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에 이루어진 남북 정상의 역사적인 만남으로 동토의 땅 한반도에도 봄이 오고 있다. 어렵게 찾아온 천재일우의 기회이니만큼 이 불씨를 잘 살려나갈 지혜를 민관이 함께 적극 모색해야 한다. 필자가 오랫동안 관여해 온 아시아-아프리카 작가 연대가 이 불씨를 살리는 데 의미 있는 공헌을 할 것이라 믿는다.

아시아-아프리카 연대의 원형은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반둥회의에서 구축되었다. 반둥회의는 냉전으로 인해 세계를 동서로 양분하던 흐름에 대한 아시아-아프리카식 저항이었다.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열차 21’은 20세기의 반둥회의가 남긴 유산을 한편으로는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극복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열차 21’은 아프리카의 최남단 케이프타운에서 출발해 최북단 카이로까지 종단한다. 거기서 아시아가 시작되는 아라비아반도로 건너가 팔레스타인에서 인도 아대륙 그리고 동남아시아와 인도차이나를 거쳐 한반도까지 내달린다. 문학열차의 이 이동 궤적 안에는 과거 영국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 고안한 3C(케이프타운-카이로-캘커타) 지역이 포함된다. 유럽의 후발 제국 독일을 이끌던 비스마르크의 3B(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 지역은 물론이다.

문학열차는 아시아-아프리카 각 대륙의 분쟁지역에 멈추어 서서 해당 지역의 대표 의제들을 논의한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는 인도양과 대서양의 만남, 해양문명과 대륙문명의 만남,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집단지성의 향연을 펼친다. 이 세 가지 주제는 모두 케이프타운의 역사적 배경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 작가들의 논의 과정에서 한반도가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들이 쏟아질 것이다.

다음으로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수도라 일컫는 요하네스버그로 향한다. 여기서는 전 세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아프리칸 르네상스’와 ‘아프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frica)’에 관한 흥미진진한 서사를 소개한다. 그리고 콩고의 킨샤샤로 간다. 열대의 엘도라도라 불리던 곳이 어떤 과정을 거쳐 식인종이 사는 ‘암흑의 핵심’(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제목)으로 둔갑하게 되었는지 살핀다. 이를 통해 분단된 남과 북이 서로를 ‘뿔 달린 도깨비’로 희화화하게 된 주술의 시간을 이해하게 된다. 문학열차는 나머지 분쟁 지역도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내달려 최종적으로는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서 멈춘다. 그곳에서 반둥 이후 아시아-아프리카가 지난 70년 동안 옹골차게 응축하여 농익혀 온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타전한다.

문학열차 21은 한국판 문화신작로를 만들기 프로젝트이다. 21세기의 한국이 의미 있는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아시아 및 아프리카와 연대를 도모해야 하는가를 (인)문학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기획이다. 한국판 문화신작로는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일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모델과 다르다. 제국(帝國)적 중심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이 센 특정 국가가 중심이 되고 힘이 약한 나머지 나라가 들러리를 서는 연대의 틀은 과거를 답습하는 낡은 틀이다. 한국판 신작로는 아시아-아프리카의 나라들, 곧 제국(諸國)들이 공히 수평적으로 연대하는 틀을 발굴해가고 있다. 이는 머지않아 세계시민주의 혹은 사해동포주의의 철학을 모범적으로 담아낸 이상적인 한 전범의 역할을 튼실히 수행할 것이다.

<이석호 | 카이스트 대우교수·(사)아프리카문화연구소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그는 초등학생 때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 가게로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는 시내 한복판 간판 가게가 모여 있는 곳에서 간판 가게를 했다. 도시에 하나쯤 있던 중앙극장이 아버지 가게 맞은편에도 있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그 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그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스무 살에 일찌감치 ‘부장’ 명함을 달았다고 자랑했지만,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의 눈에 아버지는 용케 극장 공짜표를 잘 얻어오는 간판장이일 뿐이었다.

한때는 일하는 사람을 두어 명씩 두고 일할 정도로 간판 가게가 잘되었다. 가게 안에 피워 놓은 난롯불이 온종일 활활 타올랐고, 그 불에 아크릴을 구부리는 냄새가 진동했다. 수십 년 동안 그랬듯이 중앙극장도 일 년 열두 달 바쁘게 간판을 갈아치웠다. 그가 아버지 가게와 중앙극장을 드나들면서 더디게 자라는 동안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아크릴이 네온사인이 되는가 싶더니 언젠가부터 서울 충무로에 가면 인쇄기에서 광고 전단 찍어내듯 간판도 찍어냈다. 난롯불도, 붓도 필요 없는 세상이 올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간판장이들은 황망하게 골목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도 버텨내지 못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그 뒤로 그의 아버지는 간판장이의 삶이 세상에서는 어떤 간판도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몸소 겪어야 했다.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중앙극장은 동시 상영 극장이 되었고, 불야성을 이뤘던 시내는 주말에도 한적했다. 그의 기억 속 아버지는 쇠락한 골목과 같았다.

