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적이고, 역사적인 날이다. 엄격히 말해 그런 날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날이다. 미국과 북한의 두 정상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비핵화와 체제보장,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를 구축해 나갈 대장정의 서막을 여는 날이다. 그리고 세계가 ‘정말로’ 이를 주목하고 있다. 건조하게 말하자면 서로의 잇속을 채우고 이에 부합하는 최대한의 명분을 얻고자 함이지만, 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국가로서의 본능적 행위가 이루어지기까지 7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70년이라니… 오나전 캐안습 우리 민족의 일만 아니라면 몰라, 니 맘대로 하세요 생각이 다 들 정도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이 회담의 시작과 협상 과정… 순탄치만은 않았던 그 과정과 하물며 두 정상이 어느 호텔에 묵고 어디로 이동하고 그 일거수일투족을 우리가 소상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안다는 사실. 우리가 ‘알 수 있다’는 (너무나 일상적이라 따로 인식하기도 쉽지 않은) 이 사실이, 그러나 어쩌면 이번 회담이 증명하는 남북의 가장 큰 성과일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전과 평화란 두 단어가 당연히 대두될 것이다. 그래서 또 분명, 이 회담은 한국전쟁과 분단을 기점으로 한 것이겠지만… 남과 북이란 기차가 달려야 했던, 또 달릴 수밖에 없었던… 한 치도 벗어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레일의 출발점은 보다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거슬러 올라 1905년을 말해야 할 것 같다. 러일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던 해이고, 연이어 포츠머스조약, 을사조약이 줄줄이 체결된 해였다. 당시 미국의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누군지, 또 그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어디서 어떻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아는 대한제국의 국민은 없었다. 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조약도 마찬가지…. 비로소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나서야 그나마 신문이라도 읽을 수 있는 자들이 예컨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과 같은 논설을 읽고 분노할 수 있었다.

미디어의 발전상을 논하기 이전에 우선 우리는 대화의 상대가 아니었다. 협상이나 회담의 대상이 아닌 객체였고, 알릴 필요도 알 필요도 없는 그 무엇(미안하지만 이 말을 대체할 다른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라고 나는 생각한다. 잊어도 좋을 만큼 긴 세월이 지나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 사라진 민족과 국가도 실은 부지기수기 때문이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식민지 지배도 전쟁과 분단도 또 냉전의 오랜 대치와 경쟁도…. 크게 보면 1905년에 내재된 시대적 부산물, 내지는 옵션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이지 더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만약 냉전의 승자가 달랐다면, 상대해주지 않는 러시아와의 협상과 회담을 위해 기필코 핵을 개발해야 했던 것이 바로 우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민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이런 타이틀도 그래서 실은 전부 허망한 말들이다. 1905년에 깔린 이 레일 위를 달리기 위한 옵션, 내지는 미션… 번호표에 불과한 말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세월 우리가 달려온 이유는 어쩌면 동등한(까지는 아니더라도) 협상이 가능하고 조약과 회담이 가능한 국가… 최소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지을 수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이든 북이든, 1905년의 상황을 생각하면 도무지 우리가 어떻게 이 길을 달려왔는지, 그리고 또 살아남았는지… 가늠이 서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일이 아니라면 이거 설화입니까? 생각이 다 들 정도다. 한 세기가 흘렀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싱가포르의 테이블을 중재하고 마련하고 그곳에 앉는 직간접적 당사자가 되었다. 이 회담의 시작과 협상 과정… 순탄치만은 않았던 그 과정과 하물며 두 정상이 언제 호텔에서 나와 회담장으로 이동하고 그 일거수일투족에… 공동으로 발표할 선언문에 담긴 전체 그림을 소상히 보고 듣고 아는 주체가 될 것이다. 안다는 사실.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이 사실이 그래서 중요하다. 협상과 회담은커녕, 통보조차 받지 못하고 올라야 했던 1905년의 레일에서 우리가 비로소 벗어난 증표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 2018년 6월12일 바로 오늘을! 즐기고 만끽하자. 우리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있고 누구나 알다시피 겸손은 힘든 것이다.

세기적이고 역사적인 오늘을 어떻게 보낼 생각이오?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으며 보낼 거라 답하고 싶다. 정말이지 그들의 노랠 들으며 두 정상의 회담을 라이브로 지켜볼 생각이다. 방탄소년단의 ‘방탄’은 총알을 막아낸다는 뜻인데, 10대와 20대에게 가해지는 모든 억압을 막아내고 끝내 자신의 길을 찾는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알 길 없이 들을 길도 없이… 근대라는 시간을 가질 일말의 여유 없이… 그래서 터무니없이 가혹하고 뒤늦은 성장통을 겪어야 했던 남과 북이 오늘, 그리고 이제… 새로운 길을 가려하고 있다. 축하하자. 이 두 명의 방탄소년이 걸어 갈 스스로의 앞길을. 서로가 이행해야 할 저마다의 앞길을… 스스로가 마련한 새로운 레일의 시공식을 지켜보며 오늘 하루를 축복하자.

