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가 횡행한 시대를 겪었다. 인종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 집단을 절멸시킨 역사가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시리아의 내전과 난민, 그리고 올해로 70년을 맞이하는 제주 4·3도 그랬다. 제노사이드는 범죄다. 그 시기, ‘보편적이고 궁극적 가치로서의 인간 존엄’을 지키는 일은 시대정신이었다. 제노사이드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인간에 의한 바이오사이드(biocide·생명학살)도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단 며칠을 위한 가리왕산 10만 그루 벌목, 생명의 이동을 막는 4대강 16개의 댐, 골프장과 리조트를 위해 파헤친 제주 곶자왈, 웅담을 목적으로 사육하는 철창 안 반달가슴곰, 정상 정복의 욕망에 희생되는 국립공원 핵심지역의 경우가 그렇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은 바이오사이드를 거부하며 인권을 넘어 생명과의 공존을 요청한다.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1987년 개헌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헌법은 시대의 변화와 국민의 뜻을 오롯이 투영하지 못했다. 국민주권 실현을 위한 직접민주제 도입, 평등권 강화, 기본권 신설, 사회권 확대, 사법 절차적 권리 강화 등 주요 과제가 쌓였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녹색 개헌’이다. 자연의 권리, 환경과 생명존중의 가치를 국가의 최상위법이자 기본법의 질서로 명명하고, 지구 공존을 위한 녹색 사회를 세우는 일이다.

헌법 제35조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는 인간중심적인 협소한 개념이다. 현행 환경권은 1980년 개헌에 언급된 이후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보다 포괄적으로 시대정신에 부합하도록 환경권을 확장해야 한다. 헌법 전문에 국가의 이념과 지향으로서 ‘환경과 생명존중의 가치’를 선언하는 건 어떨까. 헌법의 원리로서 환경국가를, 그리고 국가 운영원리로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과 지속가능성을 승인하자는 제안이다. 이를 실행할 국가기구로 기존의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의 설치를 헌법으로 규정할 수 있다.

에콰도르 헌법, 멕시코시티 주 헌법은 ‘자연의 권리’를 담고 있다. 뉴질랜드는 세계 최초로 강의 지위를 인간의 위상과 동등하게 법률로 인정했다. 2009년 유엔총회는 4월22일을 ‘지구의날’로 선포하고 ‘지구의 권리에 관한 선언’을 촉구했다.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과 지속가능성도 국제사회가 지구 공존을 위해 약속한 일이다. 1987년 유엔이 발간한 ‘우리 공동의 미래’는 ‘지속가능발전’ 개념을 사회 발전의 원리로 제안한다. 1992년 리우환경회의는 기후변화협약, 생물다양성협약 등을 채택하고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선언’을 통해 지속가능발전과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명시했다. 2015년 유엔총회는 17개 목표와 169개 세부목표로 구성된 ‘지속가능발전목표’를 발표했다.

내일,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개헌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자연의 권리,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 지속가능성은 공존과 공생을 위한 시대적 요청이다. 개정 헌법은 녹색 가치를 반영한 ‘녹색 헌법’이어야 한다. 자연 생태계를 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시대는 끝났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자연자원 고갈을 멈추자. 생명을 위협하는 방사능과 유해 화학물질로부터 인간과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자. 인간 존엄은 자연의 권리를 인정할 때 비로소 지켜지고 확장된다.

<윤상훈 | 녹색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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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활동이 잦아지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운전을 하고 가다보면 도로상에 터널이 종종 나오게 된다. 터널은 일반도로보다 교통사고 위험이 높아 안전운전에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구간으로 터널 주행 시 안전운전을 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밝은 곳을 달리다 터널에 진입한 직후 잠시 사물인식이 어려워지는 블랙홀 현상과, 시야가 터널 내부의 어두운 환경에 순응되어 있는 상태로 터널을 빠져나갈 때 터널 외부 배경으로 강한 눈부심이 동반되는 화이트홀 현상으로 인해 눈의 적응과 시력회복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터널 안 선글라스 착용은 삼가야 한다. 또한 터널 진입 전 미리 전조등을 켜고 운행하는 습관을 길러 다른 운전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도록 하자.

