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판사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집행유예로 풀어준 항소심 판결을 공개 비판하고 나섰다.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이재용 판결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법관이 다른 법관의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평하는 것은 금기처럼 되어 있다. 김 부장판사는 2014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위반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를 향해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함)’라 비판했다가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은 바도 있다. 그런 그가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게 된 사법 현실이 안타깝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잔자 부회장이 5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경향신문 김창길 기자 cut@kyunghang.com

 

이 부회장 항소심 판결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려면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우리는 시민의 눈높이에서 두 가지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다른 국정농단 사건 재판부들이 증거능력을 인정했던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 내용 대부분을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은 점이다.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는 장시호씨 등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이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바 있다. 앞서 서울고법 형사10부도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 대한 항소심에서 ‘안종범 수첩’을 판단의 주요 근거로 활용했다. 다른 국정농단 사건 재판부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둘째, 이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는 뇌물액수를 깎고 깎아 36억원만 인정했다. 하지만 이 액수만으로도 집행유예 선고 사안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박채윤 와이제이콥스메디칼 대표는 안 전 수석 등에게 59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한 혐의가 인정돼 징역 1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장시호씨는 특검 수사에 협조했음에도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이 부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는 양형의 형평성과 예측가능성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사법권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 과연 무엇을 위한 가치인지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주권자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행사하듯 사법부도 마찬가지다. 법관의 독립은 주권자가 제대로 된 재판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 개별 판사 마음대로 재판을 좌지우지하라는 뜻이 아니다. 국정농단 사건의 수많은 피고인 가운데 박채윤·장시호·문형표씨 등은 감옥에 있고 이 부회장은 석방됐다. 과연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가. 모든 법관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신군부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를 동원해 광주시민들에게 여러 차례 사격을 가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가 7일 발표했다. 특조위에 따르면 당시 계엄사령부는 1980년 5월21일부터 전남도청에 진입한 27일까지 수시로 문서 또는 구두로 헬기 사격을 지시했다. 일례로 5월22일 전투병과교육사령부에 시달된 ‘헬기작전계획 실시지침’은 “상공을 비행정찰해 버스나 차량 등으로 이동하면서 습격, 방화, 사격하는 집단은 지상부대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사격 제압하라”고 적시하고 있다. 공군의 수원·사천 전투비행단 전투기들은 폭탄을 장착한 채 출격 대기 중이었다. 해군과 해병대까지 출동 대기시켜 육·해·공군 3군이 모두 광주를 향해 출동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도 새로 드러났다. 신군부의 주도면밀한 광주 진압 계획과 잔혹성에 새삼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군이 헬기 사격을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비인도적 행위다. 이는 신군부가 광주시민을 시민이 아니라 적군으로 간주해 무차별 사살하려 했다는 증거이다. 특히 5월21일 헬기 사격은 비무장 상태인 시민들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지상에서 시민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가해진 사격보다 훨씬 공세적이다. 계엄군의 범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군의 주장은 핑계일 뿐이다. 5·18 때 공수부대와 육군뿐 아니라 해·공군, 해병대까지 동원한 사실은 새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당시 공군과 해군 지휘부의 신군부와의 거래 및 그들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조사에도 불구하고 규명해야 할 부분이 더 있다. 당장 광주에 투입된 헬기 조종사 5명은 무장출동은 시인하면서도 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암매장 희생자 찾기도 한창 진행 중이다. 최종 발포명령자도 밝혀지지 않았다. 가해자들과 일부 추종세력은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칭하는가 하면 북한군이 개입했다며 5·18을 폄훼·왜곡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는 5·18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 광주시민들은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라는 것을 피로써 가르쳤다. 이런 현대사의 비극이 40년 가까이 되도록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말이 안된다. 이번 조사는 5·18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한층 강조한다. 5개월간에 걸친 특조위의 조사를 이어받아 진상을 규명할 법적 근거와 조직이 필요하다. 정치권은 이미 발의돼 있는 5·18특별법안을 신속하게 통과시켜야 한다. 특히 자유한국당은 5·18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낀다면 법 통과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평창 동계올림픽 고위급대표단으로 남한에 파견한다고 북한이 7일 밝혔다.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인 최휘 당 부위원장과 남북 고위급회담 단장인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도 대표단에 포함됐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북한 최고권력 가문인 ‘백두혈통’이자 김정은 위원장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방남기간 동안 김 위원장의 대리인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폐회식 때 황병서·최룡해·김양건 등 ‘실세 3인방’의 방남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치적 무게가 실려 있다. 김 제1부부장의 남한 방문을 환영한다.

