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수수 혐의로 기소된 안봉근·이재만·정호성 전 비서관 등 ‘문고리 3인방’의 1심을 맡은 이영훈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 부장판사는 선고를 내리는 자리에서 “판결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경향신문의 <사법농단 관여 판사들이 ‘국정농단’ 재판…부적절 지적> 보도(7월9일자 4면)를 언급하며 “유감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전산정보관리국장으로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겨냥해 법원 내 연구회 중복가입 금지 공지를 올린 당사자다. 전산정보관리국은 하창우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의 사건 수임 내역 조회에 관여한 의혹도 받고 있다. 경향신문은 해당 기사에서 ‘사법농단’ 의혹과 연루된 이 부장판사가 ‘국정농단’ 사건을 재판 중이라는 사실에 대해 국민들이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부장판사는 재판 발언에서 “(전산정보관리국이 하 전 회장 수임 내역을 조회하려 했다는) 문건 내용은 저도 정확히 모른다”면서 “이번 재판의 공정성을 문제 삼는 것은 지금 법원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문제를 바로잡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이번 보도가 국정원 특활비 뇌물사건에 무죄 판결이 선고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라고 오해될 여지가 있다”고도 했다.

누구나 자신을 해명할 권리는 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의혹을 법정에서 반박한 것은 공적인 자리를 사적으로 이용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도 법원행정처가 이정현 의원(무소속)을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를 청탁했던 정호성 전 비서관 등 ‘국정농단’ 의혹 피고인들의 재판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의혹 제기가 특활비 무죄 판결에 대한 불만 때문일 수 있다는 주장까지 했다. 기사가 ‘다른 뜻’을 가지고 작성된 것 아니냐고 호도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명의로 올린 연구회 중복가입 금지 공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 대상자가 될 수도 있는 이 부장판사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법정이란 장소를 이용한 것은,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지금 사법부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문제를 바로잡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희곤 | 사회부 hul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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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의 갑질이 시작이었다. 회의 자리에서 유리컵을 던지고 막말을 했단다. 범죄 혐의는 특수폭행이다.

다음은 엄마였다. 딸보다는 혐의가 많았다. 공사현장 작업자, 운전기사 등에게 폭행과 폭언을 했단다.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세 번째로 아빠가 수사 대상이 되었다. ‘가장’의 존재감인지 이번엔 좀 더 죄질이 무거워 보였다. 횡령, 배임, 탈세 등이었다. 첫딸은 땅콩회항을 일으켰고, 아들은 아빠가 주인 노릇하는 대학에 부정 편입학까지 했단다. ‘범죄 가족’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죄질이 얼마나 나쁜지는 살펴봐야겠지만, 가족 모두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좀 따져봐야 할 일이다. 특히 엄마에게는 폭행 등으로 한 번, 가사도우미 문제로 한 번, 합해서 검찰이 두 번이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모두 네 번의 영장 청구가 있었고, 결론은 모두 기각이었다.

얼핏 보면 조씨 일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당연해 보인다. 그저 재벌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부를 갖게 된 사람들의 행태가 너무 고약했다. 사회적 책무는 고사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마저 저버리고 불법행위를 일삼았으니 엄정(嚴正)하고도 단호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무릇 모든 범죄에는 죗값이 따라야 한다. 재벌가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게 바로 정의다.

그러나 범죄자에게 묻는 죗값은 딱 죄를 진 만큼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경찰과 검찰은 법정이 열리기도 전에 사실상 여론 재판을 해버렸다. 단지 범죄 혐의를 의심하는 단계였는데도 범죄 사실은 물론, 범죄와 별 관련 없는 일까지 언론에 알렸다. 조씨 일가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알려주는 게 마치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인 양 굴었다. 애먼 사람들이 누명을 쓴 건 아니었지만, 벌주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다 망신 주고 과잉형벌을 남발했던 옛날의 인민재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구속영장 청구다. 세 사람에게 네 번의 영장 청구. 어쩌면 네 번으로 영장 청구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씨 일가에게 반복적으로 영장을 청구하는 검찰은 마치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가 속의 특전사와 닮았다. 법률전문가로서의 양식이나 법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속은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형사소송법 제70조)가 있고,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거나,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에 할 수 있다. 구속할 때는 범죄의 중대성과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 등도 고려해야 한다.

구속은 형사사법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피의자, 피고인이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애면 죄를 물을 수도, 죗값을 치르게 할 수도 없기에 마련한 부득이한 절차다. 하지만 많은 경우 형사사건에서의 핵심은 구속이냐 불구속이냐에 달려 있다. 구속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속은 남발하면 안되는, 사실은 이례적으로 적용해야 할 절차다. 그래서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을 원칙으로 한다”(제198조)고 천명하고 있다. 이 원칙은 ‘준수사항’으로 따로 정해두고 있다. 불구속이 원칙이니 그 원칙을 따르고 좇으며 지키라는 것이 법의 명령이다.