둘째, 터널은 공간이 좁아 보통 도로보다 공기저항의 영향을 더 받기 때문에 차로 변경 시 더 많은 흔들림이 있고 속도를 조절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터널 안에서는 절대 다른 차량을 추월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터널 안은 운전자의 시야 확보가 용이하지 않고 급제동도 위험하기 때문에 반드시 감속운행을 하고 앞차와의 간격도 100m 정도로 충분하게 두어 사고를 예방해야 한다.

넷째, 터널 내 사고 발생 시 신속하게 갓길에 주차한 뒤 비상등을 켠 채 대피하고 사고 초기에는 50m 간격으로 설치된 비상벨로 외부에 사고를 알림으로써 2차 사고를 막아야 한다.

터널 안 사고는 대형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안전운전을 반드시 생활화해야 한다.

<박정민 | 원주경찰서 수사과 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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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 바람을 타고 시작된 시리아 내 평화적 시위는 정부에 대한 분노에서 정부군 대 반군의 전쟁으로, 종파의 전쟁으로, 패권의 전쟁으로 그리고 이와 얽힌 국제 세력들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2011년 3월부터 현재까지 2만7000여명의 아동이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20만명 이상의 아이들은 포위 공격을 받는 지역에 갇혀 살고 있으며 아동의 79%는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다. 전체 시리아 난민의 절반이 아동이고 60% 이상의 5세 미만 아동은 출생이 등록되지 않았다. 난민 아동 중 63%가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장기화된 전쟁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모르고,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는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 매일 총격과 폭격의 공포 속에 살아가는 아이는 살아남기만을 기도하며, 목숨을 걸고 시리아를 떠난 아이는 폭력과 인신매매의 위험에 노출된다. 실향민 또는 난민이 된 아이들은 심각한 영양실조를 앓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어른들이 만든 분쟁 속에서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무고한 아동에 대한 전쟁. 3월15일이면 8년째로 접어드는 시리아 내전은 더 이상 그 어떤 명분으로도 용인될 수 없는 아동에 대한 전쟁이다. 지난 7년 동안 지속된 시리아 내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난민촌 아이들은 신호등을 몰라요. 세상에 코끼리나 돼지 같은 동물이 있다는 것도 모르지요. 난민촌에서는 정착을 막기 위해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고 있어서 씨앗을 심으면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순리도 가르치기가 쉽지 않아요.” 이나스 알파즈는 시리아 긴급구호 교육사업 담당자로서 난민 아동들을 위한 월드비전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아이들이 난민촌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면 과연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적어도 자신이 맡은 아이들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꿈을 안고 오늘도 난민촌으로 향한다.

작은 축구공 하나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또 전쟁이 끝난 후 아이들의 일상을 지켜줄 울타리가 될 것이기에 우리는 이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월드비전은 3월15일부터 시리아 내전을 포함한 분쟁 피해지역 아동들을 보호하기 위한 ‘I AM(아이엠)’ 캠페인을 진행한다. 그 시작으로 월드비전은 얼마 전 동구타 지역의 영속적인 휴전을 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동구타의 현 상황은 민간인과 아동에 대한 명백한 학살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할 곳 없는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다. 우리는 국제사회에 압력과 목소리를 더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동들이 아이다운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분쟁에서 아이들을 지켜주는 당연한 일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나와 당신이다.

<남희경 | 월드비전 옹호·시민참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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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은 그것을 말할 때 통증을 느낀다. 기억이란 게 정신에만 저장된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이 과거를 불러오는 것처럼 몸도 과거를 불러온다. 그리고 정신이 그때를 증언할 때 몸도 그때처럼 아파온다.

유력한 대권 후보인 안희정의 성폭행을 고발한 여성의 얼굴이 그랬다.

