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요즘처럼 일자리를 갈구한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진실, 즉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의 생존이 노동력의 판매에 달려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4차 산업혁명’이 구원자가 될 것 같지도 않다. 인공지능은 천재 바둑기사의 재능조차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던가. 집에서 보면 참으로 신기한데 직장에서 보면 너무나 두렵다.

어떻든 지금은 모두가 일자리를 외치는 중이다. ‘일중독’이라는 말조차 사치로 들릴 정도로 일자리가 절박하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파산에 직면했던 한국지엠에 8000억원을 투입하면서 이를 ‘남는 장사’라고 했다. 수익을 올려서가 아니라 일자리를 지켰다는 뜻에서다. 이제는 기업가가 ‘파산’이라는 말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협상의 무기로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업이 일자리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기업을 보장하는 꼴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들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의 일자리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 걸까. 절박한 상황에 무슨 한가한 물음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막대한 돈을 들여 우리가 지키고 만들고 뛰어드는 일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생각해보았으면 싶다. 당장에야 수십만명의 생존이 달린 자동차 공장의 폐쇄를 막아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 세상에 자동차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최근에 펴낸 책 <Bullshit Jobs>에서 일자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100년의 통계를 보면 자동화의 여파로 농업과 제조업 등의 생산직은 크게 줄었다. 반면 전문직, 관리직, 판매직,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세 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산업에서 관리 행정 부문이 크게 증대했다. 법률서비스나 홍보, 인적자원 관리, 보안 등의 일자리 말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누군가의 일상적 일을 대신해주는 직업들, 이를테면 개 목욕 시키기, 요리 배달 등의 일자리도 많이 생겼다.

그런데 그레이버에 따르면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적으로 볼 때 그다지 의미있는 직업들이 아니다. 돈은 벌지만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꽤나 탄탄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자기 일의 무의미함을 토로하는 걸 볼 때가 있다. 실업자, 무직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분명 여기에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근대 경제학은 세상에 의미있는 일과 경제적으로 가치있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면서 시작되었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물은 우리에게 한없이 소중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무가치하다. 구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그만한 연봉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기업은 잔인할 정도로 노동자의 쓸모에 민감한 곳이다. 수익을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해고되었을 것이다.

기업은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돈이 되는 일을 하는 곳이다. 돈이 된다면 생태계 재앙이 닥친다 해도 강에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홍보 전문 직원을 동원해서 그 일을 녹색성장으로 포장할 것이고, 법률 전문 직원을 동원해서 소송에도 대응할 것이다. 이런 전문직이 세상에 얼마나 필요한지는 모르겠으나 기업에는 꼭 필요하다.

세상에 필요하고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과 기업에 필요하고 경제적으로 가치있는 일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점에서 불가피하다. 경제적 행동이 윤리적 결과를 산출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 경제학은 윤리학이 아니다. 문제는 의미와 가치의 간극이다. 이 간극이 너무 벌어지면 경제적 풍요를 더하는 일이 정신을 가난하게 만들고 세계를 황폐화시킨다.

우리에게 어떤 일자리가 필요한가. 지난겨울 장애인 단체들이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공공일자리 창출을 요구하며 장애인고용공단을 점거한 일이 있었다. 중증장애인들의 고용률은 채 20%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이 최저임금 보호도 받지 못한다. 최저임금법 7조에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자”에 대해서는 최저임금 적용을 제외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당수가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보호작업장이라는 곳에서 일한다. 이곳에서는 80%의 노동자들이 50만원 이하의 월급을 받는다. 일터에 고용되었다기보다 복지시설에 수용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중증장애인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데 어떻게 최저임금을 보장하느냐고 말할 수 있다. 옳은 이야기다. 기업의 필요에서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기업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신 사회적 의미(공공의 가치)를 창출한다. 이들은 황폐화된 세계 속에서 동료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고 인권을 지키며 차별적인 사회 인식을 개선한다. 그 무엇보다 세상에 필요한 일을 그 누구보다 잘해내는 사람들이며 끔찍한 조건 속에서도 이미 이 일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통령 집무실에 있다는 일자리 현황판에 어떤 일자리들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국가가 일자리 창출에 돈을 써야 한다면 돈 되는 일만큼이나 의미있는 일에 썼으면 좋겠다. 기업에 돈은 벌게 해주지만 세상에 유익함은 거의 없는 엉터리 일들보다 우리를 몇백배나 풍요롭게 해주는 일들 말이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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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라돈침대 사태가 불거진 후 정부가 서둘러 종합대책을 세우겠다고 발표하며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최근 다른 침구류 제품들에서도 안전기준치를 넘어선 방사능이 측정돼 시민들의 우려가 지속되고 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웰빙마케팅’에 편승한 업체들의 무분별한 방사성물질 남용, 방사성물질 가공업체들에 면죄부를 준 생활방사선 규제제도, 정부기관 규제인력의 절대 부족을 꼽을 수 있다.

