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소야대 현실 속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두 가지 선택지를 앞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연정 혹은 여야 협치다. 진보·보수 시민 모두가 참여한 촛불혁명의 취지에 맞게 여러 정당이 손을 잡고 국회 다수파를 구성, 개혁을 추진하는 방법이다. 연정론은 촛불혁명에 담긴 연대의 정신을 받들 수 있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았다.

다른 하나는 대선에서 선택받은 쪽이 더불어민주당이니, 민주당 단독으로 국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민주당정부론이다. 이 경우 개혁입법은 유보해야 한다. 국회를 우회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행정명령을 통해 빠른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새 정부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자를 택했고, 청와대가 1년간 적폐청산을 주도했다. 정권 인수 과정 없이 출범한 정부였다. 새 정부 비전을 공유한 인물이 포진한 청와대가 국정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했고, 효율적인 측면도 있었다. 최고의 지지율이 입증한다. 하지만 그건 국회 우회, 정당 배제, 내각 무시의 대가였다.

민주당도 자의 반 타의 반 배제되었다. 지난 1년간 정부 성격에 합당한 이름은, 모두가 정확하게 부르고 있듯이 문재인 정부다. 어떤 관점에서도 당초 구상했던 민주당 정부는 아니다. 문 대통령의 뒤에 펼쳐져 있는 병풍 같은 존재로서 민주당이 한 게 있다면, 딱 하나. 무위(無爲)의 정치. 인내와 침묵의 긴 시간을 보낸 민주당은 ‘수다는 반역’이라는 신조를 가슴 깊이 새겼던 것 같다.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민주당은 천장에 닿고, 보수야당은 바닥에 붙은 지지율이 잘 말해준다.

절정의 순간이 계속되는 법은 없다. 지방선거는 끝났다. 누구도 최고점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좋을 것이다. 벌써 세상이 바뀌고 있다. 그동안 정부 발목을 잡고 있던 보수세력을 떨쳐내는 데 힘을 보탰던 시민들이 보수야당의 궤멸을 직접 목격했다. 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최근 문 대통령과 민주당 지지율이 하락하고 정의당 지지율이 창당 이래 최고치인 10%에 달했다. 정부를 상대로 협력과 견제를 적절히 잘했다는 평가를 받은 결과로 해석되지만, 지방선거 이전에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다. 정의당 평판이 좋아도 꼭 찍을 수 없었다. 보수 심판을 우선시한 시민들이 자기 선호를 무시하고 정부와 여당을 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마음의 빚을 갚았다는 생각에 자유롭게 자기의 가치와 선호를 따르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시민들은 삶을 바꾸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더 많이 생각하고, 개혁 조치는 누가 더 실행했는지 단단히 따질 것이다. 이런 질문도 던질 것이다. 그동안 쌓아놓은 지지율은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가? 삶의 개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숫자에 불과하다. 지방선거 이후 시민의 관심사는 선거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 정치공간의 이동이라 할 만하다.

이런 국면에서 청와대의 국정 주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곧 다양한 이해와 요구가 분출할 것이고, 그런 현실은 민주주의의 두 제도인 국회와 정당 없이는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민주당은 청와대의 자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침묵을 깨고 민주당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국회에서 혁신의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 젊은이의 높은 정치참여, 곧 다가올 냉전구조의 해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면 개혁경쟁의 무대에 오르지도 못한다.

자기 색깔을 맘껏 드러내고, 실력대로 의석을 배분받아 공정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선거제 개혁도 해야 한다.

통치의 시간이 끝났다. 청와대와 행정부가 선한 의지로 시민을 위해 홀로 일하는 시간은 이미 흘러갔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힘의 일부만 사용해서 사회의 일부 문제만 손대는 것이다.

게다가 임기가 제한된 청와대의 행정적 조치는 한시적이다.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는 변화다. 겨우 그 정도 하자고 촛불혁명이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더 많은 변화, 더 깊은 개혁을 해야 한다. 그러자면 더 많은 힘을 빌려야 한다. 가능한 모든 것들의 협력과 연대가 필요하다. 중심무대는 청와대가 아닌 국회가 되어야 하고, 행동의 주체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쟁과 연대의 경연,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정치의 계절이 오고 있다. 정치의 귀환을 환영한다.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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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還穀)의 출납을 수령이 제멋대로 하는 데에서 온갖 간사한 짓이 나온다. 이는 백성을 위한 제도인데 정작 그로 인해서 가장 곤욕을 받는 이들이 백성이고, 수령들은 오히려 이를 치적으로 삼는다. 그대는 마을을 잠행할 때 먼저 장부의 허위 기재 여부와 입출의 공정성을 세세히 살피고 나서, 출두 이후 창고의 곡물을 낱낱이 대조 확인하여 가감 없이 보고하라.

