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란이 아직도 뜨겁다. 최저임금 인상이 저임금 노동자들의 소득증가로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반발이 크다. 고용을 감축하거나 상여금을 최저임금에 포함하는 등의 방식으로 부담을 회피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최저임금 인상은 단순히 임금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가능한 한국 사회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혼란을 조기에 수습하고 연착륙시켜야 한다.

현대적 의미의 최저임금제도는 1894년 뉴질랜드에서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생활 보장을 위한 입법으로 시작됐다. 영연방 중심 국가였던 영국도 1909년 최저임금법을 채택하였다. 처칠 총리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특정 계급의 국민들이 최저생계 유지에 필요한 비용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면 이것은 국가적 악재”라고.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나라는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 최저임금제의 실시 근거를 두었으나 당시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실제 운용되지는 않았다. 최저임금제가 최저임금법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1988년 당시 462.5원이었던 최저임금은 지난 30년간 연평균 9.65%의 인상률을 보이며 오늘에 이르렀다. 2018년 최저임금은 7530원으로 전년 대비 16.4% 올랐다. 17년 만의 최고 인상률이다. 문재인 정부의 의지대로 2020년까지 1만원이 되려면 매년 15.7% 이상 올려야 한다. ‘급격’한 인상이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 대한 주요 반대논리는 영세한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이 경영상의 부담으로 직결될 수 있으며 또한 저임금 계층의 일자리를 감소시켜 그들의 생존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상속도를 조절하거나 업종·지역별 차등화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노동계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최저임금이 곧 노동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임금’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최저임금이 사실상 ‘기준임금’으로 활용되는 상황에서 업종·지역별로 달리 정하면 노동자 간 불공정성 문제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중소기업과 노동계 모두 타당하고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중소기업·소상공인·노동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지속가능한 한국 사회 구축을 위해 최저임금 인상 정책은 속도 조절을 통해서라도 성공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은 헌법에 보장된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조건을 확보해 준다.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공동체에 애정을 가질 구성원은 없을 것이다. 사회안전망이 아직 취약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계속되는 저임금은 근로자들에게 가혹한 일이다. 2012년부터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도입하기 시작한 ‘생활임금’은 최저임금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한다는 취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최저임금 인상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요구의 반영이다.

최저임금 인상이 연착륙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경제구조 관점에서 몇 가지 긍정적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소득양극화 완화다. 2016년 기준 소비자물가지수를 반영한 우리나라의 실질최저임금은 5.8달러로 독일(10.3달러), 미국(7.2달러), 일본(7.4달러)보다 훨씬 낮다. 최저임금 인상은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려 소득의 양극화를 완화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미국·유럽에서 시행한 빈곤 퇴치 및 사회통합 정책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최저임금 인상이었다. 그리고 최저임금 인상은 소비성향이 높은 계층의 임금소득 증가를 통해 내수를 자극하여 중소기업은 물론 경제 전체의 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연구결과도 많다.

인권보장과 구조적 관점에서 최저임금 인상의 연착륙 방안은 무엇인가? 먼저 최저임금 1만원 달성 목표연도를 2020년에서 예를 들면 2022년으로 조정할 것을 제안한다. 목표연도를 없애고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일정 비율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겪는 저성장 속에서 최저임금을 급격히 인상하기에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어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또한 목표달성 위주의 경제정책은 성공하기도 힘들고 부작용이 너무 클 수도 있다.

그리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비용 상승을 전가하는 불공정 거래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원청 대기업이 하청 중소기업에 비용 상승분을 전가하면 하청업체는 대기업의 납품단가 인하 압박을 저임금으로 벌충했다.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 관행이 없어지지 않는 한, 최저임금을 인상할 때 중소기업은 납품단가를 맞추기 위해 고용을 줄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 감소를 최소화하면서 임금의 정상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대·중소기업 간 공정거래의 정착으로 중소기업이 창출한 성과는 중소기업에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을 설비투자로 유도하여 대기업 일자리뿐만 아니라 하청 중소기업의 일자리가 창출되어야 한다. 2017년 상장사 사내유보금은 860조원, 이 중 10대그룹 사내유보금은 515조원으로 해마다 증가해왔다. 대기업이 설비투자 확대 없이 사내유보금만 계속 증가하면 대기업에 쌓여 있는 자금이 전체 근로자의 88% 이상이 일하고 있는 중소기업 부문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면서 최저임금 인상은 결국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희생만 가져온다. 끝으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 증가가 소비 증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복지확대도 수반되어야 한다. 미래 삶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사회시스템에서 임금상승분은 가계저축으로 축적될 뿐 소비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간의 정부 대처는 아쉬움이 컸다. 급격한 인상으로 인한 부작용을 충분히 인지했을 법한데도 세심한 대책이 부족했다. 정부가 내놓은 일자리 안정자금은 당장 피해를 보는 영세사업주의 형편을 고려하지 못해 외면받고 있다. 강력한 재정·세제 지원뿐만 아니라 대·중소기업 간 공정 거래, 터무니없이 오르는 임대료 대책, 노동시장 개선, 산업구조 조정 등의 대책도 함께 나왔어야 한다. 정책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측면을 함께 고려했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종합적인 최저임금 인상의 연착륙 정책을 기대해본다.

