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그랬다. 직업상 조지 나카시마나 핀 율, 한스 웨그너 같은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디자이너 가구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는 남자들을 주로 만났지만 나는 실상 그들보다는 나무 그 자체에 대해 잘 아는 남자가 더 좋았다. 자신의 직업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식물을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기회 닿는 대로 더 깊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남자. 그 때문에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지기도 하는 남자. 예컨대 격렬했던 오전 업무가 끝나고 동료들과 가벼운 산책 중에 모감주 나무 아래에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남자.

“옛날에 고려사를 보면 사신이 조공을 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져간 물품들이 비단·한지 등인데 그럼 중국에서 거꾸로 답례로 오는 것 속에 모감주 몇 말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 아, 그건 화살나무입니다. 가시가 있지요? 이런 식의 방어 기제가 있는 것들은 대체로 다 잎이 맛있습니다. 동물들이 다 좋아하지요.”

훌륭한 관광자원 역할을 하고 있는 전남 장성군 서삼면의 편백나무 조림지.

청와대 참모진과 경내 산책을 즐기던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다. 오죽하면 애칭이 ‘식물 박사’일까? 그러고보니 나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전문가를 두루 키우고, 이들에게만 방제 자격을 부여하자는 골자의 ‘나무의사’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그다. 또 지난 4월 남북의 두 정상이 함께 군사분계선에 65년 된 반송을 기념식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또 얼마나 가슴 뭉클해했던가?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사람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로 시작하는 김용준의 책 <근원수필> 생각이 난다. 세상에는 그게 매화나무든 감나무든 꽃나무 한 그루를 위대한 예술작품 못지않게 귀히 여기며 감상하는 ‘근원수필’적 인간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그런 부류를 매우 한가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하는 책.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자는 결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 대통령이 한가한가? 그처럼 더 중대한 일을 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또 있는가? 아무리 바빠도, 기꺼이 시간을 쪼개어 우리 삶의 뿌리라든가 인류의 ‘근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만큼은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세계가 극찬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유능함은 혹시 우리로서는 그 이름도 모를 식물들을 대하는 그의 지극한 태도와 관련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남자, 문재인>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문변’은 야생화 보기를 좋아했는데, 야생화 산행의 안내를 맡으면 인권변호사 일도 바쁠 텐데 더 좋은 산행의 결과물을 위해 하루 전날 미리 답사를 했다고 한다. 전날 답사를 통해 코스는 적정한지, 어떤 꽃이 피었고 어떤 나무들이 있는지, 그리고 내려와서 쉴 만한 곳은 마땅한지를 꼼꼼히 살폈다는 것. 다음날 야생화 탐방자들이 대만족인 것은 물론이었다고.

또한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의 저자 최수연씨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그는 꽃들 사이에 돋아난 별로 이롭지 않은 풀도 그냥 보지 않는다. 이 녀석들은 꽃과 꽃 사이에서 자라며 저 꽃들과도 연대를 한다고.”

그게 ‘외교 천재’ 문재인이 일하는 방식이다. 자신이 조금 더 수고롭더라도 상대를 조금 더 알뜰하게 살펴서 우리 모두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연대하기. 특유의 그 섬세하고 성실한 지성으로. 진실되게 감동적인 준비성과 그만의 인간적 온기를 담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재인의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 박정희도 녹화사업만큼은 잘했다. 박정희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1960년대부터 산림법을 제정해서 단계별로 사방조림(황폐한 산지에 나무를 심어 토양을 보존하고 지력을 유지) 운동을 열심히 전개한 덕분에 30년 만에 민둥산을 없앤 업적만큼은 높이 산다. 물론 그 또한 ‘산림의 성쇠가 국력의 성쇠와 비례한다’는 일념으로 국가 조림 사업에 앞장섰던 현신규 서울대 명예교수의 역할이 컸지만 여하튼 두 사람의 녹화사업은 미국이 놀랄 정도로 성공적이었고 둘 다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돼 있다.

하지만 그사이, 한국과 미국의 ‘주적’으로 고립되어 연료난과 식량난, 경제난에 빠져 살아온 북한엔 민둥산이 많아졌다. 많아도 너무 많다. 북한의 전체 면적 중 숲이 차지하는 비율이 74%인데 그중 32%가 황폐해졌다고 한다.

다행히 남북협력 1호 사업으로 북한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산림협력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대북 제재를 적용받지 않는 비정치적이며 비군사적인 사업이기에 무엇보다 먼저 추진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산림 녹화사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인가? 아무리 짧아도 30년이 걸리는 일이다. 게다가 무려 49억그루의 나무를 새로 심어야 하는데 북한에 ‘땔감’이 없어서 “아침에 심으면 저녁에 사라진다”는 얘기가 있다는 말을 어젯밤 경향신문 기사에서 읽고 무척 가슴 아팠다.

‘금 모으기’ 운동 같은 걸 생각한다. 누군가 ‘북한 민둥산에 심을 어린나무 한 그루 보내기’ 모금 운동 같은 걸 벌여주면 49억그루가 의외로 금방 모아질 것 같다, 물론이다. 내 몫으로 10그루쯤은 감당할 수 있다. 문재인 보유국의 국민으로서 기꺼이 그러고 싶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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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대표작품 <몬스터>는 통독 이전의 동독이 배경이다. 당시 동독에는 서독으로 망명했거나, 사상범으로 처벌받은 부모의 자식들을 대거 집단수용하는 고아원이 있었다. 그 고아원에서 국제적 스파이 기계로 양성되는 10대들의 처참함이 소시오패스의 온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살인병기 소년은 매일 배급되는 우유를 친구에게 주면서 이렇게 부탁한다. “너라도 내 이름을 꼭 기억해줘!” 자신들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게 만드는 철저한 스파이 육성 프로그램은 인성과 인격의 마지막 피난처마저 상실케 한다.

통독 이전의 동독은 올림픽 때마다 메달 상위권의 위상을 유지해왔다. 그들이 국가적 스포츠 육성전략으로 밀어붙였던 전체주의적 정책은 실제 비인간적인 국가권력의 통제로 외부에 알려졌다. 수영선수끼리 결혼시키고, 수중분만을 거쳐 태어난 아이를 다시 수영기계로 양성시키는 프로그램을 통해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만든다는 루머는 비단 과장된 이야기에 그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스포츠는 음악과 미술 등 예체능적 체험과 함께 인성을 함양하고,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하며, 삶의 깊이를 확장시키는 중요한 사회적 공론화 지대를 제공한다. 그렇기에 학교체육과 시민체육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풀뿌리 네트워크의 시작이며 청소년들의 비상구 역할도 맡아야 할 경험의 산실이다. 그러나 국내 스포츠가 보여주는 스타 마케팅과 실적 위주의 영재스포츠는 그러한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운용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내 영화 중에는 이러한 스포츠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며 도리어 감동을 상품화했던 사례들이 많다. <국가대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킹콩을 들다> <페이스메이커> <튼튼이의 모험> <달려라 하니> 등 종목에 관계없이 눈물과 투혼이 주제가 된다. 스포츠는 정직한 땀의 체험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건강한 사회의식과 자아를 형성하는 즐거운 순간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스포츠는 안타까움과 눈물, 헌신과 고통, 낙담과 분노, 그리고 극복과 성공이라는 서사로 이해되는 인위적 카타르시스의 기계적인 악순환이 아닌가 싶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남북의 평화를 가져오고 한국 동계스포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눈부신 성과와 스타선수를 위해 수많은 사연들의 안타까움이 가려져 있었다는 것은 이제 모두에게 상식이 됐다. 모든 국내 스포츠 현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폭력과 계급이 상존하며, 한 사람의 스타선수를 만들기 위해 부모의 인생이 희생되기도 한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의 아이슬란드 축구대표팀 사례는 더 감동으로 전해진다.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 자신이 즐기는 스포츠 종목의 대표선수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최선을 다해 조국에 헌신하는 스포츠정신, 그들의 일상이 부러움을 넘어 영화처럼 느껴진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찾아오는 영화 <러브액츄얼리>에서 뻔뻔한 미국 대통령을 앞에 두고 영국 총리인 휴 그랜트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엔 베컴의 왼발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나라이며, 처칠, 비틀스, 숀 코널리, 해리포터, 그리고 베컴의 오른발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박지성의 왼발이 있고, 김연아의 트리플악셀과 윤성빈의 스켈레톤도 있다. 그리고 손흥민의 오른발도 있다. 이처럼 스타선수들이 국민 모두에게 주는 자부심의 가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결국 스타선수를 위한 국가적 투자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한 투자의 과정에 학교체육과 시민체육의 건강하고 다양한 리그와 시스템이 적절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조기축구와 실업축구 전국리그에서 우승한 팀의 선수도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구조가 열려 있어야 한다. 학교체육을 통해 건전한 사회인이 육성되고, 그들의 체험이 다시 시민체육을 활성화시켜 국가 전체가 운동을 취미와 생활로 함께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기대해본다.