1787년 정조가 황해도, 평안도에 파견한 암행어사 이곤수에게 내린 봉서(封書)의 일부다. 조선시대에는 사헌부에 감찰(監察)을 두어 관리들의 비위를 살피고 회계 감사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때로는 지방관의 비위를 조사하기 위해 감찰어사를 파견하기도 했는데, 후에 이 임무를 비밀리에 담당하게 된 것이 바로 암행어사다. 감찰 대상은 관리들이었다. 오늘날에도 감찰은 공무원의 위법 행위를 조사하고 징계 처분을 내리거나 수사 기관에 고발하는 역할 혹은 조직을 지칭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감찰하세요! 사찰하지 마시고.” 얼마 전 종영된 한 드라마에서, 과잉 진압으로 문제가 된 동료 순경의 사생활을 캐묻는 감찰반에게 같은 지구대 소속 순경이 던진 말이다. 감찰과 사찰의 차이는 무엇일까. 감찰은 합법이지만 사찰은 무조건 불법이라고 여기는 것은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사상적인 동태를 조사하고 처리하는 일을 주로 맡아왔던 점 때문에 부정적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사찰(査察) 역시 경찰의 고유 직분이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 공직자인가 민간인인가, 방식이 적법인가 불법인가에 있다.

어떤 사찰이 직무범위 내에서 정상적이고 필수불가결하게 이루어졌는지 가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국군 기무사령부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을 조직적으로 사찰하고, 대법원장이 변호사협회 회장의 개인사를 사찰하는 일이 과연 적절했는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기소 사유는, 국가정보원을 동원해서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 등을 불법 사찰한 혐의다. 당시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우병우 수석에 대한 수사를 의뢰하던 중이었다. 특별감찰관제는 대통령 측근의 권력형 비리를 척결하겠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으로 신설되었다. 그 임무에 충실한 감찰관을 사찰하여 옷을 벗기고야 만 것이다. 감찰마저 사찰로 누를 수 있다고 여긴, 농단의 민낯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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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픽션, 즉 만들어진 사회이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비근대적 사회의식은 픽션에서 불안을 느끼지만, 근대정신은 픽션의 가치와 효용을 믿고 재생산한다”고 했다. 이렇게 근대를 구성하는 픽션의 정점에 헌법이 있다. 국가라는 거대한 픽션의 설계도이다. 군사정부의 성실한 마름이던 대법원이 공정하고 독립적인 사법부라는 서구적인 픽션을 갖춘 것은 역설적이게도 1987년이 계기다. 시민혁명의 대상은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정권과 법원이지만 6월항쟁은 법원에 손을 대지 않았고, 법원은 혁명에 무임승차했다. 어설픈 타협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실체를 드러낸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한 판사가 이명박 정부 당시 대법관이 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여한 검사가 박근혜 정부에서 대법관이 됐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7월2일 (출처:경향신문DB)

세상의 모든 픽션은 내러티브를 요구한다. 경험하지 않은 시간을 상상하고 공유하게 만들어 픽션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일본헌법이라면 일왕의 존재가, 한국헌법에는 임시정부의 시간이 있다. 독재정권에 협력한 사법부에 공정함이란 픽션을 제공한 내러티브는 우리법연구회라는 존재다. 1988년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군사독재 시절 인물인 김용철 대법원장을 유임시키려 했다.(1982년 7월 문재인 사법연수생에게 판사임용 불가를 통보한 사람이 김용철 법원행정처장이다.) 6월15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문건이 돌며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김용철에 반대했다. 이광범, 유남석, 김종훈, 한기택 등이 주축이었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김용철 대신 비슷한 정기승을 대법원장에 부쳐보지만 국회에서 부결된다. 2차 사법파동이고, 이 사건 주역들이 만든 모임이 우리법연구회다.

지난해 시작된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공정한 사법부라는 픽션은 위기에 처했다. 우리가 믿어온 재판의 공정함이 실재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이 자리를 파고든 것이 ‘보수적인 양승태 대법원의 악행’ 때문이라는 소문이다. 얼마 전 어느 방송사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와 “ ‘양승태 대법원’과 ‘이용훈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들의 고등부장 승진율 자료를 달라”고 했다. 나는 “지난해 기사에서 양쪽 모두 100%라고 밝혔다”고 했지만 상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러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을 추진한 이유가 퇴임 이후 변호사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 아니냐”고 물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느 언론사의 기자는 “상고법원을 추진한 사람은 모두 징계 대상이 아니냐”고도 했다.

