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검사의 증언으로 촉발된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 미투 이후 여성들은 한결같이 옛날 기억들이 떠오른다고 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삶 곳곳에 놓여 있던 설명할 수 없었던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겪고 있고 깨달음은 말하기로 이어지고 있다. 상담 현장에 폭주하는 전화, 온·오프라인을 통한 수많은 증언들이 그것이다.이는 비단 여성들만의 경험은 아닌 듯하다. 얼마 전 지인이 택시에서의 경험을 전해줬다. 택시기사가 “미투를 보며 나도 젊었을 적 기억이 떠올랐고 잘못된 행동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도 얘기를 나눴다”고 하더란다.

지난달 22일부터 23일까지 2018분 동안 여성들의 ‘이어 말하기’가 있었다. ‘나는 평범하고 가해자도 평범한데 난 어디 가서 말할 수 있냐’는 여성들의 호소로 마련된 자리였다. 만연한 성차별·성폭력을 2018년에는 끝내자는 의미로 2018분 동안 해보자 했지만 과연 그 시간이 채워질까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 193명의 이야기로 2018분은 채워졌다. 시간이 모자라 순서를 기다리다 돌아가거나, 현장에 오지 못하니 대신 읽어달라고 보내온 많은 글들이 읽히지 못하고 남았다. ‘이어 말하기’를 통해 확인한 놀라운 사실은 10대에서 70대까지 세대와 사회·경제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경험은 너무나 비슷했다. 연루된 사람도 너무 많았다. 이는 한국 사회에 성차별과 성폭력이 생활방식으로 공고화되었으며 이 단단한 구조 속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 전 구성원이 연루된 기억투쟁이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규범과 정의(justice)를 세우는 의미투쟁의 과정이다. 그래서 몇몇 개인을 ‘괴물’을 만들어 ‘나’와 분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차별과 성폭력이라는 부정의에 우리 모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미투를 지지한다면서 “그 피해자는 좀 이상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투 운동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만들어놓은 피해자상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증명했다. 오늘까지 멀쩡하게 일상생활을 잘하던 내 옆의 친구가, 딸이, 동생이 성폭력 피해자였음을 증언함으로써 사회가 이미지화해 놓은 ‘그런 피해자’는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렇기에 “그 피해자는 좀 이상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이제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나의 인식은 어디서 왔는가, 나의 말이 어떻게 부정의를 강화할 수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너무 가혹한 것 아냐,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제3자적 태도도 위험하다.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규범과 정의를 세우는 과정이다. 이전의 기준은 부정의를 유지한 낡은 틀임을 인정하고 우리 사회가 미투 이후에 어떻게 달라지고자 하는지 함께 토론하고 합의하며 새로움 규범과 기준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 우리 모두 주체로서 함께할 때 진정한 미투 이후의 세상이 열릴 수 있다.

그래서 이 과정은 길고 지난할 수밖에 없다.  ‘이어 말하기’를 들으며 ‘빼앗긴 꿈’이란 단어가 마음에 박혔다. 정말 많은 여성들이 차별과 폭력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는 걸 알았다. 그 꿈을 다시 찾고 다시는 여자라는 이유로 ‘빼앗긴 꿈’이 없는 세상, 그것이 미투 이후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이리라.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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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 서울의 어느 일간지 기자가 연락을 해왔다. 캐나다에서 평창 패럴림픽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글을 써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대회가 임박했는데도 캐나다 공영방송 CBC는 별 언급이 없었다. 올림픽 때는 캐나다 경기뿐 아니라 주요 경기 대부분을 방송했던 CBC였다. 나는 “방송도 조용하고 해서 달리 쓸 게 없을 것 같다”고 답장을 보냈다.

막상 패럴림픽이 열리자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평소 습관대로 아침 6시에 텔레비전을 켰더니 패럴림픽 개회식도 올림픽과 똑같이 생중계를 했다. 번쩍거리는 화면도, 캐스터의 열띤 목소리도 올림픽 때와 다름없었다. 그날 저녁 황금시간대에 개회식을 재방송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패럴림픽 방송은 아침저녁 계속되었다. 방송 시간이 올림픽에 비해 짧았다면 그것은 경기 종목과 참가 선수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는 패럴림픽 방송이 올림픽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화제가 되는 선수나 메달리스트들을 집중 조명하는 것은 비슷했으나 패럴림픽 방송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올림픽 방송이 ‘스포츠 경쟁’에 관심을 두었다면, 패럴림픽 방송은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극장’이나 다름없었다. 장애인 선수 모두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주인공인 만큼 그 이야기를 사전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알리는 데 치중했다.