AFP연합뉴스

김정은 위원장이 김 제1부부장을 파견한 것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헌법상 국가 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에 더해 김 제1부부장을 보내기로 한 것은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제1부부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김영남 위원장 면담이 성사된다면 배석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견해를 전달할 수 있다. 김 제1부부장이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나 구두 메시지를 가지고 내려올 가능성도 있다. 마찬가지로 남북관계에 대한 문 대통령의 남북관계 복안이나 국제사회의 북핵 우려를 가감 없이 김 위원장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 간접대화의 메신저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청와대가 김 제1부부장의 방남을 “의미가 크다”며 환영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김 제1부부장의 파견으로 정부는 큰 힘을 얻게 됐다. 그렇잖아도 평창 올림픽은 사사건건 북한 참가를 문제 삼는 국내 보수세력과 대북 강경 목소리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미국의 공세에 부분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빚어왔다. 정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맞이한 셈이다. 정부는 김 제1부부장의 방남을 남북교류의 제도화와 북·미대화 모멘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 제1부부장도 방남기간 중 평화올림픽 개최에 협력하는 것은 물론 북핵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겸허히 청취할 필요가 있다. 미국도 북한의 진정성이 확인된 만큼 북한이 한·미공조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체제에 균열을 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거두고 평화올림픽 개최를 위해 적극 협력하기 바란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대학원 다닐 때 들은 얘기다. 인문대 신임 교수가 술자리에서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대학원생들이 그 교수에게 찾아가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만있지 않겠노라 경고했더니 그 다음부터 아예 술자리에 나타나질 않았단다. 그 교수가 누구인지, 그 후로도 문제가 없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30여년 전 흘려들었던 이 얘기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음은 교수의 잘못된 행동에 즉각 응분의 조치를 취한 학생들의 행동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당시 음대에도 성추행을 일삼는 교수가 있었다. 학생회가 이 문제를 공식 제기했지만 학교는 그를 잠시 해외에 나가있게 하는 걸로 무마했고 얼마 후 그는 다시 복귀했다. 실험실에서 벌어진 교수의 성희롱을 고발한 한 조교의 용기로 대학 내 성희롱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으나,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학사회의 권력형 성범죄는 여전하고 피해자 다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최고 권력기관인 검찰 내 여검사들조차도 성추행 가해자를 폭로하는 것이 어려운 사회에서, 하물며 아무런 힘도 없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성희롱과 성추행에 제대로 대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수년 전 교수들의 성추행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며 파면에 이른 경우도 있었지만, 성희롱을 가볍게 여기는 남성중심 문화, 성추행이 밝혀져도 기껏해야 정직 몇 달에 그치는 교수사회의 온정주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2016년 가을,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가 대두되며 피해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폭력의 심각성이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단, 미술계, 영화계는 물론이고, 예술학교에도 피해자들의 고발이 쏟아졌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계는 조용했다. 피해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부 고발이 어려운 집단이어서다. 오랜 기간 일대일 레슨으로 형성된 교수와의 수직적 관계는 평생 음악 활동의 기반이고 그 관계를 벗어나 살아남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년 전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제자 성추행 문제로 파면에 이른 음대 교수를 제자들이 옹호하며 피케팅을 하고 거리음악회를 열었던 것은 이런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다.

