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데이터 회사가 페이스북 이용자 5000만명의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이용해 선거에 활용한 사건이 보도됐다. 페이스북 등 데이터를 판매해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에 논란이 붙었다. 이용자들이 동의했다지만 이용자들은 정치 선전에 활용하라고 동의한 것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원유’라 불리는 데이터. 데이터를 활용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주장하는 기업들의 논리와 자신의 데이터가 곧 ‘개인정보’이자 ‘사생활’인 개인들이 정보를 보호하고자 하는 논리가 부딪친다.

2016년 6월 박근혜 정부는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를 위해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개인정보에 가명화·익명화·범주화 등 비식별 조치를 하면 개인정보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도 이를 활용·유통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개인정보보호법을 우회해 개인정보를 유통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는 지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2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행정안전부가 ‘빅데이터의 안전한 활용을 모색하기 위한 개인정보 비식별 처리 기술 세미나’를 열었다. 이 민감한 시기, 정부가 직접 나서서 ‘안전한’ ‘활용’이라는 병립되기 어려운 가치를 내세운 것이다. 개인정보 보호와 활용이라는 딜레마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비식별 조치’ 대신 ‘익명처리’ ‘가명처리’로 용어를 통일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또 지난 2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해커톤 끝장 토론에서도 ‘비식별 처리’라는 모호한 용어 대신 개인정보, 가명정보, 익명정보로 구분해 정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날 시연회에서는 정작 ‘비식별’ 정보를 만드는 기술만 강조했을 뿐이다. 더구나 최근 금융위원회, 방통위, 과기정통부 등이 관련 권한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활을 건다는 얘기도 들린다. 개인정보를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가장 기본적인 해커톤 합의 내용도 지키지 않고 있다면 오해라고 할까. 그리고 하나 더. 부처 간 헤게모니 다툼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쪽은 누구일까.

<임아영 |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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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공장의 담벼락에서 멈췄고, 권리는 근로계약서 아래에 감춰져 있다. 2017년 겨울 경남지역의 촛불집회에서 한 청년은 “박근혜가 퇴진하면 우리 삶은 달라질까요?”라고 물었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우리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일터가 바뀌어야 하고, 그 변화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낼 때에야 가능해진다는 것을. 그런데 노동자들은 광장에서 큰 힘의 일부였으나, 일터로 돌아가는 순간 힘없고 경쟁에 지친 개인이었다. 아직 일터는 변하지 않았다.

일터가 아직 변하지 않았기에, 권리를 말하는 이들이 겪는 고통은 여전히 크다. 노동자를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눌 때 “함께 살자”고 외치다가 공권력에 진압당했던 쌍용차 노동자들, 그 노동자들은 모두가 ‘함께’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곡기를 끊고 버틴다. 아직도 이 사회는 ‘함께’ 사는 것을 불온시하기 때문이다. 목동에는 75m 굴뚝 위에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파인텍 노동자들이 있다. 파인텍 사측은 공장을 정상화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겠다던 약속을 뒤집어버렸다. 그래서 “노동자의 권리는 회사가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해 그 높은 굴뚝에서 150일 가까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전주시청 앞 조명탑 위에 택시노동자가 올라가 있다. 지난해 9월4일 조명탑에 오른 후 200일이 넘게 지나고 있다. 하루 12만원에서 14만원을 오가는 사납금 때문에 택시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다. 더 많은 승객을 태우려다보니 사고도 많았다. 전주의 택시노동자들은 불법으로 운영되는 사납금제도를 없애기 위해 2014년부터 2년이나 싸웠고 전주시와 회사, 그리고 노조가 ‘전액관리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전주시가 시간만 끌고 회사의 불법을 방조하고 있기에 전액관리제는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택시노동자는 다시 하늘에 올랐던 것이다.

좁은 공간에서 100일, 200일을 보내는 동안 흔들림에 멀미를 할 것이다. 날씨와 싸우다 지치기도 할 것이다. 책임져야 할 자들의 긴 침묵에 조바심도 날 것이다.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림뿐이니,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고통도 커질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는 것이 ‘책임자들의 답변’이라면 ‘기다림’은 고통이 되겠지만, 그들의 기다림이 ‘연대’라면 그 기다림은 즐거움이 될 것이다. 하늘에 오른 이들이 깃발이 되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렇게 모인 이들이 서로에게 용기가 되는 그런 자리가 너무 소중하다.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연대’는 아직 ‘죄’이다. 문정현 신부님이 노역을 살러 가셨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서 크레인에서 농성하던 김진숙을 응원하려고, 희망버스에 올랐다가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함께 지키자는 연대가 죄가 될 수 없기에’ 벌금을 낼 수 없다고 했지만, 지난 정권은 연대를 죄로 만들어 벌금을 물리고 잡아가두었다. 그래도 연대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꾸준하게 커져 광장을 열었고 100만 촛불이 되었다. 그리고 나쁜 정권은 무너졌다.

그래서 여전히 ‘연대’가 희망이다. 정권이 죄를 물었던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연대가, 백남기 농민의 빈소를 지키던 마음이, 정권을 바꾸는 촛불로 커졌듯이, 평택 쌍용차에서, 목동 파인텍에서, 그리고 전주시청에서 연대를 기다리는 이들과 함께하는 발걸음이 일터의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는 불씨가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희망버스에 오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3월31일 전주시청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함께 타자. 그래서 200일이 넘도록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외치고 기다리는 전주 택시노동자들에게 ‘우리의 도착’을 알리자.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 연대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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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겸 종종 끼니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곤 한다. 이름하여 ‘남양주지옥분식통신’. 남양주는 장소 표시다. ‘지옥분식’은 김밥 전문점인 ‘○○천국’ 패러디이기도 하고 맛의 수준도 지옥의 맛이어서 그렇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한 끼를 쳐내는 일이 보람보다는 지옥 같을 때가 많다. 무엇보다 이 한 끼에 얽혀있는 삶의 관계들이 얼마나 지옥스러운가. 맵짠 눈물과 땀이 섞인 한 끼의 식사여서 지옥분식이다. 장을 볼 시간도 부족하고 근처에 시장도 없어서 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결국 대단지 아파트 생활자는 대형마트와 함께 살아간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세월호 7시간의 비밀’이 봉인 해제된 날이다. ‘늦잠’ ‘빼꼼’이라는 비밀번호로 비밀의 문이 따졌다. 내 허무함과 분노가 아무리 크다 한들, 참사의 당사자인 가족들의 참담함에 비한다면 미세먼지 입자만큼도 아닐 터다. 그래서 입 다물고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오늘 먹을 지옥분식 메뉴를 고민했다. 그저 식구들과 지옥의 맛이라도 함께 먹는 날이나 많이 만드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이지 않을까. 이런저런 착잡한 감상이 올라오는 와중에 소방차, 경찰차,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뒤섞여 아파트 단지를 흔들었다. 불이라도 났나 싶어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금세 잠잠해지는 걸 보니 가벼운 화재거나 오인 신고였나 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단다. 그것도 동네 이마트에서.

오늘은 이마트의 격주 휴무일이다. 휴무일인지 모르고 주민들이 종종 헛걸음을 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 보통의 날이었건만 무빙워크 안전점검을 하던 스물한 살의 청년이 빨려 들어갔단다. 요란했던 사이렌 소리는 이 사고 때문이었다. 딸기 한 상자와 고등어 한 손 사서 오고가고, 동네 조무래기들이 반대방향으로 뛰면서 장난을 치면 안전요원들이 나무라던 그 무빙워크. 옹이 박듯이 무거운 쇼핑카트 바퀴를 잡고 사람의 품을 덜 들게 만들던 그 무빙워크에는 내가 몰랐던 지하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저 지상에 드러난 ‘무빙’만 보고 살았을 뿐이었는데 이 끊임없는 순환에는 지하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의 죽음으로 늦되게 자각한다.

‘21세의 남성 근로자’라는 짧은 신상 속에서도 이 청년의 신산한 삶이 확 다가온다. 살아온 만큼 더 살았어도 겨우 내 나이다. 40대 초반의 내가 죽는다 해도 다들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며 비통할 텐데, 그보다 절반의 나이다. 세월호 희생 학생들과 또래이기도 하다. 구조를 하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려 무빙워크에서 구조했을 때는 이미 숨을 놓고 있었다는 말에. 차라리 안도했다. 빨리 눈감았기를. 구조될 거란 헛된 희망으로 버티고 있지 않았기를 바랐을 뿐. 그리고 ‘21세’의 나이 표시가 제발 만 나이였기를. 당신이 그래도 스물두 살이었기를 빌었다.