“우연히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쓴 일기를 봤어요. 아버지의 삶도 뜨거웠더라고요.”

어머니를 여의고 의지가지없이 도시에 흘러들어와 극장 간판 일을 배운 소년의 일기는 작업 일지와 같았다. 작업장에서 먹고 자며 온갖 허드렛일을 한 소년은 붓을 들면서부터 남들보다 더 잘하려고 자신을 닦아세웠다. 그의 아버지 일기장에는 목표만큼 연습하지 못한 반성이 적혀 있었으며,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질투하는 마음도 솔직하게 드러냈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아버지는 아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거죠.”

그만 그런 게 아니라 대개의 자식들이 그걸 잊고 산다. 부모들은 쇠락한 골목처럼 이름이 잊힌 채 늘 바쁘다고만 하는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김해원 | 동화작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우리나라에서 가족 중 한 명이 큰 병에 걸리면, 아주 부잣집이 아닌 이상 집안이 거덜난다. 건강보험이 있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는 건 건강보험에서 부담하는 비율(이를 보장성이라 한다)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부분에서 보장성이 80%를 넘지만, 우리나라의 보장성은 60% 남짓이다. 치료비가 총 5000만원이 든다면 2000만원을 본인이 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높여서 환자의 부담을 줄여준다면 적극 환영할 일, 문재인 대통령의 야심작 문재인 케어(문케어)는 이런 취지에서 탄생했다. 문제는 돈이 든다는 것. 국민들이 문케어로 혜택을 보는 것이니만큼 이는 건보료를 인상함으로써 해결하는 게 맞다. 도대체 얼마나 올려야 할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국회 예산처에 따르면 보장성을 70%로 올리는 데만도 3.2%의 인상이 필요하단다. 게다가 문케어에 포함된 비급여 보장,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지원 확대 같은 정책들, 그리고 고령인구 증가 같은 환경적 요인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더 큰 인상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건보료는 2017년에 비해 2.04%, 직장인 기준 월평균 2000원이 올랐을 뿐이다. 더 황당한 것은 앞으로도 인상률을 예년 수준을 넘지 않게 관리하겠다는 복지부의 공언이다. 이 정도 인상률로 문케어가 가능할까? 정부는 그간 모아둔 건강보험 적립금 21조원을 사용하면 된다는데, 이건 당장 보험료를 올리지 않으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문케어가 시작되면 적립금은 곧 바닥이 날 테고, 그때가 되면 보험료를 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정부가 당장의 인상을 꺼리는 까닭은 지지율이 떨어질까 걱정해서다. 실제로 우리 국민들 10명 중 8명은 문케어로 인해 혜택을 보는 건 좋지만, 추가적으로 보험료를 부담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답했다. 이런 식이면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을 왜 비판했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는 건보료 인상의 불가피함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어야 했다.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훨씬 더 좋게 바꾸는 일인데, 지지율이 좀 떨어진들 어떠랴.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는 대신 당장의 지지율을 선택함으로써 보험료 인상의 부담을 다음 정권으로 넘기기로 한 모양이다. 재정불안에 허덕이는 문케어가 제대로 작동할지 의사들이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미용·성형을 제외한 비급여를 건강보험에서 지원하는 것 역시 우려스럽다. 비급여는 당장 생명에 지장이 없어서 국민건강에 포함되지 않은 항목이다. 환자 개인이 좀 더 편하고자 돈을 더 내고 선택하는 게 비급여란 얘기인데, 6인실 대신 2인실에 입원한다든지, 회복기간을 약간 단축시켜주는 추가적인 약을 부담하는 게 그 예다. 개인의 편의를 위한 선택에 국민이 내는 보험료를 쓰는 게 과연 온당할까? 더 우려스러운 일은 비급여 여부의 판단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한다는 사실이다. 심평원은 의사의 정당한 진료행위에 과도한 개입을 하곤 했다. 환자에게 꼭 필요한 약을 써도 “왜 이 약을 썼느냐?”며 따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줄 돈을 안 주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비급여마저 심평원이 관장한다면, 환자들이 돈을 더 내고 좋은 치료를 받는 건 불가능해진다. 또한 의사들이 그동안 원가 이하의 진료수가를 비급여로 메꿔 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문케어에 대한 의사들의 반발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의사들의 반발은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의사들, 이기심의 극치네요”라는 댓글에서 보듯, 국민들은 의사를 적폐세력처럼 취급한다. 이건 문케어에 대해 국민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반대투쟁을 이끄는 최대집 의협회장이 ‘박사모’라는 게 더 큰 이유다. 박근혜가 무죄이며 억울하게 탄핵당했다고 주장하고,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조작됐다고 하는 등 그가 했다는 일련의 말들엔 그저 한숨만 나온다. 그가 회장이 되고 나서 첫 번째로 추진한 ‘문케어 반대 의사파업’을 하필이면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4월27일로 잡았던 것도 의협의 앞날이 어둡다는 걸 말해준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의협회장이 된 것일까? “내가 선거에 무관심했다.” “설마 박사모가 되겠냐고 방심했다.” 얼마 전 만난 동료 의사들은 이런 반성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정부 측에 의사들의 우려를 전달하고, 이를 문케어에 반영하려면 정부와의 줄다리기가 필요한데, 여론에서 외면받는 의협회장의 말에 정부가 얼마나 귀를 기울여줄지 의문이다. 