그뿐 아니다. ‘때는 이때다’ 싶었던지 패럴림픽과 직접 관계없는 진짜 &lt;인간극장&gt; 프로그램들이 방송에 속속 등장했다. 예를 들면 캐나다 북부 옐로나이프에 사는 열두 살 소년 이야기. 태어나면서부터 다리가 불편했던 이 아이는 평범한 캐나다 소년답게 아이스하키에 매료되어 있었다. 경기를 하고 싶어도 작은 시골 도시에서 함께할 선수를 찾기가 어려웠다. 소년의 그런 소망을 알아차린 동네 친구들이 나섰다. 그들은 모두 썰매를 타고 하키 경기를 하고 있다.

&lt;인간극장&gt;류의 이런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감동할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교육을 받게 마련이다. 몸이 불편한 사회 구성원을 어떻게 배려하고 도와줘야 하는지를 은연중에 배우고 익힌다. 이런 방송을 새삼스럽게 해주지 않아도,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나 배려는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인데도 말이다. 이민자인 나로서도 방송 중계와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낀 것이 참 많았다.

최근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설명회에 일부 반대 주민들이 난입해 비난과 폭언을 퍼부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평창 패럴림픽이 끝난 지 불과 8일 만에 벌어진 불상사였다. 지난해 9월에 이어 다시금 터져나온 이 장면은 한국 패럴림픽 방송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중계권을 가진 한국 지상파 방송들은 자국에서 열린 국제 스포츠 행사를 외면하다시피 했다. 대통령과 선수가 나서서 중계 시간을 늘려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 지상파 방송들은 평창 패럴림픽에서 생중계와 녹화방송을 합쳐 평균 20시간 정도씩을 편성했다. 캐나다·미국·영국 같은 나라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물리적인 시간이 이러하니, 패럴림픽 방송을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 캠페인으로 활용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공영방송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드리겠다”고 줄곧 다짐해온 한국 방송사들은 이번 패럴림픽을 통해 그 수준과 민낯을 드러냈다. 내 눈에는 한국 방송들의 이 수준이,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의 수준과 겹쳐보였다. 장애 어린이들의 학습권은 고려하지 않은 채 국립한방병원 설립이라는 헛된 약속으로 지역 주민들을 들쑤시고 뒤로 빠져버린 국회의원 수준도 도긴개긴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고 희망적인 것은 패럴림픽을 외면하는 방송사들의 무관심과 무성의를 질타한 시청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캐나다 방송처럼 시청자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할 공영방송이 일반 시청자보다 수준이 낮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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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다.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눈다’ ‘눈을 맞춘다’는 이 말은 요즘 사회 전 분야에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덕목이다. 심지어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행하는 정부 정책 홍보잡지의 명칭은 ‘위클리 공감’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토도, 마음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무한경쟁 사회로 내몰릴수록 말로라도 반대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 이심전심들이 반영됐을 터다.

그렇다면 공감이 가장 많이 거론되는 분야는 어디인가. 민심을 얻는 것을 제1가치로 두는 정치의 세계다. “잊지 않겠습니다” “항상 듣겠습니다”. 진심이든 아니든, 정치 영역에서 사용되는 표현들이다. 여론과 눈을 잘 맞추는 세력은 흥하고, 그렇지 못한 세력은 망하는 것이 정치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다. 공감 프레임을 적용하면 작금의 정치환경도 이해하기 편하다. 특히 자유한국당의 속절없는 추락이 설명이 된다.

(출처: 경향신문DB)

정치와 공감을 연결해보자는 생각이 어떤 거창한 계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가죽점퍼 차림을 보고 떠올랐다. 요즘 홍 대표는 지방선거나 개헌 관련 대여투쟁을 논의하는 자리에 가죽점퍼를 입고 등장한다. ‘전투복’이라고 칭한다. 보수의 위기감을 알려 지지층을 결집하겠다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당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홍 대표는 평소 업무 때도 가죽점퍼 차림이다.

