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답신

오해하지는 말고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해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쪽이 보내온 카톡을 보고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그래도 마냥 모른 척할 수만 없어서 이렇게 용기를 내 답문을 보내는 거예요.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사실 저는 오늘 소개팅을 나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제 처지에 지금 소개팅이라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 거죠. 미향이가 지난주부터 계속 자기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나가달라고 부탁 문자를 보내왔는데, 그때마다 거절했어요. 미향이 얘가 날 앞으로 얼마나 보겠다고 이러는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아까 낮에 제가 교육행정직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사실 그건 작년 여름까지만 맞는 말이었어요. 미향이도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던 거죠. 저는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시험 문제집 한 번 펼쳐보지 않은 상태예요. 뭐, 포기 상태인 거죠. 그쪽도 공무원 준비한다니까 잘 아실 테죠. 시험 한두 번 보고 나면 스스로 답이 나오잖아요? 이건 마음잡고 몇 년만 노력하면 되겠다, 운만 좋으면 다음 시험에 붙을 수도 있겠다, 괜한 자신감이나 아쉬움 같은 것이 생기고…. 한데, 전 시험을 볼 때마다 더 주눅이 들더라고요. 내가 안되는 길을 억지로, 억지로, 가고 있구나, 불가능한 일들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구나…. 그런 마음을 꾹꾹 숨긴 채 삼 년을 더 붙잡고 있었는데…. 작년 여름엔 그냥 스르르, 언제 손에서 빠진지 알 수 없는 반지처럼, 어느 순간 놓고 말았어요. 그래 봤자, 저는 학원에서 공부한 것도 아니고, 혼자 자취방에서 인강으로만 준비한 거라서, 삶이 그리 달라지는 것도 없더라고요. 낮에는 변함없이 커피전문점에서 알바를 했고, 밤에도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어요. 인강만 안 들었을 뿐, 계속 컴퓨터로 시시한 연예인 소식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앉아 있었죠. 그 생활을 일 년 가까이 한 거예요. 잠드는 시간도 예전 인강을 듣고 컴퓨터를 끄는 그 시간과 똑같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변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으면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지낸 거죠. 그러니, 제가 무슨 소개팅에 나갈 마음 같은 게 있었겠어요? 그건 그저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건네는 시답지 않은 농담 같은 말이었을 뿐이죠.

한데, 사흘 전에 문득 생각이 변했어요. 이건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할게요. 그날 밤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무슨 음식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계속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두 시간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한데도 제가 의자에서 일어나질 못하더라고요. 제가 사는 곳은 원룸이어서 화장실까지는 불과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머리로는 분명 화장실을 가고, 손을 씻고, 다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사실 계속 가지 않은 채 요의를 참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결국 속옷에 찔끔 지리기까지 했어요…. 그때야 문득 두려운 마음 같은 것이 들더라고요. 내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미향이한테 문자를 보내 소개팅에 나가겠다고 한 거예요. 무언가라도 당장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저도 소개팅은 처음이고, 물론 그쪽도 처음이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만나자마자 짜장면을 먹으러 간 건 너무 하셨어요. 저는 그래도 가볍게 차를 한잔 마시고, 점심시간이었으니까 그런 다음에 파스타 같은 걸 먹으러 가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들었던 소개팅의 기본 코스였거든요. 한데, 그쪽에서 근처에 기가 막힌 짜장면집이 있다고, 그쪽으로 가자고 했을 때부터, 조금 기분이 상했던 게 사실이에요. 거기다가 우리 그 집 앞에서 대기를 삼십 분이나 했잖아요? 소개팅을 나왔는데, 짜장면집 앞에서,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나란히 서서 삼십 분이나 기다린다는 게, 그게 저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때부터 그쪽이 더 싫어진 것도 맞고요. 그러다 보니까 짜장면집에 들어가서도 그쪽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겠더라고요. 입맛도 없고, 그쪽이 후루룩 후루룩 소리 내서 먹는 모습도 싫고…. 어쩐지 그 모든 게 제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짜장면을 먹다가 말고 일부러 화장실도 다녀온 건데… 돌아오다 보니까 그쪽이… 그쪽이 제 짜장면을 조금 덜어서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안 본 척했지만 제가 그걸 봤어요…. 그걸 보니까… 그냥 모든 게 다 서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커피라도 한잔하자는 그쪽의 말을 거절한 거예요.

솔직하게 말하는 제 마음을 이해해주세요. 그쪽도 모솔이고, 처음이라서 그랬겠죠. 그쪽도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하다 보니까 누군가를 만나고 대하는 게 어색해서 그랬겠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린 다 그 정도로 살고 있고, 버티고 있는 거겠죠. 미안해요. 내 마음은 지금 딱 그 정도인 거 같아요. 그쪽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겨우 그 정도가 지금의 내가 누굴 이해할 수 있는 최대치인 거 같아요. 이 정도라도 된 것이, 그래서 이렇게 답문을 보내는 것이, 저로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잘 지내시고, 공부도 열심히 하시길 바랄게요.