양승태도, 상고법원도 악이 아니다. 대법관 12명이 연간 4만여건을 처리하는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용훈 대법원’이 추진한 고등법원 상고부와 ‘양승태 대법원’이 추진한 상고법원이 다르지 않다. 변호사로 돈을 번 걸로 치면 양 전 대법원장이야말로 깨끗하다. 대법관을 마치고 하루도 변호사로 일하지 않다가 대법원장이 됐다. 그에 비해 이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을 마치고 삼성 등의 사건을 맡아 거액을 챙기고 세금도 누락했다. 행정처의 관료화가 본격화한 것도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이다. 그런데도 눈앞의 상황을 보혁구도로 파악하는 것은 진실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1987년에 구축된 공정한 사법부라는 부당한 픽션을 재생산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양승태 개인이 아니라 관료화한 사법부 그 자체다.

재판거래 의혹을 비롯해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문건 작성자 상당수가 우리법연구회 회원이다. 여기에 몇 명 되지도 않는 행정처 심의관 숫자, 그보다 조금 많은 우리법연구회 회원 숫자를 생각하면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는 우리법연구회가 주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검찰 손에 들어간 어마어마한 문건을 발견하고도 형사처벌이 어렵다는 결론을 적어 김명수 대법원장을 궁지로 몰아넣은 특별조사단에도 우리법연구회 회원이 있다. 끝이 아니다. 우리법연구회 초기 멤버들은 불법적인 문건을 작성한 후배 판사들을 만나 수사와 재판에 대비하고 있다. 보혁구도 같은 무책임한 상상으로는 이런 상황이 설명되지도, 부당한 픽션이 붕괴되지도 않는다.

엊그제 발표된 대법관 후보자를 두고 순수 변호사 출신이라서 의미가 있다거나, 우리법연구회 소속에 여성이라서 이번 사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낡은 픽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오히려 지금까지 판례를 바꾸어온 주인공은 서·오·남(서울대, 50대, 남성)들이 더 많고, 반대로 사형제에 합헌 의견을 내거나 쌍용차 노동자를 일터에서 몰아낸 민변 회장과 여성 변호사 출신도 있다.

사법이라는 제도는 픽션이지만, 재판이라는 작용은 현실이다. 지금 당장은 제대로 된 대법관을 가려내는 것부터 해야 한다. 부당한 현실에 저항해온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가진 대법관이 무너진 사법부를 살려낼 것이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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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명박 정부는 국제유가와 화석연료 가격이 치솟자 “원전 가동을 늘려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하고 고유가를 돌파한다”는 정책을 추진했다. 국내 유류가격은 국제유가와 연동되어 있는 반면, 전기요금은 치솟는 발전연료 가격과 무관하게 정부가 통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 시장을 무시한 이 조치로 인해 국내 전력 수급에 엄청난 혼란이 찾아왔다. 1차 에너지인 등유, LPG 등 난방유와 2차 에너지인 전기의 요금이 열량 대비 같아지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마치 수도요금과 생수가격이 같아진 형국이다.

수도요금과 생수가격이 같아지면 어떻게 될까? 생수로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하는 일이 벌어진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당시 제조업체들은 각종 가열, 건조 공정에 사용되던 유류보일러를 세우고 값싼 전기로 전환하면서 고유가 상황임에도 국내 전력 수요는 오히려 급증했다. 또한 겨울에는 농어촌 지역과 화훼농가 등에서 난방유보다 싼 전기로 난방하는 추세가 이어지고, 여름에만 발생하던 전력 피크 부하가 겨울로 옮겨졌다.

이명박 정부 초기 국내 원전 이용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유지되면서 별문제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무리한 원전 가동을 위하여 누적된 설비 균열과 결함을 무시하고 발전소 정비를 미루는 관행이 반복되었다. 한전 발전자회사들은 과거 발전소 정비를 비성수기인 겨울에 맞추었으나, 여름과 겨울 모두 피크 부하가 발생하면서 정비 시기를 찾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던 중 지난 2011년 여름이 끝나자마자 겨울피크를 대비한 정비를 위해 부리나케 다수의 원전과 화력발전소들을 세우는 과정에 이른바 ‘915정전’이 찾아왔다.

수십년 만에 겪은 정전사태에 이명박 정부는 “전력 수요예측을 잘못했다”며 모든 책임을 지식경제부 장관에게 떠넘기고 사표까지 수리했지만, 정작 정부의 잘못된 가격통제가 전력 수급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전무했다. 몇 년이 지나서야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 수립과정에서 과도하게 억제했던 전기요금의 인상과 민생용 유류에 대한 중과세를 잠정적으로 완화했고, 국제유가도 하락하면서 유류가격과 전기요금의 역전현상은 해소된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국제유가가 다시 급등하면서 이명박 정부 시절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이번 달 들어 국내 등유가격과 가정용 전기요금이 열량 기준으로 동일한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전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원자력계와 보수언론들은 “탈원전으로 인해 전기요금이 폭등할 것”이라며 조직적인 선동을 하고 있고, 정부·여당은 “전기요금 인상은 절대 없다”는 논리로 맞서면서 전기요금은 이명박 정부 시절처럼 통제될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주로 저소득층, 산업체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난방유류에는 오히려 일본보다도 높은 중과세가 부과되고 있다.