이 지면에 2011년 이마트 탄현점에서 사망한 스물두 살의 ‘황승원씨’와 구의역에서 참사를 당한 ‘19세의 김군’을 애도하며 기성세대의 부끄러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잊고 지옥분식 차려먹고 살았다. 그런데 ‘동네일’로 이런 참화를 보고 있자니 내 입방정 때문이었나 싶어 괴롭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적어둔다. 무빙워크 자리에 꽃 한 송이 놓아야겠다. 치워지고 재빨리 삶의 공간으로 재편되기 전에 여긴 ‘죽음의 자리’이기도 했다는 것을 표시하러 지금 뛰어가야겠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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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를 3년 썼더니 잔고장이 자주 나 새 휴대전화를 알아보고 있다. 요즘 나오는 휴대전화 기능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카메라였다. 한 업체의 휴대전화는 피사체의 배경을 푸른 하늘에서 보랏빛으로 바꿀 수 있다는 CF까지 내보냈다. 이런 궁금증이 든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사건의 증명이다. 한데, 찍는 사람 마음대로 피사체에 변화를 줄 수 있고, 배경마저 바꾼다면 그걸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이미 사진은 ‘원판’을 보여주지 않은 지 오래됐다. ‘뽀샵’(포토샵)이라는 말이 전문적 프로그램 용어가 아니라 흔히 사용하는 말이 됐다. 명도나 채도의 조정 문제가 아니라 색감도 보정(아니 수정)할 수 있다. 광고는 심지어 모델의 다리까지 늘이기도 한단다.

보이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라고 간파한 것은 장 보드리야르다. 그는 이미지가 실재를 압도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이 신을 대신하면서 신성을 약화시켰듯이, 이미지가 실재에 앞선다고 했다. 이것이 시뮬라크르이다. 시뮬라크르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보다 더 실제적인 대상이다. 이를 파생실재라고 했다.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실재를 모델들을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다. 영토는 더 이상 지도를 선행하거나, 지도가 소멸된 이후까지 존속하지 않는다. 이제는 지도가 영토에 선행하고-시뮬라크르들의 자전(自轉)-심지어 영토를 만들어낸다.’(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학자들은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하이퍼리얼리티라고 표현한다. 하이퍼리얼리티는 그림자가 실체보다 더 진짜 같은 세계다. 이미 우리는 가상세계가 생활 속에 들어온 시대에 살고 있다. 얼마 전 가상화폐 광풍이 요동쳤다. 가상현실(VR)도 대중화되고 있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현실과 겹치는 시대다.

아마 우리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 세계는 지식보다 정보를 중시한다. 지식이란 하루아침에 채울 수 없다. 벽돌을 하나하나 쌓듯이 공부의 과정이 필요하다. 반면 정보는 찰나적이다. 주식시장에서 남보다 빨리 얻은 정보는 돈이 되지만, 늦은 정보는 무용지물이다. 정보는 지식보다 환금성이 있다.

이 세계는 로고스가 취약해진 세계이다. 로고스는 이성(理性)이며 법칙이다. 법이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흔들림 없어야 한다. 절대적이어야 한다. 고대와 중세에는 종교가 로고스였다. 고대인은 신의 말씀을 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고스를 변함없는 대지, 땅에 비유했다. 근대에 와서 로고스의 자리를 과학과 법이 차지했다. 반면 정보화시대에는 정보가 물처럼 흐른다. 유동적이다. 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로고스가 약화된 이 시대를 액체근대, 유동하는 근대라고 했다.

로고스가 약화된 시대에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은 파토스다. 파토스는 감성이며, 열정이다. 로고스가 여러 사람의 눈에 바라보이는 객관에 의지한다면, 파토스는 자신의 감정에 의지한다. 파토스는 상황적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파토스의 시대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노동현장에서는 노동자의 감정을 상품화하고 있고, 마케팅에 감성을 넣었다.

진실이란 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흙탕물도 가라앉아야 밑바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순간순간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은 감에 의지하기 십상이다. 하여 감정, 파토스에 기대게 된다.

문제는 세상은 더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산업과 문화와 정보의 다변화가 직조해나가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단순명쾌하게 진짜와 가짜, 선과 악으로 나뉘지 않는다. 또 사건은 과거처럼 한 장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작게는 지역, 넓게는 지구적 구조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한데 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동정과 지지, 분노와 혐오의 감정이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꺼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사안에 따라 사람들은 한쪽으로 달려가 시소의 끝자락에 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설득할 때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에토스는 바람직하거나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일정한 행동양식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로고스는 파토스를 필요로 하고 파토스는 로고스를 바탕으로 발산돼야 한다. 로고스와 파토스는 에토스에 기대야 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에토스는 무엇인가. 나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개가 걷히기까지 기다려야 수평선을 볼 수 있듯이, 세상사도 시간이 흐른 뒤에 이해가 될 때가 있지 않은가.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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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금요일.’ 부활절을 이틀 앞둔 오늘, 교회는 2000년 전 십자가형으로 처형된 예수의 죽음을 기립니다. 죽음은 생명의 봄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생명으로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사실, 겨울을 지나 봄이 오듯,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듯, 모든 죽음에는 생명의 씨앗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순환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은 존재와 생명의 근원적 유대로 연결되어, ‘나’는 세상의 모든 ‘너’ 덕분에 살아갑니다. 어떤 이유든 순환의 고리가 끊기면, 생명체는 병이 듭니다. 무관심과 고립은 순환의 원리를 거스르고, 독점과 배척은 순환의 고리를 끊습니다.

서울 광림교회에서 2016년 열린 개신교계 부활절 연합예배.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도 결국 순환의 고리가 훼손된 결과입니다. 사람과 자연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공장에서 거리로 내몰린 지 십년이 되어갑니다. 해고자 복직에 최선을 다하겠다던 회사는 미적거리고, 희망고문은 계속됩니다. 김득중 쌍용차 지부장은 4번째 단식에 들어갔고, 오늘이 단식 30일째입니다. 전주의 김재주 택시노동자는 사납금 폐지와 월급제 시행을 요구하며 209일째 전주시청 앞 조명탑에서 농성 중입니다. 월급제가 도입된 지 20년, 사납금 제도는 여전히 기사의 생계를 옥죄고 안전 운행을 위협합니다.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는 침묵으로 방관합니다.

설악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엄격한 자연보호구역입니다. 그 설악산에 양양군은 두 번이나 케이블카 사업을 신청했고, 국립공원위원회에서 모두 부결되었습니다. 하지만 2015년 8월, 세 번째 신청한 사업이 조건부 승인되었습니다. 그 뒤에, 박근혜 정부가 운영한 환경부의 비밀 TF가 있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쓰일 알파인 스키장을 만든다고 가리왕산의 원시림을 파헤쳤습니다. 단 며칠의 경기를 위해 조선시대부터 벌목을 금해온 봉산에서 나무 10만그루를 베어냈습니다. 잔치가 끝나자, 강원도는 가리왕산 복원 약속을 미루기 시작했습니다.

탈핵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가 외국에서는 핵발전소 수출에 열을 올립니다. 원전업계는 ‘원전수출 국민행동’을 결성하고 정부에 원전수출 지원을 촉구합니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핵발전소를 수출한 이후, 이 땅에 핵발전소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고준위핵폐기물 같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힘든 싸움을 통해 이제 겨우 탈핵을 선언했을 뿐, 고통과 문제들은 그대로입니다. 원전수출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 이 모든 고통과 문제를 다른 나라로 보내는 것입니다. 탈핵을 선언한 나라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위험한 것은 다른 나라에도 위험합니다.

근원적 유대감에서 오는 타자에 대한 존중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런 현실에서 순환의 고리가 온전할 리 없습니다. 봄이 온들, ‘침묵의 봄’입니다. 지난 25일, 문정현 신부가 제주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올랐다고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았지만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한 연대는 죄가 아니라며 버텨왔던 문정현 신부, 단식하는 김득중 지부장을 “기억하며 기도”하겠다며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며 벌금노역을 자청하였습니다. 다시, 아름다운 연대의 길을 떠났습니다. 주말인 내일이면, 휴식을 마다하고 전주의 하늘에 홀로 떠 있는 택시노동자 김재주를 만나러 희망버스를 타고 길 떠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길이 예수의 길입니다.

