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 읽기 모임에 다녀왔다. <현남 오빠에게>라는 소설집을 읽고 느낀 점을 30~40대들이 토론하는 자리였다. 소설은 연애, 결혼준비, 결혼, 육아 등을 여성의 시선에서 풀어낸 내용을 담았다.

성차별적인 직장과 가부장적인 가족 때문에 한국이 여성이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일하며 살기에 가혹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출산과 육아는 여성의 몫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여전히 많지만, 조직은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정에서 느끼는 책임감은 조직생활에서 무책임으로 해석되고 만다. 보육시설은 부족하고 문제가 많기 일쑤다. 남성 육아휴직도 걸음마 중이다. 이런 구도를 간파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이 결혼, 출산, 육아를 부담스러워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농경사회’에 태어난 세대의 전통적 가족관은 여전하다. <아침마당> 같은 TV프로그램의 주역인 중년 출연자들은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지만, 여자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전통적 가치를 옹호한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집에 인사 온 예비 며느리에게 앞치마를 안기고 과일 깎는 실력을 평가한다. 인사치레라도 아들에게 아침을 잘 챙겨주겠다는 며느리를 좋아한다. “아이가 생기고 나면 ‘어른의 말씀’을 이해할 것”이라며 자신을 이해해주길 기다리는 시어머니들도 많다. “요즘 애들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지만, 전통적 가치는 공기와도 같다. ‘주말연속극’에 3대가 모여 사는 현실에 없는 단독주택 대가족이 나오듯이, ‘무난한 가족’도 토크쇼상에서만 은연중에 유지되는 셈이다. 세대 간 인식이 서로 포개지지 않기에 당연히 이해되는 게 적다. 결혼과 육아 비용만큼 소통 비용도 올라간다.

토론이 시작되고 기혼 남성인 나는 가만히 들어보려고 했다. ‘난 어떤 실수를 하고 있는가. 난 어떻게 오만한가?’ 성찰의 시간으로 삼으려 했다. 한 여성의 시댁 방문담에서 예상은 좀 틀어졌다.

또래의 그녀는 20~30대 여성들이 대개 그렇듯 딸·아들을 구분하지 않는 집안에서 자기 이름으로 일하며 살라고 교육 받고 자랐다고 한다. 시댁에 인사 간 날, 시어머니는 앞치마를 손에 쥐여줬다고 한다. 시댁 식구들은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편하게 드러누워 TV를 봤단다. 그녀도 앞치마를 치우고 그냥 소파에 같이 앉았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어디서 저렇게 버릇 없는 애가 왔냐”면서 야단을 쳤단다. 그녀는 “이 집에 시종으로 온 거 아니잖아요”라며 받아쳤다. 부당하면 부당하다고,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딸같이 생각해서 그런 거다” 하면, “엄마 말 곧이 듣는 딸이 어디 있어요. 다들 대들고 투닥거리죠” 하면서 반박했다. 몇 년 지나 둘은 동네 사람들이 시샘할 정도로 좋은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지나고 보니 며느리가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정말 좋다고 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 <현남 오빠에게>, 웹툰 <며느라기>는 ‘말할 수 없는 여성’과 ‘말 못하게 만드는 구조’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딸, 며느리, 엄마, 아내이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고구마 몇 개 먹은 것처럼” 답답함을 주는 구조를 말한다. ‘미투’ 운동은 이 세계 속 성폭력이 얼마나 처참한 것이었는지를 전한다. 일련의 분위기에서 의아한 것은 ‘따지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가족관계를 노사관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의 일터는 도식적으로 보면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고 노동자를 소외시키며 전근대적인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 위계관계를 강요한다. 그러나 착취와 소외는 노동조합과 사측의 교섭에 따라 변화한다. 협상하다 고성이 오갈 수 있다. 대화가 안되면 파업과 직장폐쇄가 벌어지기도 한다. 제대로 된 협상 과정으로 신뢰의 합의 도장을 함께 찍어야, 서로 존중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의 고부관계에는 충분한 교섭이 없다. ‘가정의 평화’를 바라는 ‘중재자’이자 ‘효자’인 남편들은 엄마에게는 자신이 따질 테니, 아내에게 ‘무난함’으로 시어머니의 말을 ‘그러려니’ 들으라 한다. 지지받지 못하는 아내는 피곤한 교섭을 회피하게 된다. 자괴감에 낙담하기 일쑤다. 가부장제가 지지하는 성역할의 근본적 모순은 ‘여-여 갈등’으로 축소되고 은폐되기 마련이다. <B급 며느리>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주인공은 ‘못된’ ‘B급 며느리’로 불린다. 전통의 가치관을 고수하는 시어머니에게 할 말은 하며 끊임없이 교섭을 추구하고 필요시 분쟁도 감수한다. 협상이 결렬되면 연락을 끊거나 명절 방문을 취소한다. 남편 할머니집 ‘비무장지대’에서 ‘중재’가 벌어지기도 한다. 고부간에 극한 대립을 하는 것 같지만 이는 서로 ‘지켜야 할 선’을 이해하는 가족의 학습과정이 된다.