그는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막겠다며 대단한 용기를 낸 사람이다. 하지만 TV에 비친 그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고 곧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한마디씩 이어가는 증언이 마른 수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왜 곧바로 고발하지 않았는가. 왜 오랜 시간 그대로 있었는가. 그런 악의적 질문들이 성립할 수 없음을 몸이 보여주었다. 입이 말하는 것과 별개로 몸도 그때의 일을 말했다. 그가 어떤 상태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이다. 몸에 서리가 내린 듯 그는 얼어붙었음에 틀림없다. 증언할 때처럼 창백하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핏기 없이 있었을 것이다. 왜 그날을 반복해서 당했느냐고? 정신이 그날을 떠올리기만 하면 몸도 그날을 떠올리며 얼어붙는데 도대체 어떤 몸으로 저항하고 고발하고 투쟁한단 말인가.

니체는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피로 쓰고 피로 말한 것을 책장을 넘기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책장이나 들춰보고 화면이나 스크롤하는 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에게 하는 말이다. 진리에 베인 적도 없으면서 진리란 날카로운 것이라고 폼을 잡으며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문구용 칼에 베여본 아이도 그것을 기억할 때는 얼굴을 찡그리는데,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무런 통증도 없이 말해왔다.

미투 운동이 한국에서 본격화된 날에도 그랬다. 서지현 검사가 힘겹게 검찰에서 당한 성추행을 고발할 때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되뇌었다. 그래, 검찰, 기자, 교수, 정치인들 털어대면 숱하게 나올 거야. 증언을 지켜보던 나도 아내도 가해자들을 향해 ‘나쁜 놈’이라고 말했지만, 목소리를 떠는 아내와 달리 나는 법전을 펴놓은 판사처럼 차분했다.

성폭력부터 가사노동, 유리천장까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의 실태를 고발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여성이 떠맡고, 여성가구주의 빈곤율은 30%를 넘고, 신입사원 중 여성은 20%에 지나지 않고, 임금은 남성의 60%밖에 받지 못하며, 여성임원은 2% 남짓이다. 인터넷에는 여성비하가 넘쳐나고, 여성은 남성의 사랑하는 아내이거나 연인일 때조차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내가 아는 현실은 이처럼 통계의 현실이고 정보의 현실이며 논리의 현실이다. 이런 부당한 현실을 비난하면서도 나는 왜 부들부들하지 않았는가. 내게 이 부당성은 통계적이고 지적이고 논리적인 부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균적 남성이나 예외적인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이었다. 평균적 남성은 나를 포함하지만 피가 흐르지 않는 추상적 인간이고 예외적 남성은 피는 흐르지만 나와 관계가 없는 외계의 인간이었다. 그러니 나는 통증 없이 현실을 비난할 수 있었고 이런 현실에서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은 끔찍한 성폭력 범죄자가 보통명사로서의 남자가 아니라 고유명사로서 이윤택이고, 오태석이고, 고은이고, 박재동이고, 김기덕이고, 안희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저기서 가해자가 호명될 때마다 내가 그 표정을 알고 목소리를 알고, 어떤 때는 악수까지 나누었던 남자들이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제는 내 주변의 무명인사들까지 호명되고 있다. 이들은 전자발찌가 아니라 명예훈장을 찼던 사람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주변의 칭찬이라도 목에 둘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세상의 훈장과 발찌, 낮과 밤을 바꾸는 폭력을 자행했다.

내 고통은 타인의 것이 될 수 없다고들 한다. 고통이란 너무나 고유한 것이어서 누구도 그 고통을 가져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의 고통을 가지려면 그의 몸을 가져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을 일깨울 수는 있다. 한 사람이 몸서리치며 자신의 과거를 불러낼 때, 비슷한 흉터를 가진 옆 사람도 몸이 떨리는 걸 느낀다. 그의 몸이 과거로 돌아갈 때, 내 몸도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내 몸은 그의 몸에서 일어난 일을 짐작할 수 있고 예감할 수 있다. 여성들의 미투!

그런데 미투의 파장이 내게도 작은 과거 하나를 불러일으킨다. 25년 전, 내가 다니던 학과의 어느 실험실에서 교수가 조교를 성추행한 사건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지금, 교수에게 멱살 잡혔을 때의 감각이 살아난다. 과대표로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글을 하나 붙였을 뿐이다. 내 멱살을 잡으며 이런 놈은 어느 실험실에서도 받으면 안된다고 소리치던 교수가 있었고, 여관에 끌고 간 것도 아닌데 손 좀 만진 것이 뭐가 문제냐고 소리를 질러대는 교수도 있었다. 가해자 교수는 뒤늦은 유죄 선고를 받고 이 땅에 살았고, 해당 조교는 상처만을 안은 채 이 나라를 떠나버렸다.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나 역시 거기 머물 수 없었고 머물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거기를 떠났다.

