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 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쌍방은 모두 비무장지대 내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로부터 또는 비무장지대로 향하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강행하지 못한다.” “비무장지대 내의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이거나 그가 들어가려고 요구하는 지역의 사령관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느 일방의 군사 통제하에 있는 지역에도 들어감을 허가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새로운 지리적 구역을 만듦으로써 중단되었다. 1953년 7월27일 체결된 휴전협정은 휴전선을 따라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폭 4㎞의 땅을 비무장지대(DMZ)로 정하고 어떤 사람이라도 접근을 엄격하게 제한한다고 명시하였다.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누구도 갈 수 없는 땅이 만들어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휴전협정문의 “조건과 규정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군사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생태환경에 가져온 변화가 대표적이다. 휴전 이후 65년간 사람의 발길이 엄격히 제한된 비무장지대에는 여러 생물들이 터를 잡았다. 1974년부터 지금까지 수행된 생태조사 결과들을 취합하고 분석하여 2016년 환경부가 발간한 <DMZ 일원의 생물다양성 종합보고서>에 의하면, 91종의 멸종위기 야생생물을 비롯하여 4800종이 훌쩍 넘는 동식물이 이 좁고 긴 땅에 살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 전체에 서식하는 생물종의 20%, 멸종위기종의 41%에 해당하는 숫자다. 반달가슴곰, 산양, 사향노루와 수달 같은 포유류와 겨울철새인 두루미와 재두루미는 비무장지대와 민간인통제구역을 서식지로 삼는 대표적인 멸종위기종들이다.

누구도 갈 수 없도록 철책이 둘러진 땅은 그 어느 곳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생물이 사는 곳이 되었다.

전쟁과 환경 변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리사 브래디는 냉전의 마지막 남은 유물이라는 정치사적 의미에서 한발짝 벗어나 비무장지대가 갖는 환경사(環境史)적 의미에 주목한 바 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땅의 환경 변화는 그 남쪽과 북쪽에서 인간 활동의 결과로 나타난 광범위한 환경 변화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비무장지대는 몇 십 년 동안 외교적 실패를 상징해 왔지만, 환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냉전이 가져온 최대의 성공”이기도 하다. 비무장지대의 생태가 잘 보존된 데에는 지속된 군사적 긴장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전쟁과 갈등의 결과로 만들어진 땅의 역설이다.

우리는 또 한번 정치문제와 환경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지점을 지나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달 27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으로 ‘통일’이라는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다.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함께 ‘번영’을 강조한 판문점선언문은 당장 남북 간 경제협력과 새로운 개발사업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프라 건설이다.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를 잇는다는 구상은 실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이 남북 모두에 가져올 경제 효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크다. 분단으로 인해 섬나라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남한 사람들에게는 대륙으로 연결된 철도를 이용해 부산에서 유럽까지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기대감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구상은 ‘평화발전소’ 건설이다.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정부는 북한의 심각한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한 중장기 협력방안으로 접경지역 또는 비무장지대에 발전소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와 같은 사업들은 평화에 대한 열망과 ‘번영’에 대한 기대를 철도와 발전소의 형태로 ‘물화’하는 역할을 한다(최형섭, ‘인프라와 한국의 미래’ 참고).

그러나 한층 고조된 남북 간 화해 분위기는 비무장지대에 사는 다양한 생물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일 수만은 없다. 이미 오래전 과학자들은 비무장지대 안에서 사람들의 활동이 생태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도로 건설과 같은 개발 사업이 비무장지대를 서식지로, 번식지로, 그리고 월동지로 삼는 멸종위기종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군사적 긴장이 누그러지고, 좁고 긴 땅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늘어나고, 사람과 물건의 이동이 잦아질수록 비무장지대 생물들의 자리는 좁아질 것이다.

한반도에 어렵게 찾아온 협력의 기회를 비무장지대의 환경생태 보존을 위해 포기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아주 어려운 이중의 과제에 직면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평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생태환경 보존을 모색해야 한다.

