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훈련에 관한 한, 남다른 비법은 없다. 남들처럼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 말고는. 틈틈이 책을 보고 일정 분량 글을 쓴다. 테마를 정해 자유로운 형식으로 쓰든, 일기를 쓰든, 청탁 원고를 쓰든, 필사를 하든. (…) 사전은 종류별로 갖고 있지만 어휘력을 목적으로 들춰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독과 필사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한 문장에 복수의 의미를 담는 방법, 평범한 단어를 기발하게 활용하는 방식, 문장 순서를 바꾸는 법, 위트와 유머 등을 동시에 배울 수 있다.”

정유정 작가는 21세기 한국 문단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터뷰어 지승호의 질문에 답하며 소설 창작의 비밀을 털어놓은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은행나무)에서 “본인만의 소설 창작의 비밀”이라고 밝힌 내용입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글쓰기 책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이 공통적으로 제안하는 글쓰기 방법론은 꾸준히 쓰라는 것입니다. 화학자 출신의 소설가인 곽재식은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위즈덤하우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글을 쓰는 것이 정 어렵다면,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충 쓰자! 품질을 떨어뜨려도 된다. 써서는 안 된다고 했던 상투적인 표현이나 수십 번도 더 봤던 거들떠보기도 싫은 이야기도 어쩔 수 없다면 눈 딱 감고 갖다 써도 된다. 그렇게 해서 넝마 같은 글일지언정 하여간 써나가는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에게 글쓰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이는 강원국입니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그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 배운,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을 담은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를 내놓아 일약 글쓰기의 ‘대가’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최근에 자신만의 글쓰기 방법론을 담은 <강원국의 글쓰기>(이상 메디치)를 내놓았습니다. 28년 경험을 녹여서 썼다는 그는 이 책에서 고백합니다.

“2014년 2월 첫 책 <대통령의 글쓰기>를 내고 1000번 가까이 강연을 했다. 블로그, 홈페이지에 2000개가 넘는 글을 썼다. 모두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다. 첫 책 출간 이후 1500일 가까이 글쓰기에 관해서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글쓰기로 고통받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강원국이 말하는 글 잘 쓰는 비결은 ‘3습’입니다. 

“학습, 연습, 습관이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습관이다. 단순 무식하게 반복하고 지속하는 것이다. 글쓰기 트랙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글쓰기를 일상의 일부로,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밑 빠진 독에서도 콩나물은 자란다.”

포항에서 교사로 일하는 박균호는 <사람들이 저보고 작가라네요>(북바이북)에서 강원국의 강연을 기획해서 겪었던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강연장을 나선 외부 손님들의 표정이 강원국 선생의 그것과 같았다. 사람이 행복하면 저런 표정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강연이 너무 유익했고 재미났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 ‘강의가 무척 고급지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이었다’ ‘오늘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다’라는 강의 평이 이어졌다.”

그날 박균호는 오후의 마지막 수업에 들어갔다가 중학교 2학년 애제자에게서 한 줄로 요약된 강연 후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는데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재미있었고 강연을 다 들으니까 아무 글이라도 꼭 쓰고 싶어졌다.” 

그렇습니다. 이제 누구든 아무 글이라도 써야만 합니다. 과거에 작동했던 프레임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 스스로 생존비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평생직장을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비혼과 비출산이 급증하면서 가족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다가 혼자 죽어가야만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누군가와 반드시 연결해야만 합니다. 그야말로 초연결사회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할까요? 바로 글입니다.

류대성은 <사적인 글쓰기>(휴머니스트)에서 “모든 사람이 읽고 쓰는 시대”, 그야말로 ‘쓰는 인간’이 대세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네트워크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단 한순간도 홀로 지내기 어렵다. 오장육부에 스마트폰까지 부착한 ‘오장칠부’의 인간이 바로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다.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도 뭔가 의견이 다르면 동시에 스마트폰을 꺼낸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실시간으로 흡입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 간다.”

대화는 주로 글쓰기로 이뤄집니다. 우리는 엄지손가락으로 스마트폰 자판을 누르며 글을 쓰면서 상대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한 줄의 어록은 문자언어가 아니라 영상이미지인 세상입니다. 요즘은 사진 한 장만으로도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만 감동의 글은 그 마음을 제대로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글쓰기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이며, 삶의 목적과 방향을 고민하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글쓰기는 동일한 사물과 사건을 다르게 보는 과정이다. 나만의 관점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 타인에게 감동을 주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사적인 글쓰기”라고 정의를 내린 류대성은 사적인 글쓰기에서는 문학적 상상력보다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힘’이 상상력이라면,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능력’이 창의력”이라니 우리는 ‘사적인 글쓰기’로 창조적 사고력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글쓰기가 바로 만병통치약인 시대, 누구나 저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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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예능의 최강자는 역시 먹방과 쿡방이었다. ‘푸드 포르노’라는 일부 평자들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식 예능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음식 예능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건 이 장르가 ‘남성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TV 등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먹방이 공중파와 케이블로 넘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식신원정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누가 더 많이 먹나를 경쟁적으로 과시하면서 인기를 끌었던 온라인 방송의 콘셉트가 주류 방송으로 옮겨오면서, 먹방은 많이 먹는 남자들에게 더 집중했다. 이후 음식 예능의 인기는 서바이벌 리얼리티 쇼 열풍과 만나면서 쿡방의 시대가 열린다.