일본에서 시작된 ‘음이온 마케팅’이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수백배 높은 방사능 농도의 침구제품으로까지 극단화되며 지난 2007년 라돈매트 사태와 이번 라돈침대 사태로 이어졌다. 이들 매트리스에서 안전기준을 초과하는 방사능이 나오는 주원인은 재료인 모나자이트의 토륨성분이다. 물론 우라늄도 섞여있지만 그 10배가 넘는 토륨성분이 결정적인 원인이다. 토륨은 내열 특성으로 지난 1980년대까지 북미·유럽에서 항공기엔진 합금, 가스랜턴 심지 등 각종 공산품에 사용되었으나, 방사능오염 우려가 확산되면서 1990년대에 대부분 비방사성 원료로 대체되었다. 미국에선 토륨폐기물 관리처분 규제도 강화되면서 광산업자들은 지난 1994년까지 토륨을 함유한 모든 모나자이트광산을 폐쇄했다. 그러나 인도 등 안전규제가 취약한 개도국에서는 고가의 희토류 추출을 목적으로 여전히 토륨 함유 모나자이트를 채굴하고 있다. 수입업자들을 통해 국내에 유통된 모나자이트는 이들 개도국에서 희토류를 추출한 뒤 남은 모나자이트 부산물(분말)이나, 애초 희토류가 적고 토륨성분만 많은 모나자이트(모래)인 것으로 보인다.

생활주변 방사선 안전관리법(이하 생활방사선법) 역시 큰 문제다. 지난 2012년 이 법안을 수립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상당 부분 미국 방사성물질 관련 면허규정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 규정들과 달리 가공업자에 대한 규정을 제외시키면서 문제의 침대제조업체들에 면죄부를 줬다. 물론 생활방사선법을 보완하는 일은 당장 가능하겠지만, 향후 정부대책은 걱정할 만하다.

정작 방사성물질의 가공, 유통과정을 감시할 수 있는 규제인력은 한숨 나올 만큼 빈약하기 때문이다. 원안위의 경우 생활방사선과 방사성원료 및 가공제품 담당 1명, 산하 원자력안전기술원의 생활방사선 측정 담당 2명, 환경부는 산하 국립환경과학원 라돈담당 1명이 사실상 전부이다. 국무조정실이 관계부처 고위공무원들을 대거 동원해 연 기자회견이 민심 수습에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향후 정부대책을 이행할 인력, 장비, 예산을 갖추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과거 경험처럼 여론이 잠잠해지면 중단될 공산도 크다.

이 때문에 허술한 국내 규제체계가 보완될 때까지 당분간이라도 방사성물질의 수입통관 과정에서 규제를 대폭 강화해 원천부터 차단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방사성물질 안전규제가 취약한 국가들에서 수입되는 모나자이트 등 특정 천연광물들에 대해서는 수입금지를 포함한 규제강화가 시급해 보인다. 토륨처럼 세계시장에서 이미 다른 원료로 대체된 방사성물질들은 연구용이나 특수 산업용을 제외하고 제조업과 민생에 백해무익하다.

