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4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김지은씨가 2차 가해를 멈춰줄 것을 호소했다. 김씨는 12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더 이상 악의적인 거짓 이야기가 유포되지 않게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김씨는 편지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다. 신변에 대한 보복도 두렵고, 온라인을 통해 가해지는 무분별한 공격에 노출돼 있다”고 했다. 김씨가 지난 5일 방송에 출연해 “국민들이 저를 조금이라도 지켜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은 성폭행 피해 사실 폭로 이후 감당하기 어려운 2차 피해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김씨의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어떤 식으로 가공되고 유포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비서 성폭행 의혹을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검에 자진출석하고 있다. _우철훈 선임기자

 

 

김씨는 성폭행 피해 사실을 폭로한 이후 인격살해와 다름없는 2차 피해를 당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블로그 등에서는 김씨의 학력·나이·결혼 여부 등 신상정보는 물론 ‘성폭력을 가장한 정치공작’ ‘아버지가 과거 정치활동을 했다’ 등과 같은 터무니없는 루머가 급속도로 번졌다. 법무부 고위 간부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도 근거 없는 소문으로 개인의 인격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2차 피해를 당했다. 오죽하면 서 검사가 검찰진상조사단에 출석해 허위 소문에 대한 수사까지 요청했는가.

서권천 변호사는 지난 7일 정봉주 전 의원에게 성추행당했다는 피해자의 주장을 비꼬면서 “(피해자가) 7년 전 일을 막 나눴던 대화처럼 기억하고 있다. 피해자의 천재성에 감탄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부산지역 정치인은 성폭행 피해자를 모욕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시당으로부터 제명조치됐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외침을 가로막고, 그들을 불순한 존재로 만들어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2차 가해가 아닐 수 없다. 성폭력 가해자 가족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악성 댓글도 근절돼야 한다. 일부 누리꾼들은 배우 고 조민기씨 등 성폭력 가해자 가족의 신상정보와 사진을 찾아 인터넷에 올리거나 저주 섞인 악담을 퍼붓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들불처럼 번져가는 미투 운동을 가로막는 또 다른 폭력이다. 2차 가해는 직접적인 성폭력에 버금가는 범죄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미투 운동의 성패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막는 데 달려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2차 가해로부터 보호하는 집단지성의 촘촘한 그물망을 만들어야 미투 운동을 더욱 확산시킬 수 있다.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2차 가해자를 엄하게 처벌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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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법원이 선고한 재판 중 대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들이 수임한 사건이 440건으로 전년보다 6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이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이 참여한 사건들을 전수조사한 결과 2016년 대한변호사협회가 조사했던 263건보다 177건 더 늘어났다. 대법원은 2016년 대형 법조비리사건인 ‘정운호 게이트’가 터지자 전관예우 관행을 근절시키겠다며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대법관 출신 상고심 수임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와 하루라도 같이 근무한 대법관은 주심에서 배제하겠다고 했지만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신영철 전 대법관이 지난해 수임한 대법원 사건 중 5건은 근무시기가 겹치는 대법관들에게 배당된 것으로 밝혀졌다. 얼마 전 차한성 전 대법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공여 사건 상고심에 변호인을 맡았다가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고 사퇴한 바 있다. 전관예우 근절 대책이란 게 헛구호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할 경우 동료 대법관이나 후배 법관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고 때로는 부당한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전직 대법관이 변호인 명단에 이름만 올려도 판사들이 움찔하고, 도장만 찍어주고 건당 수천만원 이상을 받는다는 건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비싼 돈을 주고라도 대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를 상고심에 내세우는 이유는 그의 대법원 내 연고를 활용하겠다는 계산이 뻔하다. 1, 2심 때는 빠져 있다가 뒤늦게 변호인단에 들어간 것도 이름값에 기대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최고법관 출신이 변호사 개업을 해서 돈을 버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미국은 대법관이 종신직이고, 70세가 정년인 일본은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통한다.