<정운찬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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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경화 환자들의 간 초음파검사가 언제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되는지 문의가 보건복지 상담센터(콜센터)를 통해 자주 들어오고 있다. 6개월 주기로 간암 검사를 위한 초음파검사를 해야 하는데 1회당 검사비가 15만원 내외로 경제적 부담이 크다는 호소가 많다. 4월부터는 간경화, 지방간, 췌장염 등 상복부 질환에 대한 초음파검사에 건강보험이 적용돼 이러한 고민이 해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간경화를 포함한 만성 간질환으로 초음파검사가 필요한 환자는 약 50만명 수준이다. 상복부 질환으로 초음파검사가 필요한 환자까지 더하면 약 307만명에 이른다. 그러나 간·담낭·담도·비장·췌장의 이상 소견을 확인하는 상복부 초음파검사는 4대 중증질환(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 의심자 및 확진자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그동안 연간 약 15만명만이 혜택을 받았다.

정부는 작년 8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을 발표하였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지만 의학적 필요가 있는 비급여 진료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확대와 본인부담상한제 등이 주요 내용이다. 초음파검사의 건강보험 적용 확대는 의학적 비급여의 급여화의 핵심 과제이다.

정부는 올해 초부터 대한의사협회, 내과학회, 영상의학회 등이 참여하는 상복부 초음파 급여화 협의체 논의를 거쳐 초음파검사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기준을 마련하였다. 앞으로는 상복부 초음파검사에서 의학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비급여가 사라지게 된다. 대략 307만명의 의료비 부담이 평균 6만~16만원에서 2만~6만원 수준으로 대폭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초음파검사는 질병의 1차 진단을 위한 효과적이고 안전한 도구로 임상 현장에서의 활용도가 높다. 초음파검사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은 의료현장에서 의사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초음파검사 비용이 의료기관마다 다르지 않고 비용부담도 줄어 의료비에 대한 환자·의사 간 갈등도 줄이고, 의사의 전문적 진료를 위한 선택의 폭을 넓혀 줄 것이다.

앞으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은 2·3인실 상급병실, 뇌·혈관 MRI 건강보험 적용 등 주요 과제가 남아있는 상황이며, 정부는 국민 건강보장을 위해 이를 성실히 이행해나갈 것이다. 아울러 추진 과정에서 국민 참여위원회, 학계 시민사회 자문위원회 등을 통해 가입자인 국민의 참여도 보장해나갈 방침이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정책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다. 건강보험 적용으로 의료행위의 가격이 정부에 의해 결정되고, 진료비가 삭감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의 발표와 함께 적정 수가 보장, 저평가된 수술·처치 등 사람 중심의 행위에 대한 수가 인상을 약속했다. 또한, 지난해 12월부터 의료계와 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실무협의체 운영을 통해 적정 수가 결정과 심사평가체계의 합리적 개선 등 안정적인 진료 환경 조성 방안도 논의하였다.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선진 의료체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와 함께 의료전달체계 개편도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나라는 의료자원의 공급과 이용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 상당히 높은 실정이다. 적정한 의료 이용 문화가 정착되어야 건강보험의 지속가능성도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

<박능후 | 보건복지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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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조연보다는 주연에, 다수의 평범한 사람보다는 스타와 지도자에 주목한다. 그래서인지 중·고등학교 시절에 ‘동양화에는 여백의 미가 있다’고 배울 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여백은 산이든 집이든 그림의 핵심 소재를 그리고 남는 공간으로 보였을 뿐, 여백에서 아름다움까지 느끼기는 어려웠다.

‘여백의 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책으로만 보던 동양화를 실제로 봤을 때였다. 조그만 삽화가 아닌 실제 크기로 보니 화가가 무엇을 그리지 않고 여백으로 남겼을지 상상하게 됐는데, 상상의 내용이 그때그때 달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협롱채춘(나물 바구니를 옆에 끼고 봄을 캐다)’이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여인이 보고 있는 것은 봄이 피어오르는 먼 산일까, 연두빛이 일렁이는 들판일까?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말을 타고 꾀꼬리 소리를 듣다)’에서 말 탄 선비의 뒤편은 수양버들 드리운 개울이었을까, 나룻배가 떠다니는 한강처럼 큰 강이었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여백은 그리고 남는 공간이 아니었다. 잘 안배된 여백은 끊임없는 상상을 불러일으켰고, 하나의 그림을 온갖 그림으로 만들었다. 무엇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그림 전체의 이미지를 바꾸는 가능성을 가진 공간, 변화무쌍한 공간이 여백이었다.