<석광훈 | 녹색연합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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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홍대 앞은 불야성이다. 사무실이 근처인 까닭에 클럽 앞의 장사진과 수많은 젊은이들이 화려한 조명 속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경우가 많다. 무리에 휩쓸리지는 않지만 금요일마다 홍대 ‘불금’의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잡지를 만들고, 책을 만드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것이 20년을 훌쩍 넘었다. 1990년대 중반에 편집동인으로 문화잡지 ‘이다’를 만들고, 인문예술잡지 ‘에프’를 거쳐 과학잡지 ‘에피’를 만들고 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습관이다.

‘이다’를 만들면서 병맥주를 호기롭게 상자째 곁에 두고 즐기는 문인들과 술잔을 돌리며 수줍게 금요일 술자리를 시작했는데, 금요일에 일이 없어 집으로 바로 가야 하는 날이면 발길이 허전하다. 글을 쓰고 책 만드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한잔 나눌 금요일에는 학교 수업이나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을 만들지 않고 비워둔다. 당대의 글쟁이, 말쟁이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가끔 젊은 호기가 얽혀 만드는 사건들은 오랜 추억이다. 술자리에서 나누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책을 시작하는 일도 많았다. 공들여 책으로 만들어 수확을 축하한 것도 그 자리였다. 낯선 사람이 합류하면 어떤 스타일인지 가늠하고 그와의 거리를 정하는 기술도 터득했고 아침까지 버틸 자신이 없을 때 도망치는 방법도 익혔다.

지금도 잡지와 책을 만들면서 머릿속에 그리는 모델은 그 시절, 그 방식이다. 잡지의 방향도 정하고 기획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눈여겨본 필자들과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내용을 가다듬는다. 글이 잡지에 실리고 책이 나오면 그것을 함께 읽고 평가하는 자리를 갖는다. 그런데 지금은 방법만 남았고, 그 방법에서 술기운과 열기는 점점 옅어져 간다. 일단 금요일마다 사람들 모이는 것이 쉽지 않다. 예전에 잡지를 만들던 윗세대 선생님들은 일부러 금요일에 학교 수업을 잡지 않고 출판사 골방에 모여 투고된 원고들을 읽고 저녁엔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요즘은 젊고 한창 일할 나이의 학자들이 학교에서 지는 부담이 커서 늘 시간을 빼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잡지 편집위원들이 이런 사정이라 정해 놓은 시간을 늘 지키는 술자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렵다. 자리의 주인이 모이기 어려우니 손님을 모시는 것은 더욱 어렵다.

매주 모이는 것은 언감생심. 달에 한 번 만나는데도 시간 맞추기 쉽지 않고 그 자리에 손님을 모실 기회도 많지 않다. 젊은 남자 소설가들과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고도 이야기를 잘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편집위원들이 회의하다 잡담을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바쁜 시간 쪼개 쓰는 입장에서 당연히 불편했으리라. 요즘은 덜 자주 모이고 효율적으로 회의한다. 술을 마셔도 가볍게, 커피를 앞에 두고 회의하는 경우도 많다. 군더더기를 확 줄여서 일을 하니, 결과물도 훌륭하다. 다만 잡담 속에서 얻었던 풍부한 재료들을 만나지 못하는 허전함을 느낀다거나 진한 술자리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어쩔 수 없는 ‘아저씨’라는 자조를 피할 수 없다.

지난 금요일에 계간지인 ‘에피’ 4호를 인쇄소에서 막 배달 받아 편집위원 몇 명과 조촐하게 1주년을 기념했다. 22년 전에 ‘이다’를 내고 시끌벅적하고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했던 음악 공연과 담배 연기가 자욱했던 자축 파티가 떠올라 여러 가지 생각이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진진했다는 사실. 수학교육이 모두에게 얼마나 필요한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했다. 우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학입시개혁과 관련해서 회자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었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아주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 학생들에게 그동안 소홀했던 민주시민 교육을 제대로 할 좋은 기회라는 이야기.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 얼마나 진행되든 모든 학생들이 고등학교 정도의 수학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을 소양 교육 정도로 대체하는 것이 학생들을 어려운 수학에서 해방시키고 좀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여기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수학이 좀 어렵다고 모든 것을 전문가와 인공지능에 맡긴다면 궁극적으로 수포자들은 수동적이고 남들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언어도 습득하지 못하고 살도록 아이들을 내버려 둘 것인가?

