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배우 알리사 밀라노는 지난해 10월16일 트위터에 “당신이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면 이 트윗에 ‘나도(me, too)’라고 답해주세요”라고 올렸다. 이 트윗은 2만4000회 넘게 리트윗되고, 답글이 6만800개 넘게 달렸다.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폭로가 촉발시킨 고발 캠페인의 시작이었다. ‘그는 내 의붓아버지였다’ ‘15살 때 3명의 남성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등 수많은 미투가 줄을 이었다.

사실 미투의 역사는 10년도 더 됐다. 2006년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흑인 사회 내의 성폭행을 알리기 위해 시작했다. 오래도록 수많은 미투가 쌓여 이제 역사를 바꾸고 있다.

한국에서도 2016년 가을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계_내_성폭력’ 운동이 시작됐다. 그렇게 용기를 낸 목소리들이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폭발력을 얻었다. 

하지만 서 검사의 대리를 맡은 김재련 변호사의 과거 경력과 발언으로 사태는 새 논쟁을 낳았다. 김 변호사가 박근혜 정부가 만든 위안부 화해·치유재단 이사로 활동하며 할머니들에게 양보를 종용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것과 방송 인터뷰에서 “박상기 법무장관에게 서 검사의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이뤄진 게 없었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를 두고 ‘현 정부 흔들기’라는 해석이 제기됐다. @mo***은 트위터에서 “김 변호사는 서 검사의 증언의 의도를 의심하게 만들고 ‘me too 운동’을 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공세로 전환시켰다”고 비판했다. @yo***도 “가해자와 덮은 자는 사라지고 박 장관만 나오는 것이 솔직히 기분이 나쁘다”고 썼다. 하지만 “성추행 문제는 그대로 있고 피해자와 약자를 공격하지는 말자”고도 했다. @pa***은 “박 장관이 질책받아야 할 일과 무리한 정치공세에 대한 대응은 분리해야 한다”고 적었다. 

김 변호사는 2일 “염치없는 사람은 부당함에 맞서면 안되나”라고 반박한 뒤 이튿날 변호인단에서 사퇴했다. 서 검사 측은 “범죄 피해 사실을 얘기하는데 의도를 묻고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는 것이 마음 아프다”며 “본질에 주목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인숙 기자 sook9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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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농도 미세먼지 저감대책으로 서울시가 내놓은 무료대중교통정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나는 한 번 시행하는 데 약 50억원이 소요된다는 버스, 지하철 무료 운행 예산의 출처가 서울시의 재난관리기금이라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미세먼지 나쁨 경보가 있는 날 외출을 해본 사람은 동의할 것이다. 회색도시 서울은 우리 모두의 재난이며, 미세먼지 문제 대책은 우리 공동체의 재난대책이라는 것을.

문제는 무료대중교통정책을 교통량 감소와 효과적으로 연계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는 공공재의 역설이라는 이름으로 경제학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문제이다. 미세먼지 나쁨 경보가 발령되는 그날 아침, 누가 자신의 편안한 자가용이 아니라 버스로, 지하철로 발길을 옮길 것인가? 무료대중교통정책은 공공재인 공기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개개인의 아침 출근길 안락함을 하루만 양보하기를 기대하는 작은 경제적 인센티브이다.

17일 서울 서초구 누에다리에서 바라본 거리가 미세먼지에 뿌옇게 덮여 있다.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서울과 경기의 1㎥당 초미세먼지(PM2.5) 일평균 농도는 91㎍(마이크로그램)으로, ‘매우 나쁨’(일평균 101㎍ 이상)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이날 서울·인천·경기 지역에는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시행됐다. 권도현 기자