이건 꼭 의협만의 일일까?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단지 경제전문가라는 이유로 돈밖에 모르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가 큰 낭패를 봤다. 거기서 교훈을 얻기는커녕 다음 선거에선 무능하기 짝이 없는 분을 대통령으로 만듦으로써 ‘이게 나라냐?’는 탄식을 하게 만들었다. 문 대통령이 다시금 나라를 일으키고 있지만, 잃어버린 9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화가 치솟는다. 6·13 지방선거가 얼마 안 남았다. 신중하게 투표해 의사들처럼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전 세계가 북극을 주목하고 있다. 과거 북극은 2m가 넘는 얼음의 두께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항로 개척이 어려웠지만, 세계 각국은 석유, 천연가스 등 다양한 천연자원의 보고인 북극을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기후변화로 북극 해빙(海氷)이 줄어들면서, 북극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다는 뜻의 ‘콜드러시(Cold rush)’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전 세계가 북극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기후변화가 가져온 재앙이 북극 항로의 거리와 시간을 단축시켜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북극곰뿐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더 큰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기상청은 위성을 이용한 북극 해빙 면적과 표면 거칠기 변화 정보, 향후 해빙 전망 등을 2013년부터 북극 해빙 감시시스템(http://seaice.kma.go.kr)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1988년부터 해빙 면적을 지속적으로 관측한 결과, 북극 해빙의 면적은 2012년부터 7년 연속으로 ‘3월 평균 면적 최소’ 기록을 경신 중이다. 올해 위성이 관측한 3월 평균 해빙 면적은 1635만㎢로, 해빙 면적이 최대였던 1990년과 비교하면 248만㎢나 줄어들었다. 해빙은 지구의 평균기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해류의 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해빙이 줄어들면 북극에서 반사되는 햇빛보다 바다로 흡수되는 햇빛이 많아져 북극의 온도가 계속 올라간다. 이로 인해 극지방과 적도의 온도차가 줄어들어 북극의 한기를 막아주던 제트기류가 약해지고, 중위도 지역에서는 저온현상이 지속된다.

특히 제트기류가 약해질수록 특정 지역에 발생한 고기압이 정체되어 정상적인 공기의 흐름을 막는 블로킹 현상이 강해진다. 이에 따라 봄철에 평년보다 추운 날이 많아지거나 오히려 고온이 오래 지속되는 기상이변이 나타나게 된다. 지난해 겨울에는 우리나라에 때 이른 혹한이 왔고, 올해는 3월의 평균기온이 8.1도로 평년(5.5~6.3도)보다 높고, 강수량은 110.7㎜로 평년(47.2~59.9㎜)보다 많아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과거에 비해 점점 줄어드는 북극 해빙을 효율적으로 감시하는 방법은 바로 ‘기상위성’이다. 저궤도 지구관측위성은 지구와 가까운 거리인 700~900㎞의 고도를 돌면서 지구 표면을 정밀 관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극 해빙 감소, 해수면 상승 등 기후변화의 집중 감시와 미세먼지·황사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위성관측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기상청에서는 2022년 발사를 목표로, 저궤도 기상위성 개발을 진행 중이다. 