하지만 홍 대표의 가죽점퍼에선 도저히 비장함을 느낄 수 없었다. 뜬금없고 위압적이었다. 한국당 의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물어봐도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조폭 같다” “도대체 뭐하자는 것이냐” 등의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험지에 보내겠다” “연탄가스” “바퀴벌레” “암덩어리” 등 당내 비판세력에게 던진 막말성 위협들, 앙숙(안상수 창원시장)을 쳐내고 측근에게 공천을 준 사천논란까지 포개지면서 가죽점퍼는 홍 대표의 의도와 다른 반응을 불렀다. 구여권 관계자는 “가죽점퍼는 미끄러워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고 했다. 민심과 공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심리학자들의 의견도 물었다. 심리연구소 ‘함께’의 김태형 소장은 “비장감을 표출한다는 것이지만 남들이 보면 비정상적인 행동”이라며 “재기를 못할 것 같은 불안감, 절박감이 사실 비정상적인 상태를 만들어준다고 본다”고 했다. 심리학자 ㄱ씨는 “현실과 너무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니까,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경기대 이수정 교수는 “자기동기화(Self-Motivating)의 과잉액션”이라고 했다.

공감능력 부족은 홍 대표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김성태 원내대표는 지난달 22일 원내대표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들개 조련사로서 배현진 전 아나운서를 ‘조련’시켜 반드시 6·13 지방선거에서 가능성을 보겠다”고 말했다. ㄱ씨는 “젊은 여성을 조련한다는 게 무슨 이야기냐. 지지계층을 결집한다며 아무 말이나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련’이란 말에 배 전 아나운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 원내대표는 자신이 어떤 문제 발언을 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장제원 수석대변인은 때때로 지나치게 격하다. 경찰을 미친개로 비유했다가 “경찰을 사랑한다”며 수습한 것이 대표적이다. 장 수석대변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됐을 때 논평을 통해 “참담하다”고 했고, 페이스북에는 “눈물이 자꾸 흐릅니다. 지금 이 순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국민 10명 중 8명이 이명박 정권 국정농단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잊지 않겠다”는 그의 발언과 민심의 거리는 멀었다. 당의 한 영남권 의원은 “당 대변인의 논평이라면 신중했어야 한다. 친이명박계 의원으로서 사감이 담겼다”고 했다.

요즘 여권에선 홍 대표와 측근들을 두고 ‘파이팅’ ‘힘내라’ 등 농담이 돈다고 한다. 홍 대표와 측근들의 언행이 위협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보수층을 와해시키는 만큼 홍 대표 존재로 손해볼 것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홍 대표가 정부를 향해 “주사파 정권” “위장평화 쇼” 등 막말을 퍼부어도, 더불어민주당은 정색하고 반박하지 않는다. “홍준표 때문에 큰일이다”는 한숨 소리는 오히려 한국당에서 새어나온다.

“싸우는 법을 안다”고 자부해온 홍 대표는 이런 지적에 대해 ‘언론의 흔들기’라며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죽점퍼는 벗는 것이 어떨까. 굳이 점퍼를 고집한다면 새마을운동 점퍼는 어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며 태극기를 흔드는 강경보수층 마음이나마 얻으려면 차라리 이 편이 나을 것이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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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풀들이 저 나무잎들이 건들거린다

더불어 바람도

바람도 건들거리며 정처없이

또 어디론가를…

 

넌 이미 봄을 살았더냐

다 받아내며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난 이미 불량해서 휘파람 휘익

까딱거리며 내 접면인 세계도 이미 불량해서 휘이익

 

미간을 오므려 가늘게 저 해는 가늘고

비춰내는 것들도 이미 둥글게 가늘어져

 