그가 누구든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도록 하고, 감옥에 보내는 일은 재판을 해 본 다음에, 법원의 판결에 따른 형벌이어야 한다는 거다. 이게 원칙이지만, 이 원칙을 지킬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앨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속하라는 거다.

조씨 일가의 범죄들이 형사소송법이 정한 불구속 수사 원칙을 깨뜨릴 만한 것이었는지, 그 깊은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예외 없이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재벌 일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검찰은 악질 재벌을 단죄하는 정의의 수호신쯤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시민들의 박수를 받을 수도 있고, 재벌 일가를 구속해서 정의를 확립하라는 시민적 요구와 짝하기에 부담도 없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기각해야 하는 법원은 치도곤을 당한다. 영장 전담 판사의 이름이 검색어 상위를 차지하고 신상이 털리기도 한다. 검찰 입장에서는 이런 게 바로 꽃놀이패다. 영장청구권은 검찰에만 있지만, 그 권한을 아무렇게나 써도 검찰 입장에서는 잃을 게 없다. 모처럼 다수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을 게다.

아무리 고약한 사람이라도 그가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국민 모두가 갖는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재벌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약간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은 지켜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관 홈스가 옹호하려 했던 사상의 자유가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를 뜻하는 것처럼, 보편적 인권은 그가 누구인지를 따로 묻지 않아야 한다. 갑질이나 일삼는 재벌 피붙이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해야만 법이 정의 구현의 수단으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조씨 일가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만큼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숱한 사람들은 검찰의 마구잡이 영장 청구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재벌가 사람들조차 저런 대접을 받는데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여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비싼 변호사를 살 수도 없는 시민들은 크든 작든 형사사건에 연루되면 당장 감옥에 갇힌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원칙은 언제나 어떤 경우나 꼭 지켜야 한다. 불구속 수사 원칙도 마찬가지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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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같은 학과에서 강의하시던 <머털도사> <임꺽정> 등의 명작을 그려내신 이두호 교수님께서 특별한 제안을 하셨다. 본인이 만화를 배울 때는 대개 도제식 과정을 거쳐서 7~8년 이상 만화수업을 하고 작가로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그러한 도제식 과정은 하루 20시간 이상 작화테이블에 앉아 작업을 할 수 있는 집중력 훈련이었다고 회상하셨다. 하지만 이제 만화를 배우기 위해 대학교 만화관련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은 그러한 도제식 과정이 아닌 대학의 커리큘럼을 따라 공부하다보니 교양과목, 아르바이트, 동아리, 학생회, 축제, 소개팅 등 도대체 언제 만화에 전념하며 작업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걱정이셨다. 그러면서 본인이 여름방학이 되면 만화전공 학생들 30여명을 데리고 산속 폐교에 들어가 9박10일 정도 도제식 만화교육의 진수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제안을 하셨다.

당시 동료교수로서 필자는 그러한 교육방식이 지금 학생들에게 가능하겠냐는 기우와 그러한 과정의 운영, 예산, 안전문제 등을 걱정했다. 하지만 당시 이두호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참가비를 본인부터 각출하며 참여를 독려하셨다. 6월 말 충청도 산골에 있는 폐교를 기도원으로 사용하던 목사님에게 허락을 얻어내고 학부학생 30여명을 데리고 시작했던 캠프가 일명 ‘만화지옥캠프’로 명명된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의 하계만화창작캠프다.

방충망도 없던 교실에는 모기떼가 득실대고 제대로 된 화장실과 샤워실도 없던 공간에서 학생들은 난생처음 하루 20시간 이상 고강도 작업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들과 똑같이 작화를 하시는 이두호 교수님의 솔선수범에 딴청을 피울 수도 없었고, 9박10일 내에 30페이지 이상의 단편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미션이 학생들에게 오기를 발동시켰다. 이렇게 작품을 완성시킨 학생들을 마지막 9일째 위로방문했던 필자는 어딘가 다른 기운에 놀라게 된다. 학교담벽에 붙여진 학생들의 완성작품을 평가받는 시간, 학생들은 자신들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에 이미 어떠한 교육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성숙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렇게 10여년 지옥캠프전통이 무르익을 무렵, 이두호 교수님에 이어 <공포의 외인구단>의 이현세 교수님이 캠프촌장을 맡았고, 이때부터 네이버웹툰의 편집장이 위로방문을 시작한다. 국내 유력 웹툰앱이었던 네이버웹툰에서는 학생들 작품에서 새로운 시도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우수 단편들을 선정하여 연재하기 시작한다. 작품의 수준이 확인되면서 여타 다른 포털사이트의 웹툰앱 편집장도 방문하게 되었고, 결국 2013년에는 20여개의 웹툰앱과 만화잡지사 편집장들이 우수작가를 선점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이런 성과를 지켜보던 네이버웹툰은 새로운 기획을 제안한다.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생 이외에도 이런 캠프에 참가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전국 모든 웹툰앱 편집장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공론화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캠프경비는 네이버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여유 있게 충당되었다.

