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온 500여명의 예멘 출신 난민 문제로 한국 사회의 여론이 분분하다. 난민 문제가 지금 국내정치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독일에서 볼 때 그런 정도의 뉴스는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도 이를 계기로 지구촌의 난민 문제를 진지하게 함께 생각하고 문제 해결에 동참할 때도 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제주도와 대비될 수 있는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탈리아의 람페두사섬을 먼저 떠올렸다. 면적이 20㎢에 불과하고 4500여명이 살고 있는 이 조그만 섬에 튀니지의 정정불안과 리비아의 내전으로 2011년에는 7000여명의 난민이 몰려들었고, 2013년 10월에는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의 난민 545명을 실은 배가 연안 근처에서 침몰, 390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이 섬의 여성시장이었던 주세피나 마리아 니콜리니는 유럽연합의 난민정책을 위한 정상회담에 참석, ‘우리 섬의 공동묘지가 얼마나 더 커져야만 하는가’라는 연설 속에서 “나는 유럽의 이주정책이 그들의 죽음을 빌미로 이주의 흐름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지녔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 그러나 조각배에 의지한 여행이 그들이 지닌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기에 나는 그들의 죽음은 유럽의 수치라고 생각한다”고 유럽연합의 난민정책을 비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3년 7월8일 이 섬을 직접 찾아 난민을 위로하고 희생된 영령들을 위한 조화를 지중해에 던졌다. 유럽연합의 난민정책에 즉시 대응하는 난민의 이동루트가 그간에 바뀌면서 현재는 100여명의 난민만이 이 섬을 조용하게 지키고 있다.

이 섬보다 근 90배나 크고 주민의 수도 140배나 많은 제주도의 원희룡 지사는 최근에 제기된 예멘 난민 문제와 관련, “제주도가 (난민) 부담을 떠안아서는 안된다. (…) 북한에서 탈북인들이 내려온다면 받아야겠지만 예멘이나 시리아에서 발생한 난민이 제주도로 들어온 것은 순전히 (무사증을 시행하고 있는) 제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걸 두고 국제사회가 ‘이왕 (난민들이) 갔으니 개개의 지방정부나 국가가 이들을 다 맡아라’ 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제주와 람페두사 두 섬의 난민 문제가 안고 있는 심각성의 정도는 다르지만 이 발언은 우리 사회의 난민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수준을 보여주고 있기에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한다. 난민 문제는 윤리적·인도주의적인 측면도 마땅히 고려되어야 하고, 법적·정치적 문제와 함께 사회적 문제도 종합적으로 검토, 장기적인 차원에서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현재 격렬하게 논쟁 중인 유럽연합의 난민과 이주자 문제를 둘러싼 여러 입장들을 먼저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1951년의 ‘제네바 난민협약’은 난민을 규정한 국제법적인 모태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적 상황을 주로 고려한 이 협약은 1967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의정서’에 의해 유럽과 1951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제한이 철폐되었다. 이에 따라 난민은 국제법적으로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및 이들 사건의 결과로서 상주국가 밖에 있는 무국적자로서 이전의 상주국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이전의 상주국가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적 정의는 강제적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자와 가령 경제적인 이유에서 자의적으로 고향을 떠난 자의 차이를 분석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제법적 성격을 지닌 난민 보호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시 제기된 직접적 계기는 2015년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지역의 내전 격화와 극심한 혼란이었다. 소말리아, 에리트레아 등지에서도 내전과 더불어 기아로 인한 난민의 유럽 이동도 거의 동시에 있었다. 이 분쟁지역과 가까운 터키, 요르단, 레바논이나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아의 상황도 매우 어렵기 때문에 육상과 해상을 통한 유럽연합의 지중해 연안국가로 향한 목숨을 건 난민의 긴 행렬은 이어졌다. 2015년 한 해 동안에 85만명이 그리스에, 15만명이 이탈리아로 건너왔고 도중에 3800여명이 사망한 비극의 행렬이었다. 또 이들은 대부분 그리스에서 출발해서 이른바 ‘발칸루트’로 불리는 경로를 따라 헝가리, 오스트리아, 폴란드와 독일 등지로 이동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유럽연합의 통합적인 난민정책은 큰 파국을 맞게 되었고 개별 나라의 국내 정치용의 손익계산서만이 난무하는 상황이 왔다. 또 이런 분위기를 최대한 이용하는 극우세력은 유럽 곳곳에서 약진했다. 또 유럽연합 내에서 100만명이 넘는, 가장 많은 난민을 받아들여 난민 문제의 유럽적인 해결을 줄곧 주장해온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난민정책의 중심에 서있는 개별국가가 여전히 기존의 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에 의존하여 난민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 현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난민 문제 해결의 전망이 어려워질수록 개별국가만이 과연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 안정된 전제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되면서 ‘방법론적인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난민 문제를 단순히 개별국가의 ‘제도개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방법론적 제도주의’의 한계도 지적되고 있다. 시드니 대학의 이주 문제 전문가로서 한국 사회의 이민 문제도 연구했던 스테펜 카슬스는 <이주의 시대>에서 21세기 민족대이동의 복잡한 동기와 동력, 난민의 범주, 난민의 가족, 친척, 친구, 지인 등의 사회적 관계망, 합법적인 구조 밖에 있는 브로커의 연락망, 비정상적인 노동시장, 난민을 돌보는 비공식적인 구호와 구조기관 등 많은 요소를 총체적으로 이해한 토대 위에서 이주와 난민정책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도 이미 1992년 12월에 국회비준을 거쳐 난민협약에 가입했다. 이제 현실로 다가온 난민 문제의 해결을 위한 종합적인 정책 개발과 더불어 전문인력 양성이 당장에 시급하다. 이번 예멘 난민이 무슬림이기에 ‘테러리스트’나 ‘잠재적인 성범죄자’와 곧장 연결시키는, 타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상상력 수준을 염두에 둘 때 더욱이나 그렇다. “낯선 사람들이 제일 먼저 우리에게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는 독일작가 테오도어 폰타네(1818~1898)의 역설적인 증언처럼 고향을 잃은 난민들은 우리의 반면교사다. 우리도 과거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피란민들이 아니었던가.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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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공급의 법칙은 경제학에만 통용되는 게 아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 배경을 살펴보면 그 이면에는 이해관계자들 사이 모종의 거래로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패사건은 수요자와 공급자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발생하게 되는데, ‘뇌물’과 같은 전형적인 부패가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 수요자는 권한을 가진 공공이 되고, 공급자는 공공이 가진 권한을 통해 이득을 보고자 하는 민간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반면에 적극적인 공급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부패도 있다. 보조금 등 공공재정을 부정수급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전형적인 부패와 반대로 수요자는 민간이 되고 공급자는 공공이 된다.‘나랏돈은 눈먼 돈’이라는 말이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눈먼 공급자로부터 돈을 받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고지식한 사람이 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은 가짜 서류 몇 장으로 실업급여나 복지급여 등을 받아내기 위해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성공담을 자랑하기도 한다.