<박민규 | 소설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올 6월 발전업계와 산업계, 환경정책 결정자들 사이의 핫이슈는 단연 ‘2030 온실가스 감축 로드맵’이다.

2021~2030년 한국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과 감축 부담 주체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논의의 핵심은 ‘해외배출권’이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 일부를 해외탄소시장에서 산 배출권으로 충당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연간 1조~2조원. 이 부담을 정부(국민의 세금)와 산업부문, 화력발전 업계 가운데 누가 감당할 것인가에 관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문제를 푸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2009년 코펜하겐 기후협상에서 한국이 2020년까지 현재 추세 배출전망치(BAU) 30%를 줄이겠다고 세계에 공언할 때만 해도 없었던 ‘해외배출권’이라는 개념이 굳이 도입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보면 된다.

이야기는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탄소 녹색성장을 기치로 내걸었던 이명박 정부는 한국이 온실가스 감축 비의무 국가였는데도 2020년까지의 배출량을 5억4300만t으로 설정, 국제적 찬사를 받았다. 사건은 이명박 전 대통령 퇴임일이자 박근혜 정부 첫날인 2013년 2월25일 벌어졌다. 이날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는 건설비 규모가 약 20조원에 달하는 신규 석탄화력 7GW, 가스복합 3.2GW가 포함된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6차 전기본)을 발표했다. 이 계획이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미칠 영향은 막대했다. 톰슨로이터는 6차 전기본으로 인해 한국 온실가스 배출량이 약 1억t, 다시 말해 20%가량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후 2015년 파리협정 협상이 시작됐다. 신기후체제하에서는 선진국, 개도국 할 것 없이 모든 당사국이 온실가스 감축 의무국이므로 한국도 2030년 감축 목표를 제출해야 했다. 6차 전기본대로라면 기존 목표를 준수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2015년 6월11일, 한국은 결국 원래 약속에서 약 1억t 늘어난 6억5000만t 내외의 4개 시나리오 중 하나를 채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바로 다음날,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청와대에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한국이 최대한 야심찬 목표를 제시해달라’는 취지의 주문이었다.

이는 유명한 청와대 서별관회의로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탄생한 게 바로 ‘해외배출권’으로 1억t을 줄이자는 안이었다. 쉽게 말해 (6차 전기본 때문에) 기존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우니, 외국에서 감축 활동한 분량을 한국의 실적으로 인정받겠다는 생각이었다. 책임자는 떠났고, 여기에 드는 비용만 남았다. 국회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30년까지 해외배출권 조달에 9조원 내지 18조원이 필요하다. 한국환경공단의 계산은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돈을 낼 것인가. 산업계와 발전업계는 국민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비용이 발생한 경위를 보면 화력발전사업자, 특히 6차 전기본의 혜택을 입은 주체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이들 사업이 전기본에 반영될 당시에도 한국 온실가스 목표는 분명했다. 사업자들은 향후 사업 제약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쉽게 눈감아 버렸다.