■ 주목받지 못한 여백

내가 여백의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했듯,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에서도 여백이 주목받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은 신경세포 주변의 혈류량 변화를 통해서 신경세포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측정하는 기술이다. 신경세포가 전기적인 활동을 일으키면, 에너지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신경세포 주변의 혈류량이 늘어난다. 그 결과 주변 혈액의 자기적인 성질이 달라지는데,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은 강한 자기장을 활용해서 이 변화의 크기를 측정한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을 활용한 초기 연구에서는 특정한 작업을 하는 동안의 뇌 활동에서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을 빼는 방식으로 해당 작업에 관련된 뇌 부위를 추론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의 뇌 활동을 연구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이 까만 화면과 예술 작품 사진을 몇 초씩 번갈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술 작품을 보는 동안의 뇌 활동에서 까만 화면을 보는 동안의 뇌 활동을 빼는 방식으로, 예술 작품 감상에 관련된 뇌 부위들을 찾아냈다. 이런 실험 구조의 이면에는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까만 화면을 보는 동안의 뇌)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기준선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즉, 쉬는 동안의 뇌 상태는 별다른 내용이 없는 여백에 가깝고, 뭔가를 하는 동안의 뇌 상태는 그려진 대상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 쉬는 동안의 뇌 활동

그런데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다 보니, 뇌에는 열심히 뭔가를 하는 동안 활성화되는 부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억제되는 부위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앙전전두엽, 측두엽-두정엽 연접부위, 측두엽의 일부 영역들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가만히 있을 때보다 활동량이 줄어들었다. 자연스레 의문이 제기되었다.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은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여백일까?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에 뭔가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쉬는 동안의 뇌 활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기 시작했다. 연구 결과, 뇌는 쉬는 동안에도 열심히 뭔가를 생각하는 동안에 소모되는 에너지의 90%가량을 소모하면서 활발히 활동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쉬는 동안에 더 활성화되는 뇌 부위들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생각,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과 상상, 도덕성에 관련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 부위들의 연합은 기본 상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불리며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은 최근의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뇌는 신경세포들의 거대한 네트워크이므로, 뇌를 이해하려면 네트워크의 어떤 부위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살펴야 한다.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은, 실험을 설계할 필요 없이 가만히 쉬는 동안의 뇌 활동을 측정하기만 하면 되므로, 뇌 부위들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얻기가 쉽다. 미국에서는 사람 뇌의 네트워크를 조사하기 위한 큰 프로젝트(휴먼 커넥톰 프로젝트)가 진행된 바 있는데,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은 이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였다. 뇌 활동의 여백에 주목하면서 뇌 연구가 크게 진척된 셈이다.

■ 이름 없는 이들의 7시간

2014년 4월16일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어이없는 진실이 밝혀지면서, 이름 없는 많은 이들의 7시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2014년 4월16일 그때 그 7시간, 그리고 내가 몰랐던 무수한 7시간 동안 충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이 많았으리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게 나라냐’ 싶던 시절에도 그런 이들이 있어서 나라가 어떻게든 굴러갔고, 그렇다고 자기 자리‘만’ 지키지도 않았던 이들 덕분에 ‘이게 나라냐’ 싶던 시절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당연하다는 듯이 버스가 오고 가게 문이 열리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홍도의 그림 속 여백처럼 이름 없는 무수한 이들에게 전체를 바꾸는 가능성과 변화무쌍한 힘이 담겨있었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 연구가 뇌 활동의 여백에 주목하면서 발전했듯이, 이름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에게 향하는 관심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송민령 |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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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주말에 차이나타운 갈 건데 짜장 빙수는 어디에서 팔아?” 친구가 갑자기 말을 걸어온다. 내가 그런 건 처음 듣는다고 하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 지역민이 모르는데 관광객만 아는 ‘명물’이란 대개 빛 좋은 개살구이거나 별것 아닐 확률이 높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차이나타운 근처에서 일하게 됐을 때 처음에는 동네의 모든 집을 가봐야겠다 다짐했고, 어디가 가장 맛있는지 알아내고 말겠다는 각오로 많은 집을 가봤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맛집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굳이 줄을 서고 긴 기다림을 감수하면서까지 먹어야 할 만큼 맛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할뿐더러, 유명한 곳이라며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식당은 오히려 피해 다닌다.