여성이 미투의 광장에서처럼 ‘시월드’에서도 크든 작든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며느리가 무난할 필요 없다”는 게 보통사람 다수의 상식이 되는 것을 정책의 목표로 해야 한다. 부모세대가 젊은 세대의 맥락을 이해하고, 새 가족을 잘 맞이할 수 있게끔 도움 받을 수 있는 ‘부모 학교’를 며칠간 열면 어떨까. 본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냉랭한 기운을 이해하고 타파할 계기가 될 것이다. 아침 방송도 ‘며느리 길들이기’ 대신 분투하는 여성들의 ‘교섭 사례’를 다뤘으면 한다. 주변의 민주적이고 대안적인 가족들을 지상파 황금시간대에 편성해 보여줘야 한다. 방관하지 않는 남자들도 만들어야 한다. ‘뭘 하면 안되고 문제인지’뿐만 아니라,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풍성해져야 한다. 가사 참여뿐만 아니라 좋은 가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평범한 남성들에게 롤모델로 보여줘야 한다.

어쩌면 구시대적인 가족과의 분쟁까지 감수하며 ‘결혼’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교섭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아”(비혼)는 일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이미 의미 있는 선택지가 됐다. 결혼이 무릅쓰고라도 해볼 만한 게 아니라면 점점 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결혼해도 괜찮아” 하며 안심할 수 없다면, 자발적 고독마저 감수할 것이다. 전통가족과 직면하여 반문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려는 며느리의 목소리를 응원하고, 그들이 고립되지 않게 제도적인 소통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 가족의 소통 비용을 낮춰주는 것은 이미 지체된 사회에 부여된 최소한의 과제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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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가운데 목요일에 매료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나무 목자, 목요일. 나는 나무를 사랑하다 못해 정원사까지 되었어라. 내 정원을 한번 구경해본 사람이라면 정원사라는 말에 트집 걸지는 못할 것이다. 울타리 솔숲과 갖가지 정원수로 꽉 찬 정원. 며칠 봄비가 내린다 하여 나무마다 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냈다. 내 손바닥은 나무의 살결 수피처럼 거칠고 딱딱해졌다. 샌님의 곱디고운 그런 손길이 아니다. 갈라지고 파이고 딱딱하며 거친 손. 악수하는 이들마다 무슨 공사하고 왔냐 캐묻는다. 나무를 매만지면 저랑 같은 동족인 줄 알고 가지를 쭉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라.

티베트 사람들은 이웃과 포근한 정을 나누기 위해 통렌(Tonglen)이란 수행법을 사용한다. 정을 나누며 살고픈 사람을 생각하고 그의 근심 걱정, 고통을 헤아려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폐부 깊숙이 그의 모든 어두움을 삼킨 뒤, 다음은 천천히 숨을 내쉰다. 이때 그를 축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훅~’ 내쉬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나무는 이미 오래전부터 통렌 수행을 해온 수도자 같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그늘을 들이마신 뒤, 우리에게는 밝음과 미소 그리고 맑은 공기를 안겨주는 나무. 목요일에 이르면 비로소 정신이 차려지고 숨도 고르게 쉴 수 있게 된다. 나무의 날은 평화와 안식의 날.

