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는 다소 긴 길을 걸어오느라 아직도 숨을 고르고 있는 기자를 보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기자는 불만을 제대로 숨기지 못해 얼굴로 드러내고 있었다. 요즘은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대상을 직접 찾아가 인터뷰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기자들은 대개 인터뷰 드론이나 화상통화를 이용했다. 하지만 정호는 청전시(市) 밖에서 절대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기자들은 굳이 차를 몰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기자는 인사말이 끝나자 곧장 질문을 던졌다.

“이번 인터뷰는 청전시를 백과사전식으로 소개하기보다 1대 시장으로 당선된 분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어서 준비해봤습니다. 시장님께서는 청전특화도시를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저는 청전시가 다른 도시에 비해 더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양성의 일면을 강조하는 특화도시들이 만들어진 건 이미 오래됐잖습니까.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나친 단순화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청전시를 ‘전통을 고집하는 옛 도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부적응자나 촌스러운 사람들만 모여 사는 도시라고 폄훼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정호는 여유있는 자세로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스물한 개 특화도시 전부를 한꺼번에 비난하시는 겁니다. 저로서는 그분들이 오히려 시대를 핑계로 삼는 차별주의자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시장님께서는 청전시가 옛 삶을 고수하는 특화도시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오히려 백과사전식 정의가 도움이 될 겁니다. 사전에 따르면 우리 시는 모든 형태의 인공지능 사용을 금하는 도시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시는 시 경계와 모든 유선 인터넷망에 안티 AI 방화벽을 설치해두고 있죠. 첨단 기술입니다. 그것만 봐도 우리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공중화장실 세면대에도 인공지능이 들어가 있는 시대 아닙니까. 물론 청전시 화장실은 다릅니다만. 어쨌든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건 곧 21세기 말의 시대적 정의입니다.”

“그런 시대라고 해도 타인에게 특정 인생관을 강요하는 게 폭력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지요?”

기자는 다소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저를 비롯한 청전시 시민들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인공지능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흔히 인공지능을 똑똑한 부하나 집사 정도로 의인화하고 있잖습니까? 하지만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고 인격이 부여되진 않습니다. 지금 사회 전반에 퍼진 인공지능은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전문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그 수집은 전방위적으로,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이뤄집니다. 청전시는 그걸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도시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게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모인 도시죠. 물론 정말로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시장님과 청전시민들은 자주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정의하는 것이, 현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수많은 편리함을 모조리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는 뜻인가요?”

“예, 우리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21세기 말에도 남아 있어야 할 인생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세상과 미래를 바꿀 만큼 잠재력을 가진 사상, 이론, 기술이 등장하면 다양한 반응이 나오게 마련이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두 가지 반응이 도드라지는 경우가 많다. 극적인 두 가지 반응이란 열렬한 찬양과 극단적인 거부다.

이런 패턴은 인공지능에 대한 태도에서도 반복된다. 사람이 당면한 문제 대부분을 인공지능이 합리적으로 해결해줄 거란 기대는 엄청나다.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를 잃거나 자율주행 자동차가 미친 듯이 거리를 질주할 거란 공포심은 그 반대편에 있는 극단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반응은 어느 쪽이든 피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인공지능의 뛰어난 학습능력이 어느 정도 알려진 지금, 숨을 고르고 차분히 생각하게 만드는 소식이 하나둘 들려온다. 인종차별적인 판단 기준을 학습한 인공지능 이야기나, 암 진단에 IBM 왓슨을 이용했던 의사들이 뛰어난 기능에도 불구하고 왓슨과 결별한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인공지능에 기반한 기술적 낙관론을 내세우던 페이스북 서비스에는 꽤 커다란 허점이 숨어 있기도 했다.

우리는 기술이 세계를 새로 정의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기술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거나 거부하면 자칫 그 세계의 참모습을 가릴 수도 있다. 설사 모든 사람이 인공지능의 작동방식을 이해할 순 없더라도 그 한계와 의미를 끊임없이 알리는 노력은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변화를 제대로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권리가 정치, 경제, 의학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에서도 지켜져야 한다는 점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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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배추 녹아. 못 써. 열무 있고, 깻잎에 호박잎, 푸성귀 천지인데 무슨 배추? 잡히는 대로 다 김치고 겉절이고. 오이지 꺼내 먹으면서 여름 나.”

세종 때의 문헌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 서른여덟 가지나 되는 김치-짠지 기록을 읽어내려 가는 판에 전해 들은 여름 김치 회상이다. 정은정 사회학 연구자의 아버지, 충북 음성 출신의 78세 어르신은 단호히 한마디 더하셨다. “한여름에 배추김치는 뭐, 서울 것들이나 그랬지, 뭐.”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김치 감각이 이렇게 다르다.

막 여름이 달려오는 모양이다. 어느새 참외가 시장에 잔뜩이다. 가게에 난전에 손수레에 눈부신 노랑을 뽐내는 과채(果菜)가 무더기무더기로 앉아 행인을 붙든다. 노랑으로 아롱진 깔판 한쪽으로는 오이, 총각무, 열무, 얼갈이, 부추, 쪽파 등 온갖 채소가 뽐내는 풀빛이 짙다. 짙다 못해 노랑을 압도할 지경이다.

푸성귀의 풀빛이 노랑과 경합하는 이때, 이때가 전에는 칠순 어르신 말씀대로, 한여름 김치를 염두에 두고 첫여름 김치를 준비하던 때였다.

오늘날의 김치를 대표하는 통김치란 속이 꽉 차는 통배추, 곧 결구종 배추로 담근 김치이다. 안으로 얌전히 오므린 배춧잎 사이사이로 가볍게 소를 넣고 겉잎으로 가지런히 감아 익히면, 부드럽고 우아한 신맛이 여느 김치보다 오래 간다. 움이나 항아리를 다 헤집지 않고 한 통씩 꺼내 먹을 수 있는 만큼 간수하기도 좋다. 통김치가 20세기 이래 김장김치의 대표로 떠오른 이유다. 이윽고 통김치는 냉장고와 손잡고 보존 기간을 늘리더니, 더구나 고랭지 배추 재배와 손잡고는 사계절 김치로 변신했다.

이제 사계절 내내 김치 공장은 통김치를 쏟아낸다. 대중식당이 딱 한 가지 김치만 낸다면 통김치가 제일번이다. 김치찌개며 온갖 부재료와 손잡은 김치찜이 통김치 생산소비의 또 다른 뒷배이다.

오늘날 국제적인 식품 규격인 코덱스(Codex)에 오른 ‘김치(kimchi)’ 또한 “주원료인 배추와 기타 채소들을 손질, 절단, 절임, 양념하여 발효시킨 것”으로 바로 통김치이다.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한국을 넘은 국제유통에서 통김치는 김치를 대표한다.

전에는 김장도 다 떨어지고, 4월 이후 한여름까지 유채, 산갓, 부추, 깻잎, 가지, 풋고추, 파, 양파, 토마토, 양배추, 총각무, 오이가 다 소담한 김치를 이루었다. 통배추 담글 때처럼 복잡한 양념을 준비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재료를 덜 써도 좋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겉절이도 하고, 무짠지며 오이지를 찬물에 말고 초를 더해 김치를 대신할 음식을 마련했다. 풋고추, 양배추, 오이가 물김치로 변신하고, 짠지가 아니라도 그때그때 가지, 오이, 미역을 써 냉국을 말아 새콤하고 상큼한 맛에 기대 여름을 견뎠다.

지역도 살아 있었다. 고구마줄기김치, 양파김치 등은 호남 산지의 계절 김치이자 별미 김치이다. 콩잎을 잘 먹는 영남에서는 초여름 즈음 콩잎이 연할 때 콩잎물김치를 담갔다. 가을로 다가가며 콩잎이 억세어진 ‘단풍콩잎’은 소금물에 푹 절여서 콩잎김치를 담갔다.