전관예우 관행은 범죄와 다를 바 없다. 전직 판사나 검사가 맡은 소송이라고 해서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건 재판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짓밟는 처사다. 시민들의 법감정과 상식에도 어긋난다. 그러나 대법원의 대책은 아직 허술하고 엉성해 보인다. 직업 윤리와 정의를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면 법으로 규제할 수밖에 없다. 전직 대법관들의 돈벌이 변호를 막는 입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전관 변호사의 수임료를 모두 공개하고, 재판부와 변호인의 연고관계를 밝히는 등의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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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소속 의원들이 지난 11일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민주평화당과 공동교섭단체 구성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노회찬 원내대표는 12일 당무위원회에서 각종 민생 입법과 선거법 개정 등 촛불시민이 요구한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있다며 “국회 내에서 더 강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평화당과의 공동교섭단체 추진을 결의했다”고 설명했다. 오는 17일 정의당 전국위원회 추인이 남아 있지만 평화당(14석)과 정의당(6석)의 공동교섭단체 구성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2008년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선진과 창조 모임’ 이후 10년 만에 두 정당의 공동교섭단체 실험을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두 당의 공동교섭단체 추진은 한국 정치에서 소수당의 입지가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준다. 교섭단체가 아닌 정당은 국회의 법안과 예산 처리에서 의사를 반영하기 매우 어렵다. 교섭단체만이 국회 운영 및 의사일정 협상에 대표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고보조금 배분에서도 크게 손해를 본다. 이처럼 과도한 차별이 벌어지는 이유는 국회법이 교섭단체 의석수를 20명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교섭단체 구성 문턱을 높여 소수당을 배제한 결과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벌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선거제도에 있다. 현행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로 지역구별로 1명만을 뽑는데 당선자를 만들어내지 못한 표는 모두 사장된다. 정당의 득표수에 따라 배분하는 비례대표가 있지만 그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어 소수 의견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 게다가 양당 체제는 두 당이 극한 대립을 할 경우 국정을 마비시킨다. 다원화 사회에서 소수파·약자 등 다양한 의견과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 필수인데, 현행 선거제도와 문턱 높은 교섭단체 규정이 그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보수당들은 평화당과 정의당의 공동교섭단체 추진을 비판하고 있다. 당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치권의 최우선 과제는 유권자의 뜻을 정확히 의석에 반영할 수 있게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시민의 대표를 뽑는 것부터 제대로 해야 개헌도 가능하다. 비례성의 원칙을 대폭 강화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선거제도 개혁안이 이미 제출돼 있다. 양당제의 폐해를 줄이며 시민의 의사를 왜곡 없이 반영하는 비례대표 확대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평화당과 정의당의 공동교섭단체 구성의 제1 목표도 당연히 선거제도 개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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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현장중심 연구.’ 오래전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2010년 무렵 현재 근무하고 있는 연구원이 대외적으로 표방하던 표어였다. 당시 수도권 소재 지방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지방자치단체장의 허무맹랑한 사업에 대한 명분과 타당성을 억지로 만들어야 하는 업무에 지쳐있던 차에 ‘생활인’ ‘현장중심’이라는 말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당장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고 여러 활동에 동참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대부분의 연구를 현재의 연구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수십년간 어렵게 공부하여 고작 어용학자가 되었다는 모멸감에서 벗어날, 좀 더 근본적으로는 ‘돈을 위한 연구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던 것 같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한 정책 중에는 학계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상하고 무리한 사업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4대강 살리기’다.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대선에서 승리하자마자 그동안 견지해온 입장을 버리고 사업에 찬성하는 무수한 학자들이 나타났다. MB가 유독 운이 좋은지 ‘뉴타운 사업’ ‘녹색 뉴딜’ 등 해괴한 개념을 가지고 나올 때마다 학계 사람들은 비판하기는커녕 사업의 전도사가 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때 반대하지 못했던 것은 무사히 학위과정을 마쳐야 했고, 학위를 받은 후에는 직장을 잡아야 했고, 직장에서는 재계약에 탈락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활인을 위한 연구, 당사자성에 뿌리를 둔 현장중심 연구를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진 후 항상 머리를 무겁게 하는, 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연구의 대가로, 좀 더 근본적으로는 지식을 대가로 돈을 버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하는 점이다.지금 일하고 있는 연구원에서 다른 눈치 안 보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회원이 매달 얼마씩 후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라는 것이 물건 만들 듯 일정에 맞추어 쓸 만한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다. 그간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회원 모두를 뿌듯하게 할 만한 연구결과가 항상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후원을 중단하는 분들도 많다. 순수한 시민의 힘만으로 연구원을 지탱하기 어려운 순간이 올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공공정책을 바로잡고 올바른 정부를 세우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기 때문에 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찾는 연구를 지속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전략으로 연구원 밖에 있는 많은 시민을 연구를 같이 해나갈 동반자로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익을 얻기 위해 꼭꼭 숨기는 게 아니라 널리 공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식은 기본적으로 비영리여야 한다. 우리 산과 들에서 오래도록 나고 자란 식물의 특허권을 외국의 거대기업이 차지하고, 그래서 특허료를 내지 않으면 우리 농부들이 키우지 못한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이런 부당함을 통해 깨달은 것이 지식과 정보가 소수에 독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보상이 없으면 아무도 연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미 우리는 수많은 비영리 연구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인터넷을 유용하게 하는 웹 서버의 대부분은 공개 소프트웨어인 리눅스 기반이다. 누구나 쓸 수 있고 수정이 가능한 위키 철학을 바탕으로 수많은 공개사전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른바 오픈소스 라이선스에 따른 정보기술 분야의 발전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이에 힘입어 불로소득을 철저히 배제하고 노동의 가치에 좀 더 비중을 둘 수 있는 비영리가 경제 전반에 확산되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시장경제를 구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연구자 버전으로 표현하자면, “기득권은 돈을 벌겠다고 빅데이터 기술을 연구하겠지만, 우리는 지식을 나누기 위해 빅데이터 기술을 연구할 것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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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은 용기 있는 소수의 고발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폭 넓은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소수의 고발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와 규칙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근거는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정치적 견해의 젠더 갭(성별 분리 현상)이다.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는 지역과 이념이었고, 불과 10여년 전부터 세대가 또 하나의 변수로 등장했다. 그런데 최근의 조사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뚜렷한 젠더 갭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자. 올림픽 직전에 대통령 지지율이 유의미하게 낮아졌고, 세간에서는 가상통화 규제와 남북 단일팀 구성이 그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특사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여론은 또다시 요동쳤다.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이 결정된 1월17일에 있었던 리얼미터 조사에서 남북 모두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해야 한다는 응답은 20대에서 38.9%로, 60대(27.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그러나 한 달 후인 2월20~22일 실시된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한반도기 공동 입장이 잘된 일이라는 응답은 20대에서 73%로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높았다. 같은 응답자에 대한 반복조사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20대 여론에 일대 반전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한 번의 반전이 있다. 20대 평균은 73%이지만, 남성 20대는 62%로 여전히 60대(54%)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지지를 보이는 반면 여성 20대는 85%로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다. 20대 내부에서 성별 차이는 무려 23%포인트에 달한다. 20대 여론의 반전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20대 여성 여론의 반전이었던 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광주·전라의 지지율은 85%였고 대구·경북의 지지율은 57%였으니,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로 간주되곤 하는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가 28%포인트였다. 적어도 20대 내부에서 젠더 갭은 이제 지역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같은 조사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서도 20대 남성은 43%만 잘된 일이라고 평가해서 모든 세대에서 가장 낮은 반면 20대 여성은 59%로 모든 세대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보냈다. 이 사안에 대해 광주·전라와 대구·경북의 차이가 21%포인트였는데, 20대 내부의 젠더 갭은 16%포인트로 역시 만만치 않은 파급력을 보여줬다.

20대가 아닌 다른 세대에서 성별 차이는 어떨까. 앞서 언급한 갤럽조사 중 한반도기 공동입장에 대해서는 세대별로 성별 분리 효과가 적게는 3%포인트에서 많게는 7%포인트의 차이를 보이는데, 20대의 23%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적다. 그나마 50대 이상에서는 성별 견해의 순위가 역전되어 여성보다 남성의 찬성률이 더 높게 나타난다.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서는 젠더 갭 효과가 적게는 1%포인트에서 많게는 5%포인트의 차이를 보여서 역시 20대의 16%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이번에도 역시 성별 견해의 순위가 50대 이상에서는 역전되어 젊은층에서는 단일팀 구성에 대한 지지가 여성이 더 높고 50대 이상에서는 남성이 더 높다.