하지만 최근 세 번에 걸친 ‘공짜 대중교통’의 교통량 감소효과는 서울시 전체 교통량의 2%가량 감소에 머물렀다. 정책의도에 비해 성과가 크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무료교통정책의 교통량 감소효과를 개선할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최근 사회 연결망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개인 인센티브에 기반을 둔 정책입안에 전혀 새로운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의 경제적 유인책을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배포하기보다는 개인이 속해있는 집단의 사회적 연결을 이용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된 당일 아침 대중교통으로 바꿔 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보는 박원순 시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족, 친지, 직장동료, 친구들이 가지고 있다. 이들의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사회 연결망을 이용하는 정책의 요지이다. 예를 들어, 서울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미세먼지 경보 당일 대중교통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추첨하는 무료 복권을 1차로 카카오톡과 같은 SNS상에 배포할 수 있다. 그러고는 복권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 복권을 “당신이 생각하기에 서울시의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 대중교통으로 바꿔 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에게 전달해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대중교통을 실제로 이용한 당사자가 복권에 당첨되는 경우 해당시민을 추천한 지인들 역시 못지않은 금액의 보상을 받기로 하면, 이러한 추천과정의 정확성은 더 높아진다. 이런 전달과정이 몇 번 반복되면 무작위 시민이 아니라, 무료대중교통을 이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민들의 사회적 연결집단이 구성된다.

관련 연구는 사회 연결망에 내재하는 정보를 이용하여 구성한 연결집단이 대중의 행동을 하나의 목표로 이끄는 데 아주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보건관계당국이 AIDS를 방지하기 위해 피임기구를 나누어주는 경우, 특정 당사자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이 피임기구가 가장 필요할 만한 사람에게 전달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경우 그 효과가 배가하였다는 연구가 있다. 미국 MIT의 미디어렙에서는 인터넷상에서 필요한 특정 정보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를 가장 빨리 찾아내기 위해 “가장 이 정보를 알고 있을 만할 사람을 추천해주세요”라고 부탁하고 추천인과 최종 정보제공자에게 모두 복권을 제공하여 정보탐색 속도를 현격히 단축하는 실험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사회 연결망에 기반을 둔 연결집단은 한 명의 개인은 알 수 없는 정보를 ‘대중의 지혜(wisdom of crowds)’를 활용하여 수집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센티브를 그 개인을 추천해준 지인 혹은 두 사람이 속한 집단으로부터의 사회적 압력으로 배가시키기도 한다.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된 출근길 아침, 큰딸아이에게, 직장동료에게, 또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받은 대중교통이용 대상자 무료 복권은 대중매체의 어떤 무작위 캠페인보다 훨씬 그 효과가 높을 것이다.

미세먼지는 특정 정치인들의 선거이슈가 아니며,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재난이다. 장기적으로는 미세먼지를 유발하는 공장과 경유차량 감소, 전기차 확대에 힘써야 할 것이다. 자동차 의무 2부제 역시 시행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곧 다시 찾아올 미세먼지 경보 발령에 무료대중교통제도가 다시 시행된다면 그때는 우리 공동체에 내재해 있는 대중의 지혜를 활용해보는 것이 어떨까? 게다가 우리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정보기술(IT)과 SNS 플랫폼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우리 사회가 그에 걸맞은 공동체 의식 역시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 공동체 내의 연결구조를 활용하는 적절한 정책개입이 무료대중교통정책의 교통량 감소효과를 크게 증대시켜줄지도 모른다.

<박선현 |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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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피고인 이재용의 항소심 판결이 선고된다. 그는 지난해 8월 뇌물과 횡령, 재산국외도피 등 혐의가 일부 인정되어 1심 재판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불복해 항소심 재판을 받아왔다. 변호인과 특별검사 사이에 법리 다툼이 치열하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피고인의 범죄 혐의를 인정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항소심 결심 공판을 받기 위해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강윤중 기자

이재용 측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 승마지원 등 삼성이 박근혜 전 대통령 측에 수십억원을 제공한 것은 정당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고, 셋째 아들이었던 이건희 회장과 달리 자신은 외아들이며 삼성은 다른 기업과 달리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지 않아 경영권이 당연히 승계될 것이라 부정한 청탁을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비정상적인 합병절차에 대해서는 두 회사 사장과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장이 모두 결정해 ‘모르는 일’이라 선을 그었다.

