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등장으로 지구촌의 정치풍경이 상당히 어수선해졌다.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를 만나 웃으면서 악수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정상들의 속내는 결코 편치 않다. 전후 세계질서 수립에 일익을 담당했던 동맹국 독일의 메르켈에 대한 트럼프의 비판이 또 화제다.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앞서 트럼프는 독일과 러시아가 함께 추진하는 지하가스 연결사업을 두고 독일이 러시아에 완전 종속된다고 내놓고 비판했다. 그런 비판을 했던 트럼프 자신은 나토 정상회의가 끝나는 길로 헬싱키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는 이 정상회담을 세계 미래를 위해서 양국의 현안 전반에 걸쳐 격의없이 토론한, 아주 건설적인 대화라고 평했다. 특히 북·미 정상회담이 세계 평화를 위한 중요한 성과라고 두 정상이 덕담을 나누자 독일의 전 사민당 당수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가브리엘은 ‘독재자 김정은’은 감싸면서도 오랜 동맹국 독일의 총리 메켈은 내쳤다고 트럼프를 여과없이 비판했다. 그 역시 외무장관 시절에는 푸틴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구적 헤게모니 쟁탈전의 두 주역인 미국과 중국의 자기중심적인 논리는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8개국이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유럽연합에서 이 문제는 더 복잡하다. 영국의 ‘브렉시트’나 난민 문제로 야기된 심한 내홍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자기중심을 확정하는 데 있어 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자기중심의 논리가 분단된 상태의 남북한에 각각 한정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복원하는 과정도 포함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여전히 답을 찾는 중이다. ‘6·15선언’과 ‘10·4선언’도 있었지만 지속가능한 수준까지는 진입하지 못했다. 미국, 중국,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한 국제사회도 이런 민족공동체 복원과정을 환영한다고 하지만 이 역시 외교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판문점선언’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우선 남북이 함께 자신의 행동반경을 다시 확대하자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 개선은 아직 기대수준에 많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원칙의 구체적 내용의 규정, 실행 방도와 일정표를 두고 아직도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상황에 남북관계의 개선도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다. 또 남북관계는 어느 한쪽의 의지에 의해서만 개선될 수 없고, 시간과 인내도 필요하다. 그러나 남북 당사자가 과감하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일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개성공단’의 재가동이나 이산가족 재회의 정례화 같은 일이다.

근자에 들어 현 정부의 개혁의지에 대해 우려와 함께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특히 재벌개혁과 부동산·노동정책의 실종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체제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헝가리 출신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1886~1964)는 우리 생활의 근본인 노동, 땅 그리고 돈의 철저한 상품화는 반드시 사회적 저항을 낳게 마련이라고 그의 저서 <위대한 전환>에서 지적했다. 적정한 수준의 최저임금, 일자리 창출, 청년실업 해소, 부동산 투기와 누적되는 가계부채를 포함한 민생문제가 바로 그런 위험의 징표다. 이를 원만히 해결치 못하면 개혁 지지세력도 머지않아 그들의 등을 돌리게 된다.

독일에는 이른바 ‘일요설문’이라는 용어가 있다. ‘오는 일요일에 선거가 있다면 당신은 어느 정당에 당신의 표를 던지겠느냐’는 설문을 의미한다. 최근 발표된 결과는 현재 집권당인 기민당·기사연합이 30%, 대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민당 18%, 야당인 녹색당 12%, 좌익당 10%이고, 우파인 ‘대안당’은 17.5%로 ‘사민당’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메르켈 총리의 지지율은 51%로 나타났다. 난민 문제가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계속 하락해 62% 수준에 머무르고 있고, 더불어민주당은 45%, 자유한국당 18.7%, 정의당은 10.5%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최근 나타났다. 현 정부나 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높다. 그러나 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의 하락이 최저임금이나 일자리 창출과 같은 중요한 민생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난민 문제처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지지율의 하락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오늘 세계 도처에서 발흥하는 포퓰리즘은 본질에 있어서 신자유주의가 낳은 ‘부익부빈익빈’의 결과에 대한 정치적 대응양식의 하나다. 삶의 기본적 영역으로부터 내몰린 대중을 상대로 기존의 정치구조와 이를 대변하는 정치엘리트를 겨냥한 집중적 공격과 대중적 선동은 선거결과로 곧 연결되어 정권이 바뀐다. 제3세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비교적 안정된 정치구도를 구축해왔던 유럽에서도 파시즘 시절에나 가능했던 현상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 곳곳에서 난민 문제를 앞세운 극우세력의 약진이 바로 그렇다.

가히 지구적 현상이라 볼 수 있는 이런 정치행태 변동을 분석한 케네츠 로버츠는 ‘위로부터’의 포퓰리즘과 ‘밑으로부터’의 포퓰리즘을 구분한다. 전자는 노련한 소수의 저항 엘리트가 조직화되지 못한 대중을 상대로 기득권층을 집중 공격하면서 대중을 우선 투표장으로 끌어들여 정권교체에 성공하고, 후자는 오히려 사회운동적 성격이 강한 정치적 저항이 정권교체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나 최근 유럽에서 나타나는 정치형태는 전자에 가깝고, ‘촛불혁명’의 결실인 현 정부의 탄생은 후자의 경우라 볼 수 있다. 현 정부는 위기적인 상황 속에서 등장했다가 이내 곧 정치무대에서 사라지는 ‘과도정부’가 아니다. 여전히 높은 대중적 지지도는 현 정부가 아직은 안정적인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제기된 난관을 빨리 타개하려고 정치공학적인 계산에 의존, ‘연정’이니 ‘협치’라는 생각을 떠올릴 상황은 아니다. 이런 발상은 한국 정치의 왜곡된 구조의 핵심에 있는 - 여당도 포함한 - 정당정치의 적폐를 비켜가는 미봉책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깨끗한 정치에 의해 건설될,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꿈을 키웠던 노회찬 의원의 안타까운 죽음은 정치개혁의 절박함을 다시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현 정부가 ‘촛불혁명’이 지켜낸 정의와 평화의 뜻을 ‘처음처럼’ 받들어 시종일관 개혁의 길로 매진하는 것이 이 시대의 정신이라고 나는 믿는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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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두 번의 남북 정상의 만남, 그리고 북·미 정상의 만남을 본 우리 국민들은 이제 한반도의 비핵화, 나아가 남북 상생공영 발전의 새 시대가 열리겠구나 하는 큰 기대를 가졌었다. 그런데 이달 초 북·미 정상회담의 후속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 결과는 우리 기대와 달리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했다. ‘역시 북한은 믿을 상대가 못돼’ ‘북한은 그런 식으로 다루면 안돼’ 등 회의적인 반응이 잇따랐다.

정말 그럴까. 폼페이오와의 협상 결과에 대한 북한 측 반응의 행간을 잘 읽으면 이 난관의 해법이 보인다. 북한 언론은 폼페이오의 주장을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요구”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했다. 아마도 비핵화 시간표를 내놓아야 종전선언, 나아가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관계 개선이 가능하다는 폼페이오의 주장, 즉 선 비핵화 요구에 대한 북한 측의 강한 반발인 것이다. 자신들이 수십년 공들였던 핵 억지력의 포기는 북한 정권의 확실한 안전 담보, 즉 정전체제의 평화체제화(평화협정 체결을 통한)와 북·미 수교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고 북한은 굳게 믿고 있다. 북한은 그러한 입장이 문서화된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에 큰 만족을 표시했다. 그런데 먼저 비핵화 로드맵을 제시하라고 하니 이게 강도적 행태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불만인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5일(현지시간)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출석, 발언하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미국의 목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말까지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이루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외신이 전했다. AP연합뉴스

북한 입장에서는 북·미 정상회담 이전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와 북한 억류 미국인들의 석방,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기 실행 등 나름대로 북·미 협상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가시적 조치를 취했다고 할 것이다. 또 가장 최근에는 미군 유해 송환 약속도 실행에 옮겼다. 반면 미국은 공동성명에서 약속한 평화협정 체결의 전단계인 종전선언을 주저할 뿐 아니라 북한을 옭죄여 온 대북 제재도 전혀 풀어주지 않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의 이러한 태도가 강도 같은 행태로 보일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새로운 비밀 핵시설 의혹을 제기하는 미국에 대해 북·미 공동성명의 이행 의지가 정말 있는 것인지 강한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사실관계는 차치하고 확실한 근거도 없는 비밀 핵시설 의혹을 제기하는 미국 측의 행태는 분명 우리로서도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라 생각된다. 최근 북한 노동신문의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잇따른 비난의 저의는 우리 정부의 적극적 노력의 부족함에 대한 불만의 표시다. 문재인 정부는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평양 정상회담을 가져 종전선언과 구체적 비핵화 로드맵을 발표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평화협정 논의 시작과 함께 핵 신고서 제출, 신고서에 따른 핵사찰 검증과 북·미 수교 협상 진행, 대북 제재 완화 조치, 평화협정 체결과 핵시설 폐기, 대북 제재 해제 및 북·미 수교, 그리고 최종적으로 초대 평양 주재 미국대사가 주도한 북한 핵무기의 해외 반출이라는 비핵화 로드맵 정도라면 북한 측도 수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미국, 중국과 사전에 협의를 거쳐야 하겠지만 그들의 허락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필요성을 강하게 설득할 필요가 있다. 현상의 변화를 바란다면 깊은 통찰과 과감한 결단, 그리고 자신감이 필요하다. 특별히 북한이란 존재에 대한 인습적 편견과 불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북한의 내부 사정은 물론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 상황이 북한 비핵화와 남북 공동 경제발전을 추진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성원 | 동북아경제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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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법원의 예언자였을까. “한 고위 법관은 ‘양 후보자가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 사법행정을 통해 재판에 영향을 줄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한겨레 2011년 8월19일자). ‘양 후보자’는 기사 게재 전날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양승태 변호사를 가리킨다. 우려는 적중했다. 이제 양승태라는 이름 뒤에는 사법농단이란 문구가 따라다닌다.