지난 5월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복지·보조금 부정신고센터’에서 보조금 부정수급으로 적발한 금액은 모두 812억원이고, 이 중 환수액이 683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부정수급을 한 719명이 형사처벌을 받았으며,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공무원 212명은 징계를 받았다.

물론 부정수급을 한 사람과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공무원에게도 잘못이 있겠지만, 시스템적으로 미비한 점은 없는지 살펴보고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정부는 올해 초 정부 합동으로 ‘보조금 부정수급 근절대책’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또한 각종 보조금, 보상금, 출연금 등 공공재정 모든 분야의 부정수급 문제를 종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공공재정 부정청구 금지 및 부정이익 환수 등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했다. 이 법안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약칭 ‘부정환수법’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부정수급으로 얻은 이익은 전액 환수하고 고의적인 경우에는 최대 5배의 제재부가금을 부과하도록 하고 있어 수요자의 도덕적 해이를 강력하게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공급자인 각 공공기관에 부정수급에 대한 조사와 관리·감독 의무를 부여해 공공재정이 엉뚱한 사람에게 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신고자에 대한 보호·보상 규정을 포함하고 있어 감시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루속히 부정환수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를 바란다.

<송준호 | 흥사단 투명사회운동 본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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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지난 21일 저녁 예멘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던 난민 하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허리를 다쳐 똑바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어둠을 푸르스름하게 밝히던 제주 초여름의 해도 저버렸다. 바깥에 있던 다른 난민들이 하나 둘씩 방으로 들어와 대화에 동참했다. 통역을 담당한 예멘인까지 포함하면 모두 6명의 ‘젊은 아랍 남성’들이 방 안에 함께 있었다. 여성은 내가 유일했다.

순간 나는 위축됐던 것 같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낯선 이방인 남성들이 다수가 되자 실제 이들이 내게 위협적인지 여부와 관계 없이 마음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예멘에 두고 온 가족, 전쟁이 벌어지기 전의 온전했던 삶에 대한 그리움, 예멘 땅에 가득한 죽음과 비참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불안한 현재와 기약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다. “무슬림은 평화를 뜻한다”고 힘주어 말하던 이들은 누구보다 예멘 난민의 일탈적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난민 반대 여론의 증폭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난달 21일 예멘 청소년 난민 하산(가명)이 여권으로 얼굴을 가린 채 촬영에 응했다. 정지윤 기자