일부 음대 교수들의 행태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지만, 영향력이 큰 인물일수록 학생들도 그와 이해관계를 공유하기에 내부 문제는 밖으로 발설되지 않는다. 지난 몇년간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음대 교수들의 폭언, 폭행, 티켓 강매, 성희롱, 성추행 사건들은 안에서 곪고 곪아 터져 나온 것들이었다. 문제가 드러나야 개선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런 논란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없다. 뼈아픈 반성을 하고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는 그 집단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문제는 성폭력을 비롯한 온갖 잘못된 관행들을 학생들이 당연시하거나 체념해버리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침묵하도록 강요받는 데 있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에 민감하지 못했다.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목소리 덕에 간과했던 문제를 깨달았고, 여전히 강고한 편견에 맞서 싸우게 될 그들 옆에서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성폭력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여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권력관계에서 약자에 놓인 수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인 것이다.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세계적인 노 지휘자 두 사람의 수십년 전 성범죄 고발로까지 이어졌다. 대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세월은 가고 세상은 바뀌며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화한다.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다. 성추행과 성폭행 피해자 156명의 증언을 일일이 경청하고 격려하며 가해자에게 175년을 선고한 미국 여성 판사의 얘기가 단지 먼 나라의 일이 아니기를… 앞서 용기를 낸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우리를 일깨운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소설가 김명순(1896~1951)은 1917년 단편 ‘의심의 소녀’를 발표하며 등단한 한국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년대 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활동했던 김명순은 문학적 재능이 탁월했던 작가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김동인·전영택·김기진 등 당대의 유명 남성 작가들에 의해 ‘퇴폐 여성’으로 낙인찍히며 문단에서 사장됐다. 김명순은 소설 &lt;탄실이와 주영이&gt;를 통해 일본 유학 시절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그러자 김기진은 김명순에게 “성격이 이상하고 행실이 방탕하기 때문”이라며 인격살해를 가했고, 전영택은 “탕녀”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당시 김명순에게 남성 작가들은 ‘문단 내 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여성혐오와 성차별은 한국 문단의 뿌리깊은 병폐다. 여성 작가에 대한 성폭력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6년 10월 해시태그 운동 ‘#문단_내_성폭력’은 문화예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이 모인 트위터 계정 ‘고발자5’의 폭로는 충격적이었다. ‘고발자5’는 고교 문예창작 실기교사였던 배용제 시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제자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배 시인은 “네가 문학에서 벽을 마주하는 이유는 틀을 깨지 못해서 그렇다. 탈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고발자5’의 폭로가 있은 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번지며 성폭력이 만연한 한국 문단의 추악한 실태를 고발했다.

최영미 시인이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발표한 시 ‘괴물’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문단 내 성폭력’ 고발운동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 시인은 시 ‘괴물’에서 원로시인의 성추행을 폭로한 데 이어 6일 JTBC에 출연해 “(시에 언급된) 그는 상습범이다. 너무나 많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목격했고, 피해자가 셀 수도 없이 많다”고 밝혔다. 시 ‘괴물’에서 ‘En’으로 표기된 이름과 노벨문학상을 뜻하는 ‘노털상’으로 인해 가해자로 지목된 원로시인은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하고 뉘우친다”고 했다. 한국 문단에는 아직도 성폭력을 일삼는 ‘괴물’들이 적지 않다. 최 시인이 시에서 언급한 대로 문학이란 이름을 더럽히는 ‘괴물을 잡아야’ 할 때다.

<박구재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남녘은 올해 진짜 춥고 눈도 많이 내린다. 집 울타리 대밭이 있는데 매서운 북풍 한풍을 양팔 벌려 막아주고 있다. 고스란히 그 바람을 맞고 선 어리고 순한 대나무. 얼마나 춥고 아플까. 또 있다. 밤이면 고갤 떨구고서 발밑을 따뜻하고 환히 밝혀주는 외등. 그늘진 곁을 항상 지켜주고 돌봐주는 이런 존재들에 무한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도 같은 혈육이라고 ‘분단과 휴전’ 중임에도 올림픽 잔치에 함께해준 북녘 동포들. 어찌 보면 영화 속 동막골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영화 &lt;웰 컴 투 동막골&gt;을 기억한다. 불발인 줄 알고 수류탄을 옥수수가 꽉 찬 헛간에다 던졌는데 순식간 펑! 하늘에서 쏟아지던 무수한 팝콘. 불꽃놀이처럼, 함박눈처럼 내리던 그 팝콘. 살지고 미끈한 송사리 떼가 개울을 헤엄쳐가듯 올림픽 선수들이 날쌔게 달려가는 자리마다 팝콘이 쏟아지길 기도하는 마음이다.

강원도에선 옥수수를 옥시기라고 부른다. 강원도 사투리에서 반드시 앞장을 서는 말이 ‘요’란 말. 요 옥시기, 요 막국시, 요 깔뚝국시(메밀국수), 요 도루매기(도루묵), 요 뜨데기국(수제비), 요 맨두(만두), 요 강쟁이(튀밥), 요 칠구랭이(칡), 요 쌔미(상추쌈), 요 마마꾸(민들레), 요 꿀밤(도토리), 요 감재(감자), 요 해자오라기(해바라기)….

