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우리 삶의 동반자다. 동시에 꿈은 ‘꿈에 보인다’라는 말처럼 시각적인 의미와 관련되어있다. 꿈을 뜻하는 한자 몽(夢)의 어원도 ‘눈이 어둡다’거나 ‘앞이 안보인다’는 것을 형상화했다. 뿐만 아니라 ‘꿈을 꾼다’는 단어가 프랑스어(songer)와 스페인어(sonar)와 같은 라틴계언어에서는 물론 독일어(traumen)와 영어(dream)도 모두 시각적 의미를 띤 어원과 연관되어 있다. 꿈은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잠과 함께 찾아와 어둠을 뚫고 나타나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미래상’(vision)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좇다보면 우리는 으레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만나게 된다. 그는 무의식의 심연에 놓여있는 꿈의 기능을 유년기의 성적인 억압을 중심으로 해석, 꿈은 억제된 본능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와 달리 카를 구스타프 융은 꿈은 자기검열로 인해 굴절된 표현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려는 적극적인 상징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꿈이 단지 개인적인 무의식의 비밀스러운 기록이 아니라 그가 속한 종족이나 집단이 지향했던 어떤 ‘원형적’인 모습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 8월28일, 워싱턴에서 행한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는 명연설은 인종주의적인 멸시와 차별, 그리고 가난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흑인들이 바라는 새로운 미국에 대한 원초적인 꿈을 담았다.

절대왕정이 지배했던 구대륙 유럽을 뒤로한 청교도들이 신세계에 건너와 자연법에 기초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의 권리를 강조한 ‘미국독립선언’이 바로 그러한 꿈의 내용이었다. ‘접시닦이에서 백만장자’라는 말로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아메리칸드림’은 그 후 작가이자 역사가인 제임스 트러스로 애덤스가 미대륙을 여행하면서 남긴 <미국의 서사시>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로부터 자유, 책임, 경쟁, 기회균등, 노력에 따르는 보상 등이 지금 우리가 통속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아메리칸드림의 내용이 되었다. 뉴욕타임스가 1996년 이래 매년 실시하는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 같은 아메리칸드림을 믿는 미국인이 비율이 여전히 60~80%를 차지한다. 이런 주관적인 평가에 대해서 놈 촘스키는 <아메리칸드림을 위한 진혼곡>에서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의 광풍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후퇴 때문에 미국적 꿈의 핵심이었던 계층이동이 유럽보다 더 힘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아메리칸드림의 최근 모습을 염두에 둔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유럽의 꿈>에서 유럽의 꿈을 불안한 이 시대의 지평에 보이는 한 줄기의 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꿈을 아메리칸드림과 비교하면서 포용성, 다양성, 삶의 질, 복지, 지속가능성, 보편적 인권, 자연과 평화를 유럽적 꿈의 내용으로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28개 나라 안에 5억명이 넘는 인구가 ‘유럽연합’이라는 한 지붕 밑에서 평화롭게 함께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2010년 이후 그리스가 심각한 재정위기에 빠지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연합 내의 의견충돌은 유럽의 꿈이 과연 실현가능한 기획인지에 대한 회의도 점증시켰다. 게다가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영국은 2016년 6월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결정,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유럽합중국’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보수적인 주장은 늘 있어왔다. 또 최근의 위기와 관련, 유럽연합은 통합보다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차이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작년 12월에 실시된 ‘유럽위원회’의 여론조사는 전체 유럽연합 성원국 국민의 절반 정도가 유럽연합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비판과 회의적 시각에 대해서 하버마스는 <유럽헌법에 대하여>라는 저서에서 유럽통합을 단지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고, 통합의 정치적 차원과 유럽헌법이라는 민주적 법제화를 뒷받침하는 문명사적인 힘을 경시하는 단견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다양성의 통일이라는 유럽의 큰 꿈이 이렇게 흔들리면서 유럽연합의 중심부인 독일과 프랑스 같은 부자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들이 희생되고 있다고 여기는 주변부의 저항도 거세지고 있다. 이와 함께 유럽연합의 약한 고리인 그리스나 포르투갈과 같은 지중해연안국가와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유럽연합에 합류한 동유럽국가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

과거의 ‘비단 길’을 따라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는 중국이 바로 그 세력이다. 2013년 3월, ‘전인대(全人代)’의 폐막연설에서 시진핑이 수차례 언급한 ‘중국몽(中國夢)’은 지구화의 중심에 중국이 자리 잡겠다는 원대한 구상이다. 아메리칸드림이 개인의 행복, 유럽의 꿈이 다양성의 통일을 강조하는 반면에 중국몽은 개인생활의 풍족(小康)도 이야기하지만 주안점은 역시 지구적 패권국가의 건설에 있다. 오랜 빈곤과 근세에 들어와서 겪었던 민족적 멸시가 만든 집단적 기억이 바로 그러한 꿈을 정당화하고 있다. 물론 이 꿈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많다. 특히 ‘현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심한 빈부격차, 부정부패와 환경오염 문제는 큰 꿈을 향하는 동력을 많이 제약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된 세 가지 꿈은 그러나 모두 다 대륙의 꿈이다. 그렇다면 작은 나라들의 꿈은 불가능한 이야기인가. 최근 볼리비아와 에콰도르는 서양의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하여 원주민의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좋은 삶’(buen vivir)을 헌법조항에 삽입, 그들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꿈은 무엇인가? ‘코리안드림’은 아메리칸드림의 축소판인가? 한반도는 중국몽과 함께하는 작은 이웃에 불과한가? 다양성의 통일이라는 유럽의 꿈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많은 질문이 꼬리를 문다.