대내외 에너지수급 여건을 무시한 채 협소한 ‘원전 찬반’ 논쟁은 이명박 정부의 과오를 되풀이할 수 있다. 전기요금은 원가와 사회적 비용을 충분히 반영해 가격의 수급조절 기능을 복원시켜야 하며 산업용, 난방용 유류에 대한 터무니없이 높은 세금은 낮춰져야 한다. 이제는 전기요금 통제 정책을 부실한 보편복지의 가림막이로 사용하던 과거 정권들의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석광훈 | 녹색연합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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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이 다만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한답시고 야단법석을 떨기 이전에 간악한 무리들을 물리치며 소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준 것은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긴 세월 무예만을 갈고닦은 무인들은 아이언 맨의 슈트를 입지 않아도 대나무 숲을 날아다녔고, 거미줄 용액을 발사하지 않고도 높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고수들은 장풍만으로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쓸어 버렸고, 축지법으로 천리길을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들 또한 하나의 세계관을 가졌다는 마블의 히어로들처럼 계보가 있으니 이소룡에서 성룡으로 이어져 황비홍으로 열연한 이연걸까지. 지금도 깊은 산중에서 무술을 수련하며 하산 날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는 고수들이 있지 않을까?

30년 가까이 무예를 익혔으며 지금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블의 히어로들이 그렇듯이 70, 80년대 극장가를 주름잡던 소림사의 무술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얘기라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장풍이나 축지법쯤은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는 굳은살이 박인 두터운 손을 앞으로 쭉 뻗어 보이면서 되물었다. 정말 장풍이 있다고 믿는가?

그는 고교 때 몸이 안 좋아 무예를 익혔다. 그는 특히 검술에 빠져 오랫동안 수련하며 조선시대 무예까지 찾아보았는데, 우리나라에 무예를 연구한 변변한 역사책이 한 권도 없더란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잘 다니던 투자전문회사를 그만두고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한 번 하기로 마음먹으면 끝까지 간다는 그는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무예사와 전쟁사를 다룬 책을 여러 권 펴낸 그에게 무예란 장풍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이 아니다. 그에게 무예란 몸으로 새기는 기억이며, 역사이며, 인간의 본질이다.

무협영화와 무협지로 드라마틱한 무예만을 봐 온 사람으로서는 그의 무예론은 밋밋하고 맨숭맨숭하다. 하지만 그의 책은 깊다. “무예는 멈출 수 있을 때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멈추어야 보이기 시작하며, 멈추어야 비로소 움직임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그의 말을 자꾸 되새김한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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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사건은 이명박·박근혜·김기춘 등이 권력과 국민의 세금으로 전 장르에 걸쳐 문화예술계를 검열하여 인위적으로 판을 바꾸고, 이를 통해 전 국민에 대한 이데올로기 통제를 획책한 반헌법·반민주 국가범죄였다. 이 대규모 국가범죄는 청와대·국가정보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중·하위직과 산하 공공기관 사람들까지 부리고 동원했기에 가능했다. 김기춘과 전 문체부 장차관들은 처벌받고 있지만, 하위 실행자·부역자들은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는 전·현직 문체부 공무원과 산하기관 직원 130명에 대한 수사 또는 징계를 권고했다. 그러니까 ‘하수인’에 불과할 수 있는 공무원과 산하기관 직원까지 여럿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단죄는 과도한 것일까?

촛불항쟁 전후에,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지목됐던 공무원들의 행위를 철학자 아렌트가 유태인 학살을 저지른 나치 하수인들을 통해 개념화한 ‘악의 평범성’으로 비판한 담론이 쏟아졌었다. ‘자기 생각’과 언어에 나태한 범상한 인간들이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백만 인간 학살에 연루된 전범들을 한국 공무원들에 비유하는 것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는다. 사태의 맥락은 물론 죄의 경중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의 힘없는 을’로서 ‘생계를 잃을까봐 시키는 대로 했다’는 식의 변명도 다 믿지 않는다. ‘조직의 질서’와 ‘생계’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은 알리바이 같지만,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뿐 아니라 한국 공무원 사회의 진실 전체도 아닐 거라 생각한다. 연루된 하위직 공무원들이나 산하기관 직원들을 모두 처벌하는 일은 어렵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기록으로 남기고 고위직 연루자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서 새삼 두 가지가 궁금하다. 첫째, 촛불과 정권교체 이후 한국 공무원들의 ‘영혼’은 어떻게 됐을까?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부를 자처한다지만, 공무원들의 보신주의와 복지부동 때문에 개혁이 더디다거나, ‘○○부 마피아’ 때문에 아무 일도 안된다는 말이 나 같은 서생에게도 들려온다. 공무원들은 정말 영혼을 어디 맡기고 다니는 듯 ‘정치’나 윗사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지만 기실 5년짜리 정권 따위보다는 공무원 자신들의 조직과 신분보장 제도가 세고 질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부처 장관은 정권 출범 1년이 넘은 지금도 ‘공무원들을 움직여 일하게 하는 것이 내 숙제’라고 말하고 다닌다 한다. 이런 ‘숙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재인 정부는 공무원들을 개혁에 나서게 할 설득력과 단호함을 다 갖고 있는지?