다소 길게 수치를 인용했지만, 일관된 발견들을 요약하면 세 가지다. 첫째, 기성세대 여성들은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 남성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20대 여성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둘째, 정치적 견해차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에 주목하면, 기성세대 여성은 남성보다 더 보수적이고 20대 여성은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다. 셋째, 20대에서의 젠더 갭 효과는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로 불려왔던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에 견줄 수 있을 만큼 크다. 20대 유권자의 수는 약 676만명인데,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한반도기 공동입장의 경우처럼 23%포인트의 차이를 보인다면 얼추 계산해도 100만표 정도는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미국 정치에서 유권자의 젠더 갭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90년대부터다. 빌 클린턴은 1996년 대선에서 여성 표의 54%를, 그리고 남성 표의 43%를 가져갔다. 그는 공화당 후보였던 밥 돌에 비해 800만표를 앞섰는데, 여성 표에서 앞선 것이 1100만표였다. 그 이후 대부분의 주요 정책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은 20%포인트 내외의 견해차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제 젠더 정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 정치세력들은 미투 고발을 지방선거용으로 소비하려 하기보다 미투가 필요 없는 세상을 위해 시급하고도 진지하게 장기 대책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할 정치적 이유도 충분하다. 100만표가 걸려있지 않은가.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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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은 이념의 중요도에 따라 ‘주의’ ‘사상’ ‘이론’ ‘관’ ‘론’을 뒤에 붙인다. 마르크스-레닌 ‘주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마오쩌둥 ‘사상’이고 덩샤오핑 ‘이론’이 뒤를 잇는다. 지난 1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99.8%의 찬성으로 통과된 개헌안에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헌법 서문에 포함됐다. ‘시진핑 사상’이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끌었던 덩샤오핑을 제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마오쩌둥의 사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중국특색 사회주의’는 먼저 자본주의에 성공한 다음에 공산주의를 실현하자는 사상으로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위해 제창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되긴 했지만 생산력이 낙후돼 진정한 사회주의에 진입하지 못한 ‘사회주의 초급단계’인 만큼 경제건설과 개혁·개방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능력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자가 되라’는 선부론(先富論)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후 중국특색 사회주의는 중국 공산당의 슬로건이 돼왔다. 그런데 이번에 ‘시진핑 신시대’라는 접두어가 붙게 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영구집권을 보장한 이번 개헌에 국제사회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중국 언론들은 ‘내재적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덩샤오핑 이론은 절대빈곤 시대에는 유효했지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지금에 와서는 한계가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관료들의 부정부패, 환경오염, 부동산 과열, 국영기업의 막대한 부채 등 숱한 문제가 중국 사회의 장기적 안정을 위협했다. 보시라이, 저우융캉 등이 벌인 권력스캔들 앞에서 집단지도체제도 무력했다. 결국 위기돌파를 위해 권력집중을 선택했다는 게 ‘내재론적’ 해석이다. 환구시보는 12일 “중국은 건국 초기 소련식 사회주의를 수용해 경제기반이 취약했지만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언론 감시 등에 의한 외부적 견제가 없는 대신 당내 민주주의로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번 헌법 개정은 당내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절대권력은 폭주하게 마련이다. ‘시진핑 사회주의’를 세계가 우려하고 있다.

<서의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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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모든 문장에는 꼬리가 있다. 행간의 의미를 읽으라는 말은 마침표 너머에 똬리 틀고 있는 그 꼬리를 놓치지 말라는 뜻일 게다. 엊그제 경향신문 이범준 기자의 ‘삼성과 법관’이라는 칼럼을 읽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법리 따위는 애당초 글러먹은 법이라서 칼럼에 거론된 판결문의 원문을 구해서 읽어보아도 당최 무슨 뜻인지 끝까지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판결문에 동원된 문장의 꼬리들의 행방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법의 문외한이긴 해도 상식의 전문가들이 아닌가.

해남 미황사를 품고 있는 달마산 가는 길이다. 우리 국토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산이고 절이다. 둘레길을 천천히 걷는 동안 “판결문을 거듭해서 읽어보아도 어떤 법리를 말하는지 가늠이 안 된다”는 탄식으로 시작해서 “현실은 언제나 법리보다 치밀하고 또 가혹하다”는 날카로운 진단으로 마무리되는 그 칼럼이 계속 떠올랐다. 갑자기 멀리서 눈을 의심케 하는 눈 무더기가 나타났다. 봄빛이 완연하고 자세히 관찰하면 가지마다 파릇한 새순이 움터오는 이 달뜬 시기에 웬 설경인가. 더구나 이곳은 따뜻한 이 기운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는 땅끝 부근이 아닌가.

햇빛을 받아 눈송이처럼 찰랑거리는 건 눈이 아니라 사위질빵의 열매들이었다. 멀리 씨앗을 퍼뜨리려고 부풀거리는 솜털에 눈이 그만 깜빡 속은 것이다. 이 덩굴식물은 조금 고약한 습성이 있다. 지면을 기다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다면 그냥 휘감아 오른다. 오르는 것도 그냥 줄기에 매달리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만만한 관목들의 꼭대기를 누르고 앉는다. 그리고 올라탄 높이가 저의 키인 양 허세를 작렬시킨다. 여름철 잎이 무성한 시절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낙엽이 지고 숲의 아랫도리가 드러나는 순간이면 사위질빵의 꼬리도 들통이 나고 만다.

글이 생각의 최소한이라면 법은 상식의 최소한일 것이다. 제 한몸 가누지 못하고 남의 등에 업혀 사는 사위질빵. 원줄기에 이만큼 떨어져서 가냘프게 꽂혀 있는 사위질빵의 꼬리를 힐끗 보고 암벽투성이의 달마산으로 헥헥거리며 올라갔다. 사위질빵, 미나리아재비과의 덩굴성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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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변의 연속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육성 비핵화 선언,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금지의 영역을 벗어났다. 상상불허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위험한 인물이라고 쓴 적이 있다. 지금은 두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또 트럼프에게 노벨 평화상에 도전하라고 쓴 칼럼도 수정한다. 문재인 대통령, 김 위원장과 공동수상에 도전하라고 말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준비 접촉 때 판문점에서 만난 북한 인사에게 인터뷰를 주선해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뉘기와 하고 싶다고?”라고 물어 “김정일 위원장”이라고 대답했다. 한참 만에 벌어진 입을 다문 그가 말했다. “동무 간이 크구먼.” 궁금한 게 너무 많다. 특히 김 위원장에게 그렇다. 전쟁 위기에서 평화를 꿈꾸게 한 역사적 결단이 어떻게 이뤄졌을까. 그가 생각하는 북한의 미래, 한반도의 미래는 무엇인가. 직접 묻고 답을 듣고 싶어 가상 인터뷰를 했다.