뻔뻔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이었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재용이 가장 큰 영향력을 보유한 제일모직과 공공기관인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삼성물산의 비정상적인 합병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도 이재용 본인이다. 상속세를 회피하고 위법적인 방법으로 부를 대물림하려고 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변명이 담고 있는 유일한 진실은 ‘이재용에게 경영권이 승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왕국 내에서 무조건 관철되어야 하는 절대명제였다는 것이다.

판결 선고를 앞두고 국내외 경제인들과 경제단체에서 대기업 총수의 장기간 부재로 인한 경영 공백을 걱정하며 선처를 바라는 탄원이 이어지고 있다. 몇몇 언론에서도 이런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이는 이재용 본인에게는 물론 앞으로 삼성을 위해서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라 생각한다.

이재용은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이병철 손자나 이건희 아들이 아닌 우리 사회의 진정한 리더로 인정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진심이었다면 그는 2015년과 2016년에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남몰래 만날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 비닐 천막 하나로 추위를 피해가며 강남역 삼성전자 홍보관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 피해 노동자들을 찾아가 만났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가 진정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넘어서는 진정한 리더로 인정받고 싶었다면 삼성그룹이 유지해 온 ‘무노조 경영전략’을 폐지했어야 한다.

삼성의 반도체 산업은 과거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빼앗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어떤 화학물질을 노동자들이 사용했는지는 영업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고, 백혈병 등 희귀질환의 의학적 인과관계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만약 이재용 부회장이 먼저 피해자들을 찾아가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고, 한 명의 피해자도 제외되지 않는 제대로 된 보상절차를 마련하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을 대책을 외부 전문가의 지혜를 두루 모아 구상했다면 이재용의 삼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재용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가치 있는 삼성”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지만 이미 총수와 다름없다던 이재용의 삼성은 과거의 삼성과 다른 새로운 가치가 전혀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건희 회장이 보유한 천문학적인 재산과 지위가 어느새 이재용 부회장에게 옮겨 갔다는 것이다. 값비싼 주식을 잘게 쪼개 더 많은 사람이 삼성전자의 주식을 구매할 수 있게 된다고 하여 국민회사가 되지는 않는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조영관 |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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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이재용

세상의 빛과 그늘을 알아야, 인간은 더욱 인간다워진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고 했다. 군중의 환호와 폭죽의 화려함에 빠져서는 정의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평창 올림픽 개막이 목전이다. 전 세계가 스포츠를 통한 인류 평화, 공존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과거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2014년 가을, 상상할 수 없는 ‘고목 학살사건’이 벌어진다. 강원도 정선과 평창의 경계에 위치한 가리왕산. 평창 올림픽 스키 활강경기가 예고된 곳. 수령 150년을 훌쩍 넘긴 신갈나무, 음나무, 전나무가 차례차례 잘렸고 그 수가 무려 10만그루를 넘었다. 500년 ‘왕실의 숲’은 슬로프의 모양대로 가리왕산 정상에서 수직으로 밀렸다.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경기를 통한 국제평화의 증진’이라는 올림픽 정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가리왕산 벌목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국제스키연맹(FIS)의 묵인 아래, 강원도와 한국 정부가 내린 결정이었다.

2011년, 평창이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호명되었다. 올림픽 유치 삼수 만에 이룬 쾌거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그 시각, 평창의 경쟁도시 독일 뮌헨 주민들도 올림픽 유치 실패를 축하하며 축배를 들었다. 이른바 ‘반올림픽연합(Nolympia)’의 승리다. 뮌헨처럼 스위스 생모리츠-다보스, 폴란드 크라쿠프, 오스트리아 빈이 IOC 주도의 동계, 하계올림픽을 주민 투표로 거부했다. 스웨덴 스톡홀름은 의회가 나서 올림픽 유치를 반대했다. 이유는 이러하다. 산더미처럼 쌓일 부채, IOC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 지역발전 허상, 부동산 가격 폭등, 자연환경 파괴에 반대한다는 것.