철도나 발전소를 짓듯이 평화에 대한 의지로 비무장지대 생태를 보존할 수는 없을까. 우리 정부는 이미 비무장지대를 생태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곳으로 특별히 지정하고 관리하고 있다. 자연환경분야 최상위 종합계획인 자연환경보전기본계획은 비무장지대를 백두대간, 도서연안, 5대강 수생태축과 더불어 ‘국가 핵심 생태축’으로 구분한다. 2016년에 수립된 제3차 자연환경보전기본계획은 2025년까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일대의 지역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등재하도록 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유네스코 등재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여러 개발계획이 빠르게 진행될 때 비무장지대의 생태 보존계획 또한 철저히 계획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끊어진 철도를 연결하거나 발전소를 짓는 일만큼 비무장지대 생태환경을 조사하고 보존하는 일은 꼼꼼하고 단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연둣빛 잎사귀가 막 돋아난 숲을 배경으로 도보다리 위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정상의 모습은 새 소리와 함께 전 세계로 송출되었다. 박새나 직박구리 같은 텃새들뿐 아니라 되지빠귀 같은 여름철새까지 총 13종의 한반도 대표 여름새들이 내는 소리였다. 미래의 비무장지대에서도 여전히 이 새들을 만날 수 있을까.

<강연실 | 과학잡지‘에피’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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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버이날을 맞아 불효에 대해 생각했다. 자식이 부모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주먹과 발길질을 내리꽂는 일은 명백한 불효이다. 나로서는 이런 불효만큼은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 행위 전반을 불효로 본다면, 범주가 넓어도 너무 넓다. 한국 사회는 ‘효’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데다 불효의 범주가 넓고 모호하다 보니 자식으로서 죄책감이 쉬이 발생하고, 부모가 장래를 멋대로 기획하며 몸과 마음을 통제하려 들 때 무력하게 끌려가기 쉽다. 나는 이것이 한국 사회에 불행한 사람들이 많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조건은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자유롭다는 감각,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관계의 형성, 불안에 잠식되지 않고 담대히 펼치는 상상력이 행복의 요건이라는 점에는 널리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족은 때론 행복을 주는 공동체지만, 오롯한 개인으로 행복해지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굴레가 되는 일 또한 잦다.

내 주변만 봐도 친구의 자식과 비교하며 자존감을 깎아대는 부모를 둔 A, 며느리에게 바라는 것이 많은 모친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미루게 된다는 B, 성장 과정 동안 방임했으면서, 성인이 되자 노후는 자식이 책임지는 거라며 기대는 부친 때문에 속이 문드러지는 C는 빙산의 일각이다. 대중매체가 재현하는 수위를 훌쩍 뛰어넘는 구체적 불행을 보고 듣는 것은 나를 번번이 숨 막히게 한다. 나 역시 양육자의 미숙함이 남긴 상처가 남아있음은 물론이다.

거대한 빙산 앞에 서면 질문하게 된다. 인간은 왜 자식을 낳아 기를까? 전근대사회에서는 자식을 노동력 수급이나 가문 간의 거래를 위한 자원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개인’이 발명되고, 아동인권의 중요성이 대두된 뒤에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행복을 위한 개인의 선택이자, 성체의 돌봄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여린 생명체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대업이 됐다. 현대 사회에서 출산과 육아는 부모들이 어느 정도 희생과 인내를 감수한 채 내리는 (특히 여성의 경우는 경력 단절의 높은 가능성까지 감수하는) 결단인 것이다.

경계해야 할 부분은, 무리한 희생은 보상 심리로 흐르기 쉽다는 사실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마음이 삐죽이 올라오는 일. 자식이 전문직을 갖거나 유명 기업에 입사하기를 바라며, 배우자의 부모까지 ‘받들어 모시는’ 이와 결혼하여 손주를 안기고, 궁극적으로 본인을 빛내주는 장식이 되기를 욕망하는 일. 이런 부모의 바람과 요구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꾸리고 싶은 성인에게는 억압과 착취가 될 수 있다.