저궤도 위성의 운영과 활용은 향후 예보 정확도를 높이고, 30년 이상 쌓아온 북극의 환경 정보와 유기적으로 연계해 북극 해빙의 변화 감시 기반을 구축하여 대한민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될 것이다.

<남재철 | 기상청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4월10일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계획을 발표했다. 차선을 편측으로 옮기고 광화문 전면에 역사광장을 조성하는 방안이다. 2016년 출범한 민관논의기구인 광화문포럼에서는 차도의 지하화를 통해서 전면 보행광장을 제안한 바 있다. 이번 계획은 비용과 공사기간 등 여러 이유에 의해 보차혼용으로 절충된 것으로 안다. 지금 광화문광장 재구조화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화문광장의 촛불혁명을 통해 민주국가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 이 시점이야말로 절반만 완성된 우리의 국가 중심공간을 수복할 최적의 때라 생각한다.

모든 수도에는 국가의 정당성과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를 표상하는 중심공간이 배치된다. 조선시대 이 터는 남북으로는 광화문과 황토현, 동서로는 육조 관가에 의해 위요된 공간이었다. 닮은꼴인 워싱턴의 ‘더 몰(The Mall)’은 국회의사당을 정점으로 하여 관가와 공공 문화시설들이 둘러싸고 있다. 

박근혜정부 출범 4주년인 2017년 2월 25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대규모 촛불 집회를 열고 있다. 17차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촛불과 레드카드를 들고 탄핵을 촉구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다시금 알렸던 이곳이 온전히 회복된다면 우리는 세계사에 전례 없는 유교적 왕조 공간과 시민민주주의 공간이 공존하는 광장을 얻게 될 것이다.

광장은 권력의 표상인 동시에 그 자체가 권력이다. 군중이 만드는 스펙터클은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 1987년 넥타이부대는 군사독재를 종식시켰고 1989년 체코 바츨라프광장의 프라하 시민들은 철의장막을 거두었다. 그래서 독재권력은 종종 광장을 정치적 도구로 쓴다. 1938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대회 사진은 지금 보아도 섬뜩하다. 빛의 기둥으로 연출된 공간의 초월적 스케일과 70만 군중, 개인이란 전체에 비해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하여 맹목적 충성을 이끌어낸 장치였다.

우리도 동원된 지지군중과 국군의날 열병식 풍경으로 여의도광장을 기억한다. 이 같은 ‘관조적 스펙터클’에서 군중은 수동적이며 비자발적이다. 한편 우리는 2002년 누구의 지시도 없이 하나의 색으로 광장을 물들인 장관을 선보인 바 있다. 자발성과 능동성의 진수라 할 ‘참여적 스펙터클’이다. 군중의 시선은 다초점이며 카오스모스(chaosmos)적이다. 광화문 촛불집회는 이를 계승한 것이다. 소란했음에도 깨끗했고 즐거웠으나 장엄했다. 광화문광장은 이러한 장소성을 오롯이 담는 공간으로 다시 탄생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광장은 시대의 산물이며 진화한다. 차로로 둘러싸인 섬일지언정 광화문광장은 오세훈 시장의 업적이다. 또 청계천과 서울광장을 통해 차로를 줄인 도심도 작동함을 보여준 이명박 시장의 공도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과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중앙청 철거가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앞길로 바뀌며 국가 중심공간을 잃은 이후 지난한 수복의 과정을 거쳤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광화문광장은 미래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도시는 유기체와 같다. 세포가 바뀌어도 모습과 정체성은 유지되듯 건축이 변할지언정 도시의 틀은 장구하다. 길과 광장이 항상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장은 ‘무계획의 계획’이어야 한다. 지금처럼 동상, 꽃밭, 분수, 전시장 등의 디자인 요소로 시민을 구경꾼으로 만드는 대신 적극적 비움을 통해 다양성과 주체적 이용을 이끌어내야 한다. 광장이 재구조화되어야 할 두 번째 이유이다.

세 번째, 광화문광장은 지금의 박제된 공간에서 탈피해야 한다. 차로에 의해 잘리고 청진, 무교, 도렴동의 도심재개발에 의해 옛 골목길들이 와해되어 지금은 도시적 맥락을 잃은 외톨이 공간이다. 광장 외연의 확장을 통해 시민의 일상적 삶과 광장의 비일상적 경관이 어우러져야 한다. 또한 주변부 건물의 저층부를 활용하여 시민편의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인접 블록들의 재정비를 통해 보행네트워크를 회복시켜야 한다.