2014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시도된 이러한 만화지옥캠프는 2018년인 올해, 장래 웹툰작가를 꿈꾸는 총 100명의 전국 대학생들과 이미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웹툰작가가 된 15명의 멘토들이 함께 참가하여 명실상부한 작가양성 만화캠프가 되었다. 이제는 쾌적한 대형연수원 시설에서 에어컨과 수세식 화장실, 샤워실, 개인침실 및 작업실 공간을 배정받으며 무료로 캠프에 참가할 수 있고, 전국 40여개의 웹툰앱 편집장들이 마지막 평가 당일 참석해 바로 연재계약까지 가능한 협의를 진행한다. 캠프촌장인 이현세 교수는 좋은 시설의 안정된 작업환경을 보장하면서도 이렇게 강조한다. “이제 이처럼 천당 같은 시설에서 작업을 하니, 실제 더 어려울 수 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도 멋진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게 지옥이지!”

대학의 실험적인 교육모델이 대기업의 사회적 후원을 이끌어내고, 그러한 후원의 발판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산업계와 직결된 맞춤형 교육과 취업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아직도 우리에겐 도전할 때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전히 은퇴하셨음에도 18년째 이두호 교수님은 캠프에 동참해서 손자 같은 학생들 작품을 묵묵히 지켜보시며 어린 작가들과 눈을 맞추고 격려하신다. 가슴에 남겨지는 원로의 모습이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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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다툼이 생겨요.”

전업주부로 살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오십대 중반의 제자가 괴로움을 토로한다. 아이 낳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시부모 봉양하고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죽 살아왔다. 이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사회학을 시작했는데 공부할수록 그동안 잘 지내왔던 주변 사람들과 자꾸 부딪힌다. 그들이 여자에게 바라는 삶은 명확하다. 현모양처. 다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할라치면 이기적인 존재로 몰아붙인다. 개인의 목소리를 도저히 낼 수가 없다.

한 지방대생 엄마가 떠오른다. 어릴 때는 남녀 차별을 잘 모를 정도로 남자애들과 어울려 지냈다. 집에서도 큰 차별을 못 느끼고 자랐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때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윽박지르는 아버지에게 못 이겨 인문계를 포기하고 상고에 진학했다. 가부장이 진짜 가부장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가족을 온전히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 평생 성실하게 살았지만 아버지는 이런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족 안에서 절대 권위를 휘두른다. 맞서 봐야 좌절감만 느낀다.

상고 진학 이후부터는 가부장제 아래 여자에게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살았다.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하고, 그곳에서 만난 남자와 1년 연애 후 스물두 살에 결혼하고, 첫아이를 출산하고 육아를 하며 전업주부로 지냈다. 하지만 둘째 아이를 낳은 후에는 돈 벌러 나가야 했다. 현모양처의 삶을 살고 싶었지만 남편의 경제 능력이 변변찮았다. 회사에 들어가서 내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 처음에는 말단직원에 불과했지만 점점 인정을 받고 나중에는 거의 오너 위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진짜 오너는 아니었다. 오너와 마찰이 생겨 결국 10년 이상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전도하러 온 사람을 따라 종교를 믿게 됐다. 힘을 얻어 다시 일을 구했다. 그곳에서도 성실하게 일했더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다.

이제 삶을 되돌아보니 큰 후회 없이 모두 다 잘되었다.

“살아가는 거 중에 그냥 하나하나 지나가는 것들이 그냥 우연 같지만 다 필연이라는 거지. 어떤 한 시점에서 이 과정들을 쭉 봤을 때. 그 과정이라고 생각해.”

행운의 신정론! 내 의지나 행위와 무관하게 얻은 행운의 비합리성을 합리적 언어로 정당화한다. 과거 힘들 때를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눈물겹도록 행복하다. 그런데 이 행복이 사실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얻게 된 행운에 가깝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자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왔더니 결국 인생 중후반에 행운이 깃든 것이다. 지금은 살아온 날들 중 어느 때보다도 좋다.

