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0일 열린 ‘AI 로봇 소피아 초청 콘퍼런스: 4차 산업혁명, 로봇 소피아에게 묻다’라는 행사는 2018년의 대한민국 서울에 서둘러 도착한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홍콩에 있는 핸슨로보틱스에서 2016년에 개발한 로봇 소피아는 사람 여성처럼 생겼다. 자신이 미국에서 ‘착상’되어 홍콩에서 ‘태어났다’라고 소개하는(연합뉴스TV) 소피아는 2017년 10월에는 로봇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민권을 받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홍콩 태생의 사우디아라비아 ‘로봇시민권자’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초청 덕분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박 의원과 소피아는 로봇이 대체할 인간의 직업에 대해, 인간과 로봇이 사랑에 빠질 가능성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과 촛불혁명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소피아에게 던진 여러 질문 중 ‘권리’와 ‘안전’에 대한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굳이 로봇에게 물을 필요는 없었던 이 질문들은 오히려 2018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었다.

박 의원은 로봇에게 ‘전자인간’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소피아는 자신을 포함하는 ‘로봇의 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우디아라비아의 ‘로봇시민권자’ 소피아는 미리 준비한 듯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소피아의 대답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로봇에게 시민적 권리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태도다. 박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서울을 ‘4차 산업혁명’의 전진기지로 자리매김하는 상징적인 조치로 소피아에게 ‘명예시민권’을 주는 ‘진취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시민권을 얻은 두 살짜리 로봇 소피아에게 굳이 색동저고리와 분홍치마를 입히고, 대한민국 서울의 명예시민권까지 주려는 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본의 로봇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제니퍼 로버트슨은 자이니치 등 비일본인 거주자, 난민, 이주노동자 등 일본 사회에서 일하고 살면서도 동등한 권리 없이 차별을 받는 사람들에 비해, 각종 로봇과 애니메이션 캐릭터에게는 더 쉽게 호적이나 명예주민표가 발급되는 상황의 모순을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의 권리는 거부되기 일쑤지만 로봇의 권리는 기꺼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소피아가 사우디아라비아 시민권을 받았을 때도 로봇이 사우디의 보통 여성보다 복장, 여행 등에서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는 냉소적인 논평이 있었다.

난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하는 한국에서도 ‘로봇시민권자’의 방문은 사람의 권리, 즉 인권의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난히 까다롭다는 한국의 난민 인정 절차를 기다리며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과 국회의원의 초청으로 박수를 받으며 한국에 들어온 소피아의 차이, 휠체어를 타고서는 고속버스도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장애인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디든 모시고 다니는 소피아의 차이는 무엇인가. 낯설다는 이유로 각종 혐오의 언어와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 여기에서, 우리는 로봇과 공존하고 사랑에 빠지는 미래를 기대해도 괜찮을까. 로봇에게 명예시민권을 주자는 제안을 미래지향적이라며 쉽게 반길 일은 아니다. 로봇의 권리에 대한 상상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성찰과 연결하는 것이 더 미래지향적이다.

대화 후반에 이르러 박 의원은 소피아에게 일종의 윤리적 딜레마를 제시했다. 큰 화재 현장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아이 한 명과 노인 한 명을 발견했는데 그중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자율주행차 알고리즘이 사고를 피할 수 없는 긴급 상황에서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치어야 하는지를 묻는 ‘트롤리 문제’의 소방구조 버전인 셈이다. 묻는 사람은 많고 답하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이상한 문제다. 소피아는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출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구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넘어갔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꼭 물어야 하는 유의미한 질문인 것처럼 포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 2018년 한국 사회의 맥락을 보여준다. 소피아를 보러 온 사람들 중에 전·현직 소방관이 한 명이라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피아가 받은 질문 자체의 잔인함은 소방관이 아니라도 느낄 수 있다. 제천에서, 밀양에서, 그 전의 숱한 현장에서 불길을 뚫고 다행히 노인과 아이를 구해서 나왔거나, 어떻게든 구해보려다 다치거나 사망한 소방관과 의료진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들은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까.