오늘, 문득 알게 되었다. 미투의 기억은 위드유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충격에 노출되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 소중한 것이 떠오른다는 것. 이제야 현실이 조금 만져진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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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에 살러오고 얼마 안되어 학교 동문회 모임에 나갔다가 퍽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자리에서 십수년 선배 되는 분이 미국 유명 대학에 재학 중인 아들 자랑을 겸해 들려준 이야기였다. “우리 아이가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어쩌다 보니 룸메이트가 백인 여학생이라는 거야. 임시라지만 말이야. ‘문제는 없는 거야?’라고 물었다가 아들한테 창피만 당했네.”

아버지는 평범한 한국인 부모답게 대학생 남녀가 같은 방에서 생활하면 무슨 문제나 생기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걱정의 내용을 알아차린 아들은,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고 했다. “그런 일 없어요. 여자 친구도 아닌데 어떻게 같이 잠을 자요?” 아버지는 말했다. “여기서 자란 아이들은 우리 하고는 참 많이 달라.”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는 나도 ‘청춘 남녀가 한 방을 쓰면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그런 의구심은 차츰 사라졌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딸아이는 ‘보이’들 하고만 주로 놀았다. 4~5학년이 될 때까지 여자 친구가 거의 없었다. 남자 아이들 집에는 수시로 놀러가고 그 집 가족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우리 집에 놀러온 외국인 남자 아이들도 우리 가족과 함께 한국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딸아이는 “여자는 친구로 왜 안 사귀는데?”라는 질문에 정색을 했다. 친구면 친구지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차츰 달라지더니, 고교 진학 후에는 친구의 남녀 비율이 역전되었다. 그래도 남자 친구들은 여전히 많았다.

딸아이의 교우 관계를 지켜보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친구는 그냥 친구일 뿐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친구는 동성이든 이성이든 다를 바가 없다. 대신 연인 관계에 있는 ‘이성 친구’와 ‘이성 사람 친구’는 확실하게 구분한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면서 아이들은 늘 남녀가 함께 놀았다. 남녀가 아니라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이다.

‘사람 친구’와 ‘연인’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딸아이가 ‘남자 사람 친구’ 집에 가서 밤늦게까지 있어도 별 걱정을 하지 않는다. 대학생이 된 지금도 딸아이 방에 고교 시절 ‘남자 사람 절친’이 와서 함께 공부하고 놀다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젊은 남녀가 그렇게 지낸다 한들 문제될 것이 없다.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을 사귀고 대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혀왔기 때문이다.

이성을 남녀로 갈라 구분하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대하고 교유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으니, 청춘 남녀가 기숙사 룸메이트가 되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다.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와중에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들을 아예 피하고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과거 중·고교 때처럼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높은 담장을 치자는 것과 다름없는 발상이다.

이성에 대해 가장 예민한 중·고교 시절, 지금 기성세대는 이성에 대해 배우고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법을 어디서고 배우지 못했다. 나아가 이성과 어울리는 것을 죄악시하는 풍토 속에서 10대를 보냈다.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바 없으니, 미투 운동에 그렇게 용렬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남녀 병사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내무반에서 함께 생활하는 세상인데, 사람이 사람에게 다시 선을 긋고 차별하려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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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이 많다.

별명이 점박이다.

나는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나에겐 까만 마침표가 많다.

복잡한 게 아니라 풍부하게 산다.

문장을 다듬듯 알뜰살뜰 산다.

밤하늘처럼 초롱초롱

추억의 문장이 빛난다.

당신이 주어일수록

더 반짝거린다. 이정록(196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칠성무당벌레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몸은 짧은 달걀 모양이고 몸 전체가 됫박을 엎어놓은 것 같다”라고 설명을 멋지게 해놓았다. 진딧물을 잡아먹고 사는 익충이라는 풀이와 함께. 내 어릴 적 놀던 뒷동산같이 생긴, 언덕같이 생긴 칠성무당벌레.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꼼짝을 않고 죽은 척을 하던 칠성무당벌레. 붉은색 딱지날개에 7개의 검은 점무늬가 있다.