강원도 사투리가 하고 싶으면 ‘요’라는 첫마디만 꺼내면 된다. 캐나다·미국에서 온 친구, 러시아에서 온 친구, 멀리 남미에서 온 친구한테도 요를 가르쳐주길. 요 올림픽. 고라댕이(산골짝) 너와집마다 건강하고 예쁘장한 요 해까이(어린이), 요 아주버이, 요 아주머이, 요 할머이, 요 할부지, 재미지게 오순도순 살고 있는 강원도땅. 설피를 신고 설산을 오르다보면 멀리 보이는 설악산 금강산. 겨울에 금강산은 개골산이라 불린다지. 수천수만 번 들었던 노래 그리운 금강산. 눈두덩 말라붙은 눈물로도 모자란 그리움이렷다. 눈 내리는 ‘요 밤’, 강원도 옥수수 팝콘이라 생각하고 입을 쩍 벌려본다. 가문 땅에 내리는 평화와 생명의 은총. 아무리 추워도 감사해 지분지분 눈물부터 난다.

<임의진 목사·시인>

'일반 칼럼 > 임의진의 시골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원도 팝콘  (0) 2018.02.08
참새와 까마귀의 마을  (0) 2018.02.01
농민가  (0) 2018.01.25
어촌 겨울풍경  (0) 2018.01.18
눈썰매  (0) 2018.01.11
통일 올림픽  (0) 2018.01.0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탈출한 이후에도 싸움이 그친 적은 한 번도 없다. 인류의 먼 조상으로 동물에 가까웠던 구 인류뿐 아니라 현생 인류도 폭력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들도 관용을 몰랐다.

인간은 왜 싸우는가. 토머스 홉스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보았다. 따라서 강제적인 수단으로 국가가 내부 평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홉스는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이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반면 장 자크 루소는 인간 자연상태가 평화롭고 조화로웠으나 점차 인구가 성장하고 사유재산, 계급분화가 나타나면서 전쟁과 각종 병폐가 출현했다고 했다. 따라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러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 둘은 시계추처럼 시대에 따라 한쪽이 설득력을 얻었다가 다시 잃기를 반복하고 있다.

최근 현존하는 수렵채집인이나 과거 서구인이 관찰한 수렵채집인들에 대한 연구, 선사시대 수렵채집인들의 생활에 대한 발견, 그리고 진화론을 바탕으로 고찰한 한 연구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인간의 자연상태가 루소가 말했던 평화로운 상태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터였다는 것이다. 아자 가트는 &lt;문명과 전쟁&gt;에서 “인간의 자연상태는 동물사회와 다를 것이 없는 투쟁이 지배했으며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인간의 노력에 따라 달렸다”고 결론지었다. 인류에게 평화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본성을 억제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도시국가 간 전쟁에 지친 이들은 평화를 찾을 방안을 모색했다. 올림픽은 안전을 희구하는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국가 엘리스의 왕 이피토스는 전쟁과 전염병까지 액운이 휩쓸자 신에게서 신탁을 받았다.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해마다 제전을 열어 우정을 두텁게 하라’는 신탁을 받아든 그는 그동안 중단되었던 경기를 다시 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주변국과 조약을 맺었다. 올림피아는 성지이며 여기에 무력으로 발을 들여놓는 자는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올림피아 휴전기간 중에 엘리스의 영토에서는 어느 누구도 몸에 무기를 지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경기가 열리기 몇 달 전부터 그리스 본토와 해외지역의 모든 도시국가에 전령이 파견되었다. 신성한 휴전기간이 선포되었고 모든 그리스 시민들은 올림피아에 초대되었다. 이 기간 동안 자유로운 여행이 보장됐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뿐만 아니라 유사한 제전들이 그리스 전역에서 열렸다. 델피의 파티아 제전, 아르골리스의 네미아 제전, 코린트의 이스트미아 제전 등이 4년 또는 2년 주기로 열렸다. 물론 제전이 열리는 시기는 휴전기간이었다.

올림피아 제전은 도시국가 간 맺은 동맹과 조약을 다른 도시국가에 공표하는 기회로 이용되기도 했다. 아테네와 아르고스 등은 올림피아 축제를 이용해 동맹조약을 기념하는 청동기둥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휴전기간에 다른 도시국가를 공격했을 경우에는 올림피아 법에 따른 처벌이 뒤따랐다. 벌금은 물론 올림피아 제전에 참여도 불허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노력의 산물인 올림피아 제전의 전통은 오랫동안 끊어졌다.