김구 선생은 이미 70여년 전에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우리는 지금 이 화두가 담고 있는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남북이 함께 분단의 아픔을 이겨내면서 평화와 번영을 가꿀 수 있는 한반도는 단지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패권의 꿈을 키울 수 있는 대륙은 아니지만 높은 문화를 지닌 한반도가 ‘작은 거인’으로서 새로운 꿈길로 세계를 인도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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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PC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Tree of Savior)의 원화 작가인 일러스트레이터가 메갈 트위터 이용자로 의심된다는 게임 이용자의 항의로 커뮤니티 내부에서 문제가 커지자, 지난 3월26일 해당 일러스트레이터가 본인의 SNS 계정에 직접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사과문을 올린 뒤에도 게임 이용자의 항의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자 IMC게임즈 대표는 일러스트레이터와 면담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공지글을 올리기 에 이른다.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같은 계정은 왜 팔로했는지’ ‘한남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트윗을 리트윗한 이유가 무엇인지’ ‘과격한 메갈 내용이 들어간 글에 마음에 들어요를 찍은 이유는 무엇인지’를 묻고 답한 내용을 공개했다. 게임업계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사건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 국가권력에 의해 대중에 대한 감시가 이뤄졌다면, 지금은 SNS라는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통해 개인이 개인을 감시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뜻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한민국 국민들은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를 통해 치밀하게 진행된 사상검증이 창작자에게 미친 영향을 확인했다. 당시의 블랙리스트가 정치적이고 국가적 차원의 논리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의 게임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상검증은 더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SNS 내용이 특정 시각과 이익관계라는 기준에 따라 검열되고 있으며, 이제는 한 개인이 한 개인을 검열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논쟁적 단어를 사용하거나 자신의 입장과 반(反)하는 단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IMC게임즈 대표가 회사 직원에게 가한 사상검증 사건은 심각하고 중대한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은 결국 게임업계 종사자들과 게임 이용자들 모두 페미니즘과 관련된 어떤 단어도 언급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규제의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논란이 커지자 IMC게임즈 대표는 자신이 올린 글에서 한국여성민우회와 페미디아를 문제적으로 언급한 것은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하지만 이 사과문에는 회사 직원의 사적 행동과 말을 감시한 문제의 심각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과문으로 일단락된 듯 보이지만, 게임업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사상검증 논란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이러한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문제 해결 방안은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용자를 지닌 게임업계가 보여주는 페미니즘 사상검증과 같은 행보는 이용자들의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다수의 게임 이용자의 의견을 그대로 반영해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게임산업 내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활동과 인권이 존중받을 수 있는 창작자들의 제작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정부기관, 게임업계, 이용자 모두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종임 | 문화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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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 <논어>의 한 구절이다. 권위를 인정받은 ‘정통’ 해석은 ‘공자께서는 괴상한 것, 힘, 어지러움, 귀신에 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이다. 공자 시대 이후 아주 오랫동안 유교 문화권에서 이 네 가지는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으로서 사람을 미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우리 문화에서도 유교와 상관없이 ‘힘’은 본래 좋은 것이 아니었다. 몸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힘 든다’고 하고, 몸 밖으로 힘이 나가는 것을 ‘힘 난다’고 한다. 힘이 들면 괴롭고 힘이 나면 즐겁다. ‘힘’은 사람이 일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몸 안에 들어와 고통을 주다가 쉬는 사이에 몸에서 나가는 귀신과 비슷한 존재였다. 힘은 사람에게 평생 붙어 있는 신체 또는 정신의 일부가 아니었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몸에 힘 들이며 사는 삶이 고생이고, 힘 안 들이고 사는 삶이 호강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개인과 공동체의 도(道)로 삼았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힘을 숭상하기보다는 멸시했다. 그들에게 힘은 천한 것이었기에, 힘 쓰는 일도 천한 일이었다.

정조 때의 어의(御醫) 강명길은 직접 쓴 의서(醫書) <제중신편>에 “부귀자는 마음을 많이 쓰니 병이 대개 속(本)에서 오고, 빈천자는 수족을 많이 쓰니 병이 대개 겉(標)에서 온다”고 했다. 힘은 수족을 많이 쓰는 빈천자에게나 필요한 것이었다. 마음을 많이 쓰는 부귀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덕(德), 지조(志操), 기개(氣槪) 등 ‘운동 에너지’를 갖지 못하는 가치들이었다.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도(道)를 모르는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정도의 차는 있으나, 지구 전역에서 힘은 대체로 반(反)문명과 야만의 상징이었다.

힘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거의 고정되어 있던 물질세계가 급격히 팽창하면서부터였다. 증기기관 발명은 마력(馬力)을 숭상하는 시대를 열었다. 뒤이어 찰스 다윈은 신(神)과 혈연관계에 있던 인간을 동물의 일원으로 재배치했다.

