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12일 당정협의를 열어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대책’을 내놨다. 기술탈취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 피해액의 최대 10배까지 배상받게 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거래 때 비밀유지협약서 체결을 의무화하는 게 핵심이다. 또 중소기업이 기술탈취 소송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입증책임’을 가해혐의 기업에도 묻기로 했다. 대기업의 기술탈취가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피해 중소기업은 보복이 두려워 고발을 꺼리는 현실을 감안하면 늦었지만 바람직한 조치다.

이번 대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모든 기술보호 관련 법률에 도입하고, 배상액도 손해액의 최대 10배로 강화했다는 점이다. 손해배상에 관한 현행 규정은 하도급법에선 3배 이내, 상생협력법·특허법·부정경쟁방지법은 손해액을 배상하도록 하고 있지만 산업기술보호법에는 손해배상 규정조차 없다. 기업 간 기술자료 요구 행위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거래 때 비밀유지협약서를 체결하도록 한 것은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소송이 제기됐을 때 가해 혐의를 받는 대기업에 기술탈취 사실이 없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을 지운 것도 평가할 만하다. 지금까지는 기술탈취 피해 기업만 입증책임을 떠맡는 바람에 소송이 장기화할 경우 비용이 늘어나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탈취는 어느새 흔한 일이 되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동안 중소기업이 기술을 탈취당한 사례는 644건에 달하고, 건당 피해액수만도 17억원에 이른다. 그럼에도 공정거래위원회나 경찰에 신고한 중소기업은 3.8%에 그쳤다. 기술탈취 사실을 외부에 알리면 거래를 끊겠다는 대기업의 갑질에 시달릴 뿐 아니라 소송을 제기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비용과 시간을 들여 개발한 기술을 정당한 대가 없이 빼앗는 것은 경제생태계를 무너뜨리는 반사회적인 범죄행위다. 이번 대책이 대기업의 횡포를 차단할 계기가 될지는 정부의 신속하고도 엄정한 법 집행과 후속 조치에 달려 있다. 정부는 중소기업의 자생력을 잠식하는 대기업의 기술탈취 행위를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대기업도 해외 기술은 비싼 로열티를 주고 사오면서 국내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은 빼앗는 이중적 행태를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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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평창 올림픽 개회식 참석을 계기로 막혀있던 남북 간 대화의 물꼬는 텄다. 이제 평창 이후 대화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북·미가 대화 테이블에 앉도록 할 대책이 절실하다. 그 첫 관문은 올림픽 이후로 미뤄놓은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한·미 양국은 이 문제에 대해 추가로 합의하지 못하면 오는 4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경우 모처럼 조성된 대화 분위기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양국의 결단이 시급하다.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12일 정례브리핑에서 “한·미 연합훈련 일정은 한·미 간 계속 협의하고 있다”며 “구체적 일정과 나머지 사안들이 결정되면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국이 이 문제를 논의 중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미국이 훈련을 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은 한국 내 자국 시민과 병력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북관계나 다른 사안과 연계해 훈련 여부를 결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훈련은 미국의 입장과 달리 북한에는 매우 위협적이다. 북한은 이 훈련을 한·미 양국의 북침 연습으로 간주한다. 한·미가 1990년대 초 북핵 위기 때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한 것도 이를 감안한 조치였다. 결국 훈련 중단은 제네바 핵 합의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귀국 길 인터뷰에서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 대해 최대 압박과 외교적 해법을 동시에 구사하겠다는 것으로, 북한이 양보한 뒤에야 대화에 나서겠다는 이전 방침과 다르다. 북한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 미국이 지금 훈련을 재연기하거나 중단하자는 한국의 제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핵폐기에 관한 북한 입장에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 진전을 위해서는 북한이 도발을 중단하고, 핵에 관해서도 발전된 태도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미국도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북한이 열병식을 강행했던 것과 같은 논리로 이미 계획된 훈련이니 예정대로 해야 한다고 우길 때가 아니다. 훈련은 북한이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실시해도 늦지 않다. 남북정상회담과 그에 앞서 군사 및 당국자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화하면서 군사훈련을 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 긴밀히 협의해 훈련을 유보하는 조치를 이끌어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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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공식 초청하면서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2000년, 2007년에 이어 3차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기대는 크다. 전쟁위기설까지 나돌았던 한 달 전 분위기를 생각하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긴장 해소의 모멘텀이 된 것은 크게 반길 일이다. 이제 정부는 올림픽을 계기로 맞은 해빙의 기회를 잘 살려나갈 무거운 책임을 안게 됐다. 북핵 해법의 운전대를 잡은 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여건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야 한다. 특히 북·미대화로 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산적한 난제들을 풀어나가려면 남남갈등부터 해소하는 게 급선무다. 우리가 한목소리로 힘을 실어도 될동말동하다. 보수야당과 일부 보수단체는 모처럼 조성된 한반도 평화 분위기에 재를 뿌리는 언행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평창 올림픽을 ‘평양올림픽’이라고 부르거나 북한 인공기와 김정은 위원장 사진을 불태우는 건 올림픽의 성공은 물론 한반도 정세 안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한 응원단이 사용한 남성 가면에 대해 “김일성 가면 아니냐”고 트집을 잡는 것은 졸렬한 태도다. 일각에선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를 놓고 우려를 제기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입장권 판매가 연일 목표치의 99%를 웃도는 등 관중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강릉행 KTX는 매진되는 등 초반부터 흥행을 질주하고 있다고 한다. 시민들의 수준이 보수 일각의 케케묵은 색깔공세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야당과 보수층에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며 대북 협상에 나서는 열린 자세가 요구된다. 보수 일각에선 북한이 올림픽 참가 카드로 국제적인 대북 제재에 구멍을 내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위한 시간을 벌려는 것 아니냐는 불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에게 차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남갈등을 최소화하고 여러 세력과 공조하지 않으면 북한의 태도 변화를 효과적으로 끌어낼 수 없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시민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국론 분열만 부를 뿐이다. 문 대통령은 여야 대표를 초청해 평창 이후를 설명하고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검토해볼 만하다.