온실가스 의무감축분을 고려하지 않고 신규 석탄발전소를 대거 늘리기로 결정한 산업부에도 책임은 있다. 지금이라도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산업부는 화력발전, 특히 신설 화력발전이 해외배출권 책임을 부담하도록 체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정부가 해외배출권 비용을 세금을 통해 손쉽게 국민에게 전가하는 상황이다. 이는 포스코에너지, 삼성물산, SK가스 등 석탄발전소를 운영하는 몇 개의 대기업에 수십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공정한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문재인 정부가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김주진 | 변호사·(사)기후솔루션 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전국법관대표회의가 11일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형사절차를 포함하는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전국의 변호사 2000여명도 시국선언을 통해 검찰 수사와 김명수 대법원장의 관련자 고발 등을 촉구했다. 법조 삼륜의 두 축인 판사와 변호사들이 일제히 양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의 ‘재판 거래’ 의혹 수사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나머지 한 축인 검찰은 이미 수많은 고발장을 받아든 채 수사 착수 시점을 저울질하는 터다. 이제 김명수 대법원장이 용단을 내리는 일만 남았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소속 대표판사 115명은 이날 임시회를 열고 10시간 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4개 항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들은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관해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이번 사태로 주권자인 국민의 공정한 재판에 대한 신뢰 및 법관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훼손된 점을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어 형사절차를 포함하는 진상조사와 책임 추궁,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적이고 실효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함을 분명히 했다. 앞서 지난 1~8일 전국 33개 법원 중 21곳에서 열린 판사회의에서도 대다수가 검찰 수사를 촉구한 바 있다. 법원이 직접 고발이나 수사의뢰를 해야 할지에 대해선 견해차를 보였으나, 수사 자체에 명시적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은 차관급인 서울고법 부장판사 회의가 유일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규탄 전국 변호사 비상모임’이 주도한 변호사 시국선언에는 14개 지방변호사회 회장단 중 9곳이 참여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시국선언 때보다 참여한 회장단이 많았다. 변호사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들은 서울지방변호사회 앞에서 시국선언을 한 뒤 대법원 앞까지 이례적으로 가두행진을 벌였다. 재판 거래 의혹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과거사 사건 피해자단체들도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양 전 대법원장 등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각각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지만, 사법부는 오로지 주권자의 믿음을 권력의 존립기반으로 삼는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의 조사보고서는 양승태 대법원이 자신들의 존립기반을 헌신짝 취급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상고법원 신설이라는 사익을 실현해줄 청와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법원이 주권자의 신뢰를 내팽개친 증거를 목도하고도 법원장 35명을 비롯한 일부 고위법관들은 검찰 수사가 사법권의 독립을 해친다며 ‘셀프 조사’로 끝내자고 한다. 김 대법원장도 “대법관들 의견까지 들은 뒤 심사숙고해 결론을 내겠다”는 입장이다. 현 대법관들 가운데 절반인 7명은 재판 거래 의혹을 받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상고심에 참여했던 인사들이다. 검찰 수사가 개시되면 조사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사들에게 형사조치 여부 등 후속 대책을 묻겠다니 납득하기 어렵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부 수장이기 이전에 시민으로부터 사법권을 위임받은 공직자이다. 김 대법원장이 지금 새기고 실천해야 할 원칙은 명확하다. 사법권을 맡긴 시민의 뜻이 준거틀이 돼야 한다. 지난 4일 공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선 ‘사법부 판결을 불신한다’는 응답(63.9%)이 ‘신뢰한다’는 응답(27.6%)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시민과 대다수 법관은 이미 의사를 분명히 했다.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사법농단 사태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라는 게 그들의 뜻이다.

김 대법원장은 12일 북·미 정상회담과 13일 지방선거 일정이 마무리된 후 최종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의견 수렴은 할 만큼 했다. 이제는 결단하고 실행할 때다. 김 대법원장은 환부를 도려내는 발본(拔本)적 조치에 나서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드디어 그토록 노심초사하며 기다려왔던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한반도의 비핵화와 종전 및 평화체제 수립의 과정은 불가역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대로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면 일어나지 못했을 일이다. 국민들의 성원이 뜨겁다. 덕분에 이번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 예상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번 선거 전과 후로 나뉠 것이다. 이번 선거는 그동안 우리 사회와 정치를 모든 면에서 비틀어 왔던 비정상적 분단체제가 항구적 평화체제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치러진다. 여기서 냉전 극우주의 세력인 자유한국당이나 보수를 혁신한다면서도 안보보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바른미래당은 정치적으로 설 자리가 없음이 확인될 것이다.

보수 진영이 기왕의 부패에 더해 평화라는 이 압도적인 시대정신을 외면한 대가다. 이제 지역 차원에서도 주류 교체가 이루어져 민주당이 우리 사회의 중심 정당이 된다. 그만큼 민주당이 져야 할 역사적 책무도 크다. 가야 할 길도 분명하다.

아무래도 제일 중요한 과제는 늘 분단을 핑계로 정당화되어 왔던 우리의 일그러진 ‘결손 민주주의’를 온전한 민주주의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민주당은 무엇보다도 좌초된 개헌부터 다시 추진해서 새 민주주의 체제를 앞장서 준비해야 한다. 기왕의 대통령 발의 개헌안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 국회 차원에서 지난 30년 동안의 우리 민주주의 한계를 더 살피고 국민의 기본권을 더 잘 보호하며 곧 도래할 한반도 평화체제의 지상명령을 더 올곧이 담아낼 헌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개헌은 촛불혁명의 완수라는 의미와 함께 분단체제가 우리 사회와 정치에 가한 질곡을 완전하게 떨쳐내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선언하는 함의도 가질 것이다. 물론 선거법 개정도 미룰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시민들의 물질적 안정이 확보되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온전할 리 없다. 민주당은 촛불혁명의 정치적 집행자로서 또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자로서 한동안 다수당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지위는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광범위한 세력들로부터 심층적이고 장기적인 지지를 얻어내지 않고는 안정적일 수 없다. 민주당은 유럽의 사회민주당이나 뉴딜 때의 미국 민주당과 같은 진보적 기축 정당이 되어 복지국가를 위한 확고한 정치적 동맹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포용적 복지국가는 평화체제의 가장 직접적인 함축이다.