내가 느꼈던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으로 살면서 몸과 마음에 각인된 공포다. 하지만 그 순간 느꼈던 공포의 실체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내가 느꼈던 ‘막연한 공포’와 내 앞에 앉아있는 예멘 난민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이었고, 두려움은 내가 아니라 이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이땅에서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약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주는 고립된 난민의 섬이 됐다. 법무부는 제주도에 들어오는 예멘 난민이 급증하자 이들의 무사증 입국을 금지하고 체류지역을 제주도로 제한했다. 출도제한 조치는 예멘 난민 문제를 우리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팽배한 난민혐오 여론 속에서 제주도는 난민 문제를 풀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난민들을 흡수할 수 있는 아랍 커뮤니티나 산업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제주도는 난민수용 능력에 한계를 보이고 있지만 법무부는 “무사증 제도는 관광객을 유치해서 제주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출도제한 조치는 당연하다”고 선을 그었다.

일자리를 구했지만 힘든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난민이 급증하면서 지낼 곳이 없는 난민들의 숙소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어렵게 이방인에게 대문을 열고 머물 곳을 내어주던 주민들도 외부에 이 사실이 알려지고 반대 여론이 증가하자 이들을 도와주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난민에 과도한 혐오와 지나친 온정주의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상황에서 개개인의 선의에 의해 어렵게 난민들에 대한 원조가 이뤄지고 있는데도 ‘지나친 온정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난민 혐오를 부추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부적절했다.

3년 전, 시리아의 세살배기 난민 쿠르디가 차가운 시신으로 터키 해안가에 떠올랐을 때, 우리는 연민과 애도에 인색하지 않았다. 난민 수용에 소극적인 서방국가들을 비판하며 난민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머나먼 이국의 해변이 아닌, 제주도에 들어오자 태도가 달라졌다. 배타와 혐오의 정서가 팽배하다.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불온하게 여기는 것은 혐오이고 인종주의”라며 “인종주의에 기반한 차별과 혐오는 외국인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안의 약자와 소수자에게로 확산되기 때문에 허용돼선 안된다”고 말했다. 머나먼 나라 해변에서 숨진 쿠르디에게 연민과 온정을 느낄 수 있다면, 제주도에 당도한 500명의 예멘 난민들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나아가 난민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것은 온정주의가 아니라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약속이고 의무다.

한 외국인 원어민 강사의 도움으로 지난달까지 주택에 머물던 하니와 동료들은 더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어 지금은 긴급구호숙소로 향했다. 그들이 언제까지 그곳에 머물 수 있을지, 제주에 머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 답은 좁게는 제주도의 6명의 난민심사관의 손에 달려있고, 넓게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달려있다.

<이영경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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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은 특별한 산이다. 내가 콩나물시루보다 조금 웃자란 크기였을 때 어머니 따라 해인사를 갔었다. 가을걷이 끝낸 동네 어른들과 모처럼 합천의 큰 절로 야유회를 가는 길이었다. 오래전의 일이라 희미하고도 흐릿하지만 몇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때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절에 갔다면 오늘은 내가 어머니를 업고 산으로 간다. 가파른 만물대 코스를 훑고 칠불암 지나 마지막 상왕봉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활짝 핀 꽃이 있다.

산중의 꽃 앞에서 굴기(屈己)하기를 거듭한 이래 꽃도 꽃이지만 식물이 처한 사정이나 상황에 주목해 왔다. 그때마다 맞춤한 시들이 찾아와 주었다. 한편 시를 먼저 염두에 두고 그 장소를 찾는 적도 있다. 가령 김달진의 ‘샘물’은 오래 가슴에 담고 다닌 시였다. “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 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만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만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산은 제 높이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까. 웬만한 정상은 바위로 그 뚜껑을 덮어놓는다. 가야산의 상왕봉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궐 같은 바위에 오르니 여태껏 찾았던 그 광경이 펼쳐지는 게 아닌가. 지름 다섯 뼘에 깊이 두 뼘 정도의 바위 속 웅덩이, 우비정(牛鼻井)이 있다. 하늘과 구름이 들어가기에 충분히 넓었다. 물은 탁했지만 그건 나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산오이풀이 뿌리를 내리고 비단개구리 일가가 퐁당퐁당 살고 있다. 신나게 장난치는 올챙이 형제들. 근심 많은 엄마 개구리의 큰 한숨인가. 가끔 기포가 뻐끔뻐끔 올라왔다. 