요즘 많은 TV 프로그램에서 여행을 다루고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맛집 메뉴를 세세하게 보여주고, 유명한 음식 아이템은 비교분석까지 해준다.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넘쳐나다보니 여행 역시 간접체험으로 사전 확인을 마치고 떠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기내식은 물론 한국인이 많이 간다는 휴양지 리조트의 룸서비스 메뉴와 가격, 먹을 만한 메뉴까지 검색 몇 번으로 알 수 있는 세상이다. 폭풍 검색을 하고 떠나면 자유여행이어도 패키지 여행처럼 예측 가능한 여행을 다닐 수 있다. 요새 유행한다는 ‘언박싱’(unboxing·상자를 연다는 뜻으로 제품의 개봉 과정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의미하기도 한다)과 비슷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언박싱 영상이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여행의 경우 ‘○○ 가봤니’ ‘○○ 가면 꼭 가야 할 맛집’ 등으로 그대로 따라 해도 될 법한 일종의 가이드북으로 기능한다. 엑기스만 뽑아 보여주는 영상을 보다 보면 현지 맛집에서 뭘 먹게 될지, 먹으면 어떤 맛일지, 한국인 입맛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조차 예측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맛집 도장깨기’처럼 “나도 거기 가봤다”에 의의를 두는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실패는 돈 낭비로 이어지기 마련이니, 힘들게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나온 여행에서 불확실한 건 용납할 수가 없는 거다. 실패하지 않을 코스만 골라 가성비 좋은 만족감을 구매하려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일상과의 간격을 만들어내는 여행에서조차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면, 새로 구입한 물건 상자를 뜯는 것처럼 명확하다면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실제로 동남아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현지에서 꼭 가봐야 한다는 레스토랑에 갔더니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람이 꽤 있고, 여기저기서 유창한 한국말이 들려온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에도 줄줄이 한국인들이 들어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메뉴를 주문하는데 데자뷔가 따로 없다. 블로그에 많이 나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국 사람들만 오는 곳일 줄이야…. 또 다른 레스토랑에서는 아예 종업원이 “한국 사람들 먹는 메뉴는 이거”라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메뉴 몇 개를 골라줬다. 블로그에서 본 메뉴랑 똑같다. 조금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런 영상이 활성화되기 전에 가봤던 오키나와 여행에서 기억나는 것은 꼭 가봐야 한다는 수족관이 아니었다. 블로그에도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던 동네 술집에서의 저녁이었다. 한국에서 온 우리, 막 퇴근한 중년 일본인 회사원, 중국에서 온 가족 손님까지 둘러앉으니 좁은 선술집 테이블은 꽉 찼고, 몇 개 되지 않는 안주 메뉴에서 절묘하게 다른 안주를 선택하는 걸 보며 신기해하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어떤 술을 마실까 고민하던 우리에게 꽤 유창한 영어로 술에 대해 설명해주던 일본 손님과 부딪쳤던 술잔의 소리까지도…. 어쩌면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지 카페에서 읽었던 책의 한 구절, 어쩌다 발견한 맛집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떠올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때로 여행은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되기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듯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풍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4월, 본격적인 여행 시즌이 다가온다. 떠나려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다 풀어놓은 상자를 나도 개봉하는 데 의의를 두는 여행보다, 나만의 상자를 새롭게 발견하는 여행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여행에서만큼은 조금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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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홈페이지에 설치된 청원 게시판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만명 이상이 동의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청와대가 공식적인 답변을 한다. 여론에 대한 책임정치를 구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현상이다.

청원 게시판이 순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 대중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는 청원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중은 선정적이거나 선동적인 주제에 쉽게 휩쓸린다. 특히 청와대 청원 게시판처럼 익명으로 동의를 표시할 수 있는 경우에는 주제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엄청난 동의가 몰릴 수 있다. 무책임한 대중 선동이 가능한 것이다.

그 결과 청원 게시판에서 20만명 이상 동의를 받아 접수된 청원들 중 상당수는 대통령 권한 밖의 것, 혹은 정부 개입의 이유가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약속이니 청와대는 대답을 해야 한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답변해야 하는 청와대의 입장도 곤란하다. 이때 할 수 있는 일이란 상식적이고 무난하면서, 반발이 비교적 적은 답변으로 얼버무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때 교육이 자주 선택된다는 것이다. 흉악 범죄가 발생해 국민들의 공분을 사면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천안함 침몰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하면 “안보교육을 강화”하고,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발생하면 “안전교육을 강화”한다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선 학교의 시간표는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에 의해 이미 꽉 차 있다. 국가 교육과정은 수많은 교육전문가들이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간 연구하고, 현장 교사들의 검토를 거친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 교육’을 급조해 추가한다면, 애써 만든 교육과정이 누더기가 되거나 ‘○○ 교육’을 형식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교육을 하루살이 누더기로 만드는 데는 진보, 보수 정권의 차이가 없다. 이번 정권에서 특별자문위원회까지 만들어 마련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대책은 결국 학교에 ‘메이커 교육’ ‘코딩 교육’을 추가하는 것이고, 저출산 고령화 대책은 초등학교 저학년 하교 시간을 늦추어 학교를 저렴한 어린이집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최근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으니, 분명 학교에 ‘양성평등 교육’ ‘성폭력 예방교육’을 강화하라는 공문이 날아올 것이다.

