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에 해빙의 분위기가 역력하다.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나온 판문점선언의 내용을 살펴볼 때, 남북 화해와 경제협력의 기본적 전제가 되어야 할 부분은 아마도 상호신뢰의 구축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에는 인적교류와 함께 물적교류, 즉 물류의 남북 간 소통이 필수적이다.

운송수단은 인간의 역사적 발전에 기여한 것 중 하나이다. 시간적, 공간적 간격을 해소함으로써 상호 간의 물리적 격차를 줄이고 있다. 현대와 같이 생산의 중요성이 점점 약화되고 유통의 기능이 중요한 시기의 경영활동에서는, 물류비용이 경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현재 남북한 간의 물류활동이 기능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려 한다. 우선 생산시설의 관점에서 볼 때, 개성공단을 비롯해 향후 구축될 북한 내의 설비들에 대한 원자재와 부자재의 조달 과정과 생산 이후의 판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운송의 역할이 강조될 수 있다. 이에는 육상과 철도, 그리고 항공과 해상 등 여러 형태의 운송수단이 활용될 수 있다.

육상 및 철도 운송의 역할을 살펴보면, 동서독의 경우에서 경제협력과 통일의 시금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경우 경의선이나 동해선을 통한 유럽 지역으로의 운송의 적용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만일 개성공단과 같은 대규모 시설이 더 건설된다면 해상을 통한 운송에 대한 기대도 가능하다. 이에는 북한의 항만시설에 대한 남한의 설비와 자본 그리고 기술력을 통한 투자와 건설, 그리고 이후 항만운송활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연안운송의 개념으로 부산을 환적항으로 해서 북한의 수출입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항공운송이 또한 언급되고 있는데, 현대는 항공화물의 물동량이 점점 고부가가치 형태로 증가일로에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향후 평양과 인천의 노선 개설은 환적공항으로서도 필수적인 사항이다.

물적유통의 활성화를 통해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남북한 국민들의 염원이다. 동서독의 경우에서처럼, 남한은 기술과 자본력 그리고 에너지 등을 공급하는 형태로 북한의 경제발전에 나름의 형태로 이바지할 것이며, 북한은 양질의 노동력과 지하자원 등을 제공하며 경제적 개발의지를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차원의 상호 간 발전모델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제교류의 활성화는 곧 인적교류의 흐름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부분은 상호 간의 경제적 실익을 추구하는 수지타산적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 분단조국의 민족적 동질성과 통일을 위한 사전비용 지출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사안이라는 점이다.

<김진환 | 한국방송통신대 강원지역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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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달리 5월은 감정의 외출이 잦은 달이다. 어린이날에 이어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짬을 내 우리는 인간의 유전자 혹은 인류의 지식이 대물림되는 현장을 애써 기억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노력은 다소 소모적인 데가 없지는 않겠지만 삶의 고명이자 향신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물림은 ‘닮음’을 지속하는 과정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게 마련이다. 닮았다곤 해도 자식은 부모와 꼭 같지는 않다. 바로 이 ‘같지 않음’ 때문에 지구가 생물학적으로 다양성을 띠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 대물림의 주체는 세포다. 지구에 사는 75억이 넘는 인간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했다. 엄마로부터 하나, 아빠로부터 하나 이 두 개의 세포가 합쳐져 하나 된 세포인 수정란으로부터 인간은 발생을 시작한다. 한 개의 세포가 두 개가 되고 그것이 다시 네 개, 여덟 개… 이런 식으로 아홉 달이 지나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 탄생하게 된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한 세포가 두 개가 될 때에는 세포가 가진 가구 일습을 두 배로 불린 다음 그것을 공평하게 반으로 나누어 갖는다. 그렇게 세포는 서로 닮는다. 이제 나눠 갖는 세포의 가구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대물림을 얘기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유전자는 고이고이 포개져 핵 안에 보관된다. 이 유전자에 담긴 정보를 풀어 단백질 노동자를 만드는 장소는 소포체다. 단백질을 만들 때 쓰이는 에너지는 주로 미토콘드리아가 공급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미토콘드리아를 세포 내 발전소로 비유한다. 그것 외에도 단백질을 가공하는 골지체와 생체 물질의 재활용을 담당하는 리소좀이 있다.

이런 가구를 하나도 구비하지 못한 채 오직 산소만 운반하는 적혈구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세포 대부분은 저런 세포 소기관 가재도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 인간은 부모로부터 세 종류의 유전 정보를 물려받는다. 엄마와 아빠로부터 물려받는 각각 한 가지의 유전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토콘드리아도 자신만의 독특한 유전체를 가지고 당당하게 한몫 끼어든다. 바로 여기에 생물학의 가장 미묘한 수수께끼가 숨어있다. 미토콘드리아는 ‘불균등하게도’ 오직 모계를 통해서만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미토콘드리아는 난자를 통해서만 후대로 전달된다. 따라서 아들만 있는 엄마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체는 궁극적으로 진화의 무대에서 가뭇없이 사라진다.