 

2. 재답신

죄송합니다. 제가 소개팅이 처음이라서…. 저도 친구 대신 나간 자리였거든요. 공무원 시험은 원래 소개팅 나가기로 한 친구가 준비하는 거고, 저는 그냥 알바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지금은 일을 쉬고 있는데… 그래서 나갔는데… 죄송합니다. 짜장면은… 그쪽이 안 드셔서 불까 봐 그만… 죄송합니다. 저도 그쪽이 힘내시길 바랄게요.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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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몇 년간 미세먼지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면서 환경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실감했다. 나는 미세먼지의 해결이 곧 기후변화 문제의 해결이며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노력이 미세먼지 문제 해결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우리에게 수많은 불편함과 건강 피해, 경제적 손실을 야기하는 미세먼지는 중국 등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것도 있지만, 국내 발전소 및 운송수단 등에 쓰이는 화석연료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 또한 주요 원인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아직도 석탄발전의 과감한 축소와 같은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 중에는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부담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전기요금 인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달 평균 7일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된다. 사람들이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된 날에 개당 2000~3000원짜리 일회용 미세먼지 마스크를 1개 구입한다고 했을 때, 월평균 1만4000~2만1000원을 지출하게 된다. 4인 가구를 기준으로 온 가족이 미세먼지 마스크를 구입한다고 하면 가구당 5만~8만원대를 쓰는 것이다. 여기에 실내 공기청정기 구입 비용까지 더한다면 공기청정기 사용 연한을 10년으로 가정했을 때 가구당 매달 적게는 1만원 이상을 추가적으로 지출하고 있는 것이 된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가구당 월평균 전기요금은 6만5000원이다. 미세먼지 마스크 구입 비용과 공기청정기 값을 합하면 가구당 전기요금에 버금가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차라리 석탄발전을 줄이고 천연가스와 재생가능에너지 사용을 대폭 늘려 전기요금이 10~20% 오르더라도 마스크와 공기청정기를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으로도 유리하다. 우리는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대책으로 예상되는 전기요금 인상액보다 훨씬 큰 비용을 이미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온실가스와 미세먼지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는 전기자동차와 같은 친환경자동차 기술의 개발과 보급 확산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에서 수송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을 기준으로 발전부문(37%) 다음으로 많은 13%다.

따라서 자가용 차량 운행을 억제하고 대중교통 이용을 활성화하고 전기자동차와 같은 친환경자동차 보급을 확대하면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미세먼지로 인한 피해 또한 줄일 수 있다.

세계에너지기구는 지구 온도 상승을 2도 이내로 억제하는 전 세계적인 노력이 가시화되는 경우, 2040년 기준으로 전 세계 자동차 20억대 중 9억대가 전기자동차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선도해 가지 못하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과 그에 연관된 산업은 쇠락할 수밖에 없다. 즉 화석연료 퇴출을 통해 미세먼지와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정책이 곧 우리나라 경제를 지속적인 성장궤도에 있게 하는 대안인 것이다.

온실가스 감축과 미세먼지 저감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은 문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각 이슈에 대한 관심도와 정치적 쟁점화의 정도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기후변화 억제를 위한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는 그리 높지 못하다. 이는 미세먼지가 현실의 문제로 내가 경험하는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반면, 기후변화의 문제는 미래의 문제로 나에게는 그리 큰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미세먼지 문제와 기후변화 문제를 분리하여 생각해 온 우리는 그동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의사표현과 행동을 해왔던 것이다.