판사가 축구감독이 되고, 자동차 정비사가 수비수가 되며, 게임 개발자가 공격수가 되고, 디자이너가 미드필더가 되는 그런 영화 같은 스포츠가 우리에게도 일상이 되었으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오늘 이 시간에도 각자의 종목에서 최선을 다하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박수와 성원을 보낸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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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는 한국 정치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다. 한국 정치의 시대와 전망은 이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이는 첫 민주적 선거였던 5·10 제헌의원 선거(1948년)와 정권교체 시대를 연 15대 대통령 선거(1997년)와 견줄 만하다.

선거 드라마에서도 이번 선거는 전혀 다른 파격이다. 한국 정치가 편가름식 ‘양분(兩分) 정치’의 주박(呪縛·주술적 속박)에서 놓여나는 출발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전은 진영의 울타리 뒤에 숨은 비상식의 정치가 상식을 이기는 암흑의 시대였다.

6·13 지방선거는 더불어민주당의 승리도, 문재인 정부의 승리도 아니다. 민주당이나, 문재인 정부의 승리로 머물 수 없다. “국민의 승리”라는 뻔한 입발림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 전복적인 결과가 운명적으로 마주해야 할 미래를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특정 정당·진영·가치의 승리로만 이번 선거가 매김될 때 6·13 민심은 반쪽에 머물게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등골이 서늘하다”고 했다. 청와대 전 직원들에게 생중계된 수석보좌관회의에서였다. 그러면서 참모들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 바로 ‘유능·도덕성·태도(겸손)’다. 도덕성은 전통적 진보의 가치이며, 유능은 진보·보수 구분 없는 국정의 조건이다. 눈에 띄는 것은 태도다. 앞선 노무현 정부를 옥죄는 한 빌미가 됐던 오만·독선 등 태도의 문제를 환기시킨 것이다.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는 물(水則載舟水則覆舟)과 같은 ‘민심의 법칙’과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는 권력 법칙 사이에서 긴장의 끈을 죈 셈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상식의 승리’다. 지난 반세기 한국 정치를 양분해온 한 진영을 궤멸시킨 결과는 한국 정치에도 ‘상식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알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만 한국 정치는 긴 ‘분열’의 방황을 지나 ‘화해’로 만날 수 있다. 실상 표심을 결정지은 한반도 미래, 정치적 시민의 성장, 경제·사회적 정의와 안전의 가치는 모두 진보나 보수의 것으로만 머물 수 없는 상식적 명제들이다.

지난 대선부터 민심은 우리 사회·국가의 혁명적 변화를 명령하고 있다. 그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진영의 대결장과도 같은 ‘양분 사회’의 극복이다. 좌우 두 진영만 존재하던 정치에 대한 ‘다양성’의 도전과 승리다. 자유한국당으로 상징되는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패배로 선거 의미가 우선 매김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는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하고, 국가 현실의 필요만으로 판단하는 새 세대의 출현으로 가능하게 된 현상이다. 단순히 스윙하는 민심이 아니라, 정치적 다름도 옳다면 지지할 수 있는 유연한 유권자·여론층의 존재다. 그 점에서 이념의 종언도, 지역의 종언만도 아닌 그동안 허위의 지역과 이념에 기댔던 ‘진영 정치’의 종언이다.

실제 앞길은 꽃길이 아니다. 선거 결과가 무색할 만큼 녹록지 않은 난제들이 산적하다. 한반도 평화의 길은 여전히 험하고 멀다. 별빛조차 들지 않던 캄캄한 벼랑길에 이제 등불 하나를 들었을 뿐이다. ‘소득주도 민생’의 새 길도 강한 저항을 받고 있다. 이는 국내 문제만으로 해결될 수도 없기에 더욱 엄혹하다. 탈원전 등 국민안전의 미래도 내내 방해받고 있다. 이처럼 비상식은 곳곳에서 반격을 준비하며 꿈틀대고 있다.

‘전환의 시대’에 정치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 핵심은 태도다. 새로운 태도의 내용들이 향후 정치의 문법과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첫번째는 한번도 제대로 가보지 못한 ‘협치’다. 대결의 정치 문법을 종식시키고 다양성을 가능케 할 기반이다. 다양한 정치적 의견이 공존하는 다당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여권이 일축한 ‘연정’은 협치의 가장 제도화된 버전이다. 두번째는 유연함이다. 어떤 정치적 주장도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고 수정을 전제하는 태도다. 해묵은 ‘내로남불’ 프레임을 벗는 길이기도 하다. 세번째는 ‘생활 속으로’다. 그간 이념의 추상언어에서 구체적 생활과 현장으로 정치 언어는 더 다가가야 한다. 현실의 구체성에 기반할 때 정치적 공통분모는 커진다.

여당이 이번 선거를 진영의 승리로 자축할 때 그들은 새 시대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될 것이다. 이는 비상식의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일이다. 적폐 정권이지만, 전임 정부가 오랜 갈등 끝에 정리한 국책사업(동남권 신공항)의 결론을 선거가 끝나자마자 뒤엎으려는 움직임에선 그런 불길함도 감지된다.

그 결과는 정치지도에서조차 사라지게 된 한국당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여당이 진정으로 승리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다. ‘하룻밤 새 무진을 점령한 안개’(‘무진기행’)처럼 실패의 기운은 부지불식간에 스며든다.

<김광호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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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동맹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오는 11월4일까지 이란산 원유의 전면 수입 중단을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유럽연합(EU)·중국·캐나다 등을 상대로 무역보복 조치를 가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란 제재를 명분으로 세계 경제를 또다시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전체 원유 수입의 13.2%를 이란산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도 큰 부담을 지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26일(현지시간) “동맹국들과 세계 각국은 이란으로부터의 원유 수입을 ‘제로(0)’ 수준으로 줄여야 하며, 어떤 면제 조치도 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면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고, 예외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8일 이란 핵합의 탈퇴를 공식 선언하고, 2015년 7월 협정 타결 이후 해제됐던 경제 제재를 복원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이란에 대한 귀금속·여객기 거래 등 3개월간의 유예기간을 뒀던 제재는 8월6일부터 시작되고, 원유를 비롯한 나머지 부문 제재는 11월5일부터 복원될 예정이다.

미국이 이란산 원유 수입 중단 방침을 발표하면서 국제유가는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27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8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72.76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2014년 11월 이후 최고치다. 국제유가 급등세가 지속되면 한국 경제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까지 오르면 국내총생산(GDP)이 0.96% 하락할 것으로 분석했다. 가계소비 위축과 기업의 투자 축소, 생산비용 상승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이란산 원유 말고도 상품·금융 등 다른 부문 제재를 동맹국들에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이란 수출은 40억2100만달러에 달한다. 주력 수출제품은 자동차·디스플레이·철강 등이다. 특히 미국이 이란과 달러나 유로화 결제를 금지하는 제재조치를 내리면 한국의 이란 수출길이 막힐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미국과의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이란산 원유 수입 제재 면제국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중국·인도·EU 등 이란산 원유를 많이 수입하는 나라들과 공조체제를 구축할 필요도 있다. 정유업계도 원유 도입선 다변화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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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러시아 월드컵 한국·독일전을 앞두고 한국의 2-0 승보다 오히려 독일의 7-0 승 가능성이 더 크다는 해외베팅업체의 평가가 있었다. 그만큼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개최국 브라질을 7-1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8-0으로 패배시킨 독일 축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반면 스웨덴·멕시코전에서 부진했던 한국 수비진은 극심한 비난여론 속에 ‘멘털 붕괴’ 상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우려는 기우로 판명됐다.

한국 선수들은 세계최강 독일의 슛을 육탄으로 막아냈다. 부진에 대한 자책감과 팬들의 비난이 선수를 ‘죽기 살기’로 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떨어져 출전을 포기할 생각까지 품었던 장현수 선수는 “너 때문에 진 게 아니다”라는 동료들의 다독거림에 마음을 다잡았다. 김영권 선수 역시 “월드컵 준비 4년 동안 너무 힘들었지만 이 순간을 위해 견뎠다”며 그라운드를 누볐다.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선수들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눈물로 쏟아냈다. 국가대표의 무거운 짐을 진 선수들에게 던졌던 돌팔매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세계최강 독일을 탈락시킨 것은 세계축구의 흐름을 바꿔놓은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축구의 근본 문제가 선수들의 막판 불꽃투혼 뒤에 숨어 은근슬쩍 넘어갈까 우려된다. 2002년 4강과 2010년 16강에 진출한 한국축구는 2014년 브라질에 이어 이번 러시아 월드컵까지 2회 연속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한국축구의 실패’라 규정할 수 있다. 스웨덴·멕시코전 패배에서 봤듯이 실패한 체력관리, 섣부른 전술실험 등 지도자의 경험 부족이 도드라졌다. 이제는 세계축구의 흐름에 맞는 외국인 명장급 지도자를 영입해야 한다.