또 다른 분께 여쭈니 요즘 배추보다 키가 큰 토종 반결구종 배추에 밥을 으깨 넣어 담근 영남 내륙의 김치를 기억하는 분도 있다. 지역에 따라서 열무김치에 보리밥을 넣어 풍미를 더하는 방식도 있거니와 한여름에 불 앞에서 버티고 찹쌀풀 쑤어 넣느니, 아예 밥을 넣어 물성과 풍미를 달리한다는 조리와 맛의 기획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시 &lt;산가요록&gt; 앞으로 다가앉는다. 우리가 익히 아는 동치미, 나박김치, 물김치 계통이 550년 전에 이미 오롯하다. 책장을 더 넘기니 과일을 소금에 절여 풍미를 증폭하고, 꿀로 단맛을 끌어올리고, 수분까지 넉넉하게 잡은 복숭아김치, 살구김치가 등장한다. 이윽고 수박김치에 이르러서는 침샘이 터질 지경이다. 문헌으로 보거나, 칠순 어르신께 한 세대를 건넌 이야기를 듣거나 참 아깝다. 그 계절 감각, 지역 감각, 다양한 맛의 기획이 아깝다. 아까워하는 그 마음으로 김치라는 음식을 헤아린다. 문헌 속에서 한 가지 김치라도 더 확인하고, 세대가 다른 분들로부터 하나라도 더 듣자고 달려든다.

“Keep Calm and Carry On,” 조용히 하던 일 하기. 폭풍의 나날, 다시 책을 펴고 다시 귀동냥을 이어간다. 평화가 꽃피면, 그때 북에 역사적 김치, 남의 김치 이야기를 전해 줄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 북의 김치 이야기를 더 잘 들을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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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에 간식거리를 살 때마다 학생들과 마주친다. 편의점 한곳에는 우리 과 학생 중 둘이 각각 주말 전일, 주중 저녁 릴레이로 알바를 한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학교 앞에서도 알바 하는 학생을 찾을 수 있다. 일식주점에는 군대를 마치고 돌아온 시끌시끌한 복학생이 저녁시간을 책임지고 있고, 해장을 위해 들르는 카페에는 수줍은 신입생 남학생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먹자골목 전체를 뒤지면 줄잡아 우리 과 학생 십 수 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최저임금은 지난해에 비해 16.4%, 1060원이 오른 7530원이다. 실제 알바생들의 최저임금은 어떨까? 편의점 알바생들은 시간당 1000원 이상 덜 받는다고 한다. 그마저도 더 깎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부당하지 않으냐”며 “노동청에 신고하는 법을 알려주마” 했더니 손사래를 친다. “학교 앞과 근처에 편의점이 이렇게 많은데, 알바비를 제대로 줄 수나 있느냐”며 오히려 ‘영세 프랜차이즈 자영업자’들 편을 들어버린다. “학교 앞 편의점에서 알바 하는 애들은 다 이 정도 돈 받을 거를 감안하고 하는 거”란다. 교차로에 서서 세어보니 눈앞에만 편의점이 다섯 개가 있었다. 치킨집은 십 수 개. 주점이나 음식점 알바를 하는 경우 최저임금을 받거나, 좀 더 받는 경우는 있다고 한다. 대신 노동강도가 세다. 공부에 지장받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받는 것에 대한 선호. 편의점 알바는 어쩌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다만 벌이가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할 뿐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학생들도 많다. 방학 때마다 공장 알바를 하는 남학생들도 제법 있다. 제조업벨트가 위치한 동남권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조선소 사내하청이나, 공장의 조립 하청업무 등에 투입된다. 요새 조선소 일은 별로 없지만, 공장은 잘 소개받으면 일이 손에 좀 익을 때쯤 주말 특근과 야근을 뛰면 월수입 300만원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한다. 남학생들은 제대하자마자 학기를 통째로 쉬고 공장에서 일하면 대학교 학비와 생활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서울에도 알바를 하는 학생은 많다. 그렇지만 제조업벨트가 있어 계절적으로 비정규직 수요가 급증할 때마다 꽤 높은 임금을 주는 직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차이다. 몇몇은 여차하면 학교 관두고 공장으로 간단다.

지난 28일 통과된 최저임금 산입 개정안에 따라 정기상여금도 기본급의 25%인 39만원을 넘는 부분은 모두 최저임금에 반영된다. 식대나 교통비 등 복리후생비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다니는 공장에서 당분간 임금이 생각만큼 오르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차피 계약직으로 몇달씩 일하는 거라 상여는 별 해당이 없을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사측이 최저임금에 들어갈 수당을 결정할 때 노동조합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의견청취’나 ‘협의’만 하게 만든 내용 때문에 양대 노총의 반발을 샀다. 단체협상으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결정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수준일지라도 협상의 테이블에 올라가게는 될 것이다. 하청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알바생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의견’이라도 낼 수 있을까. 편의점에서 월급을 떼여도 그러려니 하는데 말이다. 단체교섭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번듯한’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의 급여명세서엔 자잘하게 떼어가는 것도 많지만, 자잘하게 붙어 있는 항목도 많다. 복리후생비 외에도 정근수당·가족수당·자기계발비 등 다양하다. 내용으로 보면 기업이 아니라 국가가 제공해야 할 복지서비스의 이름들이다. 가족을 돌보는 것도, 자기계발을 해서 역량을 강화하는 것도 복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당들의 형성 이유를 추적해보면 기본급을 올려주는 대신, 회사가 다른 명목으로 임금을 보전해준 경우다. 많은 노동조합은 한결같이 모든 직급 임금의 정액 인상을 요구했고, 회사는 정률 인상을 제시했다. 협상은 대개 정률 인상으로 끝나되, 일정 부분 특별 보너스나 ‘자잘한 수당’ 지급으로 결론이 나곤 했다. 물론 교섭력이 떨어지는 비정규직이나, 하청 중소기업 노동자는 정기상여금 정도를 제외하면 그러한 항목조차 없었다. 그 결과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임금 차이 중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정기적으로 지급할 급여를 기본급 대신 다른 명목으로 지급한 것은 경영상의 어려움이 올 때 언제든 삭감할 수 있게 만들려는 회사 측의 의도이긴 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저임금에 복잡한 형태의 수당들을 통합해 단순화하는 건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논란이 어딘가 마뜩잖다. 수당 따위 없이 알바 하는 학생들이 생각나서다. ‘번듯한’ 회사에 가기 위한 전국적인 ‘스펙’ 쌓기 경쟁에서 멀리 떨어져 쉽게 포기하는 지방대 학생들은 알바를 하다가 근속은커녕 연봉조차 불분명한 하청 중소기업의 저임금 노동자가 되기 일쑤다. 로드숍 화장품 매장 점원이나 휴대폰 판매원 등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카페 직영점 직원 정도면 감지덕지로 여긴다. 다 합쳐도 최저임금 못 맞추는 사업장은 전체의 15%에 달한다. 임금체계 바깥에 있는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외주작업을 맡아서 하는 작가들도 떠오른다. 

복리후생비나 ‘저녁이 있는 삶’은 언감생심, ‘최저임금’이 곧 ‘최고임금’이 되는 이들에게 ‘최저임금’과 ‘수당’이란 도대체 뭔가 싶다. 예외라고 치부하기에 이들의 비중은 노동가능인구로 볼 때 절대다수일 것 같다.

저학년 때 진로 면담을 하면 “특별한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이런저런 알바를 열심히 하던 학생들은 4학년이 되어 갑자기 철난 얼굴로 9급 공무원과 경찰이 되겠다고 찾아온다. 공무원밖에 없단다. 하루에 5시간 이상 엉덩이 붙이고 1년은 꼬박 공부할 수 있는지를 물어 보려다 참는다. 카페나 술집을 하겠다고 포부를 밝히거나, 아는 선배나 부모가 알려준 대기업(사실은 하청)에 가겠다고도 한다. 성실한 여학생들은 사무보조 자리를 잡거나 학교의 조교 자리를 노린다. 수당 포함 최저임금 언저리에 경력단절 오기 딱 좋은 비정규직 자리들이다. 