예수는 끊어진 순환의 고리를 잇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무관심과 고립, 독점과 배척의 세상을 관심과 연대, 나눔과 포용의 세상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죽음을 생명과 연결하려 했습니다. 세상은 그런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지만, 십자가 죽음에서 생명이 피어났습니다. 세상의 가장 약한 존재를 향해 자기를 비우는 그 마음이 순환의 고리를 잇는 힘, 생명의 원천입니다. 곧 부활입니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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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와 블랙리스트, 그것은 아마도 지금 곤경에 처한 예술의 상반된 두 얼굴일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국가가 예술가에게 자행한 가장 천박한 형태의 상징폭력이다. 미투는 권력을 가진 예술가가 그에게 종속된 공동체에 자행한 가장 참담한 형태의 젠더폭력에 맞선 상징저항이다. 블랙리스트는 정치적 이념의 잣대로 예술가를 배제한 국가의 검열 장치이다. 그것은 통치자의 지시에서 문화 관료들의 실행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를 냉전-이념의 틀로 구별지으려 했다는 점에서 유신정치의 회귀이며, 그것의 종말을 확증하는 징표이다. 블랙리스트는 보수 정치권력 10년 통치술의 무의식이며, 문화융성이라는 허울 좋은 기표의 무의식이기도 하다. 블랙리스트는 보수 정치권력이 진보적 예술가들을 포획하려는 공작정치였던 것이다.

예술계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오랫동안 참담한 겨울을 보냈고, 그 공작정치가 폭로되면서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촛불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공작’으로서 블랙리스트는 예술가를 옥죄는 배제의 장치이지만, ‘사건’으로서 블랙리스트는 저항의 계기였다. 예술가들이 광화문광장 캠핑촌에서 143일간 노숙농성을 하면서 국가검열과 배제에 맞서 저항했던 것은 오로지 블랙리스트라는 사건과 그 사건이 주는 예술의 총체적 파국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술 파국은 블랙리스트로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 파국의 최종 형태는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바로 젠더폭력이었다. 미투는 그것을 알게 해주었다. ‘운동’으로서 미투는 예술계에 오랫동안 신체화된 젠더폭력에 맞선 저항의 연대이면서, 블랙리스트라는 정치적 파국을 다시 내파시키는 ‘자기 부정’의 동력인 셈이다.

미투 운동이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에 촉발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것은 여혐 논쟁으로 환기된 젠더운동의 진화된 형태만은 아니다. 그것은 블랙리스트에 맞선 예술행동 안에 감추어진, 혹은 은폐된 젠더폭력의 폐부를 드러내는 예술운동의 진화된 형태이기도 하다. 미투 운동이 블랙리스트에 속한 진보적 남성 선배 예술가들을 향한 것도 그런 점에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김어준 식의 음모론으로 귀결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예술계 내 위계 권력의 상층부에서 성공가도를 달린 진보적 남성 예술가들이 같은 장 안에 함께 있었던 여성 후배들에게, 제자들에게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했던 것은 단지 은폐되었을 뿐이다. 젠더폭력은 블랙리스트라는 훈장으로 은폐될 수 없다. 미투는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를 환기시켰다. 그것은 우리 안 젠더폭력의 자명성을 드러낸 것뿐 아니라, 진보적 이념의 논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폭로했다.

저항과 진상조사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종결을 지으려 했던 블랙리스트 사건은 지금 미투라는 거울을 마주하고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박근혜를 감옥에 보내고, 진상조사와 관련자 추가 처벌만으로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사건은 매우 불편하게도 지금 미투라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이자 그 사건을 주도했던 진보적 예술가들도 미투라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블랙리스트와 미투는 대립적이지만, 어떤 점에서 예술의 장을 파괴시킨 강력한 폭탄과 같은 것이다. 블랙리스트가 예술의 장 외부에서 날아온 폭탄이라면, 미투는 예술의 장 내부에서 투척된 폭탄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미투 운동이 예술의 장을 회복불가능하게 소멸시킬 것이라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다. 예술의 생존을 위해 적당히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예술의 장은 미투로 내파되어 완전히 새로운 장으로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은 블랙리스트 사건의 거울효과이다. 블랙리스트는 미투라는 거울을 통해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미투는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라는 검은 얼굴을 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미투는 촛불혁명의 이행을 위한 예술계 내 사투의 언어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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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짧은 실험 동영상이 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 번 공을 패스하는지 세어보라”는 지시가 나오고, 검은 옷을 입은 세 명과 흰옷을 입은 세 명이 농구공 두 개를 쉴새없이 주고받는다. 이 동영상을 본 사람들 중 반 정도는 사람들 사이로 고릴라가 지나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공에 집중하느라 고릴라가 안 보이는 것이다.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즈가 제작한 영상이다. 선택적 인지, 선택적 기억은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도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핵심으로 보는가에 따라 관련성이 적은 내용을 나도 모르게 걸러내고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우선순위를 설정함으로써 지각과 사고의 범위가 제한되는 것이다. 더욱이 공을 던지는 사람들 틈에 고릴라가 나타나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상상력이나 선지식이 없을 때도 인지 가능성은 줄어든다. 거꾸로 고릴라를 관찰하라고 한다면 공을 던지는 횟수를 정확히 세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동영상은 특정한 문화적 훈련이나 정치적 방향제시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미투(#MeToo)’ 운동이 정치공작에 악용될 수 있다는 김어준씨의 발언이 폭풍을 일으켰었다. 그는 미투 운동을 변질시켜 진보진영에 타격을 입히려는 정치공작을 경계하고 미투 운동의 와중에 이명박 전 대통령(MB)의 비리의혹들이 잊힐까 염려했다. 시야에 드러나지 않는 고릴라를 찾는 것은 그 나름의 유의미한 기술이다. 정봉주 전 의원이 성추행 의혹 보도에 맞서 결백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공작’의 가능성이 부각되는 듯했다. 그러나 MB는 수감되었고 그에 대한 조사는 진행 중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피감독자 간음 및 강제추행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성추행 의혹을 전면 부인했던 정봉주씨는 결국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고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했다. 공작이 있는지, 혹은 공작을 찾아내는 일로 단련된 사람이 그것을 보고싶어 했는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미투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불가능할 것 같던 많은 일들이 우리 정치현실에서 일어났으니 말이다. 실제로 시류에 올라타 성폭력을 진보의 문제로 치부하는 보수의 공세가 있으므로 그것이 보수의 자가당착임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특정 목적을 위해 “피해자들을 준비시켜서” 미투 운동을 몰고 간다는 발언은 사실에 근거한 진단이 아니라 자칭 “예언”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공놀이 장면에 고릴라가 등장할 것이라는 “예언”이 고릴라를 기다리느라 공놀이를 볼 수 없게 만들고, 없는 고릴라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생각에 몰두해서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동안, 고릴라는 있든 없든 어느새 주인공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자와 그들의 고통스러운 폭로를 ‘공작’과 결부시키게 되고, 피해자의 폭로가 특정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도록 이용 혹은 기획되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음모론이 심각한 2차 피해를 야기한다.

정치공작 “예언”에 이처럼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보 내의 보수 영역인 남성중심적 관점과 미흡한 젠더감수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피해 여성을 누군가 이용한다면, 우선 성피해를 입은 여성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현 정권과 진보세력의 정치적 입지 손상을 말하기 이전에,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진보진영 내의 성폭력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우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1970~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뿌리를 두는 현재 진보진영의 문화는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국가와 계급의 문제, 보편가치의 추구라는 플롯을 우선시하라는 지시를 충실히 내면화한 수많은 정치적 주체들(시민이라 쓰고 남성이라 읽는다)에게 성평등, 여성인권의 요구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였다. 미투 운동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만연한 성폭력의 문제가 시민사회의 시야에서 더 이상 선택적으로 배제될 수 없는 일임을 천명한다. 그러나 정치공작 “예언”은 미투 운동의 장에서 궁극적으로 진보세력의 정치적 위상이 손상될 것을 우려함으로써 성평등을 부차적인 사안으로 격하했다. 성피해 여성을 수단화하는 책동이 은근히 미투 운동의 숨은 주인공이 된다면 결국 미투 운동은 진보와 보수가 세력을 다투는 정치지형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셈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드러나는 상처와 고통을 보면서도 그것을 시각장에서 지울 수는 없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스스로를 드러낸 덕분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긴 혁명이다.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모퉁이를 돌고 있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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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서울서부지법 곽형섭 영장전담판사는 지난 28일 “수집된 증거 자료와 피의자가 수사에 임하는 태도 등에 비춰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구속하는 것이 피의자의 방어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판단했다. 구속영장 발부 여부는 온전히 영장전담판사의 권한이다. 영장 기각이 무죄 심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피해자의 인권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8일 오후 여비서관 등 성폭력 의혹을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안 전 지사는 피해자의 폭로 직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다. 모두 다 제 잘못”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합의된 관계’였다고 말을 바꿨다. 피해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며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이 아닌, 친밀한 남녀관계로 왜곡하려 하고 있다. 이게 증거인멸 우려가 아니면 뭔가.