꼬리가 잘린 여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솔로’ 여우는 제 꼬리를 베고 단잠을 잔다. 여우 꼬리의 전설은 대부분 배필, 짝을 상징한다. 꼬리 달린 모든 짐승들은 꼬리로 대화도 나눈다. 마찬가지로 나무도 대지의 꼬리. 목요일은 일주일의 꼬리부분이다. 일에서 놓여날 수 있는 금토일이 머리 부분이라면 월화수는 생을 살아가는 본디박이 몸통. 그러다 목요일이 되면 살랑살랑 봄바람에 춤을 추는 꼬리처럼 휴일이 설레어서 행복해진다. 나무는 다른 날보다 배나 어깨를 들썩거린다. 요샌 보통 목요일 밤에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더라. 금요일 오후부터는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목요일 밤엔 나무그늘 아래서 혼자 고독하게 차 한 잔 즐겨도 좋다. 나무 목요일, 나무아미타불. 이날엔 누구나 부처님처럼 성불할 수가 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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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2000년 연 451만1000원이었던 4년제 사립대 평균등록금이 지난해 739만9000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만약 2000년 이후 대학들이 매년 물가상승률만큼만 등록금을 올렸다면 지난해 등록금은 연 700만원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비록 지난 수년간 대학들이 등록금을 동결 및 인하해 왔으나 여전히 대학 등록금은 ‘비싸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향후 3~4년 동안 등록금 인상 억제 기조를 유지하면 2000년 이후의 대학 등록금 인상률이 같은 기간의 물가상승률과 비슷해질 것이라며 당분간 등록금 인상 저지 방침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필자는 교육문제에 관심이 많은 경제학자로서 교육부의 이러한 주장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교육부가 등록금 동결을 고수해서가 아니라, 교육부 관료들의 무지함에 놀라서이다. 교육부가 제시한 계산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0년 소비자물가지수(기준연도 2015년)는 66.6으로서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 102.9와 비교하면 그간 1.55배의 물가상승이 있었다. 만약 대학 등록금이 같은 비율로만 상승하였다면, 지난해 대학 등록금은 2000년 연 451만1000원의 1.55배인 약 700만원이 적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가 놓친 것이 있다. 바로 우리 경제의 성장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지금은 1인당 GDP 3만달러를 내다보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우리 사회의 모든 시스템과 재화 및 서비스의 공급이 이러한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교육 서비스 역시 이에 합당한 양적·질적 발전을 꾀하는 것이 바로 ‘성장’이다. 지난 2000년의 우리나라 1인당 GDP는 1만1950달러로, 원화로 환산하면 약 1351만원이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2만9740달러로, 원화로 환산하면 약 3364만원이다. 1인당 GDP로 따진다면, 2000년과 지난해의 차이는 무려 2.5배에 달한다. 말하자면, 2000년의 대한민국과 오늘의 대한민국은 완전히 다른 사회라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10년이 근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렇다면 경제의 성장과 사회 전반의 발전까지 고려한 적절한 수준의 등록금은 얼마인가. 당연히 2000년 당시 연 451만1000원의 약 2.5배인 1127만8000원이다. 만약 교육부가 2000년 당시의 대한민국에 걸맞은 대학교육을 원한다면 여전히 등록금은 ‘비싸다’. 만약 교육부가 2018년의 대한민국에 걸맞은 대학교육을 원한다면 지금의 등록금 약 740만원은 싸도 너무나 싸다. 소득 3만달러 시대의 대한민국에 소득 1만달러 수준의 대학교육을 강요하는 교육부라면 역사를 거꾸로 살기로 작정한 조직이다.

교육부의 등록금 동결 정책 자체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없다. 선진적인 복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를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등록금은 여전히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등록금을 요구하는 미국의 사립대학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대학 재정의 대부분을 국가가 보전하고 있다. 물론 등록금도 없다. 미국과 비교한다면 우리나라 사립대의 등록금이 아주 싼 편이지만, 등록금이 거의 전무한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하면 매우 비싸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정부의 장기적 전략과 정책적 판단이다. 대학 운영에 대해 미국식 자유화를 추구해갈 것인지, 무상교육에 기반한 유럽식 복지체계를 따라갈 것인지에 따라 대학의 재정조달 방식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교육 복지에 대한 국민적 요구의 증대에 따라 지난 10여년간 등록금 인하 정책을 고수해 왔다. 이는 장기적으로 유럽식 복지체계를 일부 수용하겠다는 정부 차원의 선언인 셈이다. 그러하다면 대학의 재정조달 역시 일정부분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철학적 고민 없이 물가상승률 타령을 하면서 대학 등록금이 아직 비싸다고만 외쳐대는 것은 너무 안이한 태도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다. 새 시대에 적합한 인재 양성을 위해 모든 국가들이 전략적으로 고등교육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지난해 사립대 평균등록금(약 740만원)은 딱 2009년의 등록금과 일치한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한다면, 2009년 이후 대학의 재정 상태는 ‘성장’은 고사하고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그나마 확대된 대학재정지원사업들은 되레 정치적으로 악용되며 대학을 더욱 혼돈 속에 빠져들게 했다. 진정으로 대학교육의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부라면 ‘등록금 동결’ 이상의 무언가를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김영철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교육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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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amazon)의 로고에는 노란색 화살표가 A에서 Z까지 그려져 있다. 아마존에는 모든 상품이 있다는 뜻이다. 제프 베이조스가 1994년 시애틀의 작은 차고에 차린 온라인 서점에서 출발한 아마존은 20여년 만에 유통업계의 거물이 됐다. 로고에 담긴 의미대로 사업 영역을 전자제품, 소포 배달, 트럭 영업, 자동차 부품, 슈퍼마켓 등으로 넓혔고, 온라인 시장의 40%를 장악했다.