진지하게 이것저것 묻는 학생들에게 공무원 말고도 다른 일자리도 괜찮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학생들이 최저임금을 받든 상여금을 더 받든 중장기적인 직업적 전망이란 것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양승훈 공작소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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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침대 매트리스에서 라돈이 검출되어, 대규모 리콜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라돈은 지각에서 기체 상태로 방출되는 방사성물질로, 흡연 다음으로 폐암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번 사태는 음이온을 방출하는 효과를 낸다며 모나자이트라는 광물을 매트리스에 사용하면서 발생했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모나자이트라는 광물은 1개 수입업체를 통해 66개 업체로 팔려나갔다. 지난 25일 원자력안전위원회 보도자료에 따르면 66개 업체 중 1개 업체는 이번에 문제가 된 대진침대로 매트리스를 납품했고, 9개 업체 제품은 라돈으로 인한 내부피폭선량이 연간 1mSv(밀리시버트)를 넘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고, 3개 업체의 제품들은 분석 중이며, 나머지 53개 업체는 사용 현황에 대해 확인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보도자료에 따르면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의 내부피폭이 1mSv를 넘는지 확인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모나자이트를 통해 라돈에 노출되는 사람들은 소비자뿐만이 아니다. 모나자이트를 취급해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 또한 라돈에 노출되었을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소비자들보다 라돈 노출의 정도가 더 심했을 가능성이 높다. 모나자이트의 취급량이 침대 매트리스에 포함되어 있는 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수 있으며, 작업장 환기가 잘 안되는 구조였다면 라돈 노출이 더 많았을 것이고, 모나자이트 광물 분진이 날리는 작업 환경이었다면 분진을 흡입해 직접 폐에서 라돈이 뿜어져 나와 작용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나자이트를 사용한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라돈 노출 정도를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우선 라돈 검출 침대 관련 대응을 위한 관계부처 회의에 고용노동부도 참여해야 한다. 노동부는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협조해 모나자이트가 유통된 사업체를 확인하고, 해당 사업체에서 모나자이트를 사용한 기간 동안 일했던 노동자들의 전수 명단을 확보해야 한다. 이후 안전보건공단과 함께 각 사업체별, 노동자별 라돈 노출 추정치를 확인해 문제의 심각성 정도를 확인하고 공표해야 한다. 문제가 심각한 정도라는 결론이 나오면 모나자이트 라돈 노출 노동자들에 대한 코호트를 구축하고, 향후 이들 노동자에게 폐암이 발생하지 않는지 추적하며, 폐암이 발생한 경우에는 산업재해보상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또한 노동부는 이번 기회에 노동자들의 라돈 노출 관리방안을 마련하고 실제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를 갖추어야 한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과 그에 따른 ‘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을 보면 노동자들의 라돈 노출에 의한 건강장해를 예방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 다만 ‘생활주변방사선 안전관리법’ 제14조에 모나자이트와 같은 물질을 취급할 때 노동자들에게 취해야 할 조치들이 명시되어 있으나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문송면은 온도계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수은에 중독되어 1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문송면은 노동자들이 일 때문에 죽거나 아프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는 화두를 던졌다. 30년이 지난 지금 라돈 침대 사태를 겪으면서 문송면이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노동부를 비롯한 정부부처의 적절한 대처를 기대한다.

<강희태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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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란 말 대신에 다방이라고 쓰면 반갑다. 늙다리 옛사람도 아닌데 그러하다. 이난영의 노래 ‘다방의 푸른 꿈’을 틀어놓는다면 금상첨화겠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느나 부르느나. 흘러간 꿈을 찾을 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조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옛사랑이 그립다. 조그만 찻집에서 만나던 그날 밤 목메어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느나 부르느나. 소리에 실은 장미화러냐. 시들은 사랑 쓸어진 그 밤. 그대는 가고 나 혼자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남미에서 가장 이름난 다방을 가봤다. 아르헨티나 하고도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를 추다가 구경하다 어찌 저찌 하다가 토르토니(Tortoni)라는 수백년 된 다방에 들어섰다. 가르델의 유성기판 탱고 노래들이 흐르는데, 나는 뜬금없이 이난영의 노래 ‘다방의 푸른 꿈’이나 ‘할빈(하얼빈) 다방’이 듣고 싶었다. 그런 오래되고 센스 있는 다방이 서울이나 울 동네 어디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야흐로 아이스커피의 계절. 걱정하는 척 남 흉이나 보고 앉아 있는 속인들 말고 손해만 보고 사는 맘 착한 친구랑 앉아 수다를 떨고파라. 편하고 순정한 다방이 어디 있나.

이브 라발리에는 십대 때 파리에 당도한 인기 절정의 여배우였다. 어느 날 갑자기 산속 마을로 숨어버렸다. 동네 병원을 도우며 화장기 하나 없이 지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튀니지에 찾아가 병자를 돌보기도 했다. 사연을 알게 된 영화계는 안달이 났다. “나는 파리에 돌아가지 않을래요. 파리는 많은 걸 안겨주었지만 행복을 주진 않았어요.” 라발리에는 장미꽃이 만발한 시골 다방에 앉아 시집을 읽고 드뷔시의 ‘달빛’을 들었다. 가장 부자였다가 가장 가난한 재속 수도자가 되었다. 소리에 실은 장미화. 성모 마리아에게 꽃을 바치며.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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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 노동 참여율은 57.1%, 남성 노동 참여율은 76.3%이다. 이러한 고용률 격차는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으로, 여성의 경력단절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어 왔다. 여성 경력단절의 제일 큰 원인으로는 육아와 출산이 꼽힌다. 여성의 연령별 고용률 그래프 역시 수십년째 M자형 곡선을 그리며 이를 드러내고 있다. 가장 왕성한 노동 활동 연령대인 29~45세의 여성들이 노동 현장을 이탈한 후, 다시 돌아오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한창이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을 보면, 남녀 공히 육아휴직 신청가능, 노동자의 육아휴직에 따른 사업주 지원제도, 육아휴직을 이유로 불리한 처우 금지 등이 명시되어 있다. 즉, 우리가 제도가 없어서 육아 휴직을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막상 현장의 태도는 다르다. 기업에서는 석사학위를 받는 것을 장려하고 심지어 재정적 지원을 주기도 하지만 비슷한 기간 동안 이뤄지는 육아 휴직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MBA(경영학 석사)를 받으면 의사결정 기술과 전략 기획 능력을 습득했다고 인정하고, 상위 직책으로 승진시키기도 하지만,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사람들은 덜 헌신적인 사람으로 여기거나, 종종 핵심부서에서 지원 부서로 이관되기도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제도가 있어도 사용하기 어려운 문화가 된다. 고용주뿐 아니라 직장 동료, 그리고 휴직 가능자 스스로도 육아휴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다.

출산과 육아는 경력단절을 야기하는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여성의 노동력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사용하던 기술과 고도화된 현장 지식을 따라잡는 데 시간이 필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신입사원처럼 원점부터의 교육이 필요치는 않다. 기본적으로 ‘어디까지 했었지?’ 기억해 내고, 업무에 수반되는 관계를 재구축하고, 덜 쓰던 기술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한편, 육아에서 돌아온 여성들은 새로운 스킬셋을 장착하고 업무현장으로 온다. 육아 경험은 공감, 리더십, 멀티태스킹, 우선순위 결정 등과 같이 중요한 조직 개발 역량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여성 창업가 리카르다 체차(Riccarda Zezza)는 20년 가까운 기업 재직 동안 참가했던 수많은 연수보다 두 번의 출산 휴가를 통해 필요한 조직 역량을 더 많이 습득하고, 이것이 본인만의 경험이 아닌 많은 부모들의 공유된 경험임을 알게 된다. 기업 또한 이를 적극 활용하여 혜택을 얻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육아연수’ 또는 ‘육아석사’(MaaM·Maternity as a Master)라는 개념을 주창하고 이를 사업화했다.

아이의 탄생은 일상생활의 재편성과 변화를 관리할 복잡한 시스템 구축을 요한다. 부모들은 시간과 자원을 최적화하고 목표와 우선순위에 따라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등 매일의 위기 속에서 멀티태스킹 능력과 창조적인 솔루션을 찾는 능력을 개발한다. 또한, 자녀의 욕구를 듣는 공감력과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습득하고, 독립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지도하는 리더십 역량 등을 기르는 기회를 얻는다.