조그만 샘에 앉아 물낯에 비친 띵띵한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동그란 지구의 테두리를 아슬아슬하게 걸어서 내려오는 길. 좀전에 본 꽃은 아직도 피어 있다. 올라갈 때 본 꽃 내려와서 찍으니 선백미꽃이다. 몇 층의 잎이 돌려나고 잎겨드랑이에서 노란 꽃이 다투어 피어난다. 제주를 제외한 지역에 살지만 이런 척박한 곳에까지 뿌리를 내린 꽃이 퍽이나 대견하다. 풀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이곳의 선백미꽃은 경건함에 제 일생을 투신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해인사 마당의 탑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선백미꽃. 박주가리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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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젊은 나이에 중범죄를 저질러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수감 직후에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삶을 견디지 못했으나, 이윽고 생명체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여 상황에 ‘적응’한다. 감옥 안에서 산 세월이 감옥 밖에서 산 세월보다 훨씬 길어졌을 즈음, 그에게 감옥 밖은 비현실적 공간이 되었다. 그곳에서 보낸 삶이 어땠는지는 어렴풋한 이미지로만 남았다. 하지만 죄수의 삶은 익숙하나 고통스러웠다. 그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석방 신청을 한다. 그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잘 ‘개조’됐는지, 감옥 밖으로 나가 ‘정상인’으로 살 준비를 얼마나 잘 갖추었는지 간절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번번이 기각당한다. 거듭되는 좌절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그가 “가석방 따위엔 관심 없으니 공연히 시간 빼앗지 말고 빨리 불허 도장이나 찍으시오”라고 말했을 때에야, 심사위원들은 비로소 가석방을 허가한다. 그가 꿈을 버리자, 마침내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감옥 밖 세상에 발을 디뎠다. 그의 추억 속 공간들, 그 공간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감옥 안에서 몸에 익혔던 규율과 기능은 감옥 밖 세상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의 친구와 그의 세상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었다. 감옥 안의 그는 지혜로운 노인이었으나, 감옥 밖의 그는 철모르는 어린아이였다. 그에게 감옥 밖은 혼란스러운 공간이었다. 감옥 안은 갇혀 있으되 안정적이었으나, 감옥 밖은 열려 있기에 불안했다. 감옥 안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감옥 밖에 적응하지도 못한 그는 자기보다 먼저 가석방됐다가 자기와 같은 불안감 속에서 자살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도 자살을 결심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스토리 일부이다. 이 영화에서 모건 프리먼이 분한 노인 장기수 ‘레드’는 늘 감옥에 갇히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꿈꿨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감옥 밖에서 만난 세상은 따뜻했던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냉혹한 현실이었다. 감옥 안에서는 그나마 꿈이 있었으나, 감옥 밖 세상은 그에게서 꿈조차 빼앗았다.

올해 안에 남·북·미 간, 또는 남·북·미·중 간에 ‘종전선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전문가가 많다. 이 예상대로 실현되면, 우리는 지난 65년간 살아온 ‘휴전체제’라는 감옥에서 석방될 것이다. 전쟁 중임을 전제로 국가가 사람의 머릿속까지 들여다볼 권리를 가졌던 시대가 끝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다수는 휴전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를 겪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종전은 휴전체제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종전선언’은 한국인들을 익숙한 과거가 아니라 낯선 미래로 이끌 것이다.

1953년의 휴전협정은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 사이에 체결되었다. 유엔이 중국과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군 최고 지휘관 사이의 협정이 된 것이다. 이로써 군사문제가 한반도의 모든 문제를 규정하는 체제, 즉 휴전체제가 성립했다. 휴전협정은 전쟁을 재개할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종전선언’으로 그 약속을 폐기하는 것은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쪽이 패망하지 않더라도, 전쟁에는 언제나 책임과 배상 문제가 따랐다. 그런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전쟁을 끝내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낯선 일이다.

휴전체제가 종식되면, 당장 휴전선이라는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북한 정권과 체제에 대한 원칙적 태도를 정해야, 걸맞은 이름을 찾을 수 있다. 평양에 남측 대표부를 설치한다면, 이름은 뭐라고 해야 하는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면, 헌법의 영토 규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북한과 적대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친선관계를 맺을 것인가? 상호 간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면, 국가보안법 등 적대관계를 전제로 제정된 법률과 법조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산당, 사회당, 노동당 같은 이름의 정당이 등록 신청을 한다면, 받아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탈북민은 귀순한 우리 국민인가, 아니면 불법 월경한 난민인가? 이북5도청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인공기를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과 같이 취급할 것인가, 달리 취급할 것인가?