물론 우리는 유럽이나 미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런 복지동맹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서도 ‘유럽의 지방화’가 필요하다. 유럽의 경험을 참조하되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제 19세기 이래 유럽 자본주의의 발전 경험에만 기댄 진보 정치 모델과 결별해야 한다. 민주당이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서구적 진보 정당이 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촛불혁명을 비롯해 우리의 현대사가 명확하게 보여준 건 ‘시민적 진보’의 길이다. 우리의 복지국가 기획은 광범위한 계층의 시민적 연대라는 토대 위에 서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과연 이런 과제를 감당할 만한 충분한 역량과 비전과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가령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의 많은 후보들이 과거 보수 진영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당이 이제 우리 정치의 새 주류로 등극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당의 인적, 이념적 한계와 그 모호한 정체성도 웅변한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이런 한계와 모호성을 계속 방치한다면, 민주당도 결국 특정한 종류의 기득권 정당으로 전락하여 스스로 몰락의 문을 열게 될지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진보 정당이 성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새로운 종류의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할 수도 있다.

토마 피케티는 최근 서로 다른 선거 제도와 정치적 전통을 가진 프랑스, 영국, 미국 모두에서 왜 민주주의가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극우 포퓰리즘에 포획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그 주된 이유는 중도 좌파 정당들의 정체성 변질이다. 간단히 말해 세 나라 모두에서 본디 하층 노동계급과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하던 중도 좌파 정당들이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은 소수의 ‘브라만 좌파’(강남좌파)를 위한 정당으로 바뀌면서 절대 다수 하층 시민들의 처지와 이해관계를 무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민주당이 바로 이런 길로 빠지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이번의 최저임금법 개정이 그 징후가 아니길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나는 서울에서 나서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 생활을 할 때까지 서울특별시민으로 살았다. 비록 변두리를 전전하며 살았지만, 거의 27년을 서울에서 교육, 편리한 대중교통, 인접한 문화시설 등등을 누렸다. 평생 살 것이라 생각했던 서울살이를 접은 것은 두 번째 삶을 인천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1996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인천의 한 시민문화재단에서 계간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22년째 살고 있다. 내 삶의 절반을 인천에서 사는 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태어나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렇다. 정태옥 전 자유한국당 대변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그는 2010~2013년 인천시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바 있다. 그는 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런저런 행사장에서 그를 몇 번 만나본 적이 있다. 1986년 행정고시로 공무원이 되었고, 서초구와 서울시를 거쳐 인천에서 일했고, 다시 안전행정부 지역발전정책관, 지방행정정책관을 거쳐 대구광역시 행정부시장을 역임하다가 지난 20대 국회에서 대구 북구갑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공무원 시절 그의 전문성도, 정치적 뿌리도 지역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살고 망하면 인천 산다)’ 발언을 처음 들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인천 시민들은 이런 식의 비하 이외에도 ‘수도 서울의 관문’ 따위의 다양한 비하발언을 접해왔다. 어떤 곳에 사는 사람이 남의 도시로 들어가는 대문이 되고 싶겠는가? 그가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비록 인천에서 공직자 생활은 했지만, 마음속에 인천과 시민에 대한 애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30년째 교사생활을 하는 어떤 분은 얼마 전 서울 목동 소재 사립고등학교 교사에게 “우리 학교가 명문으로 뜨고 있는 건 인천에서 온 애들 때문이에요. 우리 학교에서 SKY 가는 애들은 그 애들이에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인천은 해마다 성적이 우수한 중학생 가운데 상당수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이주한다. 이른바 인천 토박이 중에도 원도심에 살다가 신도심으로 갔다가 부천 상동으로, 다시 서울 목동으로 가는 경우가 무척 많다. 그 결과 목동의 아파트 값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수도권은 물론 서울과 먼 타시·도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다만 그들 대부분은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 과정에서 ‘인(in) 서울’하게 되는 것에 비해 수도권 인근 지역은 고교 시절부터 ‘인 서울’이 진행된다. 자녀교육에 관심이 있고, 동원할 자금력이 있는 사람은 부동산으로 재미를 볼 수도 있고, 다른 방식의 재테크도 할 수 있어서 자녀의 학력도 대물림될 것이다. 이를 계급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나 지역 차원에서 보면 지역의 게토화와 공동화(空洞化) 현상이다.

서울은 주변의 인재와 자원을 빨아들이며 끝없이 팽창하는 블랙홀이다.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고, 폐기물을 지방으로 전가한다. 그 결과 서울을 제외한 주변 지역은 사헬벨트(Sahel belt)처럼 말라 죽는다.