‘산업계의 포식자’가 된 아마존에 대한 미국 내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블룸버그통신은 ‘아마존이 되다’(To be Amazoned)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아마존이 당신의 사업분야에 진출했으니 망하는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아마존의 저가 공세에 밀려 도산한 기업은 부지기수다. 장난감업체 ‘토이저러스’와 스포츠용품 업체 ‘스포츠 오서리티’는 사업을 접었고, 백화점들도 오프라인 매장수를 줄이고 있다.

아마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아마존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아마존이 세금을 회피하며 낮은 배송료로 연방우정국의 손실을 늘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베이조스가 소유한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에 대해서는 “아마존의 로비스트”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트럼프의 맹공에 아마존의 주가는 급락해 시가총액이 600억달러나 증발됐다.

트럼프가 아마존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는 것은 워싱턴포스트에 대한 보복 성격이 짙다. 지난 대선 때 워싱턴포스트는 베이조스의 지시로 특별취재팀을 꾸려 트럼프의 각종 정책을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당시 트럼프가 “내가 당선되면 워싱턴포스트는 사라질 것”이라고 하자 베이조스는 “트럼프를 로켓에 태워 우주로 보내버리겠다”고 맞받아쳤다.

앙숙 관계를 지속해온 트럼프와 베이조스의 싸움이 어떤 결말을 낳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트럼프는 임기가 정해져 있는 대통령이지만 베이조스는 임기가 없는 기업 최고경영자라는 점이다. 이를 잘 아는 베이조스가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장기전으로 가면 트럼프는 ‘아마존이 되다’와 같은 처지에 내몰릴 수도 있다. 트럼프가 싸움의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일지 모른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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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써줘서 고맙습니다.”

지난달 9일 중증질환 어린이 엄마들의 사연을 기사로 쓰고 받은 문자 메시지 중 하나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라고 답변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아픈 아이를 직접 보고 엄마들을 인터뷰했다. 힘든 취재였다. 몸은 고될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가슴이 너무 아팠다. 평범한 엄마나 아빠들을 취재차 만나면 아이들을 공통의 화제로 삼아 긴장을 풀어주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질문 하나하나에 신중함을 담으려 했고, 아이를 향한 눈길 하나하나도 조심했다.

되레 취재에 응해준 엄마들은 담담했다. 아이들의 사진이나 이름을 기사에 공개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아이가 현재 갖고 있는 장애와 그로 인한 막대한 의료비, 치료 과정에서 실감한 어려움을 가감없이 이야기해줬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취재할 때는 현재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집중하기 쉽다. 기사에서 그 고통을 극대화시켜 보여주고, 이를 통해 정책 담당자들이 움직여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엄마들은 그런 기사를 바라지 않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를 바랐다. 동정에 따른 도움이 아니라 시스템을 통해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기를 원했다.

6살 태경이의 엄마 강혜연씨는 지난달 12일 청와대 인터넷 홈페이지에 청원을 올렸다. 단순히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다른 엄마들의 의견을 모아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적었다. 강씨는 “저의 아이는 희귀 질환이지만 지정된 코드가 없어서 지정 코드가 있는 희귀질환 환아들과 달리 산정특례의 적용 및 의료 혜택을 받을 수도 없는 실상”이라며 “1년에 적게는 몇 백만원 많게는 몇 천만원씩 의료비로 나가며 저희 아이처럼 태아보험마저 들 수 없었던 환아들은 의료비로 더 힘든 병원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의 아이들이 응급상황이 오면 순간 부모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24시간 병원 콜센터가 필요하며 재택의료(의료진왕진), 방문교육으로 의료진이 직접 중증 환아들을 진료해줄 수 있도록 저희와 같은 부모마음으로 힘을 보태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산정특례 확대로 꼭 필요한 이들이 의료혜택을 꼭 받아 치료 과정에 어려움을 받지 않도록 진정한 검토를 두 손 모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도 썼다.

본재 엄마 허아현씨(가명)는 인터뷰 중에 “본재 같은 아이와 저 같은 엄마들이 언론에 나오면 꼭 후원받는 계좌번호가 함께 뜨던데, 왜 정부가 지원을 하지 않고 사람들의 후원에 기대게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픈 아이들 일은 정부가 책임지라는 요구다.