이에 따라 ‘인간다움’을 구성했던 정신적 가치들은 뒤로 물러서고, 주로 힘으로 표현되는 동물의 속성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이후 적자생존, 우승열패,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적 경쟁의 논리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 즉 ‘경쟁력’이 최상의 가치라는 생각이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는 맹자의 말은 허튼소리가 되었고, 물질을 만들거나 변화시키지 못하는 관념의 가치는 폭락했다. 1880년대 개화사상가들은 국가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핵심가치는 ‘부국강병’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했고, 1900년대 안창호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개개인의 생활규범으로 제시했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본이 처음 한국인들에게 요구한 정신적 가치는 충량(忠良), 온순, 착실 등이었다. 그들에게 지조와 기개를 갖춘 사람은 성가신 ‘불령선인(不逞鮮人)’이었다. 그들에게는 한국인의 ‘실력양성’도 못마땅한 일이었다. 일본인들은 각종 출판물과 인쇄물에서 기생이나 노인을 한국인의 대표 이미지로 삼았다. ‘이민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연약하고 노쇠한 민족’이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강요된 자의식이었다. 그럴수록, ‘힘’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도 높아졌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자들이 한국인들에게 ‘힘’을 권장하기 시작한 것은 침략전쟁에 한국인의 ‘힘’을 동원할 필요를 느낀 뒤부터였다. 그런데 그 힘은 그야말로 동물적이었다. 1930년대 초, 박력(迫力)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같은 무렵, 추진력이라는 말도 사람에게 쓰이기 시작했다.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뜻의 두 단어는 본래 소나 말 같은 가축에게나 어울렸다. 그러나 ‘명령에 따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진격하는 보병형 인간’을 원했던 일본 군국주의는 이 말에 ‘남성성을 대표하는 우월한 가치’를 부여했다.

해방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군인의 덕목인 ‘힘’의 가치는 한층 더 높아졌다. 뒤이어 1960년대에 군사작전과 같은 방식으로 개발하고 건설하는 ‘돌격건설의 시대’가 열렸고, 그 과정에서 ‘힘’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단일 요소로 자리 잡았다. 경쟁력, 지도력, 매력, 친화력, 지력, 경제력, 창의력, 사고력, 이해력, 논리력, 판단력 등 온갖 것들, 심지어 힘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에까지 ‘힘’이라는 글자가 들러붙었다. 생각을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한글이 힘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반면 사랑, 배려, 연민, 도덕, 염치, 기개, 지조, 양심, 정의 같은 단어들에는 ‘력’자를 붙이지 않는다. 힘 숭배의 시대에 이런 것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정의의 보루여야 할 사법부가 ‘집단권력’을 키우기 위해 불의한 짓을 했다. 이런 일이 전임 대법원장 한 사람의 일탈로 벌어질 수는 없다. 법관 다수가, 현대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의와 도덕, 양심보다 기득권력을 중시한 때문일 터이다. 이미 많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자기 존재 이유조차 부정하는 모습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몸에 힘을 비축하려면 계속 힘을 들이는 수밖에 없다. 힘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평생 힘들게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힘듦’, 즉 ‘힘들임’은 현대인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필연적으로 힘 가진 자들의 횡포와 힘없는 자들의 절규를 일상 풍경으로 만든다. 우리가 힘을 숭배하는 종교적 열정을 줄이고 힘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소생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문명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힘 드는 삶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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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알게 됐고 2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 생활을 함께했다. 서로 다른 대학에 입학했지만, 시간을 내서 한 달에 두 번쯤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졸업 학기가 되자 그 횟수는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한 달이 한 계절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둘 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남의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가끔 통화를 하고 그보다는 자주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몇 날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말은 섣불리 하지 못했다. 약속을 하면 기다렸다는 듯 우리 둘 중 누군가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야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급하게 지방으로 조문을 가야 하는 상황 등 들어보면 다음을 기약하는 것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늘 사연이 있었다. 바쁘다고, 숨통이 좀 트이면 만나자고, 상사 대신 출장을 가게 되었다고, 잊고 있던 원고의 마감이 오늘까지라고, 잘 보여야 하는 거래처 직원이 갑자기 저녁을 먹자고 했다고…. 그럴 때면 우리는 말했다. 나중에 보자. 정작 나중이 되자 연락을 하지 못했다. 한창 바쁠 때인데 방해가 될까 봐, 쉬는 중인데 내가 리듬을 깰까 봐, 아직 나중이 되지 않았을까 봐.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느 날 밤, 사전을 펼쳐 ‘나중’의 뜻을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나중의 뜻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었다. “순서상이나 시간상의 맨 끝.” 친구를 만나는 일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맨 끝에 가는 것만큼 우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나중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나중이 찾아왔을 때 친구가 내 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꼭 보자. 나중 말고 오늘.

1년 만에 만난 친구는 피로해 보였다. 친구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웃으면서 인사하고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음료를 주문하고 마주 앉았다. 잘 지냈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 질문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둘 다 “잘 지냈어?”라고 묻지 않고 “잘 지냈지?”라고 물었다. 잘 지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서, 상대가 잘 지냈다고 대답해주길 바라서 확인하듯 물었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치를 보다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서로 웃음이 터졌다. “우리 둘 다 잘 지내지 못했나 보다.” 친구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간 소원했던 날들이 다 무색해지는 느낌이었다. “나중만 찾다가는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내 말에 친구가 환히 웃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 주위를, 무엇보다 나를 제대로 못 챙긴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내 말이!”

카페에서의 시간은 유유히 흘렀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단 한 번도 전화기를 체크하지 않았다. 친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고. 내가 여기에 왜 있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중을 위해서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하는데, 대체 그 나중은 언제 오는 거지? 일도 재미가 없고, 도통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러다 우연히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글을 읽고, 읽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친구는 소진되어 있었다. 내 처지도 다를 바 없어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커피와 함께 주문한 쿠키를 하나 건넸을 뿐이다. “번아웃의 반대말은 뭘까?” 쿠키를 먹으며 친구가 물었다. “글쎄, 다시 시작하는 걸까?” “나는 지금 같아. 번아웃은 어떤 시기가 지나고 나서의 일이잖아. 나중이 되어서야 후회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가 지금 만난 거잖아!”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아이를 잃은 부부에게 갓 구워낸 빵을 건네는 빵집 주인이 등장한다. 힘들고 바쁜 때일수록 갓 구워낸 빵이 필요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어떤 것이. 친구와의 만남도 이와 같을 것이다. 곁에 있는 존재들을 맨 끝에서 마주하는 것이 아닌, 지금 내 앞으로 끌어당기는 것.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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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이 같이 공부하는 교실의 수업시간이다.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철수는 수업교재와 필기구가 없다. 좀 지나 철수는 큰소리로 떠든다. 교사는 철수에게 경청하라며 주의를 준다. 수업이 잠시 끊긴다. 철수는 교실을 돌아다닌다. 교사가 지적하니 펜을 빌린다고 한다. 수업이 다시 끊긴다. 진수는 짝에게 말을 걸고 짝의 필통을 건드린다. 다시 교사가 집중하라고 말한다. 대다수 교과시간에서 비슷하다.