지난 5월20일 광화문에서 그린피스, 세계자연기금, 지구의벗 등 전 세계적으로 적극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시민과 함께 2018 기후행진 행사를 했다. 지구와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지구의 온도 상승폭을 1.5도 이내로 억제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우리나라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우리 시민은 이제 적극적인 미세먼지와 온실가스 감축 정책이 진정으로 나, 우리 가족 그리고 우리나라를 위한 것임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유승직 숙명여대 기후환경융합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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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가 수소전기차 ‘과잉광고’를 연일 신문지면에 쏟아내고 있다. 미세먼지를 99.9% 걸러내는 공기청정기이자 발전기로서 “우리 아이들의 맑은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것이 광고의 핵심 내용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서는 이런 광고에 설득당했는지 한 대에 7000만원 가까운 구입비용 중 4000만원가량을 지원한다고 한다. 3000만원에 새 차 한 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인데, 구입 신청자가 넘쳐나서 이미 지원금이 소진되었다는 말이 들린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가 만든 물건을 광고하는 것은 조금 ‘과장’이 들어가 있다고 해도 크게 탓할 것이 못된다. 하지만 미세먼지를 ‘완벽’에 가깝게 제거하는지, 정말 “우리 아이들의 맑은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지 검증해보지도 않고 수천만원을 국민 세금으로 내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자동차는 물만 배출한다고 해도 도로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상당량의 미세먼지를 만들어낸다. 달리는 동안 도로면에 가라앉아 있던 먼지를 휘저어 날려서 미세먼지의 농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타이어와 도로의 마찰을 통해서도 많은 양의 미세먼지를 내놓는다. 작년 독일 남서부에서 수행된 미세먼지 측정값 분석에 따르면 공기 1㎥에 들어 있는 미세먼지 중 1.9㎍이 자동차 매연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것의 여섯 배에 달하는 11.9㎍은 자동차의 주행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었다. 모든 자동차를 미세먼지 99.9% 제거능력이 있는 수소전기차나 매연이 없는 전기차로 바꾸어도 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의 숫자가 크게 감소하지 않는 한 미세먼지 농도가 줄어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수소전기차의 ‘과잉광고’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연료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이다. 수소전기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수소충전소가 적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엉뚱하게, 그러니 중앙정부와 지자체에서 수소충전소를 많이 보급해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간다. 충전소 한 개 건설하는 데 수십억원이 들어가는데, 거기에도 세금을 쏟아부으라는 말이다. 연료로 사용되는 수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수소는 정유공장의 부산물로 얻어지기도 하지만 원리적으로는 천연가스나 물을 분해해서 얻는다. 이때 모두 에너지가 투입되고, 천연가스의 경우 이산화탄소가 생성된다. 가격은 천연가스보다 높고, 전기분해를 이용할 경우 전기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이 전기가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생산되는 것이면 미세먼지도 많이 발생한다.

수소전기차는 전 세계 자동차회사에서 20여년 전인 1990년대부터 개발하던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이미 13년 전에 수소전기차를 선보였고, 대통령은 그걸 타고 청와대를 한 바퀴 돌았다. 차에서 내린 후 그는 “명실공히 수소전지 시대로 갑니다. 제 임기 동안 적극적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엄청난 연구개발비가 수소 연구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수소전기차는 그 후 십수년간  잠잠하다가 이제야 시판이 시작되었다. 그사이 기존 자동차회사에서 거들떠보지 않던 전기차는 승승장구하여 수백만대가 보급되었다.

수소전기차가 “우리 아이들의 맑은 미래”를 위해 전망이 밝다면 내가 낸 세금이 지원금으로 들어가도 괜찮다. 그러나 순수 전기차와 비교할 때 수소전기차는 전망이 좋지 않다. 경제성, 연료조달, 미세먼지 어떤 면을 따져봐도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수소전기차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벤츠에서 수소전기차는 ‘계륵’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그렇다고 투입한 돈이 있으니 없애지도 못한다. 수소전기차에 매달리다보니 그동안 획기적인 전기차도 개발하지 못했다. 현대자동차는 벤츠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수소전기차에 매달린다. 결정은 자유지만, 거기에 내가 낸 세금이 쓰이는 것은 반대한다.