규정을 지키지 않고, 허술한 법규를 내버려 두고, 용도를 변경하고, 점검을 소홀히 하고, 소방 인력과 장비를 늘리지 않은 채로 있다가 노인과 아이를 모두 잃는 참사를 겪으면서도, 우리는 똑똑하다는 인공지능 로봇이 노인과 아이 중 누구를 구할 것인지 궁금해한다. 로봇에게 누구를 구하겠느냐고 물어서 우리는 어떤 대단한 구조 원칙과 기준을 세우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인공지능 로봇의 윤리성을 떠보는 사고실험은 두뇌에는 자극이 될지 몰라도 소방 안전과 인명 구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 로봇 소피아에게 묻다’라고 했지만, 로봇은 미래에서 온 예언자가 아니다. 로봇은 ‘권리’에도 ‘안전’에도 별 관심이 없다. 우리의 무관심을 로봇이 덮어줄 수도 없다. 대신 로봇은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 정도는 될 수 있다. 우리는 소피아를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점검할 수 있다. 로봇과 대화하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만 묻지 말고, 로봇의 권리를 고민할 정도의 사회에서 인간의 권리는 어떤 처지에 있는지 따져보자. 또 딜레마 아닌 딜레마에 빠져 갈팡질팡하지 말고, 노인이든 아이든 사람을 더 구하기 위해 어떤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자. 이것도 로봇의 중요한 쓸모다.

<전치형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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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가까이 타오르던 광화문의 촛불도 꺼지고 찬바람만 몰아치던 2009년 1월20일의 일이었다. 2007년부터 재개발 문제로 철거민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던 용산4구역. 남일당이라고 불리던 폐허 같은 건물 옥상에 철거민들이 임시로 지어놓은 위태로운 망루 하나가 있었다. 새벽부터 그 망루를 무너뜨리기 위해 물대포와 병력을 실은 컨테이너가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기를 한창,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여섯 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갔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는, 새로운 다큐 <공동정범>을 통해 그날 그 망루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1월 15일 오전 서울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 앞에서 용산참사 9주기 추모위원회가 개최한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참가자들이 진실을 촉구하는 빨간 장미를 들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영화는 망루의 생존자이자 공동정범으로서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출소한 다섯 명에게 남겨진 상흔을 드러내면서 시작한다. 이들은 지옥 같은 망루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를 추스를 새도 없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감옥을 나온 뒤에는 고립되었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의 현재에 동정을 보이는 대신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라고 요청한다. 기억은 혼란스럽고, 과정은 고통스럽다. 피해자들 간에는 냉랭함과 갈등이 맴돈다. 영화는 봉합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드러내기로 했다. 용산을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이들에게, 그래서 너무 쉽게 고개를 돌렸던 이들에게 다시 그 참상의 의미를 묻는다. 당신은 용산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가?

이들 모두는 각자의 깊고 날카로운 억울함을 지니고 있다. 인심의 가장 확실한 근원이 곳간이듯, 박탈된 자들의 세계는 더 비정한 법이다. 3~5년간 감옥생활을 했던 5명 중 ‘용산사람’은 한 명이었다. 나머지 네 명은 다른 곳에서 철거반대투쟁을 하다가 부랴부랴 연대를 하러 온 이들이다. 그런데 사법부는 모든 참상을 그날 그 시간 그 망루 4층에 고립되어 있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했던 다섯 명의 책임으로 돌렸다. 갈등의 사회적 원인도, 진압과정의 무리함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화재의 원인도 모두 고려되지 않았다. 잘잘못과 진실을 가리는 대신 손쉬운 통제를 위해 모두에게 벌을 주곤 하는 ‘연대책임’의 논리가 신성한 법의 이름으로 반복되며 다섯 명의 시민을 중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회 불만세력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종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고 억울함은 타인에게, 또 자신에게 겨누는 칼이 되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들을 짓누르는 것은 억울함보다도 더 거대한 죄책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내가 인화성 물질을 뿌리지 않았다면, 먼저 대피하지 않았다면, 혹시라도 그 모두가 살 수 있지는 않았을까. 이들은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그러안고 “나 때문에 모두가 죽었을까?”라는 질문 앞에 선다. 그들이 저 질문의 무게에 휘청거리는 동안, 한국사회는 또 다른 참사와 또 다른 억울함과 또 다른 죄책감들을 질리지도 않고 만들어왔다.