제시된 안은 차로를 6차선으로 줄여 한쪽으로 몰고 사직로를 우회시켰다. 고작 월대와 해태상을 복원하기 위해 차량 흐름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러나 이는 서울 역사도심을 차로부터 해방시키는 기획의 출발점이라고 달리 읽을 수도 있다. 언젠가 줄인 차로조차 필요 없게 된다면 서울의 미세먼지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친환경 차량 우선통행제를 실시하되 서울시는 단기 교통대책이 아닌 장기적인 비전과 로드맵을 제시해서 시민을 이해시켜야 한다.

광화문광장을 얻어낸 주인공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가장 빠른 기간에 이룬 우리 시민이다. 시민의 자부심과 우리의 국격에 상응하는 세계 최고의 광장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함인선 | 한양대 건축학부 특임교수·건축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 보름 넘게 지났음에도 그날의 감회는 여전히 생생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벌어져서 놀랐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느껴져서 더 크게 놀랐다. 지구상에서 서로를 가장 경계하고 적대시했던 사람들이, 마치 오랜만에 모인 가족 친지들 같았으니 말이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한 민족, 한 뿌리라는 것을 느끼는 데 말과 음식이 같다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을 테니까.

음악도 오랫동안 대립한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데 큰 몫을 했다. 남북 정상이 이동할 때는 조선시대 임금의 행차음악인 ‘대취타’가 연주되었고, 사열을 할 때는 ‘아리랑’이 흘렀다. 이질적인 피아노와 사물놀이가 어우러진 환송 공연 역시 감동적인 한 편의 음악 서사였다.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를 깨고 우의를 다지기에 노래만큼 좋은 것이 없다. 예로부터 음주가무를 즐겼던, 흥이 많은 우리 민족이 아니던가. ‘고향의 봄’을 부를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속의 아늑한 고향 마을을 떠올렸으리라. 분단의 세월이 아무리 길어도 아직 함께 기억하는 노래가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중요한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악이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의 전통을 전 세계에 소개하고 자랑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제까지의 공연들이 그다지 커다란 감동을 주지는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청중의 마음에 다다르는 울림이 되기에는 어딘가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으니까. 전통에 대한 과도한 강조나 세련되지 못한 편곡도 거기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음악은 특별한 위치를 가진다. 국악(國樂)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렇다. 국사(國史)나 국어(國語)가 아닌, 자국의 전통음악을 국악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투자 역시 적지 않다. 초·중·고 음악 교육과정에서 국악의 비중은 30%가 넘는다. 국가 차원에서 국악원을 두고 있고, 국악만 방송하는 방송국이 따로 있다. 무형문화재에 대한 지원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음악생활에서 국악의 비중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작년 한 해 인터파크를 통해 판매된 공연 티켓 중에서 국악 공연이 차지하는 비율은 채 1%를 넘지 않는다. 국악방송의 청취율은 다른 방송국의 청취율과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국악은 행사 때나 필요한 것일 뿐 우리의 일상과는 상관없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결혼식을 빼고는 아무도 더 이상 입지 않는 한복처럼.

상황은 안타깝지만 애국심에 호소하거나 민족적 전통의 중요성만 강조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이들도 스마트폰에서 하루 종일 신나고 재미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니까. 빠르게 움직이는 동영상에 익숙한 세대들에게 4시간 반이나 되는 종묘제례악이나 6시간짜리 춘향가에 공감하기를 바라기 어렵다. 광속 기술의 삶과 리듬에 이미 익숙해진 아이들이니까.

국악의 현대화는 북한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북한은 주체사상에 기초해서 민족음악 악기를 포함시킨 배합 관현악이라는 특이한 오케스트라 편성을 만들어낸 바 있다. 그것이 가장 폭넓고 풍부한 표현력을 가진 편성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민족악기를 위주로 하는 편성으로 서양악기를 조선음악에 복종시키겠다”는 대담성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우리나라 국악계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전통악기를 개량하고, 대학에 전공을 두어 창작국악이나 신국악 같은 현대식 국악을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옛 장단을 사용하고 국악기로 연주하는 것만으로 전통음악의 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은 절대로 훼손되면 안된다는 원칙이 작품의 독창성이나 참신함을 가로막는 원인이기도 하니까. 절대적 원칙과 자유로운 창작 정신은 양립하기 어렵다. 전통은 자연스럽게 묻어나야지 멋이 살아난다. 억지로 강제할 일이 아니다. 국악을 진정으로 보존하려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국악이 그러했던 것처럼. 과감한 변신을 두려워해서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다양한 시도들이 허용되고 장려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랑스럽고 훌륭한 전통이 행사용으로 전락하거나 박제화되는 불행을 피하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여정에 남과 북이 함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혜는 나눌수록 커지고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법이니까.