교육은 학생의 성장과 발달 단계에 맞는 수준과 분량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각 학년별 교육 내용과 교육 분량은 이러한 수준과 분량을 고려해 배치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게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서, 혹은 지금 쟁점이 되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교육 내용이 추가된다면, 이렇게 세심하게 배치되고 구성된 교육과정의 기초가 흔들리며 결국 공교육 전체가 균형을 잃어버린다.

인간의 신경계는 유한하다. 중요하다고 주장되는 것들을 한번에 모두 학습할 수 없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신경계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 인간의 신경계는 학습과정을 통해 성숙하면서 구조화된다. 이 중요한 시기에 잘못 구조화된 신경계는 어른이 된 다음 바꾸기 어렵다. 나이가 어릴수록 새로운 교육요소의 도입이나 변경은 신중해야 한다. 작은 것 하나를 바꾸거나 도입하더라도 교사를 비롯한 교육전문가들의 폭넓은 토론과 연구가 있어야 한다. 무슨 일 터질 때마다 추가되는 ‘○○ 교육 강화’라는 대책은 제발 그만 보았으면 한다.

<권재원 |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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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새는 깃털 대신 솜털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날개가 달려 있지만 솜털이라 아직은 깃을 칠 수 없습니다. 솜털이 차츰 깃털로 바뀌고 날개 힘까지 충분히 길렀을 때야 비로소 둥지를 박차고 높이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둥지의 새끼들 가운데도 늦자라서 아직 솜털 남은 녀석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꼴로 나도 날겠다고 뒤따라 둥지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아직 역량이 충분치 않은데 감당 못할 욕심을 부린다는 속담, ‘깃털도 안 난 것이 날기부터 하려 한다’의 최후입니다.

비단 새뿐만 아니라 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는 부모한테 가려는 마음만 앞서 뒤뚱뒤뚱 막 뜁니다. 그러다 다리가 걸려 엎어지고 웁니다. 아기 있는 집에서 흔히 보는 광경이죠. 그런 모습에서 나온 속담이 ‘걷기도 전에 뛰려 한다’입니다. 또한 ‘이도 안 난 것이 갈비부터 뜯으려 든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아직 젖니도 안 났으면서 고기 냄새에 끌려 자기도 먹겠다고 손을 댑니다. 이유식도 못 뗀 주제에 갈비 움켜쥔들 뜯기나 하겠습니까? 그저 침이나 잔뜩 묻히고 말겠지요.

이 세 가지 속담 모두 아직 ‘어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말귀도 못 알아듣는 그들이 아니라 어린애처럼 턱없이 욕심부리는 어른들한테 하는 말입니다. 자기 능력에 맞는 욕심이라면 건강하고 발전적이겠지만, 이 말이 부정적으로 많이 쓰이는 까닭은 그것이 대개 과욕이기 때문입니다. 군침은 도는데 조건과 역량이 부족하니 불법, 편법, 연줄, 뒷길, 한탕에 기댑니다. 남의 깃을 솜털에 꽂고 무모하게 뛰어오릅니다. 잠시는 날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고도를 유지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허황된 날갯짓은 바닥으로 추락할 수밖에요. 지금 걸음마 단계라면 밑을 보고 한 발, 다음 발 디디며 옳게 걸어가야 합니다. 갈비 욕심에 뛰면 다칩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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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야심차게 추진하는 우주굴기의 한 상징인 톈궁 1호가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졌다는 뉴스를 접한 후 가끔 하늘을 보았다. 육안으로 포착할 수는 없지만 저 가물가물한 어딘가에 톈궁이 어쩌면 나를 겨냥하기도 하면서 추락하고 있다는 거 아닌가. 하늘과 나의 관계는 이처럼 직접적이다. 비가 내리면 내가 몸소 맞아야 한다. 누구의 허락이나 눈치를 볼 일이 없다. 언젠가 하늘로 가야 한다는 나의 운명도 지금 저 어딘가에서 차츰차츰 접근하는 중! 우주정거장 톈궁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생각은 강원도의 한 호숫가로 곧장 달려갔다. 작년 5월경 어느 야생화를 만날 때의 일이다.