용산참사는 그 이전에 존재해왔던 여타의 철거민투쟁과는 달랐다. 용산에서 싸웠던 이들의 상당수는 빈민이 아니라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던, 도시중산층 자영업자들이었다. 국가와 자본은 이제는 낡고 보기 싫어진 것들을 걷어내고, 매끈하고 번쩍거리는 것으로 바꾸겠다고 통보했다. 일전에 나는 “용산은 우리가 수십 년간 에둘러서 중산층이라고 부르며 동일시해왔던 무언가가 찢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거대한 파열음”이라고 썼다. 용산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침묵과 외면이 혹시 무관심이 아니라 공포는 아닐까라고 물었다.

나의 의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도 침탈당하고 있는 수많은 삶의 터전과 그보다도 더 무수히 소리 없이 질식하고 있는 삶들이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여전히 이들의 고통을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 이제는 사람들도 익숙해졌다. 타인의 몰락을 보면 동정이나 연민을 갖기보단 앞장서서 조롱한다. 나는 이 악다구니에서 어떤 처절한 기도가 느껴진다. 제발 나만은 저렇게 되지 않게 해달라는. 그러나 느껴진다. 사라지지 않는 불안의 떨림과 무력감이.

‘우리 모두가 범인’이라는 식의 식상한 문장으로 이 글을 끝내고 싶지 않다. 다만 부디 이 철저하고 사려 깊은 기록을 더 많은 사람이 목격하길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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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참 춥다. 추운 날은 이불 속이 그립고 따듯한 밥도 그립다. 그저 한 끼 때우는 것이 아니라 따듯하고 맛있고 배부른 밥, 온몸을 다 녹여주는 밥.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집밥이고, 그중에서도 물론 어머니가 해주셨던 밥이다. 어려서 먹었던 어머니의 집밥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중에서도 몇몇은 그 향기와 온기, 그 음식이 담겼던 그릇의 모양까지 생생하다. 어머니들도 음식솜씨가 다 다르니 그 모든 음식이 다 최고의 음식은 아니겠지만, 맛에 추억이 입혀지면 그 맛이 음식의 맛으로만 남지 않는 법이다. 그걸 먹었던 날, 얼마나 더웠는지 얼마나 추웠는지, 심지어는 그걸 먹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기억이 날 때도 있다. 어느날은 슬펐던 기억도 있고, 입안에 침이 아니라 눈물이 고일 때도 있었다.

어려서 먹었던 것 중에 압도적으로 기억에 남는 음식들은 대개 김치와 관련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직도 가난했던 시절이라 돼지고기를 썰어넣어 끓인 김치찌개에는 늘 고기가 부족했었다. 형제들끼리 한 점의 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던 쟁탈전은 치열했고, 그렇게 차지한 한 점의 고기맛은 황홀했다. 기회와 성취와 양보와 사랑의 맛. 미사여구를 마구 갖다붙이자면 그런 맛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손으로 쭉쭉 찢어 숟가락 위에 얹어주던 김장김치의 맛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그걸 ‘긴김치’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늘 바빠 자식들에게 한가히 김치를 찢어주고 있을 여유가 없었는데, 그래도 어머니를 졸라 밥상 옆에 앉혀야만 했었다. 내 손으로 찢으면 같은 맛이 안 났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맛이라고 해두자. 지금도 가끔 김치를 그렇게 손으로 쭉쭉 찢어 물만 밥에다 올려 먹어보곤 하는데, 이건 긴김치가 아니라 그냥 찢어먹는 김치다. 옛날 맛이 안 난다. 추억이 간만 배여 깊은 맛을 못 내기 때문일 것이다. 멸치 육수도 없이 콩나물 한 줌도 안 넣고 그냥 쌀뜨물로만 끓였던 김칫국도 있었다. 그 맛이 또 그리워서 가끔 시도를 해보는데, 기억 속 맛이 아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조리법을 물으면 그 대답이 늘 신통치 못했었다. 그냥 적당히 적당히, 대충 대충. 모든 조리법의 설명이 그런 식이었다. 더 캐물으면 너무 많이는 넣지 말라 하고, 그렇다고 맛이 안 날 정도로 너무 적게도 넣지 말라고 했다. 너무 오래도 끓이지는 말되 푹 끓이라고는 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결국, 모든 조리법의 설명이 ‘적당히’로 귀결되는 것이다. 손맛으로 익히고, 세월로 익히고, 자식들의 배 따듯하게 불려줄 마음으로 익힌 조리법을 간단한 말로 설명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은 안다.