왜 미토콘드리아가 문제가 될까? 그것은 인간이 물질과 에너지를 계속해서 공급해 주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체계이고 우리가 먹은 음식물은 최종적으로 미토콘드리아에서 화학적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전기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미토콘드리아의 위력을 능히 가늠할 수 있다. 앞에서 발전소에 비유했던 점을 떠올리면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미토콘드리아에서 평생 계속되는 에너지 생산 과정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미토콘드리아 안에 전자 고압선이 흐르기 때문이다. 피복이 벗겨진 채 운반되는 전기가 위험하듯 자리를 벗어난 미토콘드리아의 전자들은 세포 안팎의 단백질과 지질 혹은 유전자 가릴 것 없이 공격할 수 있다. 흔히 우리가 활성 산소라 부르는 것의 실체가 바로 궤도를 ‘벗어난’ 전자이다.

인간이 가진 수백 가지 세포 중 유일하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난자 안에는 미토콘드리아가 가득 들어차 있다. 자신의 유전자와 함께 엄마는 그 미토콘드리아를 자식에게 물려준다. 한 달에 한 번씩 난소를 나온 난자는 나팔관이라 불리는 길을 따라 움직인다. 중도에서 수정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자궁까지 오는 데 며칠이라는 시간이 더 걸린다. 머나먼 거리를 움직이지만 그동안 난자는 거의 에너지를 만들지 않는다. 앞에서 설명했듯 에너지를 만드는 동안 불가피하게 미토콘드리아 안에서 활성 산소가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자는 활성 산소가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공격하여 태아에게 심각한 손상을 입힐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대물림 방식을 채택했다.

그렇다면 나팔관을 따라 난자를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그것은 바로 섬모(纖毛·cilia)라 불리는 또 다른 세포 소기관의 움직임에서 나온다. 숨 쉴 때 공기에 섞여 들어오는 미세먼지를 붙잡아 점액과 함께 몸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 기도(氣道) 세포의 섬모이다. 마찬가지로 나팔관에서도 갈대 이삭처럼 늘어선 섬모가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난자를 이끌어 간다. 난자는 마치 가마에 탄 새색시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에너지 사용을 극소화하면서 행여나 미토콘드리아나 난자에 들어 있는 유전체가 다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렇게 금지옥엽처럼 고이 간수한 미토콘드리아를 물려받은 수정란은 아홉 달 동안 완결체로 자라난다. 분열하여 그 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에 난자에서 온 종잣돈 미토콘드리아는 태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안에서 쉼 없이 에너지를 만드는 평생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이렇게 일사불란한 한 방향 섬모의 움직임에 기댄 난자의 미동 없음을 기리어 인간들은 기꺼이 어버이날을 만들어 냈다. 하늘 푸른 5월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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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예정인 영국의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이 결혼 선물을 일절 사절하고 대신 기부를 해달라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이들은 사회 변화, 여성 인권, 환경, 노숙인 인권, 에이즈 문제, 군대 문제를 비롯해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를 상징하는 7개의 자선단체를 선정해 이 단체들에 기부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기부 가뭄’인 상황이다. 국세청 국세통계연보의 기부금 신고 현황에 따르면 2016년 기부금 신고자 수는 71만5260명이다. 연말정산을 위해 기부금 신고를 한 사람의 수가 1년 만에 6만8722명(―8.8%) 줄어든 것이다. 이는 2006년 관련 현황을 처음 집계한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이라고 한다.

기부 감소 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통계청에서 2년에 한 번씩 기부 경험 등을 묻는 사회조사를 실시하는데 ‘기부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지난해 26.7%만이 ‘있다’고 답했다. 같은 질문에 대해 2011년 36.4%가 ‘기부 경험이 있다’고 했으나 2013년 34.6%, 2015년 29.9%로 계속 감소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약 6명꼴로 향후 기부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기부 감소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 추세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정치인들에 대한 후원기부금은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출판기념회를 통해서다. 일부 출판기념행사에서는 현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카드 단말기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최근 정치 관련 인터넷 여론조작 사건의 주범인 ‘드루킹’이 아닌 ‘기부의 왕-도네이션 킹’이 우리 사회에 많이 생기길 간절히 기원한다.

<정석윤 | 농협구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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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2일은 불기 2565년 ‘부처님오신날’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교가 수용된 시기는 4세기 고구려 때이다. 이후 삼국의 다른 나라에도 전파되면서 정치, 문화, 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불교는 우리 민족에게 단순한 종교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후 남북국 시대와 후삼국,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국교로서 역할을 해오면서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오랜 기간을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불교는 처음 도입 시기부터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호국불교’의 성격을 가졌다. 고려 시대에는 여러 외세 침략에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초조·재조·팔만대장경 등을 만들어 불력에 의한 국가 수호를 빌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의병을 조직해 싸우기까지 했다. 승려 김윤후는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군의 사령관 사르탁을 사살하여 몽골군 전체를 후퇴시켰다.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탄압받았음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또다시 외세 침략에 맞서 싸웠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한 투쟁에도 불교가 있었다. 2009년 진관사에서 일장기 위에 핏빛 자국이 있는 태극기가 발견되었다. 그 태극기를 숨긴 주인공은 백초월 스님이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다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특히 중일전쟁에 강제로 징용된 사람들과 물자들이 실린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를 쓰는 대범한 기획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 밖에도 대한승려협회에서는 불교계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불교는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위기 때마다 앞장서 왔다. ‘호국불교’는 한국불교가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특징일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우리 사회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진관사가 있는 은평구에서 초월 스님의 이야기를 웹툰과 태극기 게양 등의 다양한 문화사업으로 만들어냈다. 다른 곳에서도 이런 문화사업이 발굴되기를 기원한다.