한국축구는 이미 뿌리째 흔들렸다. 축구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K리그는 차이나머니로 무장한 중국리그와 선진시스템을 구축한 일본리그에 밀리고 있다. 유능한 선수들이 줄줄이 빠져나가 리그의 인기는 바닥을 기고 있다. 2011년 1000억원을 넘은 대한축구협회 예산은 700억~900억원대로 추락했다. 재임 중 2000억~3000억원대로 예산을 늘린다던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의 약속은 공수표가 되었다. 전국의 월드컵 열기에서 확인하듯 축구는 협회장의 것도, 축구인의 것도 아니다. 축구를 응원하는 시민들의 것이다. 새판을 짜서 출발하지 않으면 한국축구는 4년 후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도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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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28일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을 처벌하는 병역법 조항은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체복무제를 병역의 한 종류로 인정하지 않은 조항은 헌법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2019년 말까지 대체복무가 가능하도록 병역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했다. 병역거부자 처벌이 병역 자원 확보와 병역 부담의 형평을 위해 정당하다고 보면서도 대체복무제를 마련해 법과 현실의 괴리를 줄이라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자체를 온전히 인정한 결정은 아니지만 그 취지를 분명하게 수용하고 대체입법을 촉구한 점은 환영할 일이다.

축하의 악수 28일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 없는 병역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자 헌법소원 등을 청구했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서울 종로구 헌재에서 서로 축하의 악수를 나누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헌재는 결정문에서 “대체복무제가 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한다면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병역종류조항에 대한 입법부의 개선입법 및 법원의 후속조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부연했다.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엄하게 처벌해도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끝없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극소수에 불과해 국방력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아니라고도 했다. 대체복무제를 도입해 양심의 자유를 지키면서도 병역의무도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헌재 결정은 병역거부자 처벌을 규정한 병역법 조항 자체가 위헌인지 여부를 가린 것뿐이다. 본질은 ‘정당한 사유’가 없으면 입영 거부를 처벌하도록 한 병역법 제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포함시킬 것이냐의 문제다. 그 판단은 대법원에 달려 있다. 대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온전히 인정할지 여부를 전원합의체에서 결론짓기로 하고 8월 말 공개변론 일정을 잡아놓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해마다 600명 안팎의 사람들이 처벌받는 부끄러운 인권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된다. 대체복무제와 안보를 둘러싼 환경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그동안 세 차례나 7 대 2 의견으로 병역법 처벌조항을 합헌이라고 판단했던 헌재도 이번에는 합헌 4 대 위헌 4, 각하 1로 합헌과 위헌 의견이 대등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현역복무와 대체복무 사이에 복무의 난이도나 복무 기간의 형평성을 갖추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제대로 판정하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사회적 논의를 거쳐 공정한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합리적 방안을 찾기를 기대한다. 국회와 정부는 헌재의 결정에 따라 대체복무에 대한 조건과 기준을 마련하는 입법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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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에 외세와의 전쟁이 발발했다고 가정해 보자. 전쟁이 나면 당연히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보내진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부상하고, 부모님들은 절망하며 대한민국을 지켜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자신의 죽음과 부상으로 누구와 무엇을 지켜준 것일까?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일까, 아니면 그렇게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 땅에서 가장 많은 부와 권력을 소유한 상위 1~10%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일까? 사실 우리 모두가 같이 사는 대한민국이고 그 대한민국의 국민과 재산을 꼭 이렇게 구별할 필요는 없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전쟁의 승리로 얻는 가장 큰 혜택은 보통 젊은이들의 피와 상처와 절망으로 보호되는 상위 1% 혹은 10%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우리 어르신들의 생명과 재산이다.

이 가정과 시나리오는 의도적으로 자극적 표현과 논리를 사용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세력(글쓰기의 편의상 그냥 보수라고 쓰겠다)의 위치와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보수세력은 이른바 ‘안보보수’와 ‘시장보수’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반공을 이념의 근간으로 하여 국가를 지키기 위해 상시 국가적 준전시상태에 준하는 준비를 해야 하고, 한·미동맹을 종교의 영역에 놓고, 국가 안보를 위하여 많은 것들(민주주의, 인권, 청춘, 생명까지도)을 희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로 노년층을 중심으로 안보보수세력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자연스러운 정서이지만 한국에서의 독특한 권력인 유교적 ‘연장자 권력’과도 연관되어 있다. 주로 연장자로 구성된 안보보수세력은 젊은이들의 해이함과 방종과 건방짐이 나라를 망친다고 야단치고, 훈계한다. 물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그들의 공헌을 인정하지만 젊은이들은 일방적으로 야단맞고, 강요받는 이 상황과, 오직 나이만으로 권력이 주어지는 불공정성에 속이 끓는다. 이러한 일방적 연장자 권력이 우리의 안보보수 속에 녹아 있다. 젊은이들은 이들의 생명과 노후를 보장하는 국가적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나이 권력 때문에 일방적으로 야단만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공과 ‘빨갱이 협박’으로 생명을 이어온 안보보수세력이 고연령층이고, 지극히 유교적인 지역을 대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보수의 또 다른 한 축인 시장보수세력은 안보보수와 넓은 교집합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장을 위해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상위 1% 혹은 10%로의 부의 집중은 시장원리라고 강변하는 세력이다. 재벌과 부자 권력이 특권을 행사하고 갑질을 하고, 탈법과 불법을 저질러도, 그들의 국가 경제 공헌을 내세우며 이들에게는 유난히도 관대하고 오히려 탈법과 불법을 권장하는 모습마저 보이는 세력이 시장보수세력이다. 이들 중에는 전쟁이 나면 총을 들고 싸워야 하는 병역의 의무에서 유난히 자유로운 사람이 많고, 단지 출생이 좋다는 이유로 노동의 대가를 보통사람들의 수백배에 이르게 받고, 자신의 재산 규모에 만족하지 않고 총수라는 선출되지 않은 국가권력까지 물려받는다. 그리고 전쟁터와 시장에서 자신을 위해 싸워주는 사람들이 그들의 특권과 불법, 탈법을 지적하면 반공과 빨갱이 논리로 위협하고 공격한다. 시장보수와 안보보수가 겹치는 지점이다.

지금 우리의 보수 정당은 이들 연장자와 소수의 시장권력을 대한민국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주로 이들만을 대변해 왔다. 그런데 우리 보수가 건강하지 못한 것은 자신들을 지켜주어야 할 국민들에게 권력과 폭력만을 행사하지, 스스로 국가의 주류가 되기 위한 ‘존경심’을 얻지 못하고 ‘품격’과 ‘희생’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대부분이 자기 재산이고 특권인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나온 당연한 의무사항일 뿐 대단히 숭고한 의무사항이 아니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수준의 재산을 넘어서는 부분은 그때부터 재산이 아니라 권력이 된다. 서양 선진국의 주류는 그 재산을 존경을 얻기 위해 최소한의 자선과 공공성을 목적으로 사용하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보수세력은 그 재산을 떵떵거리기 위해서만 사용한다. 지난 두 번의 보수 정부가 외쳤던 자선과 공공성의 진정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보수세력은 대한민국의 주류임을 자처하며 자신들을 무조건 공경하라고 대다수의 국민을 협박하고 강요해 왔다. 같이 잘살아야만 자신들의 큰 혜택이 지켜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국민들의 외면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강권력만 있고 매력이 없는 세력이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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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사극 <뿌리 깊은 나무>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석규가 오랜만에 티브이에 출연해서 관심을 끌었죠. 팬으로서 침체기에 있던 배우가 걱정이었지만 이는 한낱 기우였습니다. 드라마는 세종과 밀본이라는 비밀조직의 다툼을 그렸습니다. 양측은 정반대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추구했죠. 세종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고, 밀본은 정도전의 뜻에 따라 왕이 아닌,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했습니다.

실제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군주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고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재상은 군주의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을” 임무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능력 없는 이도 임금이 될 수 있으니 능력 위주의 관료가 중심에 서야 한다는 지적이죠.

드라마고, 왕조시대 이야기지만 밀본의 걱정은 오늘날 정치와도 무관치 않습니다. 정치 안정을 한 개인에게 기댈 수 없다는, 그래서 다수가, 민이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점에서 현대 국가의 통치, 특히 민주주의와 닿는다고 할 수 있죠. 이런 점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먼저 북핵 문제를 보면 개인의 영향력이 도드라집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고 평창 올림픽을 거쳐 남북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까지 열렸습니다. 내부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지만, 관료들을 제쳐놓고 김여정 부부장, 김영철 부위원장 등 소수의 최측근을 통해 거침없이 진행됐음을 짐작할 수 있죠.  더 특이한 것은 미국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특사를 만나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의 초청을 수락했습니다. 북·미 협상도 국무부는 쏙 빼놓은 채 최측근인 폼페이오 당시 중앙정보부 국장과 트위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의 걱정과 반대도 완전히 무시했죠. 개인 치적과 자존심을 앞세운 트럼프에 의해 지난 반세기를 이어온 대북 정책이 뒤집힌 것입니다.

김정은과 트럼프라는 개인이 주도하는 협상이었던 만큼 일 처리가 KTX처럼 빨랐습니다. 하지만 신속했던 만큼 구체적 성과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웃는 얼굴로 악수했지만, 비핵화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가 될 것인지, 확인은 어떻게 할 것인지 어느 하나도 구체적으로 결정난 것이 없죠. 게다가 두 지도자의 추진력이 주요했던 만큼 둘 중 하나라도, 무슨 이유에서든, 마음만 돌아서면 상황은 쉽게 악화할 수 있습니다. 북·미 협상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입니다.