금요일마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을 꿈꾸면서 지금도 금요일엔 가능하면 다른 약속을 잡지 않는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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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덜해졌으나 오래전 법조 현장을 출입할 당시만 해도 검찰 수사를 비판하는 기사는 종종 있었지만 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판사들이 검사들보다 더 정의롭고 실수도 적은 훌륭한 법조인일 리는 없다. 복잡한 법조항과 판례에 능통한 전문 법률가인 판사들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논리를 파고들어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사실 우리 사회의 마지막 갈등 해소 절차인 법원 판결마저 비판하기 시작하면 사회 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대국적(!) 견지에서의 우려가 더 컸다. 형사재판에서 유죄가 나온 피고인들,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소송 당사자들 다 나름의 불만이 있을 텐데 이들이 모두 잘못된 판결이라고 들고 일어난다면 사회적 갈등은 도저히 해소될 길이 없고,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다. 그러다 보니 판결에 대한 비판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판사가 어련히 알아서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했겠지, 1심 판결이 잘못됐으면 2심, 3심에서 바로 잡히겠지 하며 정당화의 근거를 찾기도 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권력은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 등 3가지로 나뉜다. 이 중 입법권이 속한 국회와 행정권을 관장하는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가 있어 왔다.

반면 사법권을 행사하는 사법부는 비판과 견제보다는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외부의 다른 권력으로부터 압력이나 간섭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명목이다. ‘법관의 독립’ ‘재판의 독립’ ‘사법부 독립’이니 하는 말은 흔히 하지만 ‘입법부 독립’ ‘행정부 독립’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이런 이유다. 그렇게 사법부는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성역이 돼 왔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독한 비판과 견제 속에서 그 속내가 상당부분 노출돼 왔다. 그에 비해 비판과 견제에서 비켜나 있던 사법부는 사회가 요구하는 투명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터진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는 그 ‘법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사법부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헌법 103조에는 판사(법관)는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무엇보다 판사들의 양심을 과연 믿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시도한 이들도, 판사들을 뒷조사한 이들도 바로 판사들이다. 그것도 이른바 법원 내 최고 엘리트라 불리는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대부분이다. 눈앞의 작은 이문을 좇아 권모술수를 부리는 그저 그런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나라를 지탱하는 사법부의 신뢰, 법관의 양심을 말하는 것이 민망할 따름이다.

사법부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잘못 다뤘기 때문이다. 상고법원 설립이라는 자기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시도한 것은 ‘사법권’을 남용한 것이고, 수뇌부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성향을 뒷조사한 것은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국가권력뿐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권력 구조가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요즘 한국 사회는 이 권력들이 잘못 작동해 벌어진 사달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터져 나오고 있다. 그 권력에 취했던 이들은 책임들을 지고 있다. 대통령의 권력을 남용한 전직 대통령 2명은 구치소에 있고, 재벌 회장인 배우자의 권력을 이용해 갑질을 한 부인과 딸들은 사회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여성을 대했던 유력 정치인은 정치인생이 끝났고, 유명 연극인은 감옥에 있고, 심지어 스스로 세상을 등진 대학교수도 있다.

사법권과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사법부의 전·현직 인사들에게도 응분의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폭로되면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사회적 혼란만 가중됐다고 한다.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 대상 사건 중 하나로 거론된 KTX 해고승무원들의 반발을 놓고 판결 불복 사태가 우려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 성역 없는 엄정한 수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법원 내 판사들 사이에서도 분출하고 있다. 누구보다 판결 불복, 사법부 불신을 두려워할 일선 판사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할까. 신성한 판결이라는 신화 속에 가려 있던 권력의 남용을 단호하게 끊어내야 진정으로 신뢰받는 사법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판사들 스스로가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판사들로 구성된 법원이 행사하는 사법권은 헌법이 사법부에 부여(헌법 101조)한 권력이 아니라 국민들의 복리를 위해 써야 할 사법부의 무거운 책임이라는 점을 명심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김준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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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이 들여다보여 봄이 온 줄 알았다

저녁엔 강으로 나가 물속까지 자라는 벚나무를 보았다

물속까지 핀 벚꽃을 보았다

물속까지 벚꽃 피어 봄도 절정인 줄 알았다

 