서바이벌 쿡방은 요리의 세계란 칼을 휘두르고 불을 다루는 ‘남성화된’ 세계라는 인식을 보편화시켰다. <한식대첩> 같은 걸출한 예외를 빼면, 요리 서바이벌은 남자들의 향연이었다. 덕분에 일상적인 요리 노동이 여전히 여성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프로페셔널 셰프=남성’이라는 도식이 대중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골목 상권을 위협한 것으로도 비판을 받았던 요식업계의 대부 백종원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부상 역시 이런 흐름과 함께했다. 이들은 자신의 입맛을 보편 입맛으로 등록하고 다양한 음식문화 속에서 스스로 기준이 되려고 했다는 점에서 ‘푸드 엘리티즘’이라고 할 만했다.

그렇게 ‘생존경쟁’과 ‘위로’ 사이 어딘가에 존재했던 음식 예능은 남성의 얼굴로 그려졌다.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서 6월 18일 열린 <밥블레스유>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이영자, 김숙, 최화정, 송은이(왼쪽부터). 올리브티비 제공

이런 와중에 새로운 음식 예능 <밥블레스유>가 시작됐다. 최화정, 이영자, 송은이, 김숙. 결혼하지 않은 네 명의 중년 여성이 출연해 크게 웃고, 크게 말하고, 크게 먹는 먹방이다. 지금까지 총 3편이 방영되었는데 매회가 흥미진진하다.

1편은 <밥블레스유> 홍보물 촬영 현장을 배경으로 네 사람의 전문가적 면모를 보여줬다. 방송 경력을 다 합치면 100년을 가볍게 넘기는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베테랑들이다.

여기서 단연 빛난 것은 ‘새싹 피디’ 송은이였다. 그는 남성중심 예능에서 설 자리가 없어졌을 때 팟캐스트 <비밀보장>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우물을 판 직업인이자, 자신의 여성 네트워크를 제작자원으로 끌어올 수 있는 방송인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다. 나는 송은이의 머리 위로 솟아난 초록 잎사귀를 멈추지 않는 도전의 표지로 읽는다. 그리고 그 잎사귀에는 곧 꽃이 필 것이다.

2편은 최화정의 집에서 펼쳐진다. 최화정은 싱글 여성의 생활 요리를 선보였는데, 일상적인 돌봄노동에 능숙한 사람들의 먹방이 쿡방을 겸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요리는 “여성=어머니=돌봄노동”의 회로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 노동이 즐거움이자 생명을 보살피는 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3편에서는 김숙의 마포 맛집 안내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맛집 안내란 “바깥 생활에 능숙한 지갑을 가진 남자”들의 몫이었음을 생각하면,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여성으로서 동네 맛집 달인의 면모를 빛내는 김숙의 리드는 그야말로 ‘가모장숙’다운 퍼포먼스였다.

<밥블레스유>의 관심사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뿐만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 ‘누구와 어떻게’에 오랜 시간 속에서 축적된 것들이 스며든다. 우정, 추억, 역사, 삶의 지혜, 그리고 넉넉한 마음. 여기에는 오랜 시간 일해온 여자들의 경제력 역시 포함된다. <밥블레스유>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푸드 포르노의 지리멸렬한 관습을 뒤집었다. 이 신선한 음식 예능에는 심장 쫄깃한 경쟁도 가혹한 평가도 없다. 특히 이영자가 읊조리는 맛에 대한 코멘트는 즐거운 농담이자 경쾌한 노래인데, 남성 푸드 엘리티즘과 달리 지식을 과시하기보다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나누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01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브라운관 속 ‘밥’이 ‘집밥’이나 ‘엄마밥’이라는 판타지를 거둬내고 우리를 축복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지, 기대하게 된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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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일년 중 반이 지났다. 누군가에게는 찰나의 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억겁의 시간인 한 학기였을 것이다. 교사들은 학생교육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함께한다. 교사들이 살면서 매일 부딪히는 여러 일에 묻혀서 학생의 성장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 학기라는 시간의 토막을 함께 보낸 이들이 잠시 멈춰서 돌아보는 일이 중요하다.