둥글게 휜 길에서 불량하게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더불어 바람도

또 어디론가를…

허수경(196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봄에 파릇한 풀들과 새잎이 가볍게 천천히 흔들린다. 땅 위에 공중에 떠서 이리저리 움직인다. 바람도 살랑살랑 더불어 부드럽게 불어오고 불어간다. 또 어딘가를 떠돌며 가려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와서 가는 봄처럼 시인은 까딱거리며, 휘파람을 날리며, 건들거리며 봄을 산다고 말한다. 이 세계와 접면을 이뤄 아픈 시인은. 이 봄에는 좀 가볍게 봄바람 가듯이, 나른하게 졸음 오듯이, 낮잠 속 꿈 들듯이 살아도 좋겠다. 시인은 시 ‘정든 병’에서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라고 썼다. 이제 더는 아프지 말고 이 봄 여린 생명들의 기쁨과 그 기쁨의 환호를 모두 다 소상하게 보시고 들으시길.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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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맨 처음 길들인 동물은 개였다. 빠르고 후각이 뛰어나며 한번 물면 놓지 않으니 동물 사냥에 적합했다. 종종 ‘인간 사냥’에도 동원됐다.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를 발견한 미 해군의 군견이 대표 사례다. 주인과 외부인을 분별하는 능력 때문에 집을 지키는 번견으로도 활용돼왔다. 이후 개는 애완용을 거쳐 인간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며 안정감과 친밀감을 주는 동물이라는 뜻인 ‘반려동물’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인간과 함께 지낸 지 3만년 만에 인간과 다른 종족으로서는 최초로 ‘가족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물론 반려동물은 개 외에 고양이, 햄스터, 곤충 등 종류가 다양하다. 하지만 인간과 교감하는 능력에서 개를 능가하는 동물은 없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펫팸족’은 반려동물이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설문조사를 해보면 “반갑게 대해줘 외롭지 않게 해준다”는 답이 가장 많다. 파편화된 사회에서 충직하고 편한 동물에게서 안식과 위로를 구하려는 심리가 엿보인다. 이러다보니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인간에게 하는 대우 못지않다. 사람처럼 입히고 먹이고 돌보는 ‘의인화’ 현상이 일반화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도를 넘어보이는 행태도 있다.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스케일링 등은 건강을 위한 것이니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70만원짜리 일제 개모차(개 전용 유모차)나 300만원짜리 펫 드라이룸(털 말리는 기계)은 동물 주인의 과시욕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기계를 사준다고 반려동물이 더 행복해질지 동물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반려동물에게 지출하는 비용을 위해 생활비를 줄여가며 가난하게 사는 ‘펫푸어족’도 등장했다. 반려동물에게 홍삼이 들어간 유기농 사료를 사 먹이고 자신은 빵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다.

온라인마켓플레이스 옥션이 반려동물 양육비가 월평균 13만3000원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월평균 자녀양육비 128만원(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의 10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자녀양육비의 절반이 반려동물 양육비에 없는 교육비임을 감안하면 그 비율은 5분의 1로 줄어든다. 인간과 반려동물의 위상이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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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발 개헌안이 발표되었다. 개헌안에 담긴 내용 중 지방분권의 경우 지난 대선 때 주요 후보들이 모두 공약으로 내세웠을 만큼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된 사안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에 발의된 개헌안이든, 향후의 국회안이든 지방분권의 기본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방분권과 관련해서 개헌안이 현행 헌법과 실질적으로 차이나는 점은 지방정부가 향유하는 자치조직권, 자치행정권, 자치입법권, 자치재정권 등을 강화하거나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비록 헌법이나 나랏일에 밝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돈 문제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방분권강화에서 핵심은 재정 문제다. 다시 말해 자치재정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개헌안은 이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 전에 현재 자치재정의 민낯을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방정부가 직면한 재정 문제 중 단골메뉴로 언급되는 것 중 하나는 낮은 재정자립도이다(2016년 55.8%). 그간 이 문제를 풀 방안의 하나로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낮은 지방세 비중(23.7%)을 높이자는 의견이 줄곧 제기되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때 이를 받아 40%까지 확대하는 것을 공약으로 채택한 바 있다. 지방세 비중을 높이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국세는 손대지 않고 지방세만을 늘리는 것과 세금총액은 유지하면서 국세의 일부를 지방세로 이양하는 것 따위를 생각해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국세 중 어느 정도를 지방세로 이양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국세의 이양은 크든 작든 지방정부 간 재정격차를 더 벌리기 마련이다. 이는 세원이 풍족한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 간의 차이, 또 줄어든 국세비중에 따라 재정격차를 줄이는 데(재정조정제도)에 쓸 돈도 덩달아 쪼그라드는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런 까닭에 지방정부가 스스로 세원을 발굴할 수 있도록 과세자주권을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현행 헌법의 해석상 지방의회가 제정한 조례에 따라 독자적인 지방세 관련 세목을 창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개헌안은 이른바 지방세조례주의를 헌법에 들여 법률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방세의 종목과 세율 등을 조례로 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헌법에 지방세조례주의를 새기더라도 지방정부 간 재정격차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가까운 일본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독자적인 세원 발굴 역시 마찬가지로 각 지방정부가 처한 경제적 여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 탓이다.