다행히도 한국이라는 중재자가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두 지도자와는 달리 정부를 십분 활용하고 민심을 추스르며 남북 문제를 추진하고 있죠. 불안한 북·미 협상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정치가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방선거가 민주당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습니다. 설마설마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월세 내는 날이 또박또박 오듯 예견된 결과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능숙한 외교를 통해 전에 없던 남북 간 평화를 끌어냈고, 70%를 오가는 지지를 받아왔죠. 자연히 민주당은 문재인마케팅에 올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에 기대기는 민주당뿐 아닙니다. 시민도 대통령만 바라보는 형국입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그 한 예죠. 이는 불통의 아이콘이던 박근혜의 추억을 지우기 위한 방책이었을 겁니다. 덕택에 막힌 하수구가 뚫린 듯 청원이 뜨겁습니다. 하지만 종편방송 허가 취소, 용의자 처벌 등 대통령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일마저 요구합니다. 권력은 나누어져 있고 법과 제도가 있지만, 시민은 대통령이 봐주고 처리해주길 바라는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잘해서 인기도 얻고 국정운영도 잘되고 남북 문제도 잘 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 업적도 쉽게 무너질 수 있죠. 그 여파가 국내정치에 그치지 않고 남·북·미관계에 여파가 미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박근혜에게 환호하며 올인했던 보수의 꼴이 보수만의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21세기, 아직도 덕이 많은 군주 덕에 태평성대가 오고, 폭군 때문에 난세가 오는 중세에 사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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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용은 한 여자를 보았다. 목이 다 드러나는 짧은 헤어스타일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흰 면티를 입은 여자였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고개가 그쪽으로 갔다. 밤 10시가 지난 시각,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거나 교차로 앞에 정차할 때마다 술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들큼한 과일 향이 났다. 사람들은 과육 안에 점점이 박힌 씨처럼 혼자 서 있거나 좌석에 앉아 졸고 있었다. 여자는 정용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좌석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뭐지? 아는 얼굴인가? 정용은 유리창에 비친 여자의 얼굴을 훔쳐보며 속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명확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알바하다가 본 얼굴인가? 정용은 편의점과 피시방과 한과 공장과 택배 물류창고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었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데, 왜 자꾸 고개가 그쪽으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마치 트럭에 쌓아 올린 택배 박스 하나를, 아무 표정 없는 택배 박스 하나를, 오랫동안 쳐다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정용은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여자와 정용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정용은 여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걸어가면서 그렇게 스스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버스에서 몇 번 마주쳤을 수도 있고, 마트 같은 곳에서 봤을 수도 있지. 낯이 익어서 무의식중에 시선이 간 것이겠지. 정용은 일부러 여자와의 거리를 조금 더 벌렸다. 여자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걸었다. 편의점 옆을 지날 때, 여자는 잠깐 걸음을 멈췄으나, 그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한 손으로 얼굴 근처 날벌레를 쫓더니, 이내 다시 동네 쪽으로 걸어갔다. 정용도 같은 곳에 서서 잠깐 여자의 행동을 따라 했다.

여자가 들어간 곳은 ‘원흥 원룸’이었다. 정용이 사는 원룸 건물은 ‘원흥 원룸’ 옆 골목으로 5분쯤 더 걸어가야만 나왔다. 하지만 정용은 여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원흥 원룸’ 앞에 서 있었다. 이층 구석방에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용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단순히 같은 동네에 사는 여자가 아니었다! 정용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여자의 이름은 김명희. 정용이 대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군 입대 전에 들었던 교양 과목을 함께 수강했던 여자다. 그때도 정용은 강의 시간 내내 자꾸만 그 여자 쪽으로 시선으로 돌리곤 했다. 왜 그랬는지 몰랐지만, 자꾸만 고개가 갔다. 그 여자를 7년 만에 다시 한동네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날 이후 정용은 밤마다 원룸에서 나와 ‘원흥 원룸’ 앞까지 걸어갔다. ‘원흥 원룸’ 뒤로는 단독 주택이 몇 채 있었고, 긴 초등학교 담벼락이 이어져 있었다. 밤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았고, 골목이 좁아 차들도 잘 다니지 않았다. 정용은 ‘원흥 원룸’ 옆 전봇대에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길고양이와 눈을 맞추거나, 그도 지겨워지면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가 가만히 철봉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여자는 늘 밤 10시가 넘어서 원룸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같은 숄더백을 메고 있었으며, 옷도 하루는 면티, 하루는 폴라티, 하는 식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생수와 컵라면을 사오는 날도 있었고, 식빵과 우유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오는 날도 있었다. 정용은 그 모든 것을 전봇대 뒤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예전, 대학교 때처럼 정용은 그녀에게 말을 걸진 못했다. 조별과제를 같이한 적도 있었는데, 몇 번인가 전화번호를 따로 물어보려다가 결국은 입을 떼지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휘파람을 불면서 괜스레 남자 기숙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여자 기숙사 근처를 맴돌았을 뿐, 그것이 전부였다. 정용은 퇴근한 여자의 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두세 시간 더 그 앞에 머물다가 조용히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정용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누군가 정용의 손목을 움켜쥔 것은 그로부터 2주 정도 지난 뒤의 일이었다. 11시 무렵 언제나처럼 ‘원흥 원룸’ 근처 전봇대에 기대 서 있던 정용의 앞으로 한 여자가 휘청휘청 걸어왔다.

“너, 이 새끼, 누구야? 너 스토커지, 너 스토커 맞지!”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키가 작은 여자였다. 여자에게선 술 냄새가 났다.

“너, 내가 여기 사는 거 어떻게 알았어? 너, 내 뒷조사했어? 하, 이 새끼 봐라. 너 이름 뭐야? 진규? 창근이? 아니아니 영진이. 맞지? 하영진!”

정용은 여자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컸고, 하나둘 ‘원흥 원룸’의 창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너, 내가 여기 찾아오지 말라고 그랬지? 찾아와서 뭐? 네가 뭐? 네가 날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런 거야?”

김명희의 방 창문도 열렸다. 정용은 잠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빨리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여자는 더 꽉 정용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런 거야? 날 좋아해서 늘 여기 서 있는 거야?”

여자가 정용의 눈을 보면서 물었다. 여자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러나 조금 슬퍼보이기도 했다. 정용이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네, 좋아해요. 사랑한다고요!”

정용이 그렇게 말하자 손목을 잡고 있던 여자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여자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제야 정용은 후다닥, 자신의 원룸이 있는 골목길로 뛰어갈 수 있었다. 하나둘, 다시 ‘원흥 원룸’의 창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김명희의 창문도 닫혔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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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자치경찰제는 지난 참여정부에서 당초 기대와는 달리 제주특별자치도에 한하여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시범 실시에 그치고 말았다. 이번에는 개헌과 함께 지방분권을 대폭 확대한다는 취지에서 자치경찰제의 전면 도입론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으며, 비대화되는 경찰권에 대한 통제방안으로서 수사권 조정 문제와도 연계되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발표된 ‘자치분권 로드맵’은 핵심전략 제1호인 ‘중앙 권한의 획기적인 지방 이양’의 일환으로 ‘광역단위의 자치경찰제’ 도입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국가경찰은 전국 치안 수요에 대응하고 자치경찰은 지역 주민 밀착형 치안서비스를 제공하여 지역별 다양한 치안서비스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주민의 안전과 지역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한 경찰 사무는 주민에게 가까운 지방자치 조직에 배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국정원 개혁의 일환으로 대공수사권을 경찰청으로 이관한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더욱 비대화되는 경찰권을 어떻게 견제할지에 대한 방안도 함께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정보와 수사의 결합으로 인한 인권침해 사례를 우리는 머지않은 과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치경찰제 실시는 권력분립을 통한 효율화, 수사권 조정을 위한 전제로서 피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이제 ‘어떠한 자치경찰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하여 합리적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솔루션으로 광역단위의 실효적인 자치경찰제가 도입된다면 중앙집권적 경찰권이 어느 정도 분산되고 민주통제를 통해 그 폐해도 예방될 것이다.

그러나 경찰개혁위원회가 발표한 ‘자치경찰 모델’을 보면, 기존 국가경찰 제도에 자치경찰 제도를 추가하여 자치경찰은 지역의 치안과 경비,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등 일부 사건만 자체적으로 수사하고, 대부분의 사건 수사는 여전히 국가경찰이 담당하게 되어 애초의 취지와 거리가 멀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상황, 생활권의 광역화 등을 감안할 때 불가피해 보이는 시·도 단위 자치경찰제 도입은 아주 새로운 것이 아니다.       

경찰법 제2조 제2항은 시·도지사 소속으로 지방경찰청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자치 치안의 확립을 위해서는 광역단위로 지방청 이하는 포괄적으로 조직과 권한을 자치경찰로 전환해야 제도의 목적을 살릴 수 있다.

지방경찰은 지방자치의 원리인 전권한성(全權限性)에 맞게 과감하게 자치경찰로 이양하여 지역 치안을 완전히 행사할 수 있게 하되, 전국적이고 전문적인 치안서비스와 수사 업무에 관해서는 국가경찰의 협조를 얻어 연계하면 될 것이다.