자식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태어날 수 없다. 탄생 자체가 부모에게 달려있기에 부모는 책임의 무게를 지게 된다. 즉, 자식을 일정 시기까지 돌보는 일은 선택에 따른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 자식을 도구로 휘두를 권리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것. 당연하다는 듯 요구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비난하는 일의 반복은 가족을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만들 뿐이다. 오히려 ‘가족 같은 회사’를 믿고 거르는 작금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가족일수록 남처럼 상호 예의를 차리는 태도가 좀 더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부모와 적당히 거리를 두는 일마저 불효라면 나는 차라리 불효자가 되겠다.

부모와 자식이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사회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아이를 낳지 않는 타인의 선택에 손가락질하며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음을 확인할 때마다 어리둥절하다.

사회적 약자를 온전히 함께 돌보는 공동체 내에서도 개인의 선택을 두고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폭력일 텐데, 공동체의 존재가 흐릿한 한국 사회에서 그런 말과 행동이 유통되는 일은 부조리의 극치다.

경쟁이 극심하고, 부모가 자식에게 투여하는 자원의 양과 질이 자식의 계급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한국에서 자식의 보육과 교육에 큰돈을 쓰고, 독립할 때 보증금이라도 마련해주려 애쓰다 보면 부모는 노후의 불안에 더욱 취약해지는데, 이는 자식들의 죄책감으로 귀결된다. 악순환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기대한다.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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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순간이 내게도 왔다. 불현듯. 문득 걸음이 멈춰지더니 사방이 새하얘지는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무엇에도 무기력해지는 순간. 그러고선 애초에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붙박이게 되는 순간. 축축한 안개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채, 그저 안개가 되어가는 시간. 이토록 화창한 봄날에 때아닌 우박처럼 상습적인 미세먼지처럼 낯설고도 싫은 공격.

여느 때처럼 토마토를 갈고 새우 껍질을 깠다. 소스와 양념들을 일렬로 늘어놓고 테이블 세팅을 마치고 손님을 기다렸다. 거리에 인적이 없었다. 바람은 차고 거칠었다. 지나가는 계집애의 얇은 치맛자락이 함부로 나부꼈다. 예약은 없었다.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 익숙한 음악소리만이 빈 테이블 위로 흐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 빈 시간을 틈타 냉장고 정리를 하거나, 새로운 메뉴를 시험해 보거나, 와인 리스트를 새로 짜거나 하면서 미뤄두었던 일들을 해결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기다렸을 것이다. 약속이니까. 내가 열어놓고 있기로 한 시간. 혹시라도 뒤늦게 올지도 모를 사람들을 배반하는 일이니까. 그런데 나는 앞치마를 벗었다. 그리고 말했다. 문 닫는다.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머릿속의 말을 무시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안다. 아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문을 닫기 전,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여기 없는 사람. 들키지 않으려고 벽에 몸을 숨기고 숨을 참았다. 전화벨 소리가 멈춘 후 그곳을 나왔다. 범죄현장을 빠져나가는 사람처럼 재빨리. 되돌아보지는 않았다. 식당을 나와 장례식장으로 갔다. 친구의 시부상. 따지고 보면 잠시 들러 조의만 표하고 오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한구석에 혼자 자리를 잡고 꽤 오래 앉아 있었다. 고인에 대해 장례 절차와 장례 전후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고, 그동안 미처 말하지 못한 일상들에 대해 밀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안타까움은 있지만 비통함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 일상에 가까운 애도였다. 친구가 예를 갖추러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떡이나 마른안주 같은 걸 습관적으로 집어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냈다.