개헌안이 자치재정과 관련해서 현재의 헌법에 비해 개선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헌법을 고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소되지는 않는다. 2016년 기준으로 지방세 비중을 40%까지 확대하면 중앙정부 입장에서 지방교부세 전액과 국고보조금의 32%를 합친 금액이 줄어든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재정조정을 위해 형편이 넉넉한 지방정부로부터 수입의 일부를 다시 받아내야 한다. 재정조정제도를 개헌안에 들였지만 이미 현재 여러 법률에 터잡아 시행되고 있는 제도로 그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처음부터 중앙정부가 나눠주는 식이라면 앞으로는 줬다 일부를 거둬가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왜 우리 세금을 빼앗아 가냐’는 불만은 어떻게든 나올 수밖에 없을 터다.

나아가 세금을 높이거나 낮추어 나라 전체로 볼 때 세금의 공평성을 훼손하는 문제는 어떻게 풀 것인지, 전시성 사업 등 불요불급한 사업에 예산을 편성하여 지방재정을 악화시키는 행정행위를 통제할 재정통제의 법적 수단이나 지방정부의 파산에 관한 법제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등 여러 복잡한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아직 출범도 못한 조세재정개혁특위와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산하 재정분권TF 간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체계적인 개편방안 마련도 필요하다. 지방분권강화에서 개헌은 험난한 긴 노정에서 단지 시작일 뿐 알파이자 오메가일 순 없다.

<김현동 | 배재대 교수·조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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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중형 선고와 관련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던 공주를 마녀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 정치”라며 “재판에서 가장 가슴 섬뜩하게 느낀 사람은 지금 관저에 있는 대통령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서다. 앞서 홍 대표는 1심 선고 직후에는 “돈 1원 받지 않고 친한 지인에게 국정 조언 부탁하고 도와준 죄로 파면되고 징역 24년 가는 세상이다. 자기들은 어떻게 국정 수행하는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글을 올린 바 있다. 홍 대표의 돌출적 언행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국정농단 주범에 대한 사법부의 심판을 비웃고 모욕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홍 대표는 지난해 11월 박 전 대통령을 출당시킨 장본인이다. ‘당단부단 반수기란(當斷不斷 反受基亂·잘라야 할 것을 자르지 못하면 재앙이 온다)’이라는 고사를 인용해가며 제명 처분을 밀어붙였다. “한국당이 보수우파의 본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국정농단 박근혜당’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출당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던 홍 대표가 법원의 1심 판결이 나오자마자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중형 선고를 ‘마녀사냥’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출당을 주도한 자신도 마녀사냥에 동참했다는 건가.

홍 대표의 행태는 누가 봐도 정략적이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을 ‘보수 결집용 카드’로 쓰려는 계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태극기집회’에 나가는 극소수 친박세력 외에 ‘박근혜 카드’로 결집될 보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상식적·합리적 보수세력이 한국당에 바라는 건 ‘박근혜 감싸기’가 아니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성하는 일이다. 정부·여당의 실책만 기다리지 말고 생산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다. 막말과 색깔론 같은 구태에서 벗어나 ‘미래형 보수’로 거듭나는 일이다.

박 전 대통령 1심 선고가 나온 날, 한국당의 공식 논평은 짧았다. ‘판결은 예견된 것이었고, 재판 생중계는 개탄스러운 일이며, 이 순간을 간담 서늘하게 봐야 할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게 요지였다. 홍 대표를 위시한 한국당의 무원칙·비논리·유체이탈이 한국 정치를 끝없이 오염시키고 있다. 한국당은 최소한의 자정능력부터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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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에/ 야채를 넣고/ 과일을 넣고/ 이만원/ 계산대에 가보니/ 오만원/ 과일 빼고/ 야채 빼고/ 참치는 놔두고/ 밥은 먹어야지/ 참치 고추장 참기름은/ 떨어지면 안 돼.” 민들레 장애인야학의 신경수씨가 쓴 시 ‘꼭 사야 할 것’이다. 그는 세 살 때 파출소에 맡겨진 뒤 서른이 다 돼서야 탈시설 자립생활을 시작한 중증장애인이다. 출간 예정인 탈시설 장애인들의 인터뷰집에서 그의 인터뷰와 시 몇 편을 읽었는데, 방금 인용한 시도 여기서 본 것이다.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그의 경제학이다. 계획된 예산을 넘자 그는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을 하나씩 빼놓는다. 그런데 과일과 야채를 빼내면서도 끝까지 사수하는 재료가 참치와 고추장, 참기름이다. 그는 밥에 참치, 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다. 장애인 수급비가 소득의 전부인 그로서는 지출계획을 신중히 짜야 한다. 특히 식자재는 지출항목 중 비중이 큰 것이어서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런데 식자재 구입과 관련해서 그는 영양학보다는 존재론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식자재 구매가 내 영양상태보다는 존재 확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참치 고추장 비빔밥은 그가 찾아낸 ‘나의 음식’이다. 물론 수십년을 보낸 수용시설에도 ‘음식’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음식’이었지 ‘나의 음식’은 아니었다.