‘새로운 세상(A New World)’이 열릴 것이라 했던 2016 브라질 리우 올림픽은 어떨까. 개회식이 열렸던 마라카나 스타디움은 현재 폐쇄되었다. 유리는 깨지고 전기는 끊겼다. 벽과 천장의 전기선은 사라졌다. 경기장 좌석의 10%는 도둑맞았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올림픽’ ‘최후의 패자는 자연환경’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은 경기장 활용을 못해 ‘1조7600억엔의 빚과 훼손된 자연’만 남겼다. 한국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2002 한·일 월드컵 경기를 치렀던 지방 경기장은 적자에 허덕인다. 전남 영암의 2013 포뮬러1 코리아 그랑프리 경기장,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이 열린 ‘무대책’ 아시아드주경기장도 사후 활용 방안이 궁색하다.

‘포스트 평창’의 모습은 어떨까. 브라질 리우의 폐허가 너무도 가까이 있다. 흉물스러운 불 꺼진 경기장을 마주한다. 강원도는 경제 부흥이 아니라 빚더미에 앉는다. 가리왕산은 동계올림픽 특구 논란 속에 개발 광풍이 분다. 올림픽플라자를 포함해 7개 신설 경기장의 사후 활용 방안은 없다. 난개발, 반환경, 실패한 올림픽으로 치닫고 있다.

환경적 측면에서, 평창 올림픽이 남긴 숙제가 있다면 바로 ‘가리왕산 복원’이다. 작년 12월, 강원도 복원추진단도 ‘전면 복원’을 결정했다. 단 며칠 활강경기를 위해 국가 보호구역을 해제하고 나무를 베고 경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10만그루 나무를 다시 복원하라니, 아이러니다. 우리는 메멘토 모리, 정의와 평화의 관점으로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가리왕산을 위한 사죄의 진혼을 올려야 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가리왕산 복원은 뼈아픈 숙제다.

<윤상훈 | 녹색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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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말하라.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 예전에 말하던 것도 달라진다. 지금 말하라.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왜 말하는지. 이유도 경위도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은 기준이다. 지금이 변하고 있다. 변하기 전에 말하라. 변하면서 말하고 변한 다음에도 말하라.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하라. 지나가기 전에 말하라. 한순간이라도 말하라. 지금은 변한다. 지금이 절대적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이 되어버린 지금이. 지금이 될 수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그 순간이다. 지금은 이 순간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 말하라. 김언(1973~)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존재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이다. 바로 지금, 여기가 있을 뿐, 다른 더 좋은 시절은 없다. 지나간 과거에 붙들려 있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 일이다. 오직 현재의 마음을 얻을 일이다. 지금 이 순간도 변하고 있다.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잘 깎아놓은 한 알의 사과도 곧 과육의 색깔이 변한다. 순간순간이 있을 뿐이다. 시간도 왔다 간다. 고통도 지나간다. 우리의 얼굴에 핀 미소도 물 위를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흘러간다. 지금 일어나는 것을 바로 보라. 지금은 금방 빠져나간다. 움켜쥐었으나 곧 손바닥에서 빠져나가는 물처럼. 그래서 참선 수행자들에게 염기즉각(念起卽覺)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리라. 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바로 알아차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리라. 이 시는 집요하게 ‘지금’을 말하라고 요구한다. 내 손과 발이 움직이는 이 순간을, 내 생각이 안개처럼 피어나고 뭉쳐지고 흩어지는 이 순간을, 내가 전면적으로 마주 보고 대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아주 명백하게 보라고 말한다. 사실과 꼭 같게, 있는 그대로를 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것이 정견(正見)일 것이므로.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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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조직 내 성폭력, 성추행 사건이 한 여검사에 의해 드러났다. 한국 최고의 권력 조직 내, 최상의 전문직이라 여겨지는 검사도 성폭력의 대상이 되어 고통받고 차별받는 현실을 폭로한 이번 사건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계급 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한 것이다. ‘여성’은 여전히 상수처럼 존재하는 가장 열등한 계급이다.