교사들에게 학생들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순간, 수업시간에 경청하고 같이 힘을 모아 과제를 해결하는 순간, 시간과 관심을 쏟아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달라지는 아이들을 마주하는 순간, 실수를 했을 때 함께 이야기하면 인정하고 쑥스러워하며 미안해하는 순간은 찰나로 지나간다. 학생들이 새잎에서 잎이 무성한 나무로 커가는 순간은 매일의 만남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교사들이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중요하다. 나 혼자는 못 보았던, 학생들의 조금씩 보이는 성장의 조짐을 같이 돌아보며 다음 학기에도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서 함께 실천하고자 마음을 다지는 과정이 힘이 세기 때문이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한 학기 동안 작은 성취 경험을 쌓았는지, 잘 배우고 있는지,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알게 되었는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데 조금 익숙한지, 학급에서 서로 배려하며 생활했는지, 학교에서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은 무엇인지 등을 돌아보고 의견을 내는 경험이 필요하다. 학생회 주관으로 학생대의원회의를 통해 학급별 한 학기 학교생활에 대한 의견수렴을 통해 전체 의견을 모아서 교원들과 공유할 수 있다. 학부모도 학부모회 주관으로 한 학기 활동을 돌아보고 의견을 수렴할 수 있다.

학교마다 교육과정평가회나 교육활동협의회라는 이름으로 한 학기를 돌아본다. 한 학기 동안 수업과 생활교육에서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나눈다. 부서별 업무활동은 효율적이었는지, 교육활동에 집중하는 조직운영이 되었는지, 학습공동체는 잘 이뤄졌는지, 교과별로 교육과정에서 서로 배울 점은 어떤 건지, 2학기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공유하고 협의한다. 학교에는 학교평가위원회라는 필수 기구가 있다. 학기별 교육과정평가회는 학교평가의 전체흐름 속에서 운영하면 학교교육과정 운영이 실질적이고 연속적이 된다. 단위학교마다 학교평가위원회를 구성해서 교육과정, 수업, 생활교육, 조직운영 등 학교교육활동 전반에 대해 살펴보고 자료를 축적하고 학교교육력을 높이기 위해 매년 자체적으로 평가를 한다. 이전에는 상급기관이 학교평가결과를 단위학교의 성과를 측정하는 자료로 활용해 학교평가보고서를 화려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한 업무였고 담당자에겐 큰 부담이 되고 형식적 운영으로 흘렀다. 현재는 다행히 학교자체평가이다. 체험학습이나 축제와 같은 학교행사별 평가, 학기 말 교육활동평가, 학년 말 교육활동평가회 등 과정 중심으로 살펴본 내용을 중심으로 과정을 담아 차기에 개선점을 반영할 수 있다. 형식보다는 구성원들이 같이 고민해서 실제로 필요한 내용을 담아야 의미 있는 평가가 된다. 또한 평가위원회에 학생도 필수위원이다. 학생회와 연결해서 학생대표가 의견을 수렴해서 반영하는 과정을 보장해야 한다.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학생과 교사가 태풍 같은 교감이 있었는지 가을이 되면 조금 잘 보이지 않을까 한다.

<손민아 | 경기 전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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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이 편찬한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양반집 부인이 워낙 바느질 솜씨가 없어 남편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버선 한 켤레를 지어주었다. 남편이 이것을 신고 조정에 들어가자 동료들이 볼품없는 버선이라 놀렸고, 이에 내 나이 마흔에 아내가 처음 지어준 버선이라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한다. 조재삼은 이것이 속담 ‘갓 마흔에 첫 버선’의 유래라고 수집해 넣고 있습니다. 아마도 속담에 맞춰 지어낸 이야기 같습니다.

오래 기다리던 일을 마침내 이룸, 또는 나이가 꽤 들어서야 처음 해보는 것을 이르는 속담 ‘갓 마흔에 첫 버선’을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옛날에 가난한 사람들은 늘 맨발에 짚신이었습니다. 심지어 아기의 체온 보호를 위해 신기는 타래버선조차 신어본 적 없었지요. 그러니 버선을 처음 신어볼 수 있는 건 혼례 치르려 사모관대로 성장(盛裝)했을 때입니다. 즉 사십 먹고서야 혼례를 간신히 올릴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밤마다 홀로 뒤척이던 열뜬 몸부림과 단란한 가정의 꿈을 마흔에야 겨우 이루니 눈물 없인 못 치를 혼례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은 물 한 그릇 떠놓고 못합니다. 예식 비용에 하객 대접, 주택에 생계와 양육 조건까지 갖춰야 합니다. 그러나 석사학위에 외국어 능통자를 월 150만원으로 구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입니다. 쥐꼬리만도 못한 월급으로 입에 풀칠로 살면서 모으면 얼마나 모으겠습니까. 그러니 청춘을 맨발로 다 보내고 마흔 목전에 이르러 빚내서 결혼할 수밖에요. 그래서 오늘날 젊은이들을 ‘삼포세대’라 합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포기가 아니라 사실상 절망입니다. 그럼에도 이기적이라 욕을 먹습니다. 우리 땐 없이도 결혼해 애만 잘 키웠다 합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옛날 얘기만 합니다. 억울한 비난에 젊은이들은 울분으로 답합니다. “아프니까 청춘? 우린 아프리카 청춘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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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수습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단체로 부서원 지인이 운영하던 술집에 갔다. 그 부서원이 술집 주인에게 부서장부터 인사를 시키려던 찰나 주인이 대뜸 나를 보며 말했다. “부장님, 어서 오십시오!”