자꾸 눈길이 가서 네가 온 줄 알았다

내 안에서 밤낮없이 피어나는 너를 보았다

벚꽃 눈부신 봄날 내내

네 안에도 벚꽃을 피우고 싶어 사랑인 줄 알았다

- 오창렬 (1963~)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물속이 훤히 보인다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속마음이 그처럼 잘 보인다는 것일 테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물비늘이 반짝이고, 맑은 물은 거울 같고, 바닥에는 고운 모래가 쌓였다 살살 풀리며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쪽에는 꽃이 피어 향기와 빛깔의 절정을 보여준다. 사랑하면 또 어떤 기미에 의해 눈이 자꾸 한 곳으로 가게 되니, 미묘한 알아차림이 있으니, 눈길이 가 닿는 그곳에는 어김없이 사랑하는 이가 와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당신의 안에서 꽃 피는 일이요, 당신이 내 안에서 꽃피는 일임을 알겠다.

오창렬 시인의 시에는 은은한 사랑의 노래가 가득하다. 시인은 시 ‘바람 지날 만한’에서 “나와 너 사이로 바람 분다면/ 눈 녹고 꽃피는 일이 우리 사이의 일이겠다/(…)/ 너와의 사이라면 바람에 꽃잎 지는 것도 나는 춤이라 여기고/ 낙화도 하냥 꽃이라 하겠다 쓸어내지 않겠다”라고 썼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부드럽게 설레는 공간이 있다. 이 홍조(紅潮)의 공간에서는 꽃 지는 일도 꽃피는 일과 다르지 않고, 떨어진 꽃도 막 핀 꽃과 다르지 않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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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국가 통계를 놓고 ‘코드 통계’니 ‘맞춤형 통계’니 하는 말들이 유행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통계청은 뜬금없이 ‘녹색성장지표’를 만들었다. 녹색성장 정책의 수립과 평가를 지원하고 시민들의 친환경 활동을 유도하려는 취지를 내세웠지만 정부정책 홍보라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4대구조개혁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경제혁신 3개년계획이 G20의 국가성장전략 중 1위로 평가받았다고 선전했다. 물론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흔히 통계의 오류는 부주의나 무지 혹은 자의적 판단에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정부통계가 도마에 오를 때는 후자 측면이 강하다.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이 3일 기자들과 만나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가구별 근로소득이 아닌 개인별 근로소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통계청의 가계동향 조사의 원재료 중 임금 노동자를 추려내 임금의 증감을 분석한 결과라는 말도 덧붙였다. 문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관련발언을 한 뒤 근거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데 대한 해명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 성장을 내건 문재인 정부의 상징 정책이다. 하지만 재계와 보수진영은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을 늘려주기는커녕 일자리와 임금을 줄인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통계청이 1분기 가계소득 통계를 발표하면서 하위 1분위의 소득은 낮아진 반면 5분위 소득은 더 많이 늘어, 소득격차가 15년 만에 가장 커졌다는 분석을 내놨다. 정부로서는 당황했고, 반대진영은 휘파람을 불었다. 장하성 정책실장과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최저임금 인상 영향에 엇갈린 의견을 낸 것도 논쟁을 키웠다.

흔히 통계는 거짓이라고 하지만 거짓은 통계가 아니라 시각이라는 게 더 적확할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얘기이다. 정책 평가를 위해서는 추세를 봐야 한다. 최근의 최저임금 인상 효과 논쟁은 고작 한 분기 결과만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대통령의 효과 90% 발언도 섣부르고, 이를 물고 늘어지는 반대진영도 지나치다. 최저임금 인상 효과에 대한 분석은 이제부터다. 정밀 진단을 거쳐 방향을 정해도 늦지 않다.

<박용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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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의 어원은 ‘사량(思量)’이다. 생각의 양이란 말이다. 대상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는지 총량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명쾌한 정의다. 멋진 풍경을 봤을 때, 맛난 음식을 먹을 때, 눈이 올 때 그 사람이 생각나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한근태의 재정의 사전>에서 재정의한 사랑의 정의다.