<김윤형 | 서울 동대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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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도보다리가 분단의 38선을 단숨에 지웠습니다. 우발적인 오보로 베를린 장벽이 하룻밤 만에 무너졌듯 남북의 70년 장벽도 한번에 허물어지려나요.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쌓인 그리움에 간절한 염원이 보태져야겠지요. 어떤 순간이 벼락처럼 왔을 때 다 함께 달려나가 허물어뜨리려면 말입니다.

이런 설렘쯤은 괜찮을 줄 알았던 계절, 전 어제 밤새 뒤척였습니다. 당신과 긴 통화를 한 뒤였지요. 어두운 목소리가 도무지 잊혀지지 않더군요. “여성 후배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해서….” 더불어민주당 6·13 지방선거 경선을 넘지 못한 당신의 소회는 차라리 눈물이었습니다. 사실 남성들에 견줘 돈도 조직도 경험도 많지 않은 여성들에 ‘마을 정치’는 쉽지 않지요. 골목을 장악한 세력들의 굳건한 동맹. 오죽하면 “남성 의원들은 낮에 의회에선 꼼짝 못하다가 밤에 동네로 나오면 활개치더라”는 경험치가 때만 되면 나올까요. 차라리 총선은 바람(시대정신, 중앙정치)에라도 기댈 수 있지요. 내심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성 후보들의 도약을 기대했습니다. 기존 ‘변명’이 통하지 않는 환경 때문입니다. 미투(#MeToo) 운동의 불씨를 성평등 정치로 살릴 수 있는 적기였지요. 집권여당인 민주당이 앞장설 거라 확신했답니다. 이번처럼 승리를 낙관한 적도 없었기에 본선 경쟁력 구호에 밀렸던 여성들이 이제 어깨 펴겠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공천 결과는 강력한 백래시였습니다.

17개 광역단체장 후보 전원이 남성이라니, 좀 과장하면 소름 돋았습니다. 기초단체장, 광역·기초의원 경선도 여성에겐 무덤이었습니다. 들여다보니 지독한 내전이었더군요. 지방선거가 차기 총선을 앞둔 지역위원장(지역구 국회의원)들의 담합 무대나 다름없었습니다. 민주당 승리 예보는 내전을 부추기는 무기였습니다. “권리당원 2000여명을 입당시켰지만 투표를 못한 사람이 많았다. 알아 봤더니 ‘서류 입력을 잘못해서 당원 명부에서 빠졌다. 당비 줄 테니 받아가라’ 했다고 한다.” 지역위원장들이 본인 지지자들만 관리했을 뿐 경쟁자 측 권리당원은 방치했다는 하소연입니다. 권리당원 비중이 공천의 절대 변수였던 경선에서 지역위원장이 밀지 않은 예비후보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요. “지역위원장이 ‘나는 (광역·기초단체장으로) ○○○ 후보를 지지한다. 지지자 명단을 달라’고 하더라. 지역위원장과 내가 미는 후보가 다르면 가번이 절실한 내 입장에선 지역위원장 눈치를 보게 된다.” 큰 단위부터 결정하는 공천 방식이 지역위원장들의 입김을 강화하는 기제가 된 거지요. 민주당이 기초의원 4인 선거구제 무산에 집착했던 이유가 짐작되지 않습니까.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입니다. ‘내전’이 심각했던 민주당 경선만 해도 여성 전략공천, 여성할당제가 여성혐오 공천으로 변질됐습니다. “여성 30% 공천 원칙이 있지만 2인 선거구에선 여성 한 명 뽑으면 50% 공천이라는 이유로 안 지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성 전략공천 약속을 지키라고 했더니 ‘페미질’, ‘메갈후보’라는 욕설이 쇄도했다.” 미투운동, 정당 정치 폐해가 얽혀 남성 약자들이 더 약자인 여성을 노골적으로 공격한 현상입니다. 이 와중에 여성 할당제·전략공천, 가산점 제도 취지도 훼손되더군요. 하나 같이 여성 과소대표성을 교정하기 위한 조치 아닙니까. 저, 설득과 대응에 진이 빠졌습니다. 여성 인재가 많아지면 뭐합니까. 당선 가능성 낮은 지역에 몰아버리는데요. 경쟁력을 갖추면 또 뭐합니까. 컷오프로 뒤통수치는데요. ‘가산점 받고도 떨어지는 능력없는 여성들에게 웬 특혜냐’고 몰아붙입니다. 아니, 남성들의 능력이 대단해서 정치가 지금 이 지경인가요. 능력과 경쟁력은 왜 여성에게 더 가혹한 기준이 돼야 하나요. 여성 할당제·전략공천은 특혜가 아닌 방향이라고 이해합니다. 성평등 정치라는 큰 방향 말입니다. 이마저도 동의 못하면 왜 지역에서 여성들이 성장 못하는지, 민주당 부산 사례(비례의원만 있다가 이번엔 기초단체장 여성 후보 2명)만 보더라도 그간 준비된 여성들이 왜 무대에 못 올랐는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성 리더들의 책임감도 필요합니다. 여성 국회의원들은 총선 때 30% 의무공천엔 사활을 걸면서 정작 지방선거 때는 내 문제라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5·18 가두방송 주역 김선옥씨가 고문 수사관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말을 38년 만에 꺼냈습니다. 86도, 운동권도 아니어서 홀로 견뎠을 모진 세월을 헤아리니 너무 가슴 아픕니다. 분노가 치밀지만 이제라도 용기를 내서 고맙습니다. 성평등 정치는 이런 일을 원천 봉쇄하려는 것이지 능력 있는 여성들에게 배지를 달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란 걸 확신하게 됩니다.

