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한국 정부가 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한국 정부가 해결하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 제도의 희생양이 된 여성은 26개국 출신 40만명 이상이다. 중국인 20만명을 포함해 독일·영국·미국 간호사 등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따라서 일대일 양자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할머니들이 우리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고, 국제사회에서 한·일 간에 합의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한 것도 아니다. 이런 국제적인 인권문제를 졸속 합의로 땡처리한 당사자가 1965년 한일협정을 강행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9일 오후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을 발표하는 모습을 TV로 시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쩌면 그런 박근혜 전 대통령이어서 별다른 일이 없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 4월부터 12차례 국장급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시민단체들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을 못했다. 한·일 양국에 입장차가 있다는 언론 보도만 있었기에 별다른 결과가 나올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전쟁범죄를 다루는 협상테이블에 앉은 적이 없는 만큼 미국의 요구든 뭐든 협상테이블에 나온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결과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기림비를 세우는 등 이 문제 해결에 진력해온 우리는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출범 7개월 만인 지난 9일 위안부 합의 후속조치를 발표하면서 일본에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합의 파기를 선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 10억엔을 일본에 돌려주고 화해·치유재단도 해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한·일 합의에 사망선고를 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이 합의를 파기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는 세계인권에 관한 것인 만큼 두 나라의 합의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으며, 앞으로 국제기준에 맞춰 피해자 중심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또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엔은 전액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고, 기금의 향후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한·일관계 안에 위안부 문제를 가두는 2015년 양국 합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국제무대에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위안부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부터 재개해야 한다. 우리도 캘리포니아 교육부가 채택한 10학년 교과과정 2016년 개정판에 포함된 한·일 합의에 대한 일본 외무성 링크를 없애달라고 다시 요청할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요청해서 포함된 이 링크를 삭제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간단히 풀 수 있는 첫 번째 과제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와 피해 당사국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세계의 인권문제다. 가장 앞장서서 가장 오랫동안 싸워온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한국 정부가 국제기준에 맞는 해결을 이루도록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해 본다. 더 늦기 전에.

<김현정 미국 가주한미포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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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이다. 치열하게 보낸 2017년의 조각들을 떠올려 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집중력 또한 예전 같지 않다.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바로 독서라는 행위다. 신간 서적은 매일 쏟아지고 읽어야 할 책은 500권 넘게 대기표를 달고 있다. 과학의 힘으로 수면시간이 사라지거나 자면서도 독서를 할 수 있다면 적어도 1년에 300권 이상의 책읽기가 가능할 텐데.

독서의 목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가장 피곤한 인간형은 지식자랑에 심취하는 자다. 책에서 얻은 자투리 지식을 전가의 보도처럼 아무 때고 휘두른다. 무술영화로 치면 저잣거리에 처음 등장한 칼잡이와 다를 바 없다. 고가의 명품이 인격 형성의 필요악인 것처럼 단순히 지식 차원에서 맴도는 말을 무한반복한다. 독서와 인격이 따로국밥의 모양새를 취하는 격이다.

다음은 자기계발서 외에는 상종하지 않는 자칭 현실주의자다. 자기계발서는 독자에게 환상을 강요한다. 누구나 ‘1만 시간의 법칙’만 따른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목받는 존재로 변한다는 유혹의 언어를 뿌려댄다. 당신은 선천적으로 열등하기 짝이 없는 실패작이기에 자기계발서를 완독하라고 겁박한다. 현실주의자의 독서란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의 학습과정이다.

수집형 인간도 빼놓을 수 없다. 틈만 나면 서점에서 시간을 보낸다. 생활비보다 책값에 더 많은 돈을 쓴다. 읽은 책보다 산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 원하는 절판서적을 발견하면 가차 없이 지갑을 연다. 가족으로부터 모진 무시와 박해를 당해도 끄떡없다. 그는 인생의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워야 한다는 철학의 소유자다. 문제는 흡연처럼 눈을 감아야지만 수집벽이 멈춰진다는 거다.