이 교실에서 교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두 학생의 행동을 못 본 척하고 다른 학생들만 가르쳐야 할까. 그럼 방해 행동으로 수업이 되지 않는다. 28명의 학습권과 2명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육권 중 무엇을 존중해야 할까. 교사의 제지에도 학생이 수업 방해 행동을 계속해도 교실 밖으로 격리하기는 힘들다. 학생의 수업권 침해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매일 일어나는 교실은 많다. 두 학생의 행동습성은 여러 해에 걸쳐 지속되고 심해진 것이다. 해당 학급의 수업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사는 다른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두 학생에 대해서도 답답하고 안타깝다. 다수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경청하고 참여하자고 함께 정한 학급 약속을 지키고 공적인 시공간에 대해 존중하기를 원하지만 해당 학생은 미안해하지 않는다. 교과 교사는 이유를 물어보고,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한다. 담임교사는 학부모와 상담한다.

수업 방해가 지속적이고 심한 학급에 대해 학년에서 같이 고민하고, 학생선도위원회를 열어 선도절차를 밟는다. 그래도 그때뿐인 경우가 많다.

교사들이 지치는 것은 문제행동을 반복하는 5~10%의 학생들에게 에너지가 소진될 때다. 전체를 보면 소수다. 이 소수의 학생들에게 에너지를 쏟는 것이 공평한 것일까. 학교는 교육목표에 따라 학생에게 적절한 교육적 방법을 적용하는 곳이다. 공평하다는 판단은 교육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인가로 해야 한다. 소수 학생이지만 문제행동은 공동체 문화에 시나브로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또한 문제행동을 하는 학생도 자존감 있고 타인을 배려하는 시민으로 성장할 기회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교사들이 보통 이 학생들에게 지도와 상담을 하며 몇 배의 품을 들이지만 학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문제행동의 원인이 여러 가지이고 10여년간 몸에 밴 습관이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성장과정에서 여러 요인으로 인해 심리적·인지적·도덕적으로 적정한 발달이 이뤄지지 않았거나 존중받는 관계를 맺는 사회적 기술이 없거나 무기력하거나 부정적 습관이 생활화된 경우 등등.

한 명의 보통 교사가 해도 교육이 가능한 학생이 있다. 반면 한 명의 보통 교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학생도 있다. 후자의 경우, 지금 교실에서는 교사 혼자 오롯이 버텨내고 있다. 학생의 어려움의 원인에 따라 다양한 교육적 지원을 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원인에 따라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거나 학습, 심리, 문화, 복지 지원 등 다양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교과수업 지도에 훈육과 돌봄까지 개별 교사에게 오롯이 맡겨져 있다. 모든 학교에 일반교사 외에 상담전문, 복지전문, 진로전문인 교사가 배치되어 있지는 않다.

전문성이 있는 다양한 교직원을 확보한 학교라면 학년부와 관련부서가 학생 성장을 위해 협업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의 성장과 수업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 말이다.

<손민아 | 경기 전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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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양반가나 부잣집에서 주인 대신 하인들을 관리하던 하인으로, 요즘으로 치면 집사 정도에 해당하는 ‘청지기’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윗사람 곁에서 뜻을 받드는 수청(守廳)과 지키고 관리하는 직책 직(直)이 합쳐진 청직(廳直)에, 사람을 뜻하는 ‘-이’가 붙어 등대지기처럼 청지기가 됩니다. 청지기에게는 뒤섞여 자는 다른 하인들과 달리 수청방이라는 독립 공간 등 여러 혜택들이 제공됩니다.

그리고 이 수청방은 주인어른의 명을 바로 받으며 찾아온 손님들을 먼저 맞을 수 있도록 사랑방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윗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주인 대신 일을 처리하다 보니 청지기 중에는 자신이 하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집 안팎으로 뒷짐 지고 다니던 이도 있었지요. 예나 지금이나 완장 하나 차면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어떻게든 ‘완장질’ 하고 싶어 들썩대는 하급 인간들이 있는 법입니다.

조금 나은 대접을 해주니 우쭐해함을 이르는 말로 ‘청지기가 벼슬인 줄 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관리자 시켜주니 마치 벼슬이라도 한 양, 양반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입니다. 어느 정치인은 5개월치 식비로 혈세 1억5000만원을 자기 돈처럼 썼습니다. 어느 시의원들은 자기네 지위를 돋보이게 할 의전용 차량과 의자를 바꾸는 데 지역주민을 위한 예산을 낭비했지요. 국회의원이라고 좀 나은 대우를 해주니 더 대접받겠다고 의원 월급 올리고 혜택 넓히는 데만 짬짜미로 참 열심들이십니다.