그래서 나 역시 적당히 시늉만 내는 수밖에 없다. 요리는 적당히 시늉으로만 내고, 먹는 건 추억이다. 따듯한 밥상의 추억, 그걸 먹을 때 한겨울 지글지글 끓던 온돌바닥의 뜨거움, 동치미 사발에 얼어있던 살얼음의 이가 시린 차가움. 김치비빔밥을 한 양푼 만들어놓고 영역 다툼을 하던 형제들, 숟가락으로 양푼에 금을 그어놓는 것도 모자라 침을 뱉는 시늉까지 했던 내 짓궂은 형제들,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부르던 어린 나, 그런 추억들.

도시락의 기억도 있다. 생일날이면 어머니는 고기반찬을 한번씩 싸주었는데, 혹시 친구들한테 뺏길까봐 그걸 밥 속에 꾹꾹 묻어주셨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뭐 이렇게까지 하시나, 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보물찾기 같은 도시락의 기억이 되었다.

슬프고 쓸쓸한 밥도 있다. 영화 <밀양>에서는 유괴범에게 아이를 잃은 여주인공이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야말로 끼니를 때우는, 한 끼니의 시간으로부터 냉정하게 상처 입고 있는 장면이다. 삶으로부터 완전하게 버려진, 속속들이 다친, 그러나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어머니의 밥이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본 적도 있다. 좁은 경비실 안에서 밥을 그릇에 푸지도 않고, 그냥 밥솥째 꺼내놓고 점심을 때우던 우리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의 밥. 택배물건을 찾으러 갔더니 그렇게 점심을 드시고 계셨다. 밥은 밥솥째, 멸치는 봉투째, 그리고 고추장통 하나. 그게 전부인 식사였다. 그걸 들킨 아저씨도 면구했겠지만, 그걸 목격한 나도 당황스러웠다. 가난한 식사가 문제인 게 아니다. 가난한 반찬도 따듯할 수 있고, 그 따듯함과 함께 추억이 생길 수 있는 거니까. 음식의 맛이 아니라 식사의 맛이란 것도 있는 거니까. 그러나 밥솥째 안고 그렇게 한 끼를 때우는 모습에서는 모욕이 느껴졌다. 내가 아니라 아저씨가 당하고 있는. 노동으로부터, 삶의 가치로부터 당하고 있는.

경비원 관련 보도가 나올 때마다 자꾸 그 아저씨의 밥솥이 생각난다. 최저임금 얘기가 나오고, 전원해고 이야기가 나오고 할 때마다 생각이 나는 건 그 밥솥이다. 최저임금은 사실 받아야 할 돈의 최저선을 말하는 게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노동의 가치를 말한다. 존중받아야 할,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가치. 경비원이나 청소원들 중에는 휴게실이 없어서 화장실 안에서 밥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말도 안되게 갑질을 하는 입주자들에 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최저임금 때문에 휴게시간을 늘렸으나, 그 휴게시간이 정작 쉬는 시간이 아니라는 보도도 나온다. 돈을 버는 일은 밥 먹자고 하는 일이라는 말은 내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들먹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옛말이 되었다. 아니, 옛말이 되었어야만 한다. 그것은 가치를 지키는 일이고, 당연히 가치를 존중받아야 하는 일이다. 적어도 그 노동의 가치가 한 끼 밥을 따듯하게 지켜주는 것이기는 해야 한다.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 한 토막만 더 이야기하자. 내 어머니는 하숙집을 했는데, 가난한 하숙생들이 하숙비를 제때 내는 적이 거의 없었다. 사정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욕도 했다. 그리고 서로 감정이 상했다. 