경찰의 수사 기능을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관할권 배분으로 나누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수사권은 행정조직의 권한 문제가 아니라 형사법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치경찰에 대한 견제와 감독은 경찰청장이 아니라 경찰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행정안전부 장관 소속인 경찰위원회를 국무총리 소속의 국가경찰위원회로 격상시켜 일본의 공안위원회 이상의 권한을 부여하고, 시·도 경찰위원회에 실질적인 결정권을 부여하여 지방 단위에서 시·도지사의 권한을 견제하면서 지역 실정에 맞는 치안정책을 수립·실시하게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자치단체장의 개입과 지역유착으로 인한 수사 기능 왜곡을 우려할 수도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법통제기관인 검사의 수사지휘를 통해 해결하면 될 것이다.

자치경찰제의 전면 실시가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하나, 그럴수록 지방분권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가장 큰 취지인 주민생활 밀착형 치안서비스 제공, 국가경찰의 축소 및 분산을 통한 민주화를 달성하고 수사권 조정의 전제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내 삶을 바꾸는 자치분권’을 위한 자치경찰의 모습을 기대한다.

<오승규 중원대학교 법무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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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국립국악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토요상설 국악공연’의 전통음악 레퍼토리를 섭렵해볼 심산이었는데, 예악당 큰 무대에서 스피커를 통해 전해진 연주들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종묘제례악을 현장에서 듣겠다며 5월 따가운 햇살의 종묘 마당에 앉았을 땐 ‘밤에 해야 멋질 텐데…’ 힘들기만 했다. 2000년대 초의 일이다.

오히려 잊지 못할 장면은 1986년 창덕궁 옆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봤던 사물놀이 상쇠 고 김용배 추모굿. 1990년대 초반 지리산 자락에서 들은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였다. 공간사옥 앞마당까지 가득 메운 인파 속에 처음 본 굿판이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면, 학술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초야의 한 노인이 들려준 역동적인 가야금 소리는 전통음악을 온몸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몇 년 후 석 달 속성으로 배운 가야금을 들고 독일 유학길에 오른 것은 그때의 경험에서 촉발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 후반 베를린에서 본 박병천의 진도 씻김굿과 김금화 만신의 진오귀굿 공연도 기억에 또렷하다.

귀국 후에는 남도들노래를 부른 조공례의 놀라운 내공과 정권진 판소리의 품격에 깊이 매료되었고, 국악 연주자 지인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우리 장단의 무궁무진한 변화 가능성, ‘성음’이나 ‘이면’ 같은 미묘한 소리 세계를 정교하게 이론화하는 작업에 매진할까 생각한 적도 있다. ‘수제천’의 미적 특징을 내재적으로 변화하는 선적 흐름과 그 속에 존재하는 미시적인 음향세계로 분석한 논문도 썼지만, 전통음악 연구를 이어가지 못한 것은 어설프게 한 발만 담가선 다루기 힘든 엄청난 복잡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북촌 일대의 한옥들과 원서공원에서 열린 ‘북촌우리음악축제’(예술감독 허윤정)를 보며 전통음악의 장소성을 생각했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공간’과 달리 ‘장소’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고, 개인이나 공동체가 오랜 시간 관계 맺으며 형성되는 것이 장소성이다.

전통음악은 우리의 역사와 삶 속에 녹아든 것이었음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놓인 북촌을 전통음악의 숨결이 살아있는 장소로 만들어가는 일은 잃어버린 터전을 현재의 삶 속에 복원하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북촌의 한옥·갤러리·공방 등에서 6년째 이어져 온 이 축제는 전통국악과 창작국악을 아우르는 프로그램으로, 젊은 국악인들이 전통을 그들의 감각으로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기도 하다.

전통이 깃든 장소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새롭게 거듭난다.

대형 공연장의 관행적인 전통음악 연주가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건 그 음악의 고유한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해서다. 5월 말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마련한 ‘경복궁 음악회’는 연주자들을 따라 궁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야경 속에서 음악을 감상하는 색다른 시도 때문만이 아니라, 전통 레퍼토리를 경복궁이라는 장소의 특성에 맞게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흥례문 광장에서 ‘대취타’로 시작해 왕의 집무실과 침소 옆 우물, 왕비의 후원을 지나며 ‘상령산’, 정악시나위, 경기 잡가 등을 연주하고, 마지막 교태전에서 ‘춘앵무’로 끝나는 이 공연에서 관객들은 그것이 향유되던 장소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옛 음악을 한층 가깝게 느낄 수 있었으리라. 고궁음악회는 국악만이 아니라 클래식·재즈·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장소성을 고려한 프로그램 구성은 흔치 않다.

창덕궁 앞에서 종로3가 네거리에 이르는 길은 ‘국악로’라 불린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국악교육기관이 밀집해 있던 국악 활동의 근거지였다 한다. 2016년 이 역사적인 장소에 ‘돈화문국악당’이 개관했다. 근현대사에서 전통음악이 깃든 장소들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옛 레퍼토리를 현재화하는 프로그램이 풍성하게 마련된다면, 전통음악도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고전으로 감상될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전 종묘제례악 야간 공연이 생겼다. 종묘에서 밤에 듣는 보태평과 정대업은 어떨지 내년에는 꼭 다시 찾아가보리라.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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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데이터가 ‘디가우징’ 방식으로 영구 삭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대법원은 규정에 따른 통상적 조치라고 해명했으나, 시점에 비춰볼 때 증거인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은 폐기되지 않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의 하드디스크 제출도 거부하고, 자체 조사로 추려낸 파일 410건만 검찰에 제출했다. 수사에 협조하겠다던 김명수 대법원장의 약속은 어디로 갔나. 대법원은 기어코 강제수사를 자초할 셈인가.

디가우징은 강력한 자력으로 모든 데이터를 삭제해 복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퇴임 시 (디가우징에 의한) 폐기가 원칙”이라고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의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된 것은 퇴임(2017년 9월22일) 후 39일 만인 지난해 10월31일이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2017년 11월3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추가조사를 지시했다. 퇴임 후 한 달 넘게 방치되던 하드디스크가 추가조사 결정 직전 ‘완전소거’된 것이다. 배경을 두고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 ‘퇴임 시 폐기’가 통상적인 관례라 해도, 추가조사가 예상되는 시점인 만큼 예외적 보전조치를 하는 게 타당했다고 본다.

대법원은 임 전 차장 등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도 ‘의혹과 관련 없는 공무상 비밀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제출을 거부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다수의 전·현직 법관들은 20여건의 고발을 당한 피고발인이며 검찰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피의자들이다. 피고발인이나 피의자가 소속된 기관에서 수사자료를 제출하면서 스스로 ‘의혹과 관련 없다’고 선을 긋는 일은 상식적이지 않다. 사법농단과 관련된 증거를 은닉하거나 인멸하는 것은 수사방해이자 사법방해에 해당한다. 주권자를 조금이라도 두려워한다면 이런 행태를 보여선 안된다.

법원은 지금이라도 검찰이 요구한 자료 일체를 제출하고 수사에 전폭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사상 초유의 대법원 압수수색 시도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검찰이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해도 영장전담판사들이 기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법원이 그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김 대법원장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법원도 법관도 법 위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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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돈 부산시장 당선인이 부산 가덕도에 영남권 신공항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혀 해묵은 지역갈등이 재연되고 있다. 오거돈 당선인은 27일자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가덕도 해상 330만㎡ 부지에 길이 3.5㎞의 활주로가 들어서는 중장거리 노선 중심의 공항을 2028년까지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영남권 신공항의 대안으로 이미 확정한 김해공항 확장안은 소음과 안전 문제로 폐기가 불가피한 만큼 가덕도 신공항을 재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오 당선인은 “단순히 부산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봤을 때 이 시점에서 어디가 가장 좋은 곳인지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고 했다. 오 당선인은 6·13 지방선거 때부터 가덕도 신공항 재추진 방침을 밝힌 바 있어 선거승리로 신공항에 대한 민의가 확인됐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덕도 신공항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우선 가덕도 신공항 재추진은 2년 전인 2016년 정부와 영남권 5개 광역단체장 간의 합의를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당시 해외 전문기관의 판단까지 받아가며 ‘김해공항을 5조9000억원을 들여 확장하고 대구통합공항을 짓는’ 조정안으로 가까스로 갈등이 봉합됐다. 정권과 광역단체장이 바뀌었다고 합의를 번복하면 국가정책에 대한 신뢰가 훼손된다. 합의를 번복해야 할 특별한 ‘사정변경’이 생긴 것도 아니다.