안 전 지사는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과한 적도 없다. 영장 기각 직후에도 방송 카메라를 향해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수사에 임하는 태도가 양호하다는 판단이 납득되지 않는 이유다. 외려 일부 지지자들이 피해자에 대한 허위 정보를 담은 글을 전파하고, 일부 언론에선 ‘안 전 지사가 컨테이너에서 하루 한두 끼만 먹으며 괴로워한다’는 기사를 내보내는 상황이다. 피의자의 방어권보다 피해자의 안전 보장이 절실하다.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과 관련해 피해자의 인권이 경시되는 사례는 이뿐이 아니다. 미투의 본격 시발점이 된 안태근 전 검사장 사건도 마찬가지다. 서지현 검사가 성폭력 피해를 증언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진상조사단은 안 전 검사장의 신병처리 방침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검찰 재직 시절 사건을 덮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최교일 의원 소환조사도 실패했다. 그사이 서 검사는 근거 없는 2차 피해에 시달려야 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범죄 구성요건에 집중해 보완수사토록 지시했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수사를 질질 끌 수는 없다.

안희정·안태근 사건의 처리 방향은 법원·검찰의 미투 운동에 대한 시각을 판단케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일상 속 성차별 문화를 깨고 보다 나은 민주사회를 만들려는 거대한 변혁의 흐름을 법원과 검찰도 인식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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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 검찰총장은 29일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안에 대해 “경찰이 수사종결권을 갖는다는 내용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논의가 가능한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영장청구권에 대해서는 “50년 이상 지속해 온 인권 보호 장치인 검사의 영장심사 제도는 유지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의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방식이 타당한가 의문”이라고 했다. 지금 청와대는 조국 민정수석 주재로 박상기 법무부 장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여러 차례 만나 수사권 조정안을 거의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잠정안은 경찰이 1차 수사권 및 종결권을 갖고, 송치 전 검사의 수사지휘를 폐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거쳐 곧 발표될 것이라고 한다. 문 총장의 작심 발언은 검찰이 배제된 채 조정안이 마무리되고 있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이 수사한 모든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고 검사가 수사종결권을 행사하는 현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불기소가 명백한 경미한 사건까지 검사의 종결처분을 기다리게 함으로써 사건 당사자들이 불안정한 법적 지위에 놓이는 데다 이중 부담까지 주기 때문이다. 미국·영국은 경찰이 1차 종결권을 행사하고, 일본은 경미 범죄에 한해 경찰이 수사를 종결하고 있다. 인권 보호를 위해 검사의 영장심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인권 침해로 지탄받고 있는 검찰이 되레 인권 보호를 내세워 조직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영장심사는 법원에 맡기면 될 일이지, 검찰이 그에 앞서 심사하고 통제할 사안이 아니다.

검찰은 수사권, 영장청구권, 기소권을 독점하며 사건을 만들 수도, 없던 일로 둔갑시킬 수도 있는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다스가 누구 것이냐는 의혹 등 과거 자의적으로 수사했다가 정권이 바뀐 뒤 다시 뒤집힌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살아있는 권력에 충성하고, 죽은 권력에는 가혹한 기회주의적인 모습은 ‘정치검찰’이란 비난을 자초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검찰을 개혁 대상 1호로 지목했고, 수사권 등 일부 권한을 경찰에 넘기자는 수사권 조정 요구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검찰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겠다며 기득권을 움켜쥐고 끝까지 조직 방어에 급급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런 식으로 검찰개혁이 좌절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검찰개혁은 또 흐지부지될 수 있다. 청와대는 권력기관 개혁안을 서둘러 마무리짓고, 국회 사법개혁특위는 검찰개혁이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속도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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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모두 22개다. 버들다리는 청계광장부터 따지면 13번째에 있다. 평화시장 봉제노동자로 일했던 전태일 열사가 1970년 11월 <근로기준법 해설>을 품에 안고 분신(焚身)사망한 곳이다. 2005년 전태일의 반신부조상이 설치되면서 ‘전태일 다리’로도 불린다. 올해 말이면 청계천 6번째 다리인 수표교 근처에 ‘전태일 기념관’이 들어선다. 전태일 정신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는 것은 반길 일이다.

기념관 벽면에는 전태일이 1969년 12월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편지 전문이 금속재 스크린에 새겨진다고 한다. 전태일이 22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기 11개월 전에 쓴 자필편지다. 편지에는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신음했던 청년노동자의 분노가 담겨 있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주와 극심한 생존경쟁으로 내모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도 드러나 있다.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의류계통에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의 평균 연령은 18세입니다. 노동자들은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고삐에 매인 금수(禽獸)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해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기업주들은 폭리를 취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습니다.”

당시 전태일과 어린 여공들이 일했던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은 참혹, 그 자체였다. “천장 높이가 1.6m밖에 안돼 허리도 펼 수 없는 2평 남짓한 작업장. 먼지 가득한 그곳에서 하루 13~16시간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을 앓고 있는 13세의 어린 소녀들. 이들은 건강검진은커녕 근로기준법에 담긴 노동자의 기본 권리마저 박탈당하며 살아가고 있다.”(경향신문 1970년 10월7일자)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 답신을 보내지 않자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도 장문의 편지를 썼다. 하지만 편지는 끝내 전달되지 못했다. “각하에게 아픈 곳을 알려드리니 고쳐 주십시오. 하루 14시간의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단축하십시오. 일요일마다 쉬기를 희망합니다. 시다공의 수당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전태일은 두 통의 편지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숨진 전태일의 ‘노동해방의 꿈’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도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선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1930년에 펴낸 소책자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100년 뒤에는 살림살이가 8배 나아져 노동시간이 주당 15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했다. 당시는 전 세계가 대공황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던 때여서 케인스의 예측은 ‘꿈같은 얘기’로 간주됐다.

하지만 케인스가 소책자에 소개한 여성 노동자의 묘비명은 눈길을 끌었다. “친구들아,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결코 울지도 말라. 나는 이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네.” 죽어서 ‘노동의 사슬’에서 벗어났으니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뜻이다.

100년 뒤에는 노동시간이 주당 15시간으로 줄어들 것이란 케인스의 예측은 단지 ‘희망사항’이었던 것으로 판명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에 나서고 있는 유럽 각국의 사례를 보면 허황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주당 노동시간이 27시간인 네덜란드는 조만간 주당 21시간으로 줄인다고 한다. 독일의 노동시간은 주당 25시간이고, 스웨덴·덴마크·벨기에·노르웨이 등은 주당 노동시간이 32시간 안팎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케인스의 예측이 한참 빗나갔다. 국회는 지난달 28일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며 노동시간 단축의 첫발을  뗐다. 하지만 전체 노동자의 28.1%에 달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 558만명은 여전히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노동시간 제한뿐 아니라 연장·휴일수당 지급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는 것이다.

케인스가 예측한 주당 15시간은 아니더라도 세계 최장 수준(2016년 기준 1인당 연평균  2069시간)인 노동시간이 줄어들 때까지 한국 노동자의 또 다른 이름은 ‘전태일’이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시간’을 되찾길 열망하고 있다. 49년 전 전태일이 편지에서, 88년 전 케인스가 소책자에서 꿈꿨던 것처럼….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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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죄인을 판사가 꾸짖었단다. “당신은 세상에 좋은 일이라곤 해본 게 하나라도 있소?” 죄인의 대답. “섭섭한 말씀 마십쇼. 제가 그래도 수많은 형사님들과 교도관님까지 일자리 창출을 위해 나름 얼마나 애를 써왔는댑쇼.” 허걱, 변명을 이겨낼 재간은 아무도 없다더니 과연. 매화가 핀 봄날. 갇힌 수인들에게는 쬐끔 미안하지만서도 자유로운 바깥출입과 맛난 봄쑥국이여. 알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주꾸미하며 벗들과 보리개떡이라도 나눠먹는 화전놀이. 세상은 살 만하고 별빛은 눈부셔라. 꽃들은 봄이라고 목이 메게 소리를 지르는 표정. 새들도 지금은 봄이라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댄다. 아이고 알았다고. 밖에 나가보마. 미세먼지가 무서워도 발길을 자주 바깥으로 내디디며 살아간다.