그런데 사법농단이 적확한 표현일까. 군이 적을 향해 겨눠야 할 총부리를 시민에게 돌렸다면? 군사쿠데타라 부른다. 법관이 사실과 증거 대신 권력의 입맛에 따라 재판을 했거나 계획을 세웠다면? 사법쿠데타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심한 표현이라는 시각이 있겠다. 사람이 죽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1·2심 판결을 깨고 KTX 승무원들의 복직 길을 막아서자 세 살배기 딸을 둔 해고자가 목숨을 끊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2심 판결을 깨고 “쌍용차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한 이후 노동자 5명이 세상을 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7월27일 (출처:경향신문DB)

국군기무사령부의 ‘계엄령 문건’ 진상규명을 위해 군·검 합동수사단이 구성됐다. 시민은 국회 국방위원회를 통해 기무사의 실상을 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세 차례나 문건 관련 메시지를 내놓았다. 양승태 사법농단을 두고도 검찰 수사팀이 꾸려지긴 했다. 그뿐이다. 대법관과 법원장들은 태연히 재판거래 의혹을 부인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수사 협조를 약속했으나, 자료를 내놔야 할 법원행정처는 요지부동이다. 양승태 체제에 순치된 일부 판사들은 사실상 ‘관선변호인’ 노릇을 하고 있다. 국회는 법사위를 열었지만 안철상 행정처장의 “재판거래를 인정할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듣는 데 그쳤다. 청와대는 언급을 삼간다. 삼권분립이란 헌법정신 때문이다.

법원은 이를 틈타 치외법권지대가 되어가고 있다. 최근 사법농단 수사팀은 17건의 압수수색영장(e메일 보전조치 영장 포함)을 청구했다. 발부된 것은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에 대한 2건뿐이다. 발부율은 11.76%다. 지난 1~6월 서울중앙지법의 압수수색영장 발부율은 80.85%(법원통계월보)였다.

기각 이유를 살펴보자. 현직 대법관 연루 정황까지 제기된 부산 법조비리 은폐 의혹 사례다. 검찰은 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인사심의관실 및 문모 전 판사의 사무실, 현기환 전 정무수석(구속 중)의 구치소 등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했다. 법원은 ①윤리감사관실의 경우 “임의제출 가능성”이 있고 ②인사심의관실 자료는 “국가 중대 이익과 관련된 공무상 비밀에 해당할 여지”가 있으며 ③문 전 판사 건은 “별건수사”이고 ④현 전 수석 수감실은 “증거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며 기각했다. 그러나 ①행정처는 윤리감사관실 자료 제출 계획이 없다고 밝혔으며 ②법관 인사자료를 내준다고 국익이 훼손된다는 건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 ③과 ④는 더 군색하다. ③절도범 쫓다가 살인범 목격하면 외면해야 하나. ④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구치소에 대한 압수수색은 왜 허락했나.

양승태 체제를 옹호하는 일부 법관들은 시민의 합리적 의심을 일축한다. 우리가 위법이 아니라면 아닌 거다, 우리는 사법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뿐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대법원 상고심 사건 중 단순한 사건만 별도로 맡는 법원) 도입에 욕심을 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검찰이 확보한 문건들을 보면, 양승태 대법원은 ‘법관의 해외공관 파견’과 ‘고위 법관의 외국 방문 시 의전’ 같은 사안까지 알뜰히 챙긴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행정처의 재판개입 시도가 상고법원 도입이라는 사법정책적 목표 외에 극소수 엘리트 판사들의 ‘복지 증진’ 차원에서도 이뤄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낯부끄러워서라도 법복을 벗어던지는 고위 법관 한 사람쯤 나와야 옳다. 과도한 기대인가.

재판거래 의혹의 피해자인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은 “수사 대상자들이 법원에 남아 스스로를 변호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김 지부장의 말처럼 피의자 혹은 잠재적 피의자들이 수사를 방해하는 상황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영장심사는 물론 기소 후 재판 과정에서도 공정성을 담보할 장치가 절실하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사법농단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 구제를 위한 법안 2건을 발의할 예정이다. 전자는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추천위원회를 설치해 여기서 추천된 판사들로 ‘특별재판부’를 구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후자는 재심사유를 확대해 사법농단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길을 넓혀주는 법안이다. 이제 국회가 적극 나서 신속하게 입법해야 한다. 법원은 현대판 ‘소도(蘇塗·삼한시대 죄인이 도피해도 잡지 않았던 신성지역)’가 아니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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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다. 눈썹이라도 태울 것처럼 훅훅 볶아대는 한낮. 땀이 빠져나간 뒤의 서늘한 상쾌함을 알기에 뙤약볕쯤이야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금정산의 산성마을로 가는 길. 익숙한 풍경이다 싶어 기억을 뒤적이니 고등학교 마지막 소풍 왔던 곳이 아닌가. 사춘기의 우울한 심사와 대학입시에 짓눌려 옆으로 눈길 한번 주지 못했던 시절. 꺼먼 교복으로 회상되는 시절이라고 그때의 풍경조차 우중충한 건 아니었다. 오늘을 짐작하고 어깨 높이의 나무를 내 나무로 지정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꼬. 보잘것없는 나의 생이 그 나무를 축으로 조금은 정갈하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만약 그런 지혜를 바탕으로 그 나무 그늘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두 발을 지녔다고 깝죽대며 돌아다녀보았자, 결국은 자네 밑이로군!

그림ⓒ이해복

부질없다. 금정산 중턱에 오늘 보아야 할 꽃이 있었지만 내 눈에 더욱 들어오는 건 큰까치수염이다. 한 달 전 여행길에서 만났던 것과 아주 비슷한 꽃이다. 벌써 기억이 마구 헝클어지지만 그때 나는 연암의 뒤를 좇아가는 길 위에 있었다. 아주 압축된 여정이라 연암의 자취를 확인하는 건 난망한 일이었다.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바로 그 지점에 가면 그 자리는 이미 허물어지고 흔적조차 없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준비한 동작은 내게도 있었다. 발밑만 쫓으며 앙앙불락할 게 아니라 고개만 들면 나타나는 하늘을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당대의 문명이 까불어도 하늘에 부스러기 하나라도 건설할 수 없는 노릇이다. 흑백 사진 하나 남은 게 없는 과거라고 그때의 풍경이 거무튀튀한 건 아니다. 매연도 미세먼지도 하나 없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깨끗한 총천연색의 세계였을 것이다. 차라리 연암의 시선이 뚜렷하게 박힌 하늘을 보면서 그때 그 심중을 헤아려보는 것!

비슷했다. 요동벌판에서 본 까치수염과 금정산의 큰까치수염. 그래도 차이는 있다. 전자가 줄기에 털이 빽빽한데 후자는 전신이 매끈하다. 꽃들이 드문 시기에 울울하게 피어나 허전한 눈길을 달래주는 큰까치수염의 잎겨드랑이마다 붉은 점이 묻어 있다. 오늘은 또 무슨 생각을 발굴하라고 이 혈흔 같은 무늬를 부산에서 내게 주는가. 큰까치수염. 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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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논란을 지켜보는 심정은 착잡했다. 노·사·언론 할 것 없이 입 달린 사람은 누구나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편의점 업주 등 소상공인들의 최저임금 불복종 운동은 평소 편의점을 드나들며 24시간 영업하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지 궁금해하던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공감을 얻는 분위기다. ‘을들의 전쟁’이라는, 씁쓸하지만 부인하기도 어려운 이름이 붙었고 결국 대통령 지지율은 12%포인트가 빠졌다.