1991년 지방의회,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면서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지 어느덧 30년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과 자치는 여전히 머나먼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이기에 표를 달라고 요구하는 정당과 정치인의 입에서 저와 같은 지역비하 발언이 거침없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돈은 지역에서 벌고 자식은 서울로 보내면서도 끝없이 지역 사랑, 지역 불균형 발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사람들은 부동산계급사회 혜택과 서울중심주의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솎아내는 몫은 물론 주권자인 시민에게 있다.

고향을 떠나 대처에서 서울 시민 행세하다가 특정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연고지랍시고 내려와 “우리가 남이냐”를 외친다. 똥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일이 반복되는 한, 지역은 서울의 식민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공천 준 사람에게만 충성하기 때문이다. 이들만 막아도 지금보다 지역의 삶은 한결 나아질 것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했다. 내가 사는 곳의 주인이 되면 그곳이 어디라도 참된 삶의 터전이 되리라는 의미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일반 칼럼 >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의하지 않더라도 비핵화는 시작됐다  (0) 2018.06.19
성실 사회  (0) 2018.06.15
‘이부망천’  (0) 2018.06.12
쉴 곳 없는 일터의 불평등  (0) 2018.06.08
‘빨간 맛’의 배신  (0) 2018.06.05
당위가 무너진 정글, 먼 나라 얘기일까  (0) 2018.06.0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강원도 인제의 대암산 용늪은 워낙 중요한 생태계보전지역이라 등산하는 것도 힘들지만 입산하는 것도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여러 기관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하고, 생태마을의 주민 가이드와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 나무꾼의 후예를 뒤따르는 울긋불긋한 복장의 등산객들. 널찍한 임도를 따라 걷는데 쉬어가라는 표정으로 너래바위가 앉아 있다. ‘대암산에 나무하러 오던 나무꾼들이 쉬어가던 곳’이라는 안내문도 실제 붙어 있다.

지금은 얕은 개울 위의 출렁다리로 건너지만 예전에는 ‘사방이 하나의 넓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어느 깊숙한 평전에 이르니 또 한번 나무꾼이 등장한다. 지명이 어주구리(魚走九里)라는 곳인데 이런 재미있는 사연이 적혀 있다. “용늪에서 살고 있던 물고기가 용이 승천하는 소리에 놀라 도망치다가 나무꾼에게 잡혔는데 다음날 나무꾼이 용늪에서 도망쳐온 거리를 재어보니 십리(十里)에서 조금 모자라는 구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족은 들어보았지만 어족(魚足)은 처음 듣는다. 용은 물론 뱀과 물고기 그리고 나보다 먼저 이 길을 지나간 나무꾼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하나 엮으려는데, 길섶의 난초 하나가 맞춤하게 눈으로 들어온다. 많은 동물들의 발길을 용케 피하고 오늘 나의 눈길에 걸려든 그 꽃의 이름은 감자난초.

평생은 아니었지만 한나절이나마 어설픈 나무꾼이었던 시기가 내게도 있었다. 그땐 소먹이도 같이했다. 골짜기에 소를 풀어놓고 멱을 감은 뒤 지게 지고 다시 산으로 갈 때 감자 몇 개를 챙겼다. 이른바 ‘감자산꽃’을 하려는 것이다. 개미집처럼 정교하게 땅을 파고 돌을 달군 뒤, 물을 뿌려 그 증기로 칡잎에 싼 감자를 쪄서 먹는 우리들의 산중놀이였다.

감자난초는 땅속으로 두더지처럼 기어가던 뿌리의 일부가 비대해진다. 그 알줄기가 마치 감자 같다고 해서 감자난초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알줄기에서 단도 같은 잎이 1~2장 나오고 꽃대도 꼿꼿하게 뻗어나온다. 감자산꽃할 때 먹은 퍽퍽한 감자맛을 추억하며 올망졸망 달린 꽃들을 쓰다듬어 주었다. 감자난초,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일반 칼럼 > 이굴기의 꽃산 꽃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의나물  (0) 2018.06.19
감자난초  (0) 2018.06.12
산작약  (0) 2018.06.05
바위종덩굴  (0) 2018.05.29
왕제비꽃  (0) 2018.05.23
대성쓴풀  (0) 2018.05.1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미국 스포츠전문 매체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가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 대표팀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은 들러리”.

아, 화가 난다. 어쩌다 이런 촌평까지 듣게 되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정작 당신네 팀들은 지역예선 5위로 탈락했잖아, 라고 소리치고 싶다. 아무튼, SI는 러시아 월드컵 32개국 전력을 6개 등급으로 분류했다. 우리 대표팀은 최하위다. 호주, 이란, 파나마,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튀니지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만약 우리가 저 6등급 팀들과 한 조가 되어 맞붙는다고 해도 16강이 가능할까, 조심스럽다. 개최국 러시아, 아시아의 강호들, 더욱 굳세고 빨라진 호주를 이길 수 있을까.