- 제재를 견디다 못해 비핵화 선언한 건가. 평양도 낮에는 전기가 끊긴다던데.

“누가 그런 유언비어 퍼뜨리고 다닙네. 평양에 직접 와서 보라우…. 내가 결단한 거는 평화로운 조선반도,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디. 물론 제재가 영향이 없다면 거짓말이디. 고난의 행군 때처럼 죽기 살기로 버틸 수도 있디만 핵·경제 병진을 약속했는데, 또다시 인민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디.”

- 애초 핵개발하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닌가.

“기자 선생, 도대체 국제정치를 알기는 하나? 핵 없었으면 미국이 조선을 쳐다보기라도 했을까? 속절없이 제재만 당했을거야?”

- 남한과 미국을 믿는가. 두렵지 않나.

“국가관계는 필요의 산물 아니갔나? 남쪽엔 평화 원하는 정권이 들어섰고, 저성장 경제 타개책도 필요하지 않나? 트럼프는 중간선거 돌파구가 필요하지. 본토 공격 가능한 조선 핵에 불안감이 크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리고 선생한테만 하는 말인데, 핵은 폐기해도 기술은 남지 않갔어? 수틀리면 몇 개월 안에 다시 핵무력 갖출 수 있디. 독일과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도 기술력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 빨리 재도약할 수 있었디 않아? 하지만 중요한 건 믿음이디. 서로 신뢰하면 핵이든 재래식무기든 왜 위협이 되갔어?”    

-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 못하면 양측 지도자 모두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나 개인과 공화국 운명이 걸린 담판인 걸 잘 알고 있디. 트럼프도 모르지 않을 거고. 실패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임할 생각이디.” 

- 재래식무기 불사용 선언도 했는데, ‘미제를 몰아내고 남조선을 혁명한다’는 조선노동당 규약 및 혁명노선과 배치되지 않나.

“당 규약에 있다고 반드시 실천하란 법 있나? 그럼 남쪽은 왜 헌법 3조(대한민국 영토를 한반도 전체로 규정)를 실천하디 않디?”      

- 문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나.

“내래 문 대통령을 믿디. 죽 지켜봤지만 북남관계 발전과 평화의 의지를 갖고 안팎의 비판에도 흔들림 없이 걸어왔디. 언행이 일치되는 액면가 지도자이고, 뿔난 망아지 트럼프를 다룰 줄 아는 영리함도 갖췄디. 틈만 나면 트럼프를 칭찬하지 않아? 그러니 트럼프도 문 대통령을 욕할 수 없지비. 자존심 안 굽히고 주장 관철시키는 재주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디. 트럼프가 아베는 막 대해도 문 대통령에게는 정중하디 않아?”

- 남쪽 보수세력은 핵무기 대량생산을 위한 북한의 시간벌기쇼라고 비판하는데.

“이미 핵무력 완성했는데 무슨 시간벌기? 내래 이 말은 꼭 하야갔어. 남쪽 보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기집단이디. 보수정권 땐 누가 내려가도 환영 일색이더니 지금은 절대 안된다고 난리쳐대지 않디 않아? 이명박은 천안호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정보원(국정원) 고위급을 평양에 보내 북남 수뇌회담 하자고 졸라댔지. 연평도 사건 발생 12일 만에 우리 사람이 서울에 갔지. 박근혜는 돌아가신 장군님을 존경한다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 천안호·연평도 유족은 왜 이명박·박근혜에게 항의하지 않는지 료해가 되지 않는다.”

- 보수세력의 말을 믿는 사람들도 있다.

“걱정 말라우. 트럼프만 설득하면 다 따라오게 돼 있어. 이번에도 트럼프가 수뇌회담 응하자 홍준표 빼고 다 환영했디 않아?” 

- 말 나온 김에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김정남 암살사건에 대해 말해달라.

“고저 북남관계 해치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갔어. 언젠가는 말할 날이 오갔지.”

김 위원장이 정말 이렇게 말할지 궁금하다. 이 자리를 빌려 인터뷰를 요청한다. 한국 기자라면 누구나 김 위원장과의 인터뷰를 소망할 것이다. 김 위원장이 인터뷰를 한다면 한국 언론과 먼저 했으면 하고 가급적 그것이 나였으면 한다. 긍정 답변을 기대한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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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경주에서 전략적으로 투입되는 ‘페이스메이커’가 있다. 이들의 결승점은 42.195㎞ 지점이 아니다. 대략 30㎞이다. 여기까지 열심히 뛰어 다른 선수들의 페이스를 흩트려 놓으면 자신의 역할을 다한 거다. 마라톤, 사이클, 수영 같은 기록경기에서 ‘오버페이스’는 금물이다. 세계신기록을 갖고 있는 슈퍼스타도 오버페이스를 하면 제 실력을 내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상대로부터 오버페이스를 이끌어내는 것은 주요한 작전 중 하나다. 페이스메이커는 자신을 위해 뛰는 선수가 아니다. 자신을 죽여 팀의 다른 선수를 살린다.

17일 폐막되는 패럴림픽을 끝으로 평창 동계올림픽이 모두 막을 내린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스포츠를 넘어선 많은 질문을 한국 사회에 던졌다. 그중 하나가 ‘페이스메이커’ 논란이다. 이승훈 선수가 금메달을 딴 매스스타트에서 후배인 정재원 선수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유시민 작가는 “매스스타트는 개인경기인데 (정 선수가 페이스메이커를 해 희생하는 것은) 올림픽 헌장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촛불혁명 이후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최고의 화두는 ‘공정’이다. 모든 선수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공정’은 올림픽 내내 불거졌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그랬고,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가 그랬다. 스포츠를 통해 터져나온 공정에 대한 열망은 어느 때보다 강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불공정’에 이골이 나 있었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공정한 자유경쟁은 언제나 선이 될 수 있을까. 싫든 좋든 현실적으로 우리는 ‘팀코리아’의 멤버다. 다른 팀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팀플레이 없는 자유경쟁은 우리끼리 싸우다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 수도 있다. 실제 여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는 우리 선수끼리 부딪쳐 모두 탈락했다.