‘이마가 훤하게 까진’ 노안은 기자 생활에 도움 될 때가 많았다. 여러 취재원이 ‘연차가 꽤 있는’ 기자가 직접 현장에 취재하러 온 줄 알았다. 이들은 나중 내 나이를 듣곤 속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취재 목적은 이룬 뒤였다. 지금은 차장인데 현장에 나가면 “국장님, 어서 오세요” 인사를 듣곤 한다.

‘노안’에 얽힌 일을 떠올린 건 프랑스 사회학자 클로딘 사게르 <못생긴 여자의 역사>(호밀밭)에 나온 이브 몽탕의 동갑내기 아내 시몬 시뇨레의 일화 때문이다. “어느 날 보니 나는 늙어가는 것이고, 그 사람(몽탕)은 성숙해가는 것이더라고요. (…) 남자의 주름살은 자랑할 만한 연륜이지만 여자의 주름살은 그냥 추한 거죠.”

미투의 시대 남자의 주름살은 연륜을 나타내는 표시가 아니다. 그렇다고 남자의 주름살이 혐오나 교정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여자의 경우는 다르다. 자연스러운 존재 양태인 ‘노화’를 지연시켜야 하는 부담을 더 크게 느낀다. 사회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잣대를 여자에게 더 강하게 들이댄다.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을 찬양하면 다른 한쪽을 혐오하게 된다. 광고나 드라마 같은 미디어와 이벤트가 미추 판별에 개입한다.

미스코리아는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대표 이벤트다. 1주일 전 미스코리아조직위에서 개최 안내 e메일을 보냈다. 미술 담당이라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줄 알고 보냈나? 외모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한 터라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홈페이지는 비키니 사진으로 도배됐다. 후보자 32명의 키와 몸무게가 일일이 나왔다. ‘후보자 신체 정보 실측값 변경’. 키, 몸무게를 본인 기재에서 ‘실제 측정값’으로 바꾼다는 공지다. 건축물에나 쓰는 ‘실측’이란 말이 이 대회의 은폐된 본질을 보여준다.

“화장품 광고는 타고난 자신의 외모로는 행복해질 수 없으며 자기들의 화장품을 써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사게르)고 선전한다. 구원의 문구는 때로 도를 넘는다. ‘김 비서는 왜 그렇게 예쁠까. 부회장님 키스를 부르는 메이크업 시크릿’ ‘부회장님 시선을 강탈하는 출근광채 시크릿’. 시세이도코리아의 광고 문구다. tvN 드라마 <김 비서가 왜 그럴까>의 맥락을 끌어온 광고라지만, 왜 비서가 ‘시선 강탈’을 해야 하는지 아무 문제의식이 없다. 성역할과 성·직업 차별 관념이 든 광고가 탈코르셋 운동 와중에 나올 정도로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 둔감하다.

미디어와 사회가 조장한 ‘아름다움’은 ‘미추’를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로 만든다. 고든 파크스는 1947년 미국 뉴욕 할렘에서 심리학자 케네스 클락이 흑인 어린이를 대상으로 진행한 ‘인형 테스트’ 장면을 촬영했다. 사진 속 어린이는 흑백의 아기 인형 중 백인 인형을 가리킨다. ‘인형 테스트’에서 대다수 흑인 어린이들은 하얀 인형에 “좋아요”라며 긍정 반응하며 선택했고, 검은 인형은 “나빠요”라고 부정 반응하며 거부했다. 키리 데이비스의 2005년 다큐멘터리에서도 흑인 어린이들은 백인 인형을 선호한다.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 있다. 한 아이가 말한다. “검은 피부 때문에 자신을 추하다고 여겼어요.” 결국 ‘성소수자인 흑인 장애인 여성’이 혐오 희생의 정점에 서게 된다.

몸은 존재다. 성별, 장애, 인종, 성정체성, 몸과 외모 같은 ‘타고난 있음’은 미추 판별의 대상이어선 안된다. 당장은 그 존재에 관한 판단을 유보하며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것이 차별과 혐오 철폐의 시작일 수 있다. ‘아름다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김종목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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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하지 못한 흑백 화면 속, 커다란 구덩이에 여성 시신 수십 구가 버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불과 19초에 지나지 않는 영상이지만, 정의를 요구하며 수십 년간 계속된 투쟁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중국 윈난성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이 영상은 1932년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지속된 일본군 성노예제 역사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영상은 2018년 2월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공개한 이후 전 세계 언론에서 널리 보도됐지만 일본 정부는 이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근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 정부는 여전히 자국의 전쟁 기록에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보상 문제에 대한 합의는 끝났다고 주장하며 잔혹행위가 자행됐다는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잔혹행위, 특히 여성에게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일본의 태도는 오늘날 일본 사회의 여성관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위안부’라는 조직적인 전쟁범죄의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정의를 요구하고 있지만, 생존자들을 “직업적 창부”로 지칭하거나 증언 및 증거의 타당성을 공격하는 등 이를 부인하고, 비하함으로써 (성노예제를)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