한반도 평화는 최우선 과제이며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정부의 노력이 중요하지만, 정치권과 시민의 협력도 중요하다. 정치적·이념적 이견은 잠시 접어두고 한목소리로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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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19일, 이명박 후보가 소위 ‘7·4·7’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후보의 전과가 한둘이 아니었고,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혐의도 많았지만, 주권자는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몰염치한 구호에 기꺼이 표를 던졌다. 다음 대선을 얼마 앞두고는 국가정보원을 동원한 선거개입 사건까지 터졌지만 2012년 12월19일, 독재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수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유지하자, 박근혜 정부와 여당은 거칠 것 없이 국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2014년 2월26일, 정부는 주택임대차시장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였다. 국가가 더는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할 여력이 없으니 민간의 자본을 활용하겠다며 공공임대리츠라는 해괴한 정책을 내놓았다. 국가가 공공임대주택을 적극적으로 공급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고, 공공임대주택을 자본의 이익창출에 활용하겠다는 욕심의 실현이었다. 그 이익은 당연히 저소득층인 입주자가 부담하는 임대료와 정부의 공공재원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11월2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주택을 가진 사람들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행정부와 입법부를 다그쳤다. 그로부터 한 달 만인 12월29일, 결국 ‘부동산 3법’이 국회에서 처리되었다.

주택법이 개정되어 민간택지에서 공급되는 주택에 대한 분양가상한제가 사실상 폐지되었다.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이 개정되어 주택재건축사업 조합원이 다수의 주택을 가지고 있으면 주택을 세 채까지 분양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재건축초과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재건축사업 시행 시 초과이익에 대한 환수를 3년간 유예하였다.

2015년 8월28일, 임대주택법이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으로 개정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주택정책 망가트리기가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 시기에 주거기본법(2015년 6월22일 제정), 주택법(2015년 6월22일부터 8월28일 일부·타법 개정), 공공주택특별법(2015년 8월28일 일부개정), 택지개발촉진법(2015년 6월22일 타법개정), 공동주택관리법(2015년 8월11일 제정) 등이 동시다발로 개정되거나 제정되었는데, 주요 목적은 ‘기업형임대주택’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업형’이라는 수사는 경제발전에 민감한 국민에게 정책의 비합리성을 감추기 위한 술수였다. 기업형임대 정책은 민간자본이 돈을 벌기 위해 건설하는 임대주택에 거의 아무런 조건 없이 공공지원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공무원과 사업자가 마음만 맞으면 특정 지역을 촉진지구로 묶어 토지를 강제로 수용할 수 있는 근거까지 마련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당시 여당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공공성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었다. 사회 기득권의 지지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세력이기 때문에 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펼치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무서운 점은 박근혜 정부의 주택정책이 야당의 별다른 비판과 견제 없이 국회를 거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당시 야당은 주거정책의 공공성이 훼손되는 심각한 정책에 동의하거나,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기업형임대의 정책기조는 임대료를 주변시세보다 조금 낮게 제한하는 수준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임대소득에 대한 과세나 다주택자에 대한 주택보유세와 같은 정책의 도입에는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

기업형임대를 도입했던 국토부의 실무자들이 이 정부에서도 승진을 거듭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정책수립의 책임자였던 사람은 영전하여 정부의 주택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다고도 한다. 그가 최근에 어떤 회의석상에서 기업형임대정책을 맹렬하게 비판해온 연구자를 만났는데, 살짝 미소 띤 얼굴로 한 말이 “살살 합시다”였다고 한다.

이런 소식이 그냥 유언비어이거나 ‘가짜뉴스’이면 좋겠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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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올해 들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최저점 기준 60% 미만으로 떨어진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지만, 대체로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긍정평가는 약 10%포인트 줄었고 부정평가는 약 10%포인트 늘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아직도 역대 정부에 비하면 높은 편이지만, 워낙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온 까닭에 그 배경에 대한 관심이 높다.

언론의 진단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비트코인 등 가상통화 규제를 둘러싼 정책 혼선으로 인해 2030세대가 지지를 철회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불거진 북한 관련 이슈들이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데이터를 보면 가상통화와 관련한 해석은 어느 정도 과장되었거나 착시현상이라 보인다. 가장 큰 반발을 불러왔던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강경 대응 발표가 1월11일이었는데, 그 직후인 1월 셋째주 조사에서 비교적 큰 폭으로 지지율이 빠지기는 했지만(갤럽 기준 6%포인트. 이하 같은 기관 자료) 2030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많이 빠진 것은 아니었고,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세대에서 골고루 지지율이 하락했다. 2030세대는 이 기간에 6~7%포인트 하락했다가 2월 들어서는 약간의 보합세를 보이고 있다.

이 기간에 오히려 주목할 것은 13%포인트 하락 후(58%→45%) 보합세도 거의 없는 대구·경북, 26%포인트 하락 후(67%→41%) 미세하게나마 추가 하락하고 있는 바른정당 지지층, 10%포인트 하락 후(52%→42%) 추가 하락을 이어가고 있는 보수층 등이다.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해 부정평가를 내린 응답자들이 제시한 이유를 보아도 가상통화 규제 때문이라는 응답은 고작 1%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다른 해석은 역시 북한 관련 이슈이다. 가장 큰 논란이었던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이 결정된 것이 1월17일, 북한 측 사전 점검단이 방남한 것이 1월21일, 마식령 스키장 남북 공동훈련이 1월31일이었다. 따라서 북한 관련 이슈는 1월 둘째 주에서 넷째 주 사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그 후 2월 첫 주 정도까지 여파가 미쳤을 것이다.

