을 완전히 외면할 순 없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생명과 미래 복지가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경제논리만으로 재단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소식을 살짝 비틀어서 거울로 삼아보자. 우리는 지금 새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과학과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흥분하고 있다. 그 미래를 예찬하느라 첨단 기술이 우리 생활을 ‘지배’할 거라고 모순적인 어휘를 끌어오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기술이 이익 논리와 직결되는 현실에서, 기술에 지배되는 삶이 마냥 긍정적일 리는 없다. 아니, 애당초 무언가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건 우리가 최대한 저항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경제 논리와 첨단 기술의 화려함 때문에 져버릴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에 좋은 시기일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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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교육에 몇 년 전, ‘배움의 공동체’라는 새로운 교육철학이 등장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배공’이라는 줄임말로 잘 알려진 이 교육방법론은, 주입식 교육에 몰입했던 학교 현장이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더 이상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 SNS의 급속한 발달과 4차 산업혁명의 도래 속에서 학생들은 형해화된 교과서와 5지선다형 수능 문제에 함몰되기를 거부한다. 복잡한 이론을 이야기할 것도 없다. 학교에서 직감하는 변화들이다.

‘배공’ 이론이 시사하는 것처럼, 단지 교사가 교과목 잘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의 전부인 시대는 지났다. 학부모 역시 더 이상 방관자적 관찰자일 수 없다. 학생, 학부모, 교사는 이미 학교 구성원의 당당한 3주체가 아닌가. 그리고 이 3주체가 물리적 공간으로 어우러진 곳이 바로 지역사회,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1년 전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는 “이게 나라냐”는 구호로 상징된다. 부정부패, 비리 등 적폐청산에 대한 소망, 차별과 불평등의 해소,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시민 참여의 확대가 그 목소리에 녹아 있었다. 그러한 염원이 1700만명의 조용한 혁명을 가능케 했다.

교육계는 그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안고 있는가. 그동안 우리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지역사회의 바람을 학교 교육에 제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있었는가. 입시경쟁교육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체념하는 동안,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 졸업 후 비정규직으로, 알바 노동자로 살아가는 고충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해 왔는지, 또 그들의 삶의 고향이자 터전인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 고민을 제대로 나눈 적이 있었는지 먼저 성찰해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마공)는 한 학교에 네트워킹된 지역사회의 수많은 집단지성 구현의 장이 될 수 있다. 학부모들은 삶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의 달인이요, 저명한 인사요, 지역의 어르신이다. 또 여러 마을활동가들의 노하우는 단위 학교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민간의 노력과 교육청 등 관계기관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교과 지식을 아무리 달변으로 포장해 아이들에게 주입한다 해도 그렇게 구성된 배움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배공’의 핵심 교육철학은 ‘잘 가르침’이 아닌 ‘잘 배움’이다. ‘마공’ 역시 단위 학교 교육과정의 하향식 전달이 아닌 상향식 협력이 필요하다. 아니 상하의 위계 의식 자체로부터 탈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 주민 등이 서로의 관계맺음 속에서 교육 공동체가 그 자체로 완성되는 진정한 삶과 배움의 공간으로 우뚝 설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진정한 배움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학벌사회라는 교육불평등을 어떻게 완화할지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을 마련할 수 있다. 교사들은 교실과 학교, 나아가 대한민국 교사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면서 실천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올해는 다양한 교육정책의 입안을 앞두고 있다. 특히 하반기에는 작년에 1년 유예되었던 수능 개편안 발표 등 전 사회의 관심이 집중된 사안도 있다. 촛불시민혁명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꿈꾸는 교육개혁이 무궁무진한 상상 속에서 술술 풀리는 실천과 더불어 무술년 새해를 교육혁명의 원년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도성훈 인천 동암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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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백종원의 푸드트럭> 그리고 지난주에 다시 시작한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열심히 보는 중이다. 요식업 사업가이자 요리 전문가인 백종원이 창업하려는 청년이나, 식당을 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방송이다. <푸드트럭>이 소자본으로 창업하려는 청년층을 타깃으로 삼았다면, <골목식당>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쇠락한 서울 이화여대 앞 골목 가게들을 찾는다.

두 가지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먼저 <푸드트럭>에서 ‘안 좋은 의미’에서 화제가 된 청년 출연자의 표정이다. 푸드트럭에서 팔려고 내놓은 메뉴와 그 식재료에 대한 질문을 받고 중언부언하고 변명하다 굳어버린 그의 모습은, 결국 참지 못해 화를 내버리고 마는 백종원의 표정과 함께 공유됐다. 방송 이후 청년의 태도를 향한 비난이 많았다.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비난받기 딱 좋은 모습으로 TV에 출연한 셈이다. 말귀를 잘 알아듣고 잘 대응하고,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유재석 같은 태도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악마의 편집’은 그런 모습을 극적으로 집어냈다.