일본군 성노예제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그 뿌리는 일본의 분쟁과 점령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기원한다. 당시 일본이 성노예제를 고안하고, 운영하고, 확장시킨 방식 역시 일본의 뿌리 깊은 젠더 불평등과 타 국민 차별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지난 70여년 동안 일본에서 여성의 지위는 극적인 수준으로 상승했지만, 여전히 일본 사회가 갈 길은 멀다. 2017년 세계경제포럼 조사 결과 일본은 성평등에 있어서는 144개국 가운데 114번째로 최악의 수준이었다. 정부 및 공공, 민간기관에서 여성이 요직을 차지한 경우는 충격적이리만치 드물다. 일본 여성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상적으로 성폭력과 차별에 시달리며, 세계적으로 여성 운동이 힘을 얻고 있는 지금도 이 문제는 좀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최근 오사카국제대학교 조사 결과 정부부처, 경찰, 언론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힌 사례도 150건에 달했다.

젠더 고정관념이 팽배하며, 성차별적 태도는 여성들의 일상생활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친다. 일본 형법에서 규정하는 강간의 정의는 그 범위가 지나치게 좁고, 부부강간을 명확히 범죄로 규정하지 않는 등 국제기준에 따르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한반도, 중국 등지에서 일본에 강제 징용된 피해자들의 후손 역시 여전히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소위 ‘자이니치’라 불리는 한국계 일본인에 대한 공격도 만연하다. 한국계 학교는 고등학교 학비 면제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혐오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거의 매일같이 위협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벌어진 잔혹행위의 규모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일본군에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 처형된 여성이 총 몇 명인지도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이 감금되어 있던 ‘위안소’의 위치와 수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모두 파기되었다. 최근 성노예제에 관한 문서와 영상자료를 공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전쟁범죄를 은폐하려는 시도에 대항하고, 지금도 국가의 손으로 자행되는 불의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범죄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욱 넓은 범위의 개혁과 재발 방지 보장이 필요하다.

생존자 대부분은 현재 90대 노인으로 그 수가 계속 줄고 있어 직접적 증언은 점점 더 확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분들에 대한 배상에 관한 문제 해결도 더욱 시급하다.

일본군 성노예제처럼 일정 기간 동안 여성을 대상으로 강간을 자행하도록 국가가 직접 조직한 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조직적 폭력이 일본만의 특이한 역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구 유고슬라비아, 르완다, 콩고민주공화국, 과테말라 등 최근 역사를 통해 우리는 여성폭력이 불러온 암울한 결과를 여러 차례 목격해 왔으며, 오늘날 미얀마에서도 목도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러한 폭력의 책임을 인정하고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여기에 이러한 범죄의 기저에 있는 여성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포괄적인 개혁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과거의 인권침해를 바로잡는다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소수자의 상황을 개선하고, 성노예제와 같은 끔찍한 범죄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히로카 쇼지 |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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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답사 가는 길. 238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서울에서 출발했지만 연암은 무려 한 달, 후래자들은 고작 한나절 만에 압록강에 도착했다. 무언가 크게 새치기한 기분이 들었다. 세례받듯 압록강변에서 하룻밤을 자고 책문을 지나 대륙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지 말아야 하듯 벌판이라는 단어 앞에 다른 지역은 얼씬거리면 안된다. 요동벌판이다. 한바탕 울기 좋은 곳의 이정표가 되었던 요양(遼陽)의 백탑은 이제 고층빌딩에 가려 옛 정취가 사라졌다.   

연암을 흉내내 무슨 감정이 일어날까 목구멍 너머를 쥐어짰지만 아무 기미가 없다. 휘황한 불빛 아래 백주만 들이켜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산책 삼아 백탑공원에 가니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아침이 있는 삶이었다. 탑돌이, 기공체조 그리고 제기를 차는 중국인들. 몇몇이 어울려 제기를 빌려 함께 놀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제기. 내 발목에 차인 뒤 없는 길을 더듬으며 올랐다가 공중의 기(氣)를 기웃거리고 내려오는 제기를 보는데 연암이 압록강을 건너며 했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자네, 도(道)를 아는가. (…) 서양인은 기하학에서 하나의 획을 분별할 때, 하나의 선이라 말하는 것으로 그 은미함을 드러내지 못할 경우 ‘빛이 있고 없는 사이’(有光無光之際)라고 한다네. 불교에서는 이에 대해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다’(不卽不離)라고 말하지. 그러므로 그 경계(際)에 잘 처신함은 오직 도를 아는 사람만이 가능하니….”