1월 셋째 주에서 넷째 주로 가면서 전체 지지율은 67%에서 64%로 3%포인트 하락했는데, 같은 기간 60대 이상 지지율은 6%포인트(50%→44%), 대전·세종·충청 지지율은 10%포인트(66%→56%), 자유한국당 지지층 9%포인트(25%→16%), 경제적 중하층 15%포인트(76%→61%), 바른정당 지지층 전주 21%포인트에 이어 5%포인트 추가 하락(41%→36%), 보수층 전주 10%포인트에 이어 5%포인트 추가 하락(42%→37%), 중도층은 7%포인트(75%→68%) 하락했다.

실제로 1월 넷째 주에 국정수행 부정평가를 한 응답자들이 제시한 이유를 보면 단일팀 등 북한 관련 이유가 압도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심상치 않은 지지율 변동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북한이다.

70%대의 지지율은 이념적으로는 중도보수, 지지정당별로는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다른 야당 지지층, 지역적으로는 대구·경북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고른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지지율이 크게 빠진 집단을 보면 거의 정확하게 이 세 집단에 해당한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촛불이 만든 정부임을 강조해왔고, 촛불민심을 떠안고 간다고 설명해왔다. 그런데 70%대 지지율을 가능하게 한 촛불민심에는 이 세 집단이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세 집단이 떠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촛불광장의 ‘계약’이 깨졌다고 느끼는 것 같다.

데이터를 보면 그렇게 느끼는 공통된 이유는 ‘북한’, 다른 말로 ‘안보’이다. 그들은 ‘안보는 보수’라는 암묵적 계약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계약이 있었는지는 애매하다.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집에는 한반도 평화가 가장 중요한 기조로 되어 있지만 동시에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도 약속하고 있고, 대선 기간 중 문 대통령은 안보와 관련해서 보수층을 안심시키는 발언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니 그들이 암묵적 계약이 있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존재하는 것이다.

평창 이후 이 질문은 더 첨예해질 가능성이 높다. 올림픽이라는 특수 상황이 끝나고 나면 미국과 국제사회의 강경 제재 기조는 더욱 첨예해질 것이고, 이미 방북 초청장을 보낸 북한은 최대한 남한을 전면에 내세우려 할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 될 텐데, 선택이 늦어질수록 중도보수는 이탈할 것이다. 적어도 중도보수를 포용하지 않고는 국정동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안보와 성장은 보수의 어젠다이다. 두 영역에서 무엇을 합의할 수 있고 무엇은 양보할 수 없는지, 무엇은 가능하고 무엇은 불가능한지, 합의를 한다면 누구와 어떻게 합의할지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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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하키에서 가장 불쌍한 포지션이라면 역시 ‘골리(골키퍼)’를 꼽을 수 있다.

두께 2.54cm, 지름 7.62cm의 원형압축고무를 얼려 만든 무게 150~170g의 퍽이 시속 160~180㎞의 총알속도로 날아오는데, 이것을 온몸으로 막아야 한다.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아이스하키 골리는 맨 얼굴로 경기에 나섰다. 1927년 여자선수인 엘리자베스 타일러(퀸즈대)가 치아보호를 위해, 1930년 클린트 베네딕트가 부러진 코를 보호하려고 각각 마스크를 썼다. 그러나 부상에서 회복된 후에는 곧바로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시야를 가리는 그 무엇을 얼굴에 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와 당당히 맞서야 할 선수가 얼굴을 가리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이거야말로 불성실한 겁쟁이 아닌가.

8일 인천 선학국제빙상장에서 열린 남자아이스하키 국가대표 평가전 한국과 슬로베니아의 경기. 1피리어드 한국 대표팀 골리 맷 달튼(왼쪽 사진)의 마스크에 이순신 장군 그림이 지워져 있다. 오른쪽 사진은 3일 열린 카자흐스탄과의 평가전에서 이순신 장군 그림이 그려진 마스크를 착용한 맷 달튼 모습. _사진출처 : 연합뉴스

 

그러던 1959년 11월1일 사건이 일어난다. NHL(북미하키리그) 몬트리올 캐나디언의 골리인 자크 플랑트(1929~1986)가 뉴욕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상대방이 날린 퍽을 얼굴에 맞았다. 겨우 상처를 꿰맨 플랑트는 “시야를 가린다”고 반대하는 코치에게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경기에 나서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당시 NHL팀에는 백업 골리가 없었으므로 플랑트가 출전을 거부하면 팀은 몰수패 할 수밖에 없었다. 코치는 할 수 없이 플랑트의 마스크 착용을 허용했다. 이후 골리 마스크를 쓴 플랑트의 팀은 연전연승했다. 당시 플랑트가 마스크를 벗고 출전한 경기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경기에서 패했다. 이후 플랑트의 얼굴은 늘 골리마스크로 가려져 있었다. 골리마스크는 NHL의 시대조류가 되었다. 물론 앤디 브라운 같은 골리는 ‘맨얼굴이야말로 용감함의 상징’이라며 1977년 은퇴할 때까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은 무시무시한 형태의 마스크(헬멧)로 전의를 불태웠다. 보호장구를 착용하자 골리들은 얼굴에 퍽을 맞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낮은 자세로 수비할 수 있으니 더 부담없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비겁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상대방과의 기싸움에서 이기고, 혹은 패션피플로서의 개성을 표출하려는 매개의 역할도 했다.

한국대표팀의 귀화골리인 맷 달튼(32·캐나다 출신)은 특별히 이순신 장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순신 장군처럼 대한민국의 수호신이 되겠다면서 마스크에 장군의 동상 그림을 새겨달라고 특별히 요청했다. 귀화선수지만 ‘대한민국 대표로 뛴다’는 각오를 표하고, 각종 대회마다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달튼이 아니었던가.