출처: 백종원의 골목식당 홈페이지

두 번째는 지난주 <골목식당>에 등장한 백반집 주인 여성의 표정이다. 그녀는 식당의 메뉴가 백종원의 ‘레시피’를 다 따라한 거라고 너스레를 떨며, 자신이 내놓은 음식을 “주변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라며 손님의 평가에 기대 자랑한다. 백종원이 맛과 위생을 지적하자, 그녀는 자신이 식당을 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거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거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거지.” 옆에 같이 앉아 있던 남편은 눈물을 훔친다. 사회자와 제작진은 부부를 달래며 가게를 살리려고 한 이야기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위로한다. 방송 이후 이들의 이야기는 ‘찬란했던 90년대 이대 상권’과 함께 블로그 등에 노스탤지어를 건드리는 이야기로 묘사되었다.

<푸드트럭>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패감이 누적되고 위축된 청년들의 표정이 연상됐다. 경직되어 있고 제대로 된 말로 대응하지 못하고, 언제든 터질 것 같은 표정. 자신이 못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하기보다는, 지금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억지로 둘러대서라도 방어하기 일쑤였다. 칭찬을 듣기보다 혼나고 지적받는 데 익숙해서 그렇다. 달리 말해,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특별히 입시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거나 적성과 특기를 고려해서 진로를 잡지 못한 채, 지방대를 다니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거나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겠다고 시도하다 실패만 누적된 많은 청년들이 있다. 10대 어느 순간에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잠을 청했던 숱한 ‘평범한 학생’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힘듦’을 잘 들어주며 ‘희망’을 설계해줄 ‘어른’을 만나기 어렵다. 대개의 평범한 한국 부모는 그저 “뭐든 하고 싶은 거를 해” 정도의 독려만 해줄 뿐 ‘전략적’으로 어떤 ‘선택지’를 제시하진 않는다.

공부 대신 10대 때부터 다양한 알바를 하며 온갖 ‘사회생활’을 경험해본 학생들은 공부만 열심히 한 교사의 말을 존중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다 총력 입시체제에서 뒤처지고, 뭐든 하고 싶은 거 하라는 방침 속에서 그들은 붕 뜨고 20대가 되는 셈이다. 실업계나 전문대를 나와 사무보조, 정규직 생산직으로 대표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자리로 들어가기 어려워진 시대와 궤를 함께하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비숙련노동에 대해 ‘조무사’라고 조롱하거나, 비정규직들에게 정규직 전환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대못을 박는 멸시까지 넘쳐난다.

그런데 <골목식당>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버틴 이유”가 떠올랐다. 백반집을 하는 여성은 경제성장기를 겪은 ‘건강한’ 세대, 평범한 사람들의 익숙한 천연덕스러움을 갖고 있었다. ‘국제시장’의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온 처신일 것이다.