<이필렬 방송대 교수 문화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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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비핵화의 끝을 보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왜 국가들은 쉽게 협력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무작위로 죽이는 전쟁을 준비하려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전쟁보다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유약한 겁쟁이라고 비난한다. 죄 없는 어린아이, 부녀자들이 끔찍하게 죽어나가는데 단지 적국이라는 이유로, 혹은 독재자가 있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폭격이 자행될 때 많은 사람들이 박수치고 환호하기도 한다. 인간들이 어쩌다 이렇게 잔인해진 것일까? 다른 종에 대한 대량살상을 통해 먹이사슬의 최고 위치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도 언젠가는 대량살상을 당할지 모른다는 진화론적 불안감 때문일까? 내가 살기 위한 정당방위인가? 모르는 사람들을 막 죽이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방법들은 무수히 많을 터인데, 왜 우리는 전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인간의 분쟁과 전쟁을 설명하는 학설은 무수히 많지만 일상적인 전쟁의 공포를 설명하는 이른바 주류 국제정치 이론을 우리는 ‘현실주의’라고 불러왔다. 그 이론은 이렇게 시작한다. 본시 이기적인 인간은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자연상태, 즉 무정부상태에 놓여 있으면 나를 지켜주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으니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기적인 타인을 의혹의 눈으로 보게 되고 불신이 커지고, 그러다보니 호전적이 되어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이거나 전투를 준비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개된다. 이 자연상태 논리를 국가 간에 적용한 것이 현실주의인데, 국제정치는 국가 위에서 국가를 지켜주는 세계정부가 존재하지 않으니 이런 자연상태와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본시 이기적인 국가는 불안하고 불신하고, 결국 호전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분들이 짐작했겠지만 이 논리는 17세기 영국의 철학가 토머스 홉스의 자연상태론을 국제정치에 차용한 것인데, 이 논리가 거의 한 세기 가깝게 근대 국제정치학계의 주류 자리를 차지해 왔다. 이 현실주의 이론에 매료된 수많은 학자와 정치인들, 그리고 심지어 일반인들까지 국제정치는 국가 간 투쟁의 일상이며, 그래서 협력보다는 전쟁을 준비해야 하고, 힘을 쌓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키워 왔다. 미국과 같은 힘센 국가와 동맹을 맺고 있어야 이 투쟁의 일상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살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이 현실주의 이론은 사실 역사의 특정한 시기와 공간의 일을 항상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로 일반화한 매우 위험한 가공물이다. 예를 들어 홉스의 자연상태로 다시 돌아가 보자.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유약한 인간으로서 원시적인 자연상태에 놓여 있으면 실제로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인간이 식인종이 아닌 이상 다른 인간을 죽일 생각을 하기 전에 어떻게 주위의 인간과 협력해서 먹을 것을 찾고, 맹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나아가서 협력해서 농사를 지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즉 투쟁 이전에 협력이 먼저 오게 된다. 다만 어떤 집단이 협력을 통해 뭔가 풍족하게 소유하게 되면 그때부터 이걸 지키거나 약탈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투쟁은 빼앗을 것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고, 빼앗을 것은 협력이 있어야 애초에 생겨난다. 그래서 현실주의는 거꾸로 자연상태가 아니라 사회상태를 가정한 것이고 약탈의 일상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만약 서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분업을 해서 교환을 하고, 그 교환을 체계적으로 잘 관리하면 장기적으로 풍요로운 공생이 보장된다는 것을 우리가 배우게 되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실제로 그 상황은 봉건제가 타파된 후 근대국가 안에서는 이미 실현되었고, 이 교환의 체계가 근대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국가 간에 형성된 국제질서가 1945년 이후 점차 공고화된 이른바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것이다.

이제 국가들은 전쟁보다는 서로 교환의 체계를 잘 보호하고, 보완, 발전시켜 나가는 일에 더 많은 공을 들이게 된다. 전형적인 예가 유럽연합이다. 이들은 국방비를 올려서 강한 국가가 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서로 교환의 체계를 촘촘히 하는 통합의 길을 걸어왔다. 유럽연합만큼 촘촘하지는 않지만 다른 ‘정상국가’들도 서로 의존하고 공생하면서 교환의 체계를 협력적으로 발전시켜 온 것이 오늘날의 국제질서이다. 결국 북한 비핵화의 종착역은 북한이 이러한 자유주의 국제질서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도조절이 필요하겠지만 북한이 이 교환의 체계를 안팎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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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얼이 몸에 나쁘지야 않겠지만 정성스레 준비한 아침 밥상만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바쁜 아침, 아이들 깨우고 도시락을 준비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시리얼 먹으란 말을 하게 됩니다. 부모 노릇을 하면서 이렇게 타협하는 일이 흔합니다. 우는 애에게 TV를 틀어주고 심심해하는 아이에게 전화를 쥐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집안에서는 현실과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즉 당위의 마찰이 일상적으로 벌어지죠.

늘 현실에만 눌러앉아 있지는 않습니다. 시리얼 준 다음날이면 괜히 미안해 시간을 내 달걀이라도 부치죠. 당위를 향하는 마음은 사랑과 부모의 의무감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개인 노력만으로는 모자랍니다. 파트너의 질책이나 주변의 눈초리도 도움이 되죠. 현실과 당위의 마찰이 너무 심해지면 국가가 간섭하기도 합니다. 아동복지법은 한 예입니다.집안 현실과 당위의 마찰은 쉽지 않지만 사회의 그것에 비하면 소소해 보입니다. 특히 법질서의 현실과 그 당위의 괴리는 너무 크고 심각해 보입니다. 나쁜 짓을 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재산과 권력의 유무를 떠나 똑같이 처벌받아야 하죠. 그 당위는 법 집행의 핵심입니다. 법 집행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순간, 사람들은 경찰·검찰·법원 등 법 집행 기관과 법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내가 잘못해서 처벌받는 게 아니고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자연히 돈과 힘에서 정의를 찾을 수밖에 없고 결국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겁니다.