‘종전’ 이후에 전개될 상황에 대해서는 전쟁 불안 해소에 따른 신인도 상승, 철도와 도로 연결에 따른 경제 효과 등 장밋빛 전망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최근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을 둘러싼 논란에서 겪은 바와 같이, ‘종전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한 걸음 한 걸음이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유발할 것이다. 기대했던 일보다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더 많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휴전체제로 되돌아가는 편이 낫다고 속삭이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다시’ 통일된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통일 아닌 종전체제를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서 통일에 대비한 연구와 준비는 적지 않으나 통일 아닌 종전체제에 대한 준비는 전무하다. 과거 우리는 아무런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았기에, 엄청난 혼란과 갈등을 겪었고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지금은 해방 직전처럼 준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다. 65년간 ‘휴전체제’에 살다 석방된 사람들에게 종전 이후 어떤 일들이 닥칠 것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주는 것은 인솔자의 도리다. 종전은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규범뿐 아니라 세계관과 인간관 모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역사적 사변이다. 정부는 종전체제가 초래할 혼란과 동요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즉시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에 사는 사람 모두는, 예상치 못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다시 ‘휴전체제’로 되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져야 한다. 그것이, 후손과 역사에 대한 도리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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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으로 손이 향했다. 예전 같으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떻게든 잠들기 위해 애썼겠지만,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에는 통제가 잘되지 않는다. SNS에 접속하니 이렇게 묻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어딘가에서 분명 거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지금, 고작 잠들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고 처량하게 느껴졌다.

글들을 죽 읽어 내려다가 사진 한 장에 눈이 가닿는다. 눈이 말똥말똥해진다. 수면은 지연된다. 내일 아침부터 부리나케 치러야 할 일들은 자발적으로 망각된다. ‘축구공으로 변신한 고양이’란 제목을 단 사진은 이미 만 차례가 넘게 공유되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는 하얀 바탕에 검은 점이 난 고양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 있었다. 얼룩무늬가 만들어내는 절묘한 순간에 무릎을 탁 쳤다.

(출처:경향신문DB)

내친김에 검색창에 고양이를 입력해보았다. 사람들이 SNS에 올려놓은 고양이 사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분명 파노라마였다. 변화와 굴곡이 많은 이야기처럼, 고양이들은 하나하나 다 달랐다. 이 고양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가 저 고양이를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굳이 매력을 뽐내지 않아도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다는 걸 안다는 듯,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는 고양이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귀여워.”

언제부터인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귀여운 것을 찾고 있었다. 그것이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거나 일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여운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머리와 양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이 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플라시보 효과라고 폄하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플라시보 효과면 어떤가. 귀여움 덕분에 잠시 동안 환히 웃을 수 있었는데.

“귀엽다”라는 말도 일상에서 더욱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 뭔가 좋은 것, 다시 보고 맡고 듣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귀엽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귀여움은 으레 사랑스러움을 동반하고, 이 사랑스러움은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어준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서 의외의 면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사람도 귀엽고 그것이 발견되던 순간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 사람 안에 더 많은 귀여움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하니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힘들 때 고양이 사진을 들여다본다고 고백하니, 한 친구가 그럴 때 고작 귀여운 것이나 보느냐고 타박했다. 위로가 필요할 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테지만, 나는 귀여운 것이 좋다. 귀여운 것은 현실에 나를 붙잡아 놓되, 공중에 한 1㎝쯤 떠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귀여워하는 것들을 헤아려보니, 하나같이 투명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투명하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환히 웃는 사람보다는 자신도 몰랐던 어떤 표정을 짓는 사람이 귀엽다. 형식을 잘 갖춘 이메일보다는 삐뚤빼뚤해도 자신의 마음을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손편지가 귀엽다. 강아지가 다가갈 때 짓는 아이의 표정, 생전 처음 마주한 음식을 맛보자마자 찌푸려지는 미간이 귀엽다. 대화 도중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사투리, 가위바위보를 할 때 가위를 낸답시고 손가락을 세 개 내미는 실수가 귀엽다. 그리고 귀여운 것을 마주하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은, 아직 괜찮다.

귀여움은 ‘또’라는 상태를 염원하게 만든다.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은 것이다. 어제 길에서 만난 고양이를 오늘 또 마주친다고 해서 귀여움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귀여움은 달아나거나 닳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득 귀여움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튀어나올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엽다”라는 말 또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커다란 칭찬이다. 세월의 흐름에도 아직 ‘나’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귀엽다.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며 해맑게 웃는 사람들이 귀엽다. 밤하늘이 외롭지 않게 총총 떠 있는 별들처럼.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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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출판인쇄사를 다닐 때였습니다. 어느 날 사장실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디자인 단가를 올려야 할지 말지 판단한다고 건당 작업시간을 1시간 단위로 체크해 제출하랍니다. 잡다한 건들을 동시에 처리하는 디자인부로서는 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가 한동안 손 놓고 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건 1분, 어떤 건 몇 날, 이거 했다 저거 했다 다중작업을 하는데 어떻게 작업한 시간을 낱낱이 옳게 집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30여명이 막차 시간 애태우며 엑셀에 1,1,1,1, 어림짐작으로 제출하니 숫자가 안 맞는다고 다음날 다시!, 그다음 날 또 다시! 해서 그럴듯한 1들로 조작해 내느라 1주일 넘게 야근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엔 봐도 모르겠다, 단가 올리지 마라 흐지부지 끝났고, 그 1 때문에 일 못한 걸 메꾸느라 다시 또 지탄과 자탄의 야근 나날에 퇴사자도 속출했지요.