사회적으로 많이 진출했다 하지만 실제 여성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남성의 충실한 내조자 혹은 부속품, 육아와 양육을 전담하는 존재, 남성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용기’라는 인식은 그 뿌리가 흔들리지 않은 채 각종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변주되고 발전해 왔다. 예전의 ‘빨간책’은 디지털화되어 폭력적 이미지들을 쏟아내고 여성은 발가벗겨진 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남성들의 눈요깃거리가 되고 있다. 기생집은 룸살롱으로, 집창촌은 오피스텔로 온라인·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횡행하는 성산업은 여성을 사고, 팔고, 비하하고, 때리고, 강간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4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1일 전국 16개 검찰청 앞에서 검찰 내 성차별, 성폭력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발언하고 있다.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는 지난 1월 19일 한 방송사에 나와 법무부 간부였던 안태근 전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과거의 사실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1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한국여성단체연합·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미투’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검찰 내 성차별, 성폭력 의혹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이 같은 현상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적 영역에 진출한 여성은 두 가지 역할을 여전히 수행해야 하는 압력을 느낀다. 남성과 함께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에서도 여성은 어리고 예쁘고 날씬하고 순종적이어야 하며 남성이 요구하는 어떤 것에도 ‘눈 똑바로 뜨고’ 저항해선 안된다.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일 잘하며 안팎으로 두루두루 살피는 돌봄의 태도까지 갖추어야 한다. 결혼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며, 아이를 낳아도 문제고 낳지 않아도 문제가 된다. 시시때때로 이어지는 성차별적 발언과 성적 괴롭힘, 느닷없는 성적 접촉에도 순응해야 하고, 심지어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적당히 웃어줘야 하며 웬만해선 참아야 살아남는다.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어도 꽃뱀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2차 피해를 걱정하며, 공론화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곤, 조직의 안위까지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고 삭여야 한다. 서지현 검사가 용기 내어 말하는 데 8년이나 걸린 이유다. 여성은 사실상 단 한번도 남성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받은 적도, 동등한 시민이자 사회의 일원으로 존중받은 적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성폭력이 성차별적 사회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가시적인 잘못을 저지른 특정인들의 주관적 악행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정상적이고 객관적인 사회적 과정의 결과물인 구조적 부정의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폭력이 구조적 문제인 이유는 차별을 당하는 집단에 대한 특권이나 지배를 유지하려는 욕구, 혹은 약자로 낙인 찍힌 자들을 지속적인 피해자로 삼고자 하는 권력의지가 발현된 결과물이며, 위계화된 성별 질서에서 배태되어 불공정한 결과를 야기하고 성별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일생을 위협 속에서 살아가게 방치하는 것, 이들에 대한 폭력 행위들을 가능하게 하고 용인하는 것, 그래서 약자에 대한 지배와 통제가 정상적인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다시 피해자들을 암흑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 결과적으로 이들의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하는 것, 그 자체가 구조적 부정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이번 사건에 대한 명명백백한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은 문제해결의 선결과제이자 첫걸음에 불과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와 법무부 내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설치는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검찰조직 내 ‘불미스러운’ 문제로 축소되어선 안된다. 개인의 도덕적 흠결의 문제이거나 특수 조직의 성추문 사건이 아니다. 피해자에 대한 각종 외모품평회를 일삼으며 사생활을 캐고, 적반하장식 책임전가에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오래된 적폐가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깊은 성차별적 구조임을 웅변 중이다.

이제 프레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성폭력, 가정폭력, 여아학대, 성매매, 음란물, 스토킹, 데이트강간, 디지털성폭력, 인신매매 등은 ‘여성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가해자가 남성이고, 남성들의 의식과 무의식이 전면적으로 개조되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라면, ‘남성문제’ 아닌가. 무지가 면죄부를 주던 시대는 끝났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묵인하고 동조하고 정상화하고 비가시화하며 성차별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무지는 명백한 범죄행위다. 그러므로 목격자가 되었을 때 침묵하지 않겠다는 ‘미퍼스트’(#MeFirst)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생을 통해 누적된 가해자성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우선이다.