공직은 국민을 대신하라 내준 직책일 뿐인데 ‘보직’ 삼아 벼슬아치 노릇을 합니다. 청지기가 곳간 열쇠로 어떻게 행세하고 다녔는지 검색해봅시다. 과거가 그 사람이 할 미래입니다. 수청방은 일 잘하고 신실한 청지기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높으신 청지기님이라면 방 빼고 가시는 길 편히 모셔드려야죠.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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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필자는 두 개의 원칙, 즉 게임전략과 협상 네트워크에 입각해서 지난 몇 달간의 진전을 지켜봐왔다. 주어진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는 전략을 게임전략, 주어진 입지 자체를 바꾸려는 전략을 네트워크전략이라고 한다. 먼저 게임전략을 보자. 트럼프는 게임이론의 교과서와 같이 행동해왔고, 따라서 대단히 예측 가능한 사람이다. 물론 그는 스스로 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왔다는 점에서 예측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한 말의 ‘내용’에 집중했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가 왜 말을 뒤집는지 ‘의사결정의 원칙’에 집중해보면 그는 매우 예측 가능하다. 그는 이미 20년 전에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금 구사하고 있는 대북 전략을 설명한 바 있다. 첫째, 북핵 대응은 빠를수록 좋다. 둘째, 처음에는 대화로 시작한다. 셋째, 선제타격의 가능성을 닫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북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선제타격뿐이므로. 넷째, 미국이 단호하게 나가면 북한은 대화에 응할 것이다. 그는 20년째 예측 가능하고 일관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1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왼쪽)이 가져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보이며 웃고 있다. 친서를 담은 봉투가 트럼프 대통령의 아랫배를 거의 가릴 정도로 크다. 워싱턴 _ 연합뉴스

대화 시작과 동시에 존 볼턴과 같은 초강경 네오콘을 국가안보보좌관에 앉힌 것은 ‘협박을 믿게 만드는 전략(credible threat)’이다. 대표적 선제타격론자이자 ‘전쟁에 반대한 적이 한번도 없는 인물’이라는 이야기까지 듣는 볼턴이 트럼프의 곁에 있다면 그의 협박을 북한이 흘려듣기는 어렵게 된다. 김정은도 북핵의 위기감을 최고조로 높이고 핵보유국임을 세계에 천명함으로써 몸값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직후 협상에 나서는 것은 담대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의 한계는 만약 협상이 어그러져 미국을 상대로 서로가 목숨을 건 폭주에 나설 경우 결국 막판에 방향을 틀어야 할 것은 북한이라는 데에 있다. 동원할 수 있는 위협의 한계 때문에 김정은은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전략에서는 트럼프의 판정승이다.

존 볼턴 임명이 발표된 지 나흘 후 김정은은 전격적으로 시진핑을 방문했다. 게임전략에서 네트워크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기존의 남·북·미 협상 네트워크는 트럼프에게 유리했다. 한·미가 한쪽에 있고 북한은 남한에 의존해야 하는 구도이다. 김정은은 중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틀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바꾸어버렸다. 북·중이 오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를 회복하고 협상 네트워크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미국은 졸지에 태평양 건너편의 관찰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임전략에서의 불리함을 네트워크전략으로 만회한 김정은은 남북정상회담에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고, 회담 직후 다시 시진핑을 찾아가 협상 네트워크에서의 북·중 고리를 더욱 다졌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자 트럼프는 회담 취소를 선언하고 판을 깨버린다. 결국 김정은은 굴욕적이지만 대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낼 수밖에 없었고, 트럼프는 즉시 이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상대가 배신하면 즉시 처벌하고, 상대가 협동으로 복귀하면 즉시 용서하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전략의 가르침 그대로이다. 

중국이 아직 배후에 버티고 있으니 트럼프의 게임전략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김정은이 잠시 점유했던 네트워크전략의 우위를 상당부분 무력화시켰다.

이렇듯 지금까지 트럼프와 김정은의 선택은 게임전략과 네트워크전략 두 가지로 대부분 설명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싱가포르 회담은 열릴까. 김정은은 크게 모욕당하지 않는 한 판을 깰 인센티브가 없다. 트럼프는 최대한의 압박이란 단어까지 거둬들이면서 김정은을 관리하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갑자기 협상 네트워크의 지형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판을 깨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회담은 예정대로 열릴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보상과 같은 입장료를 내지 않는 한 판에 끼어들기 어려울 것이다. 김정은은 애써 조금이나마 바꿔놓은 협상 네트워크에 미국의 또 다른 우방 일본이 끼어들어 판세를 바꾸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트럼프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문재인 대통령은 싱가포르로 날아갈까. 아마도 갈 것이다. 

하지만 일각의 예상처럼 비핵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전선언으로 체면을 살리는 것은 지금까지 보여준 트럼프의 게임전략에 크게 어긋난다. 비핵화의 확실한 약속을 받되 한 번의 회담으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종전선언이 의미 있는 중간매듭의 역할을 하는 것이 더 그의 전략에 잘 부합한다. 협상결과를 크게 ‘타결’과 ‘결렬’로 나눈다면 김정은은 완전한 타결에서 일부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결렬 쪽에 가까이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 중간선거와 노벨상 가능성 등을 생각하면 11월 이후 트럼프의 협상의지는 크게 낮아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김정은이 치러야 할 대가는 훨씬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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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총선을 앞둔 2012년 2월2일, 한나라당은 당의 명칭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이명박 정부 내내 그치지 않았던 여러 무리수와 부정부패 의혹, 이른바 ‘미디어법’ 날치기와 같은 퇴행적 국회 운영이나 ‘디도스(DDoS) 사건’과 같은 부정선거 의혹에 따른 여당의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방편이었다. ‘한나라당=차떼기당’이라는 오래된 비아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미지 쇄신 과정에 참여한 유명 카피라이터는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붉은악마와 같은 젊은 세대 선호와 기호를 반영했다”고 새누리당의 상징색을 빨간색으로 정한 이유를 밝혔다. 때만 되면 줄기차게 ‘빨갱이’ 시비를 걸던 당이 그리 나오니 잠시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제1당을 유지하였고, 그 여세가 이어져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빨강은 가시광선을 구성하는 색 중에서 파장이 가장 길어 다른 색보다 눈에 잘 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기 있는 색이었지만 붉은 염료가 귀하여 지체 높은 귀족이나 왕족이 사용하는 색이었다. 그래서 동서를 막론하고 고귀함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색이 같은 피의 상징이기도 하며, 그에 따라 생명, 정열, 사랑을 상징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박애, 진보, 혁명을 상징한다. 자본보다 사람을 우선시하고, 기득권에 저항하며, 과거의 폐습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빨강의 이미지이다.