그러나 어느 해의 여름, 냉장고를 처음 들여놓던 날에는 우리 식구뿐만 아니라 하숙생들 모두가 냉장고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각기 숟가락 하나씩만 들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수박화채가 나오자마자 하숙비를 제때에 낸 하숙생이든, 몇달째 밀리고 있는 하숙생이든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우르르 달려들었다. 맛있고, 행복했던 저녁나절의 추억이다.

경비원들이 일하는 아파트는 부자 아파트이기도 하고 가난한 아파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모두가 이웃이기도 하다. 임금을 어디까지 올리느냐의 문제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어디까지 인정되느냐의 문제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으로, 그들의 밥 한 끼가, 아니 세 끼 전부가 따듯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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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제가 도입된 사연은 눈물겹다. 산업혁명 이후 편물기계 보급이 확산되면서 19세기 말부터 섬유산업이 급성장했다. 양털로 만든 스웨터가 대중화된 것도 그즈음이다. 당시 스웨터 제조업체들은 주문이 밀려들자 일감을 여성과 어린이들이 일했던 하청업체에 넘겼다. 노동자들은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일한 곳은 ‘스웨트 숍(sweat shop)’으로 불렸다. 노동자의 ‘땀’을 짜낼 정도로 착취가 심한 곳이란 뜻이다. 추위를 막기 위해 입는 스웨터에는 ‘일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던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스웨트 숍’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호주 멜버른에선 1895년 ‘전국안티스웨팅연맹(NASL)’이 출범했다. 영국에서도 1906년 같은 이름의 시민단체가 생겼다. 두 단체의 결성을 주도한 것은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과 중산층이었다. 이들은 스웨트 숍의 노동착취 실태를 고발했고, 최저임금 법제화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1928년 조약으로 채택한 최저임금제는 전 세계 90%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만큼 격렬한 논쟁을 부른 정책도 드물다. 신자유주의에 매몰된 경제학자들은 일자리를 줄이고 노동시장을 교란하는 ‘주범’으로 최저임금제를 지목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뷰캐넌은 최저임금 옹호론자들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극언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최저임금이 고용을 감소시킨다는 실증적 근거는 미약하다. 앨런 크루거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데이비드 카드 UC버클리대 교수는 1994년 최저임금을 20%가량 올린 뉴저지주와 동결한 펜실베이니아주의 패스트푸드 업체를 분석했다. 두 교수는 뉴저지주의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주의 초과 이윤을 줄이는 대신 고용을 늘리고 소득분배를 강화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저임금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은 인권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임금이기 때문이다. 그런 최저임금이 한국 사회에선 함부로 걷어차이고 있다. 지난해보다 16.4% 오른 지 한 달 만에 만신창이가 됐다. 편의점·프랜차이즈 가맹점 등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가게 문을 닫게 될 판이라고 아우성이다. 숨만 쉬어도 돈을 번다는 건물주가 꼬박꼬박 올리는 임대료, 매출액의 30%가 넘는 로열티, 카드 수수료 등으로 목이 졸리면서도 최저임금 인상으로 죽을 맛이라고 한다. 적립금만 수천억원에 달하는 연세·홍익·동국대 등은 청소노동자를 단시간 계약직으로 교체하고 있다.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정부가 지급하는 일자리안정자금(1인당 13만원)을 받기 위해 경비원 월급을 189만원에 맞췄다. 대기업의 납품·협력업체는 상여금을 기본급에 다달이 쪼개 넣는 방식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무력화하고 있다. 꼼수와 편법을 동원한 ‘최저임금 도둑질’이다.