이 세월을 용기내어 살아가자고, 힘들어도 웃고 살자면서 친구에게 전화로 속삭이듯 당신에게 뻔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잔소리가 바로 사랑이니깐. 작가는 잔소리꾼. 소리꾼 명창보다 더 센 잔소리꾼. 작가가 말을 아끼면 어떻게 될까. 작가는 글쟁이 말쟁이인데. “그런데 말입니다” 계속 발언을 이어갈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이. “맞습니다 맞고요.” 내 자신이 나라인 공화국에서는 누구도 주눅들 까닭이 없지.

덮으려고 쉬쉬하다 보면 문제만 더 커질 뿐. 마을에선 온갖 소문들이 무성해. 그중엔 물론 엉터리 소문도 있곤 해. 하지만 말이 없는 쥐죽은 듯한 마을은 활기가 없음은 물론이고 마을 기능을 벌써 상실한 상태. 마을에 한명쯤 ‘떠버리’가 있어야 만남자리도 재미지고 구수하다. 이러구러 사연이 많고, 사연 보따리를 풀어내는 사람은 친근하고 정이 가지. 여기서 아재개그 하나. 가수 노사연씨는 사연이 없어서 노사연일까. 연예계는 자고로 사연, 스캔들이지. 스캔들이 없으면 재미도 뚝. 정치도 연예계나 다를 바 없어 허망하고 구질 맞은 소문들이 피어나기도 하고 그러는 동네인가. 이야기의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진실이여, 너 반갑다. 현란한 ‘혀 작동’ 사기꾼들과 애정 많은 잔소리꾼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성숙해진 우리 동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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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대항해시대, 지리적 발견을 가능하게 한 것은 마젤란, 콜럼버스 등으로 대표되는 모험가의 목숨 건 도전이 아니었다.

배가 안전하게 더 멀리 갈 수 있었던 것은 온도계의 발명 덕분이다. 17세기 초, 기초적인 온도계가 발명됐고 18세기 들어 온도를 보다 세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됐다. 항해사들은 이를 이용해 해수 온도를 잴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던 해도에 온도가 다른 해류의 흐름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배들은 보다 멀리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과학사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 측정기술의 발달은 세계관을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놓는다.

메이저리그는 지난겨울 ‘혹독한 구조조정기’를 겪었다. 이전까지 자유계약선수(FA)라는 수식어는 ‘비싼 몸값’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지난겨울은 달랐다. 30대 초중반의 FA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FA 최대어 중 하나였던 3루수 마이크 무스타커스(30)는 소속구단 캔자스시티의 퀄리파잉오퍼(1년 1740만달러)를 거절했다. 퀄리파잉오퍼란 메이저리그에서 FA들의 보상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장치다. 선수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FA 자격을 얻고, 원소속팀은 이듬해 신인 드래프트 때 보상 지명권을 받는다.

무스타커스는 홈런을 38개나 때렸다. FA 시장 전문가들은 적어도 5~6년에 8000만~1억달러 정도의 대형 계약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무스타커스를 원하는 구단이 없었다. 무스타커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친정팀 캔자스시티와 1년 650만달러에 계약했다. 퀄리파잉오퍼 금액보다 1000만달러 이상 줄어든 것은 물론, 직전 시즌 연봉(870만달러)보다도 220만달러가 깎였다. 이 밖에도 수많은 FA들이 찬밥 신세가 됐다. 당황한 메이저리그 선수노조는 플로리다에 ‘실업자 FA’를 위한 스프링캠프 무대를 마련했다. 이들은 이름 없는 유니폼을 입고 외인구단처럼 훈련했다.

메이저리그는 더 어린 선수들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2017시즌 메이저리그 홈런은 모두 6105개였다. ‘약물의 시대’였던 2000년의 5693개보다 더 많았다. 젊은 선수들의 힘이었다. 2000년 대비 2017년 기록에서 25세 이하 선수들이 때린 홈런 숫자 비율이 무려 55%나 늘었다. 25세 이하 젊은 선수들은 점점 더 빨라지는 투수들의 공에 반응할 힘과 순발력을 지녔다. 부상 위험은 나이와 비례한다. 젊은 야수들의 부상 위험성은 베테랑보다 적다. 무엇보다 FA 자격을 얻기 전이어서 몸값이 싸다.

유일한 약점은 ‘경험’이다. 베테랑들은 오랜 경기 경험을 바탕으로 슬럼프를 빠져나가는 노하우를 지녔다. 상대의 허를 찌를 줄도 안다. 어떤 상황에서 투수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구단들은 베테랑들의 경험을 평가절하했다.

측정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선수의 능력 판단은 ‘눈’과 ‘감’에 의존했다. 공끝의 힘이 떨어졌다는 판단은 감독·코치의 눈과 포수가 가진 손의 느낌이 했다. 이제 메이저리그 30개 구장에 레이더가 설치됐다. 눈이 보지 못하는 100분의 1초 동안 몇 ㎜의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 류현진이 올 시즌 커브의 회전수를 분당 2400회에서 2600회 이상으로 끌어올리려 시도하는 것도 레이더의 측정 때문에 가능했다.

베테랑 홀대, 젊은 선수 우대라는 결정은 수년간 쌓인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측정 데이터가 베테랑의 경험을 대신할 수 있게 됐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야구의 세계관이 바뀌었다. 100년 넘게 야구를 지배했던 느낌과 감은 새로운 측정기술과 그에 따른 데이터가 대체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옛날에 해봤더니”라는 말은 더 이상 소용없다는 뜻이다. 청춘들을 향한 “너희들이 뭘 알아”라는 말도 유효기간이 끝났다. 정작 뭘 모르는 건, 우리 어른들이다. 오랜 영화 제목처럼, 더 이상 경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스포츠부 ㅣ 이용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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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 35인이 모였다. 몇몇을 빼면 서로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사람이 모일 때는 대개 이유가 있다.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거나, 나눌 이익이 있거나, 짝이 필요하거나,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떠한 공통점도 없고, 나눌 만한 이익도 없으며, 신상 정보 또한 모르는 35인은 제주도 성산에 모여 2박3일을 보내게 됐다. 이 시간의 이름은 ‘낯선 컨퍼런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다시 열렸다.

<낯선 사람 효과>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강한 연결’과 ‘약한 연결’로 나눈다. 전자가 가족, 친구, 동료라면 후자는 낯선 사람, 뜸하게 아는 사람 등 ‘지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그룹이다. 이 책은 강한 연결보다 약한 연결을 통해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한다. ‘낯선 컨퍼런스’는 이 책의 제목과 내용에서 이름을 빌려 온 행사다.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의 저자들이 진행하는 것도 아니니, 말하자면 그 이론을 검증해보려는 일종의 실험인 셈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스태프로 참여, 초기 기획부터 진행을 함께했다.

참가 인원을 60명에서 35명으로 줄였다. 2박3일 동안 인사도 한 번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다른 기본적인 원칙은 같았다. 첫 번째, 장소는 제주도다. 광화문이나 테헤란로 등 일상의 지역에서 행사를 갖게 되면 사람을 만날 때도 관성적이 된다. 비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일상을 단절하되, 여권이 필요없는 제주도는 그래서 ‘약한 연결’의 낯선 공간이다. 두 번째, 참가자를 신청이 아닌 초대로 모집한다. 실제로 만났던 사람이건,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던 사람이건 상관없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면 된다. 초대장엔 이렇게 썼다. “ ‘낯선 컨퍼런스’는 형식보다 내용을 고민합니다. 2박3일의 느슨한 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매뉴얼에 담긴 인사이트가 아닌, 각자의 삶에서 터득한 경험과 생각을 나눕니다. 엄선된 호기심으로 초청된 낯선 사람들의 수다로 각자의 물음표를 섞으려 합니다. 2박3일이 지났을 때 서울에서의 물음표가 제주에서의 느낌표로 바뀌길 희망합니다.” 이런 애매모호한 글을 보고 35명이 항공권을 끊고 적지 않은 참가비를 냈다. 그리고 지난 23일, 성산 플레이스 캠프에 낯선 사람들이 모였다.