둘째, ‘영혼 없음’이나 ‘영혼 털림’이 비단 공무원들만의 일인가? 과연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다. 생존주의(‘먹고사니즘’)가 모든 윤리와 공덕을 압도한 유일한 진리처럼 된 것이 세월호 참사나 이명박·박근혜 시대의 퇴행을 불렀던 것이 아니었던가? 사납고 못된 권력은 순응·보신·침묵을 ‘점잖고 합리적인 것’으로 치장해주었다. 이 땅의 삶은 더욱 사소하고 영악해져서, 정상적인(?)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이 시키는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게 됐다. 자결한 아들의 죽음을 삼성전자서비스에 6억원에 팔고 위증도 했다는 아비의 경우는, 어떤 외력이 ‘영혼 없음’을 만드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시민이야 소시민이라 해도, 구성원 전체가 생존 불안과 상대적 박탈감 외에는 가진 게 없는 사회, 청년다운 청년도, 존경할 만한 어른이나 지식인도 없는 좀팽이 공화국, 즉 ‘주체’가 해체된 나라를 경험했다. 대신 얻은 것(?)도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렇고 그런 인간’이라는 무한 상대주의와, 꼰대나 586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깊은 불신이다. ‘계몽충, 오지라퍼, 불편러, 씹선비’ 따위의 신조어들도 생겼는데, 모욕을 담은 이런 단어는 기실 불의에 대한 연루와 공모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여기까지 말하니 창자에서부터 ‘너는 얼마나 정의롭냐?’라든가 ‘너나 잘하세요’ 같은 반박이 메아리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개별자로서의 성찰의 도리와 공동체 정의의 문제를 섞어 문제를 무화하지 않아야 하겠다. ‘윤리’와 ‘생존’이 병존 가능해야 우리 허약한 영혼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높아질 터인데, 직업윤리와 사회정의가 그 지렛대겠다. 적폐청산과 영혼의 구제는 다르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법관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양승태 대법원’을, 고용노동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이채필 노동부’를 제대로 수사하여 단죄해야 한다. 언론인과 교수의 영혼을 위해서는 언론 개혁과 대학 민주화가 필요하다. 일부 언론과 대학은 적폐의 무책임·무풍 지대로 남아있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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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시절 두려웠던 순간은 세미나의 발표를 맡았을 때나, 토론과정에서 하고 싶은 말이 빨리 영어로 표현되지 않을 때나,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두툼한 읽기 과제 앞에서 망연해질 때가 아니었다. 일상의 영위를 위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통과의례. 슈퍼마켓에서 계산을 하는 일이었다. 슈퍼마켓에서 쓰는 단어들이 내가 읽어야 하는 논문의 영어들보다 어려울 리는 만무했지만, 논문을 읽을 수 있는 언어능력으로도 몇 개 되지 않는 생필품을 사는 데 계산원과 두 번, 세 번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다보면 나라는 존재가 슈퍼마켓 바닥에 납작 눌러붙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모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이 나라 대학으로 와 박사과정에 있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저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에 불과했다. 언어 소통은 권력관계였다.

뉴욕의 공항에서 렌터카를 찾으러 가던 어느 해, 셔틀버스에 혼자 탄 아시아 여성인 내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던 운전기사는 한국인이라는 대답에 “한국 사람 세탁소가 최고야”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미국에서 한국인과 세탁소, 식료품점을 연결짓는 것은 낯설지 않은 경험이다.

내 부모 세대가 30대였던 1960년대, 한국에서 일자리를 잡지 못한 고학력자들은 먼저 정착한 한국인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 한 장만을 손에 쥔 채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에 내렸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그들이 가진 거라곤 일가친척이 모아 준 100달러. 논밭 팔고 소 팔아 한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이 이국땅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 세탁이었다. 그들의 전사(前史)나,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한국인 커뮤니티에서나 통하는 얘기일 뿐, 새로 받아들여진 사회에서 그들 대부분은 세탁 노동자였고 불법체류자였다.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내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살아온 이전의 세월을 모두 지운 채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며 사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영국의 옥스퍼드에서는 파키스탄에서 중학교 교사였던 식료품점 주인을 만났고, 프랑스에서 택시를 탔을 때는 띄엄띄엄 영어로 자신이 튀니지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고 자랑하는 운전사를 만났고, 한국의 경기도 화성에서는 네팔에서 대학을 다니다 한국의 공장으로 돈을 벌러 온 청년을 만났다.