그런 달튼이 최근 낙담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마스크에 새긴 이순신 장군 그림을 ‘정치적’이라며 불허했기 때문이다. IOC는 오스트리아의 로빈후드, 체코의 개국공신, 이스라엘의 삼손, 그리고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그림도 불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식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마스크(헬멧)를 봐야 ‘IOC의 저울’이 정말 공평했는지를 알 수 있다. 2012년 욱일승천기의 이미지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일본 체조팀을 징계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물론 어떤 경우든 공연히 책잡힐 필요는 없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에서 동메달을 따고 독도세리머니를 했다가 곤욕을 치른 박종우가 좋은 예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명언을 가슴에 담고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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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이라고 하려다가 착잡, 이라고 말을 바꾼다. 착잡하다. 세상과 거리를 두려고, 하자니 이 또한 너무 거창하다. 기분전환이나 하려고 심학산에 올랐다고 해두자. 나 하나 운다고 세상이 달라지랴. 일산평야에 돌출한 심학산. 드넓은 평지에 홀로 우뚝하기에 그리 높지 않아도 사방의 경관이 툭 트였다. 서해로 귀순하는 한강의 마지막 용틀임이 한눈에 보인다. 강원도 심산유곡에서 출발한 가느다란 물줄기는 많은 동네-대부분 고시(考試) 따위는 거들떠도 안 보는 상식적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터전-를 굽이굽이 거치면서 두툼한 강이 되었다. 직선으로 흐를 줄을 모르는 한강은 한번 더 용틀임이라도 하듯 크게 구부러진다. 그렇게 일산을 둥글게 휘돌아 감싸니 하회(河回) 마을이 달리 없겠다. 강은 결국 바다를 찾아간다고 했던가.

 

춥다. 결빙하였던 한강의 얼음이 둥둥 떠내려와 서해와 몸 섞기 전에 대기하고 있는 게 멀리 보인다. 저건 아마도 서울이 배출한 각종 근심과 걱정덩어리들인 듯, 서초동 출신의 쓰레기도 한몫하고 있는 듯. 이른바 법꾸라지 한 마리가 일으킨 꾸중물이 잠잠해지는가 했는데 법귀족이라 칭할 만한 자들이 활개치는 형국이다. 한강 하구의 얼음들이 유난히 탁하고 불결하게 느껴졌다. 귀족의 정의는 태어나자마자 은퇴한 사람이라던가.

세 글자의 단어를 두 개 내뱉은 뒤 내려가는 길. 며칠 전 ‘한겨레 그림판’에서 본, 가슴이 뻥뻥 뚫린 채 걸어가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심학산 둘레길의 배밭삼거리에 서 있는 층층나무가 오늘따라 걸려들었다. 가지가 옆으로 층층이 뻗는 이 나무는 고약한 습성이 있다. 조금이라도 공간이 생기면 가지를 옆으로 벌려 햇빛을 독차지하려고 덤빈다. 같은 종(種)들끼리도 함께 살지 못하고 드문드문 떨어져 산다. 숲속의 폭군으로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나무이다.

봄이 되면 가늘고 여린 꽃들이 또 찾아오겠지만 아직은 쓸쓸한 심학산. 찬기운이 승한 가운데 길섶에 희끗희끗한 눈들이 쌓여 있다.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김수영) 이것도 분풀이랍시고 애꿎은 층층나무를 몇 대 쥐어박아 보지만 이 더럽고 허황한 기분을 어이할꼬. 층층나무, 층층나무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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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L 전 장관님, 안녕하십니까. 아마 안녕할 수도, 안녕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2010년 안태근 전 검사가 장례식장에서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하고, 이를 법무부에서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건’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조사를 벌이고 있으니까요. 조사단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L 전 장관님도 조사 대상이라고 밝혔습니다. 조사단에 출석하는 일이 번거롭고 성가시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들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8년 전 당신을 수행하던 안태근 전 검사가 후배 검사를 성추행하던 그 시간과 장소에서 L 전 장관님은 무엇을 보고 들으셨는지요. “내가 이놈을 수행하는 건지 이놈이 나를 수행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신 발언은 무슨 뜻이었는지요. 아마 조사단에서 답변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안녕할 수도 있습니다. 성폭력 사건에서 지금까지 안녕하지 못했던 쪽은 주로 피해자였으며, 안녕했던 쪽은 가해자였으니까요. 하물며 일개 ‘목격자’에 불과한 당신의 안녕 여부에 이 사건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겠군요.

목격자에 불과한 당신을 수신인으로 하는 이 글이 불쾌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때로 아무런 일도 안 하는 것이 가장 큰 잘못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당신은 법무부 장관으로서, 검찰 선배로서 후배 검사가 강제추행을 당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성추행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되는 동안 법무부를 총괄하는 장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눈감고 귀 막은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안 전 검사가 성추행하는 장면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멸감과 수치심, 혼란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서 검사의 모습과 그가 속으로 내지르던 비명이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검찰 조직 내의 만연한 성폭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요. 그저 술자리에서 벌어질 수 있는 ‘흔한 풍경’ 중 하나로 특별할 것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8년 전 그 자리에서 당신이 한마디만 했더라면, 성추행을 제지했다면, 백번 양보해 성추행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그 이후 문제가 됐을 때 가해자를 확실히 문책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침묵은 서 검사에게 성추행으로 인한 고통에 더해 인사 불이익이라는 ‘2차 가해’를 했습니다. 나아가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줬습니다. 법무행정을 담당하는 부처의 수장이 함께한 자리에서 버젓이 성추행이 이뤄졌다는 것은 우리 사회와 법제도가 얼마나 성폭력에 무감각한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죠. 당신은 어쩌면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지워오는 데 가장 앞장서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당신만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을 장관으로 임명한 이명박 전 대통령도 여성 비하적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습니다. “마사지걸을 고를 때 얼굴이 덜 예쁜 여자를 골라야 서비스가 좋다”는 이른바 ‘마사지걸 발언’ 등으로 여성단체가 주는 ‘꿰매고 싶은 입’ 상을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대통령에 그 장관’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문화계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학계의 대표 시인, 영화계의 대표 감독이 성추행과 폭력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러니 이 글의 수신인은 당신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수많은 남성, 성폭력을 방조하고 묵인한 사회 구조이기도 합니다.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미국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파괴되고 무너진 것은 오히려 피해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이번만은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진실’을 외쳐온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거센 물살이 되어 조금씩 둑을 무너뜨리기를 바랍니다. ‘진실’을 말하기를 멈춘 적 없는 여성들은 계속 외칠 것입니다. 정말 세상이 터져버릴 때까지.