수천 년간 사람들은 타자를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고 자신을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하는 방어기제를 발달시켜왔다. 상대방이 적의가 있든 없든 두려움, 의심,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때론 그 의심은 선제공격으로 이어졌다. 안보딜레마라는 악순환의 늪으로 빠져든 것이다. 전쟁은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되고 전쟁의 공포가 전쟁을 낳는 파국의 연속이었다. 19세기 말 올림픽 부활의 논의가 있었고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올림픽은 세계인들이 함께하는 축제이며 평화의 제전이다. 하지만 그동안 두 번의 세계대전이 있었고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9일 개막한다. 남한과 북한, 미국 일본과 중국 러시아, 진보와 보수 간 셈법이 다르다. 북한의 참가를 두고 평화를 위한 한 걸음이라는 평가와 ‘위장 평화’와 ‘시간 벌기’라는 시선이 교차한다.

그리스인들이 올림피아 제전으로 평화를 찾았다고 하는 것은 신화이자 미신이다. 올림피아 제전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평화조약을 맺고 파기하고 또 맺었다. 그들은 전쟁의 와중에 올림피아 제전을 열면서 평화를 모색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평화를 향한 노력이다. 싸움 유전자를 가진 호모사피엔스에게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창 올림픽이 평화올림픽이 되길 기원한다.

<박종성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필집 &lt;랑겔한스섬의 오후&gt;에서 ‘소확행’(小確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 풀이했다. 무라카미는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 소확행이라고 했다.

자신만의 소박한 행복을 찾는 것이 소확행의 핵심이지만, 일상에는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들도 소확행만큼이나 많다. 억지스럽지만 이를 ‘소확분’(小確憤·소소하지만 확실한 분노)이라고 한다면, 나의 소확분은 잔뜩 있다. 녹색 신호등에도 멈추지 않고 우회전하는 운전자를 어이없이 바라봐야 할 때, 터무니없이 비싼 찻값을 받으면서도 셀프서비스라는 가게 주인에게 화가 난다. 뒷사람이 따라오는 데도 출입문을 그대로 놓아버리는 얌체를 만나는 것도 여지없이 소확분이다. 최근 한 페친은 페이스북에 “뚜벅이여 단결하라”라는 장난 섞인 글과 함께 인도 위 불법 주정차 차량 등을 신고할 수 있는 앱 ‘서울스마트 불편신고’를 링크했다. 아마도 그의 소확분에는 보행로를 막은 불법 주정차 차량이 올라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소소한 분노를 얘기하려니, 오래전 봤던 영화 &lt;폴링 다운&gt;이 떠올랐다. 영화는 방위산업체에서 해고당한 중년 남성의 하루를 좇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고속도로는 출근차량과 도로공사로 정체를 빚고 있고, 하필 빌(마이클 더글러스)의 차는 에어컨이 고장이 났다. 이혼한 아내와 살고 있는 딸을 만나러 가던 빌은 차를 버리고 걷기 시작한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불과 1분이 지났다는 이유로 아침 메뉴를 거절당하고, 메뉴판 사진과는 딴판인 햄버거를 받아들고서 그는 결국, 폭발한다. 그의 분노는 해마다 도로공사를 반복하는 정부, 일자리를 뺏은 다인종 사회, 대기업의 과장광고 등 사회문제들과 맞닿아 있다.

분노는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심리와는 달리 대개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식되어 절제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 할라치면 별수 없이 ‘까칠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마땅히 분노해야 할 대상에 침묵하는 순간, 타자를 향한 ‘졸렬한’ 분노가 그 자리를 메워 버린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재벌의 불법 상속보다 연예인들의 탈세에 더 분노하고, 찔끔 오른 최저임금에 엄살을 부리는 대기업이 아니라 알바에게 화를 낸다. 성폭력 사건을 쓸어 담으려는 검찰 조직이 아닌 내부고발자를 몰아세운다. 제천·밀양 화재참사는 소방관 탓이 아니다.

&lt;분노사회&gt;의 작가 정지우는 “나와 세계가 어긋날 때 생기는 부적절감이 분노의 근원”이라고 규정했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논란은 불행히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을 법한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되묻는 과정이다. 기회는 평등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못했으며, 결과는 정의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진 자의 죄는 실수이고, 못 가진 자의 실수는 죄가 되어선 안된다.