이 딜레마는 스포츠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등 빅3의 침몰 이면에는 우리 업체끼리의 제 살 깎아먹는 수주경쟁이 있었다. “글로벌 빅3가 한국 기업이라 가격결정권을 우리가 쥐고 있었어요. 조금만 더 전략적으로 접근했으면 모두 윈윈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싸웠어요. 차라리 다른 나라가 가져갔으면 가져갔지 경쟁사는 못 주겠다는 심리가 있었어요.”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하늘만 바라봤다. 똑같은 얘기를 건설업계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2010년 초반 찾아왔던 해외건설 호황기에도 우리 건설사들끼리 플랜트 경쟁을 벌이다 저가수주를 떠안았다.

페이스메이커를 ‘불공정하다’고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보상체계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기껏 희생해 누군가를 승자로 만들어줬더니 승자가 그 고마움도 모르고 모두 독식해버리더라는 것이다. 재벌들이 대표적이다. 언젠가 만났던 고위 공무원은 “삼성전자가 1983년 반도체 사업을 하려 할 때 범정부 차원에서 수원 땅 매입과 반도체 설비 수입을 도왔고, 초기 반도체 기술 개발도 지원해줬다”며 “반드시 잘되어서 국민들을 먹여살려달라는 뜻이었던 만큼 삼성은 국민들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현대차, SK, 롯데 등 다른 재벌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강력한 유치산업보호정책과 시민들의 국산품 애용, 중소기업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신화는 없었다. 강남도 나홀로 부를 이룬 게 아니다. 강북과 지방이 낸 세금이 없었다면 1980년대 중반 강남 개발은 힘들었다.

공동체를 위해서 누군가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희생이 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할 사람이 없다. 강요하면 폭력이 된다. 같은 전략을 썼음에도 ‘팀네덜란드’에서는 페이스메이커 논란이 없었다. ‘특정 선수 밀어주기’ 논란이 페이스메이커의 존재, 그 자체에 맞춰져서는 안되는 이유다.

<경제부 | 박병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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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서당에 혀 짧은 훈장님이 계셨습니다. “따다해바다, 바담 풍.” “바담 풍!” “내가 언데 바담 풍이대떠! 똑바도 따다해, 바담 풍.” “바담 풍!” “(땅땅) 아니, 이놈드디! 바담 풍이 아니고 바담 풍!” “바담…풍.” 훈장님이 발음을 똑바로 하지 않는 한 학동들은 억울한 호통만 계속 들어야겠지요. 윗사람이 똑바로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제대로 본받기 어렵다는 속담이 ‘나는 바담 풍 할 테니 너는 바람 풍 해라’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형 보니 아우인 것처럼, 본이 엉터리면 본뜬 것 역시 엉망이란 것이지요.

또한 늘 그렇지만 부모에게 있어 자식 자랑만 한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식은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며 부모를 부끄러운 반면교사로 삼고 있을지 모릅니다. 부모가 받는 최고의 영예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부모님이라는 말이라 합니다. 존경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본받아 같은 직업을 갖거나 교사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윗사람이 형편없이 살면 그 지도나 가르침이 귀 아픈 길거리 전도쯤으로 여겨지겠지요.

본받으라 위인전을 사주지만 정작 그 위인과 같은 길을 가겠다 하면 극구 말립니다. 많은 부모와 교사가 미는 방향은 자신들이 살아왔던 무난하고 뻔한 길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위인전의 시작은 늘 그 부모나 스승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위인 뒤에는 항상 ‘걱정 말고 나아가라, 너는 꼭 해낼 수 있다’ 든든하게 응원해준 이가 있었지요. 그러니 위인을 키우기 위한 위인전은 과연 누가 먼저 읽어야 할까요?

자신들은 텔레비전 보면서 가서 공부해, 책 좀 읽어라 등 떠미는 바람[望] 역시 ‘바담 풍’으로 들릴 것입니다. 바람은 따를 만한 것을 보고 스스로 품는 것입니다. 부모도 자식의 거울입니다. ‘자식 자랑 말고 자식 자랑 돼라’는 요즘 속담이 괜하지 않다 하겠습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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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2일 헌법재판소는 ‘수능시험의 EBS 교재 연계 출제에 관한 사건’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각·각하를 선고했다. 문항 수의 70%를 EBS 교재 및 강의와 연계한다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의 출제원칙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선고다.

헌재의 기각 결정 자체는 얼마든지 존중할 수 있다. 타당한 결정이라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헌재의 선고문까지 존중하기는 어렵다. 헌재가 제시한 기각 결정의 가장 중요한 논거는 수능시험과 EBS 교재 연계가 ‘학교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경감’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특히 학교교육을 정상화한다는 것은 완전한 거짓이다. 수능·EBS 연계는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정상화했다. 이전의 학교교육이 정상이라는 게 아니라 비정상이었던 것을 한층 더 비정상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사교육 경감 효과가 대단했다면 눈감아 줄 수도 있겠지만 수능·EBS 연계로 인한 사교육 감소 효과는 거의 없거나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헌재의 논거는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했다.

헌재의 기각 결정에 EBS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헌재의 결정을 반기며 좋아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방송인으로서의 자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돈)의 측면에서 볼 때 EBS는 수능·EBS 연계의 가장 큰 수혜자다. 하지만 공영방송사로서의 자격이란 면에서 볼 때 EBS는 가장 큰 피해자다. 수능·EBS 연계로 인해 EBS방송사는 시청자의 신뢰를 적지 않게 잃게 됐다. 학생부종합전형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헤친 EBS 다큐 &lt;대학입시의 진실&gt;에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을 생각해보자. 호응하는 반응이 더 컸지만 분노의 반응도 상당했다. 왜 분노했을까. 수능교재를 팔아 얻는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학생부종합전형을 악의적으로 비난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수능·EBS 연계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의심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수능시험을 출제하는 평가원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특히 수능 출제진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평가원이 출제하는 수능시험 문제는 오랫동안 EBS와 출판사들이 만드는 수많은 수능문제집들이 모방하고 추종하던 문제였다.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그러나 수능·EBS 연계 이후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평가원의 출제진이 EBS 수능문제집을 모방하고 추종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시중의 문제집 따위를 모방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영혼에 최고 수준의 문제를 출제하겠다는 열정과 의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나는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수능·EBS 연계 이후 수능시험의 질이 떨어졌다고 느끼고 있다.