<토요판팀 | 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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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6일이 설날입니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섣달이고 달의 마지막 날이 그믐이니 15일은 섣달그믐입니다. 지금이야 양력으로 살아서 의미 없지만, 음력으로 살던 사람들은 섣달그믐밤이 되면 참 싱숭생숭했을 겁니다. 한 해가 또 가거든요.

만혼이 흔한 요즘에야 실감이 안 나겠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여자 나이 서른 되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고 20대 후반이면 몰아쳐 결혼하느라 그 나이 대끼리는 그 무렵 무척 분주했습니다.

더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혼기가 꽉 찼다’거나 ‘과년한…’이란 말들을 흔히 썼으니까요.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옛 여성의 혼인 적령기는 아마 스무 살 안팎이었을 겁니다. 혼기 지난 여성이 혼처가 나오지 않거나 집안이 혼사를 치를 여력이 없다면 애써 참아도 무진 애가 탔겠지요. 남들 다 할 때 하는 걸 못해서 어쩐지 뒤처지고 못난 것 같은 초조함과 자괴감으로 말입니다.

섣달그믐 저녁, 개밥 주러 나온 나이 찬 처녀는 개밥그릇에 잔반 퍼주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나이나 먹는 심란함에 울컥하겠지요. “그래 나 한 살 더 먹는다. 너도 밥 처먹어라!” 이렇게 대충 마구 콱콱 퍼주던 모습에서 만들어진 속담이 ‘섣달그믐날 개밥 퍼주듯’입니다. 늘 그렇듯 격렬한 행동은 격심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아주 오래된 노래들이 있습니다.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히스테리가 이만저만~’ ‘개구리 노총각이 살았는데, 아하! 사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 가~’ 요새 노총각, 노처녀라는 말은 잘 쓰지 않습니다. 무례한 표현이기도 하고 예전 기준으로 치면 지금 미혼자들 상당수가 거기에 해당되니까요.

오랜만의 인사치레마냥 무심히 던지던 ‘왜’ ‘아직’이란 말. 이번 설, 아랫사람들이 정말 듣고 싶던 말은 시쳇말 같은 빈 관심이 아니라 어쩌면, 윗사람다운 말없이 든든한 나잇값, 그 모습 아닐까요?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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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4등급을 받은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예외적인 경우겠으나 절대평가인 영어에서 4등급을 받은 학생이 서울대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국민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한국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노력에 상응한 결과라는 가치관으로 치열한 한국 입시를 수용한다. 이런 점에서 세계화 시대 필수 조건인 영어구사력이 입시 기여도에서 배제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육부 장관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오히려 영어를 못해도 서울대를 갈 수 있으니 건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럼에도 ‘영어 4등급도 서울대 가능’이라는 독특한 사례는 몇 가지 이유로 현행 입시 제도를 더욱 불신하는 분위기를 확산시킬 것이다.

첫째, 절대평가 대상으로 영어의 적절성 문제이다. 지난 세기말 불어닥친 세계화는 이미 일상용어가 되었다. 특히 과거 수동적 교류에서 ‘한류’의 활성화로 세계화를 주도하는 국가로 나아가는 지금 영어 절대평가는 시행 효과에서 회의적 반응을 얻을 수밖에 없다. 충분한 영어실력 없이 대학에 입학한다면 원서강독이나 영어강의 수강, 영어토론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한국 고교생의 입시 위주 학습을 전제하면 양질의 수업으로 절대평가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는 어렵다. 이미 고교생 다수가 내신 성적 외에는 영어를 신경 쓰지 않는다.

가뜩이나 제2외국어 역시 소외와 파행을 통해 ‘아랍어’로 통일되는 기현상을 빚는 현실에서 영어마저 탐구 과목 하나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면 인재육성의 사회적 취지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을 것이다.

둘째, 계층 간 영어 실력 격차라는 불공정성의 문제이다. 대학 입시에서 영어가 소외되면 영어구사력 차이는 개인의 환경이라는 외적 변수로 결정된다. 어린 시절 영어 사용국가에 거주했거나, 양질의 영어 사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상위 계층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충분한 영어 사용능력을 갖춰 공교육 과정을 실용적으로 이수한 평범한 다수와 현격한 차이를 낼 것이다. 평등이 약자에게 불리한 역설이 현실인 셈이다.

셋째, 영어 절대평가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이다. 2018년도 입시에서 수험생들은 국어와 탐구 과목 난도 상승으로 인해 낭패를 겪었다. 영어 절대평가의 보상이 다른 과목 난도 상승으로 철저히 상쇄된 셈이다. 그 결과 이번 겨울방학 대치동에는 ‘국어 1타 강사 수업 2번 듣기’가 유행이며 문과 학생들은 사회 탐구에, 이과 학생들은 과학 탐구에 공을 들인다. 당연히 수학을 위해 영어가 빠진 시간 일부를 몰아넣어 공부한다. 안타깝지만 영어 변별력 약화와 고교 수업 정상화, 혹은 학생의 학습량 감소, 대학 서열화 완화는 아무 관련이 없다. 짓누른 풍선처럼 다른 과목으로 부풀어 오를 뿐이다.

영어 절대평가라는 제도 하나만 봐도 시행 취지의 정당성은 약하고 기대효과는 낮다. 실망은 대한민국 교육 제도가 마주한 벽이다. 한국의 교육 제도는 이전 제도가 지닌 부작용만 본 뒤 이를 해결하는 데 급급했으며, 국민들은 소멸한 제도가 남긴 불만이 여전한 상황에서 새로운 불만까지 맞이해 불만족의 총량은 증가했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 제도 변화의 취지를 면밀히 검토하고 예상 가능한 부정적인 결과를 철저히 감안한 뒤 단계적으로 시도하는 교육부의 주도면밀함이 절실하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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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시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처음 만난 자리였다. “읽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인데, 꼭이라는 단어까지 붙으니 의무처럼 느껴지네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내내 뭔가가 머리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소재가 등장해서 대화는 이어졌지만, 내내 기분이 찜찜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어제 구입한 시집을 펼쳤다. 김현 시인의 &lt;입술을 열면&gt;이었다. ‘강령회’라는 시의 한 대목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영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몸이 느껴질 뿐입니다.” 시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움직이는 것은 몸이지만, 그 안에서 법석이며 몸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영혼이다.