출산, 육아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떠나 있는 시간들을 디스카운트하면 사람들은 ‘육아’와 ‘일’ 사이에 선택하려 할 것이다. 실제로 여성들이 비즈니스, 정치 등의 분야에서 유리천장을 깨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자녀를 갖지 않으면 더 쉽게 위로 올라간다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아이를 기르는 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과 경력에 피해를 받는다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평생에 걸쳐 좋은 시민, 유용한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와 교육에 몰두한 어린 세대일수록, ‘부모로서의 자아’를 차순위로 돌리고 ‘사회인으로서의 자아’에 몰두하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육아휴직을 ‘아이를 기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떠나 있는 시간’ ‘누군가 애는 낳아야 하니 잠깐 쉬게 해줘야 하는 시간’ ‘누군가 애는 길러야 하니 돈 덜 버는 아내가 쉬어라’라는 시각으로는 여성의 저조한 노동참여율도, 제도가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는 문화도, ‘엄마’와 ‘사회인’ 사이에 선택을 강요당하다 결국 저출산과 비혼을 택하는 젊은이들의 선택도 멈출 수 없다.

육아 휴직을 단순한 근무 시간의 관점이 아닌, 회사의 자산인 노동자들의 사기와 생산성 향상의 측면에서 재정의해야 한다. 고용주도, 노동자 자신도 더 많은 기술을 개발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풍부하게 할 학습의 시간으로 육아휴직을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

<송수진 고려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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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출간되어 크게 주목받은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은 스탈린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권력 앞에 나약한 예술가의 복잡한 내면과 고뇌를 그려내며, ‘체제에 순응해 살아남은 비겁한 작곡가’ 혹은 ‘음악으로 압제에 은밀히 저항한 예술가’라는 이분법적 평가로는 가닿을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문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얼마 전 발간된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라는 부제처럼, 혹독한 전쟁 시기 탄생한 교향곡 7번을 둘러싼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구성한 역사서이자 작곡가의 모습에 한층 다가갈 수 있는 평전이다.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증언>이 널리 읽혔음에도 그에 관한 책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음악만큼 격동의 현대사와 맞물려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작곡가가 드물기 때문이리라.

그런 관심은 음악회장으로도 이어져 롯데콘서트홀은 탄생·서거 백주년도 아닌 쇼스타코비치를 올해의 작곡가로 선정해 그의 작품을 조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쇼스타코비치와 검은 수사’라는 음악회가 눈길을 끈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14번을 안톤 체호프의 소설 <검은 수사>와 결합해 만든 이 공연은 에머슨 현악 사중주단의 바이올린 주자 필립 세처와 연극 연출가 제임스 글로스먼의 공동 창작물이다.

이들은 말년의 쇼스타코비치가 체호프의 이 단편에 매료되어 오페라를 구상했다는 자료를 바탕으로 현악사중주 14번에서 그 흔적을 찾아내고, 체호프의 소설 내용과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엮어 에머슨 사중주단과 일곱 명의 배우 앙상블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음악-연극’을 만들었다. 소설의 등장인물 코브린과 페소츠키가 젊은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으로 중첩되는 대본만큼이나, 현악사중주 14번을 중심에 두고 자전적인 8번을 비롯한 여러 곡들이 극의 흐름에 따라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음악 구성이 흥미롭다. 쇼스타코비치의 15개 현악사중주 전곡 음반을 냈던 에머슨 사중주단은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연극 속에 녹여내며 색다른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기존 음악을 새로운 서사 안에서 재배치하는 작업은 2018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초연된 음악극 ‘귀향’에서도 엿볼 수 있다. 17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와 한국 전통 가곡을 교차해 만든 이 음악극에는 연출과 음악감독 외에 ‘음악 드라마투르그’가 따로 있어 바로크 오페라와 전통 가곡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한다.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귀환>을 해체하고 15개의 여창 가곡에서 적절한 부분을 선택해 극에 부합하는 음악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글로벌화된 세상에서 고향과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이 작품에서는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도, 한국 전통 가곡도, 현재적 의미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지난 주말 열린 소리꾼 이희문의 ‘민요 삼천리’(‘깊은舍廊사랑’ 세 번째 프로젝트)도 과거의 노래가 흥미로운 서사 안에서 어떻게 생명력을 얻는지 보여준 공연이었다. 1968년 출시된 ‘민요삼천리’ 음반 얘기로 시작해 그 음반을 들으며 민요가수를 꿈꾸던 여성 화자의 사연을 따라가면서 그때 불렸던 노래들을 듣노라면, 익히 알던 민요들도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개성 넘치는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라이브 공연의 감동과 현장감을 대체할 수는 없다.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공연장까지 찾아오게 하려면 그만큼 매력적인 콘텐츠를 제공해야 할 터. 서양 고전음악의 미적 가치도, 전통 음악의 깊이도 그것을 행하는 음악가들의 자기 서사로 구현될 때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아닐까.

훌륭한 연주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음에도 관습적인 프로그램 외에 참신한 시도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클래식 공연은 별로 없다. 기존 레퍼토리도 어떤 서사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진대, 세상의 이슈와 접목해 고전을 현재화하는 음악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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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법원 내부는 물론 외부로도 확산되고 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다음달 11일 임시회의를 열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논의키로 했다. 이에 앞서 서울중앙지법·서울가정법원·인천지법 등은 각각 판사회의를 개최한다.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는 30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해 고발장을 제출했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의혹 문건에 등장하는 사건 당사자들도 의혹에 연루된 인사들을 공동 고발키로 했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최기상 의장은 30일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행위로 직접 고통을 겪은 분들, 그리고 사법부와 법관에 신뢰를 보내준 국민들께 깊은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고 사과했다. 그는 “철저한 진상규명과 상응하는 조치 없이는 사법부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며 “대법원장께 헌정유린행위 관련자들에 대해 엄정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겠다”고 밝혔다. 재판거래 의혹 문건에 거론된 당사자들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긴급조치피해자모임·키코 공동대책위원회 등은 기자회견을 열고 양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검찰 수사를 촉구했다. 또 아직 공개되지 않은 파일 410개도 모두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일부에서 문건 내용이 확대해석돼 사법 불신을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KTX 해고노동자들의 대법원 대법정 농성을 ‘판결 불복’으로 몰아붙이고, 향후 모든 재판의 정당성이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논리를 편다. 어처구니없는 본말전도이다. 사법 신뢰를 훼손한 이는 사건 당사자들이 아니다. 이른바 ‘엘리트 판사’들이다. 백보 양보해 ‘판결 후 행정처 차원에서 거래를 시도하려 한 아이디어일 뿐, 실행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본질적으로 달라질 건 없다. 판결은 어떤 경우에도 흥정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재판 이후에라도 판결을 두고 청와대와 거래하려 했다면, 그 자체가 반인권적·반헌법적 행위다. 이런 문건이 작성된 사실만으로도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은 무너져내렸다. 없었던 일처럼 덮어버린다고 믿음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최종 심판자인 법원이 검찰의 수사대상이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상황이 여기까지 이른 건 다른 누구의 책임도 아닌, 사법부의 책임이다. 법관들의 통렬한 자성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조속한 결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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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이승의 옷을 벗고 홀연히 떠나신 백담사 오현 큰스님께서 지난해 필자에게 하신 당부이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을 이제 밝히려 한다.

2017년 봄 어느 날 아침 스님의 문자를 받았다. 지금 서울에 있으니 잠시 보자는 내용이었다. 노령의 스님께서 문자를 하실 줄 안다는 것이 신기해서 혼자 미소지으며 스님을 뵐 수 있다는 기쁨에 한숨에 달려갔다. 스님은 건물 밖에서 휠체어를 타고 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10년 만에 뵌 스님은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이미 세속의 모든 번뇌를 다 털어낸 성자의 모습이었다. 스님은 시조시인으로 시집을 여러 권 낸 문인이어서 그런지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에 관심이 많으셨다.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솟대문학’이 폐간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며 위로해 주셨다. 스님이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 물으시기에, ‘장애예술인지원법률’을 만들어 장애예술인들이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지막 과업이라며 마치 나라를 구하는 독립군이 된 양 의기양양하게 말씀드렸다. 내 대답에 스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며칠 후 스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법이 제정되려면 시간이 걸리니 장애예술인 60명에게 월 3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다. 스님은 종교가 타 종교여도 상관 없고 그저 열심히, 어렵게 창작활동을 하는 장애예술인이면 장학금을 줘야 한다며 6개월분을 한꺼번에 개인 통장으로 입금시켜 주셨다.