오스트리아 레오강 캠프에서 들려오는 소식 또한 상큼하지 않다. 사실상 1.5군인 볼리비아를 돌파하지 못했다. 신태용 감독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투톱 김신욱과 황희찬을 ‘트릭’이라고 했다. 트릭?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주인공이 내뱉는 마지막 대사만큼이나 난해하다. 어느 팀을 상대로 한 연막작전인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002 한·일 월드컵 때 마지막 평가전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였다.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솔 캠벨과 경합했던 우리 선수는 ‘콘크리트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솔 캠벨은 전성기 때 신장 189㎝에 무려 100㎏의 거구로 100m를 10초대에 주파했다. 스웨덴이나 독일과 맞싸운다면 그런 정도의 평가전 상대여야 했다.

마지막 평가전은 세네갈인데, 장외 정보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비공개는 어쩔 수 없다 해도, H조에서 일본과 맞붙는 세네갈에 조금 이로울 뿐, 이 평가전을 ‘가상의 멕시코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와 일본이 많이 다르듯, 세네갈과 멕시코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곧 대회가 열리는데 무슨 불평의 소리냐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을 해도 시원찮은 마당에, 라고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당연히 그렇다. 그 점에서는 정말 ‘모두가 한마음’이다. 9회 연속 월드컵 진출은, 전 세계 6개 나라뿐이다. 게다가, 지난번 칼럼에 썼듯이, 공은 둥글다. 신태용 감독도 스웨덴의 평가전을 본 후 그랬다. “공은 둥글다.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고 말이다. 기본적인 태도는 이렇게 모두가 같다.

그럼에도 신태용 감독이, 그리고 이영표 해설위원이 한 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 감독은 5월19일,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이 평상시에도 축구를 좋아하고 프로리그 관중들 꽉 차고 그런 상태에서 대표팀 감독을 욕하고, 훈계하면 난 너무 좋겠다”면서 “그러나 축구장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 월드컵 때면 3000만명이 다 감독이 돼서 죽여라 살려라 하는 게 아이러니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덧붙이기를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이영표 해설위원도 “솔직히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기는 것을 좋아할 뿐”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러한가. 객관의 지표는 그렇다고 말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이후 관중은 지속적으로 급감했다. 오르고 내리는 게 아니라, 계속 감소다. 그때까지는 연평균 1만명 안팎이었으나 그 이후 8년 가까이 7000여명 수준이었고 올해 상반기는 5000명 정도다. FC서울이나 수원삼성 같은 ‘리딩 클럽’의 관중 수도 줄었다.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로 우리 국민이, 축구팬들이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쾌활하고 독창적이며 선진적인 마케팅은? 부재했다. 승부조작이나 심판 판정 같은 문제도 있었다. 각 팀들이 창조적인 플레이를 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이기는 것만 좋아’한 것은 구단과 감독들 아니었을까, 이렇게 자문해보길 바란다. 이른바 ‘졌잘싸’, 즉 졌지만 잘 싸웠다는 자조적인 표현의 이면에는, 이기면 더 좋지만 납득이 가는 패배, 다음 경기를 기대하는 패배, 그런 경기를 해달라는 뜻이다. 과연 각 프로팀들과 신태용의 대표팀이 그리 해왔는가, 의문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그것이 축구의 한 부분이다. 월드컵 때라도 3000만이 감독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 축구의 특성상, 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판단력이 있어야 응원단 자격증을 취득하는 게 아니다. ‘남녀노소’ 모두 응원하고 열광하고 때로는 비판도 하는 게 축구다. 평범 속에 깃든 비범, 단순성에 녹아 있는 복잡성, 열광 안에 숨어 있는 비판, 비판에 담긴 절실한 열망. 그것이 축구다. 그것을 읽어야 한다.