이대로라면 최저임금 문제는 해법이 없을 것이다. 편의점 업주들이 나를 잡아가라고 나선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들을 처벌하면 정치사회는 절단날 것이고 처벌하지 않으면 최저임금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문제는 해법이 없는 일들이 최저임금뿐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동산, 교육, 증세, 통일비용, 난민 문제 등등 그 목록은 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주요 정책들은 최소 10년 이상의 연도별 시뮬레이션이 함께 나와야 한다. 우리 사회 갈등 사안의 상당수는 시간축을 길게 잡고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문제들이다. 지금은 엄청난 비용을 치르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게 되었다고 후회할 사안들, 혹은 지금은 집단 간 이익다툼의 문제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상생의 문제인 경우들이다. 더구나 세계 최고의 고령화 속도를 감안할 때, 같은 정책이라도 지금의 의미와 10년 후의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어떤 정책을 하면 향후 10년간 해마다 무슨 변화를 겪을 것이고 하지 않으면 10년 후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하고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 이런 증거기반 정책을 가지고 대통령이나 책임있는 당국자가 진정성 있게 소통한다면 이해해줄 국민은 훨씬 많아질 것이다.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에 소속된 편의점주들이 16일 오후 서울 성북구 보문동 영광빌딩에서 전체 회의를 열고 최저임금 차등적용과 가맹수수료 인하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둘째, 급하더라도 정책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 최저임금이 왜 이렇게 뜨거운 감자가 되었나. OECD 최고의 자영업 비중 때문이다. 우리의 자영업 비중은 OECD에서 두 번째로 높고 적정 규모의 3.5배에 달한다. 자영업자 세 명 중 두 명은 어차피 시장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시장에서의 불리한 지위를 본인과 가족의 무지막지한 장시간 무급 노동으로 때우며 버텨왔다. 이런 상황이 현 정부 들어서 빚어진 것인가.

박근혜 정부 때도, 이명박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나간 어느 정부도 구조조정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자영업이 적정 규모로 구조조정되는 순간 실업률은 치솟을 것이고, 그것은 정치적 타격으로 돌아올 것이 뻔하므로. 정치적 이유로 한계에 선 자영업자들을 방치해온 것이다. 이번에 최저임금이 이슈가 되자 다수의 언론은 그렇지 않아도 알바 정도의 수입이나 간신히 올리던 편의점주들이 이제는 알바만도 못하게 되었다는 논지로 비판에 나섰다. 무책임한 비판이다. 편의점주가 알바 정도 수입이나 간신히 올려왔다면 그것 자체가 비정상 아닌가. 지금까지 이 비정상에 대해 침묵하다가 알바보다 못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면 진의를 의심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영업 문제에 정공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 즉 거버넌스를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최근에는 정부부서와 일을 하다보면 그들이 보유한 높은 능력과 지식 수준에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책 자문을 해달라고 요청을 받지만 이미 실무자들이 전문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거의 항상 ‘정무적 판단’의 영역이 빈칸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국정을 운영하다보면 불가피하게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무적 판단의 영역이 많아질수록 정책의 합리성은 그만큼 증발한다. 정무적 판단에 참여하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고, 그들은 해당 정책에 대해 실무자 수준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분리해서 다루는 기존의 관행도 재고해야 한다. 재정에 대한 세밀한 고려 없이 사회정책이 제시되고, 기재부가 재정을 이유로 사회정책을 난도질하고, 그로 인한 소모적 논쟁이 정책의 동력을 잃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정부 내에서 부문별 사회정책의 필요성과 재정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합의된 상태에서 정책을 발표하고 추진해야 한다.

우리처럼 정치적·사회적 합의의 메커니즘이 전무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할 것인가가 결과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모처럼 5일간의 휴가를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이 현명한 결론을 가지고 업무에 복귀하길 기대한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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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신러닝을 활용하면 요즘 몰두하고 있는 연구과제의 단순한 작업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웹 검색을 하다가 깔끔한 설명을 해놓은 블로그를 발견하였다. 블로거는 머신러닝이 무수한 첨단기술로 범벅이 된 무슨 도깨비방망이 같은 게 아니라 데이터에서 어떤 패턴을 발견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자신을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라고 밝힌 그는 머신러닝이 수학과 통계학을 기초로 하는 ‘학문’ 영역이지 세간의 오해처럼 절묘한 어떤 ‘기술’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으니 열심히 공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나, 시장에서는 기술로 오해하여 단기간에 노하우를 알려 달라고 조르는 어처구니없는 요구가 많고, 그래서 ‘수학과 통계를 몰라도 4주 만에 익히는 머신러닝’이라는 사기와 같은 강좌들이 쏟아진다고 비판한다. 수학이나 통계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누군가가 만들고 증명한 공식으로 열심히 계산만 하는 공학도들이 이런 상황에 일조하고 있다는 촌철살인에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냉소적인 비판에 놀라서 블로거가 어떤 내공을 쌓아왔는지 살펴보았다.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국내외 대학원에서 통계학, 시뮬레이션, 머신러닝에 이르는 긴 학문적 여정을 거쳐 수학과 통계학에 녹아날 정도로 고생고생하며 데이터를 다루는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과 그렇게 훈련받고 제대로 성장한 인재가 어떤 잠재력을 지니는지 알기에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살짝 불편함이 남는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하여 도달한 경제학의 계량분석은 현상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을까.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다. 최소한, 개발주의로는 오염되지 않는 시정을 펼쳐주리라 믿고 지지했던 지자체장이 서울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을 재개발하여 한국의 맨해튼으로 만들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여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고, 여론전에 밀린 탓인지, 아니면 정책이 유효하지 않다고 검증된 탓인지 정부는 최저임금 정책을 슬그머니 후퇴시켰다. 경제학은 대체로 개발주의를 옹호하고 소득주도성장이나 복지정책에 대해 배타적인데 결국 이를 넘지 못한 것처럼 여겨져 씁쓸하다.

국내외 여러 사례를 보면 도시개발이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흔한 주장과 달리 대규모 개발은 경제침체의 원인일 수 있다. 개발사업은 인플레이션을 불러오지만, 지속적 소득증가를 가져오지 않는다. 자칫 부동산으로 막대한 소득이 몰리면서 중장기적으로 가계소비의 감소가 발생할 수 있다. 대공황, 일본의 버블붕괴, 최근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는 부동산 과잉투자이다. 한편 소득주도성장은 일반 대중에게 재화를 소비할 여력이 있어야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개발주의의 위험이나 소득주도성장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복지정책이 수학으로 단련된 경제학자들에 의해 번번이 부정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경제학은 수 없이 많은 천재와 수재들이 수많은 증명을 하면서 여러 진보적인 도전과 맞서 싸우며 키워 온 세계일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경제학이 지니는 수많은 약점과 그에 대한 도전을 보완하고 흡수하면서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답이 나오게 진화한 자가증식체계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경제학자가 된 사람들은 가치를 배제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순수하게 객관적 자료만으로 분석하였으니 경제학이 내놓는 답이 정답에 가깝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무한경쟁과 자본의 효율이 진리라면 이보다 더 암담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끔 경제학이 쌓은 현란한 분석방법에 기가 눌리지만, 내놓는 답들이 하나같이 자본에 유리한 게 많고, 그래서 경제학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가 추구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부유해지기 위한 철학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무식한 공돌이란 비판을 받더라도 계속 도전을 이어가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어 보인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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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선포와 이후 세세한 이행 방안을 담은 ‘대비계획 세부자료’가 공개되면서 국군기무사령부가 헌정중단을 기획한 내용과 증좌는 차고 넘친다. 계엄 포고문을 작성하고, 국회와 언론사를 장악하며, 심야에 광화문과 여의도에 장갑차를 진주시켜 시위를 진압하는 등 구체적 행동계획이 수립되었다. 야당 의원들을 검거해 계엄 해제 의결이 정족수에 미달하도록 만드는 국회 무력화 계획까지 짰고, 미국 정부 등으로부터 계엄 인정을 받기 위한 외교적 조치도 마련했다. 합동참모본부가 2년마다 재검토해 유지하는 ‘계엄실무편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방면에 걸쳐 세밀하게 수립된 실행계획은 하나같이 군의 계엄 준비가 실행 직전 단계까지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계엄 실행 의도가 명백했음을 증명하는 세부자료까지 공개된 마당에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30일 “내란 음모로 보기에는 과도한 해석”이라며 “질 낮은 위기관리 매뉴얼”이라고 밝혔다. ‘계엄 문건’과 관련, 처음 나온 발언이다. 촛불집회 확산을 국가비상사태로 규정하고 군을 동원해 시민들을 진압하려는 계엄 획책을 ‘위기관리’ 정도로 치부하는 인식이 가공스럽다. 기무사 ‘계엄 문건’이 공개된 뒤에 줄곧 사태의 본질은 도외시한 채 ‘단순 대비 문건’ ‘시행 가능성 없는 문건’ 운운하며 음모론을 펼쳐온 한국당의 극우 의원들이 오버랩된다. 명백한 증거들에는 애써 눈을 감고, 총을 앞세워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유린하려 한 무도한 국가권력과 정치군인을 옹호하려 드니 ‘제2의 홍준표의 길을 가려는가’라는 힐난이 나오는 것이다. 극우·냉전 이데올로기에 갇혀 남북 정상이 판문점선언을 하고 북·미 정상이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하는 상황에서도 ‘빨갱이 장사’ 외에는 할 게 없었던 ‘홍준표의 한국당’이 6·13 지방선거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한 것은 필연이었다.