1인당 3분씩의 자기 소개 시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다. 철제가구를 만드는 이, 베개를 만드는 이, 숙취해소제를 만드는 이, 파티를 만드는 이… 이름을 걸고 유무형의 무엇을 창조하는 이들의 소개가 이어지는 동안 작은 탄식이 일었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놀라움, 저런 사람 만나고 싶었다는 발견의 기쁨이 어우러지는 탄식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인사의 내용은 참신했다. 한국인의 인사법인 호구조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소개에서 알게 된 간략한 정보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각자의 세계 속으로 훅훅 들어갔다. 생전 만나본 적 없는 직업군의 사람들이 여러 프로그램을 거치며 밀도있는 관계로 나아갔다. 행사가 끝날 무렵,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이나 직장의 워크숍과는 비교할 수 없는 친밀감이 그들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사람과 마주칠 만큼 마주쳐온 그들이다. 지칠 만큼 지쳐온 그들이다. 이 35개의 세계는 어떻게 이토록 가까워졌을까. 강하지도 흐릿하지도 않은 낯선 호기심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로서의 삶을 지향해왔던 이들이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동인이 진심의 교환으로 바로 이어질 수야 없을 테지만 그 지점으로 향하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오프라인에서 쉬이 자신을 드러낼 수 없고, 온라인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온갖 분쟁들에 지쳐가는 지금, 새로운 관계의 활력을 만끽할 기회가 흔한 건 아니니 말이다. 처음 듣고 꽂히는 음악이 있다. 첫술에 침이 솟구치는 음식이 있다. 늘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음악과 음식 같은 사람들에 굶주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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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정봉주 전 의원이 28일 ‘거짓 해명’을 시인하고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했다. 의혹을 보도한 기자들에 대한 고소도 취소했다. 피해자가 성추행 발생일로 지목한 2011년 12월23일 서울 렉싱턴호텔에 간 적이 없다고 주장해왔지만, 당일 자신의 신용카드가 해당 호텔에서 사용된 기록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정 전 의원은 그러나 성추행에 대해선 “기억이 전혀 없다”며 끝까지 발뺌했다. 뻔뻔하고 무책임한 모습에 말문이 막힌다.

정봉주 전 의원이 27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관련 의혹 제기로 기소됐던 사건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힌 후 정론관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이 성추행 의혹을 보도한 뒤 정 전 의원이 보인 행태는 가관이다. 그는 수차례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당일 해당 호텔에 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저격”이라며 음모론을 제기하고, 기사 쓴 기자들을 고소했다. 일부 지지자들은 피해자의 ‘익명 미투’를 문제 삼는 등 2차 가해를 일삼았다. 심지어 엉뚱한 사람을 피해자로 지목하고 신상털이에 나서기도 했다. 결국 피해자는 자신의 미투가 가짜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언론 앞에 나서야 했다.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 전 의원이 정치활동을 접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진실을 털어놓고 피해자에게 진정성 있는 사죄를 하는 게 우선이다. 모든 법적 책임을 져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저지른 사람들도 자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공정성 논란에 휘말린 SBS &lt;김어준의 블랙하우스&gt; 측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진실규명에 혼선을 야기했다”고 밝힌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정봉주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이는 정 전 의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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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28일 발표한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응과 행태는 너무나 충격적이다. 부실 대응과 사후 보고 시간 조작은 물론 비선 실세 최순실씨 개입까지 설마했던 일들이 모두 사실로 확인됐다. 세월호 참사 때 박 전 대통령이 최초 보고받은 것은 구조의 ‘골든타임’(오전 10시17분)을 넘긴 오전 10시20분이었다. 그것도 안봉근 전 부속비서관이 김장수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요청으로 관저 내 침실 앞에서 박 전 대통령을 여러 차례 부른 뒤에야 보고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꽃다운 생명들이 스러져가는 시간에 대통령은 침실에 있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나.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

보고를 받은 뒤 대응은 더 한심했다. 서둘러 집무실로 출근한 게 아니라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10시22분과 10시30분 김 전 실장과 해양경찰청장에게 “단 한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 전부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20~30분 간격으로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했다”고 했지만 실제 보고가 이뤄진 것은 오후와 저녁 두 차례뿐이었다. 거짓말로 은폐한 것이다. 국가 자원을 총동원해 시민의 생명 수호에 절치부심하는 대통령은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최순실씨가 나서서 사후 대응을 주도한 점이다. 최씨는 그날 오후 2시15분쯤 관저로 몰래 들어가 문고리 3인방 및 박 전 대통령과 대책회의를 연 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을 결정했다. 그제야 박 전 대통령과 3인방은 미용사를 부르는 등 준비에 나섰다. 박관천 전 경정이 ‘대한민국 권력 서열 1위가 최순실’이라고 한 것은 허언이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이 ‘사라진 7시간’의 행적을 끝까지 숨겨야 했던 이유가 최씨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러니 박 전 대통령이 최초 보고받은 시간을 오전 10시라고 거짓말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상황일지 등을 조작한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검찰은 허위공문서 작성 등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어 박 전 대통령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헌재는 지난해 3월 박 전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면서 세월호 부실 대응은 파면 사유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이번 수사로 박 전 대통령이 시민의 생명권 보호를 위한 성실한 직무수행 의무를 위반했다는 헌재 보충의견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박근혜는 대통령이 아니었고, 최순실은 단순한 조언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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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대기>라는 책이 있다. 1950년에 출간된 레이 브래드베리의 소설로 에스에프장르의 고전으로 일컬어진다. 스물여섯편의 길고 짧은 소설들이 연작 형태로 구성된 이 소설은 지구인들의 화성 이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에서는 지구의 탐사대가 최초로 화성에 도착하는 것이 1999년으로 되어 있다. 소설을 출간할 당시로 보면 약 50년 후의 미래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는 이미 20년 전의 과거가 되어있다. 그러나 소설의 시점으로 보자.

1999년 화성에 첫발을 내딛고 그 후 정착촌을 건설하게 될 때까지 화성에 도착했던 지구의 탐사대원들은 그리 운이 좋지 못했다. 초대받지 않은 지구인의 방문을 침입이라고 여긴 화성인들이 그들을 오해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반면 탐사대원들이 바란 것은 화성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이해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단 한마디, 환영한다는 인사를 듣는 것. 이 먼 곳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는 위로를 받는 것. 불행히도 탐사대원들은 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그 결과 목숨까지 잃는다. 그 탐사대원들이 화성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이렇다.

“우리는 지구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지구에서 왔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소설 속 대사는 아이러니하다. 거대한 세계가 조우했을 때 가장 큰 난관은 서로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화성이 아니라 다른 별이더라도, 그 다른 별에 생명체 같은 것은 없다하더라도, 이 두 개의 거대한 세계가 만난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존재방식을 이해한다는 뜻일 터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충돌이거나 파국이다.

<화성 연대기>의 파국은 좀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네번째 탐사대가 화성에 도착했을 때 화성은 이미 죽은 별이나 다름없었다. 번번이 화성인들에게 몰살을 당했던 지구 탐사대원들은 엉뚱한 방식으로 복수를 한 셈이었는데, 그들이 본의 아니게 퍼뜨린 병원균이 화성인들을 거의 전멸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병원균은 수두였다. 지구에서는 ‘어린아이도 못 죽이는’ 그 수두 병원균은 화성 전체를 무너뜨려버렸다. 그리하여 화성은 거대한 무덤, 역사와 문명과 예술의 기록으로만 남은 무덤이 되어버렸다.

‘달은 지금도 환히 빛나건만’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이 4차 탐험대의 화성탐사기는 세계종말의 비극적인 서사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두 개의 달이 비추는 화성이나 한 개의 달밖에 없는 지구거나 종말은 같다. 탐사대의 일원인 스팬더는 화성의 종말을 목도한 후 그 슬픔과 공허함에 홀려버린다. 지구인이 화성에 오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정착하기 시작한다면, 화성은 영원히 이렇게 죽은 별이 될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다른 별을 죽이면서까지 지구가 끝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그 대답을 내릴 수 없었다. 자신의 별조차 전쟁과 부패와 편견과 갈등으로 거의 다 죽여놓고는 이제 와서 대신 다른 별을 꿈꾸는 지구가, 그 지구의 사람들이 스팬더는 역겨웠다. 그래서 스팬더는 지구인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마지막 화성인이 될 것을 선택한다. 장엄하고, 공허하고, 슬픈 서사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70년 전, 아직 어떤 우주선도 화성 궤도에조차 진입하지 못했던 때에, 한 소설가의 상상력은 우주로 뻗어나가는 희망 대신 이렇듯 슬픔에 주목했다. 물론 이 소설의 스물여섯편 짧은 얘기들 중에는 화성에서 농사에 성공하는 인물의 분투가 나오고, 화성 최초로 핫도그 가판대를 여는 인물도 나온다. 일상은 어쨌든 어디에서나 흘러가기 마련이고 그 일상에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또 역사가 된다.