저자는 어원을 따라가 보면 우리가 시방 쓰고 있는 단어나 행위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으니 문제 앞에서 스스로 재정의해 볼 것을 권하고 있다. 음, 그렇다면 나에겐 무엇이 사랑일까? 생각만으론 어림없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다. 아기를 구하러 불난 집으로 뛰어들어가는 것, 만사를 제치고 가장 우선하는 것, 그런 행동을 저절로 하게 만드는 그런 상태를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공해라도 배불리 먹고 싶다고 말하던 시대가 있었다. 1976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 중에 환경공부를 하던 최열에게 운동권 친구들이 던진 뼈있는 농담이었다. 더한 시절도 있었다. 1962년 6월3일 건립된 울산 공업탑에는 “제2차 산업의 우렁찬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산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가는 그날엔 국가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이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새겨있다. 지금은 어떤가. 환경이란 단어는 일상이 되었다. 공사장 가림벽에도 아로새겨질 만큼 ‘있어 보이는’ 장식 문구로까지 진화하였다. 그렇지만 환경이 좋아진 건 아니다.

지난 2월22일 미세먼지센터 창립 심포지엄에서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은 ‘미세먼지’ 이슈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국민들은 방사능보다도 미세먼지에 대한 걱정이 더 큰 것으로 분석됐다. 최근에는 더 심각해져서 한국인이 가장 불안을 느끼는 ‘위험요소’는 북핵도, 지진도 아닌 미세먼지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지난 5월14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 방안 연구(Ⅳ)’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 3839명을 대상으로 각종 위험에 대한 불안 수준을 측정한 결과, 가장 높은 항목은 ‘미세먼지 등과 같은 대기오염’으로, 점수는 3.46점을 기록했다. 이런 국민의 불안을 누가 잠재울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 1년에 대한 평가가 각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41% 득표로 당선된 후 80%대 지지를 받는 대통령은 유례없는 일이다. 학계와 시민단체의 환경·에너지 전문가 100인의 평가도 부족한 부분은 있었지만 총점만큼은 지난 정부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문재인 정부 1년 평가에서는 환경 문제를 주요 범주에 올리지도 않았다.         

또 기후변화에 보이는 각국 정상들의 관심이나 미세먼지에 쏠리는 국민의 불안에 비해 청와대 환경사령탑의 지위가 다른 분야만큼 안되는 것도 의아하다. 현재 사회수석실 산하에 기후환경비서관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밝힌 정책현안에서 미세먼지는 기타 분류 안에 속해 있다.

홈페이지를 계속 보자면 지난 1년간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 외에 환경 쪽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미세먼지가 준동하던 시점에 대통령과 영부인의 한말씀을 기대했는데 듣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청원게시판에 올라온 내용과 SNS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국민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해야 할 15개 숙제를 올려놓았다. 그중 첫 번째 숙제가 안전환경이고, 그 세부 목표는 미세먼지 대책수립이다. 국민이 100을 원할 때 110을 해줘야 시원한 법인데, 향후 과제로라도 미세먼지가 제일 앞머리에 놓여있어 다행이다.

환경부도 2012년부터 예산이 늘지 않았다. 민원의 20%가 ‘미세먼지’인데 관련예산은 4.7%뿐이고, 그나마 미세먼지 절감 효과가 미미한 친환경차에 예산이 집중되어 있다. 정부건 민간이건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고, 예산과 조직이 받쳐줄 때 한걸음 문제해결로 나아갈 수 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믿음이라고 성경에도 나와 있다. 예산은 기재부가 나눠 주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열망과 지도자의 뜻과 부처의 열정에 따라 효과적으로 집행되어야 한다. 그 열망을 보여줄 때가 왔다.

내일(5일)은 유엔이 정한 환경의날이고 오는 13일은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날이다. 후보들이 나열한 비슷비슷한 공약들 중 따져봐야 할 것은 정책의 우선순위다. 새끼 구하려 불난 집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국민의 불안을 잠재울 지도자는 누구일까. 똑똑한 유권자가 미세먼지를 해결할 수 있다. 깐깐하게 따져보고 제대로 뽑자. 맑은 하늘에 한 표!