지금 한국이 그런 정글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 정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재벌 총수에 대한 처벌은 한없이 관대합니다. 형을 선고받아도 실형을 살지도 않고 집행유예로 끝나기 일쑤죠. 사면 복권도 공식처럼 따라다닙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사면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돈 백만원, 천만원으로도 감옥에 가지만 이들은 수십억원의 비자금, 수백억원의 배임·횡령 등에도 끄떡없습니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감옥에서 걸어나왔습니다.

특권을 몸에 달고 태어난 이들은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언행을 보였습니다. 경주장 셔터를 내리고 4억원이 넘는 고성능 차를 혼자 모는가 하면, 깡패처럼 보복 폭행을 하기도 합니다. 열 받는다고 비행기를 돌리는가 하면,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건 집어 던지기도 합니다.국회의원들도 몸에 특권이 문신처럼 그려져 있는 듯합니다. 자유한국당은 6월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죠. 강원랜드 취업청탁 의혹을 받는 권성동 의원의 체포를 막기 위한 ‘방탄국회’일 가능성이 큽니다. 국회 안에서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특권을 주고받는데 여야가 따로 있을 리가요. 바로 얼마 전 뇌물수수·배임 등 혐의를 받는 홍문종 의원과 강원랜드 채용비리에 연루된 염동열 의원 체포 동의안도 여당 의원들 이탈에 부결됐었죠. 이런 뉴스를 삼시 세끼 챙기듯 보는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믿었습니다. 현실은 어려워도, 가끔 실수해도, 가끔 잘못해도, 정의의 여신은 당위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요. 그 칼날이 무뎌지고, 저울이 기울어지고, 눈가리개가 헐렁해 보여도 우리는 믿었죠.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알게 됐죠. 그 여신은 일상을 다투며 살아가는 부모보다 못하다는 것을요. 당위를 위해 애쓰다 실수하고 가끔 현실에 타협하는 범부만도 못하다는 것을요. 놀랍게도 당위가 아닌 사익을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뒷거래하고, 아첨하며, 겁박하는 여신을 보았습니다. 그의 뒷발질에 정의는 땅에 떨어지고 힘없는 이들은 절규했습니다. 그 여신의 칼질에 직장을 잃고 목숨마저 잃었습니다.

이런 마당에 그들은 또 법복을 입고 근엄한 얼굴로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울 겁니다. 우리는 압니다. 다행히 조사가 이루어지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더라도 당위가 아득하게 보이는 정글 언저리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을요. 재벌 총수는 수십억원을 횡령하고 초울트라슈퍼 갑질을 계속하고, 권력가들은 방탄국회 노래를 흥얼거릴 것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들어대야 할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 명단이 늘기만 해 마음이 바빠지는 초여름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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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가 시작부터 네거티브전으로 격화하고 있다. 경기지사 선거는 ‘여배우’ ‘형수 욕설 논란’ ‘혜경궁 김씨’ 같은 후보의 사생활 문제 등을 놓고 난타전을 벌이며 광역단체장 선거 가운데 최악의 전장이 되고 있다. 제주지사 선거는 더불어민주당 문대림 후보와 현직 지사인 무소속 원희룡 후보 간 네거티브 공방이 격해지면서 상호 고발전으로 번졌다. 인천에선 고교 1년 선후배 간인 유정복 시장과 박남춘 후보 간에 말꼬리 잡기식 공격을 벌이고 있다. 국가 백년대계를 좌우할 교육현장을 책임지는 교육감 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낯 뜨거운 비방이 판을 친다.

이번 지방선거는 유권자들의 무관심 속에 선거 분위기가 좀체 떠오르지 않는 게 유별나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등 대형 이슈들만 부각되며 지역민과 직결된 정책들은 잘 보이질 않는다. 인물도, 정책도 알기 힘든 ‘깜깜이 선거’란 말도 나온다. 그러다보니 후보들은 유권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네거티브전에 공을 들이고, 혼탁한 진흙탕싸움은 유권자의 무관심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앞으로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갖가지 의혹 제기와 폭로, 가짜뉴스 등은 더 기승을 부렸으면 부렸지,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이러다가는 역대 최악의 무관심 속에 지방도, 정책도 없이 비방전만 난무한 지방선거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선거에서 후보의 도덕성과 자질에 대한 엄격한 검증은 당연하다. 하지만 검증을 핑계로 근거 없는 의혹 부풀리기나 가짜뉴스, 상대 후보를 음해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정책대결이 실종된 비방은 정치에 대한 혐오와 불신, 냉소만 키울 뿐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온라인상 ‘비방·흑색선전’으로 적발된 사례가 벌써부터 2014년 지방선거보다 3배가량 늘었다고 한다. 큰일이다. 이대로라면 선거가 끝나도 경쟁자 간 회복하기 어려운 앙금을 남기게 되고, 지역의 미래는 암울하다.