1, 2차 세계대전을 피해 필사적으로 탈출한 난민이었든,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민이었든, 생존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나 유랑하는 것은 20세기 이후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존재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던 할아버지 세대에 이어 한국에서 삶의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오늘의 젊은이들은 노동인구 감소 때문에 해외 노동력을 찾는 이웃 일본으로, 워킹 홀리데이가 가능한 호주로 떠난다. 인터넷과 휴대전화, 휴대용 컴퓨터만 있으면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그리는 꿈이지만, 자신의 한 몸을 누일 땅은 그곳이 어디든 결국 현실의 어느 지붕 아래에서 찾아야 한다.

전쟁을 피해 예멘에서 왔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네팔에서 왔건,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을 안고 한국 땅을 밟은 타자의 모습은 기약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다른 나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 오늘의 한국인들과 겹쳐 있다. 살기 위해 유랑을 감행해야 하는 시대, 유랑자들이 닿는 세상에서 받게 되는 환대는 절박하게 삶을 붙잡고 있는 이들에게 삶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끈이다. 예수께서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라”며 열두 제자를 빈털터리로 세상에 내보낸 것은 그들에게 밥과 잠자리를 줄 선한 이웃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식당에서 주문을 받는 타국 출신 종업원이 서툰 한국어를 구사하며 쩔쩔매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미국의 슈퍼마켓에서 진땀을 흘리던 나를 떠올린다. 오늘 내가 타자에게 베푸는 환대는 미지의 어느 날 내가 혹은 내 후대가 이 세상 어딘가를 유랑하는 타자가 되었을 때 받기 원하는 대접에 다름 아니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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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이 연일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해야 한다며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김성태 한국당 대표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촛불명령을 까먹지 않았다면 개헌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행은 “개헌이 성사된다면 (다른 야당들이 주장하는)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한국당의 입장도 통 크게 바뀔 수 있다”며 선거구제 개편에 응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당대표 권한대행이 4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한국당이 이 시점에 개헌론을 띄우는 의도는 뻔하다. 원구성 협상에서 여당을 압박하는 카드로 쓰는 동시에 6·13 지방선거 참패에 따른 당내 분란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민주평화당, 정의당과 더불어 ‘개혁입법 연대’를 모색하는 민주당에 ‘개헌 연대’로 맞섬으로써 여소야대 구도의 판을 다시 짜보겠다는 뜻도 있다. 지방선거와 동시 개헌을 그토록 반대하던 한국당이 뒤늦게 개헌을 주장하다니 참으로 황당하다. 시민들이 개헌하라고 할 때는 방해만 하다가 뒤늦게 개헌을 요구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 달라진 현실에 맞춰 헌법을 개정할 필요성은 있지만 20대 국회에서 다시 개헌을 논의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개헌에 쏠렸던 시민의 관심이 식어버린 마당에 해체된 국회 개헌특위를 다시 열고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한국당이 개헌과 연계해 언급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간과할 것이 아니다. 6·13 지방선거에서 드러났듯 현행 소선거구제는 표의 독식을 허용하는 맹점이 있다. 이런 제도를 그대로 두면 거대 정당의 독식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표의 등가성에도 문제가 있다. 지방선거 결과 정당 득표율은 20%가 되는데 10% 의석도 얻지 못한 경우가 여러 지역에서 나타났다.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면서 비례성을 강화할 수 있는 선거제도가 절실하다. 선거제도 개혁을 통한 정치개혁은 현실성 낮은 개헌 논의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결실을 가져다줄 것이다.