사실 어떤 식의 기사가, 또 태도가 아픈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이익이 될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의료비를 빼더라도 중증질환을 앓는 아이들에게는 연간 1000만원 이상이 소모품비 등으로 들어간다. 엄마들은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더 저렴한 간병 방법을 공유하고 고민한다. 정부 정책이 만들어지기 전에 민간 후원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가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제도를 만든다는 보장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지난달 9일 기사가 나간 뒤에도 사회적 관심은 그리 커지지 않았다. 강혜연씨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청원에는 20여일간 1600여명이 동의를 했을 뿐이다. 청와대가 답변을 하는 기준(20만명)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청원 마감 시한인 이달 11일까지는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들의 담담하고, 또 당당한 모습을 지지한다. 동정을 바라지 않고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커지길 바란다. 허아현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아픈 아이들은 계속 나올 텐데, 본재와 우리는 혜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정부가 책임지는 제도가 생겼으면 좋겠다.” 나도 그렇다.

<홍진수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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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섬 제주의 봄은 유채꽃 만발한 풍광으로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그 아름다운 자연에 깊은 상처와 아픈 역사가 서려 있음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기 예능프로들에서도 잇달아 언급되며 제주의 산천에 아로새겨진 4·3사건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너븐숭이, 다랑쉬굴, 섯알오름 등 70년 전 벌어진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그대로 품고 있는 땅. 섬사람들에게 그때의 사건은 발설은커녕 기억에서조차 지워야 했던 천형과도 같은 일이었다. 제주 4·3을 평생의 문학적 화두로 삼아온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이를 ‘기억의 자살’이라 불렀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것. 냉전과 분단체제, 독재정권하에서 그렇게 기억은 말살당했지만, 무고한 수만명의 억울한 죽음이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제주 유채꽃. 제주관광공사 제공

30년의 세월이 흐른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은 4·3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했고, 1980년대 말 일기 시작한 4·3진상규명운동은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2003년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주민들에 대한 대통령의 첫 공식사과 후, 2008년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념하기 위한 ‘제주4·3평화공원’이 문을 열었지만, 그 후로도 4·3은 외딴 섬 제주의 아픔으로만 여겨져 왔다.

역사적 진실은 때로 문학적·예술적 형상화를 통해 더 강렬하게 전해지곤 한다. 5년 전 개봉한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는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자행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피해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간 주민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 큰 울림을 남겼다. 수십년에 걸쳐 창작된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도 몇 년 전 한글완역본이 출간되며 한국 현대사에서 4·3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시와 노래, 춤과 연극, 그림과 영화로 이 비극적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려 애써왔다. 30년 전 ‘잠들지 않는 남도’를 작곡한 가수 안치환이 최근 ‘4월 동백’을 발표하며 다시 이 섬의 슬픔을 노래하듯이.

올해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전국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일며 각지에서 전시·공연·퍼포먼스·씻김굿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클래식 음악인들도 4월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섬의 아픔을 뭍에서 기억하다’라는 추념음악회를 마련했다. 구자범의 지휘로 네 명의 독창자와 ‘참 필하모닉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국립합창단·안양시립합창단이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한 이 음악회는 전국의 뜻있는 음악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해 오케스트라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80명의 오케스트라와 90명의 합창단이 모아낸 진혼의 목소리는 음악회장에 온 청중에게는 물론이고 참여한 음악가들의 마음속에 제주 4·3을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영원한 안식을”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레퀴엠’은 죽은 이의 넋을 기리고 산 사람을 위로하는 진혼미사곡이다. 그것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 20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창작되고 연주되는 것은 잔혹한 폭력과 전쟁에 스러진 원혼들이 넘쳐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에도 제주 4·3을 비롯해 여수·순천, 거창 등지에서 벌어진 억울한 죽음들이 많았다. 이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보듬고 우리 사회가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는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철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할 터. ‘영원한 안식’은 그런 연후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만 비극이 되풀이되는 걸 막을 수 있다.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거친 후 4월의 진혼곡이 해마다 울려 퍼지며 한반도에 마침내 평화롭고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기를….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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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4일 “4월 임시국회에서 조속한 국민투표법 개정으로 국민의 권리를 회복시키고 개헌의 진정성과 의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국회의 국민투표법 직무유기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헌법재판소는 2014년 국내 거소 신고가 안된 재외국민의 투표권 행사를 제한하는 내용의 국민투표법 14조 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2015년 말까지 이 조항을 개정하라고 했지만, 제때 이뤄지지 않아 해당 조항은 2016년부로 효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국회는 2년4개월이 되도록 심의를 미루고 있다. 임 실장은 “이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헌법기관의 책무를 다한다고 볼 수 없으며 국회의 직무유기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다. 맞는 얘기다.