객관식 문제풀이 위주의 수능 공부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악으로 볼 건 아니다. 문제풀이 공부를 통해서도 학생들은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심지어는 창의력과 사고력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 다만 그 정도가 우리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칠 뿐이다. 대학 학점에 비유해 말하자면 A나 B에는 못 미치지만 C는 될 수 있는 공부다. 그런데 수능·EBS 연계는 C는 될 수 있는 공부를 D에 불과한 공부로 전락시켰다. 수능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수능 전 과목에 절대평가를 도입하느냐 마느냐가 사회적 화두가 된 상황에서 수능·EBS 연계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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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유수의 종합병원이라 그런지 크고 복잡했다. 주차장에 차가 많아서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차에서 내려 해당 건물에 들어서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차가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말도 된다. 아픈 사람들과 아픈 사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병원 안팎에 있었다. 초조함을 이기기 위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수술실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푹 수그린 채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진료실 앞에서 호명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접수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번호표에 적힌 숫자를 통해 이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병원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0분쯤 지났을까, 순서가 되어 데스크에 갔더니 처음 내원하는 경우에는 옆에 있는 다른 건물에 가서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서두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예약 진료 시간보다 여유 있게 와서 천만다행이었다. 옆 건물에 가서 다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역시 20분쯤 흐르고 나서야 간신히 등록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처음에 갔던 건물로 돌아가서 해당 진료과로 이동했다. 스크린에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의사 이름 아래에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예약 진료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버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 하나가 사라지면 목록에 있는 이름들이 한 칸씩 위로 올라갔다. 더디게 바뀔 것임을 잘 알면서도, 하릴없이 스크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은 모두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가끔 누군가가 의자에서 일어나면 부러운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병원에서의 일은 참는 일, 기다리는 일, 묵묵해지는 일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집중하다가 만에 하나 제 순서를 놓쳐버리기라도 하면 다시 처음부터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지가 절박한 사람 옆에 사연이 절박한 사람이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머니가 눕고 싶다는 말을 하자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났다. 마음의 움직임이 몸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몸의 움직임이 마음의 움직임을 다시 이끌었다. 절박함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유대였다.

의사와 5분을 면담하기 위해 세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의 진료가 끝나고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기다리는 일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임을 몸소 깨달았다. 기다림이 다음 주로 한 주 유예되었다. 앞으로 기다릴 일은 더 많을 것이다. 기다리기 위해서, 기다림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몸은 더 바빠질 것이다.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들도 있을 것이다. 기다림을 위한 앞선 기다림이 있을 것이다.

지금껏 무수히 많은 기다림이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연락을 기다리며, 연락이 끊긴 소중한 사람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기다리며, 수학여행을 기다리고 체육대회를 기다리며 나는 마냥 설레기도 하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어떤 기다림은 기약 없어서 허무했고 인내를 시험하는 기다림도 있었다. 만나기 위해서 기다려야 했고 쓰기 위해서 기다려야 했다.

아무리 많이,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기다림은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다리다’라는 단어는 동사지만, 왠지 형용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한 동작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가슴 속에서 무수히 많은 마음들이 움직였을 것이다.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이 여기서 저기로 나아갔을 것이다. 개중 어떤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되돌아왔을 것이다.

조용미 시인의 ‘유적’이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은사시나무 껍질을 만지며 당신을 생각했죠/ 아그배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면서도/ 당신을 그렸죠 기다림도 지치면 노여움이 될까요.” 희망을 잃지 않는 한, 기다림은 여전히 진행 중일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은 계속해서 법석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기다리다’는 동사가 맞는 것 같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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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은 누구일까? 제 아무리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사람이라도 5만원권 지폐를 두고 1만원짜리를 집지는 않는다. 정답은 신사임당이다. 지폐에 사람 얼굴을 그려 넣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인류는 오랜 세월 타인의 표정을 보고 그 마음을 읽는 훈련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인물화에 특히 놀라운 식별력을 얻었다. 사람들은 지폐 속 인물의 얼굴이 익히 보던 것과 조금만 달라도 금세 알아챈다. 둘째 이유는 ‘국민교육’을 위해서다. 화폐의 도상(圖像)이 되는 사람은 국민 대다수가 존경하는 역사 인물 중에서 선정되며, 각각의 인물은 국민이 공유해 마땅한 가치들을 표상한다. 세종대왕의 애민의식, 율곡과 퇴계의 선비정신, 충무공의 위국충정 등. 신사임당은 어떤 가치를 표상하는 인물인가?

10여년 전 5만원권 지폐를 발행할 때, 어떤 인물을 넣을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한국의 화폐 속 인물이 전부 남성이니 반드시 여성을 넣어야 한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누가 적임자인가에 대해서는 당연히 여러 의견이 나왔다. 후보로 진지하게 검토된 인물은 신사임당 외에 유관순과 김만덕이었다.

제주도의 기생 출신 거상(巨商)으로서 기근 때에 사재를 털어 수많은 생명을 구했던 김만덕은 지명도가 낮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유관순은 10만원권 화폐에 김구가 들어갈 예정이니 표상하는 가치가 중복되며, 여성적 가치를 표상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신사임당에 대해서는 “율곡이 이미 있는데 그 어머니까지 화폐 인물로 선정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대가 있었으나, 한국 여성 또는 여성적 가치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 그만한 사람이 없다는 주장을 누르지 못했다. 5만원권에 신사임당 초상을 넣기로 결정한 후, 한국은행은 그 이유를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로서, 어진 아내의 소임을 다하고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준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어진 아내이자 현명한 어머니, 현모양처(賢母良妻).

이에 대해 어떤 여성단체는 “신사임당은 유교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상적 여성의 전형으로 자기 자신이기보다는 이율곡의 어머니요, 이원수의 아내로서 인정받고 있다. 어머니, 아내만이 보편적 여성상으로 자리 잡는 것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으나, 많은 사람들은 현모양처를 모범으로 삼는 것이 왜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사임당은 ‘유교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상적 여성의 전형’조차 아니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 20년 동안 주로 친정에서 살며 시집 일은 거의 돌보지 않았다. 4남 3녀를 낳았지만 율곡 말고 특별히 잘된 자식도 없었고 남편을 크게 출세시키지도 못했다. 그는 오히려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했다. 신사임당이 현대에 환생해서 당시 살았던 방식대로 산다면, 결코 현모양처라는 말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유교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요구한 기본 덕목은 ‘삼종지도(三從之道)’였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자식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성이 평생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이다. 순종은 자아(自我)를 용납하지 않으며 독립적 사유(思惟)를 배격한다.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질은 ‘말 잘 듣는 것’뿐이다.