예전에는 월드컵 때문에 지방선거 투표율이 낮아진다고, 축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반대했다. 정치 무관심은 월드컵 때문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 때문이라고. 이제는 반대 현상이다. 지방선거와 북·미 정상회담 때문에 월드컵 관심이 줄지 모른다고 한다. 틀렸다. 각각은 각각의 내러티브로 움직인다. 월드컵 열기가 저조하다면 그것은 축구하는 사람들이 자초한 결과다. 게다가 난 그런 판단조차 반대한다. 월드컵이 열리면 다들 밤을 샐 것이고 16강을 염원한다. 제발, 어느 한 팀이라도 이기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문제의 원인을 뒤죽박죽 섞어서, 마치 다른 조건들 때문에 곤란하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탄생 200주년이 되는 어느 사상가가 말했다. 문제의 원인은 내부에 있으며, 문제는 그 해결의 열쇠까지 안고 태어난다고. 한국 축구 내부의 상황에 의한 문제를 ‘3000만이 감독이 되어 무조건 이기기만 바라는 이상한 현상’이라고 단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잘못 하면 정말 무플의 고립무원으로 추락해 축구 산업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는데, 이 무슨 안이한 진단인가. 21세기 인터넷 시대의 최고 명언,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말을, 거듭 생각하자. 쓰디쓴 비판에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침묵일 뿐<햄릿>의 마지막 대사).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마감 중에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작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열여섯 살 청소년이 보낸 메일이었다. 덧붙여 보낸, A4 다섯 장에 달하는 기고문에는 자신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와 그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성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학교의 일상이 답답했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 세상이 궁금해 다른 경험들을 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엄청난 문제아가 되어 있었다고.

예전에 비해서는 좀 덜해진 듯도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 학교가 갖는 권위는 견고하다. 그 권위는 학교가 제 기능을 잘 수행해서라기보다는, 그 외엔 선택지가 별로 없는 독점성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학교의 높고 단단한 지위는 청소년들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처음 만난 십대에게 “어느 학교 다니니?” “몇 학년이니?”부터 묻는 것은 흔한 일이다. 종종 걸려오는 상담 전화에서 걱정으로 가득 찬 부모들의 첫마디 또한 “아이가 학교를 안 가려고 해요”이다. 본디 아이들이란 ‘학교에 있어 마땅한 존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를 그만두는 건 이 사회에서 도태 혹은 낙오되는 일이라는 부정적 시각이나, 당장 학교를 나오더라도 그 다음의 선택지가 별로 없는 빈약한 현실도 두려움 생성에 일조한다.

다양한 이유로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들은 실제로 ‘학생’이라는 자격을 상실함과 동시에 발생하는 모든 리스크를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한 홈스쿨러는 배우가 되고 싶어 찾아간 극단에서 3년 넘게 착취와 폭행을 당하다 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십대 때 찾아갔다가 이미 청년이 된 그 홈스쿨러는 “다 널 위한 거야”라는 연출가의 교묘한 모럴 해러스먼트에 빠져들어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힘들어하고 있다. 아이의 자유로운 배움을 존중해주고 싶어서 선택한 길인데 일이 이렇게 되도록 몰랐다고, 부모의 자책도 이루 말할 수 없다.

학교 바깥에서의 리스크가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더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센터 개설 등 제도적 지원은 늘고 있는 추세지만, 학교 밖을 선택한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복지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 제공이 아니라 그 낯설고 불안한 길을 함께 의논하고 의지하며 걸어갈 ‘사람들’이다. 앞서 메일을 보낸 청소년은 학교를 그만두기까지 여러 단계의 상담을 거쳐야 했는데, 상담 과정에서 “그러다 인생 망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학교 밖 공간에서 자신의 선택을 격려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원하던 배움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그 친구는 악담인지 조언인지 모를 어른들의 말을 보란 듯이 되받아쳤다. “학교를 나왔지만, 내 인생은 망하지 않았어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책임지고 있는 그 자신이 포기하기 전에는 쉽사리 망하지 않는 게 인생이다. 학교의 권위가 작용하지 않는 변방에서도 제 인생을 열심히 책임져보려는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도움닫기는 무엇일지 고민해볼 일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남들과 같지 않더라도 그 선택을 존중받고 지지받는 반복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실패한 인생이란 없다는 사실을 배울 기회가, 비단 그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 남자가 트렁크 문이 열린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트렁크 밖으로는 청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여자의 맨다리가 삐져나와 있다. 이 이미지에는 ‘The Real Bad Guy(진짜 나쁜 남자)’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잖아? 이게 진짜 나쁜 남자야. 좋아 죽겠지?” 잡지 ‘맥심’의 2015년 9월호 표지였다.

여성들은 경악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심지어 살인을 미화하고 상품화하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표지는 판타지로서의 ‘나쁜 남자’와 ‘범죄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위험함, 길들여지지 않음, 야만성이야말로 남자다움이라는 널리 퍼진 착각을 옹호하고 강화한다.

물론 유독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다. 이때 ‘나쁜 남자’의 종류는 다양하고, 그런 남자를 원하는 욕망의 성격 역시 다양하다. 하지만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고 그것이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맥심’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 사회는 나쁜 남자와 범죄자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의 ‘나쁜 남자’는 여성 판타지라기보다는 남성 판타지에 가깝다. 김기덕의 &lt;나쁜 남자&gt;를 떠올려보자.