<민은기 | 서울대 교수·음악학>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미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남성 사회의 반발이 곳곳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지하철에서 여성학 책을 읽는다고 봉변당한 여고생부터 “오해 받으니 여성을 멀리하겠다”는 ‘펜스룰’까지. 대개 이러한 현상을 반격(反擊·백래시)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백래시(backlash)는 1970년대 미국에서 치열했던 여성운동과 진보세력을 몰아내고자, 정부와 미디어 등 사회 전반이 주도한 반동의 물결이었다. 이때 등장한 단어 중 하나가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PC)’인데, 당시 미국에서 냉소와 좌절의 용어였다면 한국에서 ‘PC’는 지향해야 할 가치로 사용되었다. 요컨대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다. 우리는 미국의 1970년대 같은 경험이 없으며, 레이건 정부는 안티페미니즘의 선봉장이었지만 우리 정부와 언론은, 특단의 대책은 없을망정, 미투에 우호적이다.

나를 포함한 여성주의 강사 두 명이, 얼마 전 모 대학 학생회로부터 인권 강의를 요청받았다. 그런데 해당 대학의 학생 204명이 그녀의 강연을 취소하지 않으면 학생회를 탄핵하겠다고 서명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익명의 학생들은 강사의 ‘신상을 털고’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결국 학생회는 그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다행히 학내 여성주의 모임은 강연 취소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나는 그녀와 “연대한다”는 뜻에서 강연 거부를 통보했지만, 사실 나도 같은 처지이고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이 아닌가. 페미니즘은 인문학의 핵심이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라는 명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지면에 담기엔 복잡한 논의지만, 만일 학교 당국이 홍준표씨를 특강 강사로 불렀다면 어땠을까. 학생들은 반대 시위를 했겠지만, 홍씨를 불렀다는 이유로 학생회 탄핵과 같은 누군가의 사퇴를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모 보수 정치인의 특강을 둘러싸고 학생들이 반발해 충돌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 학교 측은 강사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했고 강연 취소를 요구한 학생들은 비난받았다.

얼마 전에는 ‘코뮌주의’를 내건 모 연구 공동체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 관련 토론회가 열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토론회 분위기였다. 가해자와 조직을 옹호하는 이들은 억울한 듯 다소 흥분한 얼굴로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피해자를 지원했던 여성들은 ‘쿨’했다. 이들은 토론회 내내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이 안 통하는 이들과의 시간이 아깝다는 듯, 답답해했다.

대학생들의 여성주의 강연 저지는, 반격일까. 또한 이미 당사자 두 명이 모두 인정한 사안에 대해 들뢰즈와 데리다, 칸트를 인용해가며 “우리는 문해력이 뛰어난 집단인데, 우리가 못 알아들었으니 당신들이 틀렸다는 증거”라고 ‘논증’하는 이 조직의 행위는, 과연, 반격일까.

한국 사회의 일부 진보 진영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개념 중의 하나가 ‘대화’와 ‘폭력’이다. 이들은 대화와 폭력을 대립시키면서, 자신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주주의 세력으로 자칭한다. 노! 민주주의는 폭력 대신 대화를 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삶에서 대화로 해결되는 문제는 거의 없다. 평화학자 신시아 인로는 “완벽한 대화는 군대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합의 가능한 대화는 명령뿐이라는 얘기다.

‘을’은, ‘갑’과 말이 안 통하는 일상을 산다. 대화가 안되기 때문에 저항하는(‘폭력을 쓰는’) 것이다. 위 공동체도 일부 여성 회원이 남성과의 대화에 절망하여 탈퇴했는데, 남성은 “왜 우리 몰래 토론회를 개최하느냐”는 말을 반복했다. 모두가 동등한 관계에서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다면, 유토피아다.