시인 김수영이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고 물었지만, 분노하지 말란 뜻은 아니었다. 일상에서 촉발되는 분노가 나보다 약해 보이는 존재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데 대한 반성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이발쟁이에게/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들고, 때론 화가 치밀어 오르는가? ‘이발쟁이’ 때문이 아니다.

<이명희 ㅣ 전국사회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내부형 교장공모제의 확대 방침이 발표된 이후로 곳곳에서 찬반 의견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동안 내부형 교장공모제가 극히 제한적으로 시행되어서인지,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막연한 주장을 펼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란에 작은 도움이 되고자 내부형 공모교장과 실제로 근무했던 경험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우리 학교는 2014년 내부형 교장공모제 학교로 지정되었다. 내부형 교장공모제는 교장자격증이 없는 평교사가 곧바로 교장이 되는 제도이다.

얼핏 생각하면 능력도 없고 경험도 없는 교사가 교장이 되어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교장공모의 절차가 그렇게 허술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먼저 교장공모제 학교로 지정되려면 교사와 학부모가 모두 높은 비율로 찬성해야 한다. 교육경력 15년이 넘으면 교장자격증 소지자와 미소지자 모두 후보자가 될 수 있고, 선정 과정에서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교육철학과 가치관, 학교 운영 계획 등을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후보자별 점수가 교육청에 보고되면 최종 검증을 거쳐 비로소 교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교사와 학부모가 학교 운영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우리 학교에 적합한 교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교장이 학교를 알아서 잘 운영하기를 바라면서 따르기만 했다면, 교장공모제에서는 학교구성원이 심리적으로 소외되지 않기 때문에 학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인의식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반면에 기존 승진제도에서는 힘든 행정업무에 대한 보상이나 단순한 변별력을 위한 가산점 등 교육의 본질과 상관없는 부분에서 많은 점수를 따야 교장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교장이 된 후에는 모르는 학교에 무작위로 발령받게 되고, 학교구성원들은 생각과 능력을 전혀 알 수 없는 교장과 덜컥 만나게 된다. 그에 비하면, 교장공모제는 학교구성원들이 교장의 능력을 훨씬 철저하게 직접 검증할 수 있는 제도이다.

또한 교장공모제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평교사가 교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서는 이전까지 함께 근무하던 동료 교사가 갑자기 교장이 되는 일을 겪었다. 물론 처음엔 약간의 혼란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학교구성원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학교 운영의 동반자로 존중하는 민주적인 교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학교의 책임자로서 교장이 가지는 법적 권한은 당연히 보장받아야 한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그것을 넘어서 학교구성원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독선적인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불필요한 권위의식을 걷어내면, 교장의 진정한 권위는 교장자격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과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부형 공모교장과 함께한 지난 4년 동안 우리 학교의 문화는 민주성과 공동체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갔다. 물론 교장공모제에도 보완할 점이 있을 것이다. 공모교장은 모두 훌륭하고 기존의 교장은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여러 학교에 교장공모제가 시행되면, 학교 현장에 민주주의가 확대되어 교육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환경이 정착될 것으로 확신한다.