영화는 조재현이 연기한 포주가 거리에서 여자들을 구경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여대생’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여대생에게 다가가 강제로 키스한다. 마침 여대생의 애인인 남대생이 등장해 포주의 얼굴을 가격하고 모욕을 준 뒤 여대생과 함께 떠난다. 포주는 앙심을 품는다. 그는 결국 여대생을 납치해서 성매매 업소에 감금해 놓고 그녀를 판다. 하지만 이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영화의 결말이다. 결국 여대생은 포주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트럭 한 대를 구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성매매를 시작한다.

2001년 작품이다. 당시 일부 평단은 기층 남성의 날것의 분노와 계급 전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열광했다. 그러나 이런 열광에서 의도적으로 오독된 것은 계급 전복의 방식이었다.

이 작품이 여성을 착취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옹호자들은 착취가 아니라 기층 남성과 부르주아 여성 사이의 계급투쟁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부르주아 남성과 기층 남성의 갈등을 그리고 있고, 그 속에서 여성은 그저 몸뚱어리이자 소유물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이 영화를 설명할 때 “건달이 짝사랑하는 여대생을 납치했다”고들 표현한다(범죄가 사랑으로 포장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포주가 여대생을 다른 남자들에게 판매하면서 관음할 뿐, 그녀에게 구애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이는 포주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여대생의 ‘몰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완벽하게 ‘소유’하는 것뿐이었음을 보여준다. 포주는 남대생의 소유물인 여대생을 갈취하여 자신의 재산으로 만드는 것에서 쾌락을 느낀 셈이다.

포주의 욕망은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몰카를 보는 이유’와도 닮아있다. 한 남성 누리꾼은 “예쁜 여자들에게 기죽었을 때, (여성 화장실 몰카를 보면서) 걔네도 미개한 짓을 한다는 걸 확인하면 위안이 된다”고 썼다. 몰카 옹호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그건 ‘자연스럽고 순수한 성적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고 착취하는 것을 자연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구성된 정치적 욕망이다.

여기에서 ‘나쁜 남자’는 여성의 판타지도 아니고,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적 긴장 관계도 아니다. ‘나쁜 남자’는 오히려 위악을 통해 타인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남성 판타지임과 동시에 다른 남성과의 권력 투쟁 속에서 발생하는 긴장이다.

한 유력 정치인이 연인이었던 여성에게 “너 하나 감옥에 처넣는 것은 일도 아니다”라고 겁박하고, 그의 남성 동료들이 이 사건을 묻기 위해 발버둥쳤다는 뉴스를 보면서 질문하게 된다.

왜 저들은 여자를 ‘트렁크 속 시체’처럼 대하는가. 그리고 그런 남자들이 하는 정치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남성들의 ‘나쁜 남자’ 판타지야말로 고민거리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늘 하라는 것의 반대로만 살던 아들청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어미는 죽으며 유언합니다. “나 죽으면 산에 묻지 말고 꼭 물가에 묻어다오.” 그래야 거꾸로 산에 묻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뒤늦게 뉘우친 아들은 어미 말 지킨다고 진짜로 물가에 무덤을 만듭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아들청개구리는 어미 무덤 떠내려갈까 봐 목 놓아 운다고 합니다. 남의 옳은 말을 잘 따르지 않고 엉뚱하게만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는 속담 ‘청개구리 같다’의 유래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실 중국 당나라 때 편찬된 &lt;속박물지(續博物志)&gt;에 ‘청와전설(靑蛙傳說)’로 채록된 민담입니다.

그런데 청개구리는 정말 거꾸로 행동할까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청개구리는 다른 개구리들과 달리 물가가 아닌 산속 나무줄기나 풀숲에서 사니까요. 짝짓기하며 알 낳을 때나 물가로 내려오지 줄곧 산과 들에서 삽니다. 그래서 영어로 청개구리는 나무개구리(tree frog)입니다. 다른 개구리들에는 없는 흡반이 발가락 끝에 있어 벽도 타고 올라가, 시골 아파트에선 10층 창문에 붙은 청개구리를 발견하기도 하지요. 겨울잠도 땅속 아닌 한데서 바싹 마른 미라처럼 잡니다. 또한 청개구리는 고작 어른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지만 울음소리만큼은 개구리류 가운데 가장 큽니다. 이 청개구리가 크게 울어대고 사흘 안에 비 올 확률이 70% 남짓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청개구리 울음소리 시끄러운 날이면 ‘저놈들은 계실 때 잘하지. 머잖아 비 오겠네’ 짐작했다지요. 적적하신 부모님 이야기 들어드리고 전화 자주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인 줄 알면서도 ‘바빠서’가 버릇처럼 나옵니다. 마음은 안 그런데 부모님과 얘기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곤두선 말이 나갑니다. 자식 걱정이 딱지 앉은 잔소리 같아 지겹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데 자식은 그렇게들 거슬러 사는 청개구리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