이 지원금을 보내며 하신 말씀이 바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불교에 ‘무주상 보시’라는 것이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익명의 기부인데 무주상 보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한층 차원 높은 자선이다. 스님의 무주상 보시는 우리 장애예술인뿐만 아니라 어려움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졌다. 좌초 위기에 있던 사업이 스님 덕분에 시작될 수 있었다는 후일담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스님은 격의 없이 막걸리 잔을 건네며 고통 속에 있는 중생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던 구원투수였다.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던 스님께서 훌쩍 떠나니 허망하고 또 허망하다. 이렇게 가시려고 지난해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셨구나 싶어서 스님의 무주상 보시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스님의 입적 소식에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스님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신 글을 보니, 스님의 높은 인품이 다시 한번 빛난다. 흔히들 높은 사람과 친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자랑 삼아 얘기하지만 스님은 일절 그런 상(相)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도 나라 걱정만 하셨다. 세상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서 그것을 풀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고 하시며 “다들 장애인이다. 나도 장애인이고”라던 말씀이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의 화두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념, 지역, 세대 간 갈등이 우리 삶에 장애 요소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갈등으로 대결할 것이 아니라 나도 부족하다는 자기고백으로 장애 요인을 없애 서로의 구원투수가 되라는 의미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조건 없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하는 오현 큰스님 같은 소박한 구원자이다.

<방귀희 |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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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동태찌개는 맛있다. 맑은 육수에 고춧가루만 풀어 바글바글 끓인 그 집 동태찌개는 차가운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명태를 팔딱거릴 때 곧바로 얼려서 생선살이 탱탱하고 쫄깃하며 구수하다고, 맛깔나게 설명하는 유명인들이 단골인 집은 아니다. 그래도 늘 만석이었다. 식당 사장은 30년 넘게 동태찌개를 끓였다고 했다. 자신의 손맛에 자부심이 대단한 그는 손님들이 맛있다고 할 적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념게장도 괜찮지 않아요? 싱싱한 게를 떼와서 내가 직접 무친 거예요.”

반찬으로 빠지지 않고 내놓는 게장도 맛있다. 저녁마다 이튿날 장사할 음식을 직접 다 준비해 놓는다는 그는 늘 느긋해 보였다. 점심 장사가 끝나면 그는 친구들과 식당 한쪽에 앉아 화투를 쳤다.

“내가 식당에 붙잡혀 꼼짝 못하니까 친구들이 놀아주는 거지.”

동태찌개가 끓고, 화투장을 맞추면서 어르신들이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살이 별 걱정할 게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동태찌개집이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문을 닫았다. 사장이 암 수술을 해서 더는 장사를 못할 거라는 소문이었다. 지붕 낮은 기와집이었던 가게는 2층을 올려 붉은 제등을 내건 일식집이 들어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집으로 바뀌더니 그 집도 신통치 않았는지 해를 넘기기 전에 갈빗집이 신장개업 입간판을 세웠다.

이제는 칼칼하고 구수한 동태찌개도, 곱게 화장한 얼굴로 손님을 맞던 그도 못 보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식당이 모여 있는 건물 2층에 동태찌개집 간판이 내걸렸다. 혹시나 싶어 가보니, 카운터에 그가 서 있었다. 수척해졌지만, 여전히 고운 모습이었다.

“수술이 잘되었다고 하니까 단골손님들이 하도 성화를 해서 다시 문을 열었어요.”

그는 소문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오는 손님들을 보면서 헛살지 않았구나 싶었다고 한다. 그의 삶과 사람들의 정이 녹아있는 동태찌개는 여전히 맛있다. 아, 미세먼지로 목이 칼칼한 봄에는 동태찌개가 딱인데….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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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도 베를린 외곽지역 샤를로텐부르크에 가면 유럽을 대표하는 야외 원형극장 발트뷔네가 있다.

1935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세워지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1964년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이곳에서 연설을 하는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발트뷔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이곳이 정말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베를린 필)가 매년 6월 이곳에서 정기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독일 베를린의 장벽은 1989년 11월부터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1990년 10월 독일이 통일되었는데 그 역사적인 통일의 순간을 바로 앞에 두고 1990년 6월30일 이 야외 원형극장에서 베를린 필의 여름밤 공연이 열렸다. 이후 날짜를 6월 마지막 주 일요일로 고정하여 지금까지 매년 이곳에서 베를린 필의 피크닉 콘서트가 개최되고 있다.

우리에게도 독일 발트뷔네와 같이 멋진 공간이 있다. 바로 파주 임진각의 ‘평화누리 음악의 언덕’이다. 2005년 평화를 노래하는 공간을 모티브로 독일의 발트뷔네 공연장에 착안하여 만든 이 공간은 약 3만명이 잔디밭에 앉아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국내 최대 야외공연장이다.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선언을 통해 전 세계인의 시선이 남북 간 접경지역으로 향하고 있는 이 시점에 남과 북이 함께 비무장지대(DMZ) 인근에서 평화를 노래할 수 있다면 세계인이 주목하는 매력적인 문화관광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김성은 | 경기관광공사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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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 4월은 4·3과 세월호를 기억하는 달이 아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4·3을 삭제하려 했고,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 예전에 5월은 ‘광주’로만 기억되었으나 2016년 이후에는 강남역 사건이 더해졌다.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애도할 일도 많아지는 법이다. 내달, 6월에는 두 명의 중학생이 생각날 것이다.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중학생 사건(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넓었다).

최근 출간된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새의 시선>에는 2014년 늦은 봄부터 2017년 여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그간의 소설 쓰기가 “넋을 견디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틴다, 견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는 것도 힘겨운 지경인데, 죽은 자의 넋을 견디다니. 나는 이 글귀를 붙잡고 한동안 ‘넋을 놓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해, 참혹한 ‘과거사’, 양극화된 노동조건, 혐오 범죄로 희생된 타인과 함께하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일상적 인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몸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쩌면 당장은 무관한 일을 어떻게 내 일처럼 계속 의식하고 살 수 있겠는가. 매순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넋을 견디는 일은 예술가만의 십자가이자 특권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질주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죽음과 모욕이 생생히 구현되는 현장을 살고 있다. 차라리, ‘구조’는 멀다. 공포는 ‘자본의 직격탄’이다.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혼자 일하다 사망한 열아홉 살 청년부터, 용산참사, 세 모녀의 자살, 항공운송업 재벌의 맞춤형 밀수 사건까지.

애도는 소비의 적이다. 자본주의는 사유, 슬픔, 우울을 싫어한다. 낙관과 조증(躁症)이 자본주의적, 근대적 인지(認知) 상태다. 발전 지상주의 사회인 한국은 더욱 그렇다. 세월호 사건 때 택시를 탔는데 기사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4월이 행락철 대목이었는데 황사, 메르스, 세월호로 다 망했어요. 택시도, 관광버스 회사도 피해자예요. 죽은 사람은 안되었지만 산 사람은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의 생계 불안에 공감하면서, 생각했다. 고통 받는 이웃이 있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닌 시대에, 죽은 자의 곁에 있지만 아직은 죽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구의역, 강남역 사건 이후 “너는 나다”는 글귀가 익숙하다. 며칠 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관련한 포스터에서도 “너는 나다”를 발견하고 조금 놀랐다. 예전에는 “그들도 노동자에 포함시키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호가 선의라는 것을 알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호소력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며, 정확히는 비윤리적이다. 그 누구도 타인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과 나는 다른 개인들이다. 우리는 동일한 위험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너는 곧 나”라는 주장은 구체적인 피해자의 위치(죽음)를, 아직은 살아 있는 내가 취(取)하는 행위다. 고통에 대한 동일시가 연대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특히 말할 수 없는 처지의 피해자를 대변하려는 사회운동가나 지식인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윤리적 이슈다.