독서를 연중행사로 여기는 인간도 있다. 이들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바쁘다는 언어를 자기과시나 자기포장 용도로 소비한다. 번잡한 상황을 마음껏 자랑하는 동시에 독서를 멀리할 핑계로 악용한다. 당연히 대화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단어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생계를 위해 장시간의 노동을 해야만 하는 ‘진짜로 바쁜’ 경우는 예외다.

베스트셀러만 읽는 독자는 어떨까. 이러한 쏠림현상은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공통의 관심사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베스트셀러를 찾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쉬운 점은 영화시장처럼 베스트셀러에 파묻혀 독서시장에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양서가 부지기수라는 거다. 독서 초심자에게 베스트셀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일지도 모르겠다. 독서의 폭이 넓고 깊어진다면 해결 가능한 사례다.

이러한 경우 외에도 다양한 독서행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독서가의 정의는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는 독서가란 독서 자체를 사랑하는, 목적 없는 독서에 심취한 사람이다. 그들에게 책은 두 번째 세상과 만나는 지혜와 사유의 공간이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공기처럼 책을 품고 마신다. 당연히 자신만의 시간을 거둘 줄 아는 후회 없는 인생을 택한 인물이다.

대통령의 독서가 화제에 오르고는 한다. 책 &lt;대통령의 독서법&gt;에 의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독가였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문서를 좋아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피터 드러커류의 경영서를 읽었다. 독서 성향에 따라서 정치인의 색깔과 사상이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요점은 독서를 멀리하는 정치인치고 국민으로부터 오래도록 존경을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거다.

올해도 어김없이 빛나는 신간들이 서점에 등장할 예정이다. 그만큼의 독서가가 탄생할 것이고, 그만큼의 지식사회가 형성될 것이다. 키케로는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말했다. 영혼과 육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독서가 우선이다.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텔레비전 전원을 끄자. 이번 주말에는 하워드 진의 책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역사와 만나는 시간을 가져 보자.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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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돌이’ ‘호순이’ 시대에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올림픽을 떠올리면 지긋지긋하다. 86 서울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야 하는 것이 마치 내 또래가 태어난 역사적 숙명인 줄 알았다. 공책을 비롯해 모든 문구류에 언제나 오륜기 같은 올림픽 심벌이 새겨져 있었다. 요즘말로 하면 나름 ‘올림픽 굿즈’였던 셈이다. 올림픽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포스터 대회부터 합동체육 율동 음악도 김연자의 ‘모이자, 모오오이자,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후렴구가 지겹게 반복되는 ‘아침의 나라에서’였다. 그런데 30년 만에 또 올림픽이라니. 엄청난 돈이 들어가고 자연 훼손에 더해 최순실 게이트에 휘말리기까지 한 평창 동계올림픽이 탐탁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평창 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오랜만에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였다. 선수단과 취재진, 그리고 북한 ‘걸그룹’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모란봉악단’ 참가도 예상되니 이래저래 흥행카드 몇 장을 한국에 선물한 셈이다.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면서 ‘통일’이란 문제를 깊게 고민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북핵 실험 같은 극단적인 소식이 들려오면 걱정보단 짜증이란 익숙한 감정이 올라오곤 한다. 통일 포스터가 아니라 반공 포스터를 그렸던 우리는 그 시절에서 얼마나 걸어 나왔을까.

1985년 큰 수해가 있었다. 천변 지척이었던 우리 동네에도 물난리가 났다. 그해 아주 낯선 일이 벌어졌는데 대체로 늑대나 이리로 그리곤 했던 ‘김일성’이 남한 수해 복구 지원을 한다며 쌀과 옷감을 보내온 것이다. 상습 수해지역인 우리 동네에 북한 옷감이란 것이 흘러들어 왔다. 새마을지도자 역할을 열심히 하던 아버지 덕분이었던 듯하다. 다소 난감한 꽃분홍색의 나일론 천이었는데 아마도 한복용 옷감이었을 것이다. 옷을 지어 입을 수는 없어 엄마는 가장자리에 오버로크를 쳐서 밥상 보자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북한 옷감 좀 구경하자며 이웃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그 천을 조금씩 얻어 갔다. 그해 지독한 수해 끝에 남은 것은 북한산 꽃분홍 밥보자기였다. 기성복을 사서 입던 시대이니 사실 북한산 옷감에 어떤 용처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남측은 흔쾌히 그 선물을 받았고 적대적인 남북관계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선물이란 것이 본래 그렇잖은가. 딱히 쓰임새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그 행위와 태도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선물이다.