역사의 반쪽 서사는 곧 온전한 하나로 채워지겠지요. 정치의 반쪽 서사는 언제쯤 제 짝을 찾을까요. 압니다. 질 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피는 꽃의 다른 이름은 상처란 걸요. 꽃일 때보다 상처인 때가 많았던 당신. 여기저기 긁힌 상처로 정치의 38선을 넘는 당신에게, 간절한 염원을 담은 도보다리가 돼 드리겠습니다.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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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동포사회도 남북정상회담을 적극 지지한다고 단언한다.

보수성향이 강한 동포사회 일간지 및 라디오방송 등은 마치 미주동포사회가 전반적으로 남북정상회담과 그 합의 내용에 대해 우려하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지만 이는 동포사회 전체 분위기를 올바로 대변한다고 보기 힘든 반평화정서 몰아가기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무시하고, 시대의 흐름과 민족적 정서가 올바로 반영된 독창적인 여론조사를 펼친 결과, 동포사회는 남북정상회담에 큰 관심이 있는 것은 물론 비핵화를 이루고 평화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적극 지지한다는 진실을 밝혀냈다. 일명 ‘냉면’ 여론조사 방법이다.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당시 필자는 미 동부 볼티모어에 있었는데, 한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워싱턴 지역, 그 후 캘리포니아 주도인 새크라멘토를 거쳐 필자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냉면’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실태를 파악했다. 각 지역의 한인타운에 위치한 한인식당을 돌며 끼니 때마다 시원한 냉면을 즐기면서 각 업주들에게 냉면 판매량의 변화에 대해 물었더니, 그 결과 7개 대표 식당의 냉면 판매는 모두 남북정상회담 이후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미 전국에 흩어져있는 한인커뮤니티 지도자들을 상당수 포함하여 거의 170여명의 동포가 속해있는 카톡방에서는 평소의 정치성향을 초월하여 전격적인 지지 발언들이 쏟아졌고, 상당수는 달려가 냉면을 드셨다고 밝히면서 일부는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대규모 한인동포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대표 도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의 한인회 등은 이미 동계올림픽 때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지지하는 기자회견 등을 잇따라 열었고, 보수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있던 로스앤젤레스 평통에서는 지역구 미 연방하원을 직접 만나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으며, 연방청사 앞에 가서 소규모 평화집회를 열기도 했다. 또 미국 내 반대여론을 바로잡고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 진보 언론 등에 글도 쓰고 인터뷰도 하면서 각방으로 지지여론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숨은 노력 속에서 나온 것이 툴시 가바드 의원(민주당)의 주도로 미 연방의회에서 발의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외교 노력을 지지하는 결의안이다. 미국 내에 강하게 형성되어 있는 반트럼프 정서를 뛰어넘어 이런 결의안이 나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우연은 더더욱 아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미주한인들의 풀뿌리 운동을 선도해 온 ‘미주한인 풀뿌리콘퍼런스(Korean American Grassroots Conference)’의 숨은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아주 오랫동안 미국의 동포사회는 한국의 보수정권과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보수언론의 영향 속에서 반북 선전에 젖어 왔고, 또 동시에 미국 주류언론의 맹목적인 대북 비방 여론에 노출되어 왔다. 그럼에도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서 이렇게 신이 나서 연대 차원의 냉면을 드시고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미국과 북한의 관계도 정상화되도록 노력하는 풀뿌리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미주동포사회가 자랑스럽다. 이를 바탕으로, 조만간 성사될 북·미 정상회담과 그 이후에 이어질 협상을 통해 북·미관계도 정상화되고 조국에 평화가 영구히 정착하는 데에도 미국에서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로이 홍 | 미국간호사노조 조직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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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여학생들은 교복으로 한복을 입었다. 양장을 하지 않은 것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일제가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총독부는 여학생들에게 몸뻬를 입도록 강요했다. 저고리에 몸뻬라니 그 모양새도 우스웠겠지만, 무엇보다도 몸뻬는 학생들에게 신민으로서 국가가 부르면 언제든 전쟁터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일본의 불온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한 여학교는 몸뻬를 거부하고, 무궁화를 상징하는 보라색 한복을 입었다. 보라색 한복은 전쟁에 반대하며 결코 일제의 신민이 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근현대사에서 국가가 백척간두에 놓여 있을 때 맨 먼저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거리로 나와 싸운 이들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때 만세운동을 이끌었으며, 독재에 맞서 싸웠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교복을 입은 그들은 지금 우리나라가 있게 한 주역이었다.