스티븐 호킹 박사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후,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의 책이 대출 중이었다. 과학계에, 그토록 어려운 영역에, 대중적인 유명인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스타가 됐지만 우리가 상대성이론을 알게 된 건 아인슈타인이 스타였기 때문이다. 공간이 접히고, 시간은 절대성의 영역을 벗어나고,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없고…. 기타 등등…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일까. 물론 알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상대성이론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그 단어만이라도 말이다.

호킹의 대중물리학 책들은 워낙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학의 물자도 모르지만 호킹을 통해 블랙홀이라는 단어에 친숙해지고, 다중우주니 평행우주니 하는 말을 배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책은 못 읽었더라도 호킹이 등장하는 기사라도 읽었을 것이다. 아무리 쉽게 쓰인 책이라도 책은 어렵지만, 기사는 쉽다. 실질적인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짧은 기사에 ‘천문학적’인 내용이 담길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기는 하다.

호킹이 지구 종말을 경고하면서 화성으로의 이주를 대안으로 내놨다는 기사는 충격적이면서도 익숙하게 여겨진다. 물리학이나 천문학에서보다 영화나 소설에서 더 많이 그런 상황을 보여주었고, 그 우주는 진짜가 아님에도 더 진짜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보다 더 진짜인 것도 있을 것이다. 좋은 예술작품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의 내부를 보여주는 것이니.

<화성 연대기>는 전쟁이 일어난 지구로 화성 정착민들이 모두 돌아가 버린 후, 마지막으로 화성에 남겨진 두 지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독한 지구인, 고독한 별의 모습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고독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구는 여전히, 영원히 온갖 문제의 근원이다. 지구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우주전파를 통해 전해져오기도 전에 정착민들은 하늘에서 불타는 지구를 봤다. 그들의 어머니 별, 그들의 존재의 근원이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전쟁이면 별을 다 불태울 정도였을까.

화성 이주가 지구 종말을 대비한 대안이라는 기사 밑에 달린 댓글들도 봤는데, 그 내용들이 대개 이랬다. 지구나 잘 보살피기를. 그 말에 빈정거림이 느껴진다면, 이렇게 고쳐서 말하고 싶다. 지구를 잘 보살피기를.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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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에는 자기 집의 주차장에서 골목길을 거쳐서 일반도로로, 고속도로로, 목적지 주차장까지 모든 지역에 대해서 다 완전 자율주행차 상용화가 가능하도록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2월2일 고속도로에서 자율주행차 시승 행사를 마친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세계 정상 가운데 고속도로에서 자율차를 탑승한 것은 제가 처음”이라며 자율주행차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정부가 선정한 ‘4차 산업혁명’ 선도사업인 자율주행차 발전을 위해 “국가가 모든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됐다”고도 했다. 자율주행을 통해 ‘교통사고 제로시대’가 올 거라는 대담한 전망도 내놓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3월18일 발생한 사고 소식은 자율주행차의 미래를 아직 낙관할 수 없게 만든다. 맑은 날 밤 10시쯤 시속 60㎞ 정도로 달리던 우버의 자율주행 시험차량이 자전거를 끌고 도로를 건너던 보행자를 ‘발견’하지 못한 채 충돌하고 말았다. 이는 보행자가 자율주행차에 치여 사망한 첫 번째 사고로 기록되었다.

이 사고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자율주행차의 미래 혹은 미래의 교통체계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달라진다. 가장 직접적인 반응은 자율주행 ‘기술’이 아직 불완전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자율주행차에 탑재된 라이다(LIDAR) 장치가 어두운 곳에서도 보행자를 쉽게 인식할 수 있는데도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람처럼 지치거나 한눈팔지 않고, 항상 부지런하고 정확하게 전후좌우를 살핀다는 자율주행차 센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고 조사 결과를 기다려보아야 할 사안이다.

두 번째 반응은 우버의 자율주행 시험차량 운전석에 타고 있던 ‘안전 운전자’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다. 지역 경찰이 공개한 영상에 따르면 사고 당시 이 운전자는 전방을 주시하지 않았고 빠르게 운전대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하지 않았다. 오작동이나 긴급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안전 운전자’의 역할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자율주행차 시험운행을 담당하는 사람의 자격요건이나 관리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사고가 왜 애리조나주에서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2015년 이후 애리조나 주정부가 규제 완화를 약속하며 자율주행차 기업들을 애리조나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지적했다. 애리조나 주지사는 자율주행차에 대한 ‘규제 프리’ 정책을 강하게 내세우며 기업을 찾아다녔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이번에 사고를 낸 우버만이 아니라 웨이모, 리프트, GM 등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많은 기업이 애리조나에서 수백대의 자율주행차량을 운행해왔다.

결국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 대신에 애리조나주가 ‘자율주행차의 유토피아’로 등장했다. 애리조나에서 우버는 자율주행 시험 중 사람이 운전대를 넘겨받아야 했던 횟수 등을 당국에 보고할 의무가 없었다. 운전석에 사람이 앉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무인 자율주행 시험도 시작할 수 있었다. 애리조나주 전체가 우버를 위한 자유롭고 공개적인 테스트베드가 되었다.

애리조나주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으로 생긴 ‘규제 진공’ 상태에서 우버는 최대한 빨리 성과를 내려고 애를 썼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자율주행 시험 거리를 빠르게 늘리고 상용화를 위한 발판을 만들려는 과정에서 우버는 작년 말 자율주행 시험 차량에 타는 사람을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였다. 한 명이 컴퓨터 시스템을 관찰하고 다른 한 명이 비상시 운전대를 잡도록 나누었던 역할을 한 명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럴 경우 혼자서 장시간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당연한 우려가 회사 내부에서 있었다. 자율주행 시험 중 우버의 안전 운전자가 졸거나 딴짓을 하다가 걸리는 일도 있었다.

애리조나주가 이번 사고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가 자율주행차라는 ‘혁신’을 위해 안전 규제를 적극적으로 없애온 애리조나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자율주행차는 지금보다 더 안전해질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기업, 규제기관, 운전자, 보행자의 입장이 어떻게 조율되는지에 따라 자율주행 교통체계의 미래가 크게 달라진다. 이미 자율주행 혁신가들을 전적으로 칭송하고 지원하는 ‘기울어진 도로’에서는 보행자가 안심하고 길을 다닐 권리를 요구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교통 기술과 정책의 중심이 점점 보행자가 아닌 자율주행차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약속한 범정부적 차원의 노력을 자율주행차 상용화뿐만 아니라 보행자 안전에 투입하면 어떤 미래가 가능할까. 보행자 문제를 자율주행차 상용화 과정의 실수나 골칫거리로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율주행 기술을 보행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범정부적 대책 중 하나로 삼으면 어떻게 될까. 보행자가 마음 놓고 걸어다닐 수 있는 교통 시스템은 무엇이며, 자율주행차는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를 고민한다면 더 놀라운 혁신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문 대통령이 2030년 자율주행차 상용화 약속을 꼭 지킬 필요는 없다. 정부와 업계가 함께 만들어 제시해야 하는 것은 안전의 약속이다. 규제가 없어야 혁신을 하고,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교통사고 제로시대’가 되어 안전해질 수 있다는 말은 너무 달콤해서 믿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과 규제를 마련해서 혁신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이룰지 토론해야 한다.

자율주행차 조수석에 앉은 문 대통령은 운전자에게 “조마조마 안 해요?”라고 물었다. 뒷좌석에는 자율주행차 개발팀장인 현대자동차 이진우 상무가 앉아 있었다. 그 차에 탄 사람들 모두에게 자율주행은 매력적인 동시에 어렵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을 옆에 태우고 긴장한 운전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전치형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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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말의 지배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성질 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종족이 답답하고 ‘비효율’적인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그렇지 않았을 때 벌어졌던 일들에서 힘겹게 얻은 교훈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이 방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현실이 정말로 그런가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긍정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삶속에서 말보다는 돈과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사무치게 느낀다. 힘과 돈이 있는 이들은 말을 무시하고, 그게 없어서 말의 무력함을 체감한 이들은 말을 증오한다. 

그리고 이 무시와 체감이 광범위하게 일어날수록 말은 더 무력해진다.

여기에서 탄생한 아주 곤란한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듣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어떤 합리적 논거와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듣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이미 정해진 답이 있다. 그 답은 이성이 아니라 믿음의 보호를 받는다. 만약 반박하기 어려운 사실들에 의해 그 답이 흔들린다면 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거부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택한다.