그 상황은 오래전 우스개와 꼭 닮았습니다. 죽고 다치면서 대군을 이끌고 천신만고 알프스산맥을 넘는데 정상까지 오른 나폴레옹이 사방을 둘러보고 그럽니다. “어? 이 산이 아닌가 봐.” 그다음 말은 뻔합니다. “야야, 도로 내려가.”

속담에 ‘눈 먼 머리가 몸통을 벼랑으로 이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두머리가 어리석으면 모두에게 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요즘 속담처럼 ‘못난 제왕은 재앙’입니다. 시키면 다 되고 밀어붙여서 안 되는 게 없다 믿어서일까요? 사장실에는 그 뜻 아닌 ‘궁즉통(窮卽通)’ 액자가 자랑스레 걸려 있었습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해보고 얘기하라 호통 일색인 사람은 우두머리 자격이 없습니다. 리더란 길도 아닌 데서 ‘뚫어라, 궁즉통!’ 외치는 돌격대장이 아니라 최적의 루트에 정통한 길잡이이자 노련한 키잡이여야 합니다. 리더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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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들은 왜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죠?” 한 30대 여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잘생겼잖아요. 신사적이고요.”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부를 외모나 매너로 결정하다니, 너무 정치의식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헛짚었다. 이 여성은 10년 이상 시민들의 다양한 정치 참여를 이끌어온 현직 활동가이다. 정치의식이라면 평균적인 한국인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는 꾸미지 않은 대답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한국 정치의 균열구조가 바뀌고 있다.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장기간 지속될 각인인지 아직은 분명치 않으나, 외국 여러 나라의  사례들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로널드 잉글하트가 1977년에 이미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라고 불렀던, 근본적인 가치관 변화의 한 부분이다. 경제성장은 사회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일자리의 구조가 달라지고, 문화가 바뀌고,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고, 가족의 구조가 변하고, 성역할의 고정관념이 사라진다. 이 변화는 크게 보아서는 물질주의 가치관에서 탈물질주의 가치관으로의 변화이다. 안보, 성장, 국가를 가장 중시하는 가치관에서 인권, 자유, 개인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앞의 것이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라면 뒤의 것은 충분조건이다. 앞의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 도입을 위한 환경요건이라면 뒤의 것은 민주주의 공고화의 미시적 기반이다.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자라나는 세대를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시작되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물질주의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자 환경요건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은 모든 사람이 인권과 자유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고자 함이다. 그러니 탈물질주의는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이자 미시적 기반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꾸준히 높지만, 그중에서도 성별·세대별로 높은 집단을 꼽으라면 단연 20대 여성과 40대 남성이다. 정부의 각종 개혁·평화 정책에 대한 지지도 똑같은 패턴을 보인다. 지난 칼럼(‘젠더 정치의 등장’ 3월13일자)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20대 내부에서 정치적 견해의 젠더 갭(성별 분리현상)은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에 근접한다. 여성과 남성의 정치적 견해차가 대구·경북과 광주·전라만큼 커졌다는 말이다.

앞에 소개한 대화를 보고 너무 정치의식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남성 위주의 정치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 40대 남성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던진다는 생각도 한때는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문 대통령은 도도하게 흘러온 민주화의 역사를 마침내 완성시키는 남성적 거시담론의 영웅일 수 있다. 반면 20대 여성은 ‘신사적’이라는 말 속에 드러나듯이 여성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듯한 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할 수 있다.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외모나 매너 때문에 지지하는 ‘생각 없는’ 지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 정치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민주주의이다. 20대 여성들이 앞장서서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반’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대통령 지지율은 ‘몇 퍼센트’라는 하나의 숫자로 나타나지만, 여성의 문재인과 남성의 문재인은 다르다.

한국보다 20~30년 앞서서 정치적 젠더 갭을 경험했던 외국의 사례들을 보자. 전통적으로는 여성의 정치활동 참여가 남성보다 낮고 더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일정 단계에 이르면 젠더 간 정치적 견해차가 없어지는 ‘해체(dealignment)’ 현상이 나타나고, 그 단계를 지나면 여성이 남성보다 진보적으로 변하는 ‘재정렬(realignment)’이 이루어진다. 적어도 선진산업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들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는 것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 유리천장의 완전한 해체 요구이다. 한국만이 세계사의 유일한 예외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한국 정치의 균열구조를 영원히 바꾸어놓을 것이다.