앞으로 4년간 지방살림을 책임질 지역일꾼을 뽑는 선거에서는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공약과 정책을 통해 승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후보는 지역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비전을 소상히 밝히는 게 우선이다. 후보 스스로가 안된다면, 유권자들이 변화를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정책은 뒷전에 두고 네거티브만 일삼는 후보는 엄중히 심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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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이 31일 ‘양승태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연루 인사들에 대한 고발·수사의뢰 여부는 법원 안팎 의견을 종합한 뒤 최종 결정하겠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이 공식 사과한 것은 당연한 일이나,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조치 방침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것은 유감스럽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 보고서가 나온 지 이미 엿새가 지났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사법농단 앞에서 시민의 분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언제까지 의견 수렴만 할 것인가.

김명수 대법원장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 대법원장은 담화문에서 “참혹한 조사 결과로 심한 충격과 실망감을 느끼셨을 국민 여러분께, 사법부를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고 밝혔다. 이어 “국민들의 질책을 사법부 혁신의 새로운 계기로 삼고,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징계를 신속히 진행할 것이며, 조사자료 중 의혹 해소를 위해 필요한 부분의 공개도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최종 판단을 담당하는 대법원이 형사조치를 하는 것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며 “사법발전위원회, 전국법원장간담회, 전국법관대표회의 및 각계 의견을 종합해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상 조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고자 한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은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의 조직을 인적·물적으로 분리하고 법원행정처 상근 법관들을 사법행정 전문인력으로 대체하는 등의 제도적 쇄신 방안도 제시했다.

담화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법원의 재판에는 누구도 부정한 방법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최소한의 믿음을 얻지 못한다면, 사법부는 더 이상 존립의 근거가 없고 미래도 없다. 사법부 구성원 모두와 함께 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 지금 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김 대법원장이 할 일은 양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의혹에 연루된 전·현직 법관들을 고발하거나 수사의뢰하는 것이다. 법원행정처를 대법원 청사 외부로 이전한다는 약속 정도로 시민의 충격과 분노를 달랠 수는 없다. 관련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유용하고 확실한 재발방지책이다. 심판하던 이들이 심판받는 처지가 될 때에야 연루 인사들은 물론 모든 법관들이 법의 준엄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심판대에 세우는 주권자를 진정으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대법원장의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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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31일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1분기 1분위 소득이 많이 감소한 것은 아픈 대목이지만 최저임금 증가 탓으로 돌리는 진단은 성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통계를 보면 고용근로자의 전반적인 근로소득이 늘었다”며 “이는 최저임금 증가, 소득주도성장의 긍정적 효과”라고 강조했다. 한편으로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혁신성장에 더 분발해 달라는 주문도 곁들였다. 일련의 발언은 이른바 J노믹스의 지속 추진과 이를 위한 재정의 역할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 해도 최근 경제정책을 놓고 야당과 재계의 비판, 그 한편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부와 청와대 참모진, 자문그룹 간 엇박자를 감안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최근 정부는 정책 혼선을 빚었다. 일자리 감소 원인을 놓고 “경험이나 직관상 최저임금 인상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는 김동연 부총리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감소는 없다”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간 갈등이 대표적이다. 문 대통령의 교통정리로 혼선은 일단락되겠지만 고령자 소득감소 문제 등은 연구 결과를 보아가며 별도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와 별도로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은 최저임금 인상 속도에 대해 “(2020년까지 1만원) 목표 연도를 신축적으로 생각하면 좋겠다”는 김 부총리를 겨냥해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라며 비판했다. 지난 28일의 가계동향 점검회의 뒤 나온 서면 브리핑에서 “앞으로는 장 실장이 주도해 경제 현안을 토론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는 대목을 놓고는 장 실장과 김 부총리 간 경제 컨트롤타워 논쟁이 일면서 알력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정책당국자들 사이의 시각이나 견해 차이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하는 데도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정책 수립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일각의 우려처럼 국정주도세력의 ‘김 부총리 패싱’이라면 더욱 옳지 않다. 의견이 다르다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이런 엇박자는 국정에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 정책 신뢰도만 떨어뜨린다. 더구나 지금 경제는 성장률과 수출 호조에도 불구하고 생산, 투자가 낮아지고, 미·중 무역전쟁, 신흥국 외환시장 불안 등으로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일자리, 저성장과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등 구조적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전환기에 서 있다. 정책은 구조적 문제 해결에 맞춰져야 하고, 시행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은 면밀한 점검을 통해 해소하면서 가야 한다. 상대방을 탓하기에 앞서 머리를 맞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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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일이었다.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는 노르웨이의 서남부 해안도시 베르겐에서 수도 오슬로로 가는 기차 맨 앞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러곤 무려 7시간 동안이나 기차가 보여주는 창밖의 풍경을 담아 아무 편집 없이 ‘베르겐 기차 여행(Bergen Line)’이란 제목으로 내보냈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눈 덮인 풍경만 무료하게 계속 나오는 방송이었다. 그러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갈 때면 화면이 아예 깜깜했고 열차가 멈추었을 때는 그대로 정지 화면뿐이었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시청률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 무료하기 짝이 없는 프로그램을 ‘슬로 TV’라 명명하며 너무나 좋아했다. 실제로 시청률이 15%나 나왔다. 그러한 인기에 힘입어 거대한 크루즈 배가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을 항해하는 장면을 장장 134시간 동안 찍어서 내보낼 만큼 배포들이 커졌고.