보수언론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의 극단을 보여주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역설’ ‘을과 을의 전쟁’이란 프레임을 짜며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내놨던 보수야당들은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꿨다. “최저임금 인상은 반(反)서민, 반(反)청년 정책”(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최저임금 부작용이 하늘을 찌른다”(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며 최저임금에 대한 저주와 악담을 서슴지 않는다. 후안무치의 극치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3대 실정(失政)으로 ‘최강비(최저임금·강남 집값·비트코인)’를 꼽으면서 최저임금을 맨 앞에 세웠다. 보수세력의 주장대로라면 최저임금이 1만원으로 인상되면 나라가 망할 것만 같다.

최저임금이 여느 해보다 큰 폭으로 올랐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빈곤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최저임금 대상 노동자 462만여명이 시급 7530원을 적용받아 한 달에 209시간을 일하면 157만원을 받는다. 1인 가구 표준생계비(216만원)의 73% 수준이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주도 성장과 내수 활성화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또한 착각일 수 있다. 그런 효과가 나타나려면 최저임금이 표준생계비 수준으로 올라야 한다. 최저임금은 노동빈곤층의 구제수단일 뿐이지 성장전략은 될 수 없다.

최저임금은 가장 그늘지고 추운 곳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연탄과도 같다. 그러니 함부로 차서는 안된다.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했던 적이 없었던 한국 사회에 최저임금이 묻고 있다. “120여년 전 ‘스웨트 숍’에서 죽도록 일했던 저임금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을 알기나 하는가.”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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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에겐 예배 때 휴대폰을 꺼두라고 주의까지 줬는데 정작 자기 호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린 목사. 설교를 중단하고 강대상에서 전화를 받았다. “하나님! 지금 당신에 관해 한참 설교 중인데, 나중에 전화해요. 그럼 끊습니당. 뚝~” 누가 전화했는지 이거 뭐야 당황했겠다. 아무튼 하나님 개무시. 어설픈 회개와 영악한 간증. 적당히 죄를 사해주면 양심세탁비로 헌금을 받고, 아무나 집사고 장로 직분을 내려주는 하나님 없는 교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짓이기는 수억짜리 오르간과 성가대. 박수를 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방언 기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이 전화해도 들리지 않는, 그저 소음일 따름. 진실이 숨죽이고 소음만 있는 곳엔 하늘의 천사라도 누구 하나 내려앉을 수 없는 법이렷다.

산골엔 요즘 배고픈 참새들이 많이 내려앉는다. 갈대밭에 몸들 비비며 우는 갈대처럼 새들이 무리지어 밥 좀 나눠달라 애원들이다. 묵은쌀이 없나 한 됫박 찾아 바위에 올려놓고, 돌확에다간 물도 한 바가지 떠놨다. 논밭전지에 까마귀떼가 시꺼먼 구름마냥 내려앉기도 한다. 해마다 찾아오는 검은 날개 천사들.

이태준의 소설 <까마귀>는 친구 별장에 잠시 깃든 작가와 뜨락 정자에 가끔 방문하는 여자 이야기다. “여자는 잊어버린 듯 오래도록 햇볕만 쏘이고 있다가 어디선지 산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는 것을 보더니 그제야 사뿐 발을 떼어놓았다.” 정자지기는 그 여자가 폐병에 걸려 요양 중인 환자라고 알려준다. “여기 나와선 까마귀가 내 친굽니다. 내 뒤를 쫓아다니는 무슨 음흉한 사내같이 소름이 끼쳐요. 아마 내가 죽으면 저 새가 덥석 날아와 앞을 설 것만 같이….” 몇차례 다담과 설렘이 오가고, 여자는 슬픈 미소만 남기고 내려갔다. 날이 추워지고 싸락눈이 내린 날, 잡지사에 글을 넘긴 작가는 영구차가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다.