“그런데 청소년에게 투표권을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것은 말도 안되잖아요. 그들도 이 나라 시민인데요.”

벚꽃 잎이 떨어지던 봄날, 국회 앞에서 선거 연령 하향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회원의 말이었다. 나는 말을 들으면서 천막 앞에서 해바라기를 하듯 앉아 있는 이를 힐끔댔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한 그는 농성에 들어가기 전 삭발을 한 이들 중에 하나였다. 가냘픈 목이 그대로 드러난 그의 모습은 어쩐지 애처로웠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어찌 자는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길 위에서 싸워야 하는 이들에게 걱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까. 교복을 입고 투표하는 것은 어떻게든 막겠다며 나이를 들먹이는 이들과의 싸움에 지쳤을 그들에게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끝까지 함께하겠다.

농성장을 떠나면서 머리 짧은 그에게 악수를 청하자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맞잡았다. 응원하겠다고 간 것이었는데, 그의 웃음이 도리어 내게 위안이 되었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 그들은 봄보다 아름다웠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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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 태어나신 외할머니는 “내가 만주 봉천으로 느그 외할아버지 따라서 신혼여행 갔을 때…”라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의기양양했다. 한반도의 남쪽 바닷가 통영에서 나고 자란 외할머니에게 경성도 아닌 만주까지 기차를 타고 달려 보았다는 사실은 잊을 수 없는 모험이었다. 부산역에서 출발해 서울과 신의주를 거치며 북으로 치오를수록 달라져가던 차창 밖 풍경을 회고할 때면 칠순을 넘긴 할머니의 얼굴에 스무 살 여자의 표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곤 했지만 내게는 할머니의 ‘경이’가 도무지 잘 전염되지 않았다.

아무리 사투리가 제각각이라지만, 하나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삶이 이다지도 다를 수 있는가라는 놀라움이 어떤 것이었을지를 나는 외할머니를 통해서가 아니라 시인 백석의 놀란 눈을 통해 뒤늦게 체감했다.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시 ‘가즈랑집’ 중)를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자란 평안북도 정주 사람 백석. 외할머니보다 일곱 살 연상인 그가 통영이 고향인 한 처녀를 경성에서 만나 사랑했었고, 그녀를 보기 위해 1935년에서 1936년 어름 통영을 몇 번 방문했었다는 것을 뒤늦게 책으로 읽어 알았다. 북녘 내륙에서 자란 그에게 왁자지껄한 남도 선창(船艙)의 활기는 가슴을 설레게도 하고 두렵게도 만들었던 모양이다.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 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시 ‘통영’ 중)

조부모와 부모의 고향인 통영에서 커다란 대구를 겨울 좋은 볕에 내어 바닷바람에 말리는 풍경은 지금도 흔하다. 그 고장 사람의 눈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섬돌 아래 승냥이가 오가는 것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얘기도 대수롭잖게 들어 넘기던 북쪽 남자의 눈에 얼마나 신기했으면 집집이 말리는 대구가 아이만 해 보였을까.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어쩌면 삶의 어느 지점에서 하나의 시공간에 잠시라도 함께 있었을지 모를 백석과 외할머니를 생각했다. 각자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했을 공간에 타자(他者)로 잠시나마 비집고 들어섰을 두 사람. 철학자 레비나스의 시선을 빌리자면, “주체가 그 사건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마뉘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중)에 있었을지도 모를 두 사람. 혹시라도 각자의 공간에서 조우했다면 다른 존재인 두 사람은 서로의 세계를 어떻게 발견했을까.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을 남한의 언론매체들은 실시간으로 현장중계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목소리와 웃음, 악수와 포옹 등은 날것으로 남한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렸다. 클로즈업된 그는,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사람이었고(“멀리서 온 평양냉면…멀다고 하믄 안되갔구나”), 북의 “교통이 불비”해 문재인 대통령이 육로로 오기에 불편할 것 같다는 궁색한 사정을 말하는 처지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남한의 실시간 중계와는 달리 유튜브에 공개된 33분13초 분량의 북한 조선중앙TV ‘북남수뇌상봉’ 기록영화에서는 동일한 장면들을 찍었음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물론 김정은 위원장의 육성이 소거돼 있었다. 요란하게 터지던 카메라 플래시 소리, 만찬에 참여한 남북 인사들의 웃음소리도 아나운서의 내레이션과 배경음악으로 대체되었다. 북한 주민들이 남한 주민들처럼 부산 사투리를 쓰는 문재인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 것인가.