진정한 보수정당이라면 군을 정치적으로 오염시켜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행태에 앞서 분노하고 바로잡는 노력을 하는 것이 정상일 터이다. 김 위원장은 비대위원장 취임과 함께 ‘보수가치의 재정립’을 지상의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보수가치의 재정립을 위해서도, 우선 군대까지 동원해 부당한 권력을 옹위하려던 낡아빠진 세력과 결별해야 한다. 자신과 당의 입지에 유불리만을 따져 ‘민주주의의 적들’과 정략적 동행을 고집한다면 한국당에도, 김 위원장에게도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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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시간은 시속 20㎞로 가고 60대의 시간은 시속 60㎞로 간다는 말이 있다. 시간, 즉 지구의 자전과 공전 속도는 일정하지만 그 속도를 느끼는 감각은 세대에 따라 다르다. 시대에 따라서도 다르다. 속도감은 생리적 감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감각이다.

1908년 기차를 처음 타본 최남선은 ‘경부철도가’를 지어 그 감동을 표현했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당시 기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30㎞ 정도였다. 이 정도 속도면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와 비슷하기는 하다. 빠른 것을 ‘바람 같다’고 표현하던 때였으니, 인간이 그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시대가 오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서울에서 운행하는 자동차가 10대도 안 되던 1915년 7월22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는 ‘자동차취체규칙’을 제정, 공포했다. 제한 최고 속도는 시내에서 15마일, 기타 지역에서 20마일이었다. 과속 감지기도 없던 때였으나, 제한 속도를 위반할 수 있는 차량은 없었다.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아 우마차와 사람과 차량이 뒤엉켜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레일도 없는 길에서 굴러가는 자동차의 속도에 놀랐다.

탈것의 속도만 문제가 아니었다. 이른바 ‘신문물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수십년간, 사람들은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데에 불편함을 호소했다. 특히 도시 사람들은 거리에 나설 때마다 보이는 ‘새로운 것’들을 이해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들의 이름과 용도를 모르고서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살 수 없었다. 새로운 것들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도시민의 책무가 되었다. 구두끈 매는 법, 넥타이 매는 법, 전차표나 극장표 끊는 법, 전화 거는 법 등 새로 얻어야 하는 ‘앎’이 있었을 뿐 아니라, 도로 위를 걷거나 횡단하는 법, 관청에 민원 넣는 법,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거는 법 등 과거의 것을 바꿔야 하는 ‘앎’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앎’들은 대체로 책을 보며 사색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것들이 조건반사적 반응을 요구했다. 한 가지 정보를 채 소화시키기도 전에 또 다른 정보를 입수해야 했기에, 사람들의 감각 기관은 늘 피로했다. 1920년대까지, 신경쇠약은 당대의 ‘현대병’이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처음에는 빠른 속도를 견디지 못했으나, 이윽고 그 속도감이 일상적 감각으로 바뀌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빠른 속도는 불편함이 아니라 찬미의 대상이 되었다. 비행기, 고속정, 자동차 등 공기나 물의 저항을 줄여 빠른 속도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탈것의 형태, 즉 유선형(流線型)이 가장 아름답고 현대적인 도형으로 각광받았다. 사람의 몸도 유선형으로 가꿔야 한다는 담론이 널리 유포되었다. 빠른 속도에 당황하던 사람들은, 점차 느린 속도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문명화를 고속화와 같은 뜻으로 이해했다. 새로운 물건들이 나오는 주기가 더 짧아지는 것, 기존 탈것들의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 육상·수영 등 스포츠 경기 기록을 단축하는 것이 모두 인간과 세계의 발전으로 취급되었다. 그 시대의 신문물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물질세계의 태반은 이미 신문물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신기록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20여년간, 사람들은 부득이 신기록에 대한 욕망을 접어야 했다. 특히 6·25전쟁으로 전국이 폐허화한 뒤에는 하루빨리 과거로 복귀하는 것, 즉 ‘재건’이 시대의 과제였다. 무너진 건물과 시설만 재건의 대상이 아니었다. 속도감도 재건해야 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속도의 시대가 재건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다시 계속 빨라지는 속도, 계속 단축되는 기록에 익숙해졌다.

이제 빠름만 미덕이고 늦음은 악덕이다. 30분 이내 배달을 약속하지 않는 음식점, 1일 배송을 약속하지 않는 홈쇼핑 업체는 문 닫을 각오를 해야 한다. 빠른 속도감에 익숙한 사람들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만 늦어도 배달원을 타박하고, 주문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배송 상태를 조회한다. 약속 시각이 되기도 전에 휴대전화기를 꺼내 드는 것이 현대인의 습성이다.

세상 모든 것의 운동 속도가 느리던 시절에는 판단도 기다렸다가 했다. 멀리 보이는 사람이 피해야 할 상대인지 반갑게 맞아야 할 상대인지는, 그가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려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초고속 시대인 현대에는 기다림이 곧 망설임이요, 망설임은 위험이다. 100m 떨어진 곳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발견하고 망설이는 것은 자살 행위다. 현대인은 보자마자 판단하고, 판단과 동시에 움직이는 습성을 기른 사람이다.

조급증과 속단은 현대의 시대병이요 현대인의 고질병이다. 자동차 운전석에서 차가 막힌다고 짜증을 내는 것이나 상황이 생각만큼 빨리 바뀌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나, 모두 마음속의 ‘기준 속도감’이 초고속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것도, 사람들이 생각 없이 판단하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개혁의 설계도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달라지는 속도가 느린 것만 불평한다. 새로 들은 뉴스가 사실인지 곰곰이 따지지는 않고, 덜컥 믿거나 무턱대고 배척한다. 고속 성장의 시대는 지났다. 불평한다고 지구의 자전 속도가 빨라지지는 않는다. 사람의 속도감에 세상의 변화를 맞출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 우리의 속도감을 바꿔야 할 때이다. ‘늦음’에도 나름의 아름다움과 미덕이 있다. 천천히 움직이고 찬찬히 생각하는 게, 심신의 건강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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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지난 6월28일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81조 5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적어도 올해에는 외고·자사고·국제고에 지원했다 떨어진 학생들이 예전처럼 희망하는 일반고에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자사고에 국한된 결정이지만 실제로는 외고·국제고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제81조 5항은 지난해 12월 개정된 것으로 외고·자사고·국제고 지원자의 일반고 지원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헌재의 결정은 당연하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은 대선공약(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일반고 전환)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와 교육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을 전부 학생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다. 학생들을 난처하게 만들어 목적을 이루려는 방식이다. 정부의 시행령 개정은 외고·자사고·국제고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너희들 외고·자사고·국제고에는 갈 생각을 하지 마. 지원했다 떨어지면 너희가 원하는 다른 학교에는 절대 못 가게 될 거야. 떨어지면 정원 미달인 학교에 보낼 거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가게 될 수도 있어. 그러니 외고·자사고·국제고에는 갈 생각을 하지 마.” 

실제로 시행되면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인기가 꽤 낮아지긴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공약을 이행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내 머릿속엔 그보다 바람직한 2개, 아니 3개의 방법이 떠오른다. 하나는 외고·자사고·국제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방법이다.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존립 근거를 제시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면 되는 일이다. 시행령 제90조 1항, 제91조의3 등이다. 시행령 개정이니까 전적으로 정부(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존재는 인정하되 일반고처럼 오로지 추첨으로만 학생을 선발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외고·자사고·국제고를 없애지 않은 채 이들 학교로 인한 초·중학생들의 입시경쟁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82조 1항을 개정하면 된다. 역시 전적으로 정부(대통령)의 권한이다.

다른 정치세력들이 반대를 하지 않을까? 첫 번째 방법은 대선 당시 바른정당(유승민 후보)과 정의당(심상정 후보)이 내걸었던 공약과 동일하다. 두 번째 방법은 국민의당(안철수 후보)이 내걸었던 공약과 일치한다. 이들 정치세력은 찬성할 것이다.

앞의 두 방법이 전부 부담스럽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공약을 포기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는 뒤로 미루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구성될 국가교육위원회의 과제로 돌린다면 명분이 그리 옹색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현 정부의 대선공약에 의하면 국가교육회의는 국가교육위원회를 위한 과도기적 존재다. 공약 취지대로라면 큼직한 교육정책은 국가교육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게 맞다.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일반고 전환은 타당한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와 교육부가 꾀한 방식은 그것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정부·교육부의 공약 이행 방식은 학생들을 수단으로 삼아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 점에서 정부와 교육부는 정치적 술수라는 의미의 마키아벨리즘을 실행했다 할 만하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마키아벨리즘이라고만 하는 것보단 소인배 마키아벨리즘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한 듯하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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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 계신 황현산 선생님을 뵙고 왔다. 쇠한 기력과는 달리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선생님, 저 왔어요. 일부러 더 씩씩하고 명랑하게 인사했다.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끔벅이는 눈으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서로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잘 지내니, 별일 없니, 오랜만이지?, 살이 좀 빠진 것 같구나, 이리 와서 여기 좀 앉거라 등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잘 지냈어요, 별일 없어요, 오랜만에 찾아와서 죄송해요, 살은 다시 찔 거예요, 선생님 곁에 바짝 다가앉을게요 등의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연일 폭염이었는데, 선생님을 찾아간 날에는 비가 왔다. 그야말로 단비였다. 하늘도 끔벅이는 눈처럼 갑자기 어두워졌다가 천천히 밝아졌다. 소낙비가 내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갰다. 끔벅인다는 것은 ‘갑자기’를 ‘천천히’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병과 아픔과 슬픔은 갑자기 찾아오고 아주 천천히 회복된다.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처럼.