들불처럼 번지는 각계각층 여성들의 ‘미투(#MeToo)’운동은 이제 남성들의 변화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변혁의 갈림길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인식의 지체현상을 깰 것인가, 과거에 머물 것인가.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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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검사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이후 ‘미투(MeToo)’ 물결이 거세다. 그러나 지난해 미투 캠페인이 활발했던 미국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나설 때도 가해자의 실명을 폭로하는 일은 흔치 않다. 가해자의 실명을 고발할 때는 피해자가 익명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인들의 익명 앱 ‘블라인드’에 올라온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승무원들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해왔다’는 글이 대표적이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으로부터 성추행 피해를 제기한 서지현 검사가 4일 밤 서울 송파구 동부지검에 설치된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한국의 법체계는 거짓은 물론 ‘사실’을 공개한 데 따른 명예훼손죄도 인정한다. 형법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경우 2년 이하 징역·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정보통신망법의 벌칙은 더 세다.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이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폭로에 앞장섰던 탁수정씨는 경향신문에 “우리는 열악한 성폭력법을 가진 나라에 산다. 가해자들은 법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기 때문에 법으로 걸고 넘어진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를 겪었던 이은의 변호사는 “성폭력 고소에 맞고소하는 ‘가해자 시장’이 늘었다”(한국일보 인터뷰)고 비판했다.

명예훼손죄 고소·고발이 남용되면 내부고발 등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 이 때문에 영미권에서는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민사소송으로 해결하도록 한다. 한국과 같은 대륙법체계인 독일도 내용이 허위일 때만 처벌한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11년 “명예훼손의 비형사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2016년 서울지방변호사회 설문조사에서도 응답한 변호사의 49.9%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에 찬성했고, 16.5%는 유지하더라도 징역형은 삭제하자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2016년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없애는 내용의 형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강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는 약자인 피해자에게 수사·재판의 부담까지 안기는 족쇄 노릇을 한다. 8년 만에 용기 내 폭로한 서 검사도 “(안 전 검사장이나 최교일 의원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위헌법률심판 소송으로 다퉈볼 생각”(JTBC 인터뷰)이라며 역고소를 각오하는 상황이다. 피해자의 ‘말할 자유’를 막는 명예훼손죄, 반드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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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만은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플래카드가 사거리 횡단보도 반대편 가로수에 묶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고 목격자를 찾습니다. 지난 1월16일 밤 12시쯤 이곳 횡단보도에서 일어난 1톤 트럭 사고를 목격한 분은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후사하겠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체감온도가 영하 15를 넘는 밤이었다.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채 가로수 옆을 지나쳤던 진만은, 무언가 생각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이거 날 찾는 플래카드잖아.’

진만은 다시 걸음을 돌려 플래카드 앞에 섰다. 맞네, 그날이 맞아. 진만은 자신이 건너온 횡단보도를 뒤돌아보았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희끄무레 남아 있는 잔설 위로 차량들만 빠른 속도로 지나치고 있었다. 차도에서는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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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 진만은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그때도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고, 체감 온도는 자기가 무슨 PC방 최저 시급이나 되는 것처럼 며칠째 영하 15도 변함이 없었다. 허기가 져서, 진만은 계속 자취방 싱크대 찬장에 있는 짜장라면만 생각하면서 빠르게 걷고 있었다. 짜장라면 위에 ‘달걀 후라이’를 올려야지, 노른자는 터뜨리지 말아야지, 마음먹으면서 깜빡깜빡 초록불이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반대편 인도에 도착해 채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를 들었다. 횡단보도 초록불은 이미 빨간불로 변해 있었고, 도로 2차선엔 짐칸에 파란색 방수포를 씌운 1톤 트럭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트럭의 전조등 앞에 누워 있는 한 사람… 트럭 운전석에서 검은색 비니에 목장갑을 낀 남자가 뛰어나왔고, 진만 또한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괜찮으세요?”

검은 비니 아래로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이는 운전사가 물었다. 그는 보풀이 인 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는데, 소매 끝에 다시 누런 내복 소매가 튀어나와 있었다. 도로에 누워 있는 사람은 보라색 털외투를 입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쓰러져 있는 자리 옆에는 접이식 쇼핑카트가 모로 누워 있었다. 쇼핑카트에는 각종 박스들이 마치 부러진 날개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에그… 다리가… 다리가 안 움직이는데….”

운전사는 할머니를 거의 뒤에서 안다시피 해서 부축했다. 진만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접이식 쇼핑카트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병원부터 가시죠.”