공중에 붙지도 못하고 발에 닿으려면 그냥 차올리니 떨어지지도 못하는 제기. 한국이 독일을 납작하게 만든 것처럼 축구에서 이기지 못할 상대는 없다. 하지만 제기차기는 하늘과 겨루는 것이니 스스로 그만두는 수밖에 없겠다. 이윽고 공원을 빠져나오는데 새로 보이는 풍경 속에 꽃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백탑 아래 정열적으로 핀 접시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이는 꽃이다. 중국이 원산지이니 더욱 크고 중국답게 빠알간 접시꽃. 연암의 눈길도 분명하게 묻어 있을 백탑과 중국제(製) 접시꽃을 보면서, 제기는 순우리말이라지만, 오늘은 이렇게 적고 싶어졌다. 제기는 際氣! 접시꽃, 아욱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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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대흥사 일지암의 법인 스님에게 연락을 했다. 스님은 “잠깐만요” 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5분 뒤 전화가 걸려왔다. “토요일에 산사음악회에 쓸 도토리묵을 쑤느라 전화를 못 받았네요. 끓을 때 저어주지 않으면 묵이 굳거든요.” 지역민과 함께하는 사찰을 꿈꾸는 스님의 목소리에는 도토리묵 향기가 배어 있었다.

종림 스님이 머무는 함양 안의의 ‘고반재’는 주말이나 휴가철이 되면 북적댄다. 스님은 20여년 전 팔만대장경의 전산화 사업을 착수해 완수했다. 주위의 만류로 여태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직함을 떼지 못한 스님은 고반재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만난다. 절 아닌 듯, 절집 같은 그곳에서 사람들은 말하고, 침묵하고, 행동하고, 휴식하는 스님의 어묵동정 하나하나에 빠져든다. 스님의 향기다.

사람들은 절집의 향기를 맡으러 절에 간다. 대웅전에서 피어나는 향이 그리워서가 아니요, 연못을 채운 연꽃 향기를 맡으러 가는 것도 아니다. 참선하고 법문을 행하는 스님들이 전하는 향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부처, 불법과 함께 삼보(三寶)의 하나로 꼽힌다. 지금은 여름 안거 기간. 전국 산사에서는 1000여명의 수좌들이 수행에 정진하고 있다.

서울 도심 사찰 조계사의 정취는 다르다. 노스님이 20일째 단식농성하고 있어서다. 이를 지지하는 피켓 및 촛불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87세의 설조 스님은 조계종단의 개혁과 설정 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총무원 측은 위원회를 구성해 규명작업을 벌이고 있다며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설조 스님은 ‘약봉난행시 기석기근육(若逢難行時 豈惜幾斤肉, 요구사항이 해결되지 않으면 육신도 아끼지 않겠다)’이라는 게송까지 내놓았다. 목숨까지 걸겠다는 것이다. 단식이 지속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조계종 총무원의 부정부패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자승 전 원장 이후 총무원의 비리와 일탈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이다. 노스님의 단식을 계기로 조계종이 ‘맑고 향기로운’ 청정도량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그보다 당장 시급한 것은 종단 차원에서 노스님이 단식을 멈추도록 하는 방안을 찾는 일이다. 생명 살리기는 불교의 첫번째 계율이 아니던가.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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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정치학자 존 킨은 최근 우리말로도 번역된 대작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양현수 옮김, 교양인)에서 민주주의의 이상을 “겸손한 자들의, 겸손한 자들에 의한, 겸손한 자들을 위한 통치”라고 풀이한다. 그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대의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파수꾼 민주주의’라고 규정하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권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공적 감시와 통제에서 성립한다. 그래서 단지 권력의 오만함을 경계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의 야망을 멀리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들만이 민주주의를 누리고 꾸려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큰 도약을 가져온 촛불혁명이 왜 문재인 대통령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를 향한 국민들의 신뢰가 왜 식을 줄 모르는지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문 대통령만큼 ‘겸손의 정치’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지도자가 또 있을까? 우리는 안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예상을 뛰어넘은 민주당의 압승을 보고 문 대통령이 ‘등골이 오싹해지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을 때, 그 말은 결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심정 토로는 지난 선거의 가장 빛나는 의미가 오만한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냉엄한 심판이었음을 꿰뚫어 본 겸손한 지도자의 너무도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게다.

모든 권력은 적절한 감시와 견제가 없으면 언제든 오만해질 수 있고, 오만은 반드시 응징되기 마련이다. 문 대통령 같은 겸손한 지도자가 정점에 있는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권력도 예외일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꼈으리라. 바로 그래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지방정부에 대한 특별감찰을 계획하고 나섰을 테다. 청와대가 나서서라도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지방 권력에 긴장감과 절제를 주문하려고 말이다. 겸손함에 대한 단순한 호소만으로는 민주당 권력이 오만의 유혹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 힘들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감찰 정도로 충분할까? 결코 그러지 못하리라는 점은 역시 문 대통령부터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민주당은 TK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압도적인 집권당이다. 호남 지역에서는 오랜 집권 탓에, 부·울·경 지역에서는 새롭게 민주당 쪽으로 넘어온 토호 세력 중심의 기층 조직들 때문에, 민주당의 지역 정치는 언제든 관성과 오만과 부패의 늪에 빠질 우려가 크다. 우리 주권자들은 지역 의회에서 정당정치 수준의 감시와 견제가 구조적으로 작동하기 힘들게 민주당에 압도적인 의석을 주었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최근 불거진 국회의 특활비 문제를 보면 여야 정당들끼리의 상호 감시와 견제도 허울로만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과연 무슨 수로 오만의 늪에 빠지는 걸 피할 수 있을까?