병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선생님 곁을 지키기 위해, 곁에서 더욱 뜨거운 말을 전하기 위해, 곁에서 눈을 마주치고 함께 호흡하기 위해. 누군가의 곁에 다가간다는 것은 나의 틈을 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시간의 틈을 벌려 여유를 만들고 공간의 틈을 벌려 그 사람을 나의 영역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곁을 준다는 말이 속을 터준다는 뜻인 것도, 곁을 지킨다는 말이 믿음에 뿌리를 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곁이 비어 있을 때 그리움의 감정은 커지고 곁이 많을 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글 쓰시고 밥 드시고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내미시던 손을 잡아드리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께 병원 이불의 재질이 좋다고 말씀드렸더니, 집에 갈 때 하나 달라고 해야겠다고 희미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농담을 곁에 둘 수 있는 상태를 확인하니, 적이 안심이 되었다. 동시에 집에 간다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저 말은 꼭 씨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마음산책, 2018)에는 한 글자로 된 다양한 단어가 등장한다. 나는 ‘곁’이라는 단어에 오래 머물렀다. “ ‘옆’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나와 옆’, 그 사이의 영역.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장소이자,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장소. 동료와 나는 서로 옆을 내어주는 것에 가깝고, 친구와 나는 곁을 내어준다에 가깝다.” 이처럼 나의 곁과 너의 곁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관계 사이의 오해는 사실상 옆을 곁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옆이라는 말이 공간적 거리를 지칭한다면, 곁이라는 말은 그 안에 심리적 거리를 포함한다. 옆에 있다고 해서 다 가깝다고 느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곁에는 거리감뿐만 아니라 양감과 질감, 온도와 습도 같은 성질이 다 담겨 있다.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곁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곁에 다가오지 않았거나 옆에 있는 사람들을 곁에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님이 자신의 곁이 꽉 차 있다고, 온기로 가득하다고 느끼기를 바랐다.

살아가면서 곁을 잘 챙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삶을 살아 있게 해주는 것도 곁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품고만 있고 전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곁에 두는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를 정말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집에 와서 선생님의 책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난다, 2018)을 다시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어떤 부탁은 사소하고 어떤 부탁은 절실하다. 사소하다고 해서 부탁을 쉬 지나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실하다고 해서 부탁을 다 들어줄 수도 없다. ‘갑자기’와 ‘천천히’가 한 단어에서 만나듯, 두 눈을 끔벅이며 사소하면서도 절실한 기도를 했다.

선생님 곁에 더 오래 있고 싶다고. 곁의 온도와 습도가 한동안 유지되었으면 좋겠다고.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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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진(晉)나라에 겨우 열네 살인 주(周), 즉 훗날 도공(悼公)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에게는 형이 있었지만 너무 어리석어 콩과 보리조차 구분 못한다(不能辨菽麥)고 옹립되지 못했습니다. 사리분별 못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을 뜻하는 ‘숙맥’의 어원, 숙맥불변(菽麥不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고많은 곡물과 사물들을 제쳐두고 굳이 ‘콩과 보리’를 언급했는지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책을 읽다가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리는 익는 속도가 느려 쌀과 섞으면 한 번에 삶기지 않으므로 두 번 삶는 ‘곱삶이’를 하거나 보리를 반으로 쪼갠 ‘할맥(割麥)’으로 섞어 삶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콩 역시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처럼 두 쪽으로 나뉘는 곡물입니다. 다시 살펴보니 ‘辨’자 역시 ‘분별하다’와 ‘나누다/쪼개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숙맥불변은 콩과 보리도 ‘구별 못하다’와 ‘쪼개지 못하다’ 둘 다 가진 ‘辨’자를 이용한, 옛 중국인들의 말장난은 아니었나 싶은 게 제 생각입니다. 머리도 나쁘고 재주도 없단 거죠.

흔히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만 숙맥이라 합니다. 하지만 辨의 두 가지 뜻이 알려주듯, 사리분별 못하는 사람 또한 숙맥입니다. 무언가를 분별하려면 떨어져 바라봐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쪼개진 어느 한쪽에 붙어 자신이 믿는 채널과 기사만 온전히 믿습니다. 이 뉴스는 옳고 저 기사는 온통 거짓이라며 반대쪽은 들춰도 안 봅니다. 입장과 성향은 언론사마다 다릅니다. 이목을 한쪽에만 고정하면 주 시청자·독자 입맛에 맞춰 가공된 것들만 들어오지요. ‘한편 말 듣고 송사(訟事) 못한다’는데, 양쪽 말 들어보지 않고 한편 말만 듣는, 사리분별 못하고 숙맥 같은 판결만 내리는 우리 아닐까요?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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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이 또다시 쑥대밭이다. 제주 국제관함식 때문이다. 강정마을회는 지난 3월 관함식 유치 반대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청와대는 재차 주민 의견 수렴을 요청한다. 이틀 전 관함식 찬성 주민들은 ‘대통령의 유감 표명’과 ‘공동체 회복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조건으로 마을총회를 다시 열었고 국제관함식 유치를 결정한다. 반대 주민들은 ‘정부·해군 협잡질에 우리끼리 싸우지 맙시다’며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주해군기지는 참여정부 때 ‘민항 위주의 해군 기항지’라는 조건으로 시작된 사업이다. 해군 주둔지가 아닌 잠시 들르는 항구이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후 이명박 정부는 ‘군과 민간이 공존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이름으로 계획을 변경한다. 해군 기항지? 민군복합? 관광미항? 명칭에서부터 주민을 위하는 것처럼 꾸며진 거짓말이다. 그리고 제주해군기지는 지난 11년 동안 숱한 불법과 주민 탄압으로 세워진다.

해군은 ‘주민을 매수하라’는 교훈을 2002년 화순과 2005년 위미에서 습득한다. 해녀와 어촌계, 지역주민 반발이 극심했다. 강정마을은 애초 제주해군기지 후보군에 없던 곳이다. 2007년 4월, 당시 마을회장은 마을 규정을 무시한 채 ‘해군기지 관련의 건’으로 긴급 임시총회를 소집한다. 마을 주민 87명이 참석했고 해군기지 유치를 계획대로 통과시킨다. 참석한 대다수는 해군과 접촉한, 20~30년 어업보상을 미리 받은 해녀들이었다. 강정마을회는 2007년 8월 유치 결의를 주도한 마을회장을 해임하고 주민 725명이 참가해 반대 680명으로 해군기지 반대를 결정한다. 찬성과 반대의 극단적인 대립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제주도의 8개 후보지를 대상으로 한 2009년 제주해군기지 입지타당성 평가에서 강정마을이 대안지로 선정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해군은 기본계획보고서와 환경영향평가서에 매입지 내에 민가가 거의 없고 부지 매입이 용이하며 주민과의 마찰 최소가 장점이라고 밝힌다. 검토 항목은 극히 단순하고 항목별 점수는 조작되었다. 주민들의 동의를 얻었다는 명분으로 법이 정한 예비타당성 조사는 생략되었다. 국방부 장관은 환경영향평가서가 제출되기도 전에 국방·군사시설 실시 계획을 불법으로 승인하고, 제주도의회는 2009년 제주도 지정 절대보전지역 변경 동의안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제주해군기지 부지와 강정천, 강정등대에서 발견된 멸종위기종 맹꽁이와 붉은발말똥게, 제주 고유종인 제주새뱅이, 10종 이상의 국내외 법적 보호종 산호충류는 모두 사전 환경성 검토에서 누락되었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천연기념물, 생태계보전지역, 해양도립공원, 절대보전지역 등 7개의 보호지역은 무용지물이었다. 태풍에 해군기지 방파제 케이슨이 깨져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영산강유역환경청, 문화재청, 대한민국 국회는 진실을 방치했고 불법을 용인했다. 지난 11년간, 경찰에 연행된 강정 사람은 700명이 넘는다. 구속, 실형을 받았고 수억원의 벌금을 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주민들을 상대로 34억원의 구상권을 청구했다. 과정은 공정하지 못했고 결과도 엉망진창이었다. 풍비박산된 마을에서 주민들은 서로 견제하고 상처는 깊었다.