현모양처론은 유교 가부장제의 덕목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창안되어 20세기 초 한국에 유입된 ‘천황제’ 국민국가의 여성관이다. 일본 천황제 국민국가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은 남성이 천황에게만 충성할 수 있도록 가정을 맡아 꾸리며 자식을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으로 기르는 일이었다. 현모양처라는 용어는 성인 남성을 가정에서 완전히 이탈시켜 천황에 직속된 신민의 일원(一員) 자격만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가정에 생긴 ‘권위(權威)의 공백’을 제국 신민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책임을 자각한 여성의 자발적 헌신으로 메꾸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을사늑약 직후인 1906년에 양규의숙(養閨義塾)이 ‘현모양처 양성’을 설립 취지로 내세우면서부터 이 단어 사용이 일반화했다. 이후 오랫동안 여성의 자아실현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라는 담론이 대다수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했다.

동전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어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밖에서 일하면서 ‘가정사’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 남편이자 아버지, 가정 안에 자기 자리를 만들지 않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생각을 낳았다. 집 밖에서 일자리를 잃고 집 안에도 발붙일 곳 없어 하루 종일 공원을 배회하는 한국의 노년 남성들 역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셈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심어 놓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민족 고유의 전통’인 양 착각하며 산 지도 한 세기가 넘었다. 의식이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여성과 남성의 공간을 집 안과 집 밖으로 나눌 수 없게 된 지 오래임에도, 집 밖에서 활동하는 여성을 ‘제자리를 잃은 여성’이나 ‘남성의 영역을 침범한 여성’으로 취급하는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금의 미투운동은 남성 중심으로 편제된 집 밖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피해를 입어 왔는지 여실히 폭로하고 있다. 이제는 성인군자니 영웅호걸이니 요조숙녀니 현모양처니 하는 성차별적 가치관을 담은 말들을 박물관 수장고로 보낼 때다. 미투운동은 현재의 성 역할에 관한 가치관을 전면 재구축하는 대각성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각각 ‘애국자’와 ‘현모양처’로 나뉘는 세상보다는 남녀 구별 없이 착한 사람, 성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배려하는 사람, 존중하는 사람으로 통합되는 세상이 더 좋고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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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을 운전하다 보면 과속, 신호위반, 끼어들기 등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차량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단속경찰, 단속카메라도 없는데 이 정도 위반쯤이야’ 하는 생각을 운전자라면 해보았을 것이다. 이런 사소한 교통법규 위반이 심각한 교통사고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속카메라 앞에서만 제한속도를 유지하고, 신호를 준수한다면 그 외 도로에서의 교통 무질서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제한적인 경찰력만으로는 한계에 도달한 교통사고 예방활동에 대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차량 블랙박스를 ‘거리의 눈’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교통법규 위반차량 신고제도’이다.

국민들이 교통법규 위반차량을 신고하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앱을 통해 ‘국민신문고’ 또는 ‘스마트 국민제보’에 접속한 뒤 법규 위반 차량의 위반 사실에 대한 블랙박스 영상, 위반 일시 및 장소, 위반 차량번호를 올리면 된다.

신고를 받은 각 경찰서 범법신고 담당자는 신고 내용을 확인한 뒤 위반사항이 명백하고 교통사고 위험이 명백히 크다고 인정되면 도로교통법에 따른 과태료 처분을 하게 된다. 또 위반 운전자의 소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운전자에게 가까운 지구대 또는 경찰서 민원실을 방문해 소명할 기회를 주게 된다. 누군가를 고발하는 일은 꼭 마음에 내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리의 눈’ ‘국민들의 관심’으로 교통질서 확립을 유도할 수 있다면 교통사고 예방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권준구 | 부산연제서 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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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서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 대한 권고안을 발표하면서, “이 사안은 단순히 수사기관 사이의 권한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수사구조 개혁이라는 차원임”을 명백히 했다. 이 논의가 검찰과 경찰의 밥그릇 싸움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놀라운 인식의 발전이다. 다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망령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검사가 인권옹호기관이라는 망령이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경찰의 권한 집중과 남용이 우려되므로 인권옹호기관으로서 검사가 이를 견제하고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형사절차에서 인권옹호기관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그 기관은 부당한 인권침해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를 “정부와 사건 당사자들로부터 독립되어 있을 것”이라고 표현한다.

먼저 형사절차에서 인권보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형사절차에서 인권보장이란 정부, 즉 수사당국에 의한 자의적 구금과 고문과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탄압하는 사례를 예방하는 것으로부터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형사사법절차에서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법권이 분리되었으며,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들의 독립성이 엄격히 보장되고 있다는 역사적 명제를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검사는 공무원이다. 그것도 소위 검사동일체 원칙이 지배하는 혹독한 위계질서 내의 공무원이다. 정부에 의해 고용된 공무원인 검사가,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인식은 헛된 상상에 불과하다.

또한, 사건 당사자들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수사와 기소에 관여했던 사람은 그 사람의 개인적 속성이나 개인적 공정함과는 무관하게 사안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지키기 어렵다. 피고인을 수사하고 기소했던 사람은 피고인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부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규문주의 이후 형사소송의 가장 중요한 진전이라고 볼 수 있는 기소와 재판이 분리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형사절차에서 신뢰를 향유할 수 있는 존재는 수사와 기소에 관여하지 않은 법원뿐이다. 수사기관에 불과한 검사가 또 다른 수사기관인 경찰과는 달리 피고인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부디 엘리트에 대한 선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길 빈다. 우리는 이미 법률가와 행정가, 수많은 엘리트에 의한 부패와 범죄를 너무 많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수사기관이 스스로 인권옹호기관의 지위를 자처할 때 형사소송절차에서 국민의 인권은 오히려 약화된다. 검사의 인권옹호기관적 지위는 검사의 결정에 합법성과 공정성이라는 면죄부를 준다. 인권옹호기관이라는 망토를 뒤집어쓴 채, 경찰의 수사를 방해하고,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며 국정을 농단한 작금의 사태를 직시해야만 한다.

언제부터 우리 국민의 인권을 검사들이 지켜왔는가? 누가 검사에게 인권옹호기관이라는 자격을 부여했는가? 수사절차는 본질적으로 인권침해의 절차이다. 수사기관인 검사는 본질적으로 인권침해의 기관이다. 수사기관인 검사는 이러한 기관적 속성을 자각하고, 헌법과 법률에 의해 허락된 절차 내에서 인권침해를 최소화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인권침해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이다.