영남권 신공항은 2007년 대선 과정에서 불거지면서 10년 가까이 영남권 갈등의 핵이었다. 판도라 상자를 다시 열기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명분과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 당선인의 주장 대부분은 2년 전 합의 당시 지적된 내용의 되풀이일 뿐 새로운 논리도, 충분한 설득력도 없다. 애초에 가덕도 신공항 추진은 부산시의 범위를 넘는 초대형 국가사업이다. 수십조원을 쏟아붓는 사업을 정부가 면밀하고 균형있게 판단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다. 국토교통부는 “김해 신공항을 최적 입지로 결정한 만큼 계획대로 추진해야 한다”고 했고, 김현미 국토부 장관도 “정부는 공항 위치 변경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오 당선인이 신공항 문제에 집착하면 문재인 정부의 국정수행에까지 부담을 주게 된다. 대구·경북 지역 여론은 이미 들끓고 있고, 야당에서는 “지방선거 승리에 도취돼 지역 패권주의에 나서는 오만함을 드러낸 것”(바른미래당 김동철 비대위원장)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에 표를 몰아준 민심을 이런 식으로 실망시키면 지방선거 압승이 역풍이 될 수도 있다. 오 당선인은 가덕도 신공항 재추진 방침을 철회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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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대한 기억 한두 가지는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내 기억 속 자전거는 초등 5학년 때 아버지가 어디선가 구해온 중고자전거다. 말끔하게 칠까지 새로 한 자전거를 처음 탄 날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잡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아버지의 말에 속아 ‘씨익씨익’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가 더 이상 뒤뚱거리지 않을 때쯤, 뒤에서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날로 자전거는 나의 ‘애마’가 됐지만, 얼마 타보지도 못하고 도둑맞는 바람에 자전거를 찾아 동네를 샅샅이 뒤졌던 기억이 더 많다. 누군가는 저녁노을이 질 무렵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내달렸던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연인과 자전거를 타며 나눈 속삭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탈것 중 자전거에는 그만큼 각별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돌아보면 자전거는 발명 이후 가장 진보하지 않은 이동수단일 것이다. 지금의 모습을 갖춘 자전거가 대중화된 게 1890년대쯤이라고 하니 12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페달을 발로 구르는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전거 여행>에서 김훈이 말한 대로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자전거는 한때 자동차의 증가와 함께 이용률이 급락했지만, 친환경 탈것이라는 이미지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시 이용이 늘어나는 추세다. 자전거의 천국으로 알려진 네덜란드는 국민 1인당 1.1대의 자전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네덜란드 사람들의 자전거 사랑은 환경 의식이 남달라서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교통비가 워낙 비싸고 대부분이 평지여서 자전거만큼 훌륭한 이동 수단이 없어서다. 게다가 ‘탄소 제로’ 교통수단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결국 시민들은 스스로의 삶에 더 이로운 것을 찾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공유자전거가 자전거 이용률을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공유자전거의 인기 역시 건강이나 환경보호 같은 거창한 목적보다는 값싼 데다 편리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자전거가 교통수단의 하나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자전거 도로 등 일상에서 자전거를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인프라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마침 지난 3월 행정안전부는 도로교통법을 개정하면서 자전거 헬멧 의무화도 포함시켰다. 오는 9월28일부터는 자전거를 타려면 헬멧을 써야 한다. 헬멧 의무 착용에 대해선 벌써부터 말이 많다. 공공자전거 ‘따릉이’를 2만대 이상 운영하는 서울시는 다음달부터 여의도 일부 따릉이 대여소에 헬멧을 시범 비치하기로 했다. 공공자전거가 안전 문제를 도외시한다는 따가운 시선을 피하지 못해 내놓은 대책이다. 그러나 찜통 같은 더위에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이용할 이가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덴마크에는 ‘사이클 시크’라는 말이 있다. 2006년 코펜하겐에서 시작된 라이프 스타일 운동으로 ‘패셔너블한 일상복을 입고 도심과 어울리게 자전거 타기’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다. 다만 사이클 시크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자전거 외에 관련된 제품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헬멧을 착용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다. 헬멧의 의무착용이 오히려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이용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유럽 등에서 자전거가 하나의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것은 자전거 이용자들에 대한 배려다. 헬멧을 쓰지 않아도 안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자전거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것 말이다.

서울은 어떤가. 자전거 전용도로는 부족하고, 도로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니 자전거를 타려면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사소하지만 반복되는 불편함으로 자전거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시 환경을 조성해야 자전거 이용자가 늘어날 것이다. 값비싼 자전거에 몸에 붙는 쫄바지, 헬멧을 착용해야만 자전거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따릉이를 타는 당신도 ‘자전거 시크’ 못하란 법 없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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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대법원장 재임 중 대법원에서 벌어졌던 여러 비상식적인 사건들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대법원장은 대통령과 단둘의 만남을 요청하였고, 그동안 법원이 정권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앞으로 어떤 ‘유익한’ 재판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 해도 그렇다. 대법원장이 원했던 것은 상고법원의 신설이었고, 그가 그 대가로 내줄 듯 보여준 것은 사법의 공정성이었다.

권력이 사법권에 의해 정당하게 제한되는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진실조사와 책임자 처벌 말고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도대체 상고법원을 설치하는 것이 대법원장에게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중요하였던 것은 단순히 하나의 법원을 설치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법원 권력의 정체성을 바꾸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신과 신군부의 독재정부 시절 대법원은 절망한 사람들과 정의를 외면하였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민주주의자를 처벌하는 세력에 조용히 협력했던 사법은 국민들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주의가 도래하였고, 개헌을 통하여 헌법재판소가 설립되었다. 새로 설립된 헌재는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어느덧 대법원의 위상을 위협하게 되었다. 대법원의 무리한 시도는 이로부터 시작된다.

‘최고법원으로서의 권위를 부활시켜야 하고, 차제에 헌재를 대법원의 산하기구로 통합시켜야 한다. 최고로 중대한 문제에 관해서만 재판하는 법원으로 정체성을 바꾸어야 한다.’

그 목표를 위해서 통상적 중요도의 사건을 처리해줄 다른 법원이 필요하였고, 그 역할로 계획된 것이 바로 ‘상고법원’이다. 대법원이 모든 것을 주고라도 얻어내려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국민의 신뢰를 잃었기에 권력을 잃었다면 우선 지난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하여야 했고, 공정하고 독립된 재판으로 신뢰를 회복하여야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절차와 과정을 건너뛴 채 최고 권력자와 직접 거래하려 했다.

가장 위험스러운 문제점은 우리의 권력구조가 그런 시도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대법원장의 권력이 견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정이 일방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고, 대통령의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결심한다면 별다른 장애 없이 실행될 수 있었다. 권력의 은밀한 거래를 시도한 것이 과연 대법원뿐이었을까? 대법원 사태는 고장난 권력장치를 드러내는 빙산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지방선거가 끝났다. 그동안 불량배 흉내를 내며 모든 변화에 반대하던 야당은 유권자들의 뜨거운 심판을 받았다. 보수야당의 여러 가지 잘못된 판단 가운데 가장 어리석었던 것은 개헌작업에 대한 비협조와 태만이었다. 개헌은 당장의 정치적 이해와는 거리가 먼 장기적 결정이다. 합리의 정치가 이뤄지도록 스스로 주도하고, 설득했어야 할 야당이 태업에 가까운 행태를 보인 것은 정치인과 정당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이었다.

모든 정치세력들이 지혜를 모아 개헌을 다시 이야기할 시점이다. 새로운 개헌작업을 위해서 정치권에 당부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 개헌을 하는 이유와 목표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솔직하게 논의하는 것이다. 지난번 개헌논의는 가장 기초가 되는 이 문제에 관한 합의와 공감대가 이뤄지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어쩌면 시민들의 적극적 관심을 끌어내지 못한 원인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이번 개헌의 목표는 권력구조를 제대로 수리하는 것에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헌법에 아무리 멋진 것들을 규정해 놓는다 해도 큰 의미는 없다. 게다가 정치의 구체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헌법이 아니라 한 걸음씩 어렵게 성취할 정치의 역할이다.

완벽한 절망 속에서도 삶은 꾸역꾸역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 사람들은 남부 호숫가에 있는 헤렌킴제 성에 모여 헌법초안을 논의하였다. 위원들 가운데에는 심지어 나치에 협력했던 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모두가 패자인 상황. 그들은 비난하고 방해하는 대신 남아 있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엔지니어로서 머리를 맞대고 골몰하였다. 우리의 정치인들도 정파를 떠나서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들이 엔지지어로서 멋진 작업을 만들어내는 것을, 모두가 승자가 되어 과거를 극복하는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

<김진한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대학 방문학자·전 헌법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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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병아리가 엄마 꼬꼬닭에게 질문했다. “엄마. 우리는 날개도 있는데 왜 하늘을 날지 못하는 거죠?” 엄마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즉석자판기처럼 대답했다. “얀마! 하늘을 올려다봐. 시퍼렇기만 하고 먹을 게 어디 있겠니. 땅에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뭐하려구 고생하면서 날아다녀.”

병아리가 난데없이 독수리 꿈을 꿀 필요는 없다. 생을 만족하고 오늘을 즐기며 사는 일이 행복 아닌가. 닭도 사람도 땅이 답이렷다. 주렁주렁 포도가 열리고 무뭉스름한 참외가 많이도 달렸구나. 귀마루 끝엔 귀꽃이 피어 있고 마당엔 두덩에 누운 소처럼 게으른 꽃들의 기지개. 근심 걱정 없이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장마구름 틈에서 햇살이 살짝 비친다.