조건 없이 사과하고 뭇 생명의 치유를 위해 손을 내밀어도 부족하고 부끄러운 판이다. 시대에 역행하는 군함 사열을 조건으로 대통령의 주민 면담을 추진하는 것은 옹졸한 짓이다. 11년의 불법과 억압의 진상을 밝히는 게 우선이다. 강정마을은 올해도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윤상훈 | 녹색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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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10년째 답변을 기다리는 물음이 있다. 울산의 한 고등학생이 던진 것인데 그 학생의 떨리는 음색까지 그대로 마음에 남아있다. 2008년 겨울밤이었다. 강연주제는 ‘현장과 인문학’이었고 청중은 대부분 교사들이었다. 그날 원고의 제목은 ‘앎은 삶을 구원하는가’였다. 당시 교도소에서의 인문학 강연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던 글이다. 강연장에는 선생님과 함께 온 학생들이 몇몇 있었는데 내게 질문을 던진 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 나는 인문학과 가난한 사람들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실제로 인문학 공부의 현장에서 나는 여러 긍정적인 신호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나만이 아니었다. 울산 강연 전날 서울에서 현장인문학 워크숍이 열렸는데 흡사 인문학의 효험에 대한 간증대회 같았다. 워크숍에 참여한 여러 활동가들의 입에서 빵보다 장미, 돈보다 인문학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울산 강연에서도 나는 전도사처럼 현장인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런데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마저 마무리되던 시간에 한 학생이 머뭇머뭇하더니 손을 들었다. 말을 얼른 꺼내지는 못했다. 입에 고인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자 그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감정을 겨우 가라앉힌 후 그가 내게 물었다. “오빠가 지적장애인이에요. 선생님, 오빠에게도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질문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데 답변에 대한 기억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뻔하다. 제대로 답하지 못한 것이다. 철학 공부에 대한 생각을 횡설수설했던 것 같다. 철학 공부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일깨움이자 그 일깨움이 가져온 변화이고 오빠에게도 어떤 변화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바라고. 정말 엉터리 답변이었다. 철학이 어떻게 오빠에게 일깨움을 일으키느냐고 물었는데 그런 일깨움이 바로 철학이라니. 거기에 또 무슨 이야기를 덧붙였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더 이상의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던 내 부끄러운 마음과 진지하게 나를 보던 그의 눈빛은 잊히질 않는다.

그렇게 그 물음과 헤어진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 알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그동안 공부하면서 답변을 듣지 못한 질문이 그냥 떠나는 걸 본 적이 없다. 잠시 뒷줄로 물러서기는 해도 답변을 듣지 못한 질문은 묻기 위해 올린 손을 결코 내리는 법이 없다.

그 학생과는 그렇게 헤어졌지만 그의 오빠는 언제부턴가 내 앞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노들야학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지적장애인이다. 신체장애나 뇌병변장애를 가진 학생들과는 비록 중증이라 해도 수업 진행에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지적장애 학생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철학 과목을 듣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지적장애가 덜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벽을 느꼈다. 내가 과장된 몸짓을 하는 경우 간혹 웃음을 짓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잠을 잔다. 간혹 휴대폰을 만지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몸을 배배 꼬다가 화장실에 간다고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지난 학기에는 아우슈비츠에서의 비극적 체험을 다룬 프리모 레비의 &lt;이것이 인간인가&gt;를 읽었다. 신체장애를 가진 학생들은 과거 시설에서의 체험을 떠올리며 글에 흥분하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지적장애를 가진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제 아무리 레비의 말이라 해도 그것이 책에 쓰인 문장들인 한에서는, 그리고 그것을 내가 그대로 읽어주는 한에서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았다. 10년 전 손을 들었던 학생이 여전히 묻는 것만 같았다. “오빠에게도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지적장애인들은 철학을 할 수 없는가. 이들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지혜에 대한 사랑’도, 칸트의 ‘미성년에서 벗어나기’도 불가능한 것인가. 철학자들은 이에 대해 침묵하거나 끔찍한 말만 내뱉었다. 플라톤은 결함있는 아이들은 내다버리라 했고, 칸트는 이성이 없는 존재들에게는 인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지적장애인들은 철학 바깥의 유령이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책 한 권을 만났다. 제목이 <어른이 되면>이다. 자신을 ‘생각 많은 둘째 언니’라고 소개하는 저자 장혜영씨와 18년간 장애인수용시설에서 살아야 했던 발달장애인 동생 혜정씨가 함께 꾸리는 전쟁 같은 일상의 이야기다. 혜정씨와 어떻게든 세상에서 함께 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분투하는 ‘생각 많은 둘째 언니’ 혜영씨가 깨우치고 일구어온 통찰들. “나는 특별히 배운 적이 없다.” 비장애인으로서 장애인과 함께 지내는 법에 대해서 혜영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살면서 자연스레 소통하는 법을 배웠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생각 많은 둘째 언니’는 앎을 통해 삶을 얻지 않았고, 함께하는 삶을 통해 앎을 얻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철학의 뒤집힌 성숙과 구원의 길을 본다. ‘철학을 통한 성숙’이 아니라 ‘철학의 성숙’ 가능성 말이다. 플라톤과 칸트가 성숙할 수 있는 길을 이 책의 ‘생각 많은 둘째 언니’가 보여주고 있다. 삶의 선생 노릇을 했던 앎의 대가들은 지적장애인들 앞에서 얼마나 무능했고 유치했고 무례했던가. 스스로 어른 행세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정신지체로 몰아세웠던가. 이제야 나도 혜정씨에게 손을 들고 묻고 싶다. “철학자에게도 삶이 앎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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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관련된 사회, 문화적인 활동이 이전에 비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과학자들이나 공학자들이 학회나 학술지를 통해서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내놓는, 전문 집단 안에서의 활동이 선진국 수준으로 늘어났다. 곧 없어질 분류일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의 비율이 이과가 훨씬 많은 쪽으로 역전된 지도 오래다. 고등학교에서부터 과학, 수학을 제법 깊게 배우는 숫자가 젊은 세대의 절반을 넘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이어져 과학, 수학을 밥벌이로 삼는 숫자도 제법 된다는 의미다. 개개인의 결정의 총합으로 사회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시대에 과학, 기술과 관련된 내용을 스스로 알아야 하는 필요성은 점점 커져간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과학과 기술의 내용들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활동들도 많아지고 있다. 학생들을 주요 대상으로 놓았던 잡지만 있었는데 ‘스켑틱’이나 ‘과학잡지 에피’처럼 성인들을 위한 과학 잡지들이 창간되었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 강연도 열띤 호응을 받으면서 열리고 있다. 카오스재단은 단순한 대중 강연을 넘어서 전문가 수준의 과학 강좌를 ‘마스터 클래스’라는 이름으로 열고 있는데 관객을 모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러 온다. 유전자 조작, 핵발전, 미세먼지, 기후변화 등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많은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과학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과학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과학지식은 가지고 있어야 삶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과 관련된 결정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외국어를 익히면 그 언어를 쓰는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갖게 되는 것처럼, 일정한 수준의 과학과 수학을 익혀야 삶과 운명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믿고 있었는데, 수능에서 과학과 수학의 시험 범위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22년부터 수능에서 수학에서는 기하와 벡터가 빠지고, 과학2 과목이 모두 시험 범위에서 제외된다. 물론 교육과정에서 이런 내용들을 모두 들어내겠다고 보도된 것은 아니라서 시험만 안 본다는 이야기이지 싶다. 하지만, 수능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들은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학생들은 잠만 자는 상황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고 학생들은 제외된 부분들을 익히지 못하고 고등학교 과정을 끝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 대해 축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조치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배우지 않은 것들은 대학 가서 배우면 된다고 한다. 반면에 많은 과학자들은 과학교육의 수준 하락을 걱정하고 있다. 양쪽 모두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다.

과학과 수학의 시험 범위를 줄이면 학생들의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보는 쪽은 학생들이 시험을 보지 않는 것들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교육과정 안에 있는 내용들을 충실히 전달하고 가능하면 많은 학생들의 성취도를 끌어올리는 것을 걱정해야 할 교육당국이 시험 범위만 놓고 교육 정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교육적이라고 할 수 없다. 공부의 부담을 줄이는 방식에 대해선 과학과 수학이 중요한 시대에 세상을 이해하는 기초는 제공하도록 오랜 시간을 두고 교육과정을 재편해야지 수능 시험 범위 축소 같은 것은 정책이 될 수 없다. 물론 수능 범위 축소를 반대하는 쪽에도 같은 질문을 한다. 전공할 소수의 학생들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과학과 수학에 대한 어떤 수준의 이해가 세상 사는 데 필요한지 고민하고 토론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껏 교육과정을 제공할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중교육을 통해 양성된 인력이 해야 할 일은 인공지능과 자동 로봇이 점점 대체할 것이고 산업적 요구가 영재 교육에만 집중될 것이므로 영재 교육의 대상이 아닌 학생들에게 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금의 교육정책 결정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의 글을 읽었다. 실제로 교육청에 시민교육을 담당하는 민주시민교육과가 생겼다. 나는 이런 생각이 과학과 수학 교육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아니길 바란다. 인공지능과 자동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과학과 수학을 모르고 그것들이 제공하는 편의를 누리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과 수학을 더 능숙히 다룰 수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다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눈앞에 닥칠 결정을 함께할 민주 시민들이 과학이나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하지 않도록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배워야 한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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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발생한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 이후, 10대들의 범죄가 뉴스에 나올 때마다 소년법 폐지를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친다. 정치권은 국민 여론을 의식해 소년법 개정과 엄벌을 위한 법안을 발의하지만, 보호처분의 내실화를 위한 기관 증설, 인력과 예산 지원에는 무관심하다. 따라서 비행청소년의 시설 내 보호처분을 담당하는 소년분류심사원과 소년원은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정상적인 기관 운영이 어렵고, 그 결과는 재범률 증가로 나타난다.