정당정치 차원에서만 해법을 찾지는 마라. 우회로, 아니 오늘날의 파수꾼 민주주의 시대에 맞는 유일한 정답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시민사회와의 협치를 상설화하고 구조화하며, 일상적인 시민의 참여와 감시와 견제가 가능하도록 더 많은 공간을 마련하는 데 말이다. 말하자면 더 많은 ‘참여연대’를 민주당이 앞장서 불러내고 장려해야 한다. 상설화된 공청회나 협의회 같은 것은 물론이고, 시민참여 예산제, 시민 발안, 시민 소환, 옴부즈맨 제도 등 실천하고 실험해볼 만한 많은 방안들이 있다.

사실 이런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협주’에 대한 필요는 지역정치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한 협주는 민주주의의 세계적 모범을 보여준 촛불혁명을 이끈 원동력으로서, 우리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 보여준 바, 시민정치는 정당정치의 안티테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민정치의 에너지야말로 정당정치의 가장 확실한 자양분이었다. 시민정치는 정당정치를 지지하면서도 감시와 견제에 나서고, 정당정치는 스스로에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시민정치를 더 강화하고 형성하도록 돕는 바로 이런 긴장적 상호강화야말로 우리 촛불혁명이 보여준 새로운 민주주의의 정수였다.

물론 두 차원의 정치는 서로 다른 문법에 따라 작동한다. 시민정치는 시민의 생활세계가 요구하는 인권, 평등, 공생, 삶의 인간적 질 같은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 반면, 정당정치는 국정운영을 겨냥한 안정, 번영, 법치, 갈등의 해소 같은 실질적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두 문법은 그저 모순하고 대립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실천적인 역할 분담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조율되어야 한다. 겸손의 정치는 단지 이렇게만 완성될 수 있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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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즈음,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명동성당에서 친구들과 농성 중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을 더는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란 단체를 만들어 “공정한 대통령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며 그해 12월 명동성당에 들어갔다. 농성을 준비하며 우리는 어설프게나마 죽음을 각오했었다. 87년 선거에서 그들이 패배한다면, 5월 광주 같은 일이 어디선가 또 일어나게 될 거로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그들이 승리한다면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계엄령이나 최소한 위수령 같은 사태가 발생하리라 예측했다.

12월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투표 유권자의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1980년 5월 광주로부터 시작해 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이 추구했던 민주정부 수립은 결국 전두환과 함께 12·12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투표권도 없던 고등학생으로서 나에겐 평생 씻을 수 없는 좌절과 굴욕으로 남은 역사였다.

87년의 좌절을 경험했기에 2008년의 촛불집회와 2016~2017년 촛불집회에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참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시위만으로 세상이 바뀔까, 저들이 이 목소리를 들을까 싶었다. 광화문 버스 장벽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내내 가슴 답답했다. 그러나 아이와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평화롭게 오가면서도 1987년의 경험이 있었기에 군부가 전면에 나설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바로 그 시각, 기무사에서는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기무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될 경우 이에 불복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될 것으로 예측하여 위수령을 발령하고, 위수령 상황에서 군이 폭행을 당하거나 진압할 수단이 없다고 판단되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도록 계획했다. 그 뒤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령 상황 아래 군이 정부부처·수사기관을 장악하고 언론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제하는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IT강국을 자부하는, 올림픽과 월드컵은 물론 6월항쟁을 치른 나라에서 ‘군부쿠데타’를 통해 권력 유지와 연장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난 정권들이 내보인 블랙리스트나 여러 정치공작을 보건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리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기무사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상대로 계엄령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한편으로 시대착오적이며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앞세운 시위대가 노동자의 죽음을 조롱하고 있으며, 직원들에게 단체로 회장 찬가를 부르게 하는 경영자가 경영수업 받는 자기 딸은 예쁘게 봐달라며 고개를 조아린다. 또한 난민에게 보내는 우리의 쌀쌀맞은 시선을 생각해보면 민주시민의 자부심은 섣부르다.

압축적 근대화의 역사를 살아낸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이것은 각기 다른 역사적 시간에 등장하는 요소가 동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각축을 벌이며 사회의 상을 만들어내는 법이지만, 우리는 과거에 해결했어야 할 전근대적 요소들까지 살아남아 근대적 요소와 탈근대적 요소들과 함께 동시에 경합하는 중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적폐의 내용이다. 과거 우리가 해결하지 못했던 과제들은 언제라도 망령처럼 되살아나 오늘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기무사 문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80년 5월 광주와 87년 6월항쟁, 2017년 대통령 탄핵 같은 극적인 사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여러 곳에 스며있는 적폐청산이란 과제는 분배구조의 개선, 노동자 지위 향상,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보호 등 민중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정치적으로 담아내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없다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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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9일 뉴델리 인근 노이다 공단에서 열린 삼성전자 제2공장 준공식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났다. 문 대통령이 이 부회장을 만난 것은 물론 삼성그룹 행사에 참석한 것도 취임 이후 처음이다. 이 만남은 문 대통령이 전략시장인 인도를 국빈방문하는 와중에 현지에 진출한 삼성이 행사를 열면서 이뤄졌다.