한국당이 지금 추진해야 할 것은 개헌이 아니라 철저한 자성을 통해 당을 개혁하는 것이다. 개헌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개헌을 무산시킨 것부터 사과해야 한다.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을 주장한다면 안될 말이다. 벌써 한국당의 선거구제 개편 주장이 다음 총선에 대비하기 위한 정략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국당은 개헌 주장을 접고 진정성 있게 선거구제 개편에 진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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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이 김선수 변호사와 이동원 제주지법원장, 노정희 법원도서관장을 대법관 후보로 제청한 것은 대법원 구성 다양화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세 사람은 역대 대법관 대다수를 차지했던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성)’의 범주를 모두 벗어났다. 김 변호사는 법원·검찰을 거치지 않은 순수 재야 출신의 노동·인권변호사다. 이 원장은 고려대 출신으로 법원행정처 근무 없이 재판에만 전념해온 정통 법관이다. 노 관장은 젠더 관점을 지닌 이화여대 출신 여성 법관으로 여성의 지위와 권한에 관해 주목할 판결을 여럿 남겼다. 대법원은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요구하는 국민 기대를 염두에 두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에 대한 인식 등을 고려해 선별했다”고 밝혔다. 외형상 인적 구성이나 대법관 가치관의 다양성을 종합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오는 8월 2일 퇴임하는 고영한, 김창석, 김신 대법관 후임으로 김선수 변호사(왼쪽부터)와 이동원 제주지법원장, 노정희 법원도서관장이 결정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2일 김 변호사 등 3명을 신임 대법관으로 임명해달라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청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입법부는 지갑을, 행정부는 칼을 가지고 있다. 사법부는 지갑도 칼도 없다.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만 가지고 있다.” 1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미국의 법률가이자 정치인 알렉산더 해밀턴 얘기다. 빈털터리 사법부는 시민의 신뢰를 밑천으로 비로소 권부(權府)가 됐다. 그러나 과거 대법원은 권력에 대한 추종과 사법부 기득권 지키기 행태로 유일한 밑천인 시민의 신뢰를 잃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재판을 정치권력과의 거래 대상으로 삼는 사법농단으로 사법부 신뢰를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여론조사에서 시민 10명 중 6명 이상이 사법부 판결을 불신한다고 했다. 신뢰관계가 무너진다면 판결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사법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시민 신뢰를 회복하고 사법개혁을 추진해야 할 막중한 책무를 안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의 보수 일변도 구성을 탈피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최종심을 담당하는 대법관은 시민의 권리를 구제하는 마지막 심판자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가진 대법관 일색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추된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야당도 진보와 보수를 망라해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인물들이 대법관으로 임명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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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썩은풀이라고도 불리는 여러해살이 식물인 황금(黃芩)의 학명은 스쿠텔라리아 바이칼렌시스(Scutellaria bicalensis)다. 이 식물은 햇빛을 차단하는 화합물인 바이칼린(baicalin)을 만든다. 화학적으로 플라보노이드 계열의 물질인 바이칼린을 발음하는 순간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러시아의 바이칼 호숫가, 거대한 평원에서 거침없이 쏟아지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마주하는 자그마한 풀을 떠올린다. 파도에 실려 육상에 처음 들어왔던 식물의 조상들은 물속에서는 마주하지 못했던 과도한 양의 자외선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항산화제 화합물인 플라보노이드가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육상식물 대부분은 많든 적든 플라보노이드 화합물을 만든다. 너무 강한 햇빛은 식물 세포 내부의 유전 정보인 DNA나 효소 단백질을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약 3억6000만년 전 데본기 후반 혹은 석탄기 초기에 식물들은 플라보노이드를 만드는 생합성 경로를 바꾸어 지금껏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두 종류 화합물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중 하나는 리그닌(lignin)이다. 리그닌은 일종의 접착제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탄수화물 덩어리인 셀룰로오스를 붙잡아 강력한 세포벽을 만들었다. 그 강인한 화합물 덕에 나무고사리 등 양치류 식물은 곧추서서 태양을 향해 잎을 뻗어 올렸다. 급기야 이 나무들은 30m 넘게 자라났다. 하지만 리그닌이라는 화합물을 분해할 수 있는 세균이 아직 진화하지 못한 데다 뿌리마저 약했던 이들 양치식물은 분해되지 못한 채 땅속에 모두 묻혀버렸다. 먼 훗날 석탄으로 환생한 이 나무들은 현재 대기권으로 이산화탄소를 빠르게 돌려보내고 있다.

다른 한 종류의 화합물은 타닌(tannin)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언급한 플라보노이드 혹은 탄수화물을 구심점으로 삼아 분자량이 500에서 2만 돌턴에 이르는 거대한 화합물이 만들어졌다. 리그닌처럼 타닌도 주로 나무에 존재한다. 떫은 감, 밤 껍질 혹은 차에 풍부하게 들어 있다. 바나나 껍질에도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리그닌이 나무를 서 있게 했다면 타닌은 초식동물이나 그 밖의 곤충 혹은 곰팡이나 세균의 접근을 막는 일종의 기피제(deterrent) 역할을 했다. 타닌이 쓴맛을 내기 때문이다. 