새로운 시작은 남과 북이 서로의 같음보다는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그 다름이 위협이 아니라 경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석이 통영의 말린 대구를 놀랍게 바라보았듯이, 나는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평안도 정주 땅에 여전히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국수’를 먹는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사람’들이 사는지, 궁금하다.

<정은령 | 언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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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가 8일 병영 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성범죄 특별대책 TF’ 운영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2월부터 두 달간 모두 29건의 성범죄 사건을 접수했는데, 성희롱이 15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강제추행 11건, 준강간 2건, 인권침해 1건이라고 밝혔다. 가해자는 영관 장교 10명, 위관급 7명, 원·상사 7명, 중·하사 2명, 일반직 군무원 12명이었다. 상급자에 의한 성폭력은 20건으로 전체의 70%였다. 피해자 35명 모두 여성이었으며 그 절반은 여군 부사관이었다. 군 간부 중 최하위 계급인 중·하사가 성폭력 피해에 가장 취약하며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많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된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성범죄 신고 자체를 가로막는 군 구조이다.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를 신고해봐야 소용이 없으며, 신고하려면 전역을 각오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직급이 낮을수록, 신분이 불안한 비정규직일수록 신고를 꺼렸다. 이는 신고된 성폭력 사례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점을 방증한다. 또 다른 문제는 신고해도 가해자에 대한 신속한 조사·처벌은커녕 2차 피해가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간담회에서 여군들은 “누가 성폭력을 당해도 신고하라고 권하지 않겠다”며 눈물로 2차 피해 경험을 호소했다고 한다. 조사과정이 신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피해자 신원이 다 노출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솜방망이 처벌까지 더하니 군내 성폭력은 은폐되지 않을 수 없다.

TF는 이 같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장병 선발 과정에서부터 성인지 평가 항목을 반영하고, 성범죄가 온정적으로 처리되지 않도록 징계기준을 세분화하는 등 정책개선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TF가 지적했듯 성희롱 예방교육이 질적으로 제고되어야 한다. 지휘관에 대한 성인지 교육이 우선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폭력 피해에 모범적으로 대응한 부대도 꽤 있었다는 TF의 진단은 지휘관에 따라 성폭력에 대한 대처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성 지휘관들이 여군 부하를 기피하는 현실도 극복돼야 한다. 군대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성비 불균형 사회다. 이런 환경에 따른 권력의 우열이 군내 성평등을 방해하고 있다. 성희롱 없는 상태를 넘어 남성과 여성이 조화롭게 군 생활을 하는 조직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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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내린 너른 물에 황금 빛깔 넘실대고 바람 치는 봉우리엔 푸른 옥이 흩뿌리네. 서호를 서시에 견줄 만하구나. 강산이 끄는 흥취를 어이하리오.” 서거정이 양화나루에 배 띄우고 지은 시이다. 햇살에 빛나는 강물과 빗방울 날리는 봉우리가 펼쳐진 풍경을 멋지게 묘사했다. 서호를 춘추시대 미녀 서시(西施)에 견준 이는 소동파다. 서호의 경치를 즐기며 종일 술자리를 이어가는데, 그렇게 맑던 날이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며 비가 쏟아진다. 좌중의 흥취가 깨지려는 때 소동파는 시를 읊는다. “맑은 날엔 물빛 넘실거려 아름답고, 비 오는 산의 뿌연 어둠도 장관이네. 서호를 서시에 견주어 보자면, 옅은 화장 짙은 화장 어느 때고 좋도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모처럼의 연휴, 제주도에 다녀왔다. 첫날 맑디맑은 하늘 아래 본 제주의 풍광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그러나 둘째 날은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창밖을 보며 실망과 걱정에 싸여 있을 때, 일행 중 한 분이 “오늘 같은 날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소동파의 이 시를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찾아간 큰엉 해안. 세찬 폭우를 맞으며 바라본 바다는 화장 전혀 안 한 서시의 성난 얼굴 같았지만, 그 역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어느 때고 좋도다”로 번역한 소동파 시의 마지막 구절 “총상의(總相宜)”는 특정한 조건에만 적절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그것대로 적절하다는 뜻이다. 늘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다. 좋은 날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궂은 날 거기에 맞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만들기란 쉽지 않다. 넉넉한 마음과 매인 데 없는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첫머리에 인용한 서거정의 시는 음풍농월에 그치지 않는다. 1476년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로서 정사 기순(祁順)의 시에 화운한 작품이다. 자연을 읊기는 했지만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긴장 속에 지은 것이다. 변화가 시작된 남북관계에 맑은 날만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위태롭더라도 가야만 하는 길, 살얼음을 밟듯 외줄을 타듯 조심스럽게 균형 잡으며 우선 가능한 분야의 교류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야 할 것이다. 고착화된 관념과 제도들을 내려놓고 사안마다 거기에 맞는 적절함을 찾아가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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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 ‘워라밸’ ‘케렌시아’, 지난 몇 달 내 사회학적 그물망에 걸린 말들이다. 소확행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말한다면, 워라밸은 일과 생활이 조화로운 균형을 갖는 것을 뜻한다. 케렌시아는 나만의 휴식 공간을 지칭한다. 세 말들은 각각 의미의 초점이 다르다. 하지만 공통점도 존재한다. 개인과 여가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크게 보아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개념들인 셈이다.