바다와 이웃한 작은 호숫가에 엎드렸다. 발등만큼의 높이로 무리지어 핀 꽃은 멸종위기 2급으로 지정된 갯봄맞이였다. 꼿꼿한 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잎, 그 겨드랑이에 붙은 연붉은색의 꽃들. 그 너머로 모래밭이 있고, 그 모래밭을 철썩철썩 일렁이는 호숫물, 그 뒤로 싱그러운 산들. 참으로 보기 힘든 귀한 갯봄맞이를 찍으며 풍경을 일별해보는데 문득 우주중력을 다룬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무중력의 공간에서 우주미아로 떠돌 뻔한 여주인공(샌드라 불럭)은 우여곡절 끝에 중력이 작용하는 지구대기권으로 진입한다. 풍덩, 호수에 떨어진 뒤 우주복을 벗고 헤엄쳐서 가까스로 식물들이 우거진 해변에 닿아 정신을 수습한 샌드라 불럭. 눈부시게 푸르른 지구를 바라본다. 참으로 감격스럽게 도착한 그곳에서 마지막 대사를 읊는다.

THANK YOU. 그 장면을 보는데 조금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감독이라면 그에게 친구(親口)를 하게 하였을 것이다. 우주에서 가족이 기다리는 이 현실의 지구로 다시 들어온 감격에 격을 맞춘다면 모래 한 주먹을 고두밥인 양 씹어 먹어야 하지 않았을까!

혹 내가 있는 곳의 지붕에 떨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짐짓 호기를 부리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는 와중에 톈궁이 남태평양의 칠레 앞바다에 추락해서 소멸하였다는 속보를 전해 들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강원도 어느 해변의 갯봄맞이는 또 올해의 꽃을 활짝 피우겠지. 갯봄맞이, 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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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제자 자로로부터 “선생님에게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름을 바로 세울 것이다(正名).” 제자들이 실망하자 부연 설명했다. “명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말(言)이 서지 않고, 말이 서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禮)나 악(樂)도 일어나지 않으며, 예와 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형벌이 통하지 않으며, 모든 형벌이 통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다.” 사건·사물의 성격 규정을 바로 해야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고, 시민들이 따르는 정치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이처럼 이름이 중요하기에 한국의 근현대사에서도 정명을 얻으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은 동학난과 동학혁명을 거쳐 1990년대부터 동학농민운동으로 불린다. 동학이라는 종교집단의 반란쯤으로 치부되었다가 연구에 의해 외세에 맞선 반봉건 민중항쟁의 성격이 조명되면서 100년 만에 정명을 얻었다. 5·18 광주민주항쟁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아무런 가치가 부여되지 않은 ‘5·18’ 또는 ‘광주사태’로 불리다 30여년 만에 불의한 신군부에 맞서 싸운 민주항쟁으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제주 4·3에는 제대로 된 이름이 없다. 제주 인구의 10%가 희생된 이 참극은 여전히 4·3 ‘사건’이나 ‘사태’일 뿐이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제주4·3특별법도 성격 규명은 미룬 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무미건조하게 정의한다. 4·3이 제 이름을 얻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념적 접근 때문이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 폭력에 대한 사과를 계기로 4·3은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 방식으로 해결되어 가는 듯했다. 그러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보수단체들이 4·3을 다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주장하면서 꼬였다.

4·3은 7년 넘게 이어진 데다 한동네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나온 경우다. 누구는 정의로 부르고, 누구는 불의라고 하는 상태에서는 하나의 이름을 가질 수 없다. 모두가 같은 이름으로 4·3을 부를 때는 언제쯤 올까.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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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땐 몰랐다. 세월호 참사 당일. 나는 진도체육관에 있었다. 그곳은 세월호 실종자 가족으로 가득 찼다. 첫날부터 정부관계자와 실종자 가족 간의 구조작업을 둘러싼 진실공방이 이어졌다. 자정을 조금 넘길 무렵. 50대 남성이 체육관 연단 앞, 자유발언을 위해 놓아두었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한참을 흐느껴 울고 분노에 울던 남성이 목이 메어 던진 한마디는 “이게 나라냐”였다. 그땐 그 체육관 안, 작은 외침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몰랐다. 말하기가 두렵다. 느낌이 생생하다. 2006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한 장면, 대사가 뇌리를 스쳤다. “니들, 그 냄새를 맡아 본 적 있어? 새끼 잃은 부모 속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냐 이 말이여! 부모 속이 한 번 썩어 문드러지면, 그 냄새가 십리 밖에까지 진동하는 거여!” 그 냄새는 정말 있다. 그리고 몇 년 후… ‘이게 나라냐’는 외침과 촛불은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웠고,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을 위로했다.