안보와 성장에만 의존해 살아온 보수야당이 이런 변화에 맞춰 혁신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가 젊은 여성들이 요구하는 가치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상태를 바꾸지 못하면 끝장이다. 외국의 경험을 보면, 미시적 차원에서 한번 진보화한 여성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여당에는 운동권의 거대담론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미시적인 일상의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과제가 있다. 한국 정치에서 ‘남자의 문재인’뿐 아니라 ‘여자의 문재인’이 정당한 대접을 받게 해주지 못한다면 지금의 ‘여당(與黨) 지지’는 ‘여당(女黨) 창당’으로 바뀔 수도 있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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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만여개의 주소 목록으로 지리적인 밀집도를 분석해야 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정부에서 권장하고 있는 도로명 주소의 기재요령은 ‘동대문구 ○○로 100’ ‘마포구 ○○로12번길 120-5’와 같이 적는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자료에서 규칙에 따라 기재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 별도의 정리 작업이 필요한 상황이다.

과거 방식대로 ‘○○동 26-7’처럼 법정동과 지번을 적은 경우로 오류라 보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법정동이 아니라 행정동을 기재하는 사례가 많다. 이렇게 기재된 주소는 행정동에 대응하는 법정동을 찾아서 하나하나 정정해야 한다. 간혹 여러 개의 법정동을 포함하는 행정동이 적혀 있으면 어느 법정동이 해당 주소지인지 확정하지 못하여 난감하다.

도로명을 ‘○○로 14길’처럼 ‘~로’와 ‘~길’을 떼어 적는 경우도 많은데 서로 붙여 써야 한다. 사람은 ‘~로’와 ‘~길’ 중간에 빈칸이 들어있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는 ‘○○로12길’과 ‘○○로 12길’을 서로 다른 정보로 받아들인다. 도로명과 건물번호를 서로 붙여서 ‘○○로12길100’처럼 적는 경우도 정보처리에 문제를 발생시킨다. 실제 자료에는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주소가 적혀 있다. 규칙에 어긋나서 예측하기 어려운 모든 경우는 정보처리를 곤란하게 만든다.

자연어 처리 알고리즘과 기계학습을 활용하면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겠으나 전문적인 프로그래머를 섭외할 형편이 아니어서 예전에 조금 익혀두었던 비주얼베이직 언어로 직접 분석프로그램을 작성하였다. 주소가 어떤 식으로 기재되었는지 판단하기 위한 수많은 조건문과 해당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수많은 루프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몇 주에 걸쳐서 작성하였다. 한껏 기대를 품고 구동하니 잘 돌다가 갑자기 반응이 없다.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에 빠진 것이다.

‘루프(loop)’는 순환작업을 의미한다. 1부터 100까지 더한 값을 구한다고 가정해보자. 1부터 100까지 순서대로 숫자를 발생시키면서 이 숫자들을 차곡차곡 더하여 기록한 후 최종값을 출력하도록 하면 되는데 이 과정이 하나의 루프이다. 순서대로 발생시키는 숫자가 100에 이르면 루프를 종료하도록 프로그램을 작성하면 된다. 그런데 순차값이 0보다 작을 때 종료하라고 설정하면 영원히 조건에 맞지 않게 되어 무한루프에 빠질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이 다운되었다’라는 건 이런 상태를 말한다.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므로 바르게 고쳐야 한다. 유용한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순조롭게 무한루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 자체도 무한루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과정이 쭉 이어진다. 사람마다 조금 혹은 무척 다르겠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 있다. 일상이 무너져도 여러 문제가 생기지만 앞으로 끝도 없이 똑같은 루프를 반복한다 생각하면 그 또한 무간지옥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가끔 일탈을 꿈꾸는 이유이다. 요즘 이목을 끄는 ‘자발적 퇴사’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쳇바퀴 돌 듯 삶을 반복하다 보면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에 빠진 듯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잘못된 삶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은데, 조금 귀찮고 번거롭지만 다양한 휴지기와 중단점을 두고 반성하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삶과 달리 어둡고 건강하지 못한 삶은 자기조절이 안되는 게 다반사다. 이런 부정적인 삶이 개인을 넘어서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이 적폐일 것이다.

의도치 않은 무한루프가 발견되면 일단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제어되지 않는 순환을 감시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수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적폐가 발견되었다면 해당 시스템을 멈추고 전면적으로 조사하여 잘못된 과정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프로그래머와 사용자를 피곤하게 하는 무한루프는 스스로 고쳐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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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과 브랜드인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및 환경운동연합이 환경부와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한 협약을 2일 체결했다. 비닐봉지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해 파리바게뜨는 올해 말까지 비닐봉지의 사용량을 90% 이상 줄이고, 뚜레쥬르도 내년 1월까지 80%를 감축할 계획이다. 최종적으로는 비닐봉지를 아예 쓰지 않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파리바게뜨는 전국에 3367개, 뚜레쥬르는 1306개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할 경우 비닐봉지가 연간 2억3000만장, 온실가스는 연간 1만925t이 줄어들 것으로 추산된다. 민간기업들이 시민단체, 정부와 공동으로 플라스틱·비닐 줄이기에 나서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이런 움직임이 보다 넓게 확산돼 우리 주변에서 비닐봉지를 볼 수 없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마침 3일은 제9회 ‘세계 비닐봉지 안 쓰는 날’이다.