농민운동 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은 남북관계가 꽉 막힌 상황에서도 통일쌀 농사를 지어왔다. 정부미로 부르던 ‘통일벼’가 아닌 정말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쌀’이다. 농사를 지어 북한에 쌀을 보내자는 취지의 공동 농사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평균 40만t의 쌀을 차관 형식으로 북한에 지원하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에 쌀을 보내지 못했다. 그래도 농민회 소속 농민들은 매년 ‘통일 모내기’를 하며 남북대화를 촉구해왔다. 수확된 쌀이 북한 인민 전체의 식량을 책임질 정도의 양은 아니지만 ‘쌀’이라는 강력한 민족의 상징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남한 농민들이 북녘 동포들에게 쌀밥 한 그릇을 꼭 선물하고 싶은 그 마음조차 닿지 못한 지 10년째다. 그래서 이번 남북대화를 계기로 ‘통일쌀’을 선물할 수 있다면 좋겠다. 명절에 남녘은 떡가래를 뽑아 떡국을 끓이고 중부지방은 떡만둣국을, 북녘은 만둣국을 먹는다 들었다. 이 통일쌀로 떡을 뽑아 올라가겠으니 이북 만두를 빚어 내려오면 좋겠다. ‘통일 떡만둣국’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설날이 어서 오기를. 아! 그 밥상에는 꽃분홍 밥상 보자기가 제격이겠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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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민영화하는 것은 어떨까? 국가가 결혼 공인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단체나 사회단체도 인증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얘기다. 종교인이라면 교회나 성당, 사찰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종교단체로부터 인증을 받으면 되는 식이다. 커플은 자신들의 필요와 열망에 가장 부합하는 결혼 허가 조직을 선택할 수 있다. 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 단체에서 결혼을 인증받으면 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이것은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세일러가 자신의 대표작 <넛지>에서 ‘결혼의 민영화’란 이름으로 한 장을 할애해서 한 제안이다. 그는 결혼 대신에 이성과 동성에 관계없이 두 사람의 동거 협약을 지지했다.

경향신문은 신년기획으로 ‘우리도 가족입니다’를 게재했다. 미혼 입양모, 비혼 동거, 동성혼 부부, 공동체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소개했다. 오랜 세월 동안 결혼은 가족을 이루는 첫 단추였다. 하지만 이제 결혼에 대한 생각도, 가족의 형태도 바뀌고 있다. 1인 가구는 대세다. 2025년이면 3인 가구와 4인 가구를 합쳐도 30%를 넘기 어려울 것이란 게 인구학자들의 의견이다. 2016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3세 이상 인구의 48%가 ‘남녀가 결혼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중 20~30대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60%를 넘었다.

결혼·가족제도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과거에는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제도도 있었다. 고구려와 부여에는 형사취수제도가 있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사는 제도다. 고구려 사람들이 형수를 넘볼 정도로 유독 음흉해서? 아니다. 성경에도 나온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묻는다. 모세가 정해준 법에는 형이 자녀가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돼 있다. 그런데 큰형, 둘째 형, 셋째 형…. 막내까지 일곱 명이 한 여자를 아내로 삼으면 부활한 뒤 이 여인은 누구 와이프가 되나요?(마가복음) 이런 제도가 생긴 것은 여자를 재산으로 생각했고, 어떻게든 출산을 통해 인구를 늘리는 게 힘을 키우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또 결혼으로 맺어진 세력 집단 간의 합의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서였고, 여성 혼자 정글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렵기도 했다. 흔히 알고 있는 데릴사위, 민며느리뿐 아니라 다양한 결혼풍습(제도)이 있었다.

결혼·가족제도는 정치·경제·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로 된 3~4인 가족은 근대의 산물이다.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 일하고, 어머니는 가사를 관리하는 식의 가족 형태는 근대에 발명된 것이다.