아프리카 부족들이 사용하는 스와힐리어 가운데 대표 인사말이 “하쿠나 마타타!”. 상점 주인도 하쿠나 마타타 인사를 하고, 슬쩍하려는 도둑도 하쿠나 마타타 인사를 건넨다. “모든 일이 잘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 뜻이란다. 하루에 하쿠나 마타타를 백 번 이상은 하고 잠들어야 ‘괜찮은 하루’를 보낸 셈으로 친단다. 치유 무용가 가브리엘 로스는 <기도가 땀에 젖게 살아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다. 아침에도 춤추고 낮에도 춤추고 밤에도 춤을 추느라 흘리는 땀방울. 나도 ‘어깨춤’이라는 아호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뜨겁게 춤을 추면서 하쿠나 마타타 소리 지르자고 지은 이름. 도망치듯 피서나 할 게 아니라 “걱정하지 말자구!” 용감하게 뙤약볕 모래사장으로 달려가 바닷물에 풍덩! 그대와 나, 우리는 더 물러서지 말자. 진짜진짜 앞으로는 잘될 거야! 그렇고말고. 잘되는 수밖에 없어.

작년 여름의 기억. 영국 리버풀에서 무명 가수들의 길거리 공연을 봤다. 콜드 플레이의 ‘픽스 유’를 청춘들이 엉켜서들 발을 동동 구르고 소리 높여 난리 부르스. 나도 픽스 유! 머리를 흔들고 뜀을 뛰면서 함께했었다. 아프리카식으로 하자면 하쿠나 마타타 인사법. 젖은 나무도 웅신하게 타들어가는 불기의 날들. 기록을 다투는 더위. 그대여! 땀에 젖게 춤을 추며 사랑하자. 여름의 꽃들과 함께 춤을 추자.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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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지펀드계의 전설’로 불리는 헝가리 출신 미국의 억만장자 조지 소로스만큼 양극단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도 드물다. 소로스는 30여년간 퀀텀 펀드를 운용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익을 좇아 ‘세기의 투기꾼’이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1979년 ‘열린사회재단(OSF)’을 설립해 320억달러를 기부한 자선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를 지원하고, 아프리카 빈곤 퇴치와 신흥국 교육사업을 펼쳐왔다. 게다가 소로스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꿰뚫는 경제분석가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2016년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하면 글로벌 금융시장은 ‘검은 금요일’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소로스에게 ‘정적(政敵)’이 있다. ‘리틀 푸틴’으로 불리는 헝가리의 4선 총리 빅토르 오르반이다. 청년 시절 학생운동을 이끈 ‘소로스 장학생’이기도 했던 오르반은 소로스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오르반은 지난 4월 치러진 총선을 앞두고 “소로스가 시민단체를 통해 무슬림 난민들을 헝가리에 유입시켜 유럽문화의 가치를 훼손했다”고 맹공격했다. 헝가리 정부는 거리에 “마지막에 소로스가 웃게 해서는 안된다”는 문구가 담긴 대형 포스터를 설치하기도 했다. 우파 집권당인 피데스당은 ‘스톱 소로스(Stop Soros)법’까지 만들었다. 소로스의 이름을 딴 이 법은 이민자를 지원하는  개인과 시민단체를 1년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이번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오르반이 소로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부다페스트에 있던 열린사회재단은 독일 베를린으로 옮겨야 했다.

소로스가 1991년 부다페스트에 설립한 중앙유럽대학(CEU)이 내년 대학원 신입생을 선발하기로 했다고 26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중앙유럽대학은 동유럽에서 미국식 경영대학원이 있는 유일한 대학이다. 오르반 정권이 이 대학의 신입생 선발을 허용하긴 했지만 소로스에 대한 반감을 거둔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소로스가 “열린사회재단을 통한 난민지원 사업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소로스를 ‘헝가리의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오르반 자신은 ‘난민의 적’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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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가 끝났다. 학교 정문 앞 광장에 ‘컴활(컴퓨터 활용능력)’ 부스가 생겼다. 수업을 듣고 자격증을 따는 비용이 공짜란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지나가는 학생들을 붙들고 이야기를 전한다. <미생>의 장그래가 인턴을 시작할 때 갖고 있던 자격증이다. 공무원시험에서 컴활 1급은 1%, 2급은 0.5% 가산점을 줬는데 지난해부터 가산점이 없어져 사장된 자격증에 가깝다. 면담에 찾아온 학생들에게는 공부를 좀 해야 하는 다른 ‘영양가 있는 자격증’ 몇 개를 일러줬다. 고용노동부와 함께하는 사업도 기억에 남는다. ‘문과생을 위한 개발자’ 프로그램이다. 자바 스크립트 같은 프로그래밍 코딩을 배워 ‘반응형 웹프로그래밍’ 일자리까지 얻게 하는 것이 목표다. 취업 실적이 ‘쏠쏠했다’고 한다. 고학년 몇몇에게 들어보라 했는데 결국 바람맞았다. 하고 싶은 거랑 딱 맞지 않고, 방학 내내 수업을 들을 자신이 없다고 한다.

학과에서는 현장실습(인턴십) 모집을 했다. 10군데쯤 되는 현장실습이 가능한 공공기관, 기업, 사회적기업이나 NGO 중 한 군데를 다녀오면 학점을 준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시대에 뭐든 배우고 현장실습이라도 열심히 해서 밥벌이를 한다면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이력서에 쓸 ‘단출한’ 몇 줄이 얼마나 절실한지 나도 취업준비할 때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참여율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의욕 있는 몇몇만 참여한다. 취업 면담 때마다 마주하는 결국 ‘공무원시험’만 선택하게 될 학생들을 생각하면 당장 모조리 모아 강권하고 싶기도 하지만, 스무 살도 넘은 성인에게 그럴 수는 없다. 학생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에 덜컥 취업시킬 자신도 없다. 이 지역 LH(한국토지주택공사) 정도 가는 게 도전해볼 만한 목표일 텐데, 자격증과 현장실습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공기업·공사 채용시험으로 쓰는 NCS(국가직무능력표준) 준비반을 학교에서 열었는데, 누굴 보낼까 고민하는 사이 정원이 마감됐다.

대학을 나와 ‘건실한’ 회사에 쉽게 취업할 수 있었던 시대가 끝난 지는 20년이 넘었다. 대학이 취업 학원이라는 소리를 들은 지도 10년이 넘었다. 몇 년 전, 신임교수들은 SCI, SSCI, KCI 등 지표에 포함되는 연구논문을 쓰느라고 등골이 휜다고 했는데, 이제는 제자들의 취업 역시 학과와 대학의 평가에 연결되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 없게 됐다. 일주일 전 발표된 자율개선대학 선정(박근혜 정권 시절 대학구조개혁 평가의 바뀐 이름) 결과에 많은 대학이 숨죽이고 있었다. 자율개선대학으로 선정되어야 재정 제약과 정원 감축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령 인구가 줄었다. 2020년부터 지금 정원대로 학생을 뽑다간 30% 정도의 대학(주로 지방대)들은 한 명의 학생도 뽑을 수 없게 된다. 유학생을 그만큼 유치하지 않는 이상 신입생 정원을 줄여야 한다. 학과 폐지도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하기에 앞서 저출산사회의 여파에 어찌 대응할지부터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대학교육의 효용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시대다.

퇴임한 선배 교수는 “사회학 이론만 ‘빡세게’ 가르쳐 봐야 우리도 힘들고 학생들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사회학 수업도 ‘응용적’으로 변했다. 많은 수의 강의식 수업들을 프로젝트 수업이나 실습 수업으로 바꿨다. 학생 간 상호작용을 촉진시키기 위해 칠판도 강의실에 여러 개 설치했다. ‘높은 강단’은 ‘눈높이 교육’으로 바뀌고 있다. 능동적으로 사회학이라는 도구상자를 응용해 사회에서 제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키워내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다.

그럼에도 공허하다. 학생들의 기초역량을 채우는 일은 생략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다. 고등학교 이과 수학을 이수했다고 가정한 공과대학 수업이지만, 지방대에서는 고등학교 수학을 다시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기 일쑤다. 그마저 힘들어 그만두는 학생들도 있다. 인문사회계열에서는 단 한 권의 책도 정독해 보지 않은 학생들에게 논리적인 글읽기와 글쓰기 훈련부터 시켜야 하기도 한다. 잠재성이 터진 학생들도 종종 있지만, 헤매는 학생도 적지 않다. ‘배울 수 있는 몸’을 10대에 만들지 못한 학생들에게 그런 습관까지 만드는 건 학생이나 선생이나 모두 고역이다. 취업시장에서 혹여 불이익이라도 받을까 싶어 학점이라도 잘 챙겨서 졸업시킨다 한들 고등교육을 잘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도의 지원과 자격증 몇 개와 운이 모두 따라 취업을 한들 그 일자리는 얼마나 지속 가능한 것일까. 학생들의 부모들만 해도 정년이 사라지고 평생직장이 사라진 가운데 살고 있다. 영세 자영업자도 부지기수다. 고용보장을 정부가 모두 지켜낼 수는 없다. 고용보험을 강화해 실업에 처해도 소득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게 해야 한다. 재취업도 알선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새롭게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정보를 잘 조합할 수 있는 학습의 기초역량, 쉽게 말해 ‘국영수’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1970년대는 ‘특성화 교육’의 시대였다. 당장 현장에서 필요한 노동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특성화 기계공고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1990년대 초반까지 50만명이 넘는 공고 출신들 외에도 회사 직업훈련원이 ‘찍어낸’ 노동자들이 현장을 가득 채웠다. 초창기 기계공고를 들어간 사람들은 정년을 채웠지만, 후배들은 비정규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갖고 있는 특화된 기술의 효용이 떨어진 셈이다. 1980년대 교육개발연구원은 “세분된 기술 습득에 치중하지 말고 일반적 기능의 습득과 응용력을 배양하여 산업의 구조적 고도화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직업교육을 비판했다. 지금도 이런 비판이 유효할 것만 같다. 기술의 진화 속도와 산업의 구성은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뜬다고 코딩이라도 가르쳐 취업시키려는 절박함에 공감하더라도, 고등교육은 자기 머리로 사고하고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깊게 고민하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미국도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기초역량을 강조한다.