아까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싶었다. “시를 읽을 때, 나는 스스로를 발견해요. 나는 이런 단어에 끌리는구나, 이런 소재에 반응하는구나, 이런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는구나….” 심신을 두드리는 시를 읽고 나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깨달음이 나를 향한 찬찬한 응시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저 단어가 있었어요. 저 단어가 내 인생에 단단한 매듭을 만들어주었지요.”

시를 읽음으로써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배양되기도 한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이 시를 대학수학능력시험 때 처음 접했다.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난생처음 외로움을 직면하는 시다. 모르는 작품이 나오면 으레 당황하게 되는데, 저 시는 읽는 순간 내 몸을 파고들었다. 파고든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시적 상황에 깊이 스며든다는 것이다. 시적 화자의 입장이 되어 움직인다는 것이다. 시를 읽는 일은 시적 화자가 되어봄으로써 누군가를, 누군가의 인생을 헤아려보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일상의 새로운 면, 언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2002년에 김혜순 시인의 시집 &lt;불쌍한 사랑 기계&gt;를 읽었다. ‘코끼리 부인의 답장’이라는 시를 읽을 때였다. “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야/ 앙다문 입술 밖으로 불현듯/ 불멸의 상아가 치솟게 되는지”라는 구절이 가슴에 빗금을 긋고 지나갔다. 시집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불현듯’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불현듯의 어원이 ‘불 켠 듯’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릎을 탁 쳤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저 단어가 있었다. 무수한 ‘불현듯’들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여기 올 수 있었다.

‘다르게 보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내가 시를 읽는 이유다. 진은영의 ‘가족’을 읽었을 때는 둔중한 것에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가족을 응시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광경을 다르게 보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려고 힘쓰지 않았다면 저런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좋은 시는 이처럼 편견을 뒤흔든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와 달라져 있다. 어제까지는 없었던 벽보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매일같이 듣던 새소리에서 새로운 기척을 느끼기도 한다. 발견하려는 태도와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일상에 생기를 가져다준다. 익숙함 속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낯섦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외연뿐만 아니라 삶을 감싸는 사고의 외연도 넓혀준다.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발견, 타인의 발견, 일상과 언어의 발견, 그리고 다르게 보기의 발견은 단숨에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질문은 가깝게는 취향에서 멀게는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나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극이 된다. 질문을 던지고 일상에서 끊임없이 답을 구하며, 나는 진짜 나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시를 읽기 전의 나와 시를 읽고 난 후의 나는 확연히 달라져 있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 안다. 자기 자신은 안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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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발굴, 복원된 검투사 경기장을 봤다. 영화 &lt;쿼바디스&gt;나 &lt;글래디에이터&gt;에서 본 거대한 원형 경기장과는 달리, 지름 10m 정도밖에 안 되는 반원형 광장 주위에 관중석을 둘러 세운 형태였다. 광장과 바로 맞닿은 곳에는 귀족들을 위해 특별히 길게 만든 돌 침상(寢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당대 귀족들은 이 자리에 모로 누워 음식을 먹으면서 경기를 관람했다. 먹다가 배가 부르면 새의 깃털을 목구멍에 쑤셔 넣어 토해내고 다시 먹으면서, 사람끼리 서로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며, 도끼로 찍고, 철퇴로 치다가 피 흘리며 죽어가는 장면을 ‘관람’했을 또 다른 사람들을 상상하니, 절로 몸에 한기가 들었다.

그런데 인간 행위에 관한 현대의 분류법을 적용하면 저런 행위는 어디에 속할까? 살인과 살인방조? 아니면 스포츠와 스포츠 관람?

 

1903년 정월 대보름 무렵, 서울 만리재에서 예년과 다름없이 돌싸움이 벌어졌다.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밖 사람들이 한패가 되고, 애오개 마포 용산 사람들이 또 한패가 되어 맞붙었는데, 석전꾼(石戰軍)만 9000여 명, 구경꾼은 2만여 명에 달했다. 구경꾼 중에는 구미인들도 섞여 있었다. 피와 살이 튀는 격렬한 경기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흥분했던지, 운산금광의 미국인 직원 클레어 헤스(Clare W. Hess)는 가까이에 떨어진 돌을 집어 경기장 안으로 힘껏 던졌다. 석전꾼 한 명이 그 돌에 맞아 즉사했다. 옆에 있던 구미인들은 한국인들에게 보복당할까 봐 새파랗게 질렸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년 서울에서만 돌싸움으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기에, 왕조 정부도 여러 차례 금령(禁令)을 발했다. 그러나 이 세시풍속에는 비상시를 대비한 군사훈련의 성격이 강했고 참가자도 너무 많았기 때문에, 단속 효과는 없었다.

서울에서 돌싸움이 사라진 것은 일본 헌병이 치안권을 장악한 1908년 이후였지만, 1920년대 중반까지도 뛰어난 선수와 흥행사 등 경기 관계자들의 이름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 돌싸움은 또 어떤 인간 행위로 분류해야 할까?

구기와 체조 등 일부 종목을 제외하면, 스포츠는 본래 모의전투다. 근대 스포츠가 고대와 중세의 스포츠와 다른 점은 살상력을 제거하거나 극소화했다는 점뿐이다. 인류는 동종(同種)끼리 서로 살육하는 습성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모의전투인 스포츠는 인간으로 하여금 개체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면서도 살육 욕구를 다른 방향으로 분출할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에게 전쟁 중의 광기(狂氣)와 유사한 느낌을 갖게 하면서도, 아무것도 파괴하거나 살상하지 않는 것이 스포츠의 힘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픽을 창설하여 1000여 년간 지속했던 것도, 유럽의 명사들이 프랑스인 쿠베르탱의 제창에 호응하여 올림픽 부활을 선언하고 1896년부터 근대 올림픽을 개최한 것도, 스포츠의 이런 힘을 알았기 때문이다.