<이미경 | 환경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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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만1000원.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9.99%, 소득1분위 사람들의 한 달 평균 소득이다. 지난 연말 106만원에서 큰 폭 하락했다. 이 중에서도 소위 근로능력층이 아닌 가구의 상황은 더 처참하다. 2.28명의 가족이 한 달 53만3000원으로 살고 있다고 통계는 말한다.

소득격차 확대에 대한 분석은 입장에 따라 상이한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과 정부는 인구구성의 변화로 설명한다. 노인세대 유입으로 근로소득이 하락했다는 것이다. 실제 1분위 안에서도 근로자가구의 평균소득은 153만원(평균 가구원수 2.27명)으로 그 외 가구와 꽤 차이가 난다. 낮은 임금이 가족의 유일한 소득이거나, 그 일자리마저 안정적이지 않거나 공적이전에만 의존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의 사람들에게 큰 복지의 공백이 있다.

단순하게 나누어 본다면 현재 공백은 두 가지 층위를 가질 것이다. 인구의 2% 남짓 공공부조의 사각지대, 그리고 반실업상태의 노동자다.

첫 번째는 이미 대안이 있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와 재산기준 완화 등을 통해 공공부조를 확대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선언했지만 제대로 된 대책은 아직도 없다. 올 10월부터 주거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이 폐지되지만 핵심적인 생계, 의료급여에서의 계획이 없다. 정책 목표가 합의된 상황에서 시행시기만 줄다리기하는 것은 빈곤층을 고사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행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이번 소득조사 결과는 말하고 있다.

첫 번째도 난관이 많지만 더 복잡한 것은 두 번째다. 두 번째 그룹에 대한 대책으로 정부는 취업지원 등의 사업을 꺼내들곤 하지만 좋은 대책이 될지 의문이다. 이미 일자리 정책은 빈곤층에 꽤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지만 이것이 빈곤을 해결하는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자 중 근로능력이 있다고 판명되는 경우 자활에 참여하거나 취업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한 노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급여가 중지된다.         

문제는 어떤 일자리냐는 것이다. 빈곤에 빠진 사람들은 대개 한두 가지 이상의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지만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 저임금, 고강도의 일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자활사업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3년의 기간제한이 있다. 자활사업은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임금도 낮다.

그냥 일자리 정책으로는 부족하다. 정부가 제공하고 보장하는 일자리, 괜찮은 임금과 안정성을 가진 일자리가 공공의 일자리로 공급되어야 한다. 일방적인 근로능력평가와 자활 참여 기간제한을 폐지하고 최저임금 적용, 현물급여의 유지, 자활사업에 대한 이윤중심 성과평가 근절. 이런 조치가 동반되지 않으면 개인의 수준에서도 ‘빈곤 탈출’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가난은 일을 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고 보는 ‘정책적 게으름’이다. 이는 빈곤층에 대한 낙인과 선입견인 동시에 한국의 빈곤상황에 대응하기에는 낡은 방식이다. 노인빈곤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데 언제까지 고령층에게 한달 20만~30만원짜리 일자리로 연명하라고 할 것인가. 평생 일을 해왔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공공부조가 우선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지난해 기초생활수급비가 단 1.16% 인상에 그쳤다는 점이다. 수급비가 낮은 문제는 누가 수급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수급자 선정기준도 낮다는 의미다. 언론과 정부는 곧잘 사각지대 문제와 수급자들의 삶의 질을 대립시키는 방식(급여 상향이 우선인가, 사각지대 해소가 우선인가)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둘은 명백히 구별되지 않는다. 오는 7~8월쯤 결정될 내년 선정기준 상향이 절실하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비롯한 공공부조 확대 조치는 의지에 따라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더불어 빈곤정책이 갖는 몇 가지 편향을 벗어난 정책이 이제 시도돼야 한다. 지금 빈곤정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복잡하고 기준에 맞추기 까다롭다는 점이다. 빈곤정책은 훨씬 단순하고 관대해져야 한다. 선별적 복지라도 최대한의 보편성을 추구할 때 다양한 빈곤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실효성 높은 정책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김윤영 |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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