<천지용 남양주 월문초등학교 교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인공지능 ‘사관’은 보고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탁자 주변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의 얼굴 표정을 분석해 보았다. 평균적인 감정 상태는 안도 60퍼센트, 기쁨 56퍼센트, 슬픔 5퍼센트, 무관심 20퍼센트였다. 네 사람은 사관이 정리한 결과를 두고 여섯 시간에 걸쳐 토의한 다음 10퍼센트가량 더 안도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넷 중 세 사람이 회의실을 나갔다. 인공지능 모더레이터인 이수현만이 회의실에 남았다. 그는 ‘사관’의 눈 역할을 하고 있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사관은 이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뉴스와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고, 변별성 있는 항목으로 정리해 빅데이터에서 스몰 뷰를 생성하는 게 사관의 임무였다. 하지만 사관은 사람들이 스몰 뷰를 받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직 추론할 수 없었다. 인공지능 모더레이터가 바로 인공지능 재학습을 책임지는 직책이었다. 이수현이 사관에게 말했다. “이제 질문해도 돼.” 사관은 질문을 문장으로 정리한 다음 음성 파일로 만들어 내보냈다. “결과 보고를 듣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당연히 기뻤지. 네가 오늘 보고한 건 지난 이백년 동안 인류에게 중요했던 여러 수치를 종합하고 정리한 결과야. 기후 변화, 대기 오염, 자원 활용 분포부터 시작해서 인재 발생률, 범죄율뿐 아니라 네트워크상에서 생산되고 쓰이는 언어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인류 이백년사를 데이터로 정리한 거야.” “단순히 데이터화했다는 걸로 기쁠 리는 없잖습니까? 기뻤던 이유는 뭔가요?”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야.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학습했지? 욕망은 장기적인 안목과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고 했잖아? 그 결과 어리석은 행동도 불사하는 게 사람이야. 폐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통계치를 발표해도 담배를 끊지 않는 게 사람이고, 도박에서 큰 돈을 딸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수없이 알려줘도 재산을 탕진하는 게 사람이지.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인류 전체가 눈을 가리고 절벽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될까? 비록 말을 하진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엔 그런 공포가 늘 남아 있었어.” “공포와 희망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수현이 사관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지금까지 가르친 보람이 있네. 그와 동시에 네가 아직 데이터와 세상을 제대로 연결짓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너와 내가 다루는 데이터는 어느 한 순간만 모아서는 의미가 없어. 최소한 백년 단위로 데이터를 모아서 비교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인간은 생물학적인 한계 때문에 학습하고 변화하기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해. 수억명이 변화하려면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하고. 물론 변화하지 못할 수도 있지.” “이제 희망을 품은 이유를 말씀해주시죠.” “일곱 가지 수치가 안정적으로 변했어.

오존층 회복률, 기후 안정도, 범죄 감소율, 대기 오염 감소율, 증오 어휘 감소율, 복지 분배율, 자살 감소율. 물론 그 밖에도 여러 수치들이 있지만, 이 결과를 발표하면 인간이 눈가리개를 풀고 제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모두 깨닫게 될 거야.”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지금 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 사실을 깨닫기 전부터 노력을 해왔다는 얘기잖습니까?” 이수현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세상은 욕망과 손익이 뒤엉킨 복잡계라 쉽게 변하지 않거든. 그런데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망이 그렇게 복잡한 시스템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꿨잖아. 그게 바로 희망을 품은 이유야.” 사관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수현 모더레이터는 인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면 늘 복잡계라는 용어를 끄집어냈다. 욕망, 소망, 희망이란 단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수현의 표정엔 기쁨, 안도, 흥분이라는 감정이 각각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관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이수현이 그런 감정을 만끽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그와 나눈 대화를 학습 데이터베이스의 ‘인간’ 항목에 추가해두었다.

******************************************************************************************

남극 상공의 오존층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다. 인간이 만들어냈던 염화불화탄소가 이 구멍을 만드는 주요 촉매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뒤, 각국은 염화불화탄소의 생성과 사용을 규제한다는 몬트리올 의정서를 체결했다. 몬트리올 의정서는 1989년에 발효되었다.

나사 고다드 우주비행 센터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염소 화합물 농도는 매년 0.8퍼센트씩 감소했고, 현재는 2005년도 측정치보다 20퍼센트가 감소한 상태라고 한다. 이 수치는 인류의 노력으로 오존층이 회복되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인 셈이다. 수많은 디스토피아 소설과 재난 소설이 악화일로를 걷는 인류의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의 우리는 세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끊임없는 관심과 다수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비단 환경 문제만이 아니다. 평등, 자유, 정의와 같은 무형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더 나은 미래는 유토피아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몸과 마음이 두루 잘 통하는 연인의 정사보다 맛있는 음식 한 입이 낫다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다. 마크 쿨란스키의 작업을 참고하니 이런 표현과 상상력은 이미 기원전 5세기 이래 이어진 모양이다. 네 생각에는 어떠냐, 주위에 물으면 둘 중 하나가 망설임 없이 ‘맞다!’를 외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조선 문인 허균(許筠·1569~1618)이 남긴 문자먹방 &lt;도문대작(屠門大嚼)&gt; 서문의 첫 문장이 이렇다. “식욕과 색욕은 본성이다(食色性也).”