“잊지 말자” “나는 너다”,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하다. 피해자와 유가족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같지 않다. 기억하고 견뎌야 하는 일도 전혀 다르다. 유가족은 “잊지 말자”는 다짐이 필요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잊기 위해 몸부림친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다짐을 거듭해야만 잊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나는 그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망자의 넋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행위가 가능한가? “잊지 말자”는 일상이 고통인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그들을 소외시키는 언어다. 슬픔이 일상이라면, 기억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얼마나 다짐했던가. 그러나 거짓말처럼 비슷한 일이 무섭도록, 빨리,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구조적 해결도, 잊지 말자는 다짐도 다 공염불이다. 한국 사회,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진상 규명, 피해 보상, 명예 회복을 요구하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는 문제 해결의 일부분일 뿐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가해자’인 국가 권력이, 다시 문제 해결자로 등극하는 것은 권력의 최종 심급으로서 국가의 위상을 강화하는 행위다.

소설가는 말한다. “만장이 펄럭이는 세계 속에서 넋을 피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죽은 너와 살아남은 내가 같다고 말하기 전에, 일상에서 ‘나’는 ‘너’를 견디고 있는가. 살아 있는 이웃도 견디기 힘든데, 보이지 않는 죽은 자의 넋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들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잊혀질 텐데….

“너는 나다”라는 착각 속에서는 넋을 견디는 긴장과 혼돈이 필요하지 않다. 넋을 마주하려면 일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타인의 혼이 내 몸 안팎을 들락거린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동거한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힘겹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위로가 될지 모른다. 안전한 사회는 슬픔의 노래가 지속되는 사회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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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화재의 형상은 복합적이고 순간적이지만 골든타임이 속절없이 흘러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지는 공통점이 있다. 지난해 12월21일 충북 제천 노블휘트니스 스포츠센터에서 일어난 화재는 사망자 29명, 부상자 37명의 인명피해를 야기했다. 올해 1월26일 밀양 세종요양병원에서 발생한 화재는 192명의 사상자를 냈다.

화재 발생 장소는 여가생활을 즐기는 스포츠센터, 진료를 위해 찾는 의료시설 등 일상생활에서도 매우 밀접한 시설이다. 한마디로 화재의 위험성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소방관의 입장에서 화재 현장을 보면 ‘조금만 빨리 인지했더라면, 조금만 빨리 대응했더라면, 조금만 빨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소방대가 교통체증, 불법주차, 기타 여건 등으로 신속한 인명구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므로 필자는 소방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골든타임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피난 동선의 탐색과 손바닥으로 벽을 따라 탈출구를 찾는 법이다. 지하역사, 영화관이나 노래방 등 피난 동선이 복잡한 장소에서는 처음 들어온 출입구 이외의 비상 탈출구 위치 등 동선을 사전에 탐색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만약 어두운 장소에서 유도등이 꺼져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손바닥으로 벽을 따라 출입구가 나올 때까지 찾는다.

둘째는 피난방법의 선택이다. 피난방법의 선택지는 화재 시 발생하는 유독가스에서 신속하게 벗어나는 것이다. 1992년 이후 건축된 아파트는 발코니에 석고보드 경량칸막이가 설치되어 있고, 2005년 이후 건축된 타워형·확장형 등에는 구획된 대피공간이 설치되어 있다. 가구 간 벽체가 경량칸막이라면 화재 시 석고보드로 구성된 경량칸막이를 깨고 대피해야 한다. 또 젖은 손수건은 마른 수건에 비해 5분 이상 유독가스를 막아줄 수 있다. 온도가 높은 유독가스는 위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낮은 자세로 신속하게 대피해야 한다.

셋째, 평상시 가정이나 영업장에 투명한 50ℓ 김장봉투를 비치해놓고 대피 시 활용하는 방법이다. 화재 초기 열기 없이 농연만 가득한 상황이라면 투명한 50ℓ 김장봉투에 맑은 공기를 담아 얼굴에 쓰고 신속하게 대피하는 것이다. 실제 실험 결과 50ℓ 김장봉투로 5분 정도 공기를 마시며 계단을 통해 대피할 수 있었다. 다만, 뜨거운 열기나 화염이 발생한 경우에는 주의해야 한다.

넷째, 평상시 아파트나 소규모 영업장 욕실 수도꼭지에 긴 일반호스와 직분사기를 상시 연결해놓으면 초기 진화 및 대피 때 연기를 희석하고 화재 확산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모옥대 | 전북 김제소방서 소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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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만든, 청와대 마크가 들어간 기념품 수십 종류의 판매가 돌연 중지됐다. 청와대 관람객 등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념품을 새로 제공하기 위해 지난 1월 디자인 업체에 용역을 의뢰하였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 그 도안을 제공하여 기념품을 제작 판매토록 하였는데 ‘표절’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필자도 지난 5일 청와대 사랑채에 갔는데 여러 사람이 새로 선보이는 기념품을 사려 했지만 ‘국민께 말씀드립니다’라는 사과문이 담긴 A4용지 한 장만 붙어있을 뿐이었다.

이번 문제에 대하여 공예계에 50여년간 종사해온 사람으로서 하소연한다. 제발 이런 일은 공예문화 전문가에게 맡겨 달라고. 왜 이런 사소한 것까지 굳이 청와대에서 관여하느냐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때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주칠함을 선물했는데, 당시 중곡동 고가구 수리점에서 중고품을 저렴하게 구입해서 선물했다고 신문에 보도되는 등 망신(?)을 당한 것도 청와대 아니었던가 싶다.

얼마 전 인사동 한국관광명품관에서 베트남산 나무 수저세트 손잡이에 옻칠 그림만 그려서 고가로 팔고 있다고 소비자가 직접 현물을 들고 협회를 찾아오는 등 조잡한 동남아산 공예품들이 국·공립 등 관이 주도하는 판매점에서 판매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디자인, 친근감이 있는 우리 공예품을 개발하지는 못할망정 외국 것을 표절한 회사에 디자인을 의뢰한 청와대나 이것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정보력을 가지고 제품을 제작한 공예문화진흥원 등을 보면서 대한민국 공예계의 현실을 보는 듯하여 울분이 치솟는다.

이번 경우를 계기로 삼아 현장의 공예 장인, 작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예산업 문화 정책을 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칠용 |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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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좋아하는 동물들을 보면서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실 수 있는 동물카페가 인기다. 많은 사람들이 강아지 혹은 고양이 등을 너무 좋아한다며 동물카페에 가서 동물들과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동물 전문가들은 동물카페에 대해 동물학대라는 회의적인 입장을 표하기도 하는데, 과연 동물카페 이용과 동물에 대한 사랑은 서로 양립가능한 것일까?

동물 전문가 중 일부는 동물카페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동물학대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동물카페는 행동 반경이 기본적으로 넓은 동물들을 한정된 좁은 공간에 몰아넣은 상태에서 운영되며 동물들이 낯선 인간을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환경에서 동물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들의 자연적 본능을 전혀 충족할 수 없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라고 하였다. 대상의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하고 대상의 건강한 삶, 정신적 성장, 자아 실현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는 서비스에 상응한 돈만 지불하면 가능하며 소비하고자 하는 대상의 감정과 개별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소비의 대상은 소비자가 돈을 지불한 후부터 그 대상 존재 자체가 아닌 소비자의 욕망으로써 정의된 수많은 상품 중 하나로 전락한다.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혹은 단순히 상품으로서 대상을 즐기기만 하는지에 대한 분별은 우리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사랑과 소비 행위에 대한 분별이 없다면 자신의 행위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상품 서비스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헷갈리게 되고 그 오해로 인해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김지태 |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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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홍대’에 살았다. ‘홍대’란 홍익대학교 일대의 서교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1990년대 후반 ‘홍대’를 떠났다가 지난해 봄 20여 년 만에 다시 이사 왔다. 그동안 ‘홍대’는 크게 확장됐다. 이제 ‘홍대’는 서교동을 넘어 상수동, 합정동, 연남동, 망원동까지를 포괄하는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홍대’의 도시 경관과 문화 양식 또한 적잖이 바뀌어져 있었다.