빨강은 식욕을 돋우는 색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스트푸드점 간판은 빨강 일색이다. 이래저래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빨강이다.

동양철학에서 빨강은 오방색의 하나인데 남쪽을 상징한다. 즉 밝음과 따뜻함을 뜻하며 그래서 태극의 양이 붉은색인 것이다. 태극에서 음은 파란색인데 서양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가 빨강,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가 파랑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과도 묘하게 일치한다.

물론 파랑이 보수의 상징이 된 것에는 좀 더 다양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시민혁명의 상징색인 파랑, 하양, 빨강 중에서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 파랑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의 상징이 파랑이 되었는데, ‘자본의 자유’를 강조하는 현재의 보수주의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보수의 색이 파랑이 되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미국의 양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은 공식적으로는 상징색을 내세우지 않지만, 언론에서는 공화당은 파랑, 민주당은 빨강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2000년 대선에서는 각 언론사가 서로 맞춘 듯이 공화당은 빨강, 민주당은 파랑으로 표기하였다. 결국 공화당의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다. 만약 민주당의 고어에게 빨강의 이미지를 부여하였다면 좀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빨강을 빼앗긴 전통적 진보정당들이 모두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다가오는 제7회 지방선거에서는 기존 정당이 터부시하는 여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녹색당이 가장 진보적으로 보이는데, ‘녹색’은 왠지 강렬한 진보주의를 가리기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초록색은 수용, 인정, 안식, 안정, 평화를 상징하기에 빨강과 정반대의 의미를 상징한다.

&lt;맛의 배신&gt;이라는 책에 보면, 현대의 맛은 ‘가상현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질이 떨어지는 식재료에 이것저것 착색료와 착향료를 첨가하여 가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과 코와 혀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을 속일 수는 없기에 가짜 음식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채울 수 없고, 그래서 과식을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빨강을 차지하고 여전히 놓지 않는 모 정당을 보면 유권자를 가짜 맛으로 속이려 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 한다고 여겨진다. 순진한 생각이지만, 진짜 맛이 맞붙는 정치를 맛보고 싶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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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이 긍정적 효과를 보이고 있다며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지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야당과 보수진영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이 되레 일자리를 줄이고 저소득층의 소득을 갉아먹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고언은 귀담아 들을 대목이 많다. 그는 최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낙수효과 경제는 실패로 끝났으며 미국식 자본주의는 한계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지만 하위 90%의 평균 소득은 정체돼 있다는 게 근거이다. 그가 대안으로 내세운 것은 저소득층의 소득증대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분수효과이다. 그는 대침체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분수효과 정책이 영향을 나타냈다며 경제가 좋지 않을 때 분수효과는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메리칸드림은 이미 미신이 됐다’는 스티글리츠 교수의 발언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에서도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운 불평등 사회가 되었다는 사실은 상식이 되었다. 시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것도 사회적 동의가 끝난 사안이다. 이런 측면에서 “수요가 충분하지 않을 때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은 좋은 방식이고, 이외에도 노동자 임금에 정부보조금을 더해줘야 하며 시장이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면 정부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스티글리츠 교수의 진단은 타당하다.

한국개발연구원이 4일 발표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효과 보고서도 이런 주장과 맥이 같다. 연구원은 “지난해 최저임금 인상으로 고용이 3만6000~8만4000명 감소했지만 정부 지원 등으로 고용감소 효과는 아주 작다”고 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을 막기 위한 일자리안정자금 3조원이 큰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저소득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 요구이다. 인상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을 빌미로 작업을 멈추게 하려는 것은 기득권 지키기에 불과하다. 부작용은 끊임없이 보완해가야 한다. 정부도 제대로 대처하고 관리하고 있는지 자문하고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에도 1분위 소득이 더 낮아진 것은 최저임금 인상만으로는 빈곤 문제를 풀 수 없는 한계 계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을 위한 별도의 복지대책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이를 위한 재원마련 논의도 미뤄서는 안된다. 불평등을 막기 위해서는 공정과세도 절대 필요하다. 부동산 보유세를 필두로 질서 있는 증세 논의의 물꼬를 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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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6월 지방선거 지원유세 포기를 선언했다. 예견됐던 일이다. 그간 한국당 후보들은 네거티브 이미지가 강한 홍 대표의 지원이 표 확장에 도움이 안된다고 보고 노골적으로 피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홍 대표는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달 31일부터 포항, 성남, 천안, 부산, 울산에서 지원유세를 했지만 광역단체장 후보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지원유세 중단은 그를 기피하는 이른바 ‘홍준표 패싱’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고 볼 수 있다. 후보들이 당 대표를 공공연하게 멀리하는 것은 정치판에서 듣도 보도 못한 현상이다. 제1야당 대표가 전국 단위 선거를 열흘 남겨놓고 지원유세를 포기한, 정치사상 초유의 일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홍 대표는 지원유세를 중단한 다음 날 난데없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판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미·북 회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면서 “외교도 장사로 여기는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호언장담하던 북핵 폐기는 간데없고, 한국의 친북 좌파 정권이 원하는 대로, 한국에서 손을 떼겠다는 신호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북·미 정상회담 과정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최악의 시나리오”라고도 했다. 지방선거를 맞아 안보 이슈를 내세웠다가 먹히지 않자 다시 경제심판론을 부각시키더니, 이번엔 미국 대통령까지 도마에 올린 것이다. 홍 대표는 올 초 미국을 직접 찾아 전술핵 도입을 주장하고, 평창 올림픽 때는 ‘평양 올림픽’이라는 어이없는 주장으로 국제적 망신을 산 바 있다.