화합물 안에 존재하는 많은 페놀기가 단백질이나 물과 강하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타닌은 수렴성이 있다고 말한다. 도토리를 먹은 말이 갑자기 죽거나 감을 먹은 다음날 배변이 힘든 이유는 동일하다. 이 화합물이 대장에서 물을 격리시켜 변을 굳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쓴맛은 식물을 먹잇감으로 삼는 모든 생명체에게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자연계에서 쓴맛은 곧 독성이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그래서 물고기와 같은 경골어류 또는 척추동물이 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 단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유충일 때 풀을 뜯어먹어야 하는 곤충도 쓴맛을 감지하는 단백질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감각기관이 아닌 우리 인간의 기도에서도 쓴맛 수용체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쓴맛 수용체 단백질이 공기 중으로 들어가는 먼지나 미세 플라스틱 입자를 쓴맛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맛에 관한 한 인간은 다소 가학적인 데가 있다. 매운 것도 쓴 것도 기꺼이 먹는다. 한방에서 쓴맛은 건위(健胃) 효과를 갖는다고 한다. 위를 건강하게 한다는 의미와 쓴맛이 합쳐져서 고미 건위제라는 말이 등장했다. 얼마 전 식당에 갔다가 돼지가 타닌이 풍부한 도토리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도토리를 먹도록 돼지를 방목해서 키우기 때문에 고기 맛이 좋다는 논조였다. 이들 돼지의 근육질 사이에 지방의 함량이 높다는 논문도 찾아 읽었다. 타닌 말고도 도토리에는 탄수화물과 지방이 풍부하다. 아마 도토리에 풍부한 지방이 돼지의 육질을 부드럽게 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돼지는 쓰디쓴 타닌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논문에 따르면 다른 종류의 풀과 함께 먹어 돼지가 타닌의 쓰고 수렴성이 있는 특성을 완화시켰다고 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돼지 말고 인간도 도토리를 먹는다. 다람쥐들도 습한 땅속에 도토리를 묻어 쓴맛을 줄인 다음 나중에 그것을 찾아 먹는다고 한다. 도토리의 영어 표기 acorn은 oak(신갈나무)와 corn(낟알)의 합성어다. 신갈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우리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전 세계적으로 북반구 온대지방에 넓게 퍼져 있다. <신갈나무>라는 책을 쓴 윌리엄 로건은 신갈나무와 초기 인류의 정착지가 ‘거의 일치한다’고 해석했다. 쉽게 말하면 도토리가 초기 인류의 중요한 식량원이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다른 곡물이 이를 대체하면서 지금은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도토리의 중요성은 현저하게 줄었다.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 캘리포니아 지역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도토리를 저장하고 가루를 내어 식량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도 우리처럼 여러 번 물에 우려내 도토리의 붉은 빛 타닌을 제거했다.

여름날 창밖으로 보이는 신갈나무가 올곧다. 가을이면 허리를 굽힌 사람들이 검은 봉지 안에 도토리 열매를 주워 모을 게다. 추운 날 배고픈 멧돼지는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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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13 지방선거 출마자들은 자신만의 선거 슬로건을 사용했다. 그러나 실제 지자체장이 되어 헤쳐 나가야 할 현실은 선거 슬로건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전임자의 모든 것을 없애고 제로에서 시작하는 것은 도시 브랜드 측면에서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멋진 새 슬로건으로 화려하게 시작하고 싶겠지만 브랜딩 차원에서는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예컨대 서울시의 경우 2015년 10월8일 새로운 도시 브랜드 슬로건 ‘너와 나의 서울(I.SEOUL.U)’을 선포했다. 2002년 ‘하이 서울(Hi Seoul)’을 시작으로 ‘소울 오브 아시아’ ‘인피니틀리 유어스’ ‘희망 서울’ ‘함께 서울’을 거쳐 13년 동안 6번 수정한 끝에 만든 슬로건이었다. 인천시도 지난해 ‘플라이 인천(Fly Incheon)’을 ‘모든 길은 인천으로 통한다(All Ways INCHEON)’로 바꾸었고, 울산시도 ‘도약하는 도시, 울산(Ulsan, The rising city)’을 선보였다. 강원과 대구 등 그밖의 많은 광역자치단체들이 곧 슬로건을 바꿀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인천, 대구의 공통점은 도시브랜드위원회를 구성하고 일찍부터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브랜딩 활동을 이어왔다는 점이다. 다른 광역시도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각 시·도는 그동안 다양한 브랜딩 활동이 브랜드 자산 구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정교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기업 슬로건의 사례로는 88년 만들어진 ‘저스트 두 잇(just do it)’과 84년부터 지금까지 사용 중인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가 있다. 두 사례는 콘셉트에 맞는 슬로건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강력한 브랜드를 만드는 지름길임을 보여준다.

새로운 도시 브랜드 슬로건은 잘 만들고 오래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다. 첫째, 단순해야 한다. 둘째, 진정성이 느껴져야 한다. 셋째, 다양한 홍보에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도시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다섯째, 쉽지만 의미심장해야 한다. 여섯째,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오랜 시간 바꾸지 말아야 한다. 일곱째, 해당 도시만의 차별화가 있어야 한다. 여덟째, 해당 시·도민에게 행복감과 자부심을 줘야 한다.

새로운 7기 지방자치가 시작됐다. 기존 슬로건을 대체한다면 중장기적인 계획과 해당 시·도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전문가를 비롯한 위원회의 노력으로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슬로건들이 2학기에 광고 수업시간의 학생들에게 우수 슬로건 사례로 소개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우리 국민은 그런 슬로건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이희복 | 상지대 미디어영상광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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