소년부 재판을 앞둔 비행청소년들은 3~4주 동안 법원으로부터 소년분류심사원에 위탁된다. 위탁 목적은 비행의 원인 진단과 재범 방지를 위한 교육이다. 이를 위해 집단상담, 심리치료, 인성교육 등 교육활동을 하고, 휴일에도 반성문, 과제물 작성, 독서 등으로 시간을 보내게 한다.

소년분류심사원과 소년원에 근무하는 보호직 공무원들은 한 달에 5~6일 생활관 당직근무를 한다. 평소에는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지만, 당직인 날은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연장근무를 한다. 주말과 공휴일, 명절에도 당직일 경우 수용관리와 생활지도를 위해 24시간 근무를 한다. 다음날 오전 9시에 근무가 끝나면 24시간 근무를 했으니 퇴근해야 하는 게 상식이지만, 인력 부족으로 수업과 생활지도, 면회지도, 법원 출장 등을 위해 정오에 퇴근하거나 대체근무자가 없으면 아예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이럴 경우 32시간을 연속 근무하고, 이를 일주일에 2회 하면 주 80시간을 일하게 되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무가 시행되는 시대에 주 80시간 근무가 일상화된 곳이 소년보호기관이다.

서울소년분류심사원의 경우 적정 수용인원은 130명이지만, 실제 수용인원은 160~200명이며 200명을 초과할 때도 많다. 한 호실에서 많게는 20명 이상의 위탁소년이 생활할 정도로 구치소보다 환경이 열악하다. 비행청소년의 약 30%가 유년시절 부모의 가정폭력과 이혼, 버림받은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분노조절장애, 우울증, 품행장애 등을 갖고 있다. 교육과 상담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고 생활지도를 하는 것은 자기 절제와 희생이 필요한 고도의 감정노동이다. 인권친화적인 생활환경이나 교육환경과 거리가 먼 과밀 수용, 32시간 연속 근무하는 보호직 공무원의 근무환경 속에서 비행청소년의 심성 순화와 효과적인 교정·교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관악산 폭행 사건 등 최근 발생한 잔혹한 청소년 범죄로 인해 소년법 폐지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20만명을 넘어섰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긴급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소년법 등 관련 법령 개정에 대해 관계부처가 국회와 함께 적극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작년에 발생한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 직후 상황과 흡사한 과정이다.

소년분류심사원에 수용되어 비행 원인을 진단받고 교육을 받은 후, 보호관찰처분을 받아 가정과 학교로 돌아간 비행청소년의 재범률은 약 40%다. 문제는 40%의 재범률을 더 낮추기 위해 시간과 인력과 예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정치권과 여론의 관심은 ‘법의 개정을 통한 엄벌’에만 있다는 것이다. 소년분류심사원과 소년원은 비행청소년 선도와 교육의 ‘현장’이자 ‘마지노선’이다. 소년법 개정보다 소년보호기관의 혁신이 절실하다.

<최원훈 | 법무부 보호직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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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에서 의류 비즈니스에 종사하며 만난 특이한 인물이 있다. 이름은 사이먼. 만난 지 10년이 좀 넘었다. 70대 후반인 그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인상이다. 빛바랜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사시사철 점퍼는 열고 다닌다. 코끼리 같은 몸집에 다리를 조금 절룩거린다.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은 하얀 수염으로 늘 덥수룩한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모습은 일품이다. 그는 유대인이지만 나를 만나면 스님처럼 합장한 뒤 악수를 청한다. 그의 인사말도 늘 똑같다. “다음주는 네 비즈니스가 틀림없이 더 좋아질 거야.”

사이먼은 옷을 취급하는 도·소매 상인들에게 비닐백 등 장사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공급하는 업자이다. 도매상 중에는 유대인들이 많다. 내가 아는 유대인 도매상은 모두 사이먼과 거래를 한다. 토론토 유대인 커뮤니티에도 경쟁자가 있을 텐데 사이먼이 거의 독점을 하고 있다면 물건에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 같았다. 가격과 품질이 뛰어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사이먼한테서 처음으로 물건을 받던 날 가격이 이상하다 싶어 그가 건네준 영수증을 다시 계산해 보았다. 사이먼은 물건을 싸게 준 것이 아니라 덧셈을 잘못해서 200달러 가까운 돈을 덜 받았다. “당신이 실수했다”며 돈을 더 주었더니, 사이먼은 두 손을 모아 내게 인사를 했다. 나에게 사이먼의 존재를 알려준 사람은 도매상을 운영하는 제이크였다. 역시 유대인인 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200달러는 사이먼에게 대단히 큰돈”이라며 그는 마치 자기 일처럼 고마워했다. 그참에 나는 궁금해하던 것을 처음으로 물어보았다. “당신들은 왜 사이먼한테서만 물건을 사지?” 제이크는 말했다. “사이먼이 좋은 사람이라서 그래. 나는 그를 30년 넘게 알아 왔는데 사이먼은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었어.” 제이크의 다음 말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사이먼 물건은 언제나 품질이 좋고 가격도 좋아. 다른 데와 비교하지도 않지만 설령 그가 비싸게 받는다 해도 나는 그의 가격이 싸다고 생각할 거야.”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제이크는 사이먼의 평범하지 않은 삶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사이먼은 잘나가던 의류회사 운영자였다. 그의 사업체는 외부 요인 때문에 십수 년 전에 문을 닫았다. 사업이 잘될 때든 실패한 이후든 그가 토론토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하는 일은 똑같았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발벗고 나선 일이다. 도움을 청하면 사이먼은 누구든 언제든 가리지 않고 응해 주었다. 수십 년에 걸친 헌신적인 활동 때문에 사이먼이라는 이름은, 의류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존경’ ‘신뢰’와 동의어였다. 그러니까 “사이먼 물건이 비싸도 그것은 싼 것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말이 말이 되는 것이다.

2018년 7월 넷째 주 닷새 동안 유례 없는 폭염 속에서도 6만여 시민이 분향소를 찾아 노회찬 의원을 추모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아파한 까닭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어 억울한 사람들 편에 섰던 노 의원의 수십 년에 걸친 한결같은 활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너무나 꼼꼼하게 한결같아서, 모교 민주동우회(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돕고 기억하는 대학동문회)에까지 연회비 3만원을 십수 년 동안 꼬박꼬박 보내왔다고 했다. 본인은 양복 두 벌에 닳아빠진 구두 한 켤레로 살았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그의 죽음을 접하면서 토론토 유대인 커뮤니티의 사이먼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사이먼이 공급하는 물건은 무조건 싸고 좋다는 믿음은 수십 년 헌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에서 연유한다. 노회찬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는 우리는 왜 살아생전 그에게 사이먼식의 존경과 신뢰를 보내지 못했을까? 그가 그것을 느끼고 자기의 진정성을 사람들이 알아주리라 믿었더라면 그의 선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죽음이 그래서 더 애통하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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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유모차가 살구나무 아래 서 있구요

지팡이와 털신이 뜰팡에 기대어 있습니다

살구가 한 소쿠리 담겼구요

처마 아래 신문지와 골판지가 쌓였습니다

 

살구를 소쿠리에 담아 샘에서 씻은 유모차가

천천히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앉습니다

깡마른 두 발이 문턱을 먼저 넘어오고

이어서 무릎걸음으로 퀭한 얼굴이 밖으로 나옵니다

좀 잡숴봐, 이래 봬두 달아

 

살구꽃이 피었다 지고 풋살구가 열리고

연두에서 노랑으로 익어가는 동안

낙상이 있었고

119구급차가 두어 번 다녀갔지만

그런대로 아직은 지낼 만합니다

송진권(1970~)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머니는 몸이 불편해 유모차를 밀고 다닌다. 헐고 너절하게 된 유모차는 늘 살구나무 아래에 서 있어서, 살구나무에 꽃이 오고 풋살구가 열리고 살구가 노랗게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생긴 건 곱지 않아도 맛이 잘 든 살구를 나눠 먹으려고 맑고 푸르고 차가운 샘물에 갓 딴 살구를 씻어서 툇마루에 앉는다. 비록 살구꽃이 오고 가고, 푸른 풋살구가 매달리고, 살구가 여무는 동안 넘어져 다친 일이 있었고, 또 위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지만. 송진권 시인은 시 ‘느티나무슈퍼’에서 “느티나무슈퍼에 가면 안채에서 말매미만큼 늙은 할머니가 나와/ 달팽이자물쇠를 풀고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지요”라고 썼는데, 이 시를 읽으니 이 시의 안채에서 고향집 어머니가 퀭한 얼굴로 바깥으로 나오신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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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재로 변한 아들을 한 줌 한 줌 강물에 뿌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작별을 고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1987년 1월16일, 임진강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렇게 보냈다. 경찰의 ‘심장 쇼크사’ 발표에도 말을 아꼈다. 사망 이틀 만에 치른 영결식이었다.