홍 대표의 연이은 막말과 좌충우돌식 돌출행동, 강경보수를 넘어 극우로 대변되는 정치성향 등은 이미 신물이 날 만큼 지적받아 왔다. 한국당 후보들이 그의 방문에 손사래를 치는 것도 이런 민심 이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 눈감은 지나친 이념 공세는 건강한 보수층은 물론 그나마 남은 지지자마저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국내서도 모자라 한술 더 떠 이제는 국제적으로도 보수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으니 더욱 할 말이 없다.

시민을 좌우로 편가르기하고, 친미주의 아니면 빨갱이로 몰아 자신들의 지분을 손쉽게 가져갔던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 지금 정치적 자산으로 여기던 모든 것을 잃고,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있는 낡은 보수의 추락을 목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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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낮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의 4층 상가 건물 붕괴 사고는 재개발 구역 노후 건물에 대한 관리부실이 빚은 ‘인재(人災)’였다. 다행히 휴일이라 거주민 1명이 부상하는 데 그쳤지만, 평일이었다면 1~2층 식당이 손님들로 북적일 점심시간대여서 대형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1966년 지어진 이 건물 1~2층은 음식점으로, 3~4층은 주거공간으로 쓰였다.

주민들은 인근 아파트 공사가 시작된 지 반년이 넘은 지난해 여름부터 붕괴조짐이 보였다고 했다. 붕괴된 건물로부터 30m쯤 떨어진 곳에서 기존 건물을 부수는 발파작업, 지반공사를 위한 대규모 굴착작업 등이 이뤄지면서 이 충격으로 건물이 흔들리거나 균열이 생겼다고 증언했다. 지난 5월에는 건물 외벽이 불룩하게 튀어나오고 인테리어 마감재가 벽에서 뜨는 현상이 발생해 식당 주인이 관할 용산구청에 제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청 직원들이 현장을 둘러본 뒤 건물주에게 안전점검을 권고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용산구가 별도의 안전조치를 하지 않은 이유는 현행법상 이 건물 안전관리가 재개발조합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상 정비구역(재개발구역) 내 건물 안전관리는 재개발조합이 담당하도록 돼 있다. 이 때문에 용산구의 위험시설물 목록에서 빠져 있었고, 별도의 안전점검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건물 일대는 2006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됐지만 관리처분 인가가 나지 않아 철거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비구역으로 지정됐더라도 건물을 철거하려면 관리처분 인가를 받아야 한다. 요컨대 정비구역에 있지만 철거가 미뤄진 노후 건물들은 안전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셈이다. 더구나 인근에서는 건물 신축을 위한 공사가 이뤄지게 마련이어서 지반침하 등으로 비슷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서울시는 정비구역으로 지정됐지만 관리처분 인가가 나지 않아 건물을 철거하지 못하는 309곳을 대상으로 노후 건축물 긴급 안전점검을 벌이기로 했다고 4일 밝혔다.

재발 방지를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이번 기회에 법제도상의 미비점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정비구역 내 철거가 지연되면서 안전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후 건물의 안전관리를 재개발조합이나 건물주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지방정부도 책임을 지도록 법령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제도의 결함으로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잃는 참사를 반복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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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이 입구를 가로막았다. 까만색 유리문이라 안쪽이 보이지 않는다. 업종을 바꿨을까? 문을 열어 보았다. 갤러리가 맞았다. 작품 수가 기대보다 적었다. 직원에게 다른 공간은 없느냐고 물으니 건물 구조를 그린 종이를 건넨다. 아무리 둘러봐도 통로를 찾을 수 없다. 문밖에 나가도 부속 건물은 없다. 안으로 돌아와 고민을 거듭하다 다시 물었다. 직원이 가리킨 방향에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문이 열리자 식당이 나온다. 어디지? 층수를 잘못 눌렀나? 두리번거리며 식당으로 나오니 다른 갤러리 공간이 비로소 드러났다.”

지인이 어느 갤러리에서 겪은 일을 e메일로 전했다. 갤러리 입구에서 ‘어디 가냐’며 저지를 당한 내 경험에 비하면 별일도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림 애호가’가 아니라 ‘그림 도둑’처럼 생겨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농담 반 한다.

갤러리인가? 식당인가? 지인의 에피소드엔 갤러리 공간의 본질에 관한 의문이 담겼다. 갤러리 일반에 관한 여러 함의도 들었다. 그도 나도 성낼 이유가 없다. 갤러리는 미술품을 사고파는 곳이다. 갤러리 대표는 옛말로 화상(畵商)이고, 영어로 딜러(dealer)다. 미술품을 팔아 이윤을 추구한다. 근대 이후 상품 아닌 예술이 어디 있나? 책도, 영화도, 무용도, 연극도 마찬가지다. 갤러리만 상업적인가? 국립미술관에도 재벌이 그 이름을 그대로 달고 스폰서를 한다.