세일러에 의하면 공식적인 결혼제도가 생겨난 주요 이유는 결혼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 탈퇴를 단속하기 위함이었다. 이혼이 어려우면 부부생활이 안정되고, 자녀들에게 유익하다. 경제·사회적으로도 긍정적 효과가 많다.

지금은 성을 단속할 수도, 단속해서도 안 되는 시대다. 해혼, 졸혼이란 말도 나온다. 세일러는 경제학자답게 결혼의 대차대조표를 따져봤다. 그는 결혼의 혜택이 놀라울 정도로 적고, 시대착오적이라고 평가했다. 한국도 그렇다. 아이가 생기면 여성은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을 감수해야 하거나, 사회적 지원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아 돌봄의 책임을 가족이 짊어져야 한다.

문제는 가족의 형태는 급변하고 있는데, 정부는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비혼 또는 비혼 동거 커플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현실을 알아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법인데, 지금까지 정부의 가족정책은 출산율에 맞춰져 있었다. 출산율을 중심에 놓고 결혼·가족제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미혼, 비혼, 동성혼을 비정상가족으로 보기 십상이다. 하지만 정상가족, 비정상가족으로 나눌 수도, 나눠서도 안 된다.

결혼·가족의 공식은 ‘1(남편)+1(아내)=3 또는 3+α’가 아니다. 마치 기업과 공장에서 생산성, 생산성 외치듯이 결혼제도·가족정책에서 출산율, 출산율 해선 안 된다. 정부가 2006년 이후 10년 동안 쓴 저출산 예산이 80조원이나 된다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은 올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비혼 동거 커플에게도 법적·경제적 지원을 한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출산율이 올랐다.

결혼제도는 영구불변의 법칙이 아니고, 가족정책은 생산성(출산율)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을 노동인구를 찍어내는 공장 같은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출산율이 아니라 행복하고 건강하며 조화로운 삶을 밑돌로 놓아야 한다. 결혼제도·가족정책은 그렇게 가야 한다.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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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전환의 원년이 밝았다. 이제 우리는 안전과 생명이 중시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전환의 출발점에 섰다. 포항 지진 이후 한 여론조사기관이 탈핵·에너지전환국회의원모임 의뢰로 지난해 11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탈원전 신재생에너지 확대정책에 대해 58.2%의 응답자가 계속 추진을 지지했고 27.0%만 추진 중단을 원했다. 국민 모두가 에너지전환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적 추세인 에너지전환을 국민 다수도 이제 가야만 하는 길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전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원자력과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이용에 생계를 걸고 있는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이나 에너지전환 비용 때문만이 아니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에너지갈등이다. 심각성의 정도는 다를지라도 원자력발전소와 석탄화력발전소,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송전탑 등을 둘러싼 에너지갈등이 태양광발전 시설 설치에서도 재연되는 느낌이다. 과거 몇몇 지역에 국한되었던 갈등이 전국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어떤 에너지 이용도 환경이나 인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없지만 재생가능에너지는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 간주된다. 원전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방사능의 위험성을, 화석연료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하지만 재생가능에너지는 환경이나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적고 그런 영향조차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그나마 풍력발전은 소음이나 전자파, 철새 이동경로 방해, 빛 반사 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어 설치에 주의를 요하지만, 태양광발전은 숲을 대대적으로 훼손한다거나 미관이나 경관에 대한 고려 없이 설치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별다른 환경이나 건강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풍력발전에는 일정한 이격거리 규정을 두지만 태양광발전에는 두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태양광발전에 이격거리를 두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태양광발전소 건설을 ‘결사반대’하며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총 태양광 설비용량(약 4.6GW)의 63%가량이 입지한 농촌에서 반대 민원이 늘고 있다. 주민들은 미관이나 경관 침해 문제만이 아니라 패널의 빛 반사, 주변 온도 상승, 전자파 발생 등을 문제로 제기한다. 하지만 기술 검증 결과 이런 우려는 사실이 아닌 걸로 나타났다. 태양광발전 시설에 대한 이격거리 기준을 설정·운영하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는 산업통상자원부의 가이드라인과 다르게 지난해 말까지 85개 지자체가 도로나 주거지역으로부터 최소 100m에서 심지어 1000m까지 이격거리를 두도록 하는 개발행위허가 지침을 마련했고 그 결과 무산되는 사업들이 생겨났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현재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들을 살펴보면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업자들이 농촌을 단지 대규모 설치 대상지로 대상화할 뿐 지역주민의 보금자리에 변화를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동의를 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지역주민에게 아무런 수익이나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은 채 소외시키거나 배제한 탓이 크다.