‘홍대’의 변화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도시사회학 개념이 ‘젠트리피케이션’이다. 널리 알려졌듯, 이 용어를 주조한 이는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다. 글래스는 1960년대 초반 런던 노동계급 거주지역에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중간계급이 들어오고 정작 노동계급은 쫓겨나는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불렀다. 신사계급을 뜻하는 ‘젠트리(gentry)’가 새로운 주민이 된다는 의미가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에 담겨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이론화한 이들은 영국의 닐 스미스와 데이비드 레이다. 두 지리학자가 겨냥한 초점은 사뭇 다르다. 스미스는 1970년대에 도심의 슬럼을 재개발해 높은 임대 수익을 얻으려는 자본의 적극적 투자가 젠트리피케이션을 낳았다고 분석한 반면, 레이는 전후 부상한 신중간계급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누리기 위해 도심으로 진출한 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에는 자본의 투자 전략과 새로운 문화·소비 공간의 등장이라는 이중적 특성이 공존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우리말 ‘둥지 내몰림’으로 번역한 곳은 국립국어원이다. 구체적으로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전문적 학술 개념인 젠트리피케이션이 대중적 시사 용어로 부상한 것은 임대료 상승과 그에 따른 원주민 및 자영업자의 이주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홍대’는 이러한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을 겪어온 상징적인 장소다.

주목할 것은 서구적 젠트리피케이션과 한국적 젠트리피케이션 사이에 관찰할 수 있는 차이다. 사회학자 이기웅은 한국적 젠트리피케이션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꼽은 바 있다. 이 가운데 내 시선을 끈 것은 두 가지다. 서구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뤄진 도심이 원래 게토화된 지역이었던 반면 우리나라 도심은 그렇지 않았다는 게 하나라면,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 젠트리피케이션이 주거 공간보다는 상업 공간에서 진행돼 왔다는 게 다른 하나다. ‘홍대’뿐 아니라 ‘가로수길’ ‘경리단길’ ‘북촌’ ‘서촌’ ‘해방촌’ ‘성수동’ 등의 핫플레이스들은 이러한 상업적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이쯤해서 독자들은 내가 왜 젠트리피케이션을 꺼냈는지를 눈치챘을 듯하다. 오는 6월13일에는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지방선거의 일차적 의제는 지역정치와 생활정치다. 서울시, 부산시를 포함한 지방정부들엔 젠트리피케이션이 주요 의제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난 3월 국토교통부는 전국 250곳에서 도시재생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적극적 대응도 그 추진 전략 안에 포함돼 있다.

문제의 핵심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세입자와 임차인들의 생존에 큰 위협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시급히 요구된다. 예를 들어, 임대차계약 갱신청구권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는 내용이 담긴 상가건물임대차계약법을 빨리 제도화해야 한다. 나아가, 지방정부는 물론 중앙정부는 지역 상생이라는 생태계 조성을 위한 다각적 노력들을 기울여야 한다. 도시의 주인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이대로 놓아두면 ‘뜨는 동네’에는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들어온다. 그 결과 핫플레이스를 일궈온 이들이 떠나면서 그 장소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분위기가 사라지는 이른바 ‘문화 백화 현상’이 일어난다. 문화 백화 현상은 해당 지역의 개성 있는 얼굴을 지우고 결국 활력을 소멸시킨다.

20년 만에 ‘홍대’로 돌아와 보니 옛날에 소소한 기쁨을 안겨주던 장소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라면을 잘 끓이던 분식집, 제육볶음이 맛있던 백반집, 너바나 노래들을 즐겨 틀어주던 레코드점, 그리고 떡집, 제과점, 세탁소, 정육점, 철물점 등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동물원이 부른 ‘혜화동’의 한 구절처럼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을 달려오는 다정한 친구’와 같던 장소들은 이제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 풍경일 따름이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도시 풍경을 소망하는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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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접전 양상으로 진행된 2010년 6·2 지방선거는 후보 단일화를 놓고 여러 뒷말을 남겼다. 진보신당을 대표해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노회찬은 야권 단일화에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호되게 비판받았다. 그가 얻은 14만여표가 한명숙 민주당 후보에게 갔으면 한 후보가 2만6000표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에게 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하지만 같은 당 경기지사 후보로 출마한 심상정은 투표일 전날 사퇴하고도 패배 책임론에 시달려야 했다. 야권 단일후보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가 김문수 한나라당 후보에게 19만여표 차로 패배하고, 부재자 투표에서 심 후보를 찍은 무효표가 많이 나오자 심 후보의 사퇴가 너무 늦었다는 볼멘소리가 쏟아졌다.

4년 후 경기지사 선거 결과는 야권에 더욱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무효표가 15만표로 새누리당 남경필, 새정치민주연합 김진표 후보 간 당락을 가른 4만2000표보다 세 배 많았던 것이다. 무효표의 상당수가 투표일 사흘 전 사퇴한 통합진보당 백현종 후보를 찍은 것으로 분석됐다. 당시 투표용지에는 백 후보 이름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무효표의 저주’는 2014년 7·30 서울 동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더욱 확실히 재현됐다. 야권단일후보인 정의당 노회찬 후보가 900여표 차로 새누리당 나경원 후보에게 졌다. 그런데 무효표가 1400여표였고, 상당수가 투표일 6일 전에 사퇴한 기동민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를 찍은 것으로 추정됐다. 직전 총선 때 같은 지역구 무효표가 500표였다. 무효표가 당락을 뒤바꾸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6·13 지방선거 투표용지 인쇄가 29일로 끝났다. 이젠 단일화에 성공해도 본투표 용지에는 ‘사퇴’ 표기 없이 후보자 이름이 다 인쇄된 채 나온다. 지지율에서 크게 뒤지는 야권이 여기저기서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다. 다음달 7일까지 단일화하면 사전투표에서는 무효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늦지 않게 단일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무효표들이 진짜 후보의 사퇴 사실을 모르고 찍었겠냐는 반문도 만만치 않다. 단일화 자체보다 단일화의 명분을 세워 유권자를 설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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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기 전 영국에서 스포츠는 ‘여가놀이’를 뜻하는 말이었다. 저명한 문명사가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역작 <스포츠와 문명화>에서 현대 스포츠의 기원을 18~19세기 초 영국의 여우사냥에서 찾는다.

사냥꾼은 총이나 칼은 물론 몽둥이조차 쓰지 못하고 오로지 사냥개만으로 여우를 추격한다. 사냥개와 여우, 사냥개들 사이의 경쟁을 지켜보면서 사냥꾼은 짜릿한 긴장감과 흥분을 즐겼다. 이는 상대방의 팔을 뽑아버리거나 심한 경우 목을 졸라 죽이기까지 했던 고대 격투기와 질적으로 달랐다. 현대 스포츠는 폭력이 통제된 ‘놀이’라는 것이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코치로부터 발과 주먹으로 수십 차례의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 뉴스를 보면서 한국에서 스포츠의 의미는 무엇일까 되물어본다.

운동선수에 대한 폭력은 한국 스포츠계의 고질적 병폐다. 일상화·관행화되어 있다. 통계도 이를 입증한다. 2016년 서울대 스포츠과학연구소 연구결과에 따르면 전국 운동선수의 38% 정도가 각종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손발이나 몽둥이로 맞기도 하고 욕설과 협박, 괴롭힘을 당했으며 원산폭격·손깍지 등의 가혹행위를 경험했다.

워낙 해묵은 문제다 보니 피해자가 유명선수거나, 엽기적 수준의 폭력이 아니고서는 보도되기도 어렵다.

엽기성이 큰 사건이 반복되다보면 충격은 덜하고 면역력은 커지는 법이다. 폭력에 대한 공분은 무관심과 무기력으로 변해 쉽게 잊혀지고 만다. 거론조차 ‘무얼 새삼스럽게’라는 느낌이 든다. 심 선수에 대한 누리꾼의 분노도 롤러코스터 같았던 북·미 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의 역전 드라마에 묻힌 듯 지나가고 있다.

한국에서 국가 스포츠는 메달을 향한 무한질주다. 운동선수는 올림픽 메달을 따서 국위를 선양해야 살아남고 각종 대회의 메달을 거머쥐어야 대학 진학이 가능하다. 승리지상주의는 과열경쟁을 낳고 때려서라도 좋은 성적을 거두면 운동선수에게 공부를 안 시켜도, 폭력과 같은 인권유린이 자행돼도 쉽게 용서된다. 성적은 운동선수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다. 지도자들의 일자리는 불안하고 대부분 성과급제의 비정규직이어서 경기 성적에 목숨을 걸게 된다.