‘자기주도학습’의 화신인 명문대에 간 모범생들은 그 문제를 스스로 풀려고 ‘열공’한다지만 나머지들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응원하며 성공만 독려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정책 방향으로는 틀린 것 같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시대에 내실의 차원에서 교육과 고용 정책을 함께 점검해야 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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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탈원전 정책에 따라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는 강원 삼척, 경북 영덕 등에 계획된 신규 원전 4기를 백지화하고 경북 경주에 있는 월성 1호기를 폐쇄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원전 수출 타격’ ‘위험한 탈원전 질주’ 등 자극적 표현으로 이번 결정을 비판하고 있다. 2030년까지 전체 전력생산의 2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정부의 목표 달성도 어렵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들 주장대로 탈원전은 위험하고, 한국 사회의 탈원전 속도는 너무 빠른 것이며, 원전 수출 타격이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위험한 것은 탈원전이 아니라 원전 확대다. 탈원전 속도는 빠른 게 아니라 2080년까지 기다려야 할 정도로 너무 느리다. 또 재생에너지 전력생산 비중 20% 목표는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현재 비중이나 에너지전환 비전에 비춰 보면 소심하기 그지없다. 이미 2016년 기준 OECD 국가의 평균 재생에너지 전력생산 비중은 20%를 초과했다.

탈원전에 소요되는 비용을 전력산업기반기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두고 혈세 운운하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중국·러시아 등 대자본을 보유한 국가들이 주도하는 글로벌 경쟁에 국가의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게 오히려 혈세 낭비 아닐까. 전력산업기반기금은 전기요금의 3.7%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말 그대로 전력산업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마련된 공적자금이다.

이면거래 등을 수반하는 원전 수출의 불투명한 지원에 비하면 전력산업기반기금으로 탈원전 비용을 감당하는 게 훨씬 더 투명하고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에너지전환의 기반을 조성하기 때문에 취지상으로도 적합하다.

재생에너지 산업 발전에 대한 지원은 원전 수출 촉진에 비해 지역경제 활성화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에도 더 기여한다. 이것은 필자의 주관적인 바람이 아니라 현재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에너지전환의 현장에서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돈의 문제’에 앞서 재생에너지 확대에 기반한 에너지전환이 절실한 것은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탈원전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10여년 전에 진행됐어야 한다. 2000년대 초 부안에서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반대 운동이 고조됐을 당시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국정감사 회의록을 살펴보면,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도 “방사성폐기물 처분을 고려하지 않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때 정치인들이 책임 있게 이 문제를 다뤘더라면 사용후핵연료 처분 등 방사성폐기물에 대한 지속 가능한 해결책이 마련될 때까지 신규 원전 건설에 대한 모라토리엄(이행 불능)을 선언했을 것이다.

보수 야당 일각이나 원자력 산업계 및 학계는 건설도 시작하지 않은 신규 원전의 건설 계획 백지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때가 아니다.

지금은 1978년 원전을 운영한 이래 40년 이상 원전의 ‘임시’ 저장소에 보관돼 있어 곧 포화 시점이 다가오는 사용후핵연료 처분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마련을 위해 정치·사회·기술적 역량을 모아야 할 시점이다.

<김수진 고려대 BK21플러스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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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푸른 밤’이 그리운 계절이다. 떠나지는 못하고, 그립기에 그 인문지리를 복기한다. 먼저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남긴 글이 눈에 확 들어온다. 최익현은 세계사, 한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도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 을사늑약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남의 나라 섬 대마도로 끌려가 숨졌다. 최익현은 제주도에 있을 때 한라산에 올라 제주도와 제주의 바다를 굽어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섬은 협소한 외딴섬이지만 큰 바다 속의 변치 않는 기둥과 같은 지형이고, 삼천리 우리나라 물길의 출입문이자 외적을 방어하는 관문이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질 만큼 정확한 표현이다. 제주도는 해저에서 폭발을 거듭하다 기둥처럼 솟은 섬이다. 이 기둥이 이룬 견고한 지형 앞에서 태풍의 사나운 기세도 달려오다가 막히곤 한다. 또한 제주도는 한반도의 물길과 태평양 물길이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해류의 흐름을 보거나 지도에서 한·중·일 사이에 자리한 그 위치를 확인하면 ‘관문’이라는 말이 과연 옳다 싶다. 그러면서도 “협소한 외딴섬”이라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지난 역사를 정직하게 표현한 말일 것이다. 오래도록 제주도는 말, 감귤, 해산물 등 엄청난 물산을 육지에 보냈지만 조선의 조정은 제주에서 물산만 받고 그저 유배지로나 활용했을 뿐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도 정치적 소외는 부인할 수 없다.

최익현에 앞서 18세기 조선 사람 신광수(申光洙·1712~1775)는 ‘잠녀가(潛女歌)’, 곧 해녀의 노래를 읊은 바 있다. 신광수는 특별검사쯤의 벼슬로 제주도를 다녀간 적이 있다. 난생처음 본 제주도를 여러 편의 시에 담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제주 여인의 물질을 이렇게 읊었다.

“탐라의 여자애들 자맥질도 잘해/ 열 살이면 벌써 여울에서 헤엄치네/ 풍습에 혼인 상대로 잠녀를 귀중히 여겨/ 잠녀 둔 부모들은 우리 딸은 먹고살 걱정이 없다고 자랑한다네.”

오늘날에도 제주 여성은 생활력 강하기로 유명한데, 이 시를 봐도 그 강한 생활력의 연원을 알 만하다. 

그때도 제주 여성들은 땅 밟으면 호미 들고, 물에 들어가서는 다래끼 하나 끼고 씩씩하게 생활을 꾸렸다.

“호미 한 자루, 다래끼 하나에 뒤웅박 차고서/ 짧은 잠뱅이에 맨살이 드러나도 부끄러울 게 무어야/ 깊고 푸른 바다 서슴없이 곧장 뛰어드니/ 그 모습이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듯/ 육지 사람들 놀라건만/ 섬 사람들은 깔깔 웃는다.”

그 씩씩하고 활기 넘치는 모습이 육지에서 온 양반 남성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때 물질의 모습이 이랬다.

“푸른 물결 사이로/ 어느새 솟구쳐 올라/ 뒤웅박줄 얼른 끌어당겨/ 뒤웅박에 올라타고 휘파람 길게 불어/ 한 번에 숨 토해내니/ 그 소리 깊고 깊은 수궁까지/ 구슬피 울리겠네.”

수경과 잠수복 없는 것 빼면 해상에서 뒤웅박을 안고 쉬고, 휘파람 소리 나는 특수한 호흡을 하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 대목에 이르니 지금 내가 제주도 해녀의 집에 앉아, 전복과 해삼 등속을 잡아 돌아오는 해녀를 기다리는 기분이 된다. 그러면서도 신광수는 이렇게 씩씩한 노동의 이면을 생각했다.

“자맥질에 능한 여인은 물속 거의 백 척 아래까지 들어간다지만/ 가다 굶주린 고래의 밥이 되는지라.”

물속 백 척 아래라. 왜 그랬을까. 먹고살 만큼만으로 안되는 데에는 하루에도 몇 짐씩이나 팔도에 서울에 전복을 바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국 풍경에 취하고 제주 전복 맛에 취했다가 신광수는 번쩍 정신이 났다.

“잠녀여, 잠녀여!/ 너희 아무리 기꺼이 일한다 해도 나는 슬프구나!/ 어찌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내 뱃속을 채울까/ 두어라! 우리 같은 서생들은 해주산 청어 먹기도 어려워/ 그저 끼니마다 푸성귀면 됐지.”

신광수는 취했다가 멈추었다. 이국정서, 여인, 자맥질, 아득한 수궁의 상상력, 전복의 맛이 다가 아니었다. 사람 상해가며 맛만 따라 갈 수는 없었다. 파란 하늘 아래 하늘만큼 파란 바다에서 건지는 제주의 진미도 진미지만, 문득 나도 신광수 따라 한 번 멈춘다. 그저 먹는 소리만 하기가 다시금 면구하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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