이 가운데 현대사회론을 공부하는 내 시선을 특별히 끄는 말은 소확행(小確幸)이다. 이 개념의 기원은 1986년에 발표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다.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등이 바로 행복이라는 메시지다. 하루키다운 감성이다. 우리 사회에선 지난해 김난도 교수 등이 ‘트렌드 코리아 2018’에서 소개하여 널리 알려졌다. 대만에서는 지난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소확행은 일종의 소비 트렌드다. 소확행에 앞서 ‘웰빙’ ‘힐링’ ‘욜로’ 등이 존재했다. ‘트렌드 코리아 2018’이 지적하듯, 소확행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는 욜로가 구체화된 모습이다. 소확행을 바라보는 데는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소소하지만 중요한 일상의 발견을 주목한 반면, 다른 이들은 젊은 세대의 좌절이 담겨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포스트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라는 과감한 주장까지 나와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의 경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최근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확행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자기 방식의 휴식을 취하는 평범한 일상들이다. 길게 본다면 1950~1960년대에 추구됐던 ‘소시민적 행복’이 ‘한국적 소확행’의 역사적 기원일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려 했던 산업화의 목표 중 하나도 개인적 차원에선 소확행의 실현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이 재발견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였다. 저성장과 불평등이 구조화되고 불안과 분노가 일상화되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진행되고, 행복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제기됐다. 학업·취업·결혼으로 이어지는 생애주기의 자연스러운 진화가 어려워지면서 중산층의 삶을 누리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됐다. 채워지기 어려운 미래의 욕망보다 당장 이룰 수 있는 현재의 행복이 더 중요한 소확행이 부상한 맥락이다.

행복은 정의하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행복이란 만족감·즐거움·기쁨이 존재하는 마음의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으로 말하면 ‘최상의 좋음’, 다시 말해 최고선이 행복이다. 그런데 행복이 간단하지 않은 것은 사람마다 그 최고선이 다르다는 데 있다. 행복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 만족감·즐거움·기쁨의 대상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 또한 다양하다. 어떤 이는 쉽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이는 노력을 기울여도 행복에 다가서기 어려울 수 있다.

소확행이 소비 트렌드 이상의 의미를 갖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가 진전하게 되면서 개인주의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 바 있다. 개인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만 그 독립적 정체성을 이루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구성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끝없는 경쟁으로 이어진 정글 사회에서 자기만의 행복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개인이라는 ‘실존적 공화국’의 행복 추구 열망은 후기 현대사회가 가져온 결과다.

소확행의 출발이 소비에 있다면 소비에 대한 새로운 성찰 또한 필요하다.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미셸 드 세르토는 소비가 생산에 따른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능동적 구성 요소임을 주장한 바 있다. 소비는 계급에 구속된 행위이자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행위다. 그러나 동시에 소비는 자신에게 만족감·즐거움·기쁨을 선사하는 주체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부정하기 어려운 21세기 소비사회의 자화상이다.

소확행의 의미를 과장하려는 게 아니다. 내년이 되면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날 수 있다. ‘큰 서사’인 계몽주의의 자장 안에서 성장한 내게 ‘작은 서사’인 소확행은 여전히 낯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확행이 제기하는 행복의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은 일상의 연속이며, 일상은 본디 거룩한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일상과 행복을 돌아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소확행은 한 번쯤 그 의미를 생각해볼 만한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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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2013) <침묵의 시선>(2014) 연작은 근년에 본 가장 무섭고 어려운 영화였다. 개봉 당시 세계영화제를 휩쓴 영화지만, 너무 예민하거나 심약한 분들한테는 권하지 못하겠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장면들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VOD로 보다 몇 번을 중단했다.

인도네시아 군부독재 시절(특히 1965~66년)에 저질러진 매카시 선풍과 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반미·반소 비동맹 노선을 견지하던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군부는 공산당 쿠데타 음모라는 것을 적발하고 배후 세력을 척결한다며 50만명(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100만명이 넘는다는 기록들도 여럿이다)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한다.

군부는 자기 손에만 피를 묻힌 게 아니라 마치 대한민국 서북청년단을 연상시키는 ‘애국 청년’들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영화의 대부분의 시간은 이제 노인이 된 그 ‘애국 청년’ 살인귀들이 스스로, 어떻게 ‘빨갱이’와 노동조합원, 또 그들과 관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농민·화교·여자들을 죽였는지를 설명하고 재연하는 데 소용된다.