50~60대 내 부모님 세대에게 늘 듣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들은 대개 농촌사회에서 태어났고 다양한 공동체의 ‘관계’ 속에 존재했다. 도시에 살아도 쌀과 간단한 채소라도 부쳐주는 가족이 있었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보통은 여성이) 희생하여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고향 사람’이라는 다소 옅거나 짙은 관계도 있었다. 번듯한 직장을 갖지 않고 소소한 장사를 하더라도 상부상조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친척이든 동네사람들이든 모아서 계를 활용했고, 은행 융자가 안되는 등 ‘사정’이 어려우면 이야기를 해서 곗돈을 당겨 받을 수도 있었다. 이따금 잘못을 했을 때도 적어도 울타리 안에선 ‘사정’을 이야기하고 ‘선처’를 빌면 용서를 받을 수도 있었다. 배신도 당하지만 은혜도 입고 답례도 하면서 관계들을 유지하거나 키워갔다. ‘사정’을 봐줄 수 있는 ‘관계’ 바깥에서 살 엄두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가 왔어도 사람의 감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어려울 때마다 이런저런 ‘비빌 언덕’에 서로 의존하며 그 나름대로 ‘버텨온’ 것이다. 근대식 교육을 받아도 사회성 측면에서는 농경사회에서 익힌 관계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안정적인 삶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좀 더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은 ‘별일없이 사는 것’이 어려워진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한 평가라고 본다. 국가는 물론 좀 더 넓은 그물을 쳐서 폭넓고 효과적인 직업교육을 유도하고, 노동시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정책을 써야 할 게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모두가 탁월해져야 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탁월함을 뽐내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세상”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평범한 청년’들도 ‘스스로의 서열’을 매기며 위축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좋은 ‘어른’과 ‘친구’의 중요성을 곱씹게 된다. TV 프로그램을 찾아 조언까지 구해야 하나. 스스럼없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가까이에 있는 어른. 그리고 스스럼없이 의논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답례할 수 있는 친구 사이. 대가족과 마을 대신 핵가족과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사회성과 풍부한 표정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노선이 아닐까 싶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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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여관집 현관에 전시되어 있던 눈썰매를 보고 감탄. 대물림을 할 정도로 짱짱한 물건이었다. 집집마다 이젠 스노 모빌 눈썰매가 있지만 과거엔 모두 아버지들이 나무를 깎아 만든 눈썰매를 탔단다. “겨울 나라에서 살려면 기술이 좋아야 해요. 썰매 하나를 만들어도 설렁설렁 대충 이어 붙여서는 곤란합니다. 눈길에 갇히면 얼어 죽죠. 모든 게 목숨과 관계되어 있으니까요” 여관집 아저씨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눈썰매도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만주땅 봉천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내 아버지도 얼음 썰매를 곧잘 만드셨다. 그곳에서 배우신 걸까. 꽁꽁 언 냇가에 나가면 내 썰매가 가장 앞서나갔다. 엊그제부터 남쪽은 폭설이다. 냇물도 두껍게 얼었다. 방문 창으로 쏟아지는 눈보라가 최면을 거는 마술사의 무엇처럼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마을에서 쫓겨난 한센인들은 짓무른 코로 눈발이 들어갈까 가마니 자루를 뒤집어쓰고서 이 서러운 남도 땅을 돌아다녔다. 갑오년 농민들과 동란 때 빨치산들은 또 얼마나 추운 산하를 떠돌며 울었을까.

남녘 목사로 지낼 때였다. 한 해 겨울은 젊은 축에 끼던 부부가 새해를 맞아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목사가 공산당에다가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괴소문. 미국의 ‘이슬람 대결 전쟁’을 반대한다고 설교를 한 다음주 일이었다. 시골에선 미국의 뜻에 반대하면 무조건 공산당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는데 집엘 찾아갔다. 이번주부터 읍내 큰 교회에 다니기로 했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시라 문전박대. 그런데 대문 앞 눈길이 얼어 그만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목사님 따라서 살다가는 그라고 재수 없을 거 같아 그만뒀당게라잉.” 내가 잘못 들었나 재차 물었더니 딸깍 문을 닫아걸었다. 나는 접질린 발목을 질질 끌고 도망치듯 그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동구 밖 교회로 돌아오는 눈길은 그날따라 배로 멀었다. 눈썰매를 타고 싱싱 달리고 싶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참으로 괴로움이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사람 말고 또 누가 있어 이 추위에 온기를 나누며 살아갈 것인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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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갈림길 위에 서 있다. 그동안 걸어왔던 길과 새로운 길 사이다. 새로운 길이 여는 세상은 ‘유러피안 드림’이라고 하는 유럽인들이 지향하는 미래다.

우리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있다. 누구든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꿈을 좇는 시스템이다. 신세계를 찾아 유럽을 떠났던 이민자들은 대서양을 건너며 ‘신분제’라는 멍에를 바다에 버렸다. 그리고 ‘기회’ ‘평등’ ‘경쟁’ ‘자수성가’ ‘돈’이라는 새로운 마법이 그들의 신앙이 되었다. 미국은 대국으로 성장했고 빈부 격차도 커졌다. 그런데 꿈이 깨진 소외 계층마저도 기회의 땅이라고 믿는 사회가 현재의 미국이다. 그들은 돈이 신분을 대신한다고 믿는 사회에서 산다. 언제라도 그 문을 열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 경제적인 성공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진다. 대부분 개인재산의 축적으로 종결되는 ‘미국식 축복’을 꿈꾸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다.