운전사가 할머니를 트럭 조수석에 태웠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가 쇼핑카트를 찾아 진만이 대신 트럭 짐칸에 실어주었다. 그것이 그날 진만이 목격한 사고의 전부였다. 진만은 자신이 무언가 좋은 일을 한 것만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지만, 자취방에 남아 있던 달걀을 정용이 몽땅 달걀찜으로 해놓은 것을 보고 이내 마음이 상했다. 그 마음이 사고의 잔상보다 훨씬 더 오래 남았다. 퍽퍽한 짜장라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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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운전사는 신호등 색깔부터 물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몇 분을 더 고민하다가 진만이 처음 전화를 했을 때였다.

“글쎄요… 아마 빨간색이었던 거 같기도 한데….”

진만이 말을 흐렸지만, 트럭 운전사는 대번에 그렇죠, 빨간색이 맞잖아요, 하면서 말을 이었다. 트럭 운전사의 말에 따르면 초록색이냐, 빨간색이냐에 따라 자신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고 했다. 초록색일 경우는 11대 중과실 교통사고로 형사처벌까지 받는 것이고, 반대로 빨간색일 경우 할머니의 무단횡단으로 자신의 과실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저기,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면 그냥 본대로 말씀만 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트럭 운전사는 목소리가 빨랐고, 또 다급해 보였다.

“할머니는요? 그때 그 할머니는 많이 다치셨어요?”

왼쪽 다리 골절로 8주. 현재 한방병원에 입원 중. 그것이 트럭 운전사가 전한 할머니의 근황이었다.

“꼭 좀 부탁합시다. CCTV도 없고 블랙박스도 없는데, 할머니는 계속 초록불에 건넜다고 우기시니….”

진만은 네, 네, 말끝을 흐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진짜 증언하게?”

옆에 누워 있던 정용이 슬쩍 진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건너고 있을 때 초록불이 깜빡거렸던 게 사실이니까….”

“그 할머니가 안 됐네…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 할머니가 힘들어질 텐데….”

진만은 팔베개를 한 채 자취방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냥 말까? 그 할머니 그 시간에 폐지 줍는 거 보면….”

“그럼 또 그 트럭 운전사가 힘들어지겠지. 중과실 사고면 벌금도 엄청 나올 텐데….”

“아이 씨,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진만은 시험을 망친 아이처럼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면서 트럭 운전사에게 전화를 건 자신을 잠깐 원망하기도 했다.

“증언해주기로 했으면 다른 거 말고 사실만 말해야지 뭐. 그게 어려운 거라서 진짜 증언할 거냐고 물은 건데….”

정용이 그렇게 말했지만, 진만은 말이 없었다. 대신 진만은 머릿속으로 그날 밤 사거리 횡단보도를 반복해서 떠올렸다. 초록불이 깜빡거릴 때, 목을 잔뜩 움츠린 채 횡단보도를 건너던 자신의 등 뒤로 탈탈탈, 접이식 쇼핑카트 바퀴가 내던 소리… 슬쩍 뒤돌아보면서 아이고 할머니, 발이 많이 느리시네… 생각하면서도 뒤돌아 다가가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진만은 어쩐지 자신의 그 마음까지 증언해야 할까 봐, 그게 더 두려워서 밤늦도록 쉬이 잠들지 못했다. 추운 겨울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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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8일자 지면기사-

토요일 밤 9시 무렵, 예고도 없이 진만과 정용이 세 들어 사는 건물 전체에 전기가 나가버렸다. 무언가 퍽, 터지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형광등도, 컴퓨터도, 보일러도, 서로 합을 맞춘 노련한 배우들처럼 일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적. 그 정적 때문에 정용은 평상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소음을 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옆방 남자가 끙, 하면서 돌아눕는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길게 어둠 속에서 울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용과 진만은 휴대폰 손전등 기능을 이용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출입구 앞에는 이미 서너 명의 건물 입주민들이 나와 환하게 불을 밝힌 바로 앞 아파트와, 그와는 반대로 오래된 축대처럼 칙칙하게 변해버린 자신들의 거주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원래 칠층짜리 모텔을 원룸으로 개조한 건물은 창턱마다 장미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장미꽃 문양만은 기괴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거, 한전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입주민 중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용과 진만은 입주민들과 몇 발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추리닝 차림 그대로 나온지라 몸이 떨렸다. 불 꺼진 건물을 올려볼 때마다 목과 어깨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한전이 아니고 건물주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밖으로 나온 입주민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슬리퍼에 맨발 차림이었고, 수면바지에 담요를 어깨에 친친 감고 나온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월세만 받고 관리를 너무 안 해주잖아요.”