새들이 알아차린 진실과 베푸는 위로. 어쩌면 사람보다 나을 때가 있다. 배고픔을 던 새가 들려주는 합창은 바흐나 헨델의 코랄을 능가한다. 까마귀도 하늘을 덮으며 베토벤의 ‘운명’을 들려준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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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말했다. “프랜차이즈 업체의 커피가 강배전으로 쓴맛만 내는 것은 커피가 식었을 때에조차 그 잡내들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그는 후일 프랜차이즈 커피 광고에 출연했다. 그는 설탕에 대해 “무뇌아적 중독을 일으키는 ‘환상’의 맛”이라고, 고추장에 대해 “맛을 얼버무리기 위한 술책”이라고 썼다. 설탕과 고추장의 조합인 떡볶이 광고에 출연했다. 방송에서도 “길들여진 맛”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던 떡볶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얘기다. 먹방, 쿡방은 여러 스타를 만들어냈다. 요리사와 사업가가 대부분인 가운데 황교익은 직접 음식을 만들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유명세를 탄 인물일 것이다. 기자로 재직하는 동안 전국을 누비며 보고 먹은 식재료에 대한 지식, 유려하고 또렷한 문체로 이미 팬이 적지 않았던 그다.

칼럼니스트 황교익(왼쪽부터), 유시민 작가, 장동선 박사, 건축가 유현준, 가수 유희열이 2017년 10월 2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tvN '알쓸신잡2'(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송을 타며 날개를 달았다. <수요미식회>에 이어 <알쓸신잡>까지 히트했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음식 권위자이자 전문가가 됐다. 무거운 이름이 됐다. 이름에 무게가 생기면 신중해지기 마련이다. 가볍게 소비되는 연예인이 아닌, 전문가라면 더욱 그렇다. 직업윤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황교익의 최근 행보는 그래서 실망스럽다. 떡볶이가 맛없는 음식이라고 하는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음악평론가인 내가 차트 1위를 하는 곡이 음악적 완성도가 떨어진다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평론가의 기준은 상업적 잣대와는 다를 수 있다. 영화를 고를 때 차트나 입소문 말고도 굳이 영화 평론가의 리뷰를 찾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뭔가에 대해 말해서 업을 일구는 사람에게 논란이란 일종의 세금과 같다. 논란이 주장 그 자체일 때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그 주장의 앞뒤가 다를 때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고추장과 설탕의 황금 조합인 떡볶이, 방송에서 맛없는 음식이라 설파했던 그 떡볶이 광고에 본인이 출연한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광고료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조금의 사례비를 받고 찍은 것”이라며 “불우 어린이 돕기에 응해줬던 회사이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에 찍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의 해명은 문제의 본질에서 비켜 있다.

광고를 볼 때 모델이 얼마를 받았는지 따져가며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 광고에 출연한 배경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더욱 없을 거다. 전문가가 광고에 출연했을 때 발생하는 상품의 신뢰도는 연예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를 모르고 ‘선의’로 출연했다면 순진무구한 거고, 알면서도 했다면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오랫동안 언론에 몸담았던 그가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뒤 다시 내놓은 입장이 점입가경이다. 이명박 정부의 한식 세계화 정책으로 떡볶이가 국민 간식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대단히 아쉬웠다. 전형적인 진영론자의 대처지, 평론가이자 전문가의 말은 아니다. 백번 양보해도 이명박근혜 정부 이전에도 떡볶이는 대표적인 한국의 간식 아니었던가? 사실 이 모든 게 그가 떡볶이 광고만 찍지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하나 꼽자면, 한결같이 사는 거라 말하고 싶다. 우리가 그런 이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만큼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 아닌가.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과거의 언행과 지금의 처신이 맞지 않을 때 비판을 겸허히 수용할 줄 아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름에 무게가 더해질수록 그런 태도가 더욱 필요하다. 비판의 방향을 호도하고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진영론으로 대처하는 게 어른의 자세는 아니다. 전문가의 자세는 더더욱 아니다. 그와 함께 <알쓸신잡>에 출연한 정재승 박사는 밀려드는 CF를 모두 고사했다고 한다. 부끄러워서였다고 하지만 광고와 전문가가 만났을 때 파급되는 효과를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 작가도 유희열에게 “광고는 신이 주는 선물”이라는 말을 듣고도 광고 섭외를 거부했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만든 구두 홍보를 위해 처음으로 CF를 찍었다. 무게가 있는 이름이란 그렇게 쓰는 것 아닐까.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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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검찰 고위간부에게 성추행당하고, 8년 동안 고통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그의 고백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부끄럽게 한다. 서 검사는 31일 변호인을 통해 입장을 내고 “까마득한 터널 속에 있는 기분이었는데 많은 분들의 공감, 응원 덕분에 이제 여러분과 같은 세상 속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의 본질은 제가 어떤 추행을 당했는지에 있지 않다. 무엇이 문제였으며,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에 관심 가져주길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한국 사회는 서 검사의 호소에 응답해야 한다.