주민이 함께하지 않는 태양광발전 확대는 또 다른 토목공사이자 외지인에 의한 지역수탈로 느껴진다. 지역주민이 태양광발전소 건설 과정에 참여해서 의견을 나누고 에너지 생산 주체로 탈바꿈하여 이익과 일자리를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고령화가 꾸준히 진행되고 농가수입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농촌 태양광발전은 협동조합 방식의 출자나 임대를 통해 농가소득원이자 농촌재생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주민참여와 이익공유 없는 에너지전환, 그것은 네모난 동그라미와 같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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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 밴드, 텔레그램.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를 침범한 녀석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60개가 넘는 카카오톡 모임방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카카오톡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단순 문자나 게임, 택시 예약 서비스는 초기 버전이다. 금융 거래와 영화 예매까지 가능하며, ‘헤이 카카오’라는 인공지능 스피커는 원하는 음악도 들려준다. 곧 정부 고지서나 통지서까지 카카오톡을 통해 등기로 배달된다. 이제 카카오톡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만능 플랫폼이 되었다.

물론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준다. 그런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혜택 받은 세대인 듯도 하다. 그러나 과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일들은 없는가. 지난 몇 년 사이 ‘카톡 감옥’에 갇힌 직장인들, ‘카톡’이 두려운 노동자들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들을 접할 수 있다.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폐해가 만만치 않다. 퇴근 후는 물론 주말까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카톡 때문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휴일이나 업무시간 이외에도 연락을 받거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장 급한 일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대부분 다음날 아침이나 월요일에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소통과 공유를 강조하고, 빠른 정보를 연결하는 수단이지만 직장인들에게 단톡방은 ‘족쇄’나 다름없다. 단톡방 메시지가 업무 관련 내용만 오고 가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사생활도 많다. 직장에서 업무상 필요로 인해 그룹방(일명 단톡방)을 만들겠다고 하면 거부할 수 있을까. 업무보고와 지시 때문이라고 하면 거부할 사람은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해야 한다. 부서장의 썰렁한 메시지에 아무런 답을 달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아마도 승진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수치도 확인된다. 서비스 노동자 3046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4명(37.5%)이 퇴근 후 SNS, e메일 등으로 업무 지시를 받고 있었다. 1주일 평균 2.3회, 87분의 부가적 일을 하고 있는데 1년이면 무려 69.6시간이나 된다. 휴일에도 일일이 메시지를 확인해야 하고, 퇴근 뒤까지 이어지는 업무지시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경계선을 허문 지 오래다. 일과 삶의 균형은 이렇게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유연하게 일할 수 있는 ‘원격근무’나 ‘재택근무’라는 것이 만들어진 이후 이미 카톡에 갇힌 직장인들의 굴레는 시작된 것이다. 최근에는 공공기관조차 사무실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효율적으로 일하라고 ‘스마트 워크’도 앞다퉈 도입했다.

사실 원격근무(telework)는 ‘멀리서(tele)’ ‘일한다(work)’는 의미다. 1973년 미국에서 나온 신조어인데 45년이 지난 지금은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카톡이나 e메일, 문자 등으로 업무지시를 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근 기업들 스스로 규제 움직임도 보인다. 밤 10시 이후나 주말에 SNS로 업무지시를 하지 못하도록 한 곳도 있고, 노사 간 단체협약으로 체결한 곳도 있다. 이미 유럽의 몇몇 기업은 업무시간 이외에 회사가 보낸 e메일이 도착할 경우 삭제하고 있다. 휴가기간에는 보낸 사람에게 ‘부재 중’이라는 정보와 함께 업무를 대체할 사람의 연락처를 안내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업무종료 30분 이후 업무용 스마트폰은 e메일이 중지되고 다음날 근무시작 30분 전에 서비스가 된다.