올림픽은 개인 단위, 또는 분대(팀) 단위로 벌어지던 모의전투를 국가 간의 모의 전쟁으로 확대한 것이다. 스포츠가 선수들에게 요구한 덕목은 중세 유럽의 기사도와 유사한 스포츠맨십이었다. 규칙을 지키며 공정하게 경쟁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것. 전력을 다해 싸우되 상대를 해치지 않는 것 등. 그런데 전투는 군사(軍事)지만 전쟁은 정치다. 올림픽은 스포츠맨십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확장된 미덕을 요구했다. 올림픽 창설자들은 각국이 서로 경쟁하나 전쟁하지 않는 세계, 전쟁과 살육의 욕구를 건강하게 해소하는 세계를 꿈꿨다. 올림픽은 살육과 파괴가 없는 모의 세계대전이며, 그래서 올림픽 정신의 요체는 첫째도 평화, 둘째도 평화, 셋째도 평화다.

한국인들이 올림픽에 관한 정보를 언제 처음 입수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09년 개성시내 각 학교 연합운동회장에 만국기가 걸렸는데, 스포츠를 세계와 연관 지은 것으로 보아 이때쯤에는 올림픽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1913년에는 일본, 필리핀,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홍콩을 회원국으로 하여 제1회 극동올림픽이 개최되었다. 한국인이 극동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21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5회 대회로서, 일본 선수단이 아니라 재(在) 상하이 조선인 체육협회 소속으로 출전했다. 한국인 선수가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은 것은 1932년 LA 올림픽이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손기정이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했다. 정부 수립 전에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에는 KOREA라는 국호로 참가했다.

올림픽은 세계 평화에 대한 지향과는 별도로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국민통합을 강화하는 힘으로도 작용했다. 올림픽은 스포츠를 ‘국민 만들기’라는 정치행위의 핵심 요소로 만들었고,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 아래 국가가 국민을 훈육할 수 있도록 했다. 초등학교 운동회장에까지 걸린 만국기는 스포츠와 국가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가르쳤다. 올림픽 기간 중에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공동 입장과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결성을 두고 ‘정치적 의도에 따라 올림픽 정신을 훼손한 처사’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스포츠맨십과 올림픽 정신을 혼동한 탓이다. 남북 간의 적대감을 줄이는 것, 전쟁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 무엇보다도 세계를 향해 ‘우리는 본래 떨어질 수 없는 하나’라고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올림픽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일이다. IOC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이번 평창 올림픽을 한민족 화합의 무대이자 전쟁 위험을 줄이는 계기로 삼기 위해 애쓰는 중에도, 정작 한국에서는 평양 올림픽이니 뭐니 하며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적대감을 고취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짓이며, 부끄럽고 한심한 짓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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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경북 김천 수도산에 반달가슴곰 한 마리가 나타나 큰 화제를 모았다. 지리산에서 진행되고 있던 멸종위기 야생생물 복원사업으로 탄생한 반달가슴곰이 서식지를 벗어나 직선거리로만 무려 80㎞가 떨어진 경북 김천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이 곰은 2015년 2월에 출생하고, 그해 가을 지리산에 방사된 세 살짜리 수컷으로, 원거리 이동에도 불구하고 포획 당시 체중 56㎏의 건강한 상태였다.

이 곰은 수도산에서 발견된 지 한 달 후인 지난해 7월, 또다시 김천 수도산으로 이동했다가 포획돼 지리산에 재방사됐다. 이러한 현상은 환경부가 2004년부터 시작한 반달가슴곰 복원사업 등 각종 멸종위기 야생생물 복원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복원된 반달가슴곰이 먹이활동은 물론 자연 번식, 이동권 확보까지 생물종의 생존에 필요한 적응력을 갖춘 것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애기뿔소똥구리 _ 사진출처 : 경향신문 DB아카이브

 

2014년 과학저널 ‘사이언스’는 지구의 생물종 멸종이 인류가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보다 1000배가량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각종 개발과 경제 성장 과정에서 개체수가 현저하게 감소한 야생 동식물이 크게 늘어났다. 국내 멸종위기 야생생물로 지정된 종수는 1989년 92종에서 2012년 246종, 2017년 12월 267종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리에게 친근하게 알려진 호랑이, 두루미, 장수하늘소, 미호종개, 광릉요강꽃 등 멸종위기 야생생물들이 안타깝게도 서서히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환경부는 그동안 우리나라 생물다양성을 높이고 생태계 건전성을 되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이들 멸종위기 야생생물에 대한 증식·복원사업에 주력해 왔다. 지리산 반달가슴곰, 소백산 여우, 월악산 산양, 창원 따오기 복원사업이 대표적인 예이다. 지리산 반달가슴곰은 현재 47마리가 살고 있어 지속적으로 생존 가능한 최소 개체수인 50마리를 조만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또 월악산 산양도 77마리가 살고 있어 100마리 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생물을 복원하는 작업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원래의 종을 확보하여야 하고, 이를 증식시켜야 하며, 이후에는 원래의 서식지를 되살리는 일련의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때마침 경북 영양군에 ‘국립멸종위기종복원센터’가 올 하반기 개관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복원센터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멸종위기 야생생물 증식·복원 연구를 통해 사라져 가는 한반도의 고유생물들을 체계적으로 보전하고 되살려내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아울러 핵심종 확보, 학계나 민간 연구소 등 기존 멸종위기 야생생물 복원기관과의 협업에 이르기까지 종 복원과 관련된 컨트롤타워로서의 역할도 하게 된다.