식은 우거짓국을 먹다가 문득, 먼 나라에 사는 아픈 시인을 생각했다. 학생 기숙사 시절에 생일을 맞아 취사실에서 미역국을 끓였는데, 다른 독일 학생들이 몰려와 마늘 냄새고 뭐고 다른 요상한 음식 냄새는 참아주겠는데, 그 미역국 냄새만큼은 참아줄 수가 없으니 제발 멈춰 달라 했다고, 그래서 혼자 굳이 끓인 생일미역국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던 이야기가 휙 지나갔다. 지난한 학생 시절이 끝나고 이젠 미역국도 마음대로 끓여먹을 수 있고, 웬만한 채소들은 작은 텃밭에서 키워먹을 수 있는데, 고향에서 즐겨먹던 방아만큼은 씨앗을 구할 수 없더라던 그에게, 돌아가면 방아씨를 구해 보내주겠다 했던 약속도 뒤따라왔고, 내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방아씨를 보내주기로 했었는데. 우리집 텃밭에는 올해도 방아가 지천인데. 그게 뭐라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걸까.

그의 시를 가슴에 품고 다니던 습작 시절이 있었다. 어느 시 한 구절에 어떤 생을 통감하고, 어느 시 한 구절을 내가 가닿고 싶은 이상으로 삼고, 읽는 것만으로 맞닿아 있다는 촉감을 느꼈던 수많은 문장들. 그와 함께 보낸 먼 나라에서의 시간을 추억했다.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이윽고 도착한 황량한 기차역에서의 만남과, 첫 만남이었는데도 낯설지 않게 서로 손을 덥썩 잡아버렸던 그 순간의 짜릿함. 함께했던 새벽 숲 산책과 거기서 들려주었던 소소한 이야기들. 자전거전용 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 슬며시 팔짱을 끼고 제 쪽으로 끌어당겨 멀리서 오던 자전거를 피하게 만들던 그 세심한 손길 같은 것. 너무도 아득하고 지독히 생생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영 문학을 너무 무겁게 지고 있지 마. 한밤중 비좁은 테라스에서였는지, 칼바도스라는 술을 연거푸 비우던 어느 바에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에 모든 것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울어버렸던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그 조그만 사람의 품에 안겨 울었던가.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처음 전해들었을 때, 나는 주방 싱크대 밑에 숨어 한참을 울었다. 좁은 싱크대가 그의 품처럼 여겨졌다. 말기암 항암치료 이어오는 절망적인 말들과 가닿기에 머나먼 그곳. 그 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를 기억해내고 그의 문장들을 소환해내는 것뿐. 내내 연락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지인을 통해 그의 소식을 묻고 전해듣는 것만이 유일한 끈이었다.

남의 장례식장에 와서, 먼 나라에서 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한 시인을 떠올리는 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낯선 느낌이었다. 눈물이 차고 넘치는 내가, 문학이든 생활이든 삶이든 관계든 그 모든 것을 무겁게 지는 것이 습관이 된 내가,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게 무기력해져버린 것일까? 그가 결국 병을 이겨내고 이곳으로 돌아와 모두에게 웃으며 시를 읊어주리라는 기대와 바람 때문인지, 문학이든 인생이든 너무 무겁게 지고 있지 말라던 그의 당부 때문인지, 아니면 갑자기 내게 들이닥친 무기력과 무의미함의 안개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벌세우는 것 같아, 난 괜찮으니 이제 그만 집에 가봐, 내일 또 일할 준비 해야잖아. 친구가 나를 일으켜세웠다. 빈소에서 나와 장례식장 입구의 전광판을 보며 먹먹히 서 있었다.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머쓱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노트북을 켜자 작업 중이던 원고와 자료 화면들이 펼쳐졌다. 아무것도 이어 하고 싶지 않은 시간. 열린 창을 하나씩 닫았다. 그러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경고인 듯 위안인 듯, 인용하기 위해 적어놓은 산초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고맙다 산초.