지인은 ‘전시’를 향유하지 못해 화가 났다. 설명도 듣지 못하고, 자료도 받지 못했다. 이것도 갤러리를 탓할 일이 아니다. 갤러리는 그림만 보러 오는 이들을 환대하는 곳이 아니다. 미술관 보도자료와 갤러리 보도자료는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다. 갤러리 자료엔 ‘관람’이란 말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기자 ‘간담회’(懇談會, 정답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라니!) 때 관람을 독려하는 일도 없다. 갤러리 ‘전시’는 컬렉터, 언론이나 미술 관계자들을 위한 것이다. 컬렉터들은 따로 약속을 잡고 와 안내를 받는다. 보도는 스크랩돼 작품 ‘가치’(라고 쓰고 ‘가격’이라 옮긴다)를 높이는 지표가 된다. 어느새 ‘그들만의 리그’에 포섭된다.

지인은 갤러리 전시 기사를 보며 상업공간을 관람공간으로 착각했다. 문화공간처럼 오도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미술 저널리즘’을 고민한다. 더 확대해 ‘문화 저널리즘’이라고 할 때, 그 작동 방식은 비슷하다. 책이든, 공연이든, 영화든 창작자가 새 창작물을 내놓으면 출판사나 기획사, 영화사는 ‘간담회’를 열고, 마케팅한다. 수용자의 구매 과정에 저널리즘은 비판이든, 호평이든, 정보 전달이든 개입한다. 다만, 미술품은 다른 ‘문화상품’보다 훨씬 비싸다. 대량 복제할 수도, 자주 반복할 수도 없다. 컬렉터만 보는 전문지가 아니라면, 미술 전시 기사에서 중요 기준은 ‘관람’이어야 한다.

갤러리가 ‘관람’에서 미술관을 대신하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시장미술’에 집중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미술진흥 중장기계획’을 보면, “대형 화랑들이 경매를 겸업, 독과점에 따른 불공정이 심화”됐다고 나온다. 신진 작가 발굴을 등한시한다는 지적도 있다. 문체부도 전시공간으로 보지 않는다. 누구든 미술품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는 미술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갤러리를 두곤 ‘중저가 미술품 소비·대여 확대’ 같은 목표만 세웠다.

미술을 좋아한다면 갤러리를 외면할 수만은 없다. 한국 거장과 해외 유명 작가들이 종종 갤러리를 통해 ‘소개된다’. ‘좋은 작품’을 볼 기회가 ‘주어진다’. 환대받지 못한들 어떤가? 갤러리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을 이끌어낼 일도 아니다. 갤러리 모두가 ‘관람객’을 냉대하지도 않는다. ‘식당에 딸린 갤러리’ 구조가 아니라 미술관을 지향하는 갤러리도 있다. 그저 관람객에 무심할 뿐이다. 지인에게 하고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무심히 또 담담히 작품 관람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갤러리로 가는 발걸음을 멈출 필요가 없다.

<김종목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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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둥 내 낭군 어허 둥둥 내 낭군, 도련님을 업고 보니 좋을 호자가 절로 나, 부용 작약의 모란화, 탐화봉접이 좋을씨구.” 춘향전 사랑가의 한 대목에 등장하는 식물들은 아마 요샛말로 원예종일 것이다. 야생의 짐승을 가축화하듯 화단의 식물로 바꿔놓은 것들이다. 나중에는 베갯머리나 이불의 무늬로 들어앉아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싸움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뜰 안의 손바닥만 한 정원으로 불러들인 작약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하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으니 멀리 자연에서만 친견할 수 있는 종류도 있다. 참작약, 백작약 그리고 산작약. 이 중에서 산작약은 무척 귀한 꽃이다.

ⓒ이해복

 

꽃을 두고 우열을 가리는 게 참 바보 같은 일일지라도 산중을 헤매는 동안 고만고만한 것을 보다가 홀연 큼지막하게 우뚝 서 있는 꽃 앞에서 눈이 번쩍 휘둥그레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흰 꽃잎에 노오란 기관이 오밀조밀하게 밀집한 백작약. 깔끔하고 기품 있다.

갑자기 훅 더워졌다. 작열하는 태양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날씨다. 영월의 어느 야트막한 산의 계곡을 줄창 헤매고 다녔다. 사전정보를 갖고 찾아간 산작약은 누군가 연약한 꽃대를 댕강 분질러놓았다. 시대를 격하여 나타난 변사또 같은 놈이 저지른 소행인 듯했다. 씁쓸한 기분을 달랠 겸 더욱 헤매다가 뜻밖의 산작약을 만났다. 백작약은 여러 번 보았지만 산작약은 처음이다. 꽃에게는 나보다 먼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어느 큼지막한 애벌레가 푹신한 수술과 암술에 파묻혀 꽃잎에 주둥이를 대고 있다. 나 따위는 도저히 침범하지 못할 자연끼리의 접촉, 그들만의 사랑법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산작약은 무리지어 있지 않다. 홀로 한 송이만 있어도 주위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원줄기에서 뻗어나간 잎줄기에 3장의 잎이 달린다. 껑충한 대궁 끝에 강렬하기 이를 데 없는 오직 하나의 꽃을 올려두는 산작약. 보물을 두고 오는 것 같아서 자꾸 뒤돌아보면, 빛과 그늘을 하나로 묶으면서 그윽하게 서 있는 산작약. 여러 장의 잎을 그러모은 뒤 하나의 고고한 꽃으로 통일(統一)시키는 듯한 산작약!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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