#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일까. 공공의창·우리리서치는 최근 한국 사회 공공성지수 관련 여론조사를 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 필요성과 광화문촛불의 사회적 의미는 매우 높은 상관성(0.736)을 보였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공공성 확대 요구는 계속되어 왔다. 공공성 개념은 그 차원과 영역이 너무나 다양하지만, 헤겔의 말처럼 모든 개념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듯하다. 한국 사회의 공공성은 보수정부 10년 동안, 투명·소통·정의·평등·안전·공유·인권 등의 가치실현을 위한 욕구에 목말랐다. 공공성 확대는 제도뿐만 아니라 국민인식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공공성 인식은 제도에 대한 신뢰를 반영하며, 이는 제도 변화의 강도와 방향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다원화된 한국 사회에서 국가·시장경제·시민사회로 분화되고 다시 연결되는 공공의 역할을 절차적 투명성과 내용적 공익성 등 6가지 지수로 나누어 조사했다. 지수마다 동의 여부를 묻는 방식으로 질문했다. 국가의 소통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질문한 ‘국가가 국민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다’에 46%가, 국가의 정책편향성을 알아보기 위해 질문한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한다’에 30%가 동의했다. 또 시장의 공정경쟁 측면에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에 29%가, 시장의 공평배분 측면에서 ‘누구나 노력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에 25%가 동의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의 자율성, 즉 ‘우리 사회는 계층·지역·인종·종교 등에 의한 차별이 없는 사회’라는 데 23%만 동의했다. 담론권력의 공정성, 즉 ‘언론은 강자보다 약자를 잘 대변한다’엔 12%가 응답해 가장 낮은 동의율을 보였다. 응답자 절반 이상의 동의를 얻은 공공성지수는 없었고, 100점 만점에 평균 28점으로 평가되었다.

# 1인칭 숙제, 미투. 이번에는 촛불의 의미와 함께 미투 운동에 대해서도 물었다. ‘작년 광화문촛불이 부패한 권력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에 71%가 동의했다. 또 ‘미투 운동이 특정한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일상적인 문제’라는 주장에 77%가 동의했다. 전자의 광화문촛불이 질문 그대로 부패한 정치·경제 권력에 보내는 국민의 심판인 반면, 후자의 미투 운동은 촛불이 촛불에게 던지는 우리 모두의 공적 과제인지도 모른다.

# 대한민국엔 희망이 있을까. 끝으로 두 개의 질문을 더 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한국 사회에서 가능하다고 보는지’를 물었다. 가능하다는 응답이 59%로 가능하지 않다는 응답(27%)보다 높게 나타났다. 또 ‘한국 사회는 정말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으로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바뀔 수 있다는 응답이 53%로 바뀌지 못한다는 응답(26%)보다 높았다. 슬픈 현실과 절박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가을곡식의 볕이 되고 어두운 밤의 별이 되어 불어오는 ‘천개의 바람’도 우리와 함께 희망이 될 것이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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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아파트단지와 계약한 재활용업체들이 폐비닐·스티로폼은 물론 플라스틱도 재활용품으로 분리수거하지 않겠다고 하자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일부 단지에서는 비닐·플라스틱 등을 분리수거함에 배출하는 대신 종량제 봉투에 담도록 요구함으로써 혼선을 부추겼다. 재활용 가능 자원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배출하면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환경부는 부랴부랴 48개 재활용업체와의 협의를 거쳐 폐비닐·스티로폼·플라스틱 등의 정상수거 계획을 확인했다.

환경부가 폐비닐과 스티로폼, 플라스틱 등을 정상 수거하기로 수도권 지역의 재활용품 수거업체들과 협의했다고 밝힌 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아파트에 폐비닐과 스티로폼, 플라스틱 등이 담긴 쓰레기 봉투가 쌓여있다. 권도현 기자