시인은 이 점박이 칠성무당벌레의 생김이 단조롭거나 간단하지 않고 문양과 그것의 멋이 오히려 넉넉하고 많다고 말한다. 몸통이 작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쏟아가며 살림을 규모에 알맞게 꾸려간다고 말한다. 칠성무당벌레가 바라보는 밤하늘에는 밝고 또렷한 별이 옛 추억처럼 언제나 빛난다고 말한다.

둥지의 알 같은 칠성무당벌레. 아기의 꼭 쥔, 조그마한 주먹처럼 걸어가는 칠성무당벌레. 넘어져도 금방 오뚝이처럼 잘도 일어서는 칠성무당벌레. 날아갈 때에는 헬멧을 쓰고 공중으로 신나게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칠성무당벌레.

조금은 어수룩한 듯이 보이지만 누구보다 정이 두텁고 너무나 인간적인 칠성무당벌레. 찾으면 찾을수록 모자라는 점보다는 나은 점과 매력이 더 여럿인 칠성무당벌레. 자세히 보면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사람도 그렇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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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는요, 출근할 때마다 차라리 지금 타고 가는 버스가 사고 나서 병원에 안 가도 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대요, 얼마나 출근하기 싫었으면! 앗, 우리 병원 얘기는 아니고요….” 활기를 띠며 빠르게 말을 쏟아내던 새내기 간호사는 이내 멋쩍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관리자급 간호사의 반응은 결이 달랐다. “행여 관두겠다고 할까봐 요즘은 야단도 못 쳐요. 오히려 신규들 눈치 보며 모시고 사는 걸요.”

얼마 전 대형병원 간호사가 자살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고 이를 놓고 병원 내 ‘태움’문화가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직원상담실이 집계한 전년도 우리 병원 통계를 살펴보면 태움을 시사한 부적응이나 갈등에 관한 상담내용도 일부 감지된다. 혹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이번에 태움에 관한 전반적 원내 설문조사를 진행해 보기로 했다. 질문지를 만드는 모임을 몇 차례 진행하면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병원의 조직문화와 의료인으로서 우리들 직업의 본질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1980년대 병원은 지금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예전 일화가 떠오른다. 응급환자가 발생한 7층으로 이동식 심전도 장비를 들고 뛰던 후배의사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잠시 숨을 돌리는 중에 선배의사 눈에 띄어 그 자리에서 따귀를 맞았다. “너는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계단으로 뛰어올라오지 않고 태평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느냐.”

병원은 생사를 넘나드는 극단적 의료상황이 눈앞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곳이다. 자칫 실수하면 큰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엄중한 세심함과 책임감이 요구되고 팀워크가 강조된다. 또한 업무특성상 상당히 폐쇄적 조직문화를 지니고 있다. 서로만 알아듣는 전문용어와 은어를 사용하고 업무상 알게 된 내용에 대해서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 더욱이 ‘유니폼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유니폼을 입는 여느 곳들처럼 병원 역시 기강이 센 곳 중 하나다. 직능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질감, 일체감,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일사불란이 요구된다. 더디거나 뒤처지는 사람에겐 ‘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는 집단압박이 가해지기도 한다. 사실 압박은 내부로부터뿐 아니라 외부로부터도 일어난다. 거친 입담을 지닌 환자나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흥분하는 내원객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동료애와 내부결속이 더 강조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도제식 교육방식이 한몫을 한다. 즉 선배가 후배에게 술기를 전수해야 배울 수 있고 앞사람에게서 인계를 받아야 뒷사람이 곤란을 겪지 않는 업무방식이다. 그래서 선후배 관계가 깍듯하면서도 돈독하다.