“이제 나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니까 그것도 좋아.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좋아. 하루를 잘 살고 싶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딸들이 격하게 울부짖고 있다. 하지만 행운의 신정론에 빠져 있는 엄마들은 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부조리하다거나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을 이해하려면 우선 주어진 세계를 넘어 이상적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긍정적 언어를 창출해야 한다. 그 언어를 준거로 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보아야만 현실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다.

현재 사회과학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페미니즘 책들이 수위를 다투고 있다. 그만큼 딸들이 자신들이 받는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해 달라는 거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CEO 총장이 장악한 대학에서는 페미니즘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취업이 존재 이유가 된 대학은 기업이 싫어하는 인재를 키울 수 없다며 그나마 있던 페미니즘 강의마저 없앴다. 어느 여대에서는 여성학을 여성지도자 과정으로 슬그머니 바꿔쳤다. 이러는 사이 젠더 분리주의와 남녀혐오라는 부정적 언어가 기승을 부린다. 행운의 신정론에 올라탄 악한 가부장제 습속이 일상을 지배한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긍정적 언어를 제대로 가르쳐 일상의 ‘평범한 악’과 다투게 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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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공론에 부친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신뢰도 제고 방안’에 대한 시민정책참여단 숙의 결과가 공개됐다. 교육부가 12일 발표한 내용을 보면, 큰 틀에서 기존 학생부 시스템을 유지하되 사교육 부담을 키우는 원인으로 지목돼온 일부 항목은 손질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앞서 교육부는 학생부 신뢰도 제고방안을 ‘국민참여 정책숙려제’ 1호 안건으로 정하고 시민참여단 100명의 숙의 절차를 거치기로 했다. 사교육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데다 합격기준이 모호해 ‘금수저 전형’ ‘깜깜이 전형’이란 비판을 받아온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의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시민참여단은 논란이 돼온 ‘수상경력’은 현행대로 기재하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부모의 계층에 좌우된다는 지적을 받아온 자율동아리도 기재는 하되 참여 동아리 개수에 제한을 두기로 했다. 가장 논란이 돼온 ‘소논문’은 아예 학생부에서 빼고, 인적사항 중 학부모 성명·생년월일·가족변동사항도 삭제키로 했다. 그러나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줄이기에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참여단 측에서도 시간에 쫓겨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전문가 자문위원회에 참여했던 전교조 등 4개 단체가 “교육부가 자신들의 시안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지도록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는 등 외압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시민참여단 숙의 결과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학종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첫 단추는 끼웠다고 본다. 학종은 당초 공교육을 정상화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후 대입에서 비중이 계속 높아져왔다. 상당수 학생과 학부모가 지나친 학업부담이나 경제적 배경에 따른 교육격차 등을 이유로 비판하지만, 현장에서는 고교 교육을 정상궤도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긍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이번 숙의절차를 시작으로, 교육당국은 학종이 당초 취지에 부합하는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또한 대학입시 정책은 학종뿐 아니라 고교 체제·수능·내신 등이 하나의 고리로 맞물려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대입정책을 포함한 교육정책을 공론화하는 작업은 유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교육부가 모든 책임을 공론화에 미뤄선 곤란하다. 교육당국은 공동체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교육정책의 거시적 비전을 그려내 시민에게 제시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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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공포로 대기질에 대한 언론과 국민의 관심도는 매우 높아졌는데, 언론의 호들갑과는 달리 오히려 미세먼지 농도는 1990년 이후 최근까지 점진적 개선을 보였다. 그럼에도 이 문제가 연일 계속되는 것은 2013년 이후 개선이 답보상태를 보인 시기와 맞물려 호흡기 질환 사망자 증가율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이 환경문제를 인식하게 되는 시점은 이미 손쉬운 해결에서는 한참 벗어난, 자신 또는 주변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가 대부분이다. 대기오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호흡기계통 질환 사망률은 미세먼지가 크게 좋아지던 시절인 1990년 이후에도 지속적 증가를 보였으며 2010년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 폐렴에 의한 사망자는 1990년 전체 사망자의 6%에서 2010년에는 15%로 증가하였는데 이후 2015년에는 29%로 껑충 뛰었고 전체 호흡기 질환 사망자는 50%를 넘어섰다. 사망자 두 명 중 한 명이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하니 미세먼지가 좋아졌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수치와는 달리 미세먼지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커졌는데, 이유는 모든 대기오염 문제를 대표하는 단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미세먼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경향신문DB)