최근 20대 국회에서도 퇴근 후 SNS 등을 활용한 업무지시 금지법이 3개나 제출된 바 있다. 현실적으로 이런 법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특히 ‘긴박하고 꼭 필요한 경우’와 같은 단서 조항의 해석을 둘러싼 갈등은 분명 쟁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퇴근 후 혹은 휴일에 업무지시를 내리는 행위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프랑스에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 법안이 통과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카톡이 침범한 경계 없는 노동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국회의 역할이 필요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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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은 6월항쟁과 그 전후의 역사적 맥락에 비춰볼 때 큰 흐름과 세부 사실 모두 흠잡을 대목이 드문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교과서적이라는 평가가 작품의 성취를 깎아내린다며 불만을 품을 관객도 있겠지만, 내 말은 시간이 지나면 고전의 자리에 올라설 것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사람마다 제각기 할 말이 많은 영화가 <1987>이다.

영화 <1987>은 전두환 정권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사람들의 열망을 담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영화의 뛰어남은 최근의 수작 <택시운전사>와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후자에 등장하는 1980년 광주의 택시 기사들이 도대체 왜 군대가 광주 시민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모습은 실감 나지 않는다. 실제로 당시 택시 기사들은 직업의 특성상 시위 진압의 잔혹한 실상을 직접 목격하기 쉬웠을뿐더러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기다 계엄군에게 걸려 죽고 다쳤다. 강경 진압의 정치적 의미를 명확히 인식한 그들은 마침내 목숨을 걸고 차량 시위의 선두에 서서 공수부대 정예 병력을 수세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실제 역사와 달리 <택시운전사>는 무고한 시민과 사악한 권력이 맞서는 감상주의적 구도에 갇히고 말았다. 반면에 <1987>은 다양한 인물상을 훨씬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그리면서도 기록영화처럼 냉정하기도 하다.

그러나 <1987>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그중에는 귀담아들을 얘기도 있지만, 오독에 가까운 발언도 없지 않다. 특히 이 영화가 다루는 승리의 서사가 ‘586세대’(옛 ‘386세대’)의 신화를 굳힐 위험이 있다는 (SNS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는) 비판은 좀 지나치다. 586세대의 일부가 198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과 성과를 과장하고 독점하려는 경향 탓에 신화화의 위험은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과하면 피상적인 세대론의 함정에 끌려 들어갈 수 있다.

영화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듯 6월항쟁은 586세대 혼자 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화선이요, 주력이기는 했지만, 6월항쟁은 어디까지나 전 국민적 사건이었다. <1987>에 세대론의 틀을 들이대는 비판적 평가에 자신의 경험을 여전히 과잉해석하는 586세대와 그 언저리 연령대의 (다분히 남성적) 감수성이 숨어 있을 역설적 가능성을 냉철히 따져볼 일이다.

의외로 별로 언급되지 않지만, 연희(김태리 분)가 교도관인 삼촌(유해진 분)과 다투다가 아빠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장면도 지나칠 수 없다. 노동조합을 주도한 아빠가 등을 돌린 동료들 탓에 상심해서 술을 가까이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노조를 탄압하던 사람들을 미워해야지 왜 아빠 친구들을 미워하느냐는 삼촌의 말은 옳지만, 이 장면에서는 실패와 상처를 두려워하는 연희의 현실적인 자세가 관객에게 더 와닿는다. 이처럼 세심한 연출 덕분에 연희 아빠의 죽음이 지금 이 순간도 노동현장에서 숱하게 터지는 일임을 환기하는 효과도 은연중에 확보되며, 힘겨운 과정을 거쳐 항쟁의 현장에 합류하는 연희의 모습이 미화되는 느낌이 없다.