졸리면 자면 그만이다. 그런데 식(食)과 성(性)은 ‘그만’에 이르기까지가 복잡하다. 과정은 구경거리(스펙터클)가 될 만한 자질로 충만하다. 남에게 민망한 구석 들키지 않는 한 내 취향으로 소품(팬시)을 지을 만한 요소로 가득하다. 이 가운데 ‘눈과 귀로만 먹는 음식’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열려 있다. 계급도 계층도 없다. 포르노는 몰래 보지만 음식 포르노는 벌건 대낮에 지하철을 타고 갈 길 가면서도 볼 수 있다. 온 가족이 화면 앞에 앉아, 그 연출에 대한 비평과 완성도에 관한 품평을 나누면서도 볼 수도 있다. 그 앞에서 침을 흘리기란 부끄러운 노릇이 아니다. 가장 만만한 오락이다. 그러니 헌 매체, 새 미디어 할 것 없이 여기에 환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온갖 매체에서, SNS에서 먹는 이야기가 폭발한다. 푸드 포르노에 잘만 기대면 명사, 준연예인 행세도 가능하다. 사진과 영상을 곁들이고 꾸준하기만 하면, 누구든 먹는 이야기 하나로 로마의 황제나 허균 같은 문인쯤은 쉬이 압도할 만한다. 그렇다고 신문마저 여기 압도된다면 무척 섭섭할 듯하다. 아니 이미 압도되었나, 아닌 게 아니라 불안이 솟는 요즘이다.

언론마다 여행과 주말과 토요일을 앞세운 특별판, 또 지역 골목길을 고리로 한 특집을 내면서 음식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때 차지한 면이 크면 연예인화한 요리사와 사진을 찍고, 굳이 비싸서 이국적인(‘비싸고’가 아니다) 맛집을 나열한다. 차지한 면이 작으면 작은 대로 기자가 힙스터로 분해 숨어 있는 ‘힙’한 곳을 시시콜콜 소개한다.

거기 자리한 정보도 이 세상에 필요하다. 신문이 기획할 만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될 듯한 징후가 보이기에 불안하다. 푸드 포르노가 그저 반짝거리고 무해한 귀여움 쪽으로만 움직이지도 않는다. 막 인천공항으로 들어온 북아프리카 사람 입에 겉절이를 욱여넣으며 ‘두유노김치’ 장면을 연출하는 한국적인 음식 폭력이 보다 증폭되곤 한다. 비싼 음식이 곧 좋은 음식으로 포장되는 동안 일상 식생활의 감각은 자꾸 지워진다. 한 끼를 먹기 위한 보통 사람의 분투를 허름하고 초라하다고 여기는 심성이 조장된다. 어쩌면 이야말로 푸드 포르노의 벌거벗은 속성이자 방향일 테다. 그러니 더욱, 신문-기자-칼럼니스트는 음식을 감각하고 음식 이야기를 쓸 때, 그저 푸드 포르노를 중개-중계하는 데 그치지 않겠다는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할 줄로 안다. 음식 이야기만 해서는 음식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할 줄로 안다.

푸드 포르노와 일상의 음식 사이에서 엇갈리는 보통 사람들의 감각은 복잡하다. 벌거벗은 먹방 앞에서 군침도 흘리지만, 그렇다고 내가 신뢰할 만한 음식 담론을 아예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신문은, 기자는, 진짜 칼럼니스트는 푸드 포르노 너머에서 보다 정직하고 분별 있는 말과 상상력을 짓고 있으리란 기대를 품고 전통적인 신문의 기사 링크에 커서를 가져다 댄다. 그러다 누구나 하는 푸드 포르노가 오른 지면을 확인한 순간, 실망해 기어코 댓글을 단다. “입소문 홍보 결국 사기,” “애드버토리얼, 바이럴이 뭐냐면 결국 댓글알바.”

먹방, 먹는 이야기가 웃자라면서 나타난 직업군이 있다. 지난 시대의 파워 블로거, 요즘의 자칭 푸드 칼럼니스트 말이다. 이들은 푸드 포르노 속에 애드버토리얼, 바이럴 등을 심으며 담론의 장을 외로 꼬아버린 점까지 있다. 그러므로 더욱 엄중하다. 푸드 포르노 흉내뿐이었다가는 신문이 찌라시가 되는 수 있고, 기자가 기레기가 되는 수가 있다. 오늘 음식 꼭지를 기획 중인 신문과 기자에게 당부한다. 그래도 신문을 믿는 독자가 있다. 신문이라서 신뢰를 보내는 독자가 있다.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말, 찌라시며 기레기 같은 말을, 더구나 음식 꼭지 앞에서는 쓰지 않게 해주십사!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