민주주의는 대화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대화를 쉽게 생각하는 이들은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글로벌 시대 미국인처럼 자기 언어가 보편적이라고 믿는다. 남성 중심적인 인식과 용어는 ‘영어’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남성’ ‘백인’ ‘이성애자’들은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통념을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남성들의 미투 운동에 대한 반감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목소리’에 대한 불안, 당황, 겁먹은 심정의 산물이 아닐까. 백래시? 반격하려면, 논리가 있어야 한다. 자기 논리가 아니라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래된 관행과 IT의 익명성에 의존한다. 한국 남성들은 새로운 무지의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고, 남성의 심기에 민감한 미디어는 이들의 퇴행을 “반격”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선거는 축제이고 민주주의의 꽃이다. 선거시기에는 우리 삶의 미래에 대한 수많은 약속이 펼쳐진다. 또한 정책과 공약이란 꽃을 들고 나온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에게 구체적인 미래의 풍경을 보여준다. 시민들은 각 후보진영이 제시하는 가장 행복한 청사진을 보고, 마침내 투표를 하게 된다. 많은 시민들이 투표에 참여하고,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한 후보는 자신의 정책과 공약을 잘 실현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이런 동화 같은 순진한 선거는 없다. 현재의 선거는 온갖 첨단 선거공학, 정치공학이 동원되고, 심지어 기후와 투표장 교통 등 당선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이 고려되는 복잡하고 치열한 싸움의 과정이 되어 있다. 또한 정당하고 긍정적인 방법의 승리가 어려우면 네거티브 전략과 더불어 불법에 대한 유혹을 받기도 한다. 선거와 무관한 후보자의 사생활 파헤치기부터 거짓정보와 중상모략에 의해 선거 자체가 막장 드라마가 되기도 한다. 지지자들의 투표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만 된다면 무엇이든 물고 늘어지는 이 한판의 선거싸움은 최악의 경우 상대방을 저주하는 말싸움 대회처럼 되어버리기도 한다. 축제일 줄 알았던 선거가 네거티브로 인해 실망과 충격을 안겨준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가? 실제로 상대 후보의 집안 문제, 사적 취향 문제 등을 포함해 후보자의 정체성에 관한 네거티브 전략이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정치심리학의 답은 현재 논쟁 중이긴 하다. 하지만 럿거스대학의 리처드 라우 교수팀은 1990년대~2000년대 초까지 여러 선거에서 네거티브를 주전략으로 쓴 후보자들의 선거를 조사한 결과, 그들 대부분은 낙선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몇 지역 유권자와의 심층 인터뷰에서는 후보자의 부정적 정보를 알게 되어 심리적 충격을 받았으나, 그 이슈 때문에 투표할 후보를 바꾸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인지과학적 측면에서 네거티브 이슈가 후보자들의 공약보다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하여, 네거티브 전략은 정책 선거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인이라고 했다. 더구나 그 전략 안에 심각한 불법이 포함되었다면, 선거 후의 정치질서가 교란되어 정치시스템 자체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또 네거티브 전략이 선거전의 대부분을 차지할 경우 이를 관망하는 시민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연구와 정치’라는 저널에서, 리엄 멀로이 등 저자들은 부정적 홍보에 노출된 시민들은 상대방 진영의 후보 및 지지자들에게 더 분노하였고, 선거과정에서 훨씬 높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지역사회의 혐오 범죄나 폭력, 집 안에서의 TV 및 기물 파손과 같은 공격적 행동이 늘었다는 보고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후보자들은 선거전략을 왜 네거티브로 결정하거나 전환할까?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지만, 네바다대학의 데이비드 다모어 교수는 어떤 방식으로든 투표율에 영향을 미치거나, 어젠다를 빼앗긴 상황에서 새로운 이슈를 제기하지 못할 때, 자신이 당선되어야만 한다는 지나친 자기애나 집착, 전능적 환상 영향 탓이라고 했다. 미국 정치심리학자들은 2012년 선거에 이어 2016년 선거에서도 과거보다 네거티브 광고가 늘어나면서 공약 없는, 비방과 중상모략의 선거전략에 깊은 우려를 정치권에 표한 바 있다고 한다. 독일은 2016년 총선을 치르며 선거에 사용된 거짓 정보와 차별적인 발언의 심각성 때문에 2017년 일명 ‘가짜뉴스와 혐오발언 방지법’을 제정했고 엄청난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고 한다. 선거과정에서 오직 집권과 당선을 위해 자신의 품위를 버리고 상대 후보를 비방, 음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정치적 공해이고 유권자들에게는 심리적 학대다. 거기다 선거운동원들에 의해 소셜미디어로 온갖 유언비어가 퍼날라져 순간순간 불안과 짜증을 동시에 견뎌내야 하는 것도 고된 정서적 노동이다. 혹시 그조차도 일부 세력들의 전략일까? 집권을 위해 투표율이 낮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목표는 정치의 희화화, 정치의 혐오화라고 하니까 말이다.