“저는 적어도 혼자 그냥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차라리 구두장이가 하는 짓처럼 이빨로 가죽을 물고 자기가 원하는 데까지 끌려오도록 끌어당기겠어요. 하늘이 정해놓은 마지막 순간이 오는 날까지 계속 먹으면서 내 인생을 끌고 가겠다는 겁니다. 제 말을 들으세요. 식사를 하시고 이 풀밭의 파란 이부자리 위에서 잠깐 한숨 눈 붙이세요. 그러고 나서 잠을 깨시면 마음이 좀 편해지신 것을 알 겁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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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이랑 눈싸움하고 들어온 밤. 어머니는 동동구루무를 손에 잔뜩 발라주셨다. 트고 갈라진 손에 기름기가 물큰하니 퍼졌다. “아가. 손은 밥 먹을 때와 일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때, 기도할 때도 이렇게 두 손을 모으잖니. 몸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게 손이란다.” 노랗고 노란 달빛 아래서 어머니는 내 손을 오래도록 만지셨다. 함박눈이 내리다가 그치고 또 내리다가 그치고 하던 밤이었다. “낼 누가 오실랑가부네.” 아니나 다를까 먼 나라에 일하러 가셨던 외삼촌이 불쑥 찾아오셨고, 어머니는 편찮으시다는 외할머니 소식에 눈물 지으셨다. 두 분이 조금씩 흘린 소금들로 간이 맞아선지 저녁밥은 정말 풍성하고 맛있었다. 눈이 그치자 달이 둥시럿 떴다. 봉창엔 따스한 불빛이 어렷다.

갓방에서 외삼촌이랑 같이 잤는데, 오들오들 추운 밤에 삼촌은 사우디 사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래가 산처럼 쌓인 나라. 물이 없이도 길고 먼 여행을 한다는 낙타라는 동물.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 “저도 가보고 싶어요.” “그러면 손을 꼭 모으고 기도해봐. 뭐든 손을 모으고 기도하면 언젠가 백 프로 이루어진단다.” 삼촌은 미신 같은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다음날 일찍 새벽길을 떠나셨다. 그런데 삼촌 말이 자꾸 맘에 걸렸다. 기도할 때마다 손을 모으게 되었다.

붓다께서 여행하실 때 전다라 신분의 사람, 게다가 똥치기인 한 청년의 집에 찾아간 일이 있었다. 청년은 붓다를 한번 뵙고자 간절히 바라 왔었다.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그를 갠지스 강으로 데려갔다. 악취로 코를 찌르는 몸을 친히 닦아주었다. “이제부터는 나를 따라오라. 너를 제도하여 사문을 만들겠다.” 천민 신분으론 수행자가 되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는데, 붓다는 완전히 달랐다. 출요경에 따르면 “똥치기 청년은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부지런히 수행한 끝에 열흘이 못 되어 번뇌를 완전히 끊어버린 성자가 되었다”. 똥을 치던 손으로 스님들의 밥을 짓고, 스승 붓다를 따라 걸으면서 손을 모아 정진했다. 이후 청년의 손에선 세상에 없는 가장 아름다운 향내가 났다. 아무도 그가 똥치기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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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대한의사협회가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담은 e메일을 보냈다. 전국 의사 대표자들이 서울에 모여 ‘문재인 케어’ 등을 주제로 대토론회를 연 뒤 그 내용을 당일에 정리한 것이었다. 여러 한글파일 중 ‘제1분과 토의 회의결과’에 눈길이 갔다. 소제목이 ‘문케어의 대회원 및 대국민 홍보’였다.

의사협회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방안’, 이른바 문재인 케어를 놓고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3월 초 정부, 병원협회 등과 함께 앉아 있던 대화 테이블에서 홀로 빠졌다. 보건복지부는 의사협회가 빠지자 개별 학회 등과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23일 ‘극우 발언’으로 논란이 된 최대집 후보가 제40대 회장으로 선출된 뒤에는 투쟁 기조가 더 강해졌다. 남북정상회담일(4월27일)에 집단 휴진을 하겠다 예고했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유보했다. 의사협회를 향한 주변의 시선은 더 싸늘해졌다.