그들은 유럽을 병들고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유럽은 놀고먹으며, 경쟁을 하지 않고, 노조의 보호에 안주하며, 연금만 타먹으려고 하는 사회다. 미국인들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수입을 얻으려고 하는 반면 유럽인들은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으려고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1970년대 이후 유럽이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부를 축적할 기회를 잃었다고 말한다. 생산성과 개혁은 경쟁에서 나오지만 경쟁을 회피하고, 규제를 만들어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이다. 노조는 노동 시간, 휴가 기간, 초과 근무, 퇴직 연령 등에 대한 규제를 강제하면서 새로운 일자리에 청년층 등 신규진입자를 막고 있다고 한다. 정부가 펼친 팽창 일변도의 복지프로그램은 그들에게 ‘정부는 복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믿음을 심어줬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은 정부의 지출확대이지만 이는 한계가 있고 연금시스템은 위기에 빠졌다고 한다. 놀고먹는 유럽인이 부지런한 미국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고 유럽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비판은 미국이 이기적이며 승자독식의 ‘정글 자본주의’ 체제라는 평가에서 출발한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간 이주민들은 경쟁을 신봉했지만, 남은 유럽인들은 공존을 택했다. 유럽인들에게 미국시스템은 개인의 물질적 성장에만 크게 의존하고 인간 전체의 보편적 복지를 등한시하는 제도다. 또한 다양성과 서로 간의 종속성이 확대되는 세계와 맞지 않는 제도다. 유럽사회는 세계에 대한 열린 마인드와 관용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꿈을 키웠다. 유러피안 드림이다. 그들에게 개척자 정신으로 무장된 낡은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기간이 지났다. &lt;유러피안 드림&gt;을 쓴 제레미 리프킨은 유러피안 드림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개인의 자율보다는 공동체의 관계를, 문화적 동화보다는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제한된 물질적 성장보다는 지속적인 발전을, 일만 하기보다는 놀면서 발전하는 것을, 일방적인 권력행사보다는 세계적 협력을 우선시하는 사회다.’ 유럽은 새 시대로 나가는 길목에서 미국에게 지휘봉을 넘겨받았다. 아메리칸 드림이 과거만 바라보며 마비되는 동안 새로운 유러피안 드림이 탄생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대체로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잘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가난에 대해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사회가 가지는 인식의 차이가 다양한 논란의 출발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를 걸고 출범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소득주도 성장이란 가계의 소득을 늘려 소비를 진작시키고 이것을 통해 생산을 유발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소득을 늘리기 위해 최저임금을 올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나섰다. 정부의 재분배기능을 강화하기로 했다. 아동수당, 기초연금, 청년 구직촉진수당, 저소득층 기초생활보장 등도 신설·확대됐다. 경쟁을 넘어 인간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덜컹거리고 있다. 지난 8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첫 수석·보좌관회의는 최저임금인상에 따른 일자리 안정대책이었다. 문 대통령이 언급했듯이 최저임금 인상은 극심한 소득불평등과 저임금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정책이다. 하지만 돌출변수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사회로 나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는 유럽인들도 수백년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꽃피운 것이다. 지금까지 이기적인 유전자로 역경을 헤쳐나왔다면 이제는 이타적 유전자를 이식시켜야 하는 시대가 됐다. 시장경제는 사회적 책임을 수반할 때 미래가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꽃길이 아님은 분명하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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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신년 기자회견을 열어 집권 2년 차 국정운영 구상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새해, 정부와 저의 목표는 국민의 평범한 일상을 지키고 더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한 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적폐청산’에 주력했다면, 집권 2년 차인 올해는 ‘삶의 질 끌어올리기’에 국정의 초점을 맞추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 때 적폐청산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된다. 이번 신년사에서 ‘적폐’란 단어는 단 두 차례만 언급됐다. 대신에 “이제 국가는 국민에게 응답해야 한다”면서 총 11번 ‘국가’를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와 치매국가책임제, 의료·주거·교육과 보육에 대한 국가 책임과 공공성 강화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국정의 큰 방향이 궤도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진행된 신년 기자회견에서 손을 든 기자들 중 질문자를 선택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번 기자회견은 내외신 기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전 각본 없이 문 대통령이 직접 질문자를 지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날 기자회견은 사전에 질문과 질문자를 정하지 않는 미국 백악관 방식으로 자유분방하게 진행됐다. 200여명의 내외신 기자가 사방에서 손을 흔드는 진풍경은 보기에도 신선했다. 문 대통령은 외교안보·정치·경제·사회 분야의 17개 즉석 질문에 막힘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은 함께 이뤄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혁신성장과 공정경제를 위한 노력도 계속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오는 6월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약속에 변함이 없음을 천명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문 대통령은 “국회가 정부와 함께 협의한다면 최대한 넓은 범위의 개헌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국회와 정부가 합의되지 않고, 정부가 개헌안을 발의하면 국민이 공감하고 지지하는 최소한의 개헌으로 좁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과거 정권과 달리 국회에서 개헌에 합의를 이루지 못할 경우 정부 주도로 개헌에 나서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정치권으로서는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대야 관계를 포함한 협치와 통합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설명이나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었다. 각종 복지 정책과 증세 등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가진 야당과 시민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짧은 기자회견에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만큼 추후 다양한 소통을 통해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날 회견은 국정 전반에 걸쳐 대통령의 구체적인 생각을 듣는 한편 산적한 과제들을 절감케 해 준 자리이기도 했다. 여러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과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개혁이 구체화돼 시민이 효능과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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