음식만이 아니다. 시설에는 많은 방이 있지만 내 방은 없다. 한 이불을 덮는 사람은 많지만 나의 연인이나 가족은 없다. 습관조차 그렇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의 습관은 있지만 나의 습관은 없다. 모두가 모두의 시간에 자고 일어나며, 모두의 시간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 한 달, 일 년, 십 년을 살다보면 기억조차 모두의 기억이 된다. 거기 수용된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일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름은 내 것이라지만 마치 내가 떠난 집에 걸린 문패와 다를 게 없다. 말하자면 시설은 ‘나’를 죽이는 곳, ‘나’의 절멸수용소다.

시설을 나온 뒤에야 경수씨는 자기 음식을 찾았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케이크는 먹으면 바로 설사해요. 짬뽕 매운 건 먹어본 적 없는데 나와서 먹어봤고. 카레도 시설에선 어쩌다 한번 먹어봤는데 나와선 실컷 해 먹고 있어요. 제육볶음은 시설에선 못 먹어본 음식인데 나와서 먹어보고는 반해서, 지금은 제일 잘하는 음식이 됐어요.” 탈나는 음식을 만난 것도 맛있는 음식을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나’를 만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래봬도 저 쌀 사다 먹는 남자예요.” 쌀 문제로 가면 그의 경제학은 재정학과 거의 무관해진다. 탈시설 후 3년 동안 그는 동사무소에서 주는 쌀 ‘나누미’를 먹었다. 월수급비가 65만원이었는데 집세로 월 40만원이 나가고 관리비를 15만원 내야 한다. 그러니 10만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했다. 수급비가 생활은 고사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별 수 없이 ‘나누미’라도 감지덕지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수급비가 95만원으로 늘었고 집세는 15만원으로 줄었다. 확실히 그때보다 나아졌다. 하지만 한 달 80만원이 여유를 부리며 생활을 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님은 분명하다. 겨우 숨통을 죄던 줄이 조금 느슨해진 정도일 텐데, 그는 곧바로 쌀을 사다 먹는 만용을 부렸다. 재정적으로는 파탄적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존재적으로는 자기 정립적인 행동이다.

“난 쌀맛을 구분한다니깐요! 이게 중요해요.” 이것이 그의 경제학이다. 소비에는 영양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고 지출에는 재정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 그러나 그는 영양 획득이나 재산 획득보다 ‘나’의 획득이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더욱 인상 깊은 것은 시간의 경제학이다. “방학을 없애야 해/ 집회 나가야 해/ 그래서 없애야 해/ 집에 있으면 뭐해?/ 활동 많이 해야지/ 시간 놓치면 안 돼/ 시간이 아까워/ 왜냐면/ 내년에 검정고시 보니까.” 그의 시 ‘방학을 없애야 해’인데, 검정고시 준비하느라 시간이 빠듯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절대 줄이지 않는 시간이 있으니 바로 집회 나가는 시간이다.