물론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면모들이 있다. 실제로 최근의 연구들은 사람이 이성에 의해서 판단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먼저하고 이성으로 빈 곳을 채운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하지만 듣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는 이런 수준을 벗어난다. 지구가 평평하다거나, 공룡이 인류와 함께 살았다거나, 백신을 맞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 증거들에 의해서 배제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차별받고 있지 않다거나, 페미니즘이 ‘반사회적 사상’이라거나, 동성애는 죄악 혹은 질병이며, 좌파의 음모가 죄 없는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다는 주장들도 그렇다. 특히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정신승리, 가짜뉴스, 대안현실, 행복회로를 통해서 주말마다 광화문광장에 일종의 평행우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성차별주의와 반공주의와 보수기독교의 만남이 끼치는 해악은 점점 더 심각해지는 중이다. 이들이 잘못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적 약자들과 동료시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군가를 제거하고, 입막음하고, 굴복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뒤틀린 희망을 품고 있다.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대신, 만만해 보이는 무언가에 모든 것을 전가하기를 택한 것이다. 이들이 세상을 다시 거꾸로 돌릴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골치 아픈 문제는, 이들의 바람이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손쉽게 제거하거나 추방함으로써 해결하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화나 타협은 더 어려워 보이는 이들과 어떤 방식으로 맞설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두 개의 층위에 걸쳐져 있다. 하나는 옳고 그름의 문제다. 이들이 전파하는 잘못된 사실과 지식들에 맞서, 진실을 공유하고 지켜내는 일이다. 단순히 교과서에 싣고 시험에 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토론하고, 체화함으로써 공통의 진실로 만들어 내야 한다. 합리적인 의문에 닫혀있는 진실일수록 얼토당토않은 거짓들 앞에서 흔들리기 쉽다. 다른 하나는 실존의 차원이다. 말에 대한 무시와 증오를 만들어 내는 조건들에 대한 개입이다. 힘과 돈을 가진 이들에게는 의무와 감시를, 그것이 없었던 이들에게는 말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혹여 누군가를 격리하거나 처벌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잘못된 의견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끼치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점령군의 보복이 아니라 사람들을 보호하는 정의에 입각한 결정이어야 한다.

듣지 않는 자들과의 싸움은 아마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영원한 시험이자 실험이다. 지치거나 환멸에 빠지지 않으면서 이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그래서 그야말로 인간다운 승리를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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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데가 있어.”

고교 시절 단짝친구와 이유 없이 멀어졌던 적이 있다. 그 나이에 흔히 그렇듯 우리는 관계에 예민했고, 나는 애착은 강하면서 그걸 표현할 자신감은 갖지 못했던 아이였다. 불안한 표정으로 애써 말을 이어가려던 내게 친구는 저렇게 말했다. 왜 질렸는지, 어떻게 하면 다시 질리지 않게 되는지는 몰랐다. “왜”라는 질문에 친구 표정은 얼음처럼 단단해질 뿐이었다. 난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애를 질리게 만든 스스로가 싫었다. 어색해진 웃음과 문어체 말들은 상대에게 가닿지 못한 채 용수철처럼 튕겨 나왔다.

스무 살이 되고 스물한 살이 돼서도 패턴은 반복되었다. 의식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그냥 잘 웃고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특정한 관계에선 태엽장치처럼 어느 지점에 이르러 그렇게 되었다. 지금도 이따금 예상 못한 순간, 냉랭해진 친구 언저리를 서성이던 열여덟의 장면들이 삶에서 재현될 때가 있다. 그새 이십여년을 더 살아내었다 하여 무뎌지거나 현명해지진 않는 것인지 이십년치 기억이 소금처럼 덧뿌려져 고통은 배가되곤 한다.

유년기 교우관계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해낸 <우리들>(윤가은 감독·2015)이란 영화가 있다. 극중 외톨이 선이는 전학생 지아와 벗이 되어 생애 가장 즐거운 방학을 보내지만, 개학 후 선이가 따돌림당하는 아이임을 알게 된 지아는 그녀에게 곁을 둔다. 친구 눈치를 살피던 선이가 “너 나한테 화난 거 있어?”라 조심스레 묻는 장면을 보던 중, 문득 기억 저편에서 그 말이 가시처럼 돋아 마음을 찔렀다. 넌 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데가 있어.

사실 영화 속 선이와 달리 난 학창 시절 외톨이는 아니었다. 급우들과 그럭저럭 잘 지냈고, 예뻐하는 학생들 일으켜 세워 괴롭히던 어느 선생님께 매를 맞고서 ‘불쌍해서 내가 그냥 맞아줬다’며 쉬는 시간에 친구와 농담할 만큼 학교생활에 별달리 맺힌 감정도 없었다. 말하자면 상흔이랄 만한 아픔을 겪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한 친구와 감정의 엇갈림을 한 번 경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 기억에 이제껏 매여 있던 것일까. 어쩌면 이는 관계에 서툰 스스로를 위한 변명 아니었을까. 예전에도 그랬었다고, 이번에 또 그랬다고, 그러니 앞으로도 이럴 거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상흔이 날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기연민의 고치를 만들어 거기 숨고자 내 쪽에서 아픔을 붙잡고 되새김질하였던 셈이다.

지아는 선이에게 있어 강자였고 가해자였겠지만, 교실공동체나 자기 삶의 조건들 안에서는 선이보다도 약자이고 피해자였다. 애달픈 친구 마음을 헤아려주기에 지아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컸듯, 어릴 적 내 친구에게도 모종의 고민과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나와 나누고 싶지 않던, 혹은 더는 나눌 수 없던. 이상하게 그 시절이 그토록 생생한데도 이에 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당시 ‘나를 질려하는 친구’를 찬찬히 살피는 대신 ‘친구가 질려하는 나’를 맹렬히 미워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일 테다. 요컨대 궁극적 관심대상은 상대가 아닌 스스로였던 것이다.

한 애니메이션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고슴도치는 가까워지고 싶어 다가서다 상대를 찌르고 자기도 피를 흘린다고, 성장한다는 것은 찌르지 않을 안전거리를 가늠하여 유지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내면에 가시 많은 자는 상처입(히)지 않기 위해 누구한테나 항상 감정의 평행선을 유지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음을, 아니, 그럴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인간이란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모두에게 피상적으로 상냥한 얼굴 내보임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쓴다 하여 당장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안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내일도 모레도 어제와 그저께 그랬듯 누군가를 질리게 만들고, 반복되었음을 아파하며 자책하겠지. 그러고도 그 다음 장면에서는 다시 마음 열 수 있으면 좋겠다. 나와 선이와 우리들이 ‘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데가 있어’도 자기 안에 그대로 갇히진 않기를. 부서지고 깨어지고 가시 박히면서 서로 사랑하려 다가감을 멈추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소영 |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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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고위급이 27일 중국을 방문했다. 최고위급이 누군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중국의 철저한 보안과 경호로 미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 추정된다. 누가 됐든 역사적인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최고위급이 중국을 방문해 북·중관계와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북·중 사이의 관계개선이 이뤄지는 것은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에 긍정적인 신호다.

한반도 정세 진전을 위해서는 주변국의 지지와 협조가 필수적이다. 특히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중국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환영했으나 북핵 등 한반도 문제에서 소외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할 수 있다. 동북아 정세에 영향력이 큰 중국의 우려가 불식되지 않으면 현재 진행 중인 한반도 상황의 개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북·중관계 개선은 이런 중국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고 한반도 정세 진전 작업의 협조 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

북·중관계는 김정일 시기까지는 혈맹 수준이었지만 김정은 집권 이후에는 계속 악화돼 왔다. 한반도 비핵화를 원하는 중국의 바람과는 달리 북한이 핵개발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국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대열에 적극 가담하면서 사이가 더 벌어졌다. 양국은 언론을 통해 서로를 비방하더니 급기야 지난해 말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가 김 위원장을 만나지 못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럼에도 북한과 중국 모두 관계 정상화를 원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고강도 대북 제재로 북한 경제 상황이 악화된 점을 고려할 때 중국의 지원은 절실하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담판을 앞둔 김 위원장에게 중국만 한 버팀목도 없다. 중국 역시 북한과의 관계 복원을 통해 동북아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유지, 확대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사단에 비핵화 의지를 밝힌 만큼 북·중관계 개선의 여건도 조성된 상태다. 이는 시 주석이 지금까지 내건 북·중관계 복원의 조건에 부합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혹은 측근을 통해 시 주석에게 이런 입장을 전달했다면 북·중 정상회담 개최의 장애물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구축은 단 한 번의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개최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담이 성공적이었다 해도 평화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그 과정에서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의 협조도 필요하다. 북·중관계 개선 움직임이 북·일, 북·러 관계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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