tvN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에서 소지섭이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를 읽고 있는 모습.

물론 전 세계가 놀랐다. ‘시끄러운 바보상자’라고만 생각했던 TV가 그렇게 모험적으로 무료하고, 용기 있게 명상적이며, 또한 역동적으로 예술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도나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단히 부러웠다. 그렇게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고요하게 무료한’ 슬로 TV 방송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또 기꺼이 시청자로서 일상의 공기인 듯 그것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노르웨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화적인 성숙도와 풍토, 혹은 시민 정서 같은 것들이.

그런 면에서 나는 나영석 PD가 ‘심심한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한 tvN의 새로운 ‘예능 다큐’ <숲속의 작은 집>이 잘되길 바랐다. 전기와 수도, 가스마저 제한적인 ‘숲속의 작은 집’에서 소지섭과 박신혜가 각각의 실험자가 되어 ‘미니멀 라이프’를 체험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예능’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다큐’에 가까운 프로그램이라니, 나영석다운 발상이다. 심지어 나영석은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라는 부제까지 달아놓고 ‘관계’라는 예능의 가장 재미난 핵심 요소를 의도적으로 삭제해 버린 채 한 개인의 숲속 고립 생활에 집중한다.

그 덕에 모든 게 저절로 단순해진다. 박신혜나 소지섭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느라 식재료를 다듬거나 장작을 지피는 소소한 과정 하나하나에 모두 집중하게 되고 고즈넉한 제주의 풍광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 소리, 자연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시청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제 아무리 나영석이고 ‘시청률 안 나와도 되는 프로그램’이어서 신경 안 쓴다지만 과연 그럴까? 4월6일 3%대로 출발한 시청률이 4월 말 2%대로 떨어졌다가 다시 5월 말 1%대로 떨어진 데에 혹시 다음과 같은 외부 요인이 작용한 건 아닐까?

1. <숲속의 작은 집>은 야채 자르는 소리,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 보글보글 음식 익는 소리, 삭 비운 밥그릇 소리,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 빗소리 등에 귀를 기울인다. 박신혜의 말대로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을 듣는 듯한 프로그램. 하지만 4월27일 전 세계는 배석자 없이 진행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도보다리 산책 모습을 생중계로 보며 두 정상의 말소리가 배제된 채 새소리와 바람 소리 등의 현장음만 담긴 ‘세기의 ASMR 영상’ 그 절정을 경험해 버렸다. 절정을 경험하니 나머지는 ‘이류’ 같고 ‘아류’ 같다. ‘숲속의 작은 집’ ASMR도 당연히 이전만큼 신선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물론이고.

2. 자연친화적인 자발적 고립 상태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극장에서 본 지 얼마 안됐다. 한국판은 물론 일본판마저 보고 나서 <숲속의 작은 집>을 보면 확실히 뭔가 덜 무르익은 느낌. 영화와 다른 예능의 한계가 확실히 느껴지기도 하고.

3. 혼자가 편하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혼밥, 혼술, 나홀로여행 등이 유행했지만 사람들은 원래 태생적으로 홀로 고립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버지니아 대학의 티머시 윌슨 연구팀은 2014년<사이언스>를 통해 사람들은 오랜 시간 홀로 생각에 빠질 바에야 차라리 전기충격을 택한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4. 칼 융에 따르면 고독은 ‘중년의 임무’다. 일과 가정 꾸리기로 나를 잃었던 중년들이 “새로운 중심이 ‘자기’가 될 타이밍, 자기로 살아가는 평화, 변화를 통한 치유”를 위해 나이 들수록 고독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얘기.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 소지섭과 박신혜가 너무 젊었는지도 모른다.