또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건물주가 관리를 제대로 안 해주는 것은 맞지만, 정용은 그렇다고 딱히 불만을 품거나 원망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월세가 지나치게 쌌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만 내는 처지라 무엇을 더 바라거나 원해선 안 된다고 이삿짐을 들여올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 건물이 근저당이 좀 많이 잡혀 있어요. 아아, 그래도 걱정할 건 하나 없어요. 그래서 보증금도 없는 건데, 뭘…. 처음 정용과 진만에게 방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인은 그런 말을 보태기도 했다. 근저당이 많이 설정되어 있는 건물, 그 건물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정전 때문에 한자리에 모여 서 있는 밤이었다.

“한전에서 30분 안에 기사 보내준대요.” 검은색 롱 패딩을 입은 젊은 남자가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그제야 몇몇 사람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더 많은 사람이 건물 앞에 남아 있었다. 일부는 출입문 옆 벽에 기대 서 있었고, 또 일부는 층계에 앉아 있었다. 건물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구경거리처럼 입주민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사층에 사는 누군지는 몰라도 거 밤에 세탁기 좀 돌리지 맙시다.”

중년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 세탁기를 안 돌리면 언제 돌려요? 낮엔 일하는데.”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되받았다.

“아니, 주말도 있고 정 안 되면 초저녁에 돌리면 되잖아요?”

“주말도 일하고 퇴근하면 밤 열 시인데, 뭘 어쩌라는 거야, 젠장.”

“젠장? 너 근데 몇 살이니? 몇 살인데 반말 찍찍 갈기는 건데!”

층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서 한 사내 앞쪽으로 다가갔다. 사내도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웠다. 정용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모두 혼자 사는 사람들이었다. 연차나 반가, 월차 같은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코인 세탁소를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가전제품이 내는 소리만 듣고 사는 사람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사람들.

서로 멱살을 잡을 듯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더 이상 반말도, 비아냥도 없었다.

“정전되니까… 괜히 호빵 같은 거 먹고 싶지 않니?”

진만이 정용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정용은 그런 진만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얘랑 너무 오래 살아서 이렇게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신고 전화를 한 지 채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아 붉은색 한전 마크를 단 사다리차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퓨즈가 나갔을 겁니다. 교체하면 바로 괜찮아질 거예요.”

헬멧을 쓴 기사가 모여 있는 입주민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입주민들은 바스켓이 달린 사다리가 서서히 펼쳐지는 모습을 마치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참새 떼처럼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건물 안에 있던 입주민들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스켓에 타고 있는 한전 기사를 바라보았다. 토요일 밤이었지만,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따뜻한 잠자리를 위해 아찔한 허공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직업이었겠지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겐 어떤 위로가 되는 모양이었다. 입주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어, 눈 오네.”

누군가가 그렇게 말을 하자 정말로 하늘에서 벚꽃 같은 작은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떨어지는 눈과 그 눈을 배경으로 하늘에 떠 있는 한전 기사를 계속 쳐다보았다. 올해 첫눈이었지만, 기사는 그런 것쯤 상관도 하지 않고 변압기 여는 작업에만 열중했다. 첫눈이 기사를 더 기사답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건물주도, 근저당도, 세탁기 소음도 첫눈이 온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겠지만, 지금 저 하늘에 떠 있는 기사만큼은 더 선명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야, 진짜 눈 보니까 호빵 먹고 싶지 않니? 올해 첫 호빵.”

진만이 다시 정용의 귀에 속삭였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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