환경부가 파리바게뜨·뚜레쥬르와 일회용품 줄이기 협약을 맺은 2일 이철수 환경운동연합 대표(왼쪽에서 두번째), 안병옥 환경부 차관(가운데), 권인태 파리크라상 대표이사(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리바게뜨 명동본점에서 빵을 담은 재활용 종이봉투를 매장 직원들과 함께 들어 보이고 있다. 파리바게뜨 제공

지난 4월 중국의 수입금지 조처로 촉발된 ‘재활용쓰레기 대란’은 한국 사회가 그간 비닐·플라스틱 등을 얼마나 무신경하게 써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과다포장 관행, 일회용품 과다사용 문화에 길들여진 채 분리 배출만 하면 자원으로 재생될 것이라는 안이한 인식과 규제완화가 한국을 비닐·플라스틱 세계 최다 소비국으로 올려놨다. 이에 정부는 2030년까지 플라스틱 발생량을 절반으로 감축하고 재활용률을 34%에서 70%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기업도 호응하고 있다. 페트병 음료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페트병 몸체를 유색에서 무색으로 바꾸고 라벨을 붙일 때 물에 쉽게 분리되는 접착제를 사용한다. 라벨에 절취선을 만들어 쉽게 라벨을 벗겨내도록 한 업체도 등장했다.

소비자들도 비닐·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운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고 있다. 지난 1일 서울 마포구의 한 대형마트에서 ‘플라스마이나스’와 환경단체 녹색연합 회원들이 쇼핑을 본 뒤 과일·채소 등의 플라스틱 포장을 벗겨내는 퍼포먼스를 하며 “포장재를 최소화할 방안을 마련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최근에는 포장 없이 손님이 용기를 직접 가져와 곡물과 채소·과일 등을 담아가도록 하는 카페 겸 식료품점이 등장하고, ‘쓰레기 줄이기’를 주제로 한 잡지도 나왔다. 커피전문점에서 음료를 일회용컵 대신 머그잔으로 주문하는 이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바람직하고 반가운 일이다.

‘비닐·플라스틱을 줄여야 한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공감하는 명제가 됐다. 모처럼 시작된 운동이 안착되도록 정부와 기업이 지혜를 모으고, 소비자들도 능동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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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김성태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가 2일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의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문 특보는 “조약과 협정보다는 평양에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가 들어가는 게 훨씬 더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담보한다”며 북한의 실질적 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변화에 방점을 둔 언급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한국당이 문 특보를 줄기차게 비판해온 점에 비춰보면 이례적인 칭찬이다. 김 권한대행은 나아가 “한국당은 평화와 함께 가는 안보정당으로서 한반도 평화 여정에 동참하면서 감시자 역할도 충실히 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당의 안보정책이 더 이상 여론의 흐름에 역행해서는 안되겠다는 자각이 작용한 듯하다. 늦게나마 남북관계의 현실을 직시한 것을 환영한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당대표 권한대행이 2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6·13 지방선거 후 김 권한대행과 한국당의 안보정책 변화는 괄목할 만하다. 김 권한대행은 선거 후 첫 의원총회에서 “수구냉전적 사고에 머무르면 국민들은 점점 더 우리를 외면할 것”이라고 한 이후 기존과 다른 발언을 하고 있다. 김 권한대행은 지난달 29일에도 한 심포지엄에 참석, “북한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개혁개방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로 협상에 임하고 있다”고 긍정 평가했다. 4·27 남북정상회담과 6·12 북·미 정상회담을 “위장평화쇼”라고 깎아내리던 당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당 대변인은 ‘북한과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한·미 연합훈련의 일정 부분 유예는 인정한다’는 논평도 냈다. 수구냉전적 사고를 솔직하게 자인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한국당의 변화를 지지하며 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안보정책을 지속적으로 내놓기를 기대한다.

김 권한대행은 한국당의 좌표를 ‘평화와 함께 가는 안보정당’으로 제시했다. 대결 일변도의 대북정책을 지양하겠다는 말이다. 북한은 핵과 장거리미사일을 보유한 적이지만 화해와 통일을 위한 대화 파트너이기도 하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북한의 변화를 냉철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김 권한대행의 변화된 입장이 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에게 시선을 맞춘 정치인들이 아직 당내에 즐비하다. 한국당은 제대로 가는가 싶다가도 되돌아간 게 한두번이 아니다. 만약 최근 변화가 눈앞의 곤경을 모면하려는 시늉이라면 더 큰 역풍을 맞을 것이다. 김 권한대행과 한국당의 향후 안보정책을 지켜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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