큰 기대 없이 의사협회가 보내온 자료를 열었다. 그동안 수차례 내놨던 입장을 다시 되풀이하겠거니 지레 짐작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꼼꼼히 읽어봤다.

깜짝 놀랐다. 그간 의사협회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아쉬워했던 것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특히 ‘대국민 홍보 시의 전략적 고려사항’ 항목에는 정확한 현실 인식이 들어 있었다. ‘의사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쉽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자’며 ‘서울지하철 노조의 홍보방식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까지 나왔다. 서울지하철 노조가 임금 인상요구를 직접 하지 않고 기관사의 근로여건과 안전요원 확충을 앞세우듯이 의사들도 수가 인상을 요구하지 않고 정부가 스스로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대국민 홍보방식’은 30가지로 정리했다. 문재인 케어 철폐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문재인 케어를 찬성하면서 제대로 시행할 수 있는 재정 지원 방안 등에 대해 강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고 ‘4대강 등 역대 정권의 잘못된 정책을 열거하고 이 정권의 문케어도 잘못된 정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홍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홍보에 이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상회담을 축하하고 평화 번영을 기원하고 남북의료에 대해서는 의사가 책임지겠다라는 내용의 메시지로 홍보를 하는 것이 필요함. 통일 이후의 의료에 대해서도 준비를 통해 주도적으로 정책을 제안하는 것이 필요함’이라는 의견이 홍보방식으로 제시됐다.

앞서 최대집 의협회장은 해당 토론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4월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북정상회담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비판을 받았다. 이틀 사이 의사협회의 입장에 큰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반가운 마음에 확인 전화를 걸었다. 반가움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실무진의 실수로 공식 입장이 아닌 내용을 함께 보냈다는 것이었다. 다시 보니 의사협회의 공식 입장은 다른 파일에 들어 있었다. ‘대한의사협회 13만 회원은 정부가 문케어와 관련된 모든 정책 추진을 중지하고 (…) 총파업 등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을 천명한다’는 전국의사 대표자 일동 명의의 결의문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의사협회가 문재인 케어 철폐를 주장하면서 내놓은 이유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정부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적도 있다. 기득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의사들이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욕을 먹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억울할 것이다. 그렇다고 싸우려고만 든다면 외로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일수록 여론을 살피고, 스스로 주변도 돌아봐야 한다. 의사협회 내부에서조차 저런 의견이 나왔다면 과감하게 채택하고 실행도 해볼 일이다. 의사협회의 주장대로라면 어차피 지금도 최악의 상황에 있지 않은가.