늙은 인간사냥꾼들은 참회는커녕 낄낄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학살 행위(Act of Killing)를 스스로 ‘재연’ 해보인다. 그저 말로써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자기 몸과 도구를 써서 ‘기억’하고 묘사한다. 바로 그 점이 충격적이고 역겹다. 큰 칼로 사람의 목과 성기를, 또 여자들의 젖가슴을 자르고 토막 내어 강에 버린 이야기, 귀신들까 봐 피해자의 피를 마신 이야기, 철사줄을 사용하는 ‘가장 쉽게 인간을 죽이는 방법’ 등.

그래서 영화의 관객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적 재현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잘 모르겠으니 넘어가기로 한다. 피해자들과 그 가족의 망가진 삶에 대해서도 생략한다. 다만, 그런 일이 어떻게 저런 방식으로 죄의식 없이 기억되고 재연될 수 있게 되었을까만 생각하기로 한다.

영화에 나온 것만 보면 우선 그 나라의 정치 상황에 답이 있는 듯하다. 가해자들은 정부로부터 또 부통령 같은 권력자로부터 여전히 비호를 받는다. 또는 그 자신들이 정치권력의 일부였다. 그래서 당당하다. 돈도 많고 건강한 듯한 학살자들은 자기들이 ‘애국자’임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은 듯하다. 반성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권력’이다.

무고한 사람을 대량으로 죽인 반인륜 국가범죄나 ‘무반성’은 물론 인도네시아의 비극만이 아니다. 한반도에서도 해결되지 못한 과거요 ‘현실’이다. 그래서 광주항쟁의 5월에 또다시 생각해본다. 제주·여순, 그리고 보도연맹과 한국전쟁기의 학살 그리고 군부독재 시절 국가범죄 가해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과연 그들은 얼마나 반성하거나 합당한 처벌을 받았나?

분단국가의 형성 시기(1946~53년) 국가범죄를 주도한 자들은 경찰·군인·자본가·지주 등의 상하층의 친일파, 그리고 분단이 낳은 극단의 극우·반공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참회하거나 진실을 말할 기회 없이 죄악을 묻어버리고 늙어 죽었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인적·제도적·정신적 유산을 남겼다. 한국식 반공주의·국가주의, 제도화된 국가폭력의 기구와 그 담당자들, 또 그들이 형성한 권력과 재산과 그것을 누리는 후예들. 그런 유산들은 죄의식을 없이 하는 데 쓰였을 것이다.

지난 1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보도한 바, 자유한국당 여상규 의원은 간첩 조작 사건의 가해자들인 고문 기술자와 배후 등을 추적하며 취재진이 피해자의 망가진 삶에 대한 생각을 묻자 “웃기고 있네”라 일축했다. 여 의원은 그땐 판사로서 법복을 입었었고 지금도 살아있는 강력한 권력이니 문제제기가 “웃기”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조금 다른 경우도 있다. ‘역사비평’ 121호(2017년 겨울)에는 노영기 교수(조선대)가 국방부 과거사규명위원회에 참여하여 광주항쟁 진실규명 조사 중 11공수여단 출신들을 집단·개별 면접한 경험을 쓴 글이 있다. 1980년 5월 19일 광주역에서부터 21일 집단발포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살인·고문·사체유기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부대다. 노 교수에 의하면 부대원들 중 대부분은 사진 등의 증거가 있는 데도, 가해 사실에 대해 ‘모른다’ ‘할 말이 없다’는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다.

왜 그럴까? ‘민주화’와 과거청산이 어느 정도는 수행된 대한민국에서 이제 가해자는 뻔뻔하게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거나 ‘애국’으로 치장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가해+무반성의 네트워크와 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진심으로 반성하지는 않는(못하는) 것이다.

건국대 이재승 교수의 역저 &lt;국가범죄&gt;(엘피, 2010)가 말해주듯, 민주화야말로 진실을 규명하고 잘못된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아니, 민주화란 국가범죄 청산과 정의 회복의 과정 그 자체다. 적폐청산이 중단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학살 가해자들의 후손에겐 앞의 두 경우(상층 간접 가해자와 하층 직접 가해자)와 달리 법적·정치적 책임이 없다. 자신이 가해자의 후손인지 모르는 경우도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식 암흑 정치의 이데올로기나 행태, 이를테면 지역주의와 보수주의가 순수히 지역과 보수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들의 피로 칠갑한 가해를 눙치거나 둔갑시킨 것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한국의 가해자들은 ‘보수’ 깃발과 태극기 뒤에 숨어 왔다. 국가범죄 가해자들의 권력과 네트워크, 그들의 가문과 재산이 ‘보수’의 자원으로 오용되거나, 보수와 지역의 시민을 인질로 잡아왔던 것이다.

또 5월이다. 그리고 역사의 대전환기다. 남북이 함께 평화와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은 더욱 정의로운 국가가 될 필요가 있다. 같은 고향이라는 이유 때문에 박정희·전두환 같은 가해자들의 편에 서 있는 일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그래야 영남의 시민들이 도매금으로 ‘극우·수구’로 오해받는 일도 멈춰질 것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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