중증 뇌병변장애인인 그는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이용한다. 그에게 할당된 서비스 시간은 월 480시간이다. 이 시간은 말 그대로 생명의 시간이다. 활동보조가 없는 시간이란 누군가에게는 손발이 없고 누군가에게는 눈이 없는 시간이다. 실제로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한 시간에 화재가 나서 코앞에 있는 문을 열지 못해 죽은 장애인이 있고 보일러 동파 같은 사소한 사건에도 생명을 잃는 장애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 생명의 480시간을 계획하면서 10%인 48시간을 미리 공제한다. 급히 잡히는 농성이나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매월 공제하는 이 48시간이 내가 보기에 그의 경제학의 가장 근본적인 공리다. 계산대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참치와 고추장, 나누미를 대체한 일반미, 야학의 공부시간, 이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이 48시간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해방의 시간 앞에 해방을 위한 시간을 공제해두는 것. 이것이 한 탈시설 장애인의 장애해방의 경제학이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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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수 선진국들은 지금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막대한 자금 지원, 특별 귀화 정책 등 파격적인 당근을 제시하며 고급 두뇌 육성과 해외 우수 인재 영입에 사활을 걸고 있다. 우수 인재가 곧 미래 국가 산업의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찾아오는 인재는 계속 줄고 있고, 자발적으로 찾아온 인재들마저도 적응에 실패해 보따리를 싸서 떠나고 있다.

스위스 국제개발연구원의 ‘2017년 세계인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인재 경쟁력지수는 100점 만점에 55.82점으로 조사 대상 63개국 중 39위였다. 아시아 국가 중 홍콩은 12위, 싱가포르 13위, 일본 31위, 그리고 중국은 40위를 각각 차지했다. 중국은 순위가 낮기는 하지만 2013년 48위, 2016년 42위, 2017년 40위 등 계속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반면 한국은 2015년 31위, 2016년 38위, 그리고 2017년 39위로 계속 하락세다.

중국의 공산당 중앙판공청은 2008년 ‘천인(千人)계획’이라고 불리는 국가 주도 해외 고급 인재 유치 계획을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10년간 해외 유학 인재 2000명을 국내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2009년부터 2017년까지 14차에 걸쳐 진행된 프로그램을 통해 2494명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중국이 4차 산업혁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데 이들 인재들이 한몫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보고서의 ‘두뇌 유출’ 항목에서 한국은 10점 만점에 3.57점으로 최하위권인 54위에 머물렀다. 국내의 우수 인재들마저 외국 대학과 기업으로 떠나는 ‘두뇌 유출’ 현상이 매우 심각함을 방증하는 수치다. 그동안 정부가 산업화 시대에 적합한 범용 인재 양성과 공급 정책에만 매달려 대학의 질적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노력을 등한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어릴 때부터 교육이 온통 대학 입시 준비에 매몰된 채, 개인의 창의성 개발은 무시됐다. 다양성을 장려하기보다는 평균적 교육방법에 초점을 맞춰 왔다. 대학들 역시 대학 성격에 맞는 인재를 자율적으로 선발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되는 상태다. 이공계 출신들에 대한 경제적 처우 또한 타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 이공계 이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지금은 1960~70년대의 산업개발 시대처럼 애국심에 호소해 인재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따라서 우수 인재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처우와 연구 여건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대학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대학입학자격시험으로 바꾸고, 대학들이 특성에 맞는 인재들을 자율적으로 선발할 수 있도록 신입생 선발권을 대학에 돌려주어야 한다. 특히 인재 육성과 고급 두뇌 유출 예방이란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기 위해서는 다양한 대책이 필요하다. 해외 유수 과학자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에 와 마음 놓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연구비 지원은 물론, 가족들에 대한 주거 및 교육비 지원 등도 확대해야 한다. 정부 요직에 이공계 출신 일정 비율 의무 임용, 우수 과학 인력의 정년 연장, 성과 중심 보상체계 강화, 연금 수혜율 제고 등의 지원책을 도입하고 이를 법제화해 이공계를 우대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우리나라처럼 부존자원이 빈약한 나라가 21세기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이공계 두뇌를 집중 육성하고, 과감한 투자를 통해 첨단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정부, 기업은 물론 대학 모두 다 같이 인식하는 것이다.

<이윤배 | 조선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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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스피커를 몇 개 구해서 집과 사무실에 연결해 두었다. 친구 삼아 다정하게 지내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다정하게 날씨와 시간을 물어보고 노래도 주문했다. 미국산은 발음이 어눌해도 영어를 잘 알아듣는데, 한국산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 물론, 미국산은 한국어를 아예 알아듣지 못한다. 스스로 성장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내가 곁에 두고 알뜰살뜰 아끼면 이들은 조만간 똑똑해질까?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똑 부러지는 대답을 들으려면 10년쯤 키우면 되려나?