4개월이 지나서야 사인이 밝혀졌다. ‘물 고문과 구타에 의한 사망.’ 민주단체들은 곧바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전국에서 고문살인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국본은 6월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 개최를 발표했다. 대회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숨졌다. 6·10국민대회에는 50여만명이 도시 거리를 메웠다. “박종철을 살려내라”, “호헌철폐”. 아버지는 시위대의 펼침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철아, 잘 가그래이….’ 임진강 허공에 부르짖던 혼잣말이 쓰여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군사정권 시절, 고문당하고 정보기관에 끌려가 의문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가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일원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해 그는 역사의 현장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6월항쟁, 이한열 장례식, 노동자 대투쟁….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아들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유가협 회원들 사이에서 ‘유월의 아버지’로 불렸다.

죽음의 시대, 아버지 박정기는 유가협 회원들을 보듬으며 함께 투쟁했다. “내가 박종철의 애비입니다”라는 그의 인사는 유가족들에게 큰 힘이 됐다. 그는 이소선 여사에 이어 유가협 회장을 맡았다. 420일간 장기농성을 통해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유가협은 한국 민주주의·인권운동의 한 축이었고, 중심에 박정기가 있었다. 박정기는 “아들이 죽음과 맞바꾸면서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화두처럼 간직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의 최후의 30년은 아들 박종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늙은 투사’ 박정기씨가 지난 28일 타계했다. 아버지마저 떠난 지금, 박종철이 남긴 화두를 잡을 사람은 누구인가.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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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직접 알지 못한다. 행사나 집회에서 스쳐 지나가며 눈인사나 나누었던 사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애도할 수도 없다. 자꾸만 그가 출연한 토론 프로그램 영상을 돌려보고, 어록을 찾아보고, 집회와 시위 기록들을 뒤지고, 그의 페이스북을 들여다본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애끊는 추도사를 몇 번이고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럴진대 그와 평생을 동고동락했던 분들의 심정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너무도 황망하여 실감조차 나지 않는 그의 부재. 부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존재의 상실이며 사라진 존재를 만지는 예리한 감각이다. 우리는 모두 그가 강렬히 존재했음을 느끼는 사후적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비로소 그의 삶을 돌아본다. 언론과 시민단체가 여러 각도로 조명한다. 진보정치의 큰 별, 거악에 맞섰던 소신 있는 정치인, 사회적 약자와 서민을 위한 정치인, 유일하게 유머를 아는 진보 정치인, 촌철살인의 달변가….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나에게 그는 “나라다운 나라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성평등한 나라”라고 말했던 유일한 진보 남성 정치인이었다. 여성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이라며, 성평등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공동과제”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남성 정치인이었다. 정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기획에 여성이 배제되는 현실과 젠더가 결여된 ‘진보적’ 가치에 깊은 회의감과 절망감이 팽배한 가운데에서도, 노동운동가 출신 남성도 여성운동의 진정한 동지가 될 수 있음을, 이성애 남성도 성소수자들과 연대할 수 있음을, 생물학적 남성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각종 행사와 모임, 토론회나 미디어에서뿐 아니라, 열정적 입법 활동과 다양한 투쟁현장에 함께함으로써, 여러 여성단체들의 오랜 후원회원으로서 말을 행동으로, 소신을 실천으로 일구며 그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초선 의원이던 2004년, “호주에도 없는 호주제를 없애자”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며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 대표 발의, 2006년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대한 특별법안’ 대표 발의, 2008년 국회의원 중 처음으로 차별금지법 대표 발의 등은 그가 펼쳐온 의정활동의 아주 작은 예들이다. 더 중요한 건, 법제도의 제·개정만으로는 사회문화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틈만 나면 뿌리 깊은 성차별 구조의 문제를 강조하곤 했다는 점이다. 호주제 폐지 당시에는 “법적 폐지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잔재를 문화적으로도 청산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일갈했고, 저출산의 원인은 아이를 안 낳는 여성이 아니라, 여성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없는 사회문화적 환경에 있음을 오래전부터 지적했다. “우리나라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두 종류의 국민이 있는 셈이다. 사회·정치적으로 강자인 남성이 봉건문화, 유교문화, 가부장적 질서 등 힘과 폭력에 의해 차별과 억압구조를 만들어 간다”고 한 건 2005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다.

“여성비정규직, 삼중의 ‘을’ 아닙니까. 여성이어서, 비정규직이어서, 주로 영세기업에 다니는 열악한 위치로 삼중의 을입니다”(2013년, 여성노동문화제 토크콘서트 패널 출연 당시)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 그는 누구보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다. 2005년부터 매년 3·8세계여성의날에 여성들에게 장미꽃을 선물해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1979년 YH사건으로 사망한 김경숙 열사의 투쟁을 기념해 제정된 ‘여성노동운동상’ 후원금을 가장 먼저 쾌척한 정치인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가 오랫동안 함께한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 승리 환영논평을 결국 발표하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는 점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 그는 우리가 애써 생각해야만 생각할 수 있는 것,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공기 같은 특권들을 일깨우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수자와 약자 모두의 행복을 바라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가 살아낼 수 없는 사회의 깊은 내면과 다시 직면하게 된다. 누군가의 사회적·실존적 죽음을 전제로 굴러가는 불평등한 세상, 누군가의 삶만을 위해 존재하는 부조리한 구조. 지난 6월, 한국여성의전화 창립 35주년 후원의 밤에서 그가 한 말처럼, “야만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할 책무는 이제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았다.

그의 미소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비로소 나는 그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영면하소서, 노회찬 의원님.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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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법외노조 취소를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가 갈팡질팡 중이다. 한국은 촛불항쟁으로 부패한 정부를 탄핵시키고 새 정부를 창출할 만큼 역동적인 사회이다. 심지어 자본과 극우의 휘장으로 유세를 떨고 있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장으로 나가도록 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촛불대통령 문재인 정부가 아닌가.

그런데 한국의 교육과 노동은 여전히 냉전과 적폐에 발목 잡혀 있다. 기업인들과 수구세력들은 노동조합이라 하면 여전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노동자나 전교조를 종북좌파나 빨갱이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물화건 정보건 서비스건 가치가 생산되는데, 노동 없이 가능한가? 교육이라는 가치 역시 교육하는 노동자, 즉 교원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래서 일찍이 세계교원조합연맹이나 국제교원노조연맹이 창설되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가입되어 있는 국제교원노조연맹은 1912년 창립되었던 교원노조단체들이 통합과 분열을 거듭하면서 1993년 출범했다. 이 단체에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172개국의 401개 단체가 소속되어 있다. 단체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2011년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3000만명의 교직원, 교사들이 가입해 있다.

2013년 세계 교육사에서 수치스러운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발생했다. 전교조가 해직 교원에게 조합원 자격을 부여하고 있는 규약을 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외노조라고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것이다. 당시 전교조만이 아니라 정치가들, 법조인들, 국내외 많은 사회단체들이나 전문가, 시민들이 부당한 결정에 대해 비판하고 항의했다. 뿐만 아니라 이 결정은 지난 정부하 산별노조의 조합원 자격은 규약에 따름에 따라, 철도노조의 해직노동자의 조합원 가입은 합법이라고 했던 대법원 판결(2012두15821)과도 위배되었다. 전교조의 법외노조 탄압은 박근혜와 양승태 리스트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냉전수구세력의 적폐이자, 대한민국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는 결과이다.

돌아보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촉진시킨 전교조 교원들의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운동으로 수많은 교원들이 부당해고당했으나 참교육운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 운동은 일제식민잔재교육이나 군국주의와 독재정권 찬양교육과 촌지문화 등을 내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아가 참교육운동의 거름이 있었기에 2009년 당시 김상곤 경기교육감(현 교육부 장관)의 ‘혁신교육’이 가능할 수 있었다.

지난 정부는 전교조를 법외노조, 사실상 불법화시키면 참교육운동, 교육혁신운동도 금지시킬 줄 알았을까? 또한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순조롭게 이뤄지고, 냉전독재시대의 교육으로 회귀시킬 수 있으리라고 착각했던가?

전교조 법외노조 이후에도 조합원들의 수가 줄어들기는커녕 더 단결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교사들이 단결하여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막아냈다. 마침내 전국 방방곡곡에 위대한 촛불이 밝혀지는 데 세월호운동과 함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전교조에 덧씌워진 탄압의 족쇄를 끊어내고 부당한 법외노조 직권취소를 해야 할 이 시점에 무슨 이유로 망설이고 있는가? 최근 최저임금 문제를 포함한 일련의 비민주적 조치로 인해 시민들의 마음이 돌아서려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진보 지식인 323명은 “문재인 정부, ‘촛불정부’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라며 현 정부가 혁신의 고삐를 더 이상 늦추지 말도록 당부한 바 있다. 아직 시간은 문재인 정부의 편이다. 그러나 현 정부가 촛불시민의 “이게 나라냐”라는 준엄한 목소리를 잊는다면 촛불민심은 다시 광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문재인 2기 정부는 이제 교육다운 교육을 만들어야 한다. 교육이 죽으면 미래가 없다. 악법 사립학교법도 제대로 개정하고, 비리사학재단을 청산하여 죽어가고 있는 한국교육을 살려, 지난 10여년 퇴행해온 교육혁신을 단행할 때이다. 이 교육혁신의 신호탄은 문재인 정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직권취소 선언이어야 한다.

<김귀옥 | 한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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