이번 설문조사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주목한 것은 문제를 제기하는 ‘유효채널’에 관한 것이다. 가깝게는 동료에게 토로하는 것에서부터 직속상사나 부서장에게 호소할 수도 있고 직원상담실, 노조사무실, 고충처리위원회, 폭력방지위원회 등 원내 여러 장치를 통해 도움 받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채널에 얼마나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지, 또한 얼마나 실효성 있게 작동하는지에 별도의 점검이 필요하다. 만일 피해나 보복이 두려워 말하는 데에 특별한 각오나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고민과 개선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편 며칠 전 열린 89주년 개원기념행사에는 졸업한 동문과 퇴직원우 분들의 뜻 깊은 축사가 있었다. 인턴 일곱 사람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정든 행려병동 환자들에게 낡은 환복 대신에 새 옷을 선물했던 미담에서부터, “주삿바늘을 꽂으려면 일단 씻기기부터 해야 했어요. 피부에 때가 쌓여 도무지 그냥은 정맥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 시절 진료 회고담에 이르기까지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한 분은 소중히 보관해왔던 1970년대 입사 당시 발령통지서와 첫 월급봉투를 가져와 낭독하였다. “지방보건기원보시보(방사선)에 임함. 1호봉을 급함. 동부병원 근무를 명함. 서울특별시장”, “쓰고 나서 후회 말고 쓰기 전에 절약하자”. 다들 빵 터졌다. 그는 백범 선생의 멋진 인용구로 마무리하였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최근 의료계는 대내외 여러 도전과 제도적 변화에 직면해 있다. 때로는 변화가 급격하여 몸살을 앓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기 바란다. 자성할 것은 자성하고 개선할 것은 개선하며 진정성 있는 노력을 계속해간다면 한층 건강하고 신뢰받는 의료계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일상이 고되더라도 소중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의업의 바탕에 깔린 본질적 기쁨과 보람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김현정 | 서울특별시동부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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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이 2008년 자신에게 성추행당했다는 한 여성의 주장이 제기되자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민 의원이 당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퇴할 경우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 본격화 이후 현역 의원의 첫 낙마 사례가 된다. 문화예술계의 고은 시인·이윤택 연극 연출가 등에 이어 정치권에서도 안희정 전 충남지사·정봉주 전 의원 등 진보진영 인사들을 향해 미투가 집중되는 형국이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에선 이를 틈타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더니 부메랑을 맞았다’는 식의 공세를 퍼붓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10일 자신을 겨냥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폭로가 나오자 의원직에서 전격 사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 의원은 이날 오후 문자 메시지를 통해 "제가 모르는 자그마한 잘못이라도 있다면 항상 의원직을 내려놓을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이에 의원직을 내려놓겠다. 그리고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7일 국회 정론관에서 '건강한 서울 만들기 프로젝트' 발표하는 민병두 의원. 2018.3.10 연합뉴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투는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젠더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서지현 검사의 사례에서 보듯 사회적 지위나 계급과도 무관하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진보 쪽에서 미투가 더 많이 나오는 배경은 무엇인가. 이미 여성계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다양한 층위의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지난 8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야기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존재할 때 등장한다”며 “말하는 여성당사자들과 동의하는 남성들이 이 진영(진보진영)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도 방송에 출연해 “좌파 진영에 있던 여성들이 꾸준히 문제제기를 했고 더 주체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야 한다”며 “좌우를 막론하고 적폐는 있다. 조용한 지역이 위험한 지역”이라고 지적했다. 보수·우파라고 안심할 때가 아니다.

‘공작’ 가능성을 염려하는 시각도 근거 없기는 마찬가지다. 미투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미투 운동의 배경에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배제·억압이라는 거대한 모순이 놓여 있다. 이러한 모순을 견디다 못한 당사자들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지금, 특정 세력이 개입해 ‘없던 일’을 만들어내거나 ‘일어난 일’에 제동을 걸 수 있다고 보는 건 판타지에 가깝다. 사실관계를 다툴 부분이 있다면 차분히 시시비비를 가리면 된다. 미투가 오염되었다느니, 사회적 살인을 한다느니 등의 관점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현실적으로 타당하지도 않다.

“한국 여자 90% 이상이 성추행, 성희롱 경험이 있다”는 배우 김여진씨의 트윗처럼 성폭력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주권자를 대리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 사실부터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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