국립멸종위기종복원센터는 우리에게 친숙하였지만 지금은 사라져 가는 소똥구리, 사향노루, 스라소니, 두루미 등 총 43종의 멸종위기 야생생물을 대상으로 원래의 종 확보 및 종 복원 사업을 우선 추진하게 된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사라져 가던 우리나라 고유의 야생생물이 우리 곁으로 되돌아와 우리 국토의 생물다양성을 증진시키고, 우리 후손이 살아가는 환경이 더욱 풍성하고 자연과 잘 어우러지길 기대해 본다.

<김은경 | 환경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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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뉴욕 한인타운 플러싱을 지인과 함께 걷던 나는 재미있는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매일잔치집’이라는 식당간판이었다. 외국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동포들이 친지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잔치가 매일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일 년 내내 휴일을 보내고 있다면 스포츠도 일하는 것만큼이나 지루하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lt;헨리 4세&gt;에 등장하는 짧은 대사도 떠올렸다. 매일 잔치를 벌인다면 준비하는 사람은 물론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조차도 오래지 않아 피곤하게 된다. 축제가 커질수록 악마는 더 독해진다는 독일 속담도 잔치나 축제가 남길 일상 속의 허탈감을 경고한다. 그러나 평창 올림픽만은 갈등과 증오를 넘어 화해와 평화를 우리 땅에 불러오는 즐거운 축제로서 앞으로도 그의 생명력을 계속 보여주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평창 올림픽이 2월9일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두 번 낙방 끝에 힘들게 개최에 성공했지만 평창은 처음에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들은 비슷한 영문표기를 하는 평양과 혼동하기도 했다. 실제로 평창 가겠다고 비행기표를 끊었는데 평양 가는 표를 여행사에서 발부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나도 실소한 적이 있다. 북측이 전격적으로 이 축제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서 여자 아이스하키에서 남북 단일팀이 성사되었고 한반도기를 앞세워 공동입장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평창 올림픽’이 ‘평양올림픽’이냐며 현 정부를 공격하는 소모적인 이념공세도 나타났다. 북핵위기의 여파를 빌려 평창 올림픽을 대정부 투쟁의 새 과녁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IOC 바흐 위원장은 평창 올림픽을 열심히 준비해온 사람들을 모욕하는 처사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제 축제는 시작되었다. 이 축제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되살아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분위기를 지구촌 곳곳에서 우리는 분명히 읽을 수 있다. 특히 북측은 명실상부한 고위급 대표단의 파견을 통해 남북관계의 개선에 대한 분명한 뜻을 전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으로 공식초청까지 했다. 이런 희소식에도 불구하고 북핵 문제가 올림픽축제와 어울린 분위기에 휘말려서는 안된다는 미국의 계속되는 공세는 축제 이후를 상당히 우려하게 만든다. ‘즐거운 저녁잔치가 슬픈 아침으로 이어진다’는 마르틴 루터의 말처럼 축제가 끝난 후 한반도가 다시 갈등의 격랑에 휩쓸릴 경우를 우리는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우리는 축제가 우리 땅에 진정한 평화의 새로운 기운을 확고하게 내릴 수 있도록 일상을 더욱더 차분하게 꾸려야 한다.

2030세대가 평창 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사회 일각에서는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취직난에 허덕이는 젊은 세대의 가슴에 직접 와닿지 않는 통일이야기가 어느 날 갑자기 나돌자 이들이 느낀 당혹과 불만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축제에만 신경 쓴 나머지 통일 문제를 절박하게 느끼지 않고 성장한 세대의 생활세계를 경시한 데도 원인은 있다. 축제는 짧고 일상은 길다.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남북이 서로 가까워지는 ‘과정’, 그 자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이와 관련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언론의 책무다. 새삼스러운 지적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적 사고가 여전히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더구나 ‘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까지 무장된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있는 정보화시대의 어두운 측면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독일의 풍자작가이자 언론인인 쿠르트 투홀스키(1890~1935)는 “축제는 지속되겠지만 그 동기는 짧게 남는다”고 경고했다. 언론매체가 본래 지향했던 축제의 목표보다는 지엽적이고 선정적인 대목만을 대서특필해서 사회갈등을 더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진정한 언론인은 ‘침묵’이라는 무기를 지니고 있고 이를 자주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평했다. 모르겠거나 사실확인이나 검증을 할 수 없을 때 언론인은 무책임한 말이나 공허한 글보다 차라리 사려 깊은 침묵을 택할 것을 차제에 나도 권하고 싶다.

축제가 끝나고 일상이 다시 돌아오면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들이 기다리겠고 그 맨 앞 줄에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자리 잡을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물론 짧은 축제기간에 이 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해결책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상호신뢰에 기초한 새로운 분위기를 이 기회에 남북이 함께 만들지 못한다면 축제 이전보다 더한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래도 설마 전쟁까지 일어나겠느냐고 자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북·미 간의 대결구도는 작은 판단착오만으로도 순식간에 무서운 파괴력을 동반하는 갈등으로 전화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무력에 의한 응징과 같은 모험보다는 면밀하게 계산된 여러 압박수단에 의존해 앞으로도 북핵 문제에 대처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이 나돈다. 평창축제 개회식에 참가한 미국 펜스 부통령이 보여준 무례한 행태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코피작전’이 아직도 운위되는 현실, 바로 그 속에 숨어있는 불길한 우연의 힘을 우리는 정말 무시만 할 수 있겠는가.

전 세계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큰 축제는 사실 그리 흔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평창 올림픽은 이를 지켜보는 지구촌 모든 사람의 가슴에 평화를 향한 우리의 뜨거운 열망과 의지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올림피아의 유적발굴작업을 이끌었던 독일의 고고학자 에른스트 쿠르티우스(1814~1896)는 “모든 공식적인 축제에는 지고의 선과 미를 실현하려는 인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힘에만 의거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전체의 생활력은 커지며 모든 개인의 힘도 강화되고 정돈되며 세련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며칠 전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그를 기려 명명된 ‘쿠르티우스 거리’를 걸었다. 그의 유지가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는 꼭 실현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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