<조순열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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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인권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깝게 지냈던 친지와 영원히 이별하는 장례식은 한 번 열리는 것이 정상인데 상황에 따라서는 안장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한다. 주로 타지에서 숨을 거둔 망자의 유해를 수습해 고향으로 이장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 2월23일에 베를린 가토 묘지에서 윤이상 선생의 이장식이 있었다. 날씨는 추웠지만 때마침 따뜻하게 비낀 햇살은 고인의 고향 길을 평안하게 인도하는 것 같았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족과 친지 20여명 정도가 모여 간소한 불교의식으로 거행된 23년 전 장례식 때는 날씨가 꽤나 쌀쌀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평화와 평정을 찾은 현자(賢者)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선생의 플루트 독주곡 ‘살로모’가 조용히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윤 선생과 이별했다.

 

 

작곡가로서 그리고 세계인이자 동시에 애국자였던 고인을 생각할 때면 나는 또 다른 음악가 쇼팽을 떠올린다. 물론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음악세계는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적 영감은 모두 조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했다. 윤 선생에게는 우리의 전통적인 창의 시김새나 가야금의 농현(弄絃)이었다면 ‘피아노의 시인’ 쇼팽에게는 ‘폴로네즈’나 ‘마주르카’가 바로 그러한 뿌리였다. 두 사람 모두 이국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고난과 압제에 신음했던 조국의 운명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친지들이 한 줌의 조국 흙을 담아 선사한 은잔을 지닌 채 20세에 바르샤바를 떠나 39세에 파리에서 병사한 쇼팽은 러시아의 압제에 저항했던 폴란드 인민에게 바친 유명한 에튀드(연습)곡 ‘혁명’을 남겼다. 음악으로 표현된 민족적 기념비라고 할 수 있는 이 짧은 곡은 비통 속에서도 해방을 향한 그의 불타는 열정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타민족이 아니라 바로 동족에 의해서 자행된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으로부터 받았던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딛고 고인이 작곡했던 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를 들을 때마다 나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투쟁하는 한국 민중의 뜨거운 힘을 느낀다.

선생의 묘비에 새겨진 ‘處染常淨(처염상정)’은 혼탁한 곳에 있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연꽃을 그리고 있다. 비록 절망스럽고 피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도 아름다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부단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인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쇼팽은 자기의 심장을 조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큰누이가 그의 심장을 몰래 코냑 병에 보관해서 고향으로 가져와 동생이 바르샤바를 떠나기 직전까지 살던 집 근처에 있는 ‘성십자가 성당’의 돌벽 안에 안치했다. 그리고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마태복음의 6장 21절을 그 밑에 새겼다. 유한한 지상세계에 쌓아놓은 재물이 아니라 성령의 구원만이 영원한 보배라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윤 선생은 더러움이 있으면 당연히 깨끗함도 있게 마련이라는, 즉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다는 연기(緣起)의 세계를 믿었다. 전자는 성(聖)과 속(俗)의 단절을 통해서, 후자는 오히려 이의 연속에서 진리의 존재양식을 발견했다.

어떤 음과 그 다음에 오는 음 사이에 항상 단절이 있는 피아노에 의거해서 쇼팽은 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남겼다. 첼로주자였던 윤 선생은 음의 흐름과 연결을 보다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현악기나 관악기를 선호했다. 또 서양의 음세계가 마치 잣대를 사용해서 그린 직선의 세계라면 동양의 그것은 붓글씨처럼 명암, 강약과 장단을 늘 지닌 세계라고 음악미학에 있어서 서양과 동양의 차이도 강조했다. 언젠가 고인은 나에게 자신의 음악세계를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에 비교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보였던 구름이 어느 새 사라지고 사라졌던 것처럼 보였던 구름이 이내 다시 나타나지만 결코 같은 모양을 반복하지 않는 것처럼, 우주 속에 여러 모습을 띠며 끝없이 흐르는 음을 자신은 다만 악보에 옮겨 놓았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깊이 흐르는 선생의 음악세계를 생각하면 나는 먼저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이 곡에 등장하는 시를 선택하는 고인의 작업을 도우며 작품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우리 민족의 기나긴 역사에서 느꼈던 절망과 한을 뒤로하고 평화와 통일이 오는 감격스러운 그날의 환희를 느낀다. 러시아의 핍박에 시달렸던 조국의 푸른 호수와 울창한 숲, 그 땅에서 평화스럽게 살고자 했던 핀란드인의 꿈을 표현했던 시벨리우스의 교향시곡 ‘핀란디아’가 있다. 핀란드의 제2의 국가로서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곡처럼 선생의 교성곡도 우리 땅에서 더 자주 울려 퍼져 더 많이 기억되기를 나는 항상 바란다. 프라하의 지하철역에는 전차의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짧은 신호음악이 울린다. 스메타나의 교향시곡 ‘나의 조국’ 속에 나오는 ‘몰다우강’의 첫 소절이다. 고인의 곡도 짧은 소절이라도 평양과 서울의 지하철역에서도 들을 수 있는 그날을 가끔 상상해 본다.

이제 선생의 유해는 잔잔한 파도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양지바른 고향 땅에 영원한 안식처를 갖게 되었다. 고인의 뜻대로 자주와 평화가 뿌리내린 조국이 아니라, 여전히 주위 강대국의 헤게모니 쟁탈전 속에서 남북과 남남 갈등으로 뒤틀린 현실은 이별을 고하는 내 마음도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흙탕물 속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향기를 발하는 연꽃처럼 윤 선생의 맑은 영혼과 아름다운 선율은 우리 민족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지며 보다 더 인간적이고 평화스러운 세상을 향한 우리의 노력을 계속 독려하리라고 믿는다.

동백꽃이 활짝 필 통영묘소를 그리며 나는 이장식에 앞서 묘역의 주위를 혼자 돌아보면서 고인과 함께 보냈던 지난 날들을 회상했다. 지난여름에 가득했던 해당화와 산딸기는 이제 앙상한 가지만 남겼다. “우리의 운명은 종종 겨울의 과실나무처럼 보인다. 바싹 마른 큰 가지며 뾰쭉한 작은 가지를 보는 슬픔 속에서 이들이 오는 봄에 다시 푸르러지며 꽃을 피우고 그래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또 이를 알고 있다”는 괴테의 &lt;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gt;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앞으로도 계속 흐를 공간 속에서 베를린과 통영은 반드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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