멀로이는 연구결과상 긍정 전략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단언한다. 정치로 국민을 치유하려면, 네거티브의 유혹을 이기고, 최대한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미래를 시민과 함께 의논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라고 한다.

<김현수 |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안미현 의정부지검 검사가 15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권성동 자유한국당 의원의 소환조사를 막으려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안 검사는 “춘천지검 수사팀이 지난해 12월 권 의원 소환조사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는데, 문 총장이 춘천지검장을 심하게 질책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단도 “지난 1일 권 의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알리자 문 총장이 수사단 출범 당시의 공언과 달리 수사지휘권을 행사해 전문자문단을 구성해 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문 총장은 지난 2월 춘천지검 수사가 각종 외압 의혹을 받자 독립된 수사단을 출범시키면서 수사 보고도 받지 않고, 수사지휘권도 행사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검 대변인은 “수사단의 요청으로 전문자문단의 법리검토 결정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지, 지휘권 행사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문 총장은 “이견이 발생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한 과정”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상명하복의 조직문화가 강한 검찰에서 현직 검사와 수사단이 수뇌부의 실명을 거론하며 주장한 것을 보면, 단순한 이견 표출이라고 보기 어렵다.

권 의원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다. 권 의원은 2013년 11월 자신의 비서관을 포함해 10명 이상을 채용하도록 강원랜드에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같은 당 염동열 의원도 수십명 채용을 청탁한 혐의가 밝혀졌다. 그런데 염 의원은 이미 구속영장이 청구됐는데 권 의원만 자문단 심의에 부치라고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염 의원은 공개소환한 반면, 권 의원은 지난달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날에 맞춰 비공개 소환했다. 혐의가 유사한 두 사람에 대한 검찰의 대접은 판이했다.

강원랜드 수사는 이전 김수남 검찰총장 때도 1년 이상 질질 끌다가 수사 외압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어 취임한 문 총장도 똑같은 의혹을 받고 있다. 사실이라면 검찰 신뢰가 훼손될 중대 사안이다. 강원랜드 채용비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좌절과 분노를 안겨준 충격적인 권력형 비리 사건이다. 검찰의 존재 이유는 이런 거악을 척결하는 것이다. 이런 수사마저 ‘정치권력 눈치보기’로 왜곡된다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얘기하나 마나다. 수사단은 한 치 성역 없이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가려내야 한다. 수사가 미진할 경우 특검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몰카 범죄, 데이트폭력 등은 여성의 삶을 파괴하는 악성 범죄”라고 규정했다. 문 대통령은 “수사당국의 수사 관행이 조금 느슨하고, 단속하더라도 처벌이 강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며 “조금 더 중대한 위법으로 다루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등에서 가정폭력을 다루는 사례를 들며 “우리도 대전환이 요구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 발언은 최근 홍익대에서 발생한 남성 누드모델 불법촬영·유포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한다.

홍대 사건은 피해자가 남성, 가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례적 주목을 받았다. 경찰은 수사의뢰 8일 만에 가해자를 구속했다. 이후 ‘경찰이 다른 불법촬영·유포사건에는 왜 그토록 미온적으로 대응해왔느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신속한 수사는 바람직하지만, 여성이 피해자일 때와는 태도가 다르다’는 게 불만의 초점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는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에 동의한 사람은 15일 오후 현재 34만여명에 이른다. 지난해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불법촬영으로 검거된 사람 중 98%가 남성이었다. 같은 기간 불법촬영 피해자 중 84%는 여성이었다. 문 대통령은 몰카 범죄 엄단을 지시하면서도 국민청원은 언급하지 않았다. 거론할 경우 불필요한 논란이 증폭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본다.

홍대 사건 수사가 신속했던 것을 두고 피해자가 남성이어서라고 주장하는 건 비약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경찰도 “이번 사건은 일반적인 불법촬영·유출과 달리 시간, 장소, 사람들이 특정돼 빠른 수사가 가능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왜 국민청원에 여성들이 폭발적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권단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성명을 통해 “홍대 사건의 가해자가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하는 동안, 우리가 지원하는 여성 피해자는 포르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렸다”며 “어째서 이제야 이례적인 일처리와 피해자 보호가 이뤄졌는지 질문을 던져야 할 지점”이라고 했다.

수사기관은 문 대통령 발언을 계기로 성범죄 수사 관행 전반을 재점검해야 한다. 최우선 가치는 피해자 보호이고, 그 다음은 신속한 수사다. 이참에 ‘몰카’라는 용어도 ‘불법촬영’으로 대체되길 바란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