시스템과 제도가 지도자의 폭력을 용인하고 부추기는 근원적 원인이 되고 있다. 심 선수의 경우도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기대만큼 기량을 보이지 못하자 코치가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폭력이 선수의 기량과 성적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희박하다. 그럼에도 지도자는 조급한 마음을 폭력으로 해소하며, 경기결과가 나쁘면 훈련장에는 폭언과 폭력이 난무한다. 아예 나중에는 훈육을 핑계로 폭력이 일상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모든 적폐의 밑바닥에는 스포츠가 국위선양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도록 하는 국가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스포츠는 정권이 활용하기 좋은 먹잇감이다. 국가는 올림픽과 같은 화려한 메가 스포츠 이벤트에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하고 체육계는 메달과 성적으로 정권에 보답한다.

이 과정에서 인권유린에 대한 묵인뿐 아니라 승부조작과 입시부정 같은 비리도 끼어든다. 빙상연맹과 같은 각종 체육단체의 사유화와 권력을 거머쥔 특정 지도자들의 횡포 또한 공공연하게 자행된다. 그럼에도 결과만 좋으면 부정한 과정은 은폐되거나 슬쩍 넘어간다.

이 같은 적폐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체육계는 물론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도 웬만큼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대적인 개혁을 표방해온 이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넘도록 체육계 적폐청산은 감감무소식이다.

지난 3월 문체부가 발표한 ‘2030 스포츠비전’은 개혁 의지는커녕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 정부도 기존 체육정책의 기조를 유지하며 체육계의 충성을 살짝 즐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체육계 적폐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켜켜이 쌓여 있다. 그렇다고 대한체육회 등 체육계가 스스로 자정하기란 기대난망이다. 그동안 폭력·성폭력 사건뿐 아니라 각종 제도적 개혁의 시대적 요구에 시늉만 내온 대한체육회의 모습은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운동선수에 대한 폭력은 한두 명의 코치를 엄벌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스포츠 적폐청산이라는 과제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운동선수를 때려서 훈련시키고 성적을 올리고 메달 따게 하는 것을 방치해 놓기에는 너무 미개하고 후진적이며 부끄러운 모습이지 않은가.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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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나 장아찌 같은 저장반찬을 만들 일이 있을 때나 주로 다니던 시장을 요새는 작정하고 다닌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볼 때와 시장에서 장을 볼 때 몇 가지 차이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큰 차이는 대형마트에서는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세일이라는 문구에 혹해 사게 되는 데 반해 시장에서는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느라 꼭 사야 하는 물건을 한두 개씩 빼먹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필요 없는 것을 산 것보다 한두 개 깜박하고 덜 산 게 나은 것 같다. 소비 효율에서도 그렇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지는 요령도 터득한다. 시장에 다니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작은 가게에서 적은 물건을 구입할 때는 웬만하면 현금을 사용하는 것이다. 영세업자들의 카드수수료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서다. 현금을 내밀 때마다 나는 뭔가 착하고 선량한 시민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이 원칙도 ‘성실하고 건강하게 일하는 영세업자’들에게만 적용한다. 카드를 아예 받지 않거나 불친절한 가게는 작정하고 탈세를 하려는, 선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누군가의 선의를 받을 자격이 없으므로 거래를 하지 않거나 부득불 카드 거래를 고집한다. 나는 그것이 정의라고 착각한다.

비슷한 선의를 나는 하나 더 실천한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냉장고에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비타민음료를 조금 여유 있게 챙겨둔 것이다. 택배 기사나 집배원 같은 배달 서비스를 해주는 분들이나 방문 서비스를 해주는 분들을 위한 것이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감사라도 드려야지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사전 연락이나 안내 없이 아파트 입구에 물건을 놓고 가거나 불친절하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들에게는 당연한 듯 음료를 생략한다. 나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건 나의 치사함이 아니라 그분들의 불성실과 불친절이 초래한 결과라고 믿는다. 선택적 선의가 오히려 더 큰 갑질이고 폭력이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나는 애초의 ‘선의’에만 집중한다.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스스로 변명하는 것이다.

어제는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날마다 커피를 사들고 도서관에 오는 이에게 ‘공시생인 것 같은데 매일 커피 사들고 오는 건 사치 아닌가’ 하면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지니 자제를 부탁 바란다는 쪽지를 찍은 사진이었다. 이미 작년에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일이라 하고, 그에 대한 갑론을박이 충분히 있었다 하는데, 나는 그 사진을 보며 뒤늦게 앞서 언급한 나만의 정의, 나만의 선의를 자각한다. 쪽지를 붙인 사람과 상황은 다르지만 노동자의 삶은, 영세업자의 삶과 태도는 어떠해야 한다며 타인의 수준과 태도를 제한했다는 점에서 쪽지를 붙인 사람과 나는 같은 경솔을 저지른 것이리라. 식권 발급 받아 쓰는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비싼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게 말이 되느냐며 비난하던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인 것이다. 인터넷상의 여론도 대체로 그런 경솔을 지적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의 경솔과 다르게 그 쪽지 주인공의 경솔은, 그 경솔을 초래한 박탈감의 무게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같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매일 들고 오는 저가의 커피마저 닿을 수 없는 사치로 느껴지는 삶의 경솔은 제 돈 아껴 모아 밥 사먹는 식당에 기초수급권자가 정부가 준 식권으로 편안히 와서 밥을 먹는 게 불쾌하다고 말하는 경솔이 아니라 식권 한 장으로 여러 식구가 견뎌야 하는 사람이 한 장의 식권으로 혼자만 견디면 되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저지른 경솔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난이 가난과 싸울 때, 어느 가난이 마땅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최저임금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노동계도 재계도 반발하고 있다. 최저임금 대상자와 영세업자들의 입장은 어떠할까. 서로 긴 싸움을 예고하는 중인데, 가난을 볼모로 가난과 싸우게 하는 싸움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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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9일 경제부처 장관들과 가계소득 동향을 중심으로 긴급경제점검회의를 열었다. 최근 들어 성장률, 수출 등은 호조인 데 반해 일자리와 분배상황은 악화되는 등 지표와 체감 사이에 간극이 크다는 판단에 따른 회의였다. 실제 고용 사정은 나쁘다. 지난 2~4월 취업자 증가폭은 매달 10만명 수준에 그쳤다. 2010년 이후 8년 만이다. 소득 하위 20%인 저소득 가구의 명목소득도 1년 전보다 9%나 떨어지면서 고소득 가구와의 소득 격차가 2003년 이후 최대인 5.95배로 늘었다. 일자리 창출과 소득주도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에서 일자리가 줄고, 소득격차가 심화되었다는 통계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가 정책기조를 되돌아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물론 시행 1년도 안된 정책이 문제를 개선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섣부르다. 일자리 감소와 소득격차 심화가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정부의 소득주도 정책과 연관 관계가 있다는 근거도 없다. 김동연 부총리도 “고령화 때문일 수도 있고, 경기 요인일 수도 있고, 도소매 숙박 음식 업종, 일용직 고용이 많이 줄었을 수도 있다”며 유의미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다. 정부는 국책연구원에 최저임금 인상 등의 효과에 대한 분석을 의뢰해놓은 만큼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이다. 연구 결과가 나오면 발전적 논의가 이뤄지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소득주도 성장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가계의 삶의 질을 높이는 작업이다. 기존에 없던 새 길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다만 어떠한 정책도 현장과 괴리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정·보완은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일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주 52시간 노동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문 대통령은 “노동시간 단축은 우리 경제가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중소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임금 감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가계소득 증대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국회 예산정책처 분석에 따르면 가계의 임금 증가율, 자영업자의 영업이익 등은 하향화 추세이다. 여기에 가계부채가 늘어나면서 여력은 더 줄었다. 소득주도 정책이 성공하려면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근로시간 단축 차원을 넘어 고용창출 효과가 큰 서비스업 육성, 자영업의 과당경쟁 문제 해결, 가계부채 대책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성과에 대한 조급증 대신 일관성이 더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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