<홍진수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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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시간보다 아직은 글을 읽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내가 글을 읽는 이유는 영감을 받기 위해서고 영감이 필요한 이유는 글을 쓰지 못해서다. 글을 쓸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삶의 일부를 낭비해버린 듯 허탈하기까지 하지만 좋은 글을 읽게 되면 외려 과분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송구하기까지 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많은 글을 읽었다. 내가 읽은 글들은 대부분 소설이다. 한국소설이든 외국소설이든 동시대의 소설이든 오래된 소설이든 가리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읽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면 고전을 읽는 것이다. 사전은 고전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작품이라 정의하지만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내게 고전이란 영감을 주는 작품을 뜻한다. 그러므로 고전이 반드시 오래된 작품일 필요도 없고 많은 이들이 아는 작품일 필요도 없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베트남의 소설가인 바오 닌의 단편 ‘물결의 비밀’이다. 단편이라 하기에는 너무 짧은 탓에 미니픽션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록 원고지 스무 장에 불과하다 해도 이천 장 못지않은 무게를 지니게 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읽은 이가 언제까지나 그 작품을 되풀이하여 곱씹어서 실제보다 두껍게 기억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처럼 이 소설은 처음 내 안에 자리 잡은 뒤 수백수천 번 불려나와 나와 대면하였기에 이제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래지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좀 절망적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소설가라면 이런 소설 한 편쯤은 남겨야 할 것 같았고 이런 소설 한 편 쓰기가 난망하기 이를 데 없음을, 어쩌면 평생을 다해 쓰더라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절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유혹임을 느낀다.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이 도달한 지점에 나 역시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절망에서 일으켜 세워줄 것임을 느낀다. 아니 그럴 것이라 믿고 싶다. 소설가가 바랄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은 여느 소설가들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을 능가하는 것임을. 오늘 내가 단어 하나에 일 분을 문장 하나에 십 분을 바쳤다면 내일의 나는 단어 하나에 십 분을 문장 하나에 한 시간을 바쳐야 한다. 바오 닌 역시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능가했을 테고 아름다운 소설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불안을 견뎠을 테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글을 쓰려는 열망만이 가득할 때 그 사람을 죽이는 건 글을 쓰려는 열망이므로 살기 위해서는 글을 쓰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사뮈엘 베케트와 필립 로스의 말을 떠올린다. 베케트의 “실패하고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문장에는 이어져야 할 문장이 있다. “더 나은 실패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실패하고 실패하여 최악에 이르러 끝장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므로 나는 베케트의 문장을 신입사원 연수회에서 정력적인 강사가 주장할 법한 성공하는 사람의 자세와 같은 것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실패가 분명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용기,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 창의적으로 실패하여 실패조차 인간적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다.

필립 로스는 파리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는 글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증표이지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면, 계속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글쓰기를 의심해야 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동안에는 진정으로 글쓰기가 이뤄지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순간 사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직전에 있는 셈이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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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취임 1년을 맞았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83%(한국갤럽 조사)에 이른다. 대선 득표율(41%)의 두 배에 이르는 놀라운 지지율이다. 긍정 평가 1~3위는 ‘남북정상회담’, ‘북한과의 대화 재개’, ‘대북 정책·안보’였다. 문 대통령은 북핵 해결의 단초를 마련해 ‘한반도의 봄’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전쟁위기로 내몰렸던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극적인 변화다. 4강 외교도 복원되고 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의 성과가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으로 이어지도록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외교는 비핵화가 이행되는 것을 봐야 최종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촛불혁명이 탄생시킨 문재인 정부가 불의하고 부정한, 국민주권을 유린한 권력을 단죄하고 역사적 교훈을 남긴 것은 평가할 만하다. 촛불민심이 탄핵을 이뤄냈다면 촛불에 담긴 시민의 갈망을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전적으로 새 정부의 몫이었다. 그러나 국정농단 사태를 초래한 정치·재벌·검찰·언론 등의 적폐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대한민국이 대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고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대변혁의 발걸음이 부분적 개선에서 멈추는 일이 반복돼선 안될 것이다.

문제는 경제다. 문 대통령은 ‘일자리 정부’를 표방하고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까지 내걸었다. 하지만 지난 3월 말 실업률은 4.5%로 1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청년실업률은 11.6%로 치솟았다. 올해 성장률은 당초 예측했던 3%대에서 2.8%로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경제정책에 대한 긍정평가가 47%로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 등 선의의 경제정책들에 대한 부작용을 더 늦기 전에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시민의 체감도가 가장 높은 민생경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민심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

협치는 미진했다. 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제안한 여·야·정 상설 국정협의체는 아직 구성조차 되지 못했다. 높은 지지율이 임기 내내 유지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야당을 설득하지 않고는 어떤 정책도 생명력을 가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주요 현안마다 정쟁의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야당의 태도도 문제지만, 문 대통령도 좀 더 정교하게 협치를 이행하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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