지금 국회는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 이후 본격적인 개헌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6월 지방선거와 동시에, 자유한국당은 9월 국민투표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위헌 상태의 국민투표법을 손보지 않으면 설사 국회 합의가 이뤄진다해도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없다. 개헌 같은 국가적 대사를 추진하면서 국민투표 절차가 미비해 개헌을 할 수 없다고 하면 이보다 황당한 일이 없을 것이다. 국회는 지난해부터 헌법개정특위를 운영해왔지만 정작 개헌의 시행 조건인 국민투표법 개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중앙선관위가 지난해 10월 대체입법 의견서까지 전했음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임 실장이 국회의 후속 조치를 촉구한 것은 일견 이해가 된다. 그러나 청와대가 직접 나서 입장문을 내고 국회를 압박한 데 대해서는 선뜻 공감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국회에 하루빨리 국민투표법을 개정해 줄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후는 여당에 맡겨도 될 사안이다. 개헌안과 달리 국민투표법은 논란거리도 없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가뜩이나 국회 개헌협상은 여야 간 이견 차가 너무 커 난관에 봉착한 상태다. 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국회 차원의 협상 대신 문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 간 회동을 통해 담판 지을 것을 요구하고 나선 마당이다. 이런 때 청와대가 “국민투표법 개정 여부는 국회의 개헌 의지를 확인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또다시 개헌을 압박한 것은 긁어 부스럼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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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동료들이 점심식사를 마친 뒤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된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와 음료를 든 채 사무실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한국 도심의 일상적인 풍경이 돼 버렸다. 이렇게 쓰이는 일회용 컵이 연간 260억개, 하루 7000만개에 달한다. 일회용 컵 사용량을 억제하기 위해 2003년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가 탄생했다. 커피전문점에서 일회용 음료컵을 제공하면서 보증금을 받았다가 컵을 가져오면 돌려준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2008년 사라졌다. 음식점이나 학교, 병원, 기숙사 등 식품 접객업이나 집단급식소에서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한 규제도 같은 해 사라졌다. 게다가 ‘테이크 아웃’ 커피 열풍이 불면서 일회용 컵 사용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정부의 대책은 일부 커피전문점 프랜차이즈 업체들을 대상으로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도록 유도하는 ‘자율협약’ 수준에 머물고 있다.

재활용 쓰레기 수거 혼란이 정상화에 들어간 3일 오전 강원 춘천시 혈동리 환경사업소 뒷마당에 압축 재활용품 더미가 쌓여 있다. 연합뉴스

중국의 수입금지 조처로 촉발된 ‘재활용 쓰레기 대란’은 한국 사회가 그간 재활용 쓰레기를 얼마나 과도하게 배출했는지 잘 보여준다. 과다포장 관행, 일회용품 과다사용 문화에 길들여진 채 분리배출만 하면 자원으로 재생될 것이라는 안이한 인식과 규제완화가 겹치면서 한국의 비닐·플라스틱 사용량은 세계 최고수준에 달했다. 정부는 일회용 비닐봉지 무상제공을 금지하지만 한국의 비닐봉지 연간 사용량은 1인당 420개로 독일(70개)의 6배, 핀란드(연 4개)의 100배에 달했다. 통계청의 2016년 조사를 보면 국내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은 98.2㎏으로 미국(97.7㎏)을 제치고 세계 1위였다. 2011년 플라스틱 폐기물 발생량은 하루에 3949t이던 것이 2016년 5445t으로 1.5배 가까이 늘었다.

주요 선진국들은 비닐·플라스틱 처리를 위한 획기적인 대책들을 내놓고 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2042년까지 25년간 불필요한 플라스틱 쓰레기를 모두 없앤다는 야심찬 계획을 지난 1월 발표했다. 프랑스는 2020년부터 플라스틱 컵이나 접시, 비닐봉지 등 썩지 않는 일회용 제품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환경부가 재활용 업체들을 설득해 수도권 지역의 비닐·플라스틱 등을 정상적으로 수거하기로 하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재활용 쓰레기 발생 자체를 줄여야 한다. 과거 정부 때 완화됐던 플라스틱 폐기물 부담금 등의 규제수준을 대폭 높이는 등 감량화에 정책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각 직장과 가정에서도 우선 종이컵과 비닐봉지 등 일회용품 사용량을 줄이는 작은 실천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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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식 즈음은 봄의 절정에서 다가올 여름을 준비하는 때이다. 입춘 즈음에 시작된 농사는 이 즈음에 궤도에 오르고 제 속도가 붙는다.