미세먼지의 감소를 고려하면 최근 급격한 호흡기 질환 증가의 주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간 동안 감소된 미세먼지와는 달리 대표적 호흡기 질환 물질인 오존농도는 서울시 기준으로 두 배가 증가했다. 도심 오존은 질소산화물이 자외선과 결합하여 생성되기 때문에 다량의 질소산화물을 발생시키는 화석에너지 사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미세먼지와는 달리 오존이나 질소산화물은 가스상 물질로 마스크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 대처할 수도 없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화석에너지 저감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하는 이유이며 이 중 시급히 개정해야 하는 것이 자동차 관련 과세문제이다. 오존농도 상승과 디젤차량의 증가, 호흡기 질환 사망자의 증가 추이가 매우 높은 관계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소상공인을 위해 트럭의 연료인 경유에 낮은 세금을 부과한다. 이것이 유가상승과 클린디젤이라는 세계적 흐름과 맞물려 2010년 전체 차량의 36%이던 디젤차량이 2017년에는 42%를 훌쩍 넘어섰다. 심지어 다른 나라와 달리 디젤게이트 발생 이후에도 증가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디젤차량의 급격한 증가는 고급 승용차와 레저를 위한 SUV차량이 주도해 유류세 정책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부자나 일반인의 세금혜택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정유사와 자동차회사들은 디젤의 미세먼지 배출량이 휘발유와 별 차이가 없다고 홍보한다. 이는 모든 대기오염을 ‘미세먼지’라는 말로 인식하는 데에서 발생한 호도인데, 미세먼지 배출량 차이가 많지 않다고 하여 대기오염에 미치는 영향이 같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디젤차량의 질소산화물 배출량은 휘발유의 무려 10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도심의 급격한 오존농도 증가와 관련된다. 같은 디젤차량으로 대체될 노후경유차 조기폐차보조금이나 허울뿐인 저감장치에 보조금을 줄 상황이 아님은 물론 환경개선부담금을 폐지할 상황도 아니다.

대책은 휘발유와 동등하게 유류세를 부과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최악의 대기오염국가에서 오염을 감내하면서 이들 차량에 세금혜택을 줄 이유는 없다. 디젤에 부과하는 세금을 당장 올리지 못한다면 최소한 차종을 구분하여 승용차에 할인해주는 세금은 환급받아야만 할 것이다. 평균 주행거리를 감안하면 차량 1대당 연간 30만~50만원 정도가 된다. 만성적 대기오염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다. 국민들도 개인의 작은 이익을 위한 선택이 모두의 불행으로 돌아옴을 인식하고 에너지 절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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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시체를 바다에 가라앉히거나 강에 흘려보내는 수장 풍습은 전 대륙에 걸쳐 나타난다. 수장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북구의 바다를 주름잡았던 바이킹들이다. 바이킹들이 전투 중 사망한 왕이나 동료의 시신을 불길이 치솟는 배에 태워 바다로 떠나보내는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북아메리카 체로키 인디언들이 시신을 근처의 강에 흘려보내는 것은 사자의 재탄생을 믿은 결과다. 체로키들은 땅이 물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과정이 반복된다고 생각했다. 천장·조장(鳥葬·시신을 새 먹이로 내어 놓는 장례 풍습)으로 유명한 티베트와 같은 내륙에도 수장 풍습이 있다. 죄인이나 병자, 임신 중 사망한 여성을 강에 던져 장사 지냈는데, 이는 물이 사자를 정화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수장은 사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이자 세계관의 반영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수장이 선호하는 장례가 아니다. 수장을 천민이나 노예에게만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계 2차대전 때 미군이 일본군의 공격으로 침몰한 배와 사망한 장병을 바다에 장사 지낸 것을 명예로운 장례식처럼 주장하지만 이는 포장일 뿐이다. 인양이 불가능하거나 전투 중 시신을 옮길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택한 장례법이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왕이 동해바다를 지키겠다며 수장을 원했다지만 사실(史實)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는 화장을 한 뒤 다시 수장한, 엄밀한 의미의 수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서해안 섬 지역의 풍장에서도 시신을 바다에 던지는 것만은 피하려는 뜻을 엿볼 수 있다.

기무사가 세월호 희생자들을 수장하는 방안을 청와대에 건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 발표 탑승자와 인양 후 탑승자 수가 다를 수 있고, 침몰 후 희생자가 상당기간 생존했다는 흔적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망자를 정중히 보내려는 뜻은커녕 증거를 지우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차가운 바다에 자식을 둘 수 없다는 부모들의 애끊는 호소에 이런 건의를 한 것도 모자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눈물 담화’로 이미지를 제고하라고까지 했다. 시민의 군대라면 꿈에서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촛불시위를 향해 계엄을 발동하자는 기무사의 발상은 결코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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