개봉 영화를 두고 찬사와 비판이 엇갈리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저 이 영화를 보지 않는 선택에 머무르지 않고, 절대 보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대통령 일행이 영화를 관람하는 자리에 함께하고서도 차마 영화는 볼 수 없어 발길을 돌린 사연은 누구나 쉽게 이해한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 광주항쟁에 참여했고 나중에 간첩조작 사건에 얽혀 긴 감옥살이를 한 강용주씨의 입장을 아는 사람은 적다. 그에 따르면, 박종철 고문사의 진상 규명을 돕는 의인으로 묘사된 교도소 보안계장의 실제 인물은 ‘간첩사건’으로 갇힌 재소자들에게는 혹독한 방식으로 전향을 강요하는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 강용주씨만이 아니라 그에게 당한 공안 사건 연루자들 여럿이 입을 모아 증언하는 사실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불법 고문수사를 총지휘한 치안감 박처원(김윤석 분)은 ‘빨갱이’를 서슴없이 때려잡는 명분으로 월남한 자신이 북에서 겪은 비극적 가족사를 강조한다. 반공을 앞세운 박처원 일당의 광기 어린 행태는 생생하면서도 너무 낯설어 우리는 이 야만적 시대가 이제는 사라졌음을 영화가 증언한다고 잠깐 오해할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은 MBC 사장이 된) 최승호 감독의 영화 <자백>(2016)은 간첩조작이 바로 엊그제까지도 노골적으로 벌어졌음을 폭로했다. 박처원과 고문 기술자 이근안, 공안검사 김기춘은 방심하면 언제든지 우리 곁에 돌아온다. 그러니 <1987>은 우리 현대사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작품이 아니라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는 문제작이다. 1987년을 비롯한 한반도의 현실을 뿌리 깊이 제약하고 있는 ‘우리 안의 휴전선’까지 무너뜨리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작품들이 나오면서 촛불시민혁명을 진전시키길 빈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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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발생한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는 119상황실과 현장 구조대 간 무선통신망이 부실했던 데다 현장 지휘관이 상황 전파를 소홀히 하는 등 소방당국의 부실대응이 인명피해를 키운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소방합동조사단은 11일 제천 화재 조사 결과 최종 브리핑을 통해 “지휘관들은 상황 수집과 전달에 소홀했으며 인명구조 요청에도 즉각 반응하지 않는 부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소방청은 이일 충북소방본부장을 직위해제하고, 간부 4명을 중징계하기로 했다.

브리핑 내용을 보면 화재 직후 2층 여성 사우나에서 충북소방본부 119상황실로 구조요청 전화가 걸려왔지만 상황실과 현장 구조대 간 무전이 되지 않았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조직이 위급 시 통신망을 불통상태로 두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현장 지휘관은 2층 상황을 전달받은 뒤에도 이를 무전으로 전파하지 않았다. 결국 늑장 구조로 2층 여성 사우나에서 20명의 아까운 인명이 희생됐다. 초기 지휘를 맡았던 간부가 눈앞에 보이는 위험과 구조상황에만 집중하느라 건물 뒤편에 있던 비상구의 존재나 상태도 확인하지 못했다. 운전자가 경험과 훈련 부족으로 굴절차 조작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점도 확인됐다. 아직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 조사단은 소방대가 비상계단을 통한 진입을 시도했다가 강한 열기와 연기로 후퇴했다고 밝혔지만 유족들은 계단에 화재 흔적이 없다며 조사단의 주장을 반박했다.

화재경보기와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았고, 건물 내 배연창과 비상통로를 잠가 놓은 데다 테라스를 불법증축한 건물주의 과실도 무겁다. 소방대원의 현장 진입을 가로막은 고질적 불법주차도 화를 키웠다. 많은 이들이 참사에 책임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무선통신만 원활하게 가동됐더라도 인명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소방당국의 부실대응 책임은 엄중하다. 인력과 장비 부족 등 소방당국이 처한 어려움은 이해하지만 기본 중의 기본인 통신망 점검을 생략한 과실마저 덮을 수는 없다.

수많은 안전사고에서 확인돼 온 것처럼 매뉴얼이나 규정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구비돼 있다. 문제는 ‘별일 없겠지’ 하며 지키지 않는 안전불감증이다. 안전불감증은 윤리의식의 부재와 다를 게 없다. 이 고질병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우리 사회의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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