전통사회에서는 청명-한식 즈음 노동의 속도와 밀도로 한 해의 끝까지 갔다. 논밭의 둑을 돌보는 가운데 농민은 봄비 맞으며 가래질과 쟁기질에 분주했다. 늦봄의 두릅·고사리·고비·도라지 캐기와 무·배추·아욱·상추·고추·가지·파·마늘·오이 심기가 나란했다. 복숭아·사과·배 등의 접붙이기도 이때를 놓칠 수 없었다. 고되지만 겨울보다 음식 장만하기는 좋고, 여름보다 보관하기도 낫다. 청명·한식의 성묘는 이때의 먹을거리와 별미를 가지고 공동체를 격려하는 의례라고 할 것이다.

먹는 얘기로 더 들어가 보자. 고추장, 두부장 같은 별미장도 이때 마련했다.

메주가루에 찹쌀 등의 곡물, 그리고 조청이 들어가되 고춧가루의 풍미가 앞서는 독특한 장인 고추장은 18세기면 조선 서민대중 식생활에 깊숙이 들어왔다. 16세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 안데스의 은(銀)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조선에 이른다. 옥수수, 땅콩, 담배 등이 고추와 함께 지구를 일주한 새로운 작물이다. 조선인은 이 고추를 가지고 지구 어디에도 없는 고추장이라는 문화유산을 이룩했다.

또 다른 별미장으로 두부를 장에 박아 서 장과 두부가 서로를 머금은 채 숙성되는 두부장을 담그기도 했다. 별미장은 막 익고, 봄꽃은 흐드러진다. 성묘하기에 좋은 때란 뒤집어 말해 나들이하기 좋은 때다. 염불도 해야겠지만 잿밥을 빠뜨리겠는가.

별미는 장뿐만이 아니었다. 허균(1569~1618)은 일찍이 봄날의 별미로 쑥떡, 느티잎떡, 진달래화전, 배꽃화전을 손꼽았다. 화전은 찹쌀반죽에 꽃잎을 장식해 기름에 지진 떡이다. 꽃놀이의 멋과 흥취는 화전 덕분에 한층 살아났다.

기록을 뒤지면 뒤질수록 먹는 얘기는 한층 요란하다. 녹두묵을 곱게 채치고, 미나리, 돼지고기, 김을 더한 뒤 초장으로 마무리하면 보면서부터 맛이 느껴지는 고급 잡채인 탕평채가 된다. 말갛게 투명한 녹두녹말 국수를 꿀물이나 오미자즙에 말면 혀끝보다 눈으로 먼저 맛보는 국수 요리인 화면(花麵)이 완성된다. 그 이름마저 꽃답다.

횟감도 제철을 맞았다. 한강 하류에서 잡히는 웅어는 풀잎처럼 저며 종이 위에다 널어 살점의 수분과 유분을 정리해가면서 세심하게 손질했다. 회에는 겨자장이나 고추장 또는 초와 꿀을 섞어서 풍미를 끌어올린 초고추장을 곁들였다. 한식에서 매콤달콤, 새콤달콤의 맛 설계는 생각보다 연원이 깊다. 단 빙초산과 물엿(콘시럽)으로 낸 결과와는 사뭇 다르기 마련이다.

늦봄의 복이나 도미로는 국을 끓였다. 한강과 임진강 하구의 복은 목숨을 바쳐 먹어도 아깝지 않은 별미로 통했다. 봄날의 복국은 농도가 옅은 장에 봄미나리를 더한 고급스러운 요리였다. 회에서 탕까지, 오늘날 고급 음식점의 생선 다루기는 저리 가라다.

마를 쪄 꿀을 바르고 칼로 다져 낸 잣가루에 버무리거나, 찹쌀가루를 입혀 지진 뒤 잣가루에 버무린 서여증식은 오늘날 제과의 관점으로 보아도 빠질 것 없는 별미 과자이다. 여기에 고급 찹쌀 청주가 뒤따른다. 제조방법이 서로 다른 청명주, 두견주 기록은 이루 다 늘어놓기가 어렵다. 진달래꽃은 봄날 술의 향색미(香色味)를 더하는 데에 요긴하게 쓰였다.

늦봄이 아주 이울기 전, 여름 기운이 막 봄을 압도하기 전, 사람들은 별미를 마련해 자연으로 나갔다. 조상을 찾아 인사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빌고, 고된 여름을 건너갈 스스로를 격려했다. 일과 놀이가 함께인 즈음, 고된 노동을 앞두고 공동체가 서로를 위로하는 때가 이때였다. 덕분에 무덤가도 쓸쓸하지 않았다. 홍석모(1781~1857)는 한식 성묘 풍경을 이렇게 읊었다. “무덤가에 술 모자란 귀신은 하나도 없으리.”