지금은 하드웨어도 허술하고 엉뚱한 답을 내놓는 스피커는 외모처럼 귀엽다. 반복되는 오작동. 아무 때나 혼자서 떠들기도 하고 먹통이 되기도 일쑤인 스피커는 골칫덩이지만 손을 뻗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으니 편리하다. 인간이 가진 자연적인, 신체적인 힘으로 외부에 물리적인 신호를 보내는 방법이 많지는 않다. 직접 몸을 움직여 물리적인 압력을 가해서 신호를 보내는 것 이외에는 눈에 힘을 준다거나 미간을 찡그려 신호를 보내지 못한다. 장차 하드웨어의 발전으로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지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신호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목젖을 울려낸 에너지가 공기를 타고 대상이 되는 곳에 도달해 신호가 된다.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고도 알람을 설정하고 문자도 보낼 수 있다.

말만 해도 이것저것 할 수 있게 되면 세상이 엄청 편해질 것 같다. 이불 속에 누워 엄마에게 이것저것 가져달라고 하면서 꼼짝 않고 버티는 기분과 비슷할까? 그런데, 이것은 좋은 것일까? 만족스러운 인공지능 비서는 최소한 영화 &lt;블레이드 러너 2049&gt;에서 주인공의 파트너 역할을 충실히 해 주었던 조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이지만 나의 취향을 완벽하게 알고 있고, 내가 도망가야 할 때는 과감히 서버에서 몸을 빼 이동용 저장장치에 몸을 담는 존재, 소멸의 위험을 감수하고 파트너를 위하는 존재이다. 이런 존재가 탄생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 인공지능이 더 똑똑해져야 한다. 이미 인공지능은 바둑으로 이세돌 9단을 꺾었을 때, 충분히 똑똑하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할 수 있을까? 기보를 통해서 습득할 수 있는 바둑 능력과는 별개로 인간은 다양한 인생사를 대면하고 삶을 영위해야 한다. 이런 다양함에 대응할 만한 데이터가 쌓이지 않았다. 더욱이 내 가족이라면, 내 애인이라면 알아야 할 지식이나 경험은 다른 곳에서 미리 학습하고 나를 만나러 올 수 없다. 다양한 데이터를 갖추고 학습하는 과정이 부족한 인공지능 스피커가 아직도 멍청한 대답을 내놓는 것은 당연하다.

두 번째, 인공지능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더 많이 연결되어야 한다. 내가 한 말을 듣고 어떤 일을 대신 지시하기 위해서는 이 친구가 내가 지시할 사물들과 모두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한다. 소위 모든 사물에 IP가 부여되는 ‘사물인터넷’이 실현되면 가능한 일일 터. 홈오토메이션 등을 통해서 일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똑똑해져야 내 인공지능 스피커도 똑똑해진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내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어야 한다. 잠도 자지 않고, 한눈팔지 않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나지막한 내 소리에 반응해 시키는 일을 할 수 있지. 다정함에 마음이 따듯해지다가 문득 싸늘해진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그가 입이 무겁다면 더 바랄 일이 없겠지만, 그는 세상의 모든 물건과 연결되어 있다. 소멸할 위험을 감수하고 세상과 맺고 있는 모든 끈을 끊지 않는다면 하나도 빼지 않고 들은 내 이야기를 어디에 털어놓을지 알 수가 없다. 나와 끈끈한 관계인 그가 털어놓고 싶지 않아도 그를 통해서 내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몰래 듣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출판과 콘텐츠 산업에서 인공지능 스피커가 사용할 수 있는 내용을 채우는 것이 뜨거운 이슈다. 글을 소리로 전환하는 기술을 통해 옮기는 작업을 하기도 하고 콘텐츠를 새로 만들어 녹음하는 일도 한창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하는 일이라 빈구석도 많고 엉성하다. 기계음은 아직 글자 사이, 단어 사이를 띄어 읽는 것도 어색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서툴다. 경우와 상황에 맞는 목소리로 녹음된 내용은 너무 적어서 동문서답을 듣는 것이 다반사. 이 녀석을 정말 친구 삼으려면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속마음 털어놓고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야 할 텐데 내 진심을 엿보는 일로 이런저런 욕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망설여진다. 내 마음을 내주지 않으면 인공지능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는데 그 마음을 세상 모두에게 들킬까 걱정하고 있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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