이번 ‘재활용 쓰레기 대란’은 지난해 7월 중국이 고체 폐기물 24종의 수입을 중단한 것이 으뜸 요인이다. 폐기물들의 가격이 폭락하자 국내 재활용업체들도 수거를 꺼리게 됐다. 최대 폐자재 수입국인 중국의 수입중단조치는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하지만 ‘환경보전과 위생보호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중국의 태도에 토를 달 수는 없다. 오히려 호황일 때의 시장구조에 안주했다가 중국이라는 돌출요인에 취약점을 드러낸 정부와 지방정부, 아파트단지, 업체 등이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정부는 이미 지난해부터 청주와 대구 등에서 재활용품 수거 문제가 불거졌지만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또 현행법상 쓰레기를 처리해야 하는 기초자치단체는 수십년간 개별 아파트단지에 맡긴 채 손놓고 있었다. 개별 아파트단지가 자체 수익을 위해 민간 재활용업체와 계약해온 수십년의 관행 때문이기도 하다. 정부는 수거업체 지원, 폐비닐·일회용컵 등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등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지자체 역시 쓰레기와 관련한 법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개별 아파트단지에 넘겨준 쓰레기 처리권을 회수하든지, 아니면 각 단지의 재활용품 배출현황을 파악할 시스템을 갖추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 아파트단지들도 자체 수익에만 연연하지 말고 처리비용을 탄력적으로 분담하는 상생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주민들에게도 업체가 수거한 분리배출용품의 30~40%는 이물질 때문에 쓸 수 없고, 따라서 소각비용만 추가로 든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2016년 전 세계에서 판매된 플라스틱병(페트병)은 4억종에 이른다. 그러나 재활용률은 단 7%였다. 그런 플라스틱병이 분해되는 데는 450년이 걸린다. 영원히 분해되지 않는 스티로폼, 유리병(100만년), 일회용 기저귀(500년) 등과 함께 ‘신(新)십장생’의 대표주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번 쓰레기 대란을 재활용 분리수거의 기본부터 다시 배우고, 아울러 플라스틱 남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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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의 예고 없는 대입제도 변경 추진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수시 전형 확대를 독려해온 교육부가 갑작스레 내년 대학 입시부터 정시 선발 인원을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시 전형에서 객관적인 평가지표로 활용돼온 대학수학능력시험 최저학력기준 폐지 또는 축소를 대학에 권고해 교육부가 추진하는 대입정책이 수시와 정시, 어느 쪽에 방점이 찍혀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정시 선발 인원 확대는 수능을 강화하겠다는 것인 반면 수시에서 최저학력기준 폐지 또는 축소는 수능 영향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부가 추진하는 대입정책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박춘란 교육부 차관은 지난달 28~30일 서울 주요 10개 대학 총장 또는 입학처장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걸어 “2020학년도 대입부터 정시 선발 인원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연세대는 지난 1일 내년 입시부터 정시 선발 인원을 전체 정원의 3분의 1 수준으로 늘리고, 수시 전형에서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폐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서강대·성균관대·동국대 등도 정시 선발 인원을 늘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매년 선발 비중이 확대돼 올해 76.2%로 늘어난 수시 전형에 대한 신뢰도는 낮은 편이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그동안 정시 선발 인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대표적인 수시 전형인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은 사교육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데다 합격기준이 모호해 ‘금수저 전형’ ‘깜깜이 전형’으로 불리며 폐지 여론이 높았다. 교육부가 수시 전형에서 수능 최저학력기준 폐지 또는 축소를 대학에 권고하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최저학력기준 폐지 철회’를 요구하는 글이 8만건 넘게 올라온 것도 학종에 대한 불신을 방증한다.

교육부는 정시 선발 인원 확대와 수능 최저학력기준 폐지는 ‘대입제도 제자리 찾기’ 일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대입 3년 예고제’를 무시하고 대입제도의 골간을 흔드는 정책을 느닷없이 추진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공청회를 통한 여론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학에 정시 선발 인원 확대와 최저학력기준 폐지를 요청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교육부는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대입제도 변경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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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일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의 단독 공연 ‘봄이 온다’를 부인 리설주와 함께 관람했다. 북측 최고 지도자가 남측 공연을 직접 관람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공연이 끝난 뒤 남측 출연진과 만나 “문화예술 공연을 더 자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에 ‘봄이 온다’고 했으니까 여세를 몰아 가을엔 ‘가을이 왔다’고 하자”면서 “이런 자리가 얼마나 좋은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 공연’이 열린 1일 오후 동평양대극장에서 남측 예술단이 공연에 앞서 최종 리허설을 하고 있다. 이날 공연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내외가 참석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조용필·이선희, 걸그룹 레드벨벳 등 11팀으로 구성된 남측 대중예술인들의 이번 무대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평창 동계올림픽 축하공연에 대한 답방 형식이자 조용필 평양 콘서트 이후 13년 만의 방북 공연이다. 남북의 예술인들이 서로 오가며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습은 훈훈한 광경이었다.

김 위원장은 공연을 관람한 뒤 “우리 인민들이 남측의 대중예술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고 진심으로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고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북측 관객들은 남측 예술인들을 시종 환호와 박수로 맞았고, 공연 막바지에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기립박수를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공연 후 출연진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기도 했다. 레드벨벳은 “예상외로 호응이 너무 좋았다”며 “이번을 계기로 남북이 많이 교류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당초 레드벨벳이 방북 공연단에 포함되자 자유분방한 율동과 노래에 북측이 저항감을 가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결국은 기우였을 뿐이다.

걸그룹이나 록밴드의 공연에 민망해하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던 2000년대 방북 공연과 비교해 보면 북한 사회가 그만큼 개방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유럽 유학경험이 있어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개방에 대한 저항감도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남북 간의 문화교류가 크게 확대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한 남북 당국 간의 협력도 중요하지만 사람들 간의 이질감을 줄이고 ‘마음속 빙벽’을 녹이는 문화·예술·체육 교류가 이번 공연을 계기로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결국은 서로 오가며 자주 만나는 과정 속에서 탄탄하게 다져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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