하지만 찾아올 후손이 없는 귀신은 어쩐다. 심지어 무덤조차 없는 귀신은? 여기서 사회가 할 일이 있다. 나라가 나설 일이다. 중앙정부와 지역에서는 교외에 제단을 차리고 제물을 마련해서 외로운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외로운 넋까지 챙기고서야 옹근 청명, 제대로 한식이었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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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왜 안 보였어?”

원젠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개인 메신저로 순오에게 물었다. 6만8000명이 넘는 네프(네트워크 프렌드) 중 순오는 가장 친한 네프였다. 원젠이 어느 사이트에 글을 올리면 1분 내에 반드시 순오가 반응했고, 결국 두 사람은 늘 인터넷으로 연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와 VR 공감 서비스를 포함해 총 여덟 개의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원젠에게 인터넷은 곧 일상이었고, 가장 큰 현실이었다.

그런데 순오가 사흘째 어떤 인터넷 활동도 하지 않은 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병원?”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순오가 대답했다.

“앞으로 네트워크 서비스는 거의 못 쓸 거야.”

원젠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느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터넷에서 취미를 나누고, 대화하고, VR을 통해 각자 만든 아바타를 놀리며 낄낄대고, 게임 속에서 함께 죽고 사는 걸 빼면 도대체 삶에 뭐가 남는단 말인가.

“이유가 뭔데?”

“어딘지 말은 안 하겠지만 나는 사실… 아버지가 꽤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야. 슬슬 후계자 수업을 하라는데, 그 첫 번째가 재벌가 애들과 공감을 나누는 거래. 직접 만나서 같이 놀러다니고 운동도 하라나. 그래야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이 든다더라고. 그러면 우리가 일반인이 아니고, 진짜 사람이란 점을 깨달을 거래.”

원젠은 생각했다. ‘진짜 사람’이라니. 그럼 저 사람들처럼 구식으로 만나서 부유한 자들의 공감대에 동참할 수 없는 사람들은 ‘가짜 사람’이란 말인가? 2050년대에 새 계급은 이런 식으로 나눠지는 걸까?

“내가 그동안 인터넷에서 활동하면서 벌었던 e코인은 전부 줄게. 너라면 나쁜 뜻으로 오해하진 않을 거라 믿어. 그럼 이만.”

개인 메시지 창 위로 e코인 계좌를 가리키는 아이콘이 반짝거렸다. 원젠은 클릭해서 금액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돈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반송하려 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그 e코인을 더 유용한 곳에 쓰기로 했다.

옛 가치가 신귀족과 ‘가짜 인간’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그런 식으로 계급을 나눠서 경제를 계속 움켜쥐겠다는 거지?

하지만 원젠의 신념은 확고했다. 인간은 이제 디지털의 힘을 빌려 다음 세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옛 형식을 미화해서 지위를 고수하려는 자들이야말로 인류의 발목을 옥죄는 존재였다.

언제일지는 모르나 나중에, 디지털 인간이 ‘진짜 인간’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때가 오면 원젠은 순오를 온라인으로 다시 만나 그가 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지의 칼럼 중 눈길을 끄는 글이 있어 살펴봤다.

실리콘밸리에 살며 첨단 IT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부모들이 자녀의 인터넷 사용과  앱  사용을 크게 제한하거나 금지한다는 글이었다. 이유는 가끔씩 우리나라 교육전문가들이 제기하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재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콘텐츠, 사회관계망서비스, 게임을 포함한 각종 앱이 아이의 관심을 지나치게 빼앗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크게 훼손한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있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아도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예전과 다르다.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보상을 미끼로 돈을 끌어들이는 게임들은 그 특성 때문에 사용자의 감정 조절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는 예전과 다른 통로로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벌어지는 교류는 예전과 다르다.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온라인 인기 투표 시스템은 오래전부터 단순한 재미를 넘어 경제활동과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이 모든 현실이 인간성을 훼손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뉴스는 온갖 자극적인 범죄 소식과 혐오에 기반한 충돌을 보도하며, 가끔씩 옛날이 더 좋았다고 주장하고 계도하려는, 나이 많은 자칭 전문가를 출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옛 가치가 무조건 좋다고 계도해서 세상이 역행한 적이 있었는가? 환경과 존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기술로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다. 변화는 가속될 테고, 영향을 주고받는 속도 또한 빨라질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세상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다독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다독임이, ‘공감’이 미래에 과연 어떤 식으로 구현될지는 알 수 없다.

억지로 소중한 가치를 소멸시키려 들지 말고, 그러면서도 변화를 일부러 외면하지 않는 것. 그 변화가 어쩌면 근본적인 부분까지 허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 태도야말로 기술이 크게 바꾸어 갈 미래에 우리가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공감대일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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