5. 자발적 고립이든 고독이든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 듯 시끄러운 세상을 향해 조용히 방문을 닫는 거다. 예컨대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라면 대박 쳤을 테마. 그런데 지금은 도도한 시대의 흐름이 그런 고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은 다 함께 평화와 상생을 꿈꾸며 다 함께 연결되고 싶은 때라 나는 오늘도 열심히 신문을 읽고 팟캐스트를 듣고 유튜브를 뒤적인다. 그런 시대를 산다는 것에 환희를 느끼며.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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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친형 로이 디즈니의 투자를 밑천으로 다시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든 월트 디즈니는 당시로서는 최신기술인 ‘토키’(talky·유성)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를 상영한다. 자신이 성장했던 미시시피강의 증기선을 아이디어로 뱃사람 ‘미키마우스’와 그의 여자친구 ‘미니마우스’를 처음으로 등장시켰던 작품이다. 성우비용조차 아끼기 위해 20대였던 자신의 목소리로 미키마우스의 허밍과 노래, 대사 등을 녹음했고, 제작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키마우스의 몸을 선으로 약화시켜 그린 프로젝트였다.

월트 디즈니는 이미 <토끼 오스왈드>라는 단편시리즈로 신생 제작사치고는 좋은 시작을 보여주었으나, 미국 전역의 배급을 대행한 대형 영화사와의 계약실수로 작품과 캐릭터 저작권을 모두 양도할 수밖에 없는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철저한 저작권관리를 다짐하며 시작한 프로젝트가 <증기선 윌리>였다. 당시 미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던 동물인 쥐를 역설적으로 귀엽게 디자인하고, 이름도 처음엔 <몰티모 마우스>였던 것을 쉽게 발음되고 기억되는 단어로 조정하여 <미키마우스>로 수정하며, 이후 초기 월트디즈니사의 중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모든 주인공을 미키마우스에 집중하게 된다. 미키마우스가 주인공이 된 일명 ‘MM시리즈’는 미국뿐만 아니라 나치즘과 파시즘에 숨죽이던 유럽의 어린이들에게도 기쁨과 희망의 상징이 되었으며,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를 모병하는 포스터의 모델로까지 등장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미키마우스는 아메리칸드림과 팍스아메리카나의 상징으로 떠올랐으며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상징하는 강력한 브랜드가 되었다.

1966년 거의 국민장 규모로 전 미국인의 애도 속에 진행된 월트 디즈니의 장례 이후, 회사캐릭터로서 막대한 수익을 보장하던 미키마우스는 당시 저작권법 기준(출시시점부터 56년간 저작권보호)으로 1984년에 저작권이 소멸될 상황이었다. 1976년 미국의회는 이와 같은 상황의 문제의식을 직시하고, 저작권보호 제도를 재검토하여 미키마우스의 저작권을 2003년까지 연장한다. 미국의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1998년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법안인 일명 ‘소니 보노법(Copyright Term Extension Act)’을 제정, 저작권보호기간을 저자 사후 70년으로 연장하며, 법인저자의 경우 발행 후 95년 또는 제작 후 120년 중 짧은 사례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해 미키마우스의 저작권을 2023년까지 보호받을 수 있게 조치했다. 아마도 2020년쯤이 되면 미국의회의 또 다른 법안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하게 만드는 역사의 기록들이다.

<개구쟁이 스머프>도 탄생 60주년을 맞았다. ‘스머프’의 원작자는 벨기에 출신 만화가 피에르 컬리포드(필명 ‘페요(Peyo)’)인데, 실제 연재만화 ‘요한과 피위’ 시리즈에 잠시 등장했던 조연 캐릭터였다. 이후 여러 가지 유사한 캐릭터로 개발 분화되면서 집단화되었고, 인기에 힘입어 단독 시리즈로 제작된다. 악당 마법사 가가멜의 나쁜 요술과 이에 대응하는 마을의 지도자 파파 스머프의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리더십, 똘똘이 스머프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지적인 고뇌의 가벼운 개그가 인종과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어린이들에게 함께 사는 세상을 보여준 작품이다. 실제 국내에 수입될 당시, 한 국가기관으로부터 공산주의를 어린이들에게 교육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의견이 강력하게 제기되어 수입이 지체되었다가 미국대사관의 입김으로 허가되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아직까지 전설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세대를 뛰어넘는 장수캐릭터는 국가의 문화자산으로 다양한 캐릭터 비즈니스의 자원이 되고 있으며 국가브랜드 및 국격을 재생산하는 젊고 긍정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1조원 이상의 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키덜트산업의 신사업까지 고려한다면 장수캐릭터의 관리와 끊임없는 스토리라인의 재생산은 더욱 필수적이다. 어린이들의 대표캐릭터였던 ‘아기공룡 둘리’가 대리운전 브랜드로 사용되고, 동남아시아에서 인기있는 ‘빼꼼’이 중국 캐릭터가 되어 보기도 힘들어지는 상황이 재연되지 않도록 국산 캐릭터의 중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보호와 육성이 절실하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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