대통령이 경제의 핵심 주체 중 하나인 기업인을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답보상태인 일자리 확충과 소득격차 해소, 미·중 무역전쟁의 후폭풍 등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기업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도 절실한 시점이다. 또한 정부가 대기업과의 거리 좁히기에 나서는 것도 어느 정도 예견돼 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중국 현대자동차 공장 방문 때 정의선 부회장의 안내를 받았고, 올 2월 한화큐셀 방문 때는 김승연 회장을 만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중순 청와대에서 열린 정책기조점검회의에서 “청와대와 정부가 기업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자주 소통하고 기업 애로를 청취해 해소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도를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뉴델리 인근 노이다 공단에서 열린 삼성전자 신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이재용 부회장 등과 함께 테이프 커팅에 앞서 박수를 치고 있다. 왼쪽부터 이 부회장, 강경화 외교·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문 대통령, 모디 총리. 연합뉴스

그러나 문 대통령과 이 부회장 간 만남이 정부의 정체성이나 경제정책 기본방향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번 만남이 경제정책 변화를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변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부가 집권 2년차를 맞아 대기업 관련 정책 기조를 바꾸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더군다나 최근 청와대가 정통 관료 출신인 윤종원씨를 경제수석에, 정무적 감각이 높은 정태호씨를 일자리 수석에 앉히면서 소득주도 성장 기조가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 터다.

특히 지금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혐의로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 부회장이 대법원 최종심을 앞두고 있다. 검찰의 삼성전자서비스 노조파괴 공작 수사도 한창 진행 중이다. 이번 만남이 자칫 대법원과 검찰에 잘못된 신호를 줘서는 안된다.

정부는 대기업을 적으로 봐서도 안되지만 대기업에 의존하려는 유혹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한국 경제에서 대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해서 최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사태 등에서 불거진 ‘갑질’ 논란 등 재벌의 폐해가 무시될 수는 없다.

노무현 정부가 삼성의 영향력을 끊지 못한 것이 경제개혁에 실패한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지난 정부 국정농단 사태의 시작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간 ‘독대’에서 시작됐다는 점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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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원내대표는 9일 후반기 국회 원구성을 위한 막판 협상을 벌였지만 또다시 합의에 실패했다. 20대 국회 전반기가 종료된 5월30일부터 국회의장도 없고 상임위도 구성되지 않은 입법부 공백 사태는 벌써 40일을 넘기게 됐다. 이 바람에 시급한 민생·경제법안은 물론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구조 논의를 뒷받침할 국회 차원의 대응은 올스톱이다. 경찰청장과 대법관 3명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도 부지하세월이다. 여야 간 협상이 결렬되는 주원인은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법사위원장을 서로 차지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효율적인 개혁입법을 위해 여당이 법사위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한국당은 일당 독주를 막기 위해 법사위를 사수해야겠다는 입장이다.

법사위는 각 상임위에서 넘어온 법안의 체계와 형식, 자구(字句)에 관한 심사를 맡고 있다. 소관 상임위 중심으로 심사된 법률안이 타 상임위 법률과 내용상 충돌하거나 조문 간의 모순 또는 부조화를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법안 형식에 관한 검토가 아니라 실질적 내용까지 좌우하거나, 상임위 위에 상전처럼 버티고 앉아 국회 의사결정 과정을 왜곡시킨다는 갑질, 월권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마치 양원제 국가에서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상원에서 수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비판이다. 실제 모든 법안은 법사위를 거쳐야 본회의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여야 이견이 없는 무쟁점 법안마저도 다른 법안과 연계시켜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일이 다반사였다.

국회법상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 규정은 1951년 제2대 국회 당시 법률전문가가 드물었던 상황에서 만들어진 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제는 법사위 기능을 뜯어 고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볼 때가 됐다. 법사위가 갖고 있는 타 상임위 처리 법안에 대한 심의를 국회의장 직속의 입법지원처를 신설해 맡긴다든지, 쟁점이 없는 법안은 우선 처리하는 등의 방법은 생산성 있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생각해볼 만하다. 법사위 권한 축소는 지난 19대 국회에서부터 제기됐지만 번번이 좌절된 바 있다. 여야의 지위가 바뀔 때마다 다른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법사위가 더 이상 다른 상임위의 ‘상원’ 역할을 하며 법안 발목잡기를 할 수 없도록 제도적 보완장치를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다. 여야가 법사위원장을 놓고 으르렁대는 지금이 적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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