지난 29일 오후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이 겪은 검찰 내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 JTBC 화면 캡쳐

무엇이 문제였나. 이른바 ‘가해자들의 연대’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서 검사가 성추행을 당한 장소는 장례식장이었다. 법무부 장관과 다수 검사들이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가해자 안태근 전 검사장의 행동을 제지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공익의 대표자’라는 검사들이 눈앞에서 범죄가 벌어지는데 방관했다. 이후 성추행 사실이 덮이는 과정에서도 가해자들의 연대가 작동했을 가능성이 짙다. ‘미투(MeToo)’ 운동을 촉발한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와인스타인이 영화 캐스팅을 빌미로 자신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폭로한 여배우 레아 세이두는 “가장 역겨운 건 와인스타인이 그러고 다니는 것을 모두 알았지만,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성폭력을 직접 저질러야만 가해자인 것은 아니다. 성폭력을 외면하거나, 방관하거나, 알고도 침묵하거나, 피해자의 침묵을 강요하거나, ‘피해자 책임론’을 들먹이는 이들 모두 가해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취임 후 첫 국정연설을 한 하원 의사당에서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 ‘미투’를 지지하는 취지로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워싱턴 _ EPA연합뉴스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문유석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미투 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내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방관하지 않고 나부터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미퍼스트(MeFirst) 운동이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대한 항의가 ‘분위기 깨는 일’이라는 유의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 문 부장판사의 말대로 “단 한 명이라도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하며 제지한다면” 가해자는 고립되고 범죄행위는 중단된다. 다수가 침묵을 깨 가해자를 제지하고, 목격한 사실을 증언할 때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피해자들은 공감과 지지 속에 용기를 내 진실을 드러낼 것이다. 모두가 눈 부릅뜨고 ‘고발자’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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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31일 국회 내에 여야와 모든 사회경제주체가 참여하는 가칭 ‘사회적 연대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그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한국형 사회적 대타협의 목표는 노동·복지·규제·조세 등 정책 전반에 대해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자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사회적 연대위원회는 청년, 여성, 비정규직, 비조직 노동자, 중소기업, 영세 소상공인 대표까지 포괄해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여야가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당면 위기의 해법을 모색하고, 새로운 나라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각계 대표가 머리를 맞대자는 얘기다. 바람직한 제안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방면에 걸쳐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위기들이 누적된 채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극심한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시민들의 삶은 벼랑 끝에 몰려 있고, 일자리도 성장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사회경제주체들의 대화와 타협이 필수인데, 현실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사회적 합의를 지향했던 노사정위원회 모델도 김대중 정부 이래 20년간 겉돌고 파행을 거듭했다. 마침 이날 노사정 대표들은 새로운 대화의 틀을 짜기 위해 8년2개월여 만에 한자리에 앉았다.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대화 기구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우 원내대표는 “노사정위원회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부족하고,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빠져 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다. 노사정위 복원과는 별도로 사회적 약자와 국회를 포함시킨 새로운 사회적 공론의 장은 검토해볼 만하다.

우리 사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 일자리 문제, 복지를 위한 증세, 규제혁파와 구조개혁 등 거의 모든 현안에서 이해 당사자 간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입장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들 현안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 어느 일방의 주도로 풀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가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의 필요성을 높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회적 대타협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권, 노사정 등 사회경제 주체들 간의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해외의 성공 사례 역시 정치와 국회의 적극적인 역할이 주요인이었다. 여야가 사회적 대화 초기부터 함께 참여하면 대타협의 입법과제를 신속히 처리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해관계가 갈리는 사안일수록 양보해서 타협을 이뤄내는 게 성과